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아들 민우야.
바야흐로 봄이 오는구나.
이제 너는 학교로서는 최고 학년인 고3이 될 순서고.
이제까지 학교를 11년간 다닌다고 고생 많았다. 

마지막 한 해를 정말 성실하게 잘 보내길 바란다. 
왜 그래야 하는지는 지난 19년간 참 여러 번 이야기했을 것 같구나.
한국 사회가 열린 사회라면 아빠가 시 특강을 했을 때,
그렇게 부정적 현실에 대한 저항 이야기도 많이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미래에 대한 비전이 밝지만은 않기 때문에,
또,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가진다고 그것이 손쉽게 이뤄지지 않는 시대기 때문에,
너희는 한층 고민이 많은 시대를 살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삶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것.
이것은 인류가 존속하는 한, 최대한의 공통적인 의견이 아닐까 해.
나는 어디쯤 와서 살고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디로 갈 건지...
이런 것이 철학이고,
그것이 바로 고전이고, 문학이고,
결국, 책에 쓰인 것은 다들 그런 것들이란다. 

오늘은 자신의 삶을 돌아본 시들을 몇 편 소개할게.
우선, 시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돌아본 김광균의 '노신'을 읽어 보자.

시(詩)를 믿고 어떻게 살아가나
서른 먹은 사내가 하나 잠을 못 잔다.
먼 기적 소리 처마를 스쳐가고
잠들은 아내와 어린 것의 베갯맡에
밤눈이 내려 쌓이나 보다.
무수한 손에 뺨을 얻어맞으며
항시 곤두박질해 온 생활의 노래
나는 돌팔매에도 이제는 피곤하다.
먹고 산다는 것,
너는 언제까지 나를 쫓아오느냐.
등불을 켜고 일어나 앉는다.
담배를 피워 문다.
쓸쓸한 것이 오장을 씻어 내린다.
노신(魯迅)이여
이런 밤이면 그대가 생각난다.
온 세계가 눈물에 젖어 있는 밤
상해(上海) 호마로(胡馬路) 어느 뒷골목에서
쓸쓸히 앉아 지키던 등불
등불이 나에게 속삭거린다.
여기 하나의 상심(傷心)한 사람이 있다. <김광균, 노신>

'노신'은 중국어로 '루쉰'이라고 읽는다.
루쉰은 중국의 정신적 스승으로 일컬어지던 분이다.
중국이 일본에 패망하던 어렵던 시절,
꼿꼿한 정신으로 중국인의 멍청한 정신 상태를 꾸짖던 분이기 때문이지.
루쉰의 소설로 "아큐정전"이란 작품이 있다.
'아큐'란 바보는 늘 '과거에 나는 잘났던 인물이야. 우리 집안은 대단한 집안이지.'이렇게 착각을 일삼는 놈이지.
얻어맞으면서도 '나는 똥이야. 나를 때린 저놈은 똥을 때린 거지.' 이렇게,
바보같은 생각을 하면서도 <정신적 승리>라며 좋아하던 바보란다.  

근대 중국이 그랬다는 비유지.
마치 조선이 왜구에 불과하던 일본이 통일국가가 된 후 서구 문물을 받아 들이고,
급기야 조선과 중국을 침범하는데도,
왜놈들, 쪽바리들, 이러면서 무시하기만 하다가 망해버린 것을 꾸짖는 거야. 

화자 김광균은 젊은 나이로 '시인'이란 직업이 못마땅하다.
가족을 먹여살리기도 어렵기 때문이지
서른 먹은 화자는 <시를 믿고 살기 어려워서> 잠을 못 잔다고 그래. 

멀리 기차의 기적소리 들리고,
아내와 어린 아기는 잠이 들었는데, 창밖엔 눈이라도 쌓이나 봐. 

시인이란 사람은,
어디 잡지사 같은 데서 책을 만드는 일을 도와주며 살겠지.
근데, 그 일이 그닥 쉽지만은 않구나. 

무수히 손에 뺨을 얻어맞으며
항시 곤두박질해 온 생활의 노래
나는 돌팔매에도 이제는 피곤하다.
먹고 산다는 것,
너는 언제까지 나를 쫓아오느냐. 

 이런 구절에서 보면, 먹고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이 나지 않니?
실제로 뺨을 얻어 맞거나, 돌팔매를 맞은 것은 아니겠지만,
먹고 산다는 것.
그것은 참 쉽지 않은 일이었으리라. 일제 시대에 말이지. 

그래서 혼자 등불을 켜고 일어나고, 담배를 피워 물어.
그건 내적 갈등을 해소하지 못하는 과정이지.
혼자서 온갖 고민을 다 하는 거야.
가족을 먹여살리기 어려운 가장의 비애. 그런 거. 
그러노라면, 쓸쓸한 고뇌로 오장육부,
창자를 쓸어내리는 고통이 느껴지지. 

그런 고통스런 밤이면,
중국의 '루쉰'을 떠올리게 된다는 거야.

온 세계가 제국주의의 고통으로 울고 있는 시절.
상하이의 '호마로' 어느 뒷골목에서
루쉰은 홀로 쓸쓸히 등불 아래서 시를 썼겠지.
물론,
고통스런 마음으로 가득한 삶이었겠고 말이야. 

그러면,
마치
루쉰이 나에게 속삭거리듯,
등불아래서 그이의 목소리를 듣는 듯,
혼자서 이런 느낌을 갖게 된단다. 

"여기 하나의 상심(傷心)한 사람이 있다."
나는 그 옛날 중국에서 근대화를 위하여 고통을 이기며 견뎌냈다.
너는 지금
한반도의 어려움 속에서 시인으로 살고 있는가?
그렇다면,
나의 어려움처럼
너의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으리라. 
나도 상심했었으나 이겨냈든, 너도 상심을 이겨내기 바란다. 

이런 동병상련의 마음을,
거기서 얻는 힘을 나타낸 시가 바로 <노신>이리라. 

시인 김광균이 가족을 부양하기도 힘든 상황을 당했던 거 같다.
그 때,
중국의 힘겹던 세월을 부득부득 이겨낸 '루쉰'을 생각하며
힘겨운 세월을 이겨낸 화자의 심정을 잘 나타낸 시로 보인다. 

이번에도 먹고 살기 위하여 교사라는 직업을 택한 어떤 시인의 시를 읽어보자.

아버지는 내가 법관이 되기를 원하셨고
가난으로 평생을 찌드신 어머니는
아들이 돈을 잘 벌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어쩌다 시에 눈이 뜨고
애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
나는 부모의 뜻과는 먼 길을 걸어왔다
나이 사십에도 궁티를 못 벗은 나를
살 붙이고 살아온 당신마저 비웃지만
서러운 것은 가난만이 아니다
우리들의 시대는 없는 사람이 없는 대로
맘 편하게 살도록 가만두지 않는다
세상 사는 일에 길들지 않은
나에게는 그것이 그렇게도 노엽다
내 사람아, 울지 말고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아라
평생에 죄나 짓지 않고 살면 좋으련만
그렇게 살기가 죽기보다 어렵구나
어쩌랴, 바람이 딴 데서 불어와도
마음 단단히 먹고
한치도 얼굴을 돌리지 말아야지 <정희성, 길>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지낸 세대는
자식이 떵떵거리는 권력을 가지거나 적어도 지식인으로 살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처럼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국가에서
4년제 대학은 무조건 보내야 한다는 통념이 생겼을 것이다. 

자식이 공부를 잘 하는 경우에,
부모는 자식이 법관이 되거나, 좋은 대학을 나와서 여러 친구와 함께 사업을 하길 바랐던 것이 흔했다.
돈없는 사람도 높은 권력을 잡기 쉬운 것이 법관이었고,
돈만 많이 벌면 또 세상은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기도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화자는 어쩌다 보니,
국문과를 가서 시를 읽고 쓰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국어 선생이 되어
높은 권력자가 되지도 못했고,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되지도 못했다.

아니, 거꾸로 나이 마흔이 되었는데도 아직 가난한 삶을 살아야 했던 시절.
옆 자리에 누워 자는 아내도 화자의 처지를 비웃는다.
참 삶은 뜻대로 되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화자가 서러운 것은
법관이 되거나 돈을 못 벌어서만은 아니다.
화자가 미친듯이 공부를 했으면 법관이 되었을 수도 있고,
화자가 미친듯이 사업을 했으면 돈을 벌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화자의 현실에서 서러운 일은, 
<없는 사람이 없는 대로 / 맘 편하게 살도록 가만두지 않는다> 는 것이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니?
세계에서 '행복 지수'를 따져 보면,
가난한 나라가 '행복'을 느끼는 경우가 많단다.
방글라데시는 최빈국 중의 하나지만, 늘 행복은 최고 지수를 얻곤 하지.
그건, 모두 가난하기 때문에, 가난함이 멸시의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한국도 전쟁 이후가 지금보다 더 행복한 세대였는지 몰라. 

지금 한국은 세계에서 '자살률 1위, 출산저하율 1위' 이런 불행한 국가거든. 
행복하지 않은 거지. 죽고 싶고, 자손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은 세상.
어떻게든 세상 사는 일에 적응하는 일에 길들지 않은 화자에게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고,
노엽다는구나. 

화가 날 수밖에 없지 않겠니?
그래서 아내에게 말한다. 

내 사람아, 울지 말고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아라
평생에 죄나 짓지 않고 살면 좋으련만
그렇게 살기가 죽기보다 어렵구나
어쩌랴, 바람이 딴 데서 불어와도
마음 단단히 먹고
한치도 얼굴을 돌리지 말아야지 

아내에게, 울지 마라.
법적으로 잘못하지 않고,
그저 평범한 교사로 살고 싶은 게 화자의 꿈이지만,
그렇게 살기 참 어렵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옳은 것을 옳다고 가르치고,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가르치면, 감방엘 가던 시절이 한국에선 먼 과거가 아니었거든. 

그래도 화자는 마음은 단단히 먹는다.
어쩌겠는가.
바람이 딴 데서 불어와서,
화자의 마음을 비겁한 곳으로 돌리려 해도,
화자는 꼿꼿한 마음으로.
자신의 소신을 지키며 살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시야.  

제목인 '길'은 '인생'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지.
이 시의 화자에게 '길'은
교사로서의 '인생'이었다고 보면 될 거야.
아빠도 그렇지만, 옛날 시절의 선생님은,
꼿꼿한 정신의 상징처럼 여겨졌단다.
절대로 더러운 일에 공감하지 않는 선비 정신을 가진 존재.
큰 돈을 벌러 떠났다면 그 뜻을 이룰 수도 있을 것을,
아이들과 이런 저런 일로 소일하는 것을 낙으로 삼아,
권력도 돈도 손에서 놓친 사람들. 그런 존재. 

그래서 선생님들의 삶은 어쩌면 권력도 돈도 놓쳐버린 패배자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아빠는 아직도, 교사가 가져야 하는 자존심 하나를 믿고,
어리석게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 시가 바로 '길'이란 시야.
아빠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 한단다. 

민우가 어떤 삶을 살지 모르지만,
아빠는 나의 살아온 길에 대하여, 나름대로 만족한다.
시대를 잘 만나, 먹고 살 만하고, 아빠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어서 말이야.
물론, 정말 아이들과 즐겁게 수업하고 열정적인 교육활동을 펴기엔 학교가 답답한 구석도 있지만,
아빠가 살아온 삶에 대하여 아빠는 나름의 자존심과 행복을 느끼고 있거든. 

세상은 남의 눈으로 보는 게 아닌 거 같아.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즐겁게 하는 것.
그것만큼 아름다운 일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아빠는 나이가 들수록 자주 하게 된단다.
다음엔 박재삼의 <흥부 부부상>을 읽어 보자꾸나.
아빠가 하던 이야기와 상통하는 주제를 담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흥부 부부가 박덩이를 사이하고
가르기 전에 건넨 웃음살을 헤아려 보라.
금이 문제리.
황금 벼이삭이 문제리.
웃음의 물살이 반짝이며 정갈하던
그것이 확실히 문제다.

욕심이 없는 웃음의 아름다움
없는 떡방아 소리도
있는 듯이 들어내고
손발 닳은 처지끼리
같이 웃어 비추던 거울면들아.

가난 속에서도 서로 위로하던 웃음
웃다가 서로 불쌍해
서로 구슬을 나누었으리.
그러다 금시
절로 면에 온 구슬까지를 서로 부끄리며
먼 물살이 가다가 소스라쳐 반짝이듯
서로 소스라쳐
본웃음 물살을 지었다고 헤아려 보라.
그것은 확실히 문제다. <박재삼, 흥부 부부상>

자, 여기서 흥부 부부는 어떤 존재로 거론되냐면 말야.
엄청 가난한 사람들이잖아. 그치?
근데... 그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다는 가정을 하고 있다는 말이지. 

가난한데 행복할 수 있을까?
우리가 가난하다고 이야기하는 건,
글쎄, 과연 어떤 것이 부유한 거고, 어떤 것이 가난한 건지 생각해 봐야 한단 거야. 

엄마 아빠가 어리던 시절, 한국은 전쟁을 겪고 난 후였단다.
그래서 유엔의 원조도 받고, 거지같이 살던 시대였어.
새옷을 사입기도 힘들고, 학교도 제대로 다니기 힘들었지.
돈이 없으면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기 어려웠단다.  

이 시에서 흥부 부부가 박을 가르기 전,
그 상황을 생각해 보자고 한다. 

흥부 부부가 왜 박을 가르려 했지?
제비가 <보은표>, 곧 은혜를 갚는 박씨(報恩瓢)를 가져다 줬고,
그 박이 쑥쑥 자랐고,
근데, 배가 고파 죽겠고,
박 속이나 파서 죽이나 쒀 먹자고 켠 거거든. 

근데,
흥부 부부가 박덩이를 사이하고,
가르기 전에 건넨 웃음살을 생각해 보래. 

그건, 배가 아무리 고파도,
부부 사이의 정,
초코파이 없이도 다사롭게 나눌 수 있는 정에 대한 이야기잖아.
그건, <금 덩어리>나 <황금 벼이삭>같은 금전적 문제를 초월한 거라고 이야기하고 있단다.
흥부 부부가 <웃음의 물살이 깨끗하게 반짝이던 그것>이 중요하다는 거지. 

앞의 <황금 벼이삭이 문제랴>는
돈이 없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고,
뒤의 <확실히 문제다>는
믿고 사는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는 이야기지.
똑같은 <문제>란 단어도,
앞의 것은 '노 프라블럼'이고, 뒤의 것은 '썸씽 굿'이란 이야기야. 

이 정도 했으면 2연은 그냥 휘리릭~~~ 넘어간다.
욕심없어도, 아름답다.
노 프라블럼.
가난해서
떡방아 찛을 것 없는 집(백결 선생 전설도 있잖아.)도
방아 찧을 것도 없는 집에서 거문고로 둥~더덩~ 울리는 음악도
곡식 있는 듯이 들어 주고 말이지,
손발 닳게 고생하던 사람들도,
같이 웃으며 서로 빤히 사정 알던,
거울에 비친 것처럼 사정을 뻔히 알던 사람들끼리
더 가지고 못 가진 것에 대하여 자랑할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던 것처럼,
노 프라블럼!!! 

언더스탠드???
이런 생황이 이해가 가니? 

가난한 사람들끼리 서로 위로하던 웃음,
동병상련의 처지.
웃다가
서로 불쌍한 맘에
서로 눈물을 나눴겠지.
그 눈물은? 뭐로 비유되었다고? 그래. 구슬. 

이 흥부 부부는 <물질적 풍요>를 바라는 사람일까?
그건 아니겠지?
흥부 부부는 가난해서, 먹을 게 없어서 박을 탔던 사람들이었으니 말이야.
그들이 추구했던 행복은, 바로 <정신적인 것>이었겠다. 

그러다 금시
절로 면에 온 구슬까지를 서로 부끄리며
먼 물살이 가다가 소스라쳐 반짝이듯
서로 소스라쳐
본웃음 물살을 지었다고 헤아려 보라. 

이런 부분을 읽어 보면, 히야~ 시인은 참, 사람의 마음을 읽는 독심술사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둘이서 박을 타다가 서로 하도 불쌍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치자.
그러다가 금세,
두 부부의 얼굴에 맞닿은 눈물을 느끼고는,
서로 부끄러워하여
물살들이 서로 부딪혀서 반짝이는 빛을 내듯,
두 사람의 마음이 하나가 되어,
가난하지만,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웃음을 짓는 그 웃음,
그 본웃음의 물살.
그런 흥부 부부의 웃음의 물살을 생각해 보자. 

가난하지만,
서로 위로가 되고 위안이 되는 사랑의 마음들이 지어내는
본웃음 물살. 
이것이야말로 <확실히 문제>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의 <확실한 문제>는
삶의 의미,
과연 부유한 삶만이 삶일까?
이런 <삶의 의의>를 따지는 시가 이 시가 되는 것이다. 

이 시가 탄생했던 1960년대는 참 가난했던 시대였다.
유엔의 원조를 받던 시대.
그렇지만, 그 가난했던 시대의 가족은 <흥부 부부>처럼 <행복>을 느끼기도 했던 것이고,
정말 가난하다고 해서 <행복>을 모르겠는가? 하면서 삶의 의의를 나누던 시대이기도 했던 것이다. 

예전 어떤 싹퉁바가지 없던 광고처럼,
당신이 어떤 아파트에 사는가가 당신을 말해줍니다~~ 이렇게 가난을 무능력으로 취급하던 시대는 아니었던 거다.
이 시의 주제는 바로 <가난한 삶의 애환과 소박한 행복, 가난한 삶의 애환과 그 정신적 극복.
정신적 행복을 추구하는 소박한 인간상> 이런 것들이었다고 보인다. 

민우야.
세상은 참 복잡하고 끝없이 가지가 많아 보인다.
그걸 누구랑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답도 여러 가지일 것 같구나. 

나는 행복하다, 아니다를 혼자서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늘 주변 사람들과 얽히고 설킨 속에서 판단할 수밖에 없다.
1930년대, 일제 강점기에 정말 똑똑한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미치고 싶었을까? 

아빠는 만약에 내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났다면,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많단다.
그 때는, 독립 투사가 되기보다는 아마도 정신병자가 되었을지 모른단 생각을 해봤어.
그런 시대적 상황을 글로 쓴 사람이 아마도
'이 상'이란 작가가 아니었나 싶다. 

그는 '김해경'이란 멀쩡한 이름을 놔두고,
'이상' 곧, 이상한 놈, '싸이코'란 별명을 쓴 거잖아.
지금은 '정지훈'이가 '비'란 이름을 써도 문제가 없지만,
80년 전에 <싸이>란 이름을 쓴 '이상'은 확실히 <문제 작가>임에 틀림 없었지. 

니네가 어떻게 사는 게 행복하다고 하는 지 몰라도,
나는 일제 강점기에 어떻게 사는 게 옳은지 모르겠다~ 얼라리요~ 헐~
이런 시가 바로 <오감도>란 생각이 들어.
우선 <오감도의 1호>를 한번 읽어 보자꾸나.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이상, 오감도- 시 제1호> 

이 시는 절대로! 수능에 날 수 없는 문제란다.
해석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지. 

그렇지만, 이상이 왜 이런 시를 썼을지는 상상해 볼 수 있지 않겠니?
그 시대의 문제작이었으니 말이야.
이상이 이런 시를 쓴 것은,
확실히 그것은 <문제>였거든.  

<오감도>란 어휘는 한국어에 없단다.
<조감도>는 있지.
새가 하늘에서 <부감 : 날면서 내려다 보기>하는 듯 그린 그림을 <조감도>라고 그래.
그럼, 오감도는?
언어 유희일 수 있어.  

너희 인간 사는 세상?
족까지 말라고 해~ ㅋ
니들이 알긴 뭘 알아? 

일본 넘들? 조선을 먹었다고?
니들도 족까지 마~ 일본은 뭐, 만 년 간대니?
이렇게 하늘서 내려다본 새의 시선에서 인간 세상의 미약함을 비웃는 시선이었는지도 모르지.
근데, 왜 <조감도>를 <오감도>로 바꿨냐고? 

아, 일본 넘들도 <조감도>는 뭔가 하느님의 시선이잖아.
그러면, 일본 넘들을 비판하는 <하느님의 뜻>일 수도 있고 말이야.
그러니깐, 새 조(鳥)자에서 작대기 하나 떼고, 까마귀 오(烏)자를 쓰면
뭐, 무슨 뜻인지 설명할 필요도 없잖아.
미친갱이란 뜻의 <싸이코>란 이름으론 도저히 방송에 출연이 불가하니깐, <싸이>라고 쓴 넘이 부른 노래 알아?
<완전히 새 됐어>거든.
원래 <완전히 좆됐어>라고 욕으로 노랠 만들었는데,
그럼 당연히 방송 불가거든.
그래서, '새 조'자를 응용해서,
<완전히 새 됐어>로 바꿔서 성공했지. 

천재 시인 <이 상>을 그대로 본딴 것이
'싸 군'의 '오나전 새 됐어'야.
시대는 바뀌었지만, 아이디어는 같지. 

이 시에서 13인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 하는 이가 많아.
그치만, 13일의 금요일이 예수가 죽었다는 이도 있고,
제목의 <까마귀 오>자와 연계하여 불길하다는 이도 있고 그래.
사실,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ㅋㅋ 
아마, 세상 사람들아,
엿 드실래요? 이런 의미였는지도 몰라. 

이 시에서 생각할 점은
<무서운 아해>야. 

자, '무서운 아이'라고 하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건, <무섭게 보이는 아이>란 뜻과, <무서워 하는 아이>란 뜻으로 볼 수 있어.
중의적이지.
이 13인의 아해는 무서워 보이는 아이기도 하고,
무서워 하는 아이기도 해. 

자, 오감도.
조감도야.
하느님의 시선에서, 즉, 하늘에서 세상을 내려다 보니,
세상은 참 요지경이지. 웃기거든. 

일본 넘들이 조선 넘들을 잡아 먹고 아웅다웅 하고,
조선 넘들 중에도 일본넘 앞잡이들이 동족을 괴롭히고 그런단 말이지.
웃기지 않겠어? 하느님 입장에서? 

조선 넘이 조선 넘을 괴롭히고,
조선 넘이 조선 넘을 무서워하고 말이지.
'무섭게 보이는 넘'이 곧 '무서워 하는 넘'이고 말이야.
이건 뭐,
현대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란다.
국가 간의 관계나, 인간 간의 관계나 똑같고, 다 다르지. 

길은 막다른 골목이나 뚫린 골목이나, 모두 적당하다고 그랬지?
일제 시대에도 힘겹게 살았고,
지금은 해방된 세상인데도 살기는 힘겹단다. 

막다른 골목, 일제 강점기에 모든 아해들은 <두렵다>고 그랬겠지?
그러나 뚫린 골목,
아해들이 질주하지 아니하여도 세상은 <두렵다>고 볼 수 있어. 

세상은 늘 불안의 요소를 안고 있는 것이 <현대인의 삶>이라고 볼 수 있는 거야.
그래서 이런 시들을 <모던>하다고 한단다. 현대적이라고.

띄어쓰기를 하나도 하지 않았지만,
사실 한국어나 일본어는 명사를 중심으로 조사가 붙은 형식이어서 띄어쓰기가 큰 의미가 없으니
이런 양식이 가능한 거란다.
영어같은 경우는 띄어쓰기를 무시하는 '신선한?' 양식은 실험이 불가능해.
'Tobeornottobethatisaquestion.'같은 글은 이해가 불가능하잖아.
'To be or not to be, that is a question.'은 누구나 이해하는 글인데 말이지.  

오늘은 '인간의 삶'과 '행복'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를 몇 편 봤다.
민우도 이제 곧 어른이야.
어떻게 살 것인지, 어떤 삶이 행복한 삶인지,
아빠랑 이렇게 시를 통해 이야기나눌 수 있는 삶이 되면 좋겠다는 게
아빠가 이렇게 매일 글을 쓰는 이유란다.
사랑하는 아들,
이렇게 쓸 수 있는 데는, 그런 모든 것이 들어간 마음이 작용한다는 거.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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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란 이름을 기억하니?
아빠가 처음 선생님이 되었던 해.
1989년 여름, 아빠는 친구들과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밤이면 무더워 잠을 이루지 못하고 라디오를 켜놓고 책을 읽으며 뒹굴곤 했단다.
근데 라디오에서 '기형도'란 시인이 죽었다면서 매일 시를 읽어 줬어. 

그 해 여름은 참 무서운 해였단다.
선생님들이 모여서 '노동조합'을 만들었는데,(이게 선진국엔 다 있는 거거든.)
빨갱이들이라고 텔레비전에서 마구 매도를 하고,
1500여명을 해직을 시키고 그랬어. 

그 어둡던 시절과 딱 맞춰서 기형도의 어두운 시들을 들으면서
아빠는 친구들 모르게 누워서 눈물을 흘렸단다.
이런 어두운 나라에서 태어난 것이 미워서 눈물을 흘렸고, 
그런 시대에 선생을 하게 된 것이 싫어서 눈물을 흘렸어.
결국 나는 군대엘 가서 해직은 되지 않았지만,
지금도 기형도 시를 읽으면 그 당시의
눈물 가득한 먹먹한 스물 네 살의 젊은 가슴이 오롯이 되살아 나곤 한단다. 

전에 기형도의 '엄마 걱정'을 읽은 적 있지?
'찬밥'처럼 방에 담긴 아이. '내 유년의 윗목'을 기억하는 가엾은 아이.
그가 어른이 되었으니 얼마나 어두울까. 
그의 유명한 시들만 몇 편 살펴볼게.
그의 시집 제목은 <입 속의 검은 잎>이란다. 
'입' 속에 '잎'이 있을 리가 없지? 비슷한 발음을 이용한 언어유희지.
'입' 속의 '혀'를 '검은 잎'으로 비유했어.
곧 자유롭게 말하지 못하는 죽은 혀.
발언하지 못하는 죽은 언론과 죽은 문학에 대한 풍자겠지.
우선 그이 <질투는 나의 힘>을 읽어 보자.
영화 제목 <복수는 나의 것>도 이 시의 패러디겠지?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려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는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다녔는데,
시를 잘 써서 '현상 공모'는 늘 1등을 했단다.
그래서 응모해 놓고 발표도 되기 전에 술값을 다 쓰곤 했단 이야기도 있어. 

연 구분이 없는 시라서 서술어가 종결형 어미를 쓰는 곳에서 나눠서 다섯 부분으로 읽어 보자.
첫 부분에선 시를 쓰게된 계기가 드러나 있어.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점을 상정하고 있지.
나이든 눈으로 본다면 스스로는 '어리석게도 너무 많이 기록'했을 뿐인 시인일 것 같대.
지금 자신의 시에 스스로 만족하지만, 미래의 눈으로 보면 아닐 거란 생각이지.
젊었던 시절,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워 너무 많이 써댔다는 반성을 하는 부분이야. 

두번 째 부분에서 자신에 대한 성찰이 드러난단다.
자신을 '어슬렁거리는 개'에 비유했으니 '보잘것 없는 존재'로 본 것 같지?
지칠줄 모르고 뭔가를 했지만, 제대로 한 것은 없고 '머뭇거렸을 뿐'인 것처럼 반성하게 될 거란 이야기지.
아직도 미래의 시점에서 자기를 본다면 그렇다는 이야기야. 

세번 째 부분에서도 자기 반성이 들어 있다.
자기 시를 돌아보니 '탄식'뿐이어서 한심하대.
젊은 자신이 살아온 날들은 참 실망스러운 것이었고,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바보스런 것이었지.
희망에 가득차서 열렬하게 적었던 시들을 돌아보노라니,
잘 사는 사람에 대한 질투,
명예와 권력을 가진 사람에 대한 질투,
자신보다 똑똑하고 글 잘 쓰는 사람에 대한 질투, 질투, 질투들...
자신이 희망했던 바는 온통 질투 뿐이었다고 회고할 거래.
그래서 화자는 미래에 읽을 수 있도록, 자신의 글을 평가하고 있어.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화자의 반성이 압축적으로 효현되고 있지.
화자의 삶을 회고하고 성찰해 보니,
타인의 삶에 대한 시기와 질투에 지나지 않았음을,
지나친 질투로 똘똘 뭉친 것이었음을 반성하고 있는 시지.
그런데 제목에서는 '질투만이 나의 힘'이라고 했어.
시를 읽어보면 질투는 '부정적'으로 그려지는데, 그것을 '힘'이란 긍정적 요소와 매칭시켰으니,
역설적 표현이 되겠구나. 

마지막 부분은 화자가 정말 열정적으로 살려고 노력했음을 표현했어.
그렇지만,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도록 제대로 살아본 적이 없다는 것이지.
늘 자신보다 나은 누구, 현재보다 나은 미래만을 위하여 꿈을 꾼 자신밖에 없음의 발견.
누구보다 바쁘게 살고 있었지만,
그것은 '스스로를 사랑해서' 그런 것이 아님을 반성하는 시란다.
좀 우울하지만, 아름다운 생각 아니니?
정말 바빠 보이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놓치고 살기 쉬운 게 인생이니 말이다.

다음엔 그의 '빈 집'을 읽어 보자.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 것도 모르는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기형도, 빈 집>

기형도에게 세상은 온통 '빈 집' 투성이였는지 모르겠다.
어린 시절, 엄마를 기다리던 '빈 집'에 홀로 엎드려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오지 않던 엄마를 걱정한 것처럼,
어른이 된 기형도에게도 '우리집'은 오지 않았다.
사랑을 잃고 그는 쓴다. 

짧았던 밤. 그는 사랑을 했고, 이제 그 사랑을 잃었다. 
모두에게 안녕을 고한다. - 그녀와 함께했던 모든 것들에게...
안개와 촛불들, 흰 종이들과 눈물들.
한 때는 그녀와 나의 것들로 착각했던 그것들은 더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일 뿐이다.

그리고 이제 문을 잠근다.
이룰 가망없는 그의 사랑은 '빈 집'에 갇힌다.
김기덕 같은 이의 작품을 만들게 해주는 모티프가 될 정도로 강렬하면서도 텅 빈 시상이 가슴을 저민다.
김기덕의 '빈 집'은 낮에는 사랑이 없고 사람이 없는 텅빈 집을 상상 속에 밀어넣은 영화다. 

기형도의 '빈 집'은 절망과 폐쇄의 공간이다.
모든 열망을 상실한 후의 공허한 내면의식이 반영된 정서적 공간이라 보면 되겠다. 

이 시에서 사랑을 잃어버린 행위는
연인과의 그것이기도 하고, 인생이나 세상에 대한 열정일 수도 있다.
'질투는 나의 힘'에서 자신은 '질투했을 뿐'임을 깨달았듯,
사랑을 잃고 그는 세상을 향한 문을 닫는다.
혼자 '빈 집'에 스스로를 가둔다.
그의 영혼은 메마르고 쓸쓸하다.

그의 작품들은 우울한 기억과 회상들로 가득하다.
개인적 경험이기도 한 이것들은 사회적 현상이기도 하였다.
그의 시에는 좌절, 불안, 허무, 불행, 죽음의 이미지가 가득하다.
이 기괴한 시어들을 일컬어 '그로테스크(기괴한 건축 양식에서 나온 말)'라고 부른다.

마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떠올리는 그의 시 '안개'를 읽어 보자.
이 시를 기형도가 유명해 졌다고 한다.
암울하고 전혀 내일이 보이지 않던 1980년대 독재 시대가 잘 반영되어 있단다.

1.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2.
이 읍에 처음 와 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군단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근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 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 다닌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성역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 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 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취객 하나가 얼어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 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총신을 겨눈다. 상처 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을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3.
아침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기형도, 안개>

이 시의 '안개'는 자연 현상이라기보다는 '공장에서 뿜어진 매연'이기 쉽다.

1문단에서 샛강에 안개가 끼는 것은 외부와 경계를 짓는 것으로 읽으면 될 거야.
3문단을 먼저 보면, 다시 샛강에 안개가 낀다는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어.
안개는 명물이고, 여공들은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공장으로 간대.
제법 밝고 경쾌한 어조로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반어법>이란다. 

공장으로 가득한 가난한 사람들의 그 읍 사람들은
늘 매연 가득한 대기 속에서 살아가면서 햇볕을 쬐지도 못한다.
여공들은 건강미를 잃고 얼굴은 허옇게 뜨고, 아이들도 자라기 전에 공장엘 가야 한다.
이렇게 부정적인 현실을 <명물이고, 아름답고, 무럭무럭 자라 공장엘 간다>고 썼으니 반어지. 

2문단에선 '안개의 군단'이 지배하는 부자유한 도시를 형상화하고 있다.
온통 우울하고 답답하다.
사람이 겁탈당하고, 얼어죽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이렇게 썼다.
안개가 자욱한 세상에 사는 것은 사회적 책임이다.
가난하게 공장에서 살아야 하는 것은 독재정권의 책임이 가장 크다.
대기업과 재벌들은 정치가와 짜고 큰 이득을 얻는다.
그리고 다시 독재정권을 지원하고 다시 이득을 얻는다.
이 톱니바퀴 속에서 '난쟁이'들은 나약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개인적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라고 표현한 것도 <반어>다.
그것을 개인의 불행이라 여기지만, 사실은 구조적인 사회의 문제라는 속뜻이 강하게 비친다.

상처 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을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사내들은 사회의 문제점을 비판하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비판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은 감옥에 갇혔기가 십상이다.
경찰은 무조건 기업가의 편을 든다.
국가도 무조건 기업가의 편을 든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 이런 말은 국민을 괴롭히는 나라라는 뜻이다.  

오로지 돈밖에 모르는 나라에서는 인삿말도 '부자되세요~'가 되었다.
이런 나라는 세상에 잘 없단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 헐~
돈이 곧 인격이 되는 무서운 곳이 '안개낀 도시'다.
비판하는 자들은 조용히 사라지고,
모든 문제는 <개인적인 불행>일 뿐이다.

이 시는 산업화로 인해 파괴되는 자연과 삭막해지는 인정에 대한 고발의식을 주제로 하고 있다.
이 시와 비슷한 주제의식을 담고 있는 시가 있어 한편 소개할게.
바로 이성복의 '그 날'이다. 우선 읽어 보렴.

그 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 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 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 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 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 점치는 노인과 변통(便桶)의
다정함을 그 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 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 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이성복, 그 날>

이성복은 어려운 비유나 상징을 하나도 쓰지 않았다.
그저 '그 날' 일어났던 일들을 하나씩 주워섬기고 있다. 

그 날 일어난 사건 목록을 만들면 아래와 같다. 

1. 아버지는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학교갔다
2. 어머니의 다리는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노닥거렸다  
3.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4. 역전엔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어린 여자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5.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6.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7.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8.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9. 새 점치는 노인과 변통(便桶)의 다정함을
10.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11.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이렇게 적으나 마나 한 일들로 가득한 날이 '그 날'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렇지도 않아보이는 '그 날' 사람들은 아프게 살아가고 있다.
아버지는 사장과 다투고, 어머니는 다리가 붓고, 가난한 여인들은 몸을 팔았다.
잡초뽑는 여인들과 집 허무는 사내들의 가난은 삶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이 시의 백미는 마지막 두 행이다. 
그토록 세상이 고통스러웠던 그 날,

아무도 그 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마치 기형도가 <개인적 불행일 뿐>으로 치부하는 것과 같다.
세상은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다고 소리치지도 아픈 이를 위해 치유하려는 노력을 하지도' 않았다.

세상은 <무사했고> <완벽했고 없는 것이 없었다>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표현은 모두 <반어법> 되시겠다.
세상은 아프고 엉망 진창이다.
그런데 무사하다, 완벽하다, 안 아프다 했으니 '반어'지. 

불규칙하게 시어를 행갈이해서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소외당하는 자들의 고통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을 고발하는 일종의 <참여시>다.

부모는 고단하고 아픈데, 자신은 노닥거리고 여동생은 음악회를 간다.
이런 부조화가 시의 문제의식을 심화시키는 것이다. 

한국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데도, 전방은 무사하단다. 전쟁으로 대치중인 국가에서 할 말은 아니다.

없는 것이 없는 완벽한 국가인데도,
가난에 찌든 여성들은 창녀가 되고, 어린 여자애도 곧 창녀가 될 운명이다.
미래까지도 비관적이다. 

여동생은 사랑하는 이와 음악회를 갔는데,
화자는 자신의 잘 풀리지 않는 사랑이라도 있는 듯,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 무서운 상상도 한다.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여성에 대한 분열증적 반응이다.
앞서가는 부츠신은 멋진 여자를 보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어두운 시대지만,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빈다.
향락적인 사회 풍토에 대한 비판이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한 문장에 모순되는 두 가지 주장이 담겼다.

병듦 = 가난 = 아픔 = 괴로움
아프지 않음 = 건강 = 즐거움

이렇게 상반되는 것들이 담겼으니 <역설>이 된다.
이성복의 <그 날>과 기형도의 <안개>에 담긴 세상을 <부조리한 세상>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고귀한 존재지만,
식민지 사회라든지,
인간보다 물질을 앞세우는 자본주의 사회 같은 곳에서는
인간이 돈과 권력 앞에 허리굽히는 일이 많다. 

알베로 까뮈라는 작가는 <이방인>이란 소설에서 식민지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소재로 삼아,
식민지가 인간의 조건을 얼마나 <부조리하게> 만드는지를 고발한다.
정신 이상이 되어 햇빛이 번쩍거리는 것으로 살인을 저지른 주인공 뫼르소는
일반적인 미친놈이 아니다.
그는 분명 미쳤지만, 사회적인 <부조리>가 그를 미치게 했다는 고발인 것이다.
이 시들의 주제 의식과 비슷한 면이 있어 까뮈를 잠깐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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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은입니다 2013-08-04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아버님하고 연배가 비슷하시고 자상하게 시대상황과 선생님의 경험담을 이야기형식으로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여러과목 특히 가끔 역사공부할때 느끼지만 아버지께서 약주를하시며 상기되신 목소리로 들려주던 근현대사의 장면은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가 않더라구요 ^^ 좋은 글 감사합니다!
 

날마다 해가 지면 어두워지고, 해가 뜨면 밝아진다.
해가 뜨기 전의 어둑한 시간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해가 질 무렵의 흐릿한 시간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박남수는 특히 아침의 또렷함을 사랑한 사람이다.
박남수의 시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을 잡아내려한 노력이 돋보인다.
누구나 귀찮다는 듯 게으른 하품을 물고,
아침을 먹고 직장으로 학교로 종종걸음을 치는 시각.
시인은 아침을 관찰한다.
그런 시 '아침 이미지'를 읽어 보렴.

어둠은 새를 낳고, 돌을
낳고, 꽃을 낳는다.
아침이면,
어둠은 온갖 물상(物象)을 돌려주지만
스스로는 땅 위에 굴복(屈服)한다.
무거운 어깨를 털고
물상들은 몸을 움직이어
노동의 시간을 즐기고 있다.
즐거운 지상(地上)의 잔치에
금(金)으로 타는 태양의 즐거운 울림.
아침이면,
세상은 개벽(開闢)을 한다. <아침 이미지>

어두울 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다가,
아침이 되면 새가 보이고, 돌이 보이고, 꽃이 보인다.
그것을 시인의 관찰력은 <어머니인 어둠>으로 읽은 것이다.
그래서 어둠은 새와 돌과 꽃을 낳는다.
표현도 그저 한 줄로 늘어 놓으면 단조로우니,
'돌을 / 낳고'에서, 행을 바꿔버렸다. 
읽는 사람더러 좀 '긴장'하며 읽으라는 '강조'의 표시다.

아침이 오면 '어머니 어둠'은 온갖 물상(사물, 삼라만상 : 세상의 모든 것)을 낳고 나서,
스스로 사라진다. 그걸 굴복한다고 표현했으니 의인화를 심하게 했다. 

아침이 오면 물상들은 멈춰있던 자세에서 '어깨를 털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침이 오는 모습을 움직임을 통하여 독자가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하려 노력한 것이다.
'노동의 시간을 즐기고 있다'는 표현에서
아침은 건강한 생명력으로 삶에 활력을 주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아침이 되어 활기차고 밝게 돌아가는 세상의 모습을 화자는 즐겁게 관찰하고 있다.
마치 잔치라도 벌어진 듯, 세상은 활기차게 돌아가고 있다. 

해님이 방긋 웃으며 떠오르는 모습을 보면,
화자는 즐거워 죽는다.
황금색 태양이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모습은 마치 트라이앵글 소리라도 들리는 듯,
즐거운 울림이 동그라미를 그리며 울러퍼질 듯 청각적 심상을 활용하여 그린다.
공감각적 심상이란 말을 여러 번 썼지?
보이는 태양(시각)을 울리는 소리(청각)로 표현했으니 시각의 청각화~ 되시겠다. 

아침이면 세상이 '개벽'을 한다.
개벽은 '천지 개벽'으로 세상이 처음 열릴 때를 나타낸다.
매일 아침 개벽이 일어나는 건 아니지만,
아침을 경건하게 맞는 화자의 경외감(존경과 두려움)이 잘 드러난 표현이다. 
이 '개벽'이란 시어에 화자의 감동이 <압축, 응축> 되어 있다보 볼 수 있단다.

이 시만큼 '아침의 신비와 활기'를 잘 관찰하여 쓴 시도 찾기 어렵단다.
'밝은 아침을 맞이하는 삼라만상의 생동감'이 오롯이 살아있어서,
독자의 기분마저도 상승시키는 효과를 노리고 있지.
매일 아침, 소가 도살장 끌려가듯 억지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너 잘못살고 있는 거 아니니? 아침이 얼마나 신비로운 건데,
어제 죽어간 사람이 그토록 살고 싶었던 아침이 지금이라고~~!!"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 같기도 해. 

이 시의 특징적 시어는 <어둠>인데,
보통 '어둠'이 부정적 의미로 잘 쓰이잖아.
근데 이 시에서는 어떤 의미로 쓰였다고 했지?
그래. '모태(母胎)의 이미지'란다.
생명을 잉태하고 있는, 그래서 건강한 생명을 탄생하게 하는 잠재력 가득한 어머니의 이미지지. 

다음엔 그의 '종소리'를 읽어 보렴.
이 시에서도 '종소리'가 울려퍼지는 현상을
그 청각적 경험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려고 감각적 언어들을 동원하고 있단다.

나는 떠난다. 청동(靑銅)의 표면에서
일제히 날아가는 진폭(振幅)의 새가 되어
광막한 하나의 울음이 되어
하나의 소리가 되어.

인종(忍從)은 끝이 났는가.
청동의 벽에
'역사'를 가두어 놓은
칠흑의 감방에서.

나는 바람을 타고
들에서는 푸름이 된다.
꽃에서는 웃음이 되고
천상에서는 악기가 된다.

먹구름이 깔리면
하늘의 꼭지에서 터지는
뇌성(雷聲)이 되어
가루 가루 가루의 음향이 된다. (종소리) 

이 시의 화자 '나'는 바로 '종소리'야.
종소리가 의인화된 것이지.
1연에서 '나는 청동으로 된 종의 표면에서 떠난다'고 했으니,
종소리가 마치 나비처럼 종의 표면에 붙어있던 것처럼 보이잖아.
그러다 기둥으로 종을 쿵! 치면 나비처럼 붙어있던 종소리가 비로소 떠난다는 거지. 

햐~ 상상력도 참 특이하지 않니?
세계적으로 한국에 전래된 종은 그 음색이 곱고도 울림이 오래 아름답게 멀리 퍼지기로 유명하단다.
그런 소리를 듣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공명이 일어 이런 시를 쓰고 싶었는지도 몰라.
한국 종은 신라시대로부터 이어지고 있는데, 구성도 독특하고 소리도 아름답대. 

표면에 수백 수천 마리가 떼를 지어 붙어있던 새처럼
일제히 날아가는 모습을 그리는 표현 자체가 장관이구나.
진폭(동그라미처럼 울리는)의 새가 되어 날아가는 종소리는 금세라도 화면에 잡힐 것 같아. 

광막한 울음 소리가 되어 날아가는 종소리.
멀리멀리 전달되는 종소리를 그리고 있는 1연. 

그런데 2연으로 넘어가면서 또다른 이미지를 얻어낸다.
종소리는 <청동의 벽>으로 이뤄진 <칠흑의 감방>에 갇힌 존재로 그려진다.
그 종소리는 울림과 동시에 '인종(참고 따름)'의 시간을 끝낸다.
자유를 구속하는 '역사'적 현실까지도 종소리와 연관지어 그려내고 있다.

3연에서 종소리는 바람을 타고 멀리 멀리 날아간다.
들을 지나 꽃을 만나고 하늘로 오른다.
거기서 푸르름, 웃음, 악기 소리처럼 싱그러운 존재로 마음껏 표현된다.
지난 시간 이야기한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나는 자유다!"를 외치며 하늘 높이, 들판 너머 멀리까지 흘러간다. 

그러다 4연에서 부정적 시어가 등장한다.
2연의 '구속'인 '청동의 벽'과 '칠흑의 감방'에서 벗어나 자유를 구가하지만,
'먹구름' 깔린 시대가 다시 도래할 수도 있다.
그러면, 멀리 나아간 종소리는 하늘 꼭지에서 터지는 뇌성(천둥소리)이 되어
가루 가루 가루의 음향이 되어 온 세상에 울려퍼진다.
이 '가루 가루 가루의 음향'은 곧 '자유의 소리'가 온 세상에 고루 퍼지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소리를 가루가 자욱하게 퍼져나가는 것처럼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니,
이것도 청각의 시각화, 곧 공감각적 이미지를 활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단다.  

이 시의 주제는 '종소리를 통하여 본 자유, 역사의 의미' 정도가 되겠지.
예전엔 이렇게 웅장한 목소리의 시를 '남성적 어조'라고도 했는데,
요즘엔 성차별 용어라고 구박받을 소지가 있어 그런 표현은 쓰지 않는단다. 

그리고 1,2연에서 도치법을 사용하여 긴장감을 자아내고 있는 것도 특징의 하나란다.
박남수의 '종소리'의 소리는 공간적으로 높은 곳까지 '상승'하고, 먼 곳까지 '팽창'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주제는 <해방>이란 이야기는 이미 했다.
아래서 지훈의 '범종'을 읽으면서 '소리의 이동 경로'와 '주제'의 차이를 생각해 보자꾸나.

무르익은 과실이
가지에서 절로 떨어지듯이 종소리는
허공에서 떨어진다. 떨어진 그 자리에서
종소리는 터져서 빛이 되고 향기가 되고
다시 엉기고 맴돌아
귓가에 가슴 속에 메아리치며 종소리는
웅 웅 웅 웅 웅……
삼십삼천(三十三天)을 날아오른다 아득한 것.

종소리 위에 꽃방석을
깔고 앉아 웃음짓는 사람아
죽은 자가 깨어서 말하는 시간
산 자는 죽음의 신비에 젖은
이 텡하니 비인 새벽의
공간을
조용히 흔드는
종소리
너 향기로운
과실이여! <조지훈, 범종(梵鐘)>

조지훈은 범종의 울림을 '향기로운 과실'에 비유하였다.
과실은 '열매'이니, 결실을 맺는 것이고,
과실과 종소리의 공통점은 바로 <정신적 성숙>에서 찾아낸 것이다. 
새벽에 텅빈 공간에서 울려퍼지는 종소리를 들으면서 얻게 되는 정신적 성숙이 <범종>의 주제다. 

이 시에서의 소리는 '응축→하강→확산→상승'의 단계를 거친다고 볼 수 있단다.
'무르익은 과실'처럼 응축하고,
허공에서 떨어지고,
터져서 확산되고 엉기고 맴돌고 메아리치고,
삼십삼천(온 세상)으로 날아오른다. 아득하게. 

꽃방석을 깔고 앉아 웃음짓는 화자는,
종소리를 들으며 정신적으로 고양되는 느낌을 받게 된다는 시다.  

박남수의 시 중에서 더욱 관념적인 시로 여겨지는 시가 바로 '새'다.
송창식이란 가수가 노래로도 불렀던 유명한 시인데, 우선 읽어 보고 이야기하자.

(1)
하늘에 깔아 논
바람의 여울터에서나
속삭이듯 서걱이는
나무의 그늘에서나, 새는 노래한다.
그것이 노래인 줄도 모르면서

새는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두 놈이 부리를
서로의 죽지에 파묻고
따스한 체온(體溫)을 나누어 가진다.

(2)
새는 울어
뜻을 만들지 않고
지어서 교태로
사랑을 가식(假飾)하지 않는다.

(3)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純粹)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傷)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새> 

마치 설명문을 쓰듯, (1)(2)(3) 이런 표현을 썼다.
그 문단 사이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도 있겠다.
우선 (1)문단을 보자. 
바람의 여울터, 나무 그늘에서, 곧 자연 속에서
새는 노래한다. 그것이 노래인 줄도 모르면서.
그것이 '자연'이다. 

동양에서 쓰던 자연은 지금처럼 '명사(원래 있는 존재)'적 의미로 쓰이지 않았단다.
노자의 사상에도 나오는 '무위자연'의 '무위'는 '유위'의 반대야.
'유위'는 인간이 억지로 지어내서 만드는 <인공, 문명>이고,
'무위'는 인간이 건드리지 않아도 이뤄지는 <자연>의 경지지.
곧, '무위'와 '자연'은 비슷한 말을 반복한 거란다.
'자연'은 '인간이 지어내지 않아도 그렇게 돌아가는' 상황을 표현하던 말이야. 

2연에서 새는 또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서로 사랑을 나눈다.
사랑해~ 이런 말은 얼마나 표현의 스펙트럼이 다양하겠니?
새는 그렇게 말로 지어내는 '유위'를 꾸미지 않고도 충분히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야. 

곧,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던 건방진 철학자를 내세우지 않더라도,
인간이 새와 비슷한 '미물'이자 '온전한 소우주'임을 가르치고 있는 시란다. 

(2)문단에서는 '새는 뜻을 만들지 않고, 억지로 사랑을 꾸미지 않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1문단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여기는 근대 정신에 일침을 가하는 것 같아.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니 '호모 루덴스'니 해서 지혜가 있다는 둥, 도구를 쓴다는 둥,
자기 종족이 자연 일반에 대하여 우월함을 내세우고 있잖아.
그렇지만, 새는 인간처럼 굳이 뜻을 만들어 말하지 않는대.
'무위 자연'의 실천이겠지. 

인간이 '유위'로써 지어낸 것이 뭘까?
지식을 쌓으려고 책을 만들고, 상대를 정복하려 전쟁을 만들었어.
전쟁에 유리하도록 화약을 만들고 총포를 만들어서 상대를 굴복시키려 하지.
그래서 '노자'라는 책에서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의 참상을 겪고 나서 딱, 이렇게 이야기했어.
'자연'은 만물의 어머니다. 지혜로운 존재다. 자연은 인간처럼 <다투지 않는다>.
인간들아, 제발, <다투지 말라 不爭>, please~~~. 

(3)문단은 조금 까다롭지만,
유사한 시들을 이미 다뤘으니 간단하게 살펴 보자꾸나.
김춘수의 '꽃을 위한 서시'나 신동집의 '오렌지'를 공부한 적 있잖아.
존재의 본질을 아는 것은 어렵다.
알려고 마음먹으면 그 순간 존재의 본질은 더 파악하기 어렵게 된다. 이런 것.  

포수는 '인간'이고, '유위'를 뜻해.
뭔가를 하려고 하는, 업적을 쌓으려고 하는 존재. 자연을 이기려는 존재.
그래서 포수는 '자연-새-순수'를 잡으려고 총(한덩이 납 탄환)을 쏜단다.
그렇지만, 포수가 매번 쏘아 맞히는 것은 '자연-새-순수'가 아니야.
피에 젖은 한 마리 상한 새는 포수가 이루려던 '유위'의 목적이 아니지.
결국 포수의 의도는 보기좋게 빗나가고 만단다. 

지금 대통령하는 이가 돈을 좀 긁어 모으려고 4대강 사업을 벌이고 있어.
온 강에 포크레인과 트럭을 동원해서 무슨 공사를 하는데,
결국 강물은 더 질이 나빠지고 그 피해는 후손들이 입게 될 거야.
목적이 돈이 아니라 정말 강물이 걱정되는 거라면, 그렇게 부랴부랴 공사할 이유가 없거든.
척 하면 삼천리요, 툭 하면 호박 떨어지는 소리라고,
정치가들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지. 

그처럼, 인간이 하는 일은
아무리 의도가 좋다고 하더라도,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단다.
해운대나 광안리 백사장은 원래 모래밭이 꽤나 넓었단다.
그런데 사람들이 신발에 모래들어가는 걸 싫어해서 둑을 쌓고 시멘트로 포장을 해서 길을 냈어.
그리고 나서부터는 파도에 모래가 쓸려내려가고 말았단다.
해마다 모래밭의 폭은 좁아지게 되어서,
결국 매년 해수욕장 개장 전에는 비싼 모래를 사다가 퍼부어야 하지.
그럼 뭐해. 바다는 다시 모래를 쓸어내리는 걸. 

이 시는 '성북동 비둘기'처럼 '문명 비판적' 시선을 느끼게 하는 시란다.
'인간 문명'은 '자연의 순수성을 파괴'하는 것임을 '피묻은 새'로 섬뜩하게 그리고 있지.
자연은 그대로 두면 (1)과 (2)부분에서처럼,
아름답게 조화를 잘 이루고 있는 것이거든. 

인간이 자연을 개발해서 이익을 얻으려는 시선은 언제나 단기적 이익을 위한 거야.
장기적으로는 개발이 손해가 되기 십상인 거지.
그런 것을 에둘러 표현하는 시가 이런 것들이다. 

공부나 인생도 그런 것 같아.
단기적인 목적으로 공부하면,
예를 들어 중간고사 범위만 죽으라고 외우고 공부하면 자기한테 오히려 손해가 되는 그런 것.
민우가 살아갈 미래 사회는
기계화, 자동화, 게다가 세계화된 시대란다.
한국인들은 노동할 자리를 기계에 내주고,
임금이 낮은 곳은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내주게 되겠지.
결국 한국인은 관리자가 되든지,
아니면 끊임없이 새로운 직업을 구하러 흘러다니는 존재가 될 것임은 불보듯 뻔한 일이란다. 

공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거야.
세상이 어떻게 흐르는지 아는 것.
그래서 장기적인 안목으로 자신을 준비시키는 것.
어차피 삶은 우물쭈물 하다가는 큰일납니다~ 이런 거니깐.
한 가지 직업이나 한 가지 목표만 바라보고 달리다가
경쟁률이 너무 높아 포기하면 삶 자체를 포기할 수도 있게 된단다. 

부디 스스로에게 관심을 가지고,
넓게 보고 많이 읽고 여러 가지 직업에 관심을 두기 바란다.
그리고, 늘 미리미리 준비하는 사람이 되길 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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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젠 좀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시, 김춘수의 '나의 하나님'을 풀어 보았다.
시를 쓸 때 반드시 필요한 비유의 상황이
그 거리가 가까울 때는 이해가 쉽지만,
관계의 거리가 멀 때... 상상력을 집어 넣어야 한다고 했지. 

오늘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경지.
죽음을 미리 상상하면서 자기 생을 돌아보고는 한 마디로 자신의 <묘비명>을 적는다면
과연 어떤 말을 적는 것이 자기 앞의 생에게 적절할지 한번 생각해 보자. 

그리스 작가로서 '자유인'을 외친 작가가 있다.
그의 유명한 소설로 '그리스인 조르바'가 있는데 나중에 한번 읽어 보렴.
조르바는 아주 터프한 남자로 뱃사람인데 아무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를 꿈꾼다.
작가 카잔차키스는,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이런 묘비명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황동규 시인이 그의 무덤 앞에서 읊은 시를 한번 읽어 보자.

꽃 속에 꽃을 피운 부겐빌레아들이
성근 바람결에 속 얼굴을 내밀다 말다 한다.
오른 팔을 삐딱하게 치켜든 큰 검은 나무 십자가 뒤에
이름대신 누운 자가 '자유인'이라는 글발이 적힌 비석이 있고
생김새가 다른 열 몇 나라 문자로 제각기 '평화'라고 쓴
조그만 동판(銅版)을 등에 박은 무덤이 앉아 있다.
인간의 평화란 결국 살림새 생김새 다른 사람들이 모여
함께 정성들여 새기는 조그만 판인가?
내려다보이는 항구엔 크기 모양새 다른 배들이
약간은 헝클어진 채 평화롭게 모여 있다.
한눈팔며 떠나가는 배도 두엇 있다.
뒤에서 누군가 속삭인다 나직이,
그래, 자유는 참을 수 없이 삐딱한 거야. <황동규, 카잔차키스의 무덤에서……> 

 

그리스는 사파이어빛 푸른 바다와 함께 하얀 건축물들의 대비로 유명하다.
그 건물들을 <카사 비앙카> 또는 <카사 블랑카>라고 한단다.
'카사'는 '집'이란 뜻이고 '블랑카나 비앙카'는 '하얀~'이란 뜻의 형용사지.
왜 해운대에도 '언덕 위의 하얀 집'같은 카페가 그런 뜻이야.
거기 피는 붉은 꽃이 <부겐빌레아>란 꽃이지.
우리집 화단에서 겨울에도 열심히 피고 지는 꽃이 부겐빌레아란다.
분홍빛 꽃받침이 아름다운 그 꽃. 

이 꽃들을 보면 꽃잎 속에 또 꽃잎이 든 것처럼 보인단다.
사실은 꽃받침이 화사하게 붉은 것인데 말이지. 

황동규 시인은 자유를 꿈꾸던 조르바를 만나기 위해 카잔차키스의 무덤엘 갔나 보다.
그렇지만 그곳엔 '자유'와 '평화'가 새겨진 비석과 동판만이 덩그렇게 놓였을 뿐.
정말 자유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를 시인에게 생각하게 만든다.

항구를 내려다보며 평화로운 바다를 음미하는데,
뒤에서 누군가 속삭인다. 나직하게. 그러나 그 낮은 음성이 가슴을 울리는 느꺼움이 있다.
자유는 참을 수 없이 삐딱한 거야. 

똑바로 줄을 설 자유라든지,
오랜 시간 정해진 자세를 유지할 자유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과학에서 '엔트로피 법칙'이란 것이 있단다.
'열역학 제2 법칙'이라고도 부르는데,
모든 것은 '자유분방한 무질서 쪽으로 운동한다'는 것이 엔트로피 법칙의 개념이란다. 

그렇다면 인간의 속성도 그러한 것일는지...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고 싶지만,
작은 욕심때문에 현실에 얽매여 살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간혹 그 얽매임을 훌훌 털어 버리고 자유인을 지향하기도 한다.
꿈은 꾸지만, 쉽지 않은 꿈이다.
오죽하면, 죽어서 거기 누운,
말로만 자유인과 평화를 노래한 카잔차키스의 무덤 따위까지 가 보았겠는가. 

그렇지만 그의 무덤에 꽃다발 하나 바치는 것도 자유를 향한 작은 몸짓임까지 부정하긴 어렵다.
다음엔 이성부의 '슬픔에게'를 한번 읽어 보자. 

섬 하나가 일어나서
기지개 켜고 하품을 하고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오는 모습을 보느냐.
바다 복판에 스스로 뛰어들어
그리움만 먹고
숨죽이며 살아남던 지난 십여년을,
파도가 삼켜버린 사나운 내 싸움을,
그 깊은 입맞춤으로
다시 맞이하려 하느냐.
그대,
무슨 가슴으로 견디어 온
이 진흙투성이 사내냐 ! <이성부, 슬픔에게> 

화자가 있는 곳은 어딜까
섬이 내려다 보이는 해변이겠지.
거기서 섬을 바라보고 있다. 

제목은 <슬픔에게>이다.
화자는 <슬픔>에게 무슨 말인가를 던지려 한다.
그런데, '슬픔'은 그 말을 들어줄 귀가 없다. 슬픔은 이야기를 들을 대상이 아닌 것이다.
화자가 하는 이야기는 결국 '슬픔'에 대한 이야기이다.
누군가의 슬픈 이야기를 하면서 짐짓 <슬픔에게> 털어놓는 이야기처럼 꾸민 것이다. 

3행까지, 의인법이 제법 멋지게 표현되고 있다.
섬 하나가 일어나고 하품도 기지개도 켜고, 걸어나온다.
그 모습을 보는 것은 화자다. 

그 섬의 내력이 다음 문장에서 진술되고 있다.
<미스터 섬>은 바다 복판에 스스로 뛰어들었다.
그리움을 먹고 숨죽이며 지난 십여 년을 살았다.
파도에 맞서 사나운 싸움을 벌인 십여 년.
이제 다시 새로운 싸움을 앞에 두고 있다. 자못 긴장된다. 

<미스터 섬> 그대는,
온 가슴에 진흙투성이로 남은,
상처투성이 가슴으로 어떻게 견디어 온
힘겨운 투쟁조차도 강인함 하나로 견디어낸, 그런 사내인 것이냐!  

 

한국 현대사에서 이런 단단한 '섬'같은 존재는 여럿 있었다.
그 섬의 상처투성이 가슴이 슬펐던 일도 참 여러 번 있었다.
그렇지만, 이 시를 읽으면 마음에 떠오르는 인물 중에 '고 노무현 대통령'이 있다.
이 시를 읽으면서 그를 떠올리면 가슴 한 구석이 아스라히 쓰라려 온다.
그런 사내의 삶에 대한 화자의 감상이 <슬픔>이기에 <슬픔에게> 편지보내듯 시를 쓴 모양이다. 

이 진흙투성이 사내 대신에
앞서 노래한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그 자유를 갈구하던 사람을 대입해 보아도 멋진 그림이 그려진다.
다음엔 김광규의 '묘비명'을 읽어 보자.
묘비석에 새겨둔 글귀란 뜻이다.

한 줄의 시(詩)는 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한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굳굳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귀중한 사료(史料)가 될 것이니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시인(詩人)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 것이냐 <김광규, 묘비명(墓碑銘)>

이 시를 두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다.
앞부분은 <훌륭한 비석>에 대한 이야기이고,
뒷부분은 <시인의 무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간사를 가장 고귀하게 노래한 시는 커녕,
잡담 같은 소설도 읽은 바 없지만,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이 있었고, 그는 <훌륭한 비석>을 남겼단다.
문학도 몰랐던 속된 사람에게 '훌륭한'을 붙였으니 비꼬는 <반어법>이 되겠다.
겉만 번지르르한 그 비석은 사실 보잘것 없는 '저급한' 비석일 뿐이다.
그렇지만 세상이 추구하는 바는 그렇게 돈과, 명예와, 번지르르한 비석으로 흘러감을 비평한 것이겠다. 

그리고 유명한 문인 하나가 물론 많은 돈을 받고서는
그 번지르르한 무덤의 주인을 위해 '묘비명'을 썼다. 
유명세를 타고 세상에 아첨하여 돈버는 자를 일러 <곡학아세>라 한다. 

돈 많이 받은 문인이 읊은 것은 이러하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 불의 뜨거움 굳굳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 귀중한 사료(史料)가 될 것이니>
그렇지만 화자는 그 묘비에 새긴 것(묘비명)이 못마땅하다.
이 묘비는 오래 <살아남아 귀중한 사료>가 될 가치가 없는 것인데도,
세상은 돈으로 칠갑한 그 묘비를 추구하며 달려간다. 

마지막 부분의 목소리는 화자의 목소리겠다.
역사는 무엇을 기록하고, 시인은 어떤 무덤을 남길 것인가 하고...
역사는 과연 승자의 기록만을 미화할 것인지,
시인의 보잘것 없는 무덤은 퇴색하고 말 것인지... 

지나치게 <물신 숭배>, <세속적 부와 지위 숭상>으로 흘러가는 세태를 비판하고 풍자하는 시를 쓰기위하여,
김광규는 <묘비명>을 이용하여 반어적 표현을 하고 있다. 

유명한 노래로 킹 크림슨(KING CRIMSON)의 묘비명(EPITAPH, 에피타프)이란 곡이 있다. 
그 노래 가사를 한번 음미해 보면 좋겠다.

예언자들이 그들의 예언을 새겨 놓았던 벽에 금이 가고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악기 위에 햇빛은 밝게 빛납니다 

The wall on which the prophets wrote Is cracking at the seams.
Upon the instruments of death The sunlight brightly gleams. 

모든 사람들이 악몽과 꿈으로 분열 될 때
아무도 월계관을 쓰지 못할 것입니다 침묵이 절규를 삼켜버리듯이...

When every man is torn apart With nightmares and with dreams,
Will no one lay the laurel wreath As silence drowns the screams 

금이가고 부수어진 길을 내가 기어갈 때
혼란이 나의 묘비명이 될 것입니다 

Confusion will be my epitaph.As I crawl a cracked and broken path

우리가 모든 것을 할수 있다면 뒤에 앉아서 웃기나 할텐데
울어야 할 내일이 두렵습니다.

If we make it we can all sit back And laugh.
But I fear tomorrow I’ll be crying, Yes I fear tomorrow I’ll be crying.

운명에 철문 사이에 시간의 씨앗은 뿌려졌고
아는 자와 알려진 자들이 물을 주었습니다.

Between the iron gates of fate, The seeds of time were sown,
And watered by the deeds of those Who know and who are known;

아무도 법을 지키지 않을 때 지식이란 죽음과도 같은 것
내가 볼 때 모든 인간의 운명은 바보들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Knowledge is a deadly friend When no one sets the rules.
The fate of all mankind I see Is in the hands of fools.

바보같은 인간들이 권력을 잡고 세계를 뒤흔드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에서,
운명의 씨앗은 이미 뿌려졌고,
비극적인 미래가, 울어야만 할 미래가 두려울 뿐이란 노래지. 

어쩌면 비극적인 가사보다도 더욱 심금을 울리는 음악이 듣는 사람을 전율하게 만든다.
이런 음악을 들을 때,
인생은 짧지만 예술은 길다는 격언이 실감난단다.


 

유명한 묘비명 몇 개 소개하고 오늘은 고만~~ 

    

릴케는 장미 가시에 찔려 패혈증으로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뭐니뭐니 해도 묘비명의 종결자는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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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2-20 23: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관계의 거리가 멀때...상상력을 집어넣어야 한다는 말, 공감합니다.
전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읽으면서 무한한 상상력을 봤어요~^^

글샘 2011-02-21 17:16   좋아요 1 | URL
요즘 저도 이책을 읽고 있습니다.
정조의 문체반정에 대하여 알려진 것도 워낙 얼마 안 되지만요.
세종대왕, 정조의 르네상스... 날조된 느낌이 크죠. 지네 관점에서 보면 그렇단 건데 말입니다.

양철나무꾼님 리뷰에도 무한한 상상력은 가득합니다. ^^
 

요즘 나무들을 보았니?
나무들은 비썩 마른 가지들로만 이뤄진 것 같지만,
전혀 바싹 마르지 않았단다.
나뭇가지들은 탱탱하게 부풀어 오른 '눈'들을 살찌우고 있더구나.
'겨울눈'이라고 이름붙은 것들이 곧 새싹으로 변신하려고
무대 뒤에서 옷을 갈아입고들 있는 풍경이란다. 

독서실 오가는 길에서
고개를 들어 나뭇가지도 한번 쳐다보기 바란다. 
오늘은 아빠가 고등학교 들어가서 배웠던 시 '봄비'를 한번 읽어 보자.
그러면서 '창의적 사고력'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볼게.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香煙)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랭이 타오르것다. (이수복, 봄비)

4연으로 되어있지?
넉 줄로 되어있는 한시를 <절구 絶句>라고 부르는데,
그 각 행을 기, 승, 전, 결구라고 부른단다.
기구는 일어설 起, 곧 상상력을 불러 일으킴을,
승구는 이을 承, 곧 첫번째 기구의 생각을 이어 나감을,
전구는 구를 轉, 좀 어려운데, 이제까지의 생각이나 표현 형식을 그대로 이어나가는 게 아니라,
                      멀리뛰기에서 '구름판'에서 도약하듯, 상상의 양식을 '비틀어 보는' 의미를,
결구는 맺을 結, 당연히 생각이 전개된 것들을 하나로 모아주는 구실을 하는 거야. 

이 시도 기승전결의 4단 구성으로 볼 수 있겠다.
4단 구성은 어쩌면 모든 문학의 '종결자' 노릇을 진작부터 하고 있었을지 몰라.

1연에서 상상력을 불러 온단다.
봄비가 그치면 마음 속에 파릇파릇 새싹이 돋는 게 아니라,
'서러운 풀빛'이 짙어올 거래.
도대체 화자에게 어떤 서러운 일이 있었던 걸까? 

2연에선 그 상상력을 이어서 더 넓게 펼치는 거야.
화자는 서러운데,
보리밭은 푸르게 변해가는 아름다운 세상에서,
종달새는 조잘거리며 생동감 넘치는 세상을 연출하겠지.
화자가 왜 서러운지 더 궁금하게 만드는 것 같지 않니? 

3연에서 생각이 다른 곳으로 흘러 나가는 듯 보이게 할까?
봄비가 그치면 시샘하며 벙글어져 피어날 고운 꽃밭을 배경으로
처녀애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새로이' 선다고 하고 있단다.
꽃이 피면 원래 여학생들은 몇 명씩 모여서 사진을 찍곤 하잖아.
그래서 어머니들 학창시절 사진 보면 꽃밭에 몇 명 모여 찍은 사진들이 다 있단다.
아빠들은 잘 없어. 아빠들은 돌 위에서 폼생폼사하던 사진들이 더 많거든. ㅋ
나는 서러운데, 그 이야기는 어디로 가고,
봄이 되면 꽃밭에 여학생들이 새로이 서서 사진을 찍을 광경을 상상해 본단다.  

여기까지는 상상이 펼쳐지긴 했지만, 도무지 뭔 얘길 하는겨? 이렇게 되고 있는데,
드디어 4연. 종결을 지어야 겠지?
화자가 '서러운 이유'도 등장하고,
꽃밭의 여학생들이 '새로이' 서는 이유도 등장하면서,
마치 폭포가 그 높은 절벽을 주저하지 않고 뚝! 떨어져 내리듯,
급전 낙하하는 연이란다. 

그 여학생들 또래의 임이 죽은 거잖아.
임은 영정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고,
그 사진 뒤에는 화안한 꽃들이 가득 피어 있는데,
현실 속의 임 앞에는
봄이 되면 땅에서 피어오르던 아지랭이처럼,
향 연기만 가득 피어오를 뿐이니... 
생각이 갑자기 아득해지면서 먹먹해지는 느낌이야.  

1연에서 등장한 '마음 속 강나루의 서러운 풀빛'은
고려때, 시를 가장 잘 써서 김부식의 질투를 받아 죽게 되었다던 정지상의 시,
송인(임을 보내며)에서 등장하는 구절이란다.
사물에 화자의 감정을 <이입>한 구절로 유명하지.
정지상의 '송인'도 한번 감상해 보자.

雨歇長堤草色多(우헐장제초색다)
送君南浦動悲歌(송군남포동비가)
大同江水何時盡(대동강수하시진)
別淚年年添綠波(별루년년첨록파) <정지상(鄭知常), 송인(送人)>

비 갠 긴 언덕 풀빛 푸른데,
그대를 남포에서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르네.
대동강 물은 그 언제 다할 것인가,
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더하는 것을. <이규보의 파한집(破閑集) 수록>

이 시의 기구(제1행)에서 '봄비'의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의 서러운 풀빛'을 가져온 거야.
대동강 가의 가장 큰 도시가 '평양'이고 좀더 하류로 내려가면 '남포'란다.
임을 보내는데 왜 이렇게 펑펑 눈물이 날까?
속된 말로 하면 '뻥'이 좀 심하잖아.
대동강물은 '해마다 이별의 눈물이 더해져서' 영원히 마르지 않을 거라고 하니 말이야. 

인도에 가면 '갠지즈 강'을 '강가'라고 부르면서 인간의 고향, 어머니처럼 여긴대.
거기에 가면 좀 깨끗지 않은 물인데도 사람들은 성스러운 강물에 몸을 담그고 정화한다는구나.
그런데, 그 옆에서는 나무토막을 쌓아 놓고 시신을 태우기도 한대.
돈이 없어 장작이 부족하면 시신이 다 못타고 남는데, 그걸 짐승이 물고 가기도 한다더구만.
지금은 강물에 유골을 뿌리는 것을 '수질오염'을 우려하여 금지하고 있다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신은 화장해서 강에 뿌리는 것이 일상적이었단다. 

고려 시대는 불교가 왕성하던 시대였어.
불교에서는 고승들도 죽으면 화장해서 들판이나 강가에 뿌리곤 했겠지.
대동강 가에서 '영원한 이별'을 한 사람들의 눈물은 얼마나 슬픈 그것이었을까. 

이수복의 '봄비'의 이별처럼,
정지상의 '송인'의 이별 역시 '사별'이라고 아빠는 생각한단다.
인간들의 '이별'은 시간이 지나면 생각이 옅어지는 것이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금세 잊기도 하는 거거든.
김소월의 '진달래 꽃'의 이별도 '사별'일 거라고 쓴 적 있지?
헤어지는 사람에게 꽃을 뿌리고는 밟고 가라는 상황은...
글쎄, 사별의 경우에나 시적으로 어울리는 거란 말이지.

정지상의 '송인'의 이별부터 김소월의 '진달래꽃'의 이별을 계승한 시인으로,
섬세한 한국적인 정감을 '한(恨)의 미학'으로 승화시킨 시인으로 이수복을 평가하기도 한단다. 

어제 '상상력'을 이야기하면서
관계적 거리가 '먼 것'을 연결하는 것이 '창의적 상상력'이라고 했던 기억 나니?
오늘은 어쩌면 한국 시 역사상 가장 '이질적인 것 - 그러니깐 둘 사이의 질적 차이가 큰 것'을
바로 은유법으로 가져다 붙인, 그런 시를 한편 읽어 보자.
우선, 김춘수의 '나의 하나님'을 읽고 이야기 나눠 보자꾸나.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悲哀)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詩人)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女子)의 마음 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여리디 여린
순결(純潔)이다. 
삼월(三月)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두빛 바람이다. < 김춘수, 나의 하나님>

어떤 느낌이야?
혹시 교회다니는 친구라면,
이 페이지를 확 찢어버리고 싶을지도 모를 일 아닐까?
일반적인 경배의 대상으로서의 '하느님'이 아닌,
유일신으로서 절대자인 '하나님'이라고 불렀으니 기독교의 하나님인 것은 틀림이 없는데 말이지. 

이 시를 이해하는 일은 가능하지도 않고,
이 시를 이해하려는 일도 의미가 없는 시란다.
전에 '꽃을 위한 서시'에서 '본질이나 의미 탐구는 어렵거나 불가능하다'는 이야길 한 적 있지?
우리는 겉보기(현상)만을 할 수 있을 뿐이지,
현상의 본질의 의미를 안다는 일은 불가능하고 무의미하다는 시였단다. 

그렇지만 시를 감상한다는 것은 나름대로 '창의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일이니...
우선 이 시의 첫 구절.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을 생각해 보자.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 사람이
신도들이 열렬히 믿고 따르면서 인생의 기둥으로 삼고 있는 '하나님'에 대하여
이러니 저러니 하는 것은 신성 모독일 수 있겠지.
그렇지만, 화자는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신도요, 제자임을 분명히 밝히고 시작하는구나.
그러려고,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을 맨 앞에 얹었겠지?  

세 가지의 은유를 늘어 두고,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이라고 다시 한번 강조한 것도 화자는 독실한 신자임을 강조하는 의미라고 볼 수 있겠다.
결코 나의 이 표현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 아니다!'라고나 할까?

그 다음은 'A는 B다'와 같은 '은유'가 주주룩 나열되어 있다.
그걸 우선 도표로 그려 보자. 

하느님 당신은
= 늙은 비애(悲哀)
=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
= 시인(詩人) 릴케가 만난 / 슬라브 여자(女子)의 마음 속에 갈앉은 / 놋쇠 항아리
= 대낮에도 옷을 벗는 여리디 여린 / 순결(純潔)
= 삼월(三月)에 /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 연두빛 바람

이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설명할 수 없단다.
도저히 말로는 통하지 않는 지경이 있단다. 

부처님이 제자들을 모아 두고는 연꽃을 한 송이 손으로 들어 올렸다.
아무 말도 없이.
그러자 제자들은 멀뚱멀뚱 쳐다보기도 하고,
서로 마주보며 의아해하기도 했지.
그러던 중, 부처님의 제자 종결자인 '가섭'이 빙긋이 웃었다고 한다.
바로 '염화미소'라는 것이다.
말이 없이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것이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되는 '이심전심'의 지경이고,
언어가 없어도 소통이 가능했던 '불립문자'의 수준이었지. 

이 시가 이뤄지게 된 배경을 먼젓번 '승무'의 스토리처럼 상상해 보는 일이
어쩌면 염화미소, 불립문자의 가르침을 얻어듣는 길이 될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1974년 3월 27일 수요일 날씨 : 흐리고 꽃샘추위로 바람이 맵찬 날

나는 밤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학기 초라, 새로운 학생들을 받아서 가르치느라 매일이 고단합니다.
3월은 '프레시'한 신입생들이 들어와서 학교가 어수선합니다.
새싹은 언제나 그렇게 제맘대로인 것 같다는 생각을 시로 쓰려고 하고 있습니다. 

수요엘에는 대학 강의까지 저녁 시간에 겹쳐 몹시 피곤하였던 모양으로,
발바닥이 성냥의 황덩어리라도 된 듯, 불이 일 것처럼 화끈거립니다.

공자님은 주역을 가죽 끈이 세 번 떨어져 다시 묶어가며 읽으셨다지만,
내가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며 읽고 있는 '릴케'의 시집은 다행히 떨어지지 않습니다.
릴케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릴케의 마음 속을 가득히 채우고 있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그리고 그의 끊어지지 않는 기도에 대하여 마음 속 가득히 감동을 느끼게 되는 이유로,
나는 릴케의 시집을 읽고 또 읽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내 마음에 오셨다 갔는지도 모르는 뒤숭한 인간이지만,
릴케의 시에서는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집니다.
사물 안에서 정확하고도 치밀하게 팽창하는 하나님의 존재가
익어가는 열매 속에서나
여물어가는 곡식 속에서 탄탄하게 보이거든요. 

잠시 쉬어가려 공원 구석 나의 낡은 벤치를 찾아갑니다.
그 벤치 옆엔 가로등이 있어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지만,
의외로 연인들은 가로등 저편에서 속삭이길 좋아하지요.
아뿔싸! 나의 낡은 벤치는,
내가 사랑하는 나의 벤치는,
어떤 늙은이가 가마니때기를 하나 덮고 이미 점령했습니다.  

목사님이 설교하실 때 들려주신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이를 당신으로 여기라고 하셨다던 말씀입니다.
저 벤치에,
자기 키보다도 짧은 벤치에,
자기 키보다도 훨씬 짧은 가마니를 덮은 늙은 거지에게도 예수님이 내려오신 걸까요?
아, 하나님. 당신은 <늙은 거지의 슬픔>과 함께 하여 주실 건가요? 

안식의 장소인 벤치를 도난당한 듯 빼앗긴 마음은 더 허전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마니 덮은 거지 노인 위에서
예수님, 당신을 만난 이후로 내 발은 화끈 거리지 않았습니다.
내 마음 속에 가득하셨던 당신은,
내 눈을 가로등 아래 활짝 팔을 펼치고 만세를 부르고 섰던
느릅나무 잎새를 우러러보게 하셨습니다.

늘 가로등 밑 벤치에서 릴케의 작은 글자들을 쓰다듬던 제가 안쓰러우셨던 걸까요?
그 가로등 아래 아직도 검은 빛의 느릅나무 그 속에서 당신은 웃고 계셨더랬어요.
아, 하나님, 당신은 <삼월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둣빛 바람>으로
어두운 제 눈을 화안한 신록으로 개안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공원을 거쳐 돌아오는 늦은 밤.
구멍가게에서 환희 담배를 한 갑 사서 돌아설 때,
가게들은 문을 닫고 있는데,
내 셋방의 건너편 정육점엔 아직도 벌건 형광등을 켜놓고 있습니다.
아, 거기에는
그 벌건 형광등 불빛 아래에는
내 새끼손가락보다 굵직해 보이는 쇠꼬챙이에 꿰인 커다란 살점들이
굳어져서 덜렁거리지도 않고 매달려 있더군요. 

인간들이 제 배를 불리겠다고,
동물의 시신을 오래오래 보관했다가 먹어 보겠다고,
냉장고 안에 넣어둔 차가운 살점 위로 비치는 붉은 빛의 형광등은,
당신의 존재를 날마다 일깨워주는 교회 첨탑의 붉은 십자가의 불빛 그것이었습니다.
날마다 동물의 비린내를 떠올리던 그 붉은 형광등 조명을 불쾌해 하던 난,
십자가의 붉은 빛이 내 동공을 지나면서 경건함을 불러 일으키듯,
인간 욕망의 제물이 된 돼지의 넓적 다리를 위하여,
또는 소의 심장 옆 갈빗살이나 자유롭던 꼬리를 위하여,
하나님, 당신께서 거기 함께 하고 계셨음을 이제야 보았습니다. 

어젯밤의 내 발걸음과
오늘밤의 내 발걸음은 똑같은 길을 따라 지나온 것이었는데도,
어젯밤에 앉았던 공원 벤치와, 릴케의 시와, 정육점의 붉은 빛 속에선 당신을 만나지 못했지만,
오늘밤 빼앗긴 나의 벤치 덕분에,
<늙은 비애> 위로,
그 벤치를 이불처럼 덮고 있던 <신록의 느릅나무 새싹> 사이로,
정육점 붉은 빛에 얼어 붙은 <커다란 살점>그 빛으로 당신은 제게 오셨습니다. 

아니, 당신은 날마다 제게 오신 것이지만,
그래서 저를 일깨우고 가르치고 옳은 인간으로 살도록 이끌어 주려 하셨지만,
학생들이 우러러보는 실력파 교사로,
대학 강단에까지 선다는 우월감으로,
시인 릴케를 사랑하는 시인이라는 잘나빠진 욕심으로,
당신의 사랑을 외면했던 저를 발견하였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하나님,
진정으로 저의 발걸음을 따라서 하나 하나 제 발자국을 따라서
어디에나 함께 임해주셨던 당신의 진심을,
인간의 죄를 대속하려 모든 고통을 짊어지신 예수님 덕택으로, 
죄 사함을 받았지만 당신을 믿지 못했던 저 자신을 그래도 사랑으로 늘 안고 오셨던 당신의 진심을,
이제 십분의 일, 백분의 일이나마 느낄 수 있습니다. 

시인 릴케가 그토록 사랑하였던 러시아 여인 루 살로메를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릴케가 모든 사랑을 바쳤으나 결국 완전한 사랑을 위하여 이별을 택한 슬라브 여인을...
릴케가 결코 도달할 수 없었던 '놋쇠 항아리'같은 슬라브 여인 루 살로메를 말입니다

나는 당신이 되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이 알지 못하는 어떤 꿈도 꾸고 싶지 않으며,
당신이 동의하시지 않는 어떤 소망도 바라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을 영광되게 하지 않는 어떤 행위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나의 심장은 마리아 상 앞의 한 램프처럼,
아름다운 당신 앞에서 불타고 있습니다. <릴케, ‘루 살로메에게 보낸 편지’ 중>

아아, 하나님.
제가 그렇게도 완벽한 추구의 대상으로 삼는 시인 릴케의 심장을 사로잡아버린 이 여인,
루 살로메에게 바치는 릴케의 이 노래는,
어쩌면 하나님 당신께 바치는 릴케의 사랑과 존경의 표현은 아니었을는지요.
그리고 릴케가 결코 얻을 수 없을 거라고 비탄에 빠져 노래부른,
루 살로메의 마음 속에 가라앉은 <놋쇠 항아리>에는,
닦고 닦노라면 윤기가 반들거리는 놋쇠 그 안에 당신이 계셨던 것이 아니었을는지요. 

꽃샘추위의 바람이 길거리를 쓰다듬고 다니는 깊은 밤입니다.
하느님, 제 차가운 잠자리 곁에서도 함께 하심을 알게 해주신 오늘 밤.
제 기도는 오로지 당신을 위한 감사 뿐입니다. 
당신께 드리는 영광 뿐입니다.  

다음날.  날씨 : 오전에 봄비가 내리고 기온이 많이 올라 포근하게 느껴지는 날 

어제 늦게까지 찬바람을 쐰 탓인지, 삼월의 격무 탓인지,
침을 삼키기 힘든 통증에 깨어 새벽을 지냈습니다.
약국이 문을 열기를 기다려 진통제를 사고, 학교에는 하루 결근을 통보하였습니다.
약이 강했는지, 내가 약했는지,
하나님, 당신의 손길 덕분이었는지, 참으로 단잠을 푹 잤습니다. 

꿈 속에서 루 살로메가 릴케의 사랑을 받아들여 환하게 웃는 즐거움도 맛보았답니다.
슬라브 여인의 놋쇠 항아리는 릴케를 고통스럽게 하지 않고,
윤기가 반들거리며 즐거운 노래라도 부르는 듯 분위기를 돋우고 있었지요. 

좀 원기가 돋았지만, 담배 연기는 삼킬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마당에선 주인집 아주머니가 풀린 날씨를 기념하여 송희 목욕을 시키나 봅니다.
송희는 이제 여섯살 난 아가씬데 나랑도 제법 친합니다.
샌샌님~ 하면서 제법 따라붙으면 뽀빠이라도 하나 얻어 걸린다는 재미를 느꼈나 보지요. 

봄비가 살푼 내린 대기는 세상을 더 윤기나게 합니다.
장독대 위에 조금 고인 연못에서도,
부불어 오른 처녀 가슴 같은 목련 나무 꽃봉오리에서도,
하나님, 당신은 반짝이는 웃음으로 세상을 가득 환하게 하십니다. 

송희 년은 물이 뜨겁다는 둥 온갖 소리를 재잘대면서,
목욕통 안에서 떠들어 대고 있나 봅니다.
미닫이 문을 열고 잠시 내어다 보니,
아, 하나님.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목욕통 위로
우리 귀연 송희가 하마나 찬바람에 다칠세라...
화안한 햇살을 가득가득 머금고,
대낮에도 옷을 홀라당 벗고도 너무도 즐거운
뽀얀 속살마다 여리디 여린 순결
함으로 가득찬 송희의 온몸 위로
당신은 가득 뿜어져 내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릴케를 읽으면서도 날마다 그의 고독을,
예술가의 외로움이 뿜어내는 표독스런 언어의 표창들을,
저는 마치 하나님의 은총인 양 자랑하곤 했던 지난 날들을 돌아봅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어젯밤과 오늘 아침 사이에 제게 내려 앉으셨던 그 모든 순간을
제가 감히 시로 쓸 수 있을까요? 
제 연필의 흑심 위로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의 손을 함께 얹어 주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나의 하나님 

                                김춘수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悲哀)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詩人)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女子)의 마음 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여리디 여린
순결(純潔)이다. 
삼월(三月)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두빛 바람이다. 

이렇게 해서 탄생된 시가 김춘수의 <나의 하나님>이라고 상상한다면 어떨까?
각자가 만들어낼 수 있는 <나의 하나님> 스토리는 다양하겠지.
그렇지만, 창의적 상상력이란 이렇게 머~얼~~~리 떨어진 것들을,
그 거리를 뛰어넘는 <관계 부여>에 성공하는 일임을 잊지 말기 바란다. 

수학 시간에 배웠던 '뫼비우스의 띠'의 원리를
소설에 넣어 봤던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나,
어느 이동통신 회사의 로고처럼 말이다.  

아빠가 상상하려고 했지만,
저 날짜의 요일이 뭔지는 과학적으로 규명해야 하겠기에
인터넷에서 '요일 찾기'를 검색해서 알아본 거란다.
이렇게 세상은 상상만으론 안 되는 거고,
연구해야 할 것도 많다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지.^^

▶ 1974년 3월 27일의 요일을 알아보게된 원리... 


 

1. 1974년의 뒷부분 2자리 '74'를 취한다. 
2. 74를 4로 나누어 몫인 '18'만 취하고 나머지는 버린다.
3. 월건수표에서 3월의 월건수 '4'를 취한다.
4. 날 수가 27일이므로 '27'을 취한다.
5. 앞의 네 수를 모두 더하면 '74+18+4+27=123'인데 이 수를 7로 나누어 몫(17)은 버리고 나머지 '4'를 취한다.
                                         (만약, 나머지가 0이면 7을 취한다.)
6. 세기수표에서 1974년은 '0'이다. 이 수를 5.에서 구한 나머지 '4'와 더하여 '4'를 얻는다. 
7. 요일수표에서 4에 해당하는 요일은 <수요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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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나온반달 2011-02-19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저 위의 글이 글샘님만의 <나의 하나님>이란 말이지요?
늘 감탄하지만 또 한번 더 감탄!

봄은 아직이지만 겨울 기운도 스러진 요즘같은 환절기...건강하셔요.

글샘 2011-02-19 17:22   좋아요 0 | URL
도무지 가르칠 수가 없을 때, 제가 쓰는 방법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