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봄은 3.1절로부터 온다.
새 학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일본의 4월은 한국의 3월과 같은 느낌이랄까? 4월이 개학이거든.
<4월 이야기>란 영화가 일본에선 가능하지만 한국에선 <3월 이야기>가 좋겠지?
새 학년, 새 학교의 설렘과 기대감...
3월이 되면 비로소 한 살 먹는 느낌이야.
아빠는 아직도 학교에서 생활하고 있으니 그런 느낌이 여전하단다.
1월 1일이나 설날보다 더 느낌이 강하지.
오늘은 나이 이야기를 해볼까 해.
시도 그런 것을 몇 개 골라 보고.
<논어>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와.
15세에 지우학(학문에 뜻을 두고)
30세면 립(몸을 세워 널리 알리고, 입신양명)
40세면 불혹(세상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50세면 지천명(하늘의 명을 알아 따르고)
60세면 이순(귀가 운명의 가르침에 순해지고)
70세면 종심소욕불유구(마음이 하자는대로 해도 기준에 어긋나지 않는다)라고...
여기서 15세는 지학, 30은 이립, 40은 불혹, 50은 지천명(또는 지명), 60은 이순, 70은 종심...이란 말이 나왔지.
간혹 20의 나이를 <약관>이라고 하는데, 그건 예전에 나이 20이면 <관례>를 치뤄줘서 생긴 말이야.
관례는 요즘으로 치면 성인식이 되겠지? 약관이 지나면 어른 취급한다... 이런 거지.
70은 두보의 시에 '인생칠십고래희'라고 해서 '사람의 일흔은 예로부터 드물게 온다'는 구절이 있어 <고희>라고도 해.
그 외에도 10을 나타내는 '순'을 넣어서 70은 '칠순', 80은 '팔순', 90은 '구순'이 되고,
77세는 한자 七十七을 세로로 쓰면 기쁠 희(喜)와 비슷해 보여서 '희수'라고 하고,
80세는 한자 八十을 세로로 쓴 우산 산(傘)자와 비슷하다고 '산수'라고 하고,
88세는 한자 八十八을 세로로 쓰면 쌀 미(米)자가 된다고 '미수'라고 하고,
90세는 한자 九十을 세로로 써 죽을 졸(卒)의 약자가 되어 '졸수'라고 하기도 해.
99세는 한자 일백 백 百에서 한 일 一을 뺀 흰 백 白 자를 넣어서 '백수'라고도 부른단다.
81세는 90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나이라고 해서 <망구>... 할망구가 여기서 나온 말이야.
91세는 당연히 <망백>이 되고, 71세는 또 <망팔>이 되겠지.
이런 복잡한 나이 계산에 덩달아서 요즘 농담처럼 <지공>이란 나이가 생겼단다.
65세가 지공...이래. <지하철 공짜>의 준말이란다. ㅋㅋ
우선 강윤후의 <불혹(不惑), 혹은 부록(附錄)>을 한번 읽어 보자.
마흔 살을 불혹이라던가
내게는 그 불혹이 자꾸
부록으로 들린다 어쩌면 나는
마흔 살 너머로 이어진 세월을
본책에 덧붙는 부록 정도로
여기는지 모른다
삶의 목차는 이미 끝났는데
부록처럼 남은 세월이 있어
덤으로 사는 기분이다
봄이 온다
권말부록이든 별책부록이든
목련꽃 근처에서 괜히
머뭇대는 바람처럼
마음이 혹할 일 좀
있어야겠다 <강윤후, 불혹(不惑), 혹은 부록(附錄)>
앞에서 마흔이 '불혹(삿된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줏대가 잡힌 나이)'이라고 했잖아.
그런데, 화자는 그것을 '부록'과 유사하게 듣는다.
언어 유희가 되겠지? 발음은 같잖아.
그러면서,
화자에게 불혹 이후의 세월은
본책에 덧붙는 <부록>같다는 생각이 든대.
<부록>은 왠지 별 내용이 없을 것 같기도 하고,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책이기도 하고,
본책에 끼워 넣어 주는 써비스 제품이기도 하고,
덤으로 더 주는 그런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잖아.
<목차>는 글의 차례란 이야기야.
본문의 삶의 순서는 모두 끝났는데, 마흔 이후는 부록처럼 다가온다.
이런 화자의 의식 속에는
마흔이 되어 보니 삶에서 중요한 것들은 모두 결정이 되어 버려서
그날이 그날처럼 익숙하게 살아지더라는 이야기가 담겨 있는 거겠지.
그래서 마지막엔 <목련꽃 근처에서 머뭇대는 바람처럼> 자신도
뭔가 새로운 것에 <매혹> 당하고 싶다는 희망을 드러내고 있단다.
삶에서 <봄>은 청춘이라 부르는데,
이 <봄>에는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에 <매혹> 당하고,
평생 하고 싶은 일에 <매혹> 당하고,
함께 인생을 나누고 싶은 이성에게 <매혹> 당하는 시기란다.
그런데, 마흔 살이 넘고 나면 이제 매혹의 시절은 지나가는 거야.
그래서 화자는 삶에 의욕이 없고 좀 지쳐 보이는구나.
오죽하면 자기 남은 삶이 본문이 끝난 다음의 '부록'처럼 여겨진다는 거겠니?
그렇지만 화자를 피시방 죽돌이 취급해선 안 될 거야.
왜냐면, 화자는 '매혹'에 대한 의지가 아직 강하거든.
뭔가 새로운 일을 맞아서 치열하게 자신을 단련하는 삶을 바라고 있는 거란다.
강렬한 매혹의 힘에 압도되어 그 분야에 자신을 몰입하고 싶다는 의지가 마지막 부분에서 드러나고 있지.
마음이 혹할 일 좀 있어야 겠다... 면서 말이야.
이 시의 주제는 <마흔 살에 만난 새로운 분야에 대한 관심 또는 의지> 같은 것이 되겠지.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민우에겐 서른 너머 마흔 너머까지 읽기는 쉽지 않을 거야.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계기가 자신의 삶을 더 치열하게 만드는 일이 될 수도 있단다.
그것이 문학의 힘이기도 해.
다음엔 구광본의 <서른 해>를 보자.
처음부터 그대를 알아본 것은 아닙니다
처음부터 그대를 사랑한 것은 아닙니다
물 빠진 뻘밭에서 갯흙을 일으키며 헤매던 지난 여름
무언가가 기어간 흔적에 한나절 따라가다 가뭇없이 눈
들자 바다 너머 하늘에 가 닿아 있던 온몸으로 간 흔적,
그 한 평생의 궤적
문신처럼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대여, 더 멀리 떠나가세요
아득할수록 깊게 꽃 핍니다
서른 해 이끌고 온 지친 몸 남루한 한낮
그대를 다시 찾아갑니다
한 눈에 알아보았다는 사람들을 믿지 않습니다
한 눈에 사랑하였다는 사람들을 믿지 않습니다<구광본, 서른 해>
이 시는 처음 연과 마지막 연을 나란히 두고 보면 주제가 떠오른단다. 한번 해볼까?
처음부터 그대를 알아본 것은 아닙니다
처음부터 그대를 사랑한 것은 아닙니다 ......
한 눈에 알아보았다는 사람들을 믿지 않습니다
한 눈에 사랑하였다는 사람들을 믿지 않습니다
화자는 '한 눈에 알아보고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어.
첫눈에 반하는 사랑도 물론 있지만, 그것은 감정에 치우친 사랑이기 쉽지.
누구나 어떤 매력인가는 가지고 있단다.
그런데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매력을 가진 이성에게 끌리기 쉽대.
그러면 첫눈에 반하게 되지.
그렇지만 오래오래 같은 일을 하면서 친해지게 된 사람들은,
성격이 비슷하고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끼리 친해지게 되거든.
화자는 자신의 사랑이 그렇다는 이야기야. 오랜 세월을 두고 친숙해진 사랑.
그런데, 2연과 3연에서 <지난 여름>의 궤적(지나간 흔적)이
<문신처럼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은 이별을 이야기하고 있단다.
지난 여름 화자와 연인은 서해안의 바닷가엘 갔겠지.
(서해안은 경사가 완만하고 조수간만의 차가 커서 갯벌이 넓게 형성되었거든.)
이제 이별을 겪고 다시 그 바닷가엘 갔나 봐.
그래서 지난 여름 무엇인가가 기어갔던 흔적을 한나절 생각했나봐.
그러다가,
가뭇없이(보이던 것이 사라져 찾을 일이 감감함) 눈을 들어.
그런데, 눈을 드는 순간 뭔가 큰 변화가 생기는 거야.
마음 속에 변화가 일어나지.
그걸 시에서 강조하며 표현하기 위해 행을 바꿨어.
눈
들자
이렇게 말이지.
이제 하늘에 아스라하게 보일락말락하는 건
화자와 연인이 살아왔던 <온몸으로 간 흔적, 한 평생의 궤적>이래.
그 연인과 함께했던 삶의 기억이 문신처럼 지워지지 않는단다.
그렇다면, 화자와 연인은 단순한 이별인 걸까?
그럼 지금 당장 달려가면 될 거잖아.
연인에게 달려가서 '난 당신 없인 못 살 거 같아.' 이러고 고백하면 되잖아.
그러면 드라마처럼 해피엔딩도 기대할 수 있을 거잖아.
그렇지만 화자는 <그대여, 더 멀리 떠나가세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득할수록 깊게 꽃 피>기를 기다리면서 말이야.
이별이 멀수록 꽃이 잘 핀다고 했으니 역설적 표현이지?
아마도, 화자와 연인은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거리에 놓인 것 같아.
사별하였거나, 또는 연인이 화자의 손에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존재이거나.
서른 살이 된 화자.
몸은 지치고, 모습은 남루(누더기)하단다.
그런데, 화자의 마음은 거기서 스톱! 하는 게 아니야.
그대를 다시 찾아간대.
아,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좀 짠해지지 않니?
남의 이야기지만, '나만 아니면 돼~' 이런 건 아니잖아.
남들이라도 좀 잘 됐으면 좋겠고, 행복했으면 좋은 거잖아.
화자는 첫눈에 반한 것도 아닌데,
오랜 기간동안 당신의 매력에 빠졌는데,
이제 함께할 수 없는 현실에 좌절하다가,
이제 다시 당신을 생각하고 있지.
그대가 더 멀리 떠나가도, 그대를 다시 찾아갈 거라는 의지가 있지만,
사실은 거리감이 너무 멀구나. 마음이 아프게도 말이야.
어쩌면, 이런 시는 사별한 임의 무덤 앞에서 읊조리면 어울리는 시가 아니겠니?
이어서 마흔 살에 대한 시들을 몇 편 보자꾸나. ^^
시인들이 서른 살엔 자신을 돌아볼 시를 별로 쓰지 못하나봐.
유독 마흔 살에 대한 시가 많은 걸 보면 말이야.
그렇지만 오십에 대한 시도 적은 걸 보면... 그건 너무 늙었나?
마흔 살이 '삶을 돌아보기'도 좋고 적당하게 피곤한 나이인가봐.
사십대 문턱에 들어서면
바라볼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기다릴 인연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안다
아니, 와 있는 인연들을 조심스레 접어 두고
보속의 거울을 닦아야 한다
씨뿌리는 이십대도
가꾸는 삼십대도 아주 빠르게 흘러
거두는 사십대 이랑에 들어서면
가야 할 길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안다
선택할 끈이 길지 않다는 것도 안다
방황하던 시절이나
지루하던 고비도 눈물겹게 그러안고
인생의 지도를 마감해야 한다
쭉정이든 알곡이든
제 몸에서 스스로 추수하는 사십대,
사십대 들녘에 들어서면
땅바닥에 침을 퉤, 뱉어도
그것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안다
다시는 매달리지 않는 날이 와도
그것이 슬픔이라는 것을 안다 <고정희, 사십대>
시에 표시한 것처럼,
<사십대 문턱(이랑, 들녘)에 들어서면> ~ <안다>는 구절이 이 시는 반복되고 있어.
나이 마흔이 되니 뭔가 좀 알게 되었다는 거고,
그 알게 된 것들은 뭐, 뾰족한 것은 아니고, 좀 초라한 것이지만,
<불혹>이란 나이에 걸맞게,
적당하게 포기하고, 남은 인생을 어떻게 누리며 살 것인지를 생각하게 된다는 의미로 보면 되겠다.
1연에선 <남은 삶>과 <만날 인연>이 많지 않음을 안다고 썼어.
30대까지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서 매혹당하는 재미로 살 수 있겠지만,
40대부터는 이미 맺은 인연들을 잘 유지하는 것을 생각한다는구나.
'보속'은 '속죄의 의미로 행하는 보상'을 말해.
주변의 인연들에게 잘해준다는 의미로 보면 되겠지.
20대엔 씨를 뿌렸고, 30대엔 그걸 가꾼대.
그 세월이 정말 빨라서 이제 거두는 40대가 되면
남은 세월이 많지 않게 느껴진다는구나.(40대인 아빠는 너무 오래 살까 걱정인데 말이야. ㅋ)
그렇지만 아빠도 이제 정년퇴직까지 20년도 안 남았단다. 휴 =3=3
선택해야 할 것도 별로 없고,
방황이나 고비의 추억을 안고 마감까지 남은 지도를 바라보는 나이란다.
고정희는 등산을 좋아했다나봐.
그러자니 <지도> 속의 인생을 내다 봤겠지.
그리고 해남 들녘의 삶과 어울리게 <이랑, 들녘>같은 시어도 잘 쓰고 있단다.
화자가 나이 마흔이 되니
남들의 말대로 출세를 했든, 그렇지 못하든,
외롭고 슬픈 마음이 가슴 한 구석에 놓인 사람들이라는 이야기로 시를 맺는다.
글쎄, 아빠에게 마흔은 아직 걸어가야 할 길이 많이 남은 나이 같은데...
시인은 이런 시를 쓰곤, 마흔 네 살에 지리산 등반 중 실족사로 죽고 말았어.
이제 내게 남아 있는 길
내가 가야 할 저만치 길에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크고 넓은 세상에
객사인지 횡사인지 모를 한 독신자의 시신이
기나긴 사연의
흰 시트에 덮이고
내가 잠시도 잊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달려와
지상의 작별을 노래하는
모습 보인다
오 하느님
죽음은 단숨에 맞이해야 하는데
이슬처럼 단숨에 사라져
푸른 강물에 섞였으면
하는데요 <고정희, 독신자(신을 모독하는 자), 부분>
이런 시를 남기고 지리산 뱀사골의 계곡물에 휩쓸려 세상을 뜬 시인을 생각하면 마음이 짠하다.
자신의 앞날을 본 걸까?
불혹에 대한 시를 더 볼까?
집에 가야 할 시간이 훨씬 지난 술집에서
싸움이 났다
노동과 분배와 구조조정과 페미니즘 등을 안주 삼아
말하는 일로 먹고사는 사람들과 즐겁게 술을 마시고 있는데
개새끼들, 놀고 있네
건너편 탁자에서 돌멩이 같은 욕이 날아온 것이다
갑자기 당한 무안에
그렇게 무례하면 되느냐고 우리는 점잖게 따졌다
니들이 뭘 알아, 좋게 말할 때 집어치워
지렛대로 우리를 더욱 들쑤시는 것이었다
내 옆에 있던 동료가 욱 하고 일어나
급기야 주먹이 오갈 판이었다
나는 싸워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어
단단해 보이는 상대방에게 정중히 사과를 했다
다행히 싸움은 그쳤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굽신거린 것일까
너그러웠던 것일까
노동이며 분배를 맛있는 안주로 삼은 것을 부끄러워한 것일까
나는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싸움이 나려는 순간
사십세라는 사실을 생각했다 <맹문재, 사십세>
뭐, 일상 속의 작은 사건에서 뭔가를 깨닫고 그걸 적는 게 '시'란 것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지식인인 화자의 동료들과 술집에서 '노동, 분배, 구조조정, 페미니즘' 등 떠들면서 한잔 하는데,
"개새끼들, 놀고 있네." 이런 욕설을 듣는다.
아마도 그 욕설을 던진 이는 노동자였으리라.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무례하면 되겠소?" 하고 따지자,
"니들이 뭘 알아, 좋게 말할 때 집어치워." 이런 대꾸가 온다.
옆자리 동료는 욱해서 일어나고
나는 사과를 하고, 싸움은 끝났다.
화자는 자신이 비굴했던 것인지,
아니면 너그러웠던 것인지,
노동자들의 힘든 삶을 안주로 떠든 것을 부끄러워 했던 것인지,
이런 것들을 생각하는 순간,
자신이 나이 <마흔>이 넘었단 생각을 하게 된다.
<구조조정>같은 말은 쉽게 말하자면,
기계가 자동화되고 세계 경제가 재편됨에 따라
한국의 조선 업계가 수주하던 물량이 중국으로 많이 넘어가게 되어
회사의 구조를 조정하기 위하여 <노동자를 함부로 자르는 일>이다.
부산에도 영도에 <한진 중공업>이란 배만드는 회사가 있는데,
이번에 구조조정건으로 노동자들은 싸우고, 회사는 문을 닫는 일이 벌어졌단다.
노동자들에게 '구조조정'이란 말은 '사형'이라는 판사의 선고와도 같은 말인데,
지식인 나부랭이들이 술집에서 이야기를 떠들고 있으니,
옆자리 노동자들이 화가 났을 수도 있겠다.
재미있게도 '맹문재'와 이름이 같은 '이문재'도 같은 '마흔 살'이란 시를 남겼다.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늦가을 평상에 앉아
바다로 가는 길의 끝에다
지그시 힘을 준다
시린 바람이
옛날 노래가 적힌 악보를 넘기고 있다
바다로 가는 길 따라가던 갈대 마른 꽃들
역광을 받아 한 번 더 피어 있다
눈부시다
소금창고가 있던 곳
오후 세 시의 햇빛이 갯벌 위에
수은처럼 굴러다닌다
북북서진하는 기러기 떼를 세어 보는데
젖은 눈에서 눈물 떨어진다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 <이문재, 마흔 살>
맹문재의 <사십세>가 일화(에피소드) 중심이라면,
이문재의 <마흔 살>은 화자의 관조 중심이다.
화자는 염전이 있던 곳으로 갔다.
계절은 '늦가을', 음, 염전의 일도 여름에 한창이니
한창때가 지난 계절, 나이 '마흔 살'과도 잘 매칭되는 계절이네.
'시린 바람'이 지나가고,
'옛날 노래'가 입에서 흥얼거려졌는지도 모르지.
말라버린 갈대꽃들은
넘어가는 햇빛 받아 눈부시게 반짝인다.
이 마른 갈대꽃들도 나이 '마흔 살'과 어울리는 소재다.
'오후 세 시'란 시간도 역시 '마흔 살'에 어울리는 시간이다.
해가 슬몃 지려고 하는 시간.
열두시 반이면 해가 하늘 꼭대기에 올라앉아 이글거리고,
오후 두 시면 뜨거움이 절정에 이르는데,
그런 시간이 설핏 지난 시간, 오후 세 시.
계절도 '늦가을'
거기다 '말라버린 갈대꽃'
그리고 공간도 여름이 지나버린 갯벌의 <염전>,
햐~ 화자의 <마흔 살>이 이렇게 시각적으로 표현되고 있구나.
기러기를 바라보던 화자는 눈물짓는다.
기러기가 가면 겨울이 오고, 곧 한 해가 끝나니 기러기 역시 가을이구나.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
이 구절이 화자가 나이 <마흔>을 대하는 자세를 요약하고 있다.
옛날은 <흘러가버린 날들>을 일컫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은 <옛날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정작 화자가 나이 마흔이 되고 보니,
자신이 <옛날 사람들> 속에 포함되는 그런 것이란 생각에 눈물짓게 되는 것이다.
<흘러가버린 날들>이 옛날이 되는 것이라던 생각은
늙음은 남들의 것이란 의식이 담겨 있었는데,
이제 <늙음이 나에게도 오는 것>이라는 마음이 들고 보니,
<내게 오는 순간 순간들>이 모두 <흘러가버려 화석이 될 날들>로 여겨지고,
<한여름이 지나버린 염전>을 보아도,
<늦가을>이란 계절을 만나도,
<오후 세 시>의 뉘엿한 태양을 바라 보아도,
한창 피었다 말라가는 <갈대꽃>에 비친 반짝이는 햇살을 보아도,
가을을 느끼고 날아가는 <기러기>를 헤아리다가도,
문득 나이 <마흔>을 떠올리는 화자의 쓸쓸한 마음.
글쎄, 아빠는 조금 이해가 되려고 하는데, ㅋ
민우는 어떨까?
요번엔 <삼십세>란 시를 한 편 보자.
<삼십세>는 오스트리아의 '잉게보르크 바흐만'이란 여성 작가의 책으로 유명하단다.
그는 삼십세를 이렇게 썼다.
30세에 접어들었다고 해서 어느 누구도 그를 보고 더 이상 젊지 않다고 말하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그 자신은 일신상에 아무런 변화를 찾아낼 수 없다 하더라도, 무엇인가 불안정하다고 느낀다.
스스로를 젊다고 내세우는 게 어색해진다. <잉게보르크 바흐만, 삼십세 중>
뭐, 요즘에야 워낙 잘 먹고 사니깐 마흔인데도 동안이라며 좋아들 하지만,
1926년에 태어난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시대였다면 서른 살이 노년의 입구처럼 여겨졌을지도 모르지.
늙지는 않았지만, 더이상 젊다고 우기긴 어려운 나이 서른 살.
민우도 서른, 마흔이 되기 전에 너 자신의 젊음을 충분히 즐기렴.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내 꿈은 말이야, 위장에서 암 세포가 싹 트고
장가가는 거야, 간장에서 독이 반짝 눈뜬다.
두 눈구멍에 죽음의 붉은 신호등이 켜지고
피는 젤리 손톱은 톱밥 머리칼은 철사
끝없는 광물질의 안개를 뚫고
몸뚱아리 없는 그림자가 나아가고
이제 새로 꿀 꿈이 없는 새들은
추억의 골고다로 날아가 뼈를 묻고
흰 손수건이 떨어뜨려지고
부릅뜬 흰자위가 감긴다.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 우리 철판깔았네 <최승자, 삼십세>
인생은 하나하나 개별자마다 모두 다른 것이란다.
누구는 백수를 누리고 누구는 열 살도 못 되어 세상을 뜬다.
인생에서 <표준 그래프>란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단다.
이 시에서 '삼십세'는 화자 개인의 체험이라고 봐야 할 게다.
그의 서른은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나이였다.
참 힘겨웠나보다.
치통으로 시작된 <통증>은
<암 세포>가 싹트고, 간의 <독>이 눈 뜨고,
그렇지만 '장가'가고픈 꿈도 있었는데,
<죽음의 붉은 신호등>이 켜지면,
<젤리같은 피>, <톱밥같은 손톱>, <철사같은 머리칼>로
생명력 하나 없이 금세 바스라질 것 같은 육신으로,
안개 속에서 그림자처럼 살고있던 서른이었나 봐.
<꿈없는 새>들은 예수가 묻힌 골고다 언덕의 무덤으로 가 <뼈를 묻고> 만다.
이 시에서 반복된 이미지가 있어. 1연과 2연의 끝에 반복되는 구절.
흰 손수건과 부릅뜬 흰자위의 이미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1연)
흰 손수건이 떨어뜨려지고
부릅뜬 흰자위가 감긴다. (2연)
흰 손수건은 마치 하얀 '수의'나 '죽음의 드레스'를 연상시키는구나.
아름다운 서른 살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서른 살을 살고 있는 어떤 사람을 상상할 수 있겠니?
1연에서 그래도 애원하던 눈자위는 2연에서 감기고 만다.
서른에 죽음을 연상하는 시를 쓴 이는 세상이 얼마나 비관적이었을까?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 우리 철판깔았네
마지막 연은 그래서 반전으로 보이지.
갑자기 우울 모드에서 행복 모드로 뒤바뀌니 말이야.
고통에서 벗어난다면 죽음조차도 <행복한 항복>이란 말일까?
'행복'과 '항복'은 유사한 발음을 이용한 언어 유희가 되겠구나.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패러디한 마지막 구절 역시 화자의 삶을 반영한다.
이제 죽음에 대하여 초월한 화자는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지.
죽음보다 더 두려울 게 뭐가 있겠어?
얼굴에 철판깔고 사는 거지. 뭐.
자, 그럼 이 최승자 시인이 <마흔>이 되어 어떤 생각을 했는지 한번 볼까?
금세라도 죽어버릴 것처럼 광적인 마음이 드러난 시 <삼십세>가 <세기말>적인 시일 수도 있어.
1900년대의 타락한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이 저렇게 병적이었는지도 모르지.
서른이 될 때는 높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지.
이 다음 발걸음부터는 가파른 내리막길을
끝도 없이 추락하듯 내려가는 거라고.
그러나 사십대는 너무도 드넓은 궁륭 같은 평야로구나.
한없이 넓어, 가도가도
벽도 내리받이도 보이지 않는,
그러나 곳곳에 투명한 유리벽이 있어,
재수 없으면 쿵쿵 머리방아를 찧는 곳.
그래도 나는 단 한 가지 믿는 것이 있어서
이 마흔에 날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다. <최승자, 마흔>
1952년생 시인 최승자로서는 그의 30대를 '광주 학살'로 시작해서 저렇게 괴로운 시를 썼을지도 모르겠다.
잉게보르크 바흐만이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는 책도 썼거든.
서른살 이후는 날개도 없이 추락하는 나이라고 생각했겠지.
서른을 <높은 벼랑 끝>에 섰던 것으로 회상하는 그의 <마흔>.
그가 마흔이 되자 세상은 <드넓은 궁륭 같은 평야>임을 느끼고 있어.
궁륭은 활처럼 휜 지붕을 의미하는 건데, 글쎄, 궁륭 같은 평야...는 좀 어색한 비유 같기도 해.
어쩌면 드넓은 궁전 같은 평야라고 쓰려고 했는지도 몰라.
한없이 넓은 것 같지만, 구석구석 유리벽이 가로막는 세상.
그의 40대는 1990년대야.
한국인들이 처음으로 <해외여행>이 자유화 되었던 새로운 시대.
그래서 더 넓은 세상을 보려고 너도나도 비행기에 오르던 시대지.
그렇지만, 재수 없으면 쿵, 머리방아를 찧을 수도 있는 위험도 도사리고 있었지.
공산주의 국가가 개방되었다곤 하지만 그 시대만 해도 마음대로 드나들 수는 없던 시대였거든.
마지막 연에서 그래도 그는 '단 한 가지' 믿는 것이 있다고 한다.
그 단 한 가지는 종교적 대상으로서의 '절대자'일 수도 있고,
화자가 시인이니 '시를 쓰는 일'일 수도 있고,
화자에게 끔찍이도 잘해주는 남편이거나 아들에 대한 사랑일 수도 있겠다.
날마다 그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조금 웃긴 표현으로 마무리짓는 걸로 봐서,
뭐, 그렇게 심각한 상태는 아닌 것 같지?
암튼 화자는 서른 살에 그토록 비관적으로 꽉 막혔던 세상이,
나이 마흔 살이 되어 좀 숨통이 틘 것으로 볼 수도 있겠어.
건강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경제적인 살림살이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가족의 관계에서 힘들었던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화자가 직접 드러내지 않고 숨겨두고 이미지만 드러내니 구체적인 건 상상하기 힘들구나.
오늘은 <나이>란 주제에 대한 이야기들을 모아 보았다.
이렇게 한 주제를 두고 다양한 예술가들이 작품을 내는 것을 <옴니버스>라고 한다.
만약에 <불혹>이란 제목의 시집에 이런 작품들이 모였다면 <옴니버스 시집>이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사랑'이란 주제를 주고 세 명의 영화 감독이 전혀 의논하지 않고 색다른 영화를 만들어 한꺼번에 방영한다면,
<옴니버스 영화>가 될 것이고 말이야.
이와 비슷한 개념으로 <피카레스크 구성>이란 것이 있단다.
'포켓 몬스터'란 만화 영화를 떠올리면 피카레스크 구성이 이해가 갈 거야.
맨날 똑같은 등장 인물이 나오지.
지우와 이슬이, 용이가 가는데, 새로운 마을에서 새로운 몬스터와 만나게 된단다.
새로운 몬스터와 싸우는 와중에 로켓단이 훼방을 놓다 날아가고 한 편은 끝나지.
다음 시간이 되면 또 같은 등장 인물들이 같은 패턴으로 행동하고 말이야.
'막돼먹은 영애씨'도 그렇고 '명탐정 코난'도 그렇잖아.
영애씨 가족과 회사 사람들이 맨날 나오고,
코난과 미란이, 탐정 아저씨, 그리고 동네 꼬마들과 박사님은 맨날 나오지.
그렇지만 매 회 색다른 사건이 펼처지는 구성을 피카레스크 구성이라고 한단다.
오늘은 '나이'에 대한 <옴니버스 구성>으로 시들을 읽었다.
민우도 네 나이 '열아홉'에 대해 생각해 봤니? ㅋ
아직 생각하기엔 너무 적은 나인가?
그치만 삶에서 아주 힘든 1년일 수 있단다.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 의논하자꾸나.
그게 좋은 가족이 아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