한 20년 전에 '접시꽃 당신'이란 영화가 나온 적이 있었다.
도종환 시인의 아내가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게 되는데,
그 애절한 남편의 마음을 시로 쓴 것이 유명해져서 영화화 되었던 거란다.
그 유명한 시 '접시꽃 당신'을 한번 읽어 보렴.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 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 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일 줄 모르고
약한 얼굴 한 번 짖지 않으며 살려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어야 할
남은 하루하루의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어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 것 없는 눈 높음과 영욕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을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 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 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 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접시꽃 당신)

 

접시꽃은 예전에 시골의 마을 입구(동구)나 집앞에 많이 심었던 흔한 꽃이다.
크기가 접시만 하대서 접시꽃인데,
수수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꽃이란다.
아주 화려하거나 아름답기보다는, 함께 어울려서 자기 존재를 굳이 내세우지 않아도
어머니처럼 부드러운 모습이 든든한 그런 꽃이지.

죽음은 누구나 받아들이도록 정해진 일이지만,
젊은 나이에 뜻밖의 죽음을 맞게 되는 일은 참 슬픈 일이다.
그렇지만, 한용운도 '이별을 슬픔으로만 받아들이면 사랑이 깨진다'고 님의 침묵에서 노래했듯이,
죽음을 아프게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반성을 했던 것 같구나. 

마지막 성한 몸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 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물론 죽어가는 이에게 장기 기증을 하라든가 하는 이야기를 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인간이 산다는 것은
주는 기쁨, 사랑의 기쁨을 배운다는 것이란 생각을 한다면,
뿌듯이 주고 가자는 화자의 말을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구나. 

시에서 몇 번이나 '남은 날은 짧지만'을 되풀이하고 있는 아쉬운 마음이 강하게 느껴지는 시란다.
우리도 매일매일이 무의미하게 돌아오는 날들 같지만,
사실은 영원히 다시 살 수는 없는 날들임을 생각해 보면,
하루를 얼마나 열심히 살아야 하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이제 아내가 죽어 옥수수밭 옆에 묻고 돌아오면서 쓴 슬픈 시를 한편 읽어 보자. 

견우 직녀도 이 날만은 만나게 하는 칠석날
나는 당신을 땅에 묻고 돌아오네.
안개꽃 몇 송이 땅에 묻고 돌아오네.
살아 평생 당신께 옷 한 벌 못해 주고
당신 죽어 처음으로 베옷 한 벌 해 입혔네.
당신 손수 베틀로 짠 옷가지 몇 벌 이웃에게 나눠주고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돌아오네.
은하 건너 구름 건너 한 해 한 번 만나게 하는 이 밤
은핫물 동쪽 서쪽 그 멀고 먼 거리가
하늘과 땅의 거리인 걸 알게 하네
당신 나중 흙이 되고 내가 훗날 바람되어
다시 만나지는 길임을 알게 하네
내 남아 밭갈고 씨 뿌리고 땀 흘리며 살아야
한 해 한 번 당신 만나는 길임을 알게 하네.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하필이면 아내를 묻던 날이 음력 7월 7일, 칠석날이었는지, 그 무렵이었는지...
아내를 묻고 오는데,
살았을 때 제대로 된 옷 한 벌 멋지게 입혀본 적 없는데,
죽고 나서 '수의(壽衣)'를 해 입힌 게 돌아보니 참 부끄럽단다. 

아내가 손수 만든 옷들일랑은 이웃에게 나눠주고, 당신을 묻고 돌아오는 남편이 허한 가슴이란... 
앞부분에서는 그런 허전한 가슴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뒷부분에서는 그런 힘겨운 마음을 이겨내려는 의지가 보이기도 한다.

당신 나중 흙이 되고 내가 훗날 바람되어
다시 만나지는 길임을 알게 하네 

지금은 비록 이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금 흙이 된 당신과, 훗날 바람이 되어 떠도는 나의 넋이
다시 만날 것임을, 윤회의 미래를 믿게 된다는 이야기겠다. 

내 남아 밭갈고 씨 뿌리고 땀 흘리며 살아야
한 해 한 번 당신 만나는 길임을 알게 하네.

그저 슬퍼하고만 있어서는 안 되고,
밭갈고 씨 뿌리며 땀흘리는 삶을 살아야,
그렇게 나름대로 노력하며 옳바르게 살아야,
한 해 한 번이라도 당신의 넋과 만나더라도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임을 생각한다. 

아내도 참 검소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 아내와 만나게 된다하더라도, 내가 부끄럽게 산다면 얼마나 스스로 바보같겠니.
그래서 재회의 희망과 삶의 의지를 일깨워 보는 것이겠다.
슬픔을 절제하고 담담한 어조로 노래하고 있어서 더욱 슬픔을 깊게 느낄 수 있다 

 

도종환 시인은 교육 민주화 운동을 위해 헌신한 분으로도 유명하단다.
학교도 원래 아주 권위주의적인 교장을 위시하여,
교사들도 지극히 어깨에 힘주던 곳이었다.
일제 강점기와 독재 시대를 거치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던 거지.
그러다가 1987년 사회의 민주화를 거치면서 교육도 많이 민주화된 거라고 볼 수 있다. 

학생들은 물론 공부에 시달리고 있지만,
그런 현실까지 교사들의 힘으로 바꿀 수는 없었던 것 같고,
-그런 것은 지극히 정치적인 일이라서 아직 바꿀 부분이 많다.-
교사와 교사간, 교사와 학생간의 소통이 예전에 비하면 많이 자연스러워 졌을 게다. 

이런 힘든 운동에 참여하면서,
힘을 모으자는 의미로 지은 시가 '담쟁이'가 아닐까 한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담쟁이)

담쟁이 넝쿨(또는 덩굴)은 조그마한 보잘것 없어 보이는 식물이지만,
참 끈질긴 놈이다.
어지간히 가물어도 말라죽지 않고,
겨우내 추운 바람 맞으며 담벼락에 말라죽은 것처럼 붙어있다가도,
봄이 되면 빠알간 새싹을 내밀곤 한다. 

이 시에서 '벽'은 말 그대로 벽이다. 가로막힌 벽. 장애물.
높은 벽을 보면 좌절감, 절망감이 생기겠지?
그렇지만, 담쟁이는 혼자가 아니라서 그걸 넘는 힘이 난대.
그걸 연대의식, 연대감이라고 하지. 

연대하는 방식은, <서두르지 않고, 꼭 여럿이 손을 잡고> 가는 거란다.
혼자서 열심히, 성실히 살려고 해도 세상은 그렇게 움직이진 않는다.
친구와 동지가 옆에 있어야 더 많은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지 

담쟁이 잎이 저 절망스런 벽을 넘는 방식.
거기서 화자는 인생의 멋진 면을 발견하고 있구나. 관조.
담쟁이의 생태에서 인생의 묘미를 발견하는 관저적 시선. 

주제는 <연대를 통해 절망을 극복해가는 담쟁이의 놀라운 생명력>이 되겠지.
세상은 혼자서 살 수 없다고 하지.
그건 친구가 있고, 형제가 있어야 한다는 좁은 의미는 아니란다.
넓게 본다면,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과 힘을 합치는 것이 삶의 방식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걸로도 볼 수 있겠지.
내일은 졸업날이라 좀 한가하지?
보람찬 하루를 잘 계획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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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1-02-10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때 담쟁이 시 참 좋아했습니다.
앞 구절 읽을때 왠지 힘을 줘야겠다는 생각도 하면서요.
이제 수험생 아버지가 되셨네요.
화이팅입니다^*^

글샘 2011-02-10 19:08   좋아요 0 | URL
감동적이지요. ^^
벽을 넘는 담쟁이. 그걸 볼 줄 아는 시인의 눈.
수험생 아버지는 뭘 해야 할까요? ㅋㅋ
 

시 중엔 사랑시도 많고 순간의 예리한 포착이 재미있는 시들도 많다.
그렇지만, 시험에는 되도록 학생들에게 교육적인 작품들을 제시하도록 구상하다 보니까,
자꾸 비판적 시각이 들어간 시들이나
문제 상황의 부정적 현실이 강조된 시들, 그리고 희망을 노래한 시들을 주로 설명하게 된다.
오늘은 기분 전환 겸, 사랑 노래 몇 편을 소개할까 한다. 

우선 김남주의 <사랑 1>을 읽어 보자.

사랑만이
겨울을 이기고
봄을 기다릴 줄 안다

사랑만이
불모의 땅을 갈아엎고
제 뼈를 갈아 재로 뿌릴 줄 안다

천 년을 두고 오늘
봄의 언덕에
한 그루의 나무를 심을 줄 안다

그리고 가실을 끝낸 들에서
사랑만이
인간의 사랑만이
사과 하나 둘로 쪼개
나눠 가질 줄 안다 <김남주, 사랑 1>

어떤 면에서는 인간은 지구를 망치는 말종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인간의 사랑은 위대하기도 하다.
그래서 꽃보다 사람이 아름답다는 말도 하고,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고도 하는 모양이다.
<인간미>라는 말은 인간의 아름다운 측면이 진하게 드러났을 때 쓰는 말이다.  

  

단테가 쓴 <신곡>에 보면, 단테는 지옥과 연옥, 천국을 여행한다.
<인간미>라는 어휘는 '천국'에 속한 것이 아닐까 싶다.
아니면 '연옥'이 천국으로 가기 전의 공간이니 거기 있을 수도 있겠고... 

봄을 기다림... 희망이겠다. 희망은 오로지 사랑에서만 나오는 것이라고 했고,
희생... 오로지 사랑만이 희생할 수 있다고 했다.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고 했다.
이 말은 그만큼 '지금 - 여기'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겠구나.
now-here... 하이픈 하나만 옮기면, no-where가 된다.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인생과, '어디에도 없는' 삶.
오늘 열심히 공부하지 않고 내일이 있다고 말하지 말라고 성리학의 아버지 '주자(주희)'가 말했다. 

현실과 오늘이 중요하지만, 그것은 미래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인간은 미래를 위하여 사랑의 씨앗을 뿌릴 줄 아는 존재인 것이 인간의 긍정적 면이 되겠다.
마지막 연에서 '가실'은 수확이다.
인간은 공동적 사고를 할 줄 아는 존재이므로, 수확의 결실을 '나눌 줄' 안다. 

이 시의 '사랑'은 남녀간의 사랑은 아니다. '사랑의 가치'에 대한 철학적 사고에 가깝겠다.
평이한 시어를 쓰고는 있지만, 인간이 지닌 사랑의 가치를 잘 형상화하고 있다.

다음은 엄청 유명한 시를 한 편 보자. 

내 마음은 호수(湖水)요,
그대 노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 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라.

내 마음은 촛불이요,
그대 저 문을 닫아 주오.
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고요히
최후의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다.

내 마음은 나그네요,
그대 피리를 불어주오,
나는 달 아래 귀를 기울이며, 호젓이
나의 밤을 새이오리다.

내 마음은 낙엽이요,
잠깐 그대의 뜰에 머무르게 하오.
이제 바람이 일면 나는 또 나그네같이, 외로이
그대를 떠나오리다. <김동명, 내 마음은>


은유 설명할 때 잠시 등장했던 시 되시겠다.
은유는 '유사성'에 기초한다고 몇 번 이야기했지? 유사성을 찾는 것이 잘 읽는 비법이다.
이 시의 화자는 자신을 어떤 사물에 비유한다.
그리고 2~4행에서 '그 이유는요~' 이러고 설명하는 것이다. 

1연. 내 마음은? 호수입니다.
그 이유는요~ : 그대가 노저어 오기만 하면 그대 배 앞에서 옥같이 부서지는 호수예요.
                     그러니깐, 내 마음은 당신의 접근을 전혀 꺼리지 않는 존재란 거죠.
2연. 내 마음은? 촛불입니다.
그 이유는요~ :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촛불이에요.
                     그러니깐, 당신을 위해 무엇이든 할 거예요. 
3연. 내 마음은? 나그네입니다. 
그 이유는요~ : 그대 피리소리를 들으며 밤새 귀를 기울이고 싶어서요.
                     그러니깐, 언제까지나 당신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존재거든요.
4연. 내 마음은? 낙엽입니다.
그 이유는요~ : 잠시 당신 곁에 머물고 싶을 뿐이거든요. 
                     그러니깐,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은 무조건 무조건이지만요.
                     저를 싫어하신다면, 저는 나그네같이 고요히 사라질 거예요. 

이렇게 오로지 주기만하는 사랑을 고백하는 노래다.
좀 징그러울 정도로 사랑이 강하게 표현되어 있지.
전에 이 시를 통해 '패러디'하는 시험을 냈더니, 어떤 넘이
'내 마음은 연필이요. 내 안에 흑심 있소.' 이렇게 적었더라.
참 멋진 유사성을 발견했지?
패러디에서는 이렇게 언어유희도 필요하니 말이야.

이렇게 말하는 투를 '하오체'라고 그래. 조금 높인 말투가 되겠지.
이 시의 주제는 <사랑의 기쁨>이기도 하지만 <사랑의 덧없음>도 들어 있단다.
사랑은 오기만 하는 게 아니라 가기도 하는 것이거든.
인간의 마음은 자주 변하는 것이니 말이야.

다음엔 '그 여자네 집'의 시인 김용택의 '들국'을 읽어 보자.

산마다 단풍만 저리 고우면 뭐헌다요
뭐헌다요. 산 아래
물빛만 저리 고우면 뭐헌다요
산 너머, 저 산 너머로
산 그늘도 다 도망가불고
산 아래 집 뒤안
하얀 억새꽃 하얀 손짓도
당신 안 오는데 뭔 헛짓이다요
저런것들이 다 뭔 소용이다요
뭔 소용이다요. 어둔 산머리
초생달만 그대 얼굴같이 걸리면 뭐헌다요
마른 지푸라기 같은 내 마음에
허연 서리만 끼어 가고
저 달 금방 져불면
세상 길 다 막혀 막막한 어둠 천지일턴디
병신같이, 바보 천치같이
이 가을 다 가도록
서리밭에 하얀 들국으로 피어 있으면
뭐헌다여, 뭔 소용이다요. <김용택, 들국> 

'들국'은 들국화를 이르는 말이야.
이 시에서는 '뭐헌다요?'나 '뭔 소용이다요?' 같은 표현이 반복되고 있어.
헤아려 보니 9번이나 반복되고 있다.
그 뜻은 '소용없다'는 것이다.  

당신이 없으면 모든 것이 소용없다는 그런 것이다.
내 마음은 <마른 지푸라기> 같고, <허연 서리>만 끼어 가고, <어둠 천지>이다.
이 가을이 다 지나도록 서리밭에 하얗게 피어있는 <들국>이다. 

앞에서 김동명이 <내 마음은요~>하고 비유했던 것에 비하면, 훨씬 강렬하지 않니?
당신이 없어서 내 마음은 쓸모없는 지푸라기 같고,
덜덜 떨리는 서리 같고, 세상은 온통 어둠 천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서리가 내리는데도 아직 지지 않고 피어있는 <들국>처럼 당신을 기다린다.

병신 바보 천치같이 보이지만, 화자의 순정은 얼마나 열렬한 것이냐.
그리움과 푸념으로 가득한 이 시는 '임에 대한 그리움과 한없는 기다림'을 강렬하게 잘 표현하고 있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이 자연을 세세하게 관찰한 화자의 생활이 잘 담긴 좋은 시로 보인다. 

지난 1월 22일 박완서 선생님이 타계하셨다.
국어 교과서에서 '그 여자네 집'으로 친숙한 소설가였는데...
사람은 한 번 오면 한 번 가게 마련이지만, 아쉽다.
선생님 덕분에 익숙한 시, 그 여자네 집을 아련한 마음으로 한번 읽으며 마치자.
설명은 필요 없겠지?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 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운 집
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 속에 살아 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 오는 집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 닿고
싶은 집

샛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
그 여자
아버지와 그 여자
큰 오빠가
지붕에 올라가
하루 종일 노랗게 지붕을 이는 집
노란 집

어쩌다가 열린 대문 사이로 그 여자네 집 마당이 보이고
그 여자가 마당을 왔다갔다하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말인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와
옷자락이 언듯언듯 보이면
그 마당에 들어가서 나도 그 일에 참여하고 싶은 집

마당에 햇살이 노란 집
저녁 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집
뒤안에 감이 붉게 익은 집
참새 떼가 지저귀는 집
눈 오는 집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 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웅숭그리고
아직 쓸지 않은 마당을 지나
뒤안으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 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김칫독 안으로
내리는 집

김칫독에 엎드린 그 여자의 등허리에
하얀 눈송이들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집
내가 목화송이 같은 눈이 되어 내리고 싶은 집
밤을 새워, 몇 밤을 새워 눈이 내리고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늦은 밤
그 여자의 방에서만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오면
발자국을 숨기며 그 여자네 집 마당을 지나 그 여자의 방 앞
뜰방에 서서 그 여자의 눈 맞은 신을 보며
머리에,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
가만히, 내리는 눈송이들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가만 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



네 집

어느 날인가
그 어느 날인가 못밥을 머리에 이고 가다가 나와 딱
마주쳤을 때
"어머나" 깜짝 놀라며 뚝 멈추어 서서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반가움을 하나도 감추지 않고
환하게, 들판에 고봉으로 담아놓은 쌀밥같이,
화아안하게 하얀 이를 다 드러내며 웃던 그
여자

그 여자가 꽃 같은 열아홉 살까지 살던 집
우리 동네 바로 윗동네 가운데 고샅 첫 집
내가 밖에서 집으로 갈 때
차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집
그 집 앞을 다 지나도록 그 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
지금은 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그 집
내 마음 속에 지어진 집
눈 감으면 살구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집
눈 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 집
그 여자네 집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

있던 집

여자네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각,을,하,면…… <김용택, 그 여자네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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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 눈감고 살 수도 있지만,
<혼자만 잘살믄 무슨 재민겨?> 하던 고 전우익 할아버님의 책 제목처럼,
현실의 변화에도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지혜이기도 할 거다.

오늘은 독재 시대의 획일성을 읊은 김명수의 <하급반 교과서>를 한번 읽어 보자.

아이들이 큰 소리로 책을 읽는다
나는 물끄러미 그 소리를 듣고 있다
한 아이가 소리내어 책을 읽으면
딴 아이도 따라서 책을 읽는다
청아한 목소리로 꾸밈없는 목소리로
"아니다 아니다!” 하고 읽으니
"아니다 아니다!” 따라서 읽는다
"그렇다 그렇다!” 하고 읽으니
"그렇다 그렇다!” 따라서 읽는다
외우기도 좋아라 하급반 교과서
활자도 커다랗고 읽기에도 좋아라
목소리도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고
한 아이가 읽는 대로 따라 읽는다

이 봄날 쓸쓸한 우리들의 책읽기여
우리 나라 아이들의 목청들이여 (김명수, 하급반 교과서)

이 시는 참 쉽죠~~잉~~하던 박지선을 흉내내도 되겠다.
아이들이 글을 읽고 따라 읽는 모습을 보면서,
한국 사회의 획일성과 유사성을 발견하고 있다.  

<읽기에도 좋아라>는 반어법이라고 볼 수 있겠다.
실제로 화자의 귀에는 <쓸쓸한 책 읽기>로 들리는데 <좋아라>라고 했으니 말이다.
이렇게 좋은 시는 쉬운 속에서 진리를 담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음엔 '정 양'의 '물 끓이기'를 읽어 보자.
민우도 라면이나 자장면 삶아 먹기를 즐기잖아.
집에서 매일 흔하게 접하는 물 끓이기라는 행동 속에서 화자는 대단한 것을 발견하고 있단다.
우선 읽어 보자.

한밤중에 배가 고파서
국수나 삶으려고 물을 끓인다
끓어오를 일 너무 많아서
끓어오르는 놈만 미친 놈 되는 세상에
열받은 냄비 속 맹물은
끓어도 끓어도 넘치지 않는다

혈식을 일삼는 작고 천한 모기가
호랑이보다 구렁이보다
더 기가 막히고 열받게 한다던 다산 선생
오물 수거비 받으러오는 말단에게
신경질부리며 부끄럽던 김수영 시인
그들이 남기고 간 세상은 아직도
끓어오르는 놈만 미쳐 보인다.
열받는 사람만 쑥스럽다

흙탕물 튀기고 간 택시 때문에
문을 쾅쾅 여닫는 아내 때문에
'솔'을 팔지 않는 담배가게 때문에
모기나 미친개나 호랑이 때문에 저렇게
부글부글 끓어오를 수 있다면
끓어올라 넘치더라도 부끄럽지도
쑥스럽지도 않은 세상이라면
그런 세상은 참 얼마나 아름다우랴

배고픈 한 밤중을 한참이나 잊어버리고
호랑이든 구렁이든 미친개든 말단이든
끝까지 끓어올라 당당하게
맘놓고 넘치고 싶은 물이 끓는다 (정양, 물 끓이기)

끓어오를 일 너무 많아서 끓어오르는 놈만 미친 놈 되는 세상.
끓어오르는 것은 분노와 울분을 토하는 일이 되겠지.
아빠도 뉴스를 안 본 것이 꽤나 오래 되었다.
뉴스를 볼 때마다 끓어오를 일이 너무 많아서 혈압이 높은지도 모르겠구나. 
소시민은 현실 속에서 화가 나는 일이 너무도 많게 마련인가 보다.
그런데, 냄비 속 맹물은 끓어도 끓어도 넘치지 않는다.
화자는 자신보다 냄비 속 맹물이 나아 보이고 있다. ^^
국수 끓이는 맹물 속에서 자아 성찰을 하다니... 대단한 내공이지 않니? 

2연에서 다산 정약용의 <증문(모기를 증오함)>과 김수영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인용한다.
조선 후기의 세도정치 시기의 혼란을 비판한 다산 선생이나,
1960년대 독재 사회의 소시민적 자아를 비판한 김수영의 시를 떠올리면서,
그들이 남기고 간 세상은 아직도 더럽게 끓탕을 치고 있고,
끓어오르는 놈만 미쳐 보이고, 열받는 사람만 쑥스럽다고 느낀다. 

혈식을 일삼는 모기는 '현실의 작은 불편을 주는 대상'으로서 탐관오리가 될 거고,
호랑이, 구렁이는 부정, 불의의 모순의 원인이 되는 존재로서 거대한 권력의 횡포가 될 거다.
국가의 구조적 모순보다 사소한 수탈이 더 열받게 한다는 이야기다.

다산과 김수영의 이야기는 이런 것이다.
국가가 썩어 빠져서 국민의 희생을 요구하는데,
지식인은 국가가 망해가는 모습을 바로잡는 요구를 해야 옳지만,
그런 큰 일을 하지는 못하고,
그저 사소한 일에나 화를 내고 있다는 자기 반성인 것이지. 

그래서 3연에서 '사소한 일에 끓어넘칠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우랴~ 하는 것은,
거대한 부정적 횡포가 사라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심정이다.
국가가 농민의 재산을 착취하는 더러운 세상.
'국가가 나한테 해 준게 뭐가 있냐?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비아냥은,
조선 시대에도 '양반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었고,
독재 시대에도 '부자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었다.
이런 권력의 부정에 속 끓이는 일 없이,
그저 사소한 다툼에만 몰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런 바람은 사실 희망이 없는 것이기도 하다. 

화자의 소망, 바람은 마지막 연에서 집중되고 있다.
배가 고파 제 배나 채우려는 소시민적 나약함은 잊어 버리고,
<끝까지 끓어올라 당당하게 맘놓고 넘치고 싶은> 것이 화자의 소망이다.
부정한 것과 싸우는 것의 정당함을 잊지 않겠다는 화자의 내면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다.

이 시는 자기 반성적이기도 하고, 현실 비판적이기도 하다.
물 끓이기를 통하여 <소시민적 행태에 대한 반성과 현실 비판>을 하는 것이 주제가 되겠다. 

한국 사회는 식민지 시대와 전쟁을 겪으면서 옳은 소리 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회가 되었다.
바른 소리를 하면 <말 많으면 공산당>이라고 감옥엘 보냈다.
부정한 것에 대한 당당한 비판과 분노는 정당한 삶인데도,
부정적 현실은 그런 비판에 익숙하지 않게 만들곤 했던 것이다.
소시민적 나약함은 사회의 부정에 대해 묵인하고 침묵할 수밖에 없는 시대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단다.
각종 표현의 자유가 침해당하는 것이 그렇다.

작년에 G 20 (group of 20)이란 자본가들의 행사 포스터에
'쥐 20'(발음을 이용한 언어 유희)이란 풍자를 담은
그래피티를 그린 대학 강사를 구속하였다가 벌금까지 매긴 일이 있었단다.
공공 시설물에 낙서를 하는 것은 벌금을 매길 수 있는 일이지만, 구속까지 하는 것은 좀 웃긴 일이었지.

그러면, 위에서 나온 김에 정약용의 '증문'을 한번 읽어 보자.  

사나운 범 울밑에서 울부짖어도 나는 코골며 잠잘 수 있었고
구렁이 꿈틀대며 처마 끝에 매달려도 드러누워 그 모양 볼 수 있지만
한 마리 모기 소리 귓가에 들릴 때는
간담이 서늘하고 기가 막혀서 오장이 죄어들고 끓어오르네.//
부리박아 피를 빨면 그로 족하지
어이하여 뼛속까지 독기 불어놓는고
베이불 덮어쓰고 이마만 내놓는데
어느새 울퉁불퉁 혹이 돋아서 보골보골 부처님 고수머리 되고 마네.//
내 뺨을 때려 봐도 헛치기 일쑤이고
넓적다리 때려 봐도 모기 이미 달아난 뒤
힘든 싸움 공은 없고 잠만 못 들어
지루한 여름밤이 일 년보다 더 길구나.//
지극히 작은 몸에 그렇게도 천한 것이
어이하여 사람 보면 침을 질질 흘리는고
밤에만 다니는 건 도적을 배운 거고
혈식은 한다지만 성현이라 그렇겠나.//
지난 날 대유사서 교서할 적에 푸른 솔 하얀 학이 마당 앞에 벌여 있고
유월에도 파리 얼어 날지 못할 때 대자리 깔고 앉아 매미 소리 들었는데
지금은 흙바닥에 볏짚 깔고 사는 신세
내가 부른 모기이지 모기 허물 아니로다. (정약용, 증문(憎))

 이 시를 5부분으로 나눠 보았다.
5번째 부분에서 정약용이 <대유사서 교서>란 벼슬을 할 때는 파리 한 마리 얼씬도 못하더니,
지금은 귀양가서 권력을 놓치고 나니 모기(탐관오리)가 덤빈다는 이야기다. 
정약용은 귀양이란 힘든 상황에서도 온갖 연구를 손에서 놓지 않았던 사람이다.
특히, 그는 조선 후기 사회의 어지러운 '관리'들에게 가르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니,
그리하여 <목민심서>라는 책도 지었던 것이다. 

다음엔 김수영의 시를 읽어 보자.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王宮 대신에 王宮의 음탕 대신에 (1연)

五十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2연)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越南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二十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3연)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앞에 情緖(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 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4연)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을 지고
머리도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5연)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 (6연)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二十원 때문에 十원 때문에 一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一원 때문에 (7연)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8연) (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1연에 <왕궁>, <왕궁의 음탕>을 욕해야 마땅하다는 인식이 등장한다.
왕이 있던 시대가 아니었으니 바로 <박정희>라는 독재자를 욕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3연에서 <언론의 자유>나 <월남 파병>처럼 반대해야 할 사안에 정당하게 저항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화자는 그러지 못하고 만만하고 사소한 일에만 화를 낸다.

2연의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은 만만한 대상이고,
3연의 <야경꾼>은 만만한 대상이고, 아주 사소한 일에 불과하다.
7연의 <이발쟁이>도 욕을 들어주는 사람일 뿐이다.

4연에서 <나의 옹졸함>은 유구하고(오래되었고) 이제 나에겐 '정서'처럼 익숙해 졌다.
포로수용소 병원에서 간호사들과 거즈나 개고 있는 화자에게
옹졸하게 남자가 간호사들 옆에서 시시한 일이나 한다고 놀린 적이있는데, 그때부터 난 옹졸했다.

5연에서 자신은 여전히 옹졸하다고 말한다.
아주 자조적(스스로를 비웃음)이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을 지고
머리도 피도 안 마른 어린애 녀석의 투정에도 진다>
화자는 스스로 너무도 자신감이 없기에 은행잎도 가시밭길처럼 여겨진다.  

6연에서 화자는 <절정>위에 있고 싶지만,
지식인이라면 뜨거운 화제에 대하여 <부글부글 끓고> 싶지만,
화자는 비켜서있고, 비겁하게 살고 있다. 

마지막 8연에서 스스로의 왜소함을, 부끄러운 나약함과 소시민성을 반성하고 있다.
바람보다 먼지보다 풀보다 자신은 작아 보이고 부끄럽기 그지없다.
  지식인의 무능과 허위 의식을 깨닫는 진지한 자기 반성>이 되겠다.

시인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발견한 새로운 관점을 자랑하듯 써서 보여주는 것을 좋아한다.
그렇지만 화자는 스스로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는 부분을 드러냈다.
자조적인 어조로 자신의 소시민적 행동을 진솔하게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이렇게 강렬하게 스스로 반성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시인은 자신을 반성한 것도 되지만, 시대와 지식인에게 반성을 촉구한 것도 된다.
주제는 <지식인의 무능과 허위 의식을 깨닫는 진지한 자기 반성> 정도가 되겠구나.  

화자는 <절정>위에 서는 삶을 지향하지만,
<절정>위에 선 삶은 언제나 가혹한 시련에 부딪히기 마련이다. 

오늘 읽은 시들 역시 시대를 아파하는 마음이 잘 드러난 시들이다.
시를 읽고, 해설을 읽으면서,
인간의 언어가 화자의 마음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울 때,
유사한 경험을 빗대서 <비유법>을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그래서 글을 쓸 때,
유사한 것을 찾아 쓰는 <유추>하는 글쓰기가 얼마나 효율적인지도 생각해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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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이 지나더니 날씨가 풀려 완연한 봄 같다.
1월 내내 춥더니 봄의 문턱에 다 온 기분이 든다.
한 해의 시작은 정초에 세운다고 하지만,
새 학기가 곧 시작될 테니 한 해의 시작을 잘 해보기 바란다. 

요즘 뉴스를 장식하는 이야기 중 하나로 '소말리아 해적 소탕 작전'이 있었다.
강대국의 상선은 원래 건드리지 않는 것이 해적들의 철칙이다.
그래서 한국처럼 어정쩡한 나라의 배가 건드리기 딱 좋은 것이다.
돈도 좀 있고, 군사를 파견하기엔 너무 멀고...
그래서 이번에 납치된 배를 구한 것은 다행스런 일이기는 한데,
지나치게 자화자찬의 잔칫상을 벌이는 언론을 보니 좀 안쓰럽기도 하다. 

저렇게 정부가 잘한 것을 내세우고 싶을까 싶어서 말이야.
평소에 잘한 사람은 발렌타인 데이라고 꼭 초콜릿으로 점수를 얻으려고 안간힘 쓸 필요는 없을 텐데 말이다.
세상 일은 서로 통하는 면들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시를 읽으면서도,
우리의 일상 생활과 시 속의 생각들이 어떻게 연관될지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풍장>과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즐거운 편지>를 통해 만났던 황동규의 시
<삼남에 내리는 눈>을 한번 읽어 보자.
3남은 임금이 살던 서울 인근('경기'라고 부른다.)의 남쪽 세 도를 가리킨다.
충청, 전라, 경상도가 되겠지.
예부터 이 3남 지방은 곡창 지대로 많은 세금이 걷히던 곳이고,
그만큼 탐관오리의 수탈도 심하던 곳이다.
우선 시를 한번 읽어 보자.

봉준(琫準)이가 운다, 무식하게 무식하게
일자 무식하게, 아 한문만 알았던들
부드럽게 우는 법만 알았던들
왕 뒤에 큰 왕이 있고
큰 왕의 채찍!
마패 없이 거듭 국경을 넘는
저 보마(步馬)의 겨울 안개 아래
부챗살로 갈라지는 땅들
포(砲)들이 얼굴 망가진 아이들처럼 울어
찬 눈에 홀로 볼 비빌 것을 알았던들
계룡산에 들어 조용히 밭에 목매었으련만
목매었으련만, 대국낫도 왜낫도 잘 들었으련만,
눈이 내린다, 우리가 무심히 건너는 돌다리에
형제의 아버지가 남몰래 앓는 초가 그늘에
귀 기울여 보아라, 눈이 내린다, 무심히,
갑갑하게 내려앉은 하늘 아래
무식하게 무식하게. (황동규, 삼남(三南)에 내리는 눈)

봉준이는 동학 농민 운동으로 <조선 왕조>에 저항의 깃발을 높이 든 전봉준을 말한다.
수탈이 심하여 부정적 시대에 저항한 울분의 시대.
'한문을 모르고 부드럽게 우는 법을 몰랐던' 민중은 거세게 봉기하였다.
관군까지도 농민군에 합세하여 <왕조>는 위기에 부딪히게 되고,
<왕조>는 왜병을 끌어들여 서양식 총으로 농민군을 몰살시킨다.
<조선 왕조>를 <국가>의 개념으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왕을 지키기 위해서는 <국가>도 버릴 수 있는 것이 <왕조>라고 봐야할 게다.

왕의 뒤에는 '큰 왕' 일본이 있었고, 그들의 채찍은 매웠다.
결국 동학 농민군은 몰살의 길을 걷게 된다.

마패 없이 거듭 국경을 넘는
저 보마(步馬)의 겨울 안개 아래
부챗살로 갈라지는 땅들
포(砲)들이 얼굴 망가진 아이들처럼 울어
찬 눈에 홀로 볼 비빌 것을 알았던들
계룡산에 들어 조용히 밭에 목매었으련만
목매었으련만, 대국낫도 왜낫도 잘 들었으련만, 

이 부분은 '겨울 안개' 자욱한데, '보병과 기마병이 국경을 넘어 들어왔다는 이야기다.
총알이 튀는 모습이 부챗살처럼 땅을 파헤치고,
일본식 소총들은 대포소리를 울리며 당황스런 농민군을 울리고 만다.
제 나라 임금이 돈주고 불러온 일본놈 총알에 맞아 눈밭에 쓰러지던 농민군을 떠올린다.
찬 눈에 홀로 쓰러져 볼 비비고 있었던 칠복이, 만수, 순이 아배, 만득이 할아범...
차라리 계룡산에 들어가 밭갈이에나 목을 매고 농사를 짓고 살았으련만...
이렇게 왜놈 총알에 나자빠져 죽을 줄 알았더라면...
밭갈이에나 목을 매었을 것을...
대국(중국, 중국인을 때가 많다고 땟놈, 뗏놈으로 불렀음)낫이나 일본낫(왜낫)이나
외국에서 들어온 물건이라도 농사짓는 데는 유용하게 쓰였을 것이지,
우리 농민을 죽이지는 않았으련만... 

이렇게 조선 왕조에 의하여 죽어간 농민군들의 슬픈 과거가 화자에겐 떠오른다.
이 이미지가 떠오르는 이유는, 바로 '눈'이 내리기 때문이다. 
갑갑한 하늘 아래 눈이 내리는데,
눈 맞으며 잡혀갔을 전봉준이 떠오르고,
눈 내린 벌판에서 찬 눈에 볼 비비며 죽어갔을 동학군을 떠올리면 속이 터진다. 

화자는 뜬금없이 왜 눈이 내리는 데 이렇게 불행한 삶을 살았던 동학군을 떠올렸을까?
왜 그렇게 슬픈 현실이 오버랩 되었을까?
아마도 화자가 살았던, 이 시를 지었던 1968년 박정희 독재정권의 통치와 그에 대한 저항이,
마치 조선 왕조가 짓밟은 제 나라 국민들처럼 짓밟히던 시대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시를 다시 낮게 읊조려 보기 바란다.
부정적 현실의 어두운 시대.
조선 농민들의 울분이나 20세기 농민들의 울분이나
<유사함>에 기초하여 오버랩되는 장면들이 슬프고 처연하구나.
우리는 동학 농민군 하면 <전봉준>이 대장이라고 여기지만,
사실은 <김개주>같은 장수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 장수들은 워낙 강성이라서 잡자마자 바로 참수(목을 벰)했다고 하더구나. 

어두운 시대, 그래도 희망을 가져봐야 하지 않았겠니?
의지적으로 희망을 가져보려는 노래 중에 오늘은 '황지우'의 시를 한 편 읽어 보자.
시들은 한번 읽으면서 느낌을 살펴 보고,
설명을 듣고 나서 다시 한번 읽어 보기 바란다. 아마 정리가 더 잘 될 거야.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 13도
영하 20도 지상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裸木(나목)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 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 받은 몸으로, 벌 받는 목숨으로 기립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 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에서
영상으로 영상 5도 영상 13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황지우, 겨울 - 나무로부터 봄 - 나무에로)

시의 제목은 '겨울 - 나무로부터 봄 - 나무에로'이다.
'겨울-나무'가 '봄-나무'로 변화하는 과정을 통하여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려는 시란다. 
그냥 '겨울 나무'나 '봄 나무'라고 해도 될 것을 가운데 하이픈을 넣은 것은 강하게 눈에 띄도록 장치를 한 거지.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이 처음 부분만 살펴 보자.
'나무는 나무이다.'라는 발언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런 만큼 독자는 화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호기심을 가지게 되어 있지.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마지막에 이런 부분이 반복된다. 수미상관.
그 사이에서 화자가 주장하는 바는 수미상관의 구성을 통하여 <강조>되고 있는 것이겠다. 
수미상관의 시는 그 사이에 어떤 주제가 담겨있는지 살펴보면 된다. 

나무는 
<영하 13도, 영하 20도 지상에>서 피하지도 않고,
<뿌리박고 무방비의 裸木(나목)으로 서>있다.
<벌 받는 자세로 서>있지만,
나무는 <온 혼>으로 <애타고 불타고 버티고 거부하>는 존재다.
그러면서 <영상 5도 영상 13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온몸이 터지면서 싹을 내밀고 잎이 되고 나무가 된다.
힘겨운 겨울을 <온몸>으로 이겨내고 봄을 불러오는 것이 나무인 것이다. 

이 시에서는 가만히 있어 보이는 <겨울-나무>가 사실은
간절히 봄을 부르는 역동적인 <봄-나무>이기도 하다는 것을 힘주어 말하고 있다.
그래서 '나무는 나무이다'라고 할 때,
앞의 나무는 '겨울-나무'고 뒤의 나무는 '봄-나무'이다.
겉보기에는 보잘것 없어보이지만, 그 가능성을 보면 무한정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었구나. 

이 나무는 <전봉준>이 되기도 할 것 같다.
시련을 당하는 사람의 상징이다.
벌 받는 나무는 <죄도 없이 죄 지어서>의 '벼'와 같은 존재들이다.(이성부, 벼)

그렇지만 그 나무는 무기력하지만은 않다.
버티고, 이겨낸다.
막 밀고 올라가서 싹을 틔우고 기어이 봄을 부른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이 영탄은 간절히 바라던 것이 경이롭게 펼쳐지는 새 세상을 보는 감탄인 것이다.

1980년대 민주화 시대를 살아온 지식인으로서 시인은
시를 통해 시대를 풍자하고 유토피아를 꿈꾸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그의 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30회)>와 <너를 기다리는 동안(14회)>에서도 마찬가지 주제가 드러난다.

주제는 <시련을 이기는 민중의 힘과 의지> 정도면 될까?
다음엔 '하종오'의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를 읽어 보자.
마찬가지로 고난의 민중사가 이어지고 있다.

우리우리끼리 하는 말로
태어나면서도 넓디넓은
평야 이루기 위해 태어났제.
아무데서나 푸릇푸릇 하늘로 잎 돋아내고
아무데서나 버려져도 흙에 뿌리박았는기라.
먼 곳으로 흐르던 물줄기도 찾아보고
날뛰던 송장메뚜기 잠재우기도 하고
농부들이 흘린 땀을 거름 삼기도 하면서
우리야 살기는 함께 살았제.
오뉴월 하루볕이 무섭게 익어서
처음으로 서로 안고 부끄러워 고개 숙였는기라.
우리야 우리 마음대로 할 것 같으면
총알받이 땅 지뢰밭에 알알이 씨앗으로 묻혔다가
터지면 흩어져 이쪽 저쪽 움돋아
우리나라 평야 이루며 살고 싶었제
우리야 참말로 참말로 참말로
갈라설 수 없어 이 땅에서 흔들리고 있는기라. (하종오,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

이 시의 주제 의식은 <우리>라는 말에 잘 드러나 있다.
'벼'는 우리가 먹으려 기르는 것이지만, '피'는 먹을 수 없는 풀이다.
그렇지만 벼가 자라는 곳이면 어디선가 피가 섞여서 자라곤 한다.
벼와 피는 이 땅을 지키는 민중의 상징인 것이다. 
이 시에서 '벼와 피'는 이질성보다는 <동질성>이 강조되고 있단다.

5행 <뿌리박았는기라>까지 읽어 보렴.

우리야 우리끼리 하는 말로
태어나면서도 넓디넓은
평야 이루기 위해 태어났제.
아무데서나 푸릇푸릇 하늘로 잎 돋아내고
아무데서나 버려져도 흙에 뿌리박았는기라.   

벼와 피는 민중이랬지? 민중들은 이렇게 평야 가득하게 생명력을 펼치며 살고 있단다.

먼 곳으로 흐르던 물줄기도 찾아보고
날뛰던 송장메뚜기 잠재우기도 하고
농부들이 흘린 땀을 거름 삼기도 하면서
우리야 살기는 함께 살았제.

벼와 피는 가까이 물줄기가 흐르지 않아도, 메뚜기떼가 마구 파먹으려 해도,
끈질기게 살아 남았지. <함께> 살아 남았단다.

오뉴월 하루볕이 무섭게 익어서
처음으로 서로 안고 부끄러워 고개 숙였는기라.  

오뉴월의 강렬한 햇볕은 벼를 잘 익게 한다.
<무섭게> 같은 말은 사투리지.
이 시는 마치 시골 농부의 말처럼 사투리가 구수하게 들리는 시다.
잘 익어서 서로 '안고' '고개 숙이'며 살고 있었다.
순수하고 겸손한 민중의 마음씨가 곱게 드러나는 것 같은 부분이다.

우리야 우리 마음대로 할 것 같으면
총알받이 땅 지뢰밭에 알알이 씨앗으로 묻혔다가
터지면 흩어져 이쪽 저쪽 움돋아
우리나라 평야 이루며 살고 싶었제
우리야 참말로 참말로 참말로
갈라설 수 없어 이 땅에서 흔들리고 있는기라.

이 부분에서 분단된 현실이 드러난다.
<총알밭이 땅 지뢰밭>이 그것이다. 
분단된 현실이지만, 우리 민중들의 뜻은 분단에 있지 않다.
민중들이 우리 맘대로 할 것 같으면,
씨앗이 터져 흩어지면 여기 저기서 움을 돋게 하고,
우리나라를 하나의 평야로 이루며 살고 싶은 것이다. 

얼마나 간절하냐면...
참말로 참말로 참말로
이렇게 간절하다.
우리는 갈라설 수 없어 이 땅에서 흔들리는데,
어디서 외세가 우리를 갈라놓고 <총알과 지뢰>로 흩어버린 것이다.
민중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지배세력에 의해 분단이 되었음을 상징하는 표현이
<우리>의 의지와 상반되어 대립되고 있단다. 

이 시의 주제는 <분단 현실 극복을 향한 민중의 염원>이 되겠지.
그 염원을 '벼'과 '피'를 통해서 형상화하고 있다.
벼와 피는 <우리>가 된다. <동질적 존재감>을 강조하는 것이지.
<하나의 땅>에 함께 뿌리내리고 있어 <분단을 극복>하려는 태도를 강조한 거란다.  

아빠가 읽어주는 시 중엔 유난히 '부정적 현실'과 '의지'를 드러낸 시가 많을 거다.
세상엔 아름다운 사랑 노래도 많이 있을 것이고,
화자 자신의 주변을 돌아본 시도 많이 있을 것이지만,
조선이 망하고 식민지 시대, 분단과 한국 전쟁, 군사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 등으로 점철된 
한국의 현대사와 '시'읽기는 떨어진 것이 아니어서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이제 독재 정권이 아니어도 저절로 더욱 험악한 곳이 되어가고 있다.
세계화의 울타리로 한 식구가 된 <글로벌 지구>는 강대국의 자본이 약소국의 민중을
직접 착취하는 구조로 변화되고 있단다.
조선 후기처럼 탐관오리가 그 지방의 농민만 수탈하던 시대나
독재 시대처럼 독재자가 그 나라 국민만 수탈하던 시대가 가고 만 거지. 

공부란 것은 꼭 문제집을 푸는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이런 시대의 흐름도 읽을 줄 알아야 공부고,
세상의 모습이 드러난 문학 작품들을 읽는 것도 공부가 되겠지.
이제 내일이면 개학이구나.
며칠 학교에 나가야 하니 일찍 일어나도록 일찍 자자꾸나.
아무래도 학교는 독서실보다 추우니 옷도 잘 챙겨 입고 다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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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고은 시인의 '문의 마을에 가서'를 통해 죽음에 대한 관조를 읽어 봤다.
산다는 일은 죽음의 뒷면과도 같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는 날까지 열심히, 잘 살아 보자. ^^ 

오늘은 고은 시인의 <눈길>이란 특이한 시를 살펴 볼 거야.
왜 특이한 시냐면, 고은 시인은 '스님'이 되었다 환속한 경력을 가진 분이었는데,
이 시에서는 인생에 대한 관조와 함께, <어둠>이란 단어를 독창적 상징으로 쓰고 있는 시라서 그렇게 말한 거다.
우선 읽어 보자.

이제 바라보노라.
지난 것이 다 덮여 있는 눈길을.
온 겨울을 떠돌고 와
여기 있는 낯선 지역을 바라보노라.
나의 마음 속에 처음으로
눈 내리는 풍경
세상은 지금 묵념의 가장자리
지나 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설레이는 평화로서 덮이노라.
바라보노라 온갖 것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눈 내리는 하늘은 무엇인가.
내리는 눈 사이로
귀 기울여 들리나니 대지의 고백.
나는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
나의 마음은 밖에서는 눈길
안에서는 어둠이노라.
온 겨울의 누리 떠돌다가
이제 와 위대한 적막을 지킴으로써
쌓이는 눈 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 (고은, 눈길)

첫 행의 <이제 바라보노라>는 마치 영화에서 인트로의 역할을 하는 구절 같구나.
영화에서 과거를 회상하겠다는 부분과도 같은 구절.
말투는 조금 거창하고 경건한 느낌이야.
무얼 바라보냐면,
<지난 것이 다 덮인 눈길>을 바라본대.
화자가 살아온 인생길이겠지.
그리고 겨울처럼 냉혹한 그 길을 떠돌고 와
지금은 <낯선 지역>에 서 있는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는 시 같다.  

화자가 어떻게 살았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온 겨울을 떠돌고> 왔다는 것으로 보아 많은 고난을 겪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데,
이제 화자의 <마음 속에 처음으로 눈 내리는 풍경>이 오버랩된다.
이제까지 마음 속에서 폭풍이 휘몰아치고 성난 파도가 용솟음쳤다면,
이제 마음 속에 눈이 고요하게 내리고 있다.
세상은 지금 묵념을 드리는 것처럼 고요하다.
내가 살아온 <지나 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설레이는 평화가 가득 덮인다.
눈이 소복소복 덮이는 그 위로... 
시각적 효과를 위하여 '눈'이나 '겨울'이 동원되었지만, 사실은 화자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지. 

10행에 다시 <바라보노라>가 등장한다.
다시 시각적 효과를 통해 화자의 심리가 펼쳐지겠지.
그런데 <온갖 것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바라본다고 했어. 
<소리 없는 아우성>과 같은 표현 기법이 쓰인 걸 알 수 있겠니?
<보이지 않는 움직임>에서 말이야.
움직임은 뭔가의 변화가 보이는 상태잖아. 역설적 표현이지.
그럼 도대체 이 사람은 뭘 본걸까?
보이지 않는 속에서도 움직이는 것.
그런 것은 <자연의 이치, 섭리>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하늘은 무엇인가'
그리고 '대지는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화자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움직임이 보인다.
바로 '하늘과 대지'의 섭리지.
대지가 고백하고 하늘이 울리는 함성을 '귀 기울여 듣는' 것으로 화자는 수도자가 되는구나.

여태까지는 귀를 달고도 듣지 못했던 그 소리.
이제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고 외치고 있어.
화자의 마음은 밖에서는 <눈길>에 소복하게 쌓인 풍경을 보며 아까 얻는 <평화>로 가득하고,
                    안에서는 <어둠>만이 가득하단다. 

화자의 마음 안에 가득한 <어둠>은 보통 '어둠'이 상징하는 '악, 잘못, 죄스런 마음'과는 전혀 다른 것이란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구별, 분별'을 버린 마음. '선악과 좋음이나 나쁨'을 버린 마음을 얻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가 밝은 곳에서는 기쁨과 슬픔이 나뉘잖아.
그런데 마음 속에 어둠이 가득하다는 것은 <판단>할 필요가 없는 참된 <평화>의 경지를 말한다고 봐야겠지.  

여기서 <어둠>이 평소와는 달리 <평화로운 마음의 표현>이란 상징으로 쓰였는데,
이런 것을 <독창적 상징>, <창의적 상징>이라고도 부른단다.
뭐, 별로 어려운 말도 아니지?

온 겨울의 누리 떠돌다가
이제 와 위대한 적막을 지킴으로써
쌓이는 눈 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  

그 어둠을 얻게 된 기쁨을,
마지막에서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반복하고 있지.
좀 이해가 되니? 

겨울같이 흔들리고 시달리던 삶을 살아온 화자에게
이제 눈길같은 평화와 어둠같은 고요함이 찾아온 것이란다.
얼마나 마음 속 깊은 기쁨이 샘속겠니?
얼마나 소리쳐 기쁨을 표현하고 싶겠니?
그런 것을 고요하게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로 표현하고 있는 거야.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살아온 고은 시인은 최근 몇 년째 노벨 문학상 후보자로 거론되곤 했지.
한국에서 그것도 <시>처럼 번역이 불가능한 장르가 수상하긴 쉽지 않은 노릇이다.
아마 통일이라도 되면 시든 소설이든 수상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
그만큼 노벨상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상이란다.
고 김대중 대통령도 이북의 김정일과 평화회담을 진행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거든.
고은 시인의 <머슴 대길이>는 전에 읽어본 적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만인보>에서 10,000명의 개인사를 시로 적음으로써
이 민족의 삶을 형상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시인이 고은 시인이다.
이제 고은 시인의 <화살>을 한번 읽어 보자.

우리 모두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허공 뚫고
온몸으로 가자.
가서는 돌아오지 말자.
박혀서 박힌 아픔과 함께 썩어서 돌아오지 말자.

우리 모두 숨 끊고 활시위를 떠나자.
몇 십 년 동안 가진 것,
몇 십 년 동안 누린 것,
몇 십 년 동안 쌓은 것,
행복이라던가
뭣이라던가
그런 것 다 넝마로 버리고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허공이 소리친다.
허공 뚫고
온몸으로 가자.

저 캄캄한 대낮 과녁이 달려온다.
이윽고 과녁이 피 뿜으며 쓰러질 때
단 한 번
우리 모두 화살로 피를 흘리자.

돌아오지 말자!
돌아오지 말자!

오 화살 정의의 병사여 영령이여! (고은, 화살)

어때? 짜릿하지 않니?
독재 시대. 저항의 기운이 열기처럼 솟구쳤던 그런 시란다.
물론 노래로 불리우기도 했지. 

'우리'라는 말을 처음에 쓰고 있구나.
동지 의식의 강조로 보인다.
<화살>은 <목표물>을 향해 조준하는 무기다.
군사 독재 정권이란 목표를 향해 <화살>이란 무기가 되어 날아가자는 선동으로 이뤄진 참여시지.  

화살이 가는 길은 정해진 길이 없단다.
허공을 뚫고 가야 한다.
앞서 누가 갔던 길도 아니다.
홀로, 외로이 허공을 뚫고 온몸으로 가야 한다.
마음만 조금 도와주는 그런 희생이 아니라, 온몸을 바치는 희생. 

저항하다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감옥에 가서 썩을 수도 있고, 심지어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가서는 돌아오지 말> 각오로 투쟁해야 함을 드러냈던 시란다.
과녁에 박혀서 박힌 아픔과 함께 썩자. 그리고 돌아오지 말자. 

참으로 비감했던 시대였다.
장엄했던 시대였다.
가진 것. 명예와 부 같은 것들.
누린 것.
쌓은 것.
이런 것들을, 행복했던 다사로운 나날을 넝마처럼 버려야 하는 희생정신.

우리 모두 숨 끊고 활시위를 떠나자.
몇 십 년 동안 가진 것, / 몇 십 년 동안 누린 것, / 몇 십 년 동안 쌓은 것,
행복이라던가 / 뭣이라던가 / 그런 것 다 넝마로 버리고 /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허공이 소리친다. / 허공 뚫고 / 온몸으로 가자.

저 캄캄한 대낮 과녁이 달려온다. / 이윽고 과녁이 피 뿜으며 쓰러질 때 /
단 한 번 / 우리 모두 화살로 피를 흘리자.

돌아오지 말자! /돌아오지 말자!

오 화살 정의의 병사여 영령이여!

이런 말들은 이제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구나.
일제 강점기에만 <속죄양> 의식이 있었던 건 아니다.
어떤 시기건 어두운 시기에는 누군가의 피가 여럿의 행복의 제단에 바쳐지곤 했던 것이 역사란다.
그런 역사를 쉽사리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

<캄캄한 대낮>은 절망적 현실 상황을 역설적으로 나타낸 표현이다.
대낮조차 절망으로 캄캄하게 여겨진다는 말이지.
고은 시인처럼 스님이기도 했던 만해 한용운의 <나룻배와 행인>도 함께 읽어 보자.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느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어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어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行人 (한용운, 나룻배와 행인)

나는 나룻배고 당신은 행인이란 비유가 시종일관하고있다.
나룻배는 강물을 건너 주는 도구다.
당신은 지나가는 사람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중요한 것은 <행인의 강 건넘>일 것이다. 

당신은 이 강을 건너야만 하는 행인이다.
그런데 나는 나룻배로서 당신을 건너게 해 줄 준비가 다 되어 있다.  

2연에서 흙발로 나를 짓밟는 당신이 등장한다.
당신은 나를 고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기에, 당신을 싣고 강 건너로 갈 것이다.
아무리 깊은 물 빠른 여울이라도 나는 기꺼이 당신을 안고 간다. 

이 <나룻배>는 참으로 희생정신이 강한 존재이기도 하다.
참을성이 많은 존재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이 강을 건넘>이란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이자 수단>에 불과할 따름이다. 

불교에서 뗏목의 비유를 많이 쓴다.
강을 건널 때 뗏목을 필요로 한다.
강을 건너고 나면 행인은 뗏목을 어떻게 해야 할까?
결코 행인은 뗏목을 머리에 이고 가지는 않는다.
강을 건너면 뗏목은 버리고 계속 가야할 뿐이다. 

일제 강점기에 제국주의 일본 세력과 투쟁하기 위하여 <공산주의자>가 된 사람들도 있었다.
<학교>를 세운 사람도 있고, 중국으로 가 <임시정부>를 세운 자도 있다.
이들의 <공산주의>, <학교>, <임시정부>는 모두 뗏목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뗏목이 아니다.
뗏목은 강을 건너면 버리는 것이다. 

민우야.
세상을 사는 일은 강을 건넘과 유사한 점이 많단다.
행인인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 <도구>가 필요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학교>도 다니고 <졸업장>도 딴다.
그렇지만 <학교>나 <졸업장>은 뗏목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행인의 걸음걸이인 것이다. 비유가 너무 어렵니? 

3연에서 이 나룻배는 <당신을 기다린>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버린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다.
그러나 당신은 언제든지 오실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 간다고 했다.

낡아 가는 것은 <고난>이겠다.
일제의 고난, 삶의 고뇌.
그것은 날마다 날마다 되풀이된다.
그렇지만 당신이 언제든 오면, 나룻배가 필요하기에 당신을 기다린다고 했다.

나룻배는 바로 <불법><불도>와도 같은 진리를 추구하는 길일 수도 있다.
독립운동가에게는 <독립군>과도 같은 단체가 될 수도 있고.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나룻배>가 아니라 <행인>이라는 인식이다.
<나룻배>는 행인의 강 건넘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고귀한 떠받듦의 대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용운 스님에게 있어 <불교>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민족이 이민족에게 짓밟히는 모멸을 당하는 것을 보고,
불교란 나룻배로 강을 건너가기를 강렬하게 소망하는 시로 읽을 수도 있겠구나.
나룻배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널 수 있는 도구다.
물론 당신은 강만 건너면 나룻배는 거들떠 보지도 않지만 말이야.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어요  

이렇게 독립을 간절하게 기다렸던 시인일 수도 있겠다.
어떤 치욕도 헌신적으로 인내하는 <나룻배>의 비유는
<행인>의 물 건넘을 간절히 소망하는 시인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에는 나름대로 험난한 파도를 넘어야 했고,
독재 정권 하에서는 또 다른 폭풍우를 견뎌야 했던 민족.
지금도 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된 나라로 남은 민족.
동족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비극을 일상으로 여기고 대립이 평상이 된 현실.
그렇지만,
아직도 우리는 <나룻배>가 필요하다.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라는 팝송이 있었듯,
민우가 건너야 할 세상의 바다에 어떤 <나룻배>가 소용이 될지...
글쎄다.
혼자서 헤엄쳐야 하는 정도로 외톨이가 아님을 고맙게 생각하렴.
그리고 부모가 <나룻배> 역할을 해줄 수 있을 때 유용하게 쓰는 것도 지혜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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