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학이다.
오랜만에 열 시까지 자습을 하고 오려니 좀 힘들지도 모르겠구나.
그렇지만 이제 적응해야 하는 생활이니, 그러려니 하기 바란다. 

교실에 들어오는 선생님들도 뭐, 모두 좋을 수야 있겠냐마는,
거기도 적응 잘 하기 바란다. 

오늘은 좀 쉬운 시를 몇 편 보자.
맨날 사회에 불평 많거나 문제점 제기하는 시들을 들이밀면 마음이 무겁겠지.
또는 인생에 쌓인 고뇌를 더듬노라면 아빠의 수업도 쉽지만은 않단다. 

<왜 사냐건, 웃지요>로 유명한 시를 우선 보자.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오

구름이 꼬인다 갈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김상용, 남으로 창을 내겠소>

화자 김상용(金尙鎔,1902~1930)은 스물 아홉에 죽은 아까운 시인이다.
화자의 시는 자신과 자연의 동일성을 보여준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나와 자연의 어떠한 대립도 있을 수 없고,
나와 자연의 화해,자연의 품에 안긴 삶,
어떠한 인위적인 삶도 극복하면서 남으로 창을 내어 푸르고 고요한 안식처인
자연의 품 안에서 새로운 삶의 의미를 조명하고 달관하여 자연과 더불어 살기를 동경한다.   

화자가 살아간 시대는 이 땅의 민중에게 가장 척박한 역사를 던져주었던 시절이다.
그렇지만, 그는 햇볕 잘 드는 남으로 창을 내고,
웃으며 산단다.
아무 생각도 없이 그렇게 사는 건 무의미 하잖아.
일제 강점기인데, 독립운동이라도 해야 하지않겠어? 넌 도대체 뭘 위해 사니?
이러고 물으면, 그저 웃겠대. 

아빠는 저 웃음이 가슴아프게 이해가 간단다.
아빠가 대학다니던 시절엔 누구나 정부에 반대하는 시위와 집회에 참여하곤 했어.
아빠도 광주에서 학살을 일으킨 정권에 저항하는 집회엔 매번 참가했지.
그렇지만, 지식인의 길을 버리고 노동자의 삶을 살면서 사회 변혁을 꿈꾸지 않겠니? 이런 풍토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아빠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단다.
그것 역시 내 길이 아닌 것처럼 여겨졌거든. 

넌, 왜 그따위로 사니? 이렇게 묻는 사람은 암튼간에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잖아.
화내거나 짜증낸다고 이해해 주지도 않을 거잖아.
그저 피식~ 웃을 수밖에 없겠지. 딴 데 쳐다보고...

화자는 일제 강점기 친일파나 부역자가 아니란다.
그저 자신의 나날을 평온하게 살고 싶었던 사람이야.
욕심도 없다. 구름이 꼬여도 갈 리가 없다.
그저 자연의 노래를 공짜로 들으며 살아갈 따름이래.
그런 사람더러,
너 일제 강점긴데 이따위로 살아서 되겠냐, 도대체 넌 뭔 생각으로 사냐?
이렇게 묻는다면, 글쎄. 아빠라도 할 말이 없을 것 같구나. 

세상은 반대와 투쟁으로 이뤄져 있어.
가진 자들은 빼앗기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못 가진 자들은 조금이라도 더 얻으려고 힘을 합치고 말이지.
그렇지만, 그 반대와 투쟁의 길에서 모든 사람이 똑같은 생각을 가진 건 아니란다.
맨 앞에서 주먹쥐고 목숨걸고 나서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뒤에서 눈치보며 소리나 질러주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어찌 보면 싸우지 않는 듯이, 세상 일에 무관한 듯이
한눈 감고 세상을 관망하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란다.
한 편에서 다른 편을 무조건 욕할 수는 없는 거라고 생각해. 

다음의 <사슴>도 마찬가지야.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노천명, 사슴>

화자는 사슴을 관찰하고 있어.
사슴은 슬프고 점잖게 말이 없고, 좀 고상하지.
뜻이 높고 우아해 보이는 사람을 고상하다, 고고하다 이렇게 말하잖아. 

물 속의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낸 그리스 신화 속 인물은?
나르시소소지.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다 물에 빠져 죽었다는 인물.
이 시의 주제는 그런 <자기애> 또는 <나르시시즘>과 관련 깊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프단'것은 이상이 높단 이야기 일거야.
'슬픈 짐승'은 감정 이입으로 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고독한 화자를 반영하고 있단다.
1연에선 사슴의 외면이, 2연에선 사슴의 내면이 표현되고 있어.
주제라면 <이상향에 대한 동경, 이상적 생명에의 향수> 같은 것이 되겠지.

이 시는 노천명을 문단에서 중요한 시인으로 확정시킨 유명한 시란다.
사슴과 고독의 시인, 노천명.
일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사슴처럼 고고하게 살다간 시인은
이 시를 통해 숙명적으로 결정지어진 여자로서의 슬픈 운명을 수용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이상적 향수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사슴'은 고고함과 귀족성을 상징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시에선 '목이 길어 슬픈 짐승'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단다.
외부 세계와 단절된 시인의 고독한 내면을 '사슴'을 통해 형상화 한 시가 되겠지. 

다음엔 자연에서 깨달음을 얻는 관조의 시 한 편 보고 마치자꾸나.

과목에 과물들이 무르익어 있는 사태처럼
나를 경악케 하는 것은 없다.

뿌리는 박질 붉은 황토에
가지들은 한낱 비바람들 속에 뻗어 출렁거렸으나

모든 것이 멸렬하는 가을을 가려 그는 홀로
황홀한 빛깔과 무게의 은총을 지니게 되는

과목에 과물들이 무르익어 있는 사태처럼
나를 경악케 하는 것은 없다.

- 흔히 시를 잃고 저무는 한 해, 그 가을에도
나는 이 과목의 기적 앞에 시력을 회복한다. <박성룡, 과목>

과목은 과일 나무고, 과물은 과일이다.
나는 '과일이 열린 것'을 보면 깜놀한다.(경악) 

뿌리는 비옥하지 않은 땅(박질 붉은 황토)에,
가지들은 시련(비바람) 속에 놓여있는 과목과 과물. 

모든 것이 소멸하는 가을에,
과일은 홀로
황홀한 빛깔을 띠고, 황홀한 무게의 은총을 보여주는구나. 
4연에서 수미상관으로 일단락이 된다.  

마지막 연.
시를 잃고 저무는 한 해.
무기력하게 보내버린 부정적인 현실을 돌아보지만,
화자는 이 과목의 과물 앞에서 깨달음을 얻고
자신의 삶의 의미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고 있단다. 

이렇게 자연에서 느끼는 경이로움과 경탄을 드러낸 시들은 참 많단다.
그렇지만 이 과목에서 보여주는 직접적인 경이와 경탄의 소리는 독자에게 호소력 있는 목소리를 얻게 되지. 

과목, 과물, 경악, 박질 같은 시어들은 보드라운 시어들이 아니지.
투박하고 생경한 한자어의 사용을 통해서 화자는 강인한 자신을 드러내고 있어.

'사태', '경악' 같은 용어도 독자에게 신선한 감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단다.
시에서 늘상 쓰는 용어들이 아닌 말들이 오히려 신선할 수도 있지. 

오늘 다룬 시들은,
시대의 핵심에서 조금은 어긋난 듯한 시들이다.
그렇지만,
삶의 핵심은 무엇인지,
<남으로 낸 창>을 통해서 타협하지 않으면서 유유자적하는 삶을,
<사슴>을 관찰함으로써 자기애를 확인하는 삶을,
<과물>의 익어감을 보면서, 힘빠지는 시의 힘을 회복하는 시인의 삶을 읽을 수 있었단다. 

삶은 그런 것 같아.
같은 모습으로 보이지만 누구나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
똑같은 월급을 들고도 누구는 불평하고 누구는 감사할 줄 아는 것.
똑같은 성적표를 보고도 우는 아이도 있고 웃는 아이도 있는 것.
그래서,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살 줄 아는 지혜를 얻는 것. 그런 것 말이야. 

열 시까지 자습이 힘들더라도 힘내서 하자.
누구나 다르지만, 또 남들 다 하는 걸 못하는 것처럼 힘빠지는 일도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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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려는지
날씨가 몹시 변덕스럽다.
꽃이 피는 일을 시샘하여 추위가 온다는 의인법을 쓴
꽃샘추위는 말은 예쁘지만,
고 성깔은 꼬마 마녀가 부리는 성질머리같다. 

날이 며칠 추울 모양이니 따뜻하게 입고 다니렴.
오늘은 얼마 전 기형도의 '안개'와 함께 다뤘던  '그날'의 시인 이성복 작품을 몇 편 살펴 보자.
우선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의 대표작, '남해금산'을 읽어 보자.

한 여자 돌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남해금산>

남해대교로 유명한 남해섬에 가면 비단 금 錦자를 쓰는 멋진 산이 있다.
바로 남해 금산이다. 
남해 금산은 바위가 멋지게 튀어나와 많은 전설을 담고 있는데,
이성계가 임금이 되도록 해달라고 빌었다는 전설도 있고,
특히 금산의 상사바위에 얽힌 전설은 유명하다.

금산의 상사바위에 얽힌 전설에서는 호남지방과 생활권을 같이 했던 남해의 옛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여수 돌산에 사는 한 총각이 남해에 고기잡으러 왔다가
우연히 만난 과수댁을 사모한 끝에 상사병에 걸려 죽을 처지에 있었다
이를 안 과수댁은 상사병을 고칠수 있다는 이 바위에서
총각과 만나 사랑을 나눈 뒤 백년해로 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렇게 <상사바위>는 잊지못해 상사병에 걸린 이들의 한을 풀어주는 바위이기도 하다.
이런 저런 전설을 떠올리면서 이성복의 남해금산을 읽어 보자. 

이 시는 전설 한 토막을 듣는 듯 하다.
한 여자가 바위 속에 있었고, 그 여자를 사랑한 나도 돌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사랑은 순탄치 않아 그 여자 울면서 떠나갔다.
해와 달은 그 여자를 끌어 주었고,
나 혼자 남은 남해 금산,
나는 바닷물 속에 잠긴 섬이 되었다는 이야기... 

남해섬 앞바다는 한려해상 국립공원으로 다도해 절경이 펼쳐지는 곳이기도 하단다.
그래서 남해금산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노라면 이런저런 전설이 떠오르기도 하겠지. 

화자는 돌 속에 묻힌 한 여자를 사랑했대.
돌 속에 묻힌 여자란 건, 그 여자가 쉽사리 사랑해선 안될 존재라고 상상해 보자.
그러다 그 여자가 떠나가고, 나 혼자 남아 오른 남해 금산.
거기서는 <상사 바위>가 사랑을 이루지 못한 이들을 이어준다는 전설을 품고 서있어.
화자는 떠나간 그 여자를 해와 달이 잘 끌어 주었기를 빌었나봐.
이별했다고, "에잇, 고얀 년, 고만 가다가 확 자빠져서 다리라도 부러져라~"
이런 심술을 부린 건 아니고,
"해님, 달님, 그 여자 앞길에 행복만이 가득하길 빌어 주세요~" 이런 순정한 마음이겠지.
혼자 남은 화자는 하늘 가까운 남해 금산에 올라 푸른 바닷물을 바라보며
혼자서 잠잠히 침묵에 잠겨 시를 쓰겠지. 

이성복은 개인적 삶을 통해서 얻은 고통스런 진단을
보편적인 삶의 양상으로 확대하면서,
시대적 아픔을 치유하는 단초를 제공하는 시인이란 평을 받고 있어.
먼저 이야기한 <그날>이 그런 시지.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그날)

이런 구절은 시대의 아픔을 드러낸 구절이었단다. 
다음엔 어머니의 사랑을 드러낸 시를 한 편 보자.

사랑하는 어머니 비에 젖으신다
사랑하는 어머니 물에 잠기신다
살 속으로 물이 들어가 몸이 불어나도
사랑하는 어머니 미동도 않으신다.
빗물이 눈 속 깊은 곳을 적시고
귓속으로 들어가 무수한 물방울을 만들어도
사랑하는 어머니 미동도 않으신다.
발 밑 잡초가 키를 덮고 아카시아 뿌리가
입 속에 뻗어도 어머니, 뜨거운
어머니 입김 내게로 불어온다.

창을 닫고 귀를 막아도 들리는 빗소리.
사랑하는 어머니 비에 젖으신다.
사랑하는 어머니 물에 잠기신다 <또 비가 오면>

이 시에서 <사랑하는 어머니>는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어.
마치 <아버지의 사진>이 중의성을 띠듯.
이 사진은 아버지를 찍은 사진, 아버지가 찍으신 사진, 아버지가 사들인 사진, 아버지가 빌린 사진,
아버지가 소유한 사진, 아버지가 소지한 사진, 아버지가 훔쳐온 사진, 아버지가 주웠다 버린 사진... 등
무한하게 많은 의미를 담고 있어.
<사랑하는 어머니>도 내가 사랑하는 어머니, 또는 나를 사랑하는 어머니 등으로 볼 수 있지. 

그 어머니가 비에 젖고, 물에 잠기신대.
이 얘기는 <청개구리 이야기>가 생각나지 않니?
평소엔 늘 반대로만 하던 청개구리 자식이 죽은 어미가 "강가에 무덤을 만들어 달라"는 유언을 해서
그대로 말을 듣곤, 비가 오면 어미 무덤이 떠내려갈까 슬피 운다던 이야기. 

이 시에서 어머니는 무덤 속에 계신 것 같아.
<창을 닫고 귀를 막아도 들리는 빗소리>는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
슬픔이 되어 애상적 분위기를 심화하는 구실을 하고 있다.
유사한 구조가 반복되어 운율을 형성하고 있지.

다음은 이성복의 <꽃 피는 시절>을 읽어 보자.

멀리 있어도 나는 당신을 압니다
귀먹고 눈먼 당신은 추운 땅속을 헤매다
누군가의 입가에서 잔잔한 웃음이 되려 하셨지요

부르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생각지 않아도, 꿈꾸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당신이 올 때면 먼발치 마른 흙더미도 고개를 듭니다

당신은 지금 내 안에 있습니다
당신은 나를 알지 못하고
나를 벗고 싶어 몸부림하지만

내게서 당신이 떠나갈 때면
내 목은 갈라지고 실핏줄 터지고
내 눈, 내 귀, 거덜난 몸뚱이 갈가리 찢어지고

나는 울고, 웃고 싶고, 토하고 싶고
벌컥벌컥 물사발 들이켜고 싶고 길길이 날뛰며
절편보다 희고 고운 당신을 잎잎이, 뱉아낼 테지만

부서지고 무너지며 당신을 보낼 일 아득합니다
굳은 살가죽에 불 댕길 일 막막합니다
불탄 살가죽 뚫고 다시 태어날 일 꿈같습니다

지금 당신은 내 안에 있지만
나는 당신을 어떻게 보내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조막만한 손으로 뻣센 내 가슴 쥐어뜯으며 발 구르는 당신 <꽃피는 시절>

아빤 이 시를 첨 읽고, 이별하는 상황을 떠올렸어.

1연 : 당신은 멀리 있어요.
2연 : 자꾸 당신이 고개를 들어요.
3연 : 내 안의 당신은 나를 벗어나려 하지만
4연 : 내게서 당신이 떠나면 내 몸 다 찢어져요.
5연 : 온몸이 당신과의 이별을 아파해요.
6연 : 어떻게 당신을 보낼까요.
7연 : 당신을 어떻게 보낼까요...

뭐, 하는 이야기는 이런 것 같구나.

나는 울고, 웃고 싶고, 토하고 싶고
벌컥벌컥 물사발 들이켜고 싶고 길길이 날뛰며(5연)
조막만한 손으로 뻣센 내 가슴 쥐어뜯으며 발 구르는 당신 (7연)

히야~ 민우는 사랑하다 이별하는 심정이 어떤 건지 겪어 봤니?
이렇게, 울다가 웃다가 토할 지경이 되고, 벌컥벌컥 물 마시고 길길이 날뛸 지경,
이별해 본 사람은 알 거야. 이렇게 육신이 아픈 지경을...

조막만한 손으로 뻣센 내 가슴 쥐어뜯으며 발 구르는 당신~


아, 얼마나 애절한 이별의 메시지인지~

그런데, 이 시의 제목을 보렴. 제목은 '꽃피는 시절~'이야.
꽃피는 시절에 이별을 한 걸까?
이 시를 다시 읽어보자. 



이제 나는 <나무>로 변신을 할 거야. 

나는 뻣뻣한 나무입니다.
내 안에서 봄이 오면, 꽃이 피어나려 움트고 있겠지요.
다시 1연 : 겨울에도 나는 꽃이 올 것을 알아요.
2연 : 봄이면 당신은 당연히 올 거예요.
3연 : 내 안에 너 있다~
4연 : 꽃이 피려면 내 몸으 갈라지는 고통을 겪어야 해요.
5연 : 희고 고운 꽃이 잎잎이 피어날 거예요.
6연 : 그러나, 어떻게 꽃잎을 떨굴까요? 미치겠네~
7연 : 내게 매달린 조그만 꽃잎과 어떻게 이별할까~

이런 노래야.
꽃이 피었다 떨어지는 것을.
나무에서 꽃이 솟아나고, 이별하는 것을,
남녀간의 이별의 상황과 유사한 점들을 추출해서,
<이별>이란 추상을 <낙화>란 구체로 비유한 것!

이런 것이 비유의 짜릿한 전율이 아닐까 해.
어쩜 이렇게 감쪽같이 이별하는 사람처럼 시를 써 놓고는
제목을 <꽃 피는 시절>이라고 붙일 수 있을까. 

시인은 늘 삶의 장면들을 어떤 언어로 표현할지를 가다듬는 연습을 하는 사람이겠지.
삶의 어떤 면과 언어의 어떤 것을 연관지어서 표현하면 멋진 작품이 될지를 생각하는 사람. 

그래서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언어를 통해서 삶의 어떠한 단면을 발견할 것인지를 생각하는 과정이기도 하단다.
시를 읽으면서,
삶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래서 당연하지.
삶은 혼자서 살 수 없으니,
늘 사회를 이야기하고, 사회는 늘 변하니깐, 
역사를 이야기하고 그런 거야.
자, 새학기다.
부디 건강하게 힘내서 잘 보내라~
힘내,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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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봄은 3.1절로부터 온다.
새 학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일본의 4월은 한국의 3월과 같은 느낌이랄까? 4월이 개학이거든.
<4월 이야기>란 영화가 일본에선 가능하지만 한국에선 <3월 이야기>가 좋겠지?
새 학년, 새 학교의 설렘과 기대감... 

3월이 되면 비로소 한 살 먹는 느낌이야.
아빠는 아직도 학교에서 생활하고 있으니 그런 느낌이 여전하단다.
1월 1일이나 설날보다 더 느낌이 강하지. 

오늘은 나이 이야기를 해볼까 해.
시도 그런 것을 몇 개 골라 보고.
<논어>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와.
15세에 지우학(학문에 뜻을 두고)
30세면 립(몸을 세워 널리 알리고, 입신양명)
40세면 불혹(세상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50세면 지천명(하늘의 명을 알아 따르고)
60세면 이순(귀가 운명의 가르침에 순해지고)
70세면 종심소욕불유구(마음이 하자는대로 해도 기준에 어긋나지 않는다)라고... 

여기서 15세는 지학, 30은 이립, 40은 불혹, 50은 지천명(또는 지명), 60은 이순, 70은 종심...이란 말이 나왔지.
간혹 20의 나이를 <약관>이라고 하는데, 그건 예전에 나이 20이면 <관례>를 치뤄줘서 생긴 말이야.
관례는 요즘으로 치면 성인식이 되겠지? 약관이 지나면 어른 취급한다... 이런 거지.
70은 두보의 시에 '인생칠십고래희'라고 해서 '사람의 일흔은 예로부터 드물게 온다'는 구절이 있어 <고희>라고도 해. 

그 외에도 10을 나타내는 '순'을 넣어서 70은 '칠순', 80은 '팔순', 90은 '구순'이 되고,
77세는 한자 七十七을 세로로 쓰면 기쁠 희(喜)와 비슷해 보여서 '희수'라고 하고,
80세는 한자 八十을 세로로 쓴 우산 산(傘)자와 비슷하다고 '산수'라고 하고,
88세는 한자  八十八을 세로로 쓰면 쌀 미(米)자가 된다고 '미수'라고 하고,
90세는 한자 九十을 세로로 써 죽을 졸(卒)의 약자가 되어 '졸수'라고 하기도 해.
99세는 한자 일백 백 百에서 한 일 一을 뺀 흰 백 白 자를 넣어서 '백수'라고도 부른단다. 

81세는 90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나이라고 해서 <망구>... 할망구가 여기서 나온 말이야.
91세는 당연히 <망백>이 되고, 71세는 또 <망팔>이 되겠지.
이런 복잡한 나이 계산에 덩달아서 요즘 농담처럼 <지공>이란 나이가 생겼단다. 
65세가 지공...이래. <지하철 공짜>의 준말이란다. ㅋㅋ 

우선 강윤후의 <불혹(不惑), 혹은 부록(附錄)>을 한번 읽어 보자.

마흔 살을 불혹이라던가
내게는 그 불혹이 자꾸
부록으로 들린다 어쩌면 나는
마흔 살 너머로 이어진 세월을
본책에 덧붙는 부록 정도로
여기는지 모른다
삶의 목차는 이미 끝났는데
부록처럼 남은 세월이 있어
덤으로 사는 기분이다
봄이 온다
권말부록이든 별책부록이든
목련꽃 근처에서 괜히
머뭇대는 바람처럼
마음이 혹할 일 좀
있어야겠다 <강윤후, 불혹(不惑), 혹은 부록(附錄)> 

앞에서 마흔이 '불혹(삿된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줏대가 잡힌 나이)'이라고 했잖아.
그런데, 화자는 그것을 '부록'과 유사하게 듣는다.
언어 유희가 되겠지? 발음은 같잖아. 

그러면서,
화자에게 불혹 이후의 세월은
본책에 덧붙는 <부록>같다는 생각이 든대. 

<부록>은 왠지 별 내용이 없을 것 같기도 하고,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책이기도 하고,
본책에 끼워 넣어 주는 써비스 제품이기도 하고,
덤으로 더 주는 그런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잖아. 

<목차>는 글의 차례란 이야기야.
본문의 삶의 순서는 모두 끝났는데, 마흔 이후는 부록처럼 다가온다.
이런 화자의 의식 속에는
마흔이 되어 보니 삶에서 중요한 것들은 모두 결정이 되어 버려서
그날이 그날처럼 익숙하게 살아지더라는 이야기가 담겨 있는 거겠지. 

그래서 마지막엔 <목련꽃 근처에서 머뭇대는 바람처럼> 자신도
뭔가 새로운 것에 <매혹> 당하고 싶다는 희망을 드러내고 있단다. 

삶에서 <봄>은 청춘이라 부르는데,
이 <봄>에는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에 <매혹> 당하고,
평생 하고 싶은 일에 <매혹> 당하고,
함께 인생을 나누고 싶은 이성에게 <매혹> 당하는 시기란다.
그런데, 마흔 살이 넘고 나면 이제 매혹의 시절은 지나가는 거야.
그래서 화자는 삶에 의욕이 없고 좀 지쳐 보이는구나.
오죽하면 자기 남은 삶이 본문이 끝난 다음의 '부록'처럼 여겨진다는 거겠니? 

그렇지만 화자를 피시방 죽돌이 취급해선 안 될 거야.
왜냐면, 화자는 '매혹'에 대한 의지가 아직 강하거든.
뭔가 새로운 일을 맞아서 치열하게 자신을 단련하는 삶을 바라고 있는 거란다.
강렬한 매혹의 힘에 압도되어 그 분야에 자신을 몰입하고 싶다는 의지가 마지막 부분에서 드러나고 있지.
마음이 혹할 일 좀 있어야 겠다... 면서 말이야. 

이 시의 주제는 <마흔 살에 만난 새로운 분야에 대한 관심 또는 의지> 같은 것이 되겠지.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민우에겐 서른 너머 마흔 너머까지 읽기는 쉽지 않을 거야.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계기가 자신의 삶을 더 치열하게 만드는 일이 될 수도 있단다.
그것이 문학의 힘이기도 해.
다음엔 구광본의 <서른 해>를 보자.

처음부터 그대를 알아본 것은 아닙니다
처음부터 그대를 사랑한 것은 아닙니다

물 빠진 뻘밭에서 갯흙을 일으키며 헤매던 지난 여름
무언가가 기어간 흔적에 한나절 따라가다 가뭇없이 눈
들자 바다 너머 하늘에 가 닿아 있던 온몸으로 간 흔적,
그 한 평생의 궤적

문신처럼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대여, 더 멀리 떠나가세요
아득할수록 깊게 꽃 핍니다
서른 해 이끌고 온 지친 몸 남루한 한낮
그대를 다시 찾아갑니다

한 눈에 알아보았다는 사람들을 믿지 않습니다
한 눈에 사랑하였다는 사람들을 믿지 않습니다<구광본, 서른 해> 

이 시는 처음 연과 마지막 연을 나란히 두고 보면 주제가 떠오른단다. 한번 해볼까? 

처음부터 그대를 알아본 것은 아닙니다
처음부터 그대를 사랑한 것은 아닙니다 ......
한 눈에 알아보았다는 사람들을 믿지 않습니다
한 눈에 사랑하였다는 사람들을 믿지 않습니다

화자는 '한 눈에 알아보고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어.
첫눈에 반하는 사랑도 물론 있지만, 그것은 감정에 치우친 사랑이기 쉽지.
누구나 어떤 매력인가는 가지고 있단다.
그런데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매력을 가진 이성에게 끌리기 쉽대.
그러면 첫눈에 반하게 되지.
그렇지만 오래오래 같은 일을 하면서 친해지게 된 사람들은,
성격이 비슷하고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끼리 친해지게 되거든.
화자는 자신의 사랑이 그렇다는 이야기야. 오랜 세월을 두고 친숙해진 사랑. 

그런데, 2연과 3연에서 <지난 여름>의 궤적(지나간 흔적)이
<문신처럼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은 이별을 이야기하고 있단다.
지난 여름 화자와 연인은 서해안의 바닷가엘 갔겠지.
(서해안은 경사가 완만하고 조수간만의 차가 커서 갯벌이 넓게 형성되었거든.) 

이제 이별을 겪고 다시 그 바닷가엘 갔나 봐.
그래서 지난 여름 무엇인가가 기어갔던 흔적을 한나절 생각했나봐. 

그러다가,
가뭇없이(보이던 것이 사라져 찾을 일이 감감함) 눈을 들어.
그런데, 눈을 드는 순간 뭔가 큰 변화가 생기는 거야.
마음 속에 변화가 일어나지.
그걸 시에서 강조하며 표현하기 위해 행을 바꿨어. 


들자 

이렇게 말이지. 
이제 하늘에 아스라하게 보일락말락하는 건
화자와 연인이 살아왔던 <온몸으로 간 흔적, 한 평생의 궤적>이래.
그 연인과 함께했던 삶의 기억이 문신처럼 지워지지 않는단다. 

그렇다면, 화자와 연인은 단순한 이별인 걸까?
그럼 지금 당장 달려가면 될 거잖아.
연인에게 달려가서 '난 당신 없인 못 살 거 같아.' 이러고 고백하면 되잖아.
그러면 드라마처럼 해피엔딩도 기대할 수 있을 거잖아. 

그렇지만 화자는 <그대여, 더 멀리 떠나가세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득할수록 깊게 꽃 피>기를 기다리면서 말이야.
이별이 멀수록 꽃이 잘 핀다고 했으니 역설적 표현이지? 

아마도, 화자와 연인은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거리에 놓인 것 같아.
사별하였거나, 또는 연인이 화자의 손에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존재이거나.
서른 살이 된 화자.
몸은 지치고, 모습은 남루(누더기)하단다.
그런데, 화자의 마음은 거기서 스톱! 하는 게 아니야.
그대를 다시 찾아간대. 

아,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좀 짠해지지 않니?
남의 이야기지만, '나만 아니면 돼~' 이런 건 아니잖아.
남들이라도 좀 잘 됐으면 좋겠고, 행복했으면 좋은 거잖아. 

화자는 첫눈에 반한 것도 아닌데,
오랜 기간동안 당신의 매력에 빠졌는데,
이제 함께할 수 없는 현실에 좌절하다가,
이제 다시 당신을 생각하고 있지.

그대가 더 멀리 떠나가도, 그대를 다시 찾아갈 거라는 의지가 있지만,
사실은 거리감이 너무 멀구나. 마음이 아프게도 말이야.
어쩌면, 이런 시는 사별한 임의 무덤 앞에서 읊조리면 어울리는 시가 아니겠니?
이어서 마흔 살에 대한 시들을 몇 편 보자꾸나. ^^
시인들이 서른 살엔 자신을 돌아볼 시를 별로 쓰지 못하나봐.
유독 마흔 살에 대한 시가 많은 걸 보면 말이야.
그렇지만 오십에 대한 시도 적은 걸 보면... 그건 너무 늙었나?
마흔 살이 '삶을 돌아보기'도 좋고 적당하게 피곤한 나이인가봐. 

 

 

사십대 문턱에 들어서면
바라볼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기다릴 인연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안다
아니, 와 있는 인연들을 조심스레 접어 두고
보속의 거울을 닦아야 한다

씨뿌리는 이십대도
가꾸는 삼십대도 아주 빠르게 흘러
거두는 사십대 이랑에 들어서면
가야 할 길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안다
선택할 끈이 길지 않다는 것도 안다
방황하던 시절이나
지루하던 고비도 눈물겹게 그러안고
인생의 지도를 마감해야 한다

쭉정이든 알곡이든
제 몸에서 스스로 추수하는 사십대,
사십대 들녘에 들어서면
땅바닥에 침을 퉤, 뱉어도
그것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안다
다시는 매달리지 않는 날이 와도
그것이 슬픔이라는 것을 안다 <고정희, 사십대> 

시에 표시한 것처럼,
<사십대 문턱(이랑, 들녘)에 들어서면> ~ <안다>는 구절이 이 시는 반복되고 있어.
나이 마흔이 되니 뭔가 좀 알게 되었다는 거고,
그 알게 된 것들은 뭐, 뾰족한 것은 아니고, 좀 초라한 것이지만,
<불혹>이란 나이에 걸맞게,
적당하게 포기하고, 남은 인생을 어떻게 누리며 살 것인지를 생각하게 된다는 의미로 보면 되겠다. 

1연에선 <남은 삶>과 <만날 인연>이 많지 않음을 안다고 썼어.
30대까지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서 매혹당하는 재미로 살 수 있겠지만,
40대부터는 이미 맺은 인연들을 잘 유지하는 것을 생각한다는구나.
'보속'은 '속죄의 의미로 행하는 보상'을 말해.
주변의 인연들에게 잘해준다는 의미로 보면 되겠지. 

20대엔 씨를 뿌렸고, 30대엔 그걸 가꾼대.
그 세월이 정말 빨라서 이제 거두는 40대가 되면
남은 세월이 많지 않게 느껴진다는구나.(40대인 아빠는 너무 오래 살까 걱정인데 말이야. ㅋ)
그렇지만 아빠도 이제 정년퇴직까지 20년도 안 남았단다. 휴 =3=3 

선택해야 할 것도 별로 없고,
방황이나 고비의 추억을 안고 마감까지 남은 지도를 바라보는 나이란다. 

고정희는 등산을 좋아했다나봐.
그러자니 <지도> 속의 인생을 내다 봤겠지.
그리고 해남 들녘의 삶과 어울리게 <이랑, 들녘>같은 시어도 잘 쓰고 있단다. 

화자가 나이 마흔이 되니
남들의 말대로 출세를 했든, 그렇지 못하든,
외롭고 슬픈 마음이 가슴 한 구석에 놓인 사람들이라는 이야기로 시를 맺는다.

글쎄, 아빠에게 마흔은 아직 걸어가야 할 길이 많이 남은 나이 같은데...
시인은 이런 시를 쓰곤, 마흔 네 살에 지리산 등반 중 실족사로 죽고 말았어. 

이제 내게 남아 있는 길
내가 가야 할 저만치 길에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크고 넓은 세상에
객사인지 횡사인지 모를 한 독신자의 시신이
기나긴 사연의
흰 시트에 덮이고
내가 잠시도 잊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달려와
지상의 작별을 노래하는
모습 보인다
오 하느님
죽음은 단숨에 맞이해야 하는데
이슬처럼 단숨에 사라져
푸른 강물에 섞였으면
하는데요 <고정희, 독신자(신을 모독하는 자), 부분>

이런 시를 남기고 지리산 뱀사골의 계곡물에 휩쓸려 세상을 뜬 시인을 생각하면 마음이 짠하다.
자신의 앞날을 본 걸까?  

불혹에 대한 시를 더 볼까?

집에 가야 할 시간이 훨씬 지난 술집에서
싸움이 났다
노동과 분배와 구조조정과 페미니즘 등을 안주 삼아
말하는 일로 먹고사는 사람들과 즐겁게 술을 마시고 있는데
개새끼들, 놀고 있네
건너편 탁자에서 돌멩이 같은 욕이 날아온 것이다

갑자기 당한 무안에
그렇게 무례하면 되느냐고 우리는 점잖게 따졌다
니들이 뭘 알아, 좋게 말할 때 집어치워
지렛대로 우리를 더욱 들쑤시는 것이었다
내 옆에 있던 동료가 욱 하고 일어나
급기야 주먹이 오갈 판이었다

나는 싸워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어
단단해 보이는 상대방에게 정중히 사과를 했다
다행히 싸움은 그쳤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굽신거린 것일까
너그러웠던 것일까
노동이며 분배를 맛있는 안주로 삼은 것을 부끄러워한 것일까

나는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싸움이 나려는 순간
사십세라는 사실을 생각했다 <맹문재, 사십세>

뭐, 일상 속의 작은 사건에서 뭔가를 깨닫고 그걸 적는 게 '시'란 것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지식인인 화자의 동료들과 술집에서 '노동, 분배, 구조조정, 페미니즘' 등 떠들면서 한잔 하는데,
"개새끼들, 놀고 있네." 이런 욕설을 듣는다.
아마도 그 욕설을 던진 이는 노동자였으리라.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무례하면 되겠소?"  하고 따지자,
"니들이 뭘 알아, 좋게 말할 때 집어치워." 이런 대꾸가 온다.

옆자리 동료는 욱해서 일어나고
나는 사과를 하고, 싸움은 끝났다. 

화자는 자신이 비굴했던 것인지,
아니면 너그러웠던 것인지,
노동자들의 힘든 삶을 안주로 떠든 것을 부끄러워 했던 것인지,
이런 것들을 생각하는 순간,
자신이 나이 <마흔>이 넘었단 생각을 하게 된다. 

<구조조정>같은 말은 쉽게 말하자면,
기계가 자동화되고 세계 경제가 재편됨에 따라
한국의 조선 업계가 수주하던 물량이 중국으로 많이 넘어가게 되어
회사의 구조를 조정하기 위하여 <노동자를 함부로 자르는 일>이다. 

부산에도 영도에 <한진 중공업>이란 배만드는 회사가 있는데,
이번에 구조조정건으로 노동자들은 싸우고, 회사는 문을 닫는 일이 벌어졌단다.
노동자들에게 '구조조정'이란 말은 '사형'이라는 판사의 선고와도 같은 말인데,
지식인 나부랭이들이 술집에서 이야기를 떠들고 있으니,
옆자리 노동자들이 화가 났을 수도 있겠다.

재미있게도 '맹문재'와 이름이 같은 '이문재'도 같은 '마흔 살'이란 시를 남겼다.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늦가을 평상에 앉아
바다로 가는 길의 끝에다
지그시 힘을 준다
시린 바람이
옛날 노래가 적힌 악보를 넘기고 있다
바다로 가는 길 따라가던 갈대 마른 꽃들
역광을 받아 한 번 더 피어 있다
눈부시다
소금창고가 있던 곳
오후 세 시의 햇빛이 갯벌 위에
수은처럼 굴러다닌다
북북서진하는 기러기 떼를 세어 보는데
젖은 눈에서 눈물 떨어진다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 <이문재, 마흔 살>

맹문재의 <사십세>가 일화(에피소드) 중심이라면,
이문재의 <마흔 살>은 화자의 관조 중심이다. 

화자는 염전이 있던 곳으로 갔다.
계절은 '늦가을', 음, 염전의 일도 여름에 한창이니
한창때가 지난 계절, 나이 '마흔 살'과도 잘 매칭되는 계절이네.
'시린 바람'이 지나가고,
'옛날 노래'가 입에서 흥얼거려졌는지도 모르지.

말라버린 갈대꽃들은
넘어가는 햇빛 받아 눈부시게 반짝인다. 
이 마른 갈대꽃들도 나이 '마흔 살'과 어울리는 소재다.

'오후 세 시'란 시간도 역시 '마흔 살'에 어울리는 시간이다.
해가 슬몃 지려고 하는 시간.
열두시 반이면 해가 하늘 꼭대기에 올라앉아 이글거리고,
오후 두 시면 뜨거움이 절정에 이르는데,
그런 시간이 설핏 지난 시간, 오후 세 시.
계절도 '늦가을'
거기다 '말라버린 갈대꽃'
그리고 공간도 여름이 지나버린 갯벌의 <염전>,
햐~ 화자의 <마흔 살>이 이렇게 시각적으로 표현되고 있구나. 

기러기를 바라보던 화자는 눈물짓는다.
기러기가 가면 겨울이 오고, 곧 한 해가 끝나니 기러기 역시 가을이구나.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 

이 구절이 화자가 나이 <마흔>을 대하는 자세를 요약하고 있다.
옛날은 <흘러가버린 날들>을 일컫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은 <옛날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정작 화자가 나이 마흔이 되고 보니,

자신이 <옛날 사람들> 속에 포함되는 그런 것이란 생각에 눈물짓게 되는 것이다.
<흘러가버린 날들>이 옛날이 되는 것이라던 생각은
늙음은 남들의 것이란 의식이 담겨 있었는데,
이제 <늙음이 나에게도 오는 것>이라는 마음이 들고 보니,
<내게 오는 순간 순간들>이 모두 <흘러가버려 화석이 될 날들>로 여겨지고,

<한여름이 지나버린 염전>을 보아도,
<늦가을>이란 계절을 만나도,
<오후 세 시>의 뉘엿한 태양을 바라 보아도,
한창 피었다 말라가는 <갈대꽃>에 비친 반짝이는 햇살을 보아도,
가을을 느끼고 날아가는 <기러기>를 헤아리다가도,
문득 나이 <마흔>을 떠올리는 화자의 쓸쓸한 마음.  

글쎄, 아빠는 조금 이해가 되려고 하는데, ㅋ
민우는 어떨까?
요번엔  <삼십세>란 시를 한 편 보자.
<삼십세>는 오스트리아의 '잉게보르크 바흐만'이란 여성 작가의 책으로 유명하단다.
그는 삼십세를  이렇게 썼다.

30세에 접어들었다고 해서 어느 누구도 그를 보고 더 이상 젊지 않다고 말하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그 자신은 일신상에 아무런 변화를 찾아낼 수 없다 하더라도, 무엇인가 불안정하다고 느낀다.
스스로를 젊다고 내세우는 게 어색해진다. <잉게보르크 바흐만, 삼십세 중>

 뭐, 요즘에야 워낙 잘 먹고 사니깐 마흔인데도 동안이라며 좋아들 하지만,
1926년에 태어난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시대였다면 서른 살이 노년의 입구처럼 여겨졌을지도 모르지.
늙지는 않았지만, 더이상 젊다고 우기긴 어려운 나이 서른 살.
민우도 서른, 마흔이 되기 전에 너 자신의 젊음을 충분히 즐기렴.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내 꿈은 말이야, 위장에서 암 세포가 싹 트고
장가가는 거야, 간장에서 독이 반짝 눈뜬다.
두 눈구멍에 죽음의 붉은 신호등이 켜지고
피는 젤리 손톱은 톱밥 머리칼은 철사
끝없는 광물질의 안개를 뚫고
몸뚱아리 없는 그림자가 나아가고
이제 새로 꿀 꿈이 없는 새들은
추억의 골고다로 날아가 뼈를 묻고
흰 손수건이 떨어뜨려지고
부릅뜬 흰자위가 감긴다.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 우리 철판깔았네 <최승자, 삼십세>

인생은 하나하나 개별자마다 모두 다른 것이란다.
누구는 백수를 누리고 누구는 열 살도 못 되어 세상을 뜬다.
인생에서 <표준 그래프>란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단다.
이 시에서 '삼십세'는 화자 개인의 체험이라고 봐야 할 게다. 

그의 서른은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나이였다.
참 힘겨웠나보다.

치통으로 시작된 <통증>은
<암 세포>가 싹트고, 간의 <독>이 눈 뜨고,
그렇지만 '장가'가고픈 꿈도 있었는데,
<죽음의 붉은 신호등>이 켜지면,
<젤리같은 피>, <톱밥같은 손톱>, <철사같은 머리칼>로
생명력 하나 없이 금세 바스라질 것 같은 육신으로,
안개 속에서 그림자처럼 살고있던 서른이었나 봐. 

<꿈없는 새>들은 예수가 묻힌 골고다 언덕의 무덤으로 가 <뼈를 묻고> 만다.
이 시에서 반복된 이미지가 있어. 1연과 2연의 끝에 반복되는 구절.
흰 손수건과 부릅뜬 흰자위의 이미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1연)

흰 손수건이 떨어뜨려지고
부릅뜬 흰자위가 감긴다. (2연)

흰 손수건은 마치 하얀 '수의'나 '죽음의 드레스'를 연상시키는구나.
아름다운 서른 살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서른 살을 살고 있는 어떤 사람을 상상할 수 있겠니?
1연에서 그래도 애원하던 눈자위는 2연에서 감기고 만다.
서른에 죽음을 연상하는 시를 쓴 이는 세상이 얼마나 비관적이었을까?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 우리 철판깔았네  

마지막 연은 그래서 반전으로 보이지.
갑자기 우울 모드에서 행복 모드로 뒤바뀌니 말이야. 
고통에서 벗어난다면 죽음조차도 <행복한 항복>이란 말일까?
'행복'과 '항복'은 유사한 발음을 이용한 언어 유희가 되겠구나.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패러디한 마지막 구절 역시 화자의 삶을 반영한다.
이제 죽음에 대하여 초월한 화자는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지.
죽음보다 더 두려울 게 뭐가 있겠어?
얼굴에 철판깔고 사는 거지. 뭐.
자, 그럼 이 최승자 시인이 <마흔>이 되어 어떤 생각을 했는지 한번 볼까?
금세라도 죽어버릴 것처럼 광적인 마음이 드러난 시 <삼십세>가 <세기말>적인 시일 수도 있어.
1900년대의 타락한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이 저렇게 병적이었는지도 모르지.

서른이 될 때는 높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지.
이 다음 발걸음부터는 가파른 내리막길을
끝도 없이 추락하듯 내려가는 거라고.

그러나 사십대는 너무도 드넓은 궁륭 같은 평야로구나.
한없이 넓어, 가도가도
벽도 내리받이도 보이지 않는,
그러나 곳곳에 투명한 유리벽이 있어,
재수 없으면 쿵쿵 머리방아를 찧는 곳.

그래도 나는 단 한 가지 믿는 것이 있어서
이 마흔에 날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다. <최승자, 마흔> 

1952년생 시인 최승자로서는 그의 30대를 '광주 학살'로 시작해서 저렇게 괴로운 시를 썼을지도 모르겠다.
잉게보르크 바흐만이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는 책도 썼거든.
서른살 이후는 날개도 없이 추락하는 나이라고 생각했겠지.
서른을 <높은 벼랑 끝>에 섰던 것으로 회상하는 그의 <마흔>.

그가 마흔이 되자 세상은 <드넓은 궁륭 같은 평야>임을 느끼고 있어.
궁륭은 활처럼 휜 지붕을 의미하는 건데, 글쎄, 궁륭 같은 평야...는 좀 어색한 비유 같기도 해.
어쩌면 드넓은 궁전 같은 평야라고 쓰려고 했는지도 몰라. 

한없이 넓은 것 같지만, 구석구석 유리벽이 가로막는 세상.
그의 40대는 1990년대야.
한국인들이 처음으로 <해외여행>이 자유화 되었던 새로운 시대.
그래서 더 넓은 세상을 보려고 너도나도 비행기에 오르던 시대지.
그렇지만, 재수 없으면 쿵, 머리방아를 찧을 수도 있는 위험도 도사리고 있었지.
공산주의 국가가 개방되었다곤 하지만 그 시대만 해도 마음대로 드나들 수는 없던 시대였거든. 

마지막 연에서 그래도 그는 '단 한 가지' 믿는 것이 있다고 한다.
그 단 한 가지는 종교적 대상으로서의 '절대자'일 수도 있고,
화자가 시인이니 '시를 쓰는 일'일 수도 있고,
화자에게 끔찍이도 잘해주는 남편이거나 아들에 대한 사랑일 수도 있겠다.
날마다 그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조금 웃긴 표현으로 마무리짓는 걸로 봐서,
뭐, 그렇게 심각한 상태는 아닌 것 같지? 

암튼 화자는 서른 살에 그토록 비관적으로 꽉 막혔던 세상이,
나이 마흔 살이 되어 좀 숨통이 틘 것으로 볼 수도 있겠어.
건강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경제적인 살림살이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가족의 관계에서 힘들었던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화자가 직접 드러내지 않고 숨겨두고 이미지만 드러내니 구체적인 건 상상하기 힘들구나.

 

오늘은 <나이>란 주제에 대한 이야기들을 모아 보았다.
이렇게 한 주제를 두고 다양한 예술가들이 작품을 내는 것을 <옴니버스>라고 한다.
만약에 <불혹>이란 제목의 시집에 이런 작품들이 모였다면 <옴니버스 시집>이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사랑'이란 주제를 주고 세 명의 영화 감독이 전혀 의논하지 않고 색다른 영화를 만들어 한꺼번에 방영한다면,
<옴니버스 영화>가 될 것이고 말이야. 

이와 비슷한 개념으로 <피카레스크 구성>이란 것이 있단다.
'포켓 몬스터'란 만화 영화를 떠올리면 피카레스크 구성이 이해가 갈 거야.
맨날 똑같은 등장 인물이 나오지.
지우와 이슬이, 용이가 가는데, 새로운 마을에서 새로운 몬스터와 만나게 된단다.
새로운 몬스터와 싸우는 와중에 로켓단이 훼방을 놓다 날아가고 한 편은 끝나지. 
다음 시간이 되면 또 같은 등장 인물들이 같은 패턴으로 행동하고 말이야. 

'막돼먹은 영애씨'도 그렇고 '명탐정 코난'도 그렇잖아.
영애씨 가족과 회사 사람들이 맨날 나오고,
코난과 미란이, 탐정 아저씨, 그리고 동네 꼬마들과 박사님은 맨날 나오지.
그렇지만 매 회 색다른 사건이 펼처지는 구성을 피카레스크 구성이라고 한단다. 

오늘은 '나이'에 대한 <옴니버스 구성>으로 시들을 읽었다.
민우도 네 나이 '열아홉'에 대해 생각해 봤니? ㅋ
아직 생각하기엔 너무 적은 나인가?
그치만 삶에서 아주 힘든 1년일 수 있단다.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 의논하자꾸나.
그게 좋은 가족이 아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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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1-03-02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라는 주제로 시를 모으니까 재미있네요 오십에 관한 시가 없는 것도 재미있구요 찜해갑니다

글샘 2011-03-03 23:07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오십 이후론 시가 잘 없어요. 그런 생각은 못해봤네요.
오십 이후론 소설 양식이 적절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는 감상이 그대로 묻어나서, 우울해지거나 써늘해 질는지도...
 

고3 올라가지 전 마지막 휴가를 다녀오느라 며칠 쉬었구나.
이제 내일 3.1절 하루만 쉬면 본격적인 고3이다.
민우도 새로운 마음일 거라 생각한다. 

그런 이야기가 있더구나.
농부가 밭을 가는데, 숙련된 농부가 간 밭은 똑바른데 비하여,
초보 농부는 삐뚤빼뚤 갈아놓았대.
초보가 숙련된 농부에게 비결을 물어 보았더니,
수십 년간 반복하다 보니, 밭을 갈 때 먼 곳의 소나무를 목표지점으로 삼아 간다는 것이었지.
이렇게 목표가 있는 사람은 똑바른 생활을 하는 데 더 힘들지 않은 법이란 이야기일 거야. 

오늘은 지폐에 등장하는 인물 퇴계 이황의 '도산십이곡'이란 시조를 공부해 보자꾸나.
몇 번 '시조'는 '문자문학'이 아니라 '시조창'이란 노래란 이야기를 했을 것 같다.
도산십이곡은 '도산(陶山)'이란 지역의 십이 골짜기를 노래한 것으로,
이황이 만년에 후학 양성을 위하여 지은 '도산 서원' 주변의 자연을 노래한 것으로 보면 된다. 

그런데, 요즘으로 치면 최고급 학원이었던 도산서원에 모인 서생들은,
멤버로 친다면 조선에서 내로라 하는 가문의 훌륭한 인재들일 거였어.
그 자부심도 대단했겠지.
조선시대에 '사대부'란,
군자의 도를 닦을 때는 '사'가 되고, 입신출세하여 이름을 떨치는 벼슬을 하면 '대부'가 되는 이였단다.
그 서원의 <교가>라고 보면 될 거야. 

이 시조는 총 12수로 이뤄져 있는데,
앞의 6곡(전 6곡)은 <자연에 동화된 생활>을 그리고,
뒤의 6곡(후 6곡)은 <학문 수양 및 학문애(學問愛)>를 권하는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
앞부분의 '자연에 동화된 생활을 하겠다는 의지'를 한자로 <지(志)>라고 부르고,
뒷부분의 '학문을 추구하는 생활을 하겠다는 내용'을 한자로 <학(學)>이라고 부른대.
<지>를 말한 부분은 <언지(言志) >, <학>을 일컬은 부분을 <언학(言學) >이라고도 하지.  

이 노래는 문학적으로 볼 때에는 중국 문학을 차용한 곳이 많고,
생경한 한자어가 남용되어 높이 평가할 수는 없지만,
성리학의 대가의 작품이라는 점을 살펴보면,
시조의 출발이 유가(儒家)의 손에 있었고 그 성장 발전 역시 그들에 의하여 이룩되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노래야. 

이황과 이이가 지폐에 새겨질 정도로 높이 알려진 이유는
조선은 군주제 국가인 <왕조>였고,
그 <왕조>를 떠받드는 이념적 기틀이 바로 <성리학적 질서>였는데,
중국의 <성리학>을 조선 지배 이념으로 학문적으로 높은 경지까지 연구한 사람들이 바로 이 두 사람이란 거야.
조선의 임금 입장에서는 엄청 중요한 사람들이었던 거지.
근데... 과연 <대한민국>의 국민들에게 그들이 뭘 해줬는지는... 글쎄다. 연구 과제구나. ^^

자, 그러면 조선 최고의 학원 도산서원의 교가를 1절부터 차근차근 읽어보자꾸나. 

[1] 이런들 엇더하며 져런들 엇더하료 
    초야우생(草野愚生)이 이러타 엇더하료 
    하믈며 천석고황을 곳쳐 무슴하리.

이렇게 산들 어떠하며, 저렇게 산들 어떠한가
초야에 묻혀 사는 어리석은 서생이 이렇게 산들 어떠할 것인가.
하물며 자연을 몹시 사랑하는 병을 고쳐서 무엇하리

<자연 사랑>의 뜻(언지) 제 1장이야.
엇더하며, 엇더하료, 초야우생이, 엇더하료.
반복되는 구절을 표기해 보면 aaba 구조라고 볼 수 있지.
<천석고황>은 '샘물 천(泉)', '돌 석(石)'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슴 속 깊은 곳에 병이 되었다(고황)이라고 과장해서 표현하는 것이란다. 

사대부가 세상으로 나아가는 입신출세를 하지 않더라도,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며 늘 기회를 기다리는 자세. 그것이 바로 '안빈낙도'이며 '안분지족'이지.
그러려면, 때를 만나 출세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할 일을 다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진인사대천명>의 자세가 필요하단다.
그러니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 자연 친화적 태도가 강조된 것이라 보면 될 거야. 
2연을 보자. 

[2] 연하(煙霞)에 집을 삼고 풍월로 벗을 삼아 
    태평성대(太平聖代)에 병으로 늘거가뇌 
    이 중에 바라는 일은 허믈이나 업고쟈.

안개와 놀을 집으로 삼고 풍월을 친구로 삼아
태평성대에 병으로 늙어가지만
이 중에 바라는 일은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나 없었으면... 

역시 <안빈낙도>의 뜻(언지)을 드러낸 표현이지.
자연을 집으로 삼고 벗을 삼는다.
입신출세하면 세상 사람들이 '베프'가 되자고 난리를 치겠지?
그치만 화자는 아직 <세상에 나가지(출세)> 못했어.
그러니 자연을 벗을 삼을 수밖에.
세상은 평안한데, 병으로 늙게 되니 나이가 많아졌지.
그런데 희망 사항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살고 싶다는구나.  

아직 입신출세하지 못한 선비가 <허물>이라면 어떤 것이겠니?
오직 출세를 위하여 인격적 수양을 게을리 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리지 못하고 출세를 위하여 안달복달하다가,
급기야 뇌물을 쓴다거나 과거 시험에 부정을 저지른다면 큰 <허물>이 되지 않을까?
아니면 허생전의 주인공처럼
마누라의 바가지에 못 이겨, 돈벌이에 나서서
선비의 고결함에 누를 끼치고 <장사치>의 비루함을 행하는 일도 <허물>이 될 거야.
돈에 연연하는 것을 '허물'로 친 허생이 변부자에게
"당신은 나를 장사치로 보는가?"하고 소리지른 말이 이런 맥락일 거야.
3연을 보자꾸나. 

[3] 순풍(淳風)이 죽다하니 진실로 거즛말이 
    인성(人性)이 어지다하니 진실로 올흔말이 
    천하(天下)에 허다 영재(英才)를 소겨 말슴할까.

순수한 풍습이 줄어 없어지고 사람의 성품이 악하다고 하니 이것은 참으로 거짓이다.
인간의 성품은 본디부터 어질다고 하니 참으로 옳은 말이다.
천하에 슬기로운 사람(영재)을 속여서 말할 수 있을까?  

순박한 풍조가 사라진다고 한다. 에이, 거짓말이겠지.
인간의 품성은 원래 어질다고 한다. 그래, 정말 옳은 말이야.
세상에 허다하게 많고 많은 영재를 속일 수 있겠어?
똑똑한 사람이라면 인간은 원래 <착한 본성>을 가지고 있고,
세상이 험악한 것 같지만 <순박한 풍조>는 아직 남아 있대. 

3연에선 자연 친화가 나오지 않지?
그렇지만, 아직까진 <언지>잖아. 화자의 뜻을 강조하는 부분.
인간의 품성은 원래 순박한 것이고, 어진 것이래. 성선설이지?

맹자가 4단을 이야기했어. '단(端)'은 '새싹의 뾰족한 끝'을 가리키는 말이야.
인간에겐 네 가지 싹수가 있다는 거지.
불쌍한 인간을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
나쁜 일을 싫어하는<수오> 마음.
좋은 일만 바라지 않고 겸손하게 <사양>하는 마음.
옳고 그른 일을 가릴 줄 아는<시비> 마음. 

이런 새싹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고 해서 4단이라고 했고,
그것을 유교의 <인, 의, 예, 지>와 연결지어 생각하기도 했던 거란다.
인간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이어받기도 했겠지.
부처님이 선배니 말이야. 선배의 좋은 점은 따라해야 하지 않겠어?
인간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싹수>를 가지고 있단다.
그러니, 학교든 학원이든, 도산서원이든 그 싹수를 바탕으로 교육을 하는 거지.

[4] 유란(幽蘭)이 재곡(在谷)하니 자연이 듯디 죠해 
    백설(白雪)이 재산(在山)하니 자연이 보디 죠해 
    이 중에 피미일인(彼美一人)을 더옥 닛디 못하얘

그윽한 난초가 골짜기에 피어 있으니 듣기 좋아
흰눈이 산에 가득하니 자연이 보기 좋아
이 중에 저 아름다운 한 사람(임금)더욱 잊지 못하네

난초가 골짜기 가득 피었으면 그 향을 맡기(듣기) 좋고,
눈이 산에 가득 쌓였으면 그 경치가 보기 좋지.
이렇게 사는데도, 안분지족의 마음 속에 잊지 못하는 한 가지 뜻은,
바로 <그 아름다운 한 분>을 향한 사랑이란다. 

조선의 성리학은 <왕조>의 이념이라고 했지?
결코 <어리석은 백성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자가 많아서> 훈민정음을 만든 게 아니란다.
왕조의 이념인 성리학을 백성에게 교육하기 위해서 훈민정음이 필요했던 거지.
그래서 훈민정음 창제 이후 가장 열심히 찍어낸 책이
유교의 <바른생활 교과서>인 <소학>이었단다.
국어책에 <소학>과 <삼강행실도>가 실린 걸 배웠지?
정말 훈민정음이 어린 백성을 위한 거였다면,
열심히 번역, 출판했어야 하는 책은 '법전'이나 '의학서', '각종 증명서' 등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러니 성리학의 기본인 <뜻>을 드러내는 시에서
임금님(미인)이 빠질 수 없었겠지. 

[5] 산전(山前)에 유대(有臺)하고 대하(臺下)애 유수(有水)ㅣ로다. 
    떼 많은 갈며기는 오명가명 하거든 
    엇더타 교교(皎皎) 백구(白鷗)는 멀리 마음 하는고

산 앞에 높은 대(낚시터)가 있고, 대 아래에 물이 흐르는구나.
떼를 지어 갈매기는 오락가락 하거든
어찌하여 희고 깨끗한 갈매기(어진 사람 - 현자)는 멀리 마음을 두는고

'대'는 절벽을 상상하면 돼.
부산에도 '태종대, 해운대, 이기대, 오륜대, 몰운대, 자성대' 등이 많잖아.
'대'는 높직한 곳이어서 절벽이나 동산 같은 뜻을 지닌다.
그 아래 물이 흐른대.
갈매기도 오락가락 하고 있는데,
어쩌자고 교교한 달밤에 갈매기는 마음을 멀리 두고 있을까? 이런 생각. 

멋진 경치에 떼를지어 나는 갈매기들은 <일반 갈매기>야.
리처드 바크가 쓴 <갈매기의 꿈> 이야기를 아니?
여느 갈매기는 먹고 사는데 급급하지만,
오타쿠 갈매기가 한마리 있었다. 그 이름은 조나단 리빙스턴!
그는 날마다 더 폼나게 나는 법을 연구하지.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그는 혼자 연습에 몰두해.
아까도 이야기했듯,
갈매기 조나단은 <자신이 할 일을 다 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선비>의 자세와 통하는 것 같아.
진인사 대천명. 조나단에겐 진구사 대천명이겠지. ㅋ 

갈매기 떼는 오명가명 날지만,
어찌하여 <교교 백구>는 멀리 마음을 두는 것일까? 이런 의미.
교교는 '달빛이 밝고 환하다'는 때 쓰는 '교교'하다~ 이런 거야.
<교교 백구>는 일반 선비떼와 구별되는 존재지.
그저 입신출세에만 눈먼 선비와는 달리,
멀리 마음 두는 선비.
조나단 리빙스턴처럼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는 말을 하려면,
마음 자체를 일반 갈매기들과는 다르게 먹는 자세가 필요하단다. 

[6] 춘풍(春風)에 화만산(花萬山)하고 추야(秋夜)에 월만대(月萬臺)라 
    사시가흥(四時佳興)이 사람과 한가지라. 
    하믈며 어약연비(魚躍鳶飛) 운영천광(雲影天光)이야 어내 그지 이시리.

봄바람에 산에 꽃이 만발하고, 가을밤에 달이 대에 가득하다.
사계절의 흥취가 사람의 흥겨움과 같구나.
하물며 고기가 뛰고 소리개 날며 구름은 그림자 지고 빛이 가득하기 어느 하나인들 다함이 있겠는가.

자, 이제 <언지>, 즉 선비가 가져야 할 바람직한 마음가짐의 마지막 노래야.
앞의 다섯 곡을 요약하자면,
1. 안빈낙도하며 자연을 즐기고,
2. 선비로서 허물을 짓지 말고,
3. 성선설(인간의 가능성)을 의심치 말고,
4. 임금을 늘 생각하고,
5. 뜻을 멀리, 크게 두고...
6. (                                        )
이런 거야. 이제 6번을 채우자. 

봄에는 산에 꽃이, 가을엔 누대에 달이 가득한 자연 친화적 풍광은 익숙한 거지?
자연의 아름다운 변화의 흥겨움은 인간 세계와 동일하대.
물고기, 솔개, 구름, 햇빛은 끝이 없을 거라는구나. 

즉 자연이 그침이 없이 날마다 새롭게 생동감 넘치듯,
인간도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뜻이 담겼다 보면 되겠다.
위의 빈 칸에 채울 내용은?
(자연처럼 끝없이 진리를 추구하는 자세를 가지자)는 권유가 되겠지. 

자, 그럼, 이제 뒷부분의 여섯 수를 살펴 보자.
언학이라고 했으니, 공부합시다~ 이런 내용이겠지?
미리 생각해 보자.
퇴계 선생님은 무엇을 완성하신 분이라고 했지?
<왕조>의 이념적 기반인 <성리학>이야.
이황은 임금을 가르치려고 <성학십도>란 책도 썼단다.
성인의 학문을 가르치기 위한 열 장의 <그림>이야. 시청각 자료라 보면 되지.
성리학을 열 장의 파워포인트 자료에 정리한 책이라 보면 된단다. 

참고로 율곡 이이의 <성학집요>는 성리학의 <요점을 모은> 요점 노트가 되겠지. 
암튼, 성리학에 대한 탐구와 학문적 열정을 잊지 말자는 이야기가 앞으로 펼쳐질거야. 

[7] 천운대 도라드러 완락재 소쇄(瀟灑)한듸 
    만권(萬卷) 생애(生涯)로 낙사(樂事)ㅣ 무궁(無窮)하얘라. 
    이 중에 왕래(往來) 풍류를 닐러 므슴할고

천운대를 돌아들어간 완락재는 깨끗한데
많은 책에 묻혀 사는 생활의 즐거움이 끝이 없구나
이런 중에 바깥을 거니는 재미를 말해서 무엇하랴

천운대는 높직한 '대'겠지. 완락재는 '별당'일 거야.
서재로 쓰는 건물이겠지. 근데, 거기가 <소쇄>하대.
'소쇄'는 아주 중요한 낱말이란다.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말인데,
한여름 무더위에 소나기가 한 줄금 뿌리고 간 뒤의 시원한 느낌, 이런 것이란다.
<소쇄>는 풍경뿐만 아니라, 정신적 경지까지도 일컬을 수 있을 거야.
왜 좋은 사람은 만나고 나면 마음이 상쾌해지잖아.
책을 만 권 읽었다니 과장법이다.
예전엔 책이 그렇게 많지 않았으니 말이야.
그렇지만 암튼 대단한 독서가란 이야기지.
즐거움이 끝없단다. 독서의 즐거움. 

그런 즐거움 중에서도,
<왕래 풍류>는 말할 것도 없이 즐겁다는구나.
왕래는 <오고 가는 것>이지?
풍류는 자연 속에서 학문을 논하는 것일 거야.
책을 만 권 읽은 즐거움보다 더 큰 것은 <왕래 풍류>래. 

아빠가 교지에 쓴 글 읽어 봤니?
공자가 말한 <멀리서 벗이 오니 즐겁지 아니한가?>하는 구절.
그 벗은 <학문적으로 토론이 가능한 벗>일거야.
관심사가 같은 사람들 말이지.
혼자서 책읽는 것보다 더 큰 즐거움은 마음이 통하는 벗과 오가며 의견을 나누는 공부라는구나. 
그래서 <서원>에서 함께 공부하는 일이 중요하겠지. 

[8] 뇌정(雷霆)이 파산(破山)하여도 농자(聾者)는 못 듯나니 
    백일(白日)이 중천하야도 고자는 못 보나니 
    우리는 이목 총명(聰明) 남자로 농고같지 마로리


우뢰 소리가 산을 깨뜨릴 듯이 심하게 울어도 귀머거리는 못 듯네
밝은 해가 하늘 높이 올라도 눈 먼 사람은 보지 못하네
우리는 귀와 눈이 밝은 남자가 되어서 귀머거리와 봉사 같지 말리라

귀머거리는 천둥소리를 듣지 못하고, 맹인은 해를 보지 못한다.
우리는 이목이 밝은 남자이니, 귀머거리, 맹인처럼 살지는 말자는 이야기다. 

자, 이 노래는 일반인들에게 들려주는 노래가 아니라고 했다.
왕조 조선의 통치 이념인 성리학을 연구하는 <도산 서원>의 주제가인 만큼,
뻔하게 눈 앞에 보이는 <진리>인 성리학 연구를 반드시 해야한다는 강조일 것이다.

[9] 고인(古人)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봇 뵈 
    고인을 못 뵈도 녀던 길 알페 잇네
    녀던 길 알페 잇거든 아니 녀고 엇졀고 


옛 어른(성인)도 나를 보지 못하고 나도 그분들을 못 보네
그러나 그분들이 행하던 길은 아직도 앞에 놓여 있네
그렇듯 올바른 길이 우리 앞에 있는데 그를 따르지 않고 어찌할고?

이 9연~11연이 시험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연들이다.
성인도 나를 못 봤고, 나도 성인을 만나진 못했지만,
그분들이 녀던(가던, 다니던) 길이 앞에 있다. 

성인의 길이란 곧 <성리학적 길>인 것이다.
인간의 본성을 연구하는 것이 <성리학>이다.
요즘 이야기하는 <인문학>에 들어가는 문학, 역사, 철학 등이 다 포함된 것인데,
그 기본이 인간의 본성이란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순하고 선한데,
그 <어진 본성>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것이 성리학이다.
극기복례(克己復禮)는 '자신만을 내세우는 이기심을 이겨내고, 예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다.
논어의 주제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말은,
인간다움의 요체는 '사랑'인데, 사랑을 실천하는 길은 곧 자신을 절제하는 마음.
<제가 하기 싫어하는 일은 남에게 시키지 말라>는 정신이다. 

공자의 말씀으로 비롯된 성리학적 올바름의 드러난 모습인 <예>를 행하는 일.
그것이 옳다는 것을 안다면,
<공자님이 행하신 길이 앞에 있으니, 나도 아니할 수 없다>는 반어적 질문이다.
안 가고 어쩌겠는가? 가야지. 당근.
성리학, 이거 참 좋은데~
뭐라 말로 설명할 수가 없네~.
좋다.
누구한테 좋다고? 남자한테? 노~~~
바로 임금한테 좋단 거야.
선비는 오로지 왕조를 지탱하기 위한 존재로서만 의미가 있다보면 될 거다.

[10 ] 당시(當時)에 녀던 길흘 몃 해를 버려 두고 
    어듸 가 다니다가 이제아 도라온고? 
    이제야 도라오나니 년 듸 마음 마로리.


그 때 뜻을 세우고 학문 수양에 힘쓰던 길을 몇 해씩이나 버려 두고
어디에 가서 무엇하다가 이제야 돌아왔는고?
이제라도 돌아왔으니 다른 곳에 마음 두지 말고 옛날에 하던 학문 수양하리라

퇴계는 젊어 등과하여 노년에야 고향으로 돌아온다.
안동의 '도산' 골짜기에 손수 설계한 집을 짓고,
도산서원이라 하였다.
현판을 쓴 이는 한석봉인데, 너무 쫄아서 질그릇 도 글자가 삐뚤어졌다는 농담도 있다. 

학문 연구의 길을 버려두고 벼슬살이의 북새통에서 살다 왔다.
어디 돌아다니다 이제 돌아왔는가~ 이런 반성이 보인다.
이제 돌아왔으니, 년 듸(다른 데) 마음두지 말자! 이런 의지가 보인다. 

다른 데 마음 쓰지 말고, 열공!!!하자는 의지가 불꽃을 튀긴다.
그 공부의 내용은 이제 알겠지?
바로 성리학이다. 조선 왕조의 기틀, 성리학.  



[11] 청산(靑山)은 엇데하야 만고(萬古)애 프르르며,
    유수(流水)는 엇데하야 주야(晝夜)애 긋디 아니하는고.
    우리도 그치디 마라 만고상청(萬古常靑)호리라.


푸른 산은 어찌하여 영원히 푸르며
흐르는 물은 또 어찌하여, 밤낮으로 그치지 않고 흐르는가
우리도 그치는 일이 없이, 언제까지나 푸르게 살리라

산은 맨날 푸르고, 물은 맨날 흐른다. 변치 않는 자연의 속성이다.
근데, 인간은 툭하면 공부를 스톱한다.
특히 일에 바쁘면 공부를 뒷전으로 미룬다.
그 공부는 바로? 성리학이지. 

어떤 대기업에서 <일십백 운동>을 말한다고 하더구나.
초중고 대학에서 <일>을 배운 사람을,
기업에서는 <십>을 알도록 가르칠테니,
스스로 <백>을 공부해야 미래에 적합한 인재가 된다고 한다. 

세상의 지식은 <네이버 지식in>에게 물어보면 다 나온다. 물론 쬐끔은 틀리지만 ㅋ
배가 아파도 네이버에 물어본다. 의사는? ㅋㅋ 나중에 확인차 물어보는 거고...
지식의 변화 속도가 엄청나다. 정보의 양은 메가톤급이다. 
한 사람이 하나의 직업으로 평생 사는 시대가 가고 있다.
한 나라에서 사는 시대도 가고 있다. 

그래서 요즘 맨날 나오는 말이 <자기 주도적 학습>이란다.
학교에서 아무리 열공해도, <1>밖에 못 배운다니 말이다.
회사에서 전문적 지식을 습득해도 <10>밖에 안 된다니 한숨난다.
평생 배워야할 <100>은 그야말로 스스로 학습하는 수밖에 없다.
변하지 말고, 그치지 말고, 꼿꼿하게 공부하는 자세를 버리지 말자는 의미의 시조를
책상 머리에 붙여두는 일도 좋을 듯 싶다.

[12] 우부(愚夫)도 알며 하거니 긔 아니 쉬운가? 
    성인도 못다 하시니 긔 아니 어려온가? 
    쉽거나 어렵거나 중에 늙는 줄을 몰래라.


어리석은 자도 알아서 행하니 학문의 길이 얼마나 쉬운가
그러나 성인도 다하지 못하는 법이니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쉽든 어렵든 간에 학문을 닦는 생활 속에 늙는 줄을 모르겠노라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 학문>인 성리학.
그건 바보도 안다. 알기는 쉽다.
그렇지만 공자도 못다 하셨다. 실천은 어렵다.
알기는 쉽고 실천은 어렵지만,
그 학문을 닦는 속에서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그렇게 사는 것이 훌륭한 생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결국 <성리학>의 완성은 아는 것이 아니라, 실천에 있다는 것이란다. 

작년부터 발굽이 갈라진 동물에게 걸린다는 <구제역>이란 동물질병이 대유행을 했다.
그래서 그 병이 걸린 소와 돼지 등을 죽이는 <살처분> 명령이 내렸어.
근데, 소는 숫자가 적으니깐 한마리씩 죽여서 묻었는데,
돼지는 숫자가 너무 많으니까 구덩이를 파고 비닐을 깐 뒤
몇백 마리에서 천여 마리까지 생매장을 했단다. 

요즘 그 참상을 담은 동영상이 떴는데, 정말 눈뜨고 보기 어렵더라.
문제는 그 담에 생겼어.
동물 사체에서 흘러나올 액체(침출수)를 모으기 위해서 비닐을 두 겹으로 까는 건데,
산 돼지를 무더기로 묻으니, 그 돼지들이 발버둥을 치면서 비닐을 다 찢었어.
원래 사체에서 나오는 물은 정화조에 모이도록 되어있는데, 비닐이 찢어지는 바람에
그 돼지들의 사체가 썩으면서 나오는 물이 지하수로 들어간 거야.
그 지하수를 펌프로 퍼올려 농업용수로 쓰던 농가들은
어느날 갑자기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물을 농작물에 뿌릴 수 없게 되었지. 

그 물은 결국 식수로 사용하는 강물로까지 흘러들어가게 되었단다.
동물의 사체를 무더기로 묻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너무도 뻔한 일을 대~~충 해 놓으니 당연히 이런 결과가 생긴 거야. 
사태의 심각성에 비해 원인은 너무도 작은 것이었단다. 

이렇게 세상 살이에서 중요한 것은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니야.
<내가 알아야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는 책이 있었어.
성인의 말씀을 아는 것은 쉽다는 거지.
뭐, 세상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책이 있고,
다 따지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철학자들과 그 유파가 있단다.
그치만, 삶에서 중요한 것.
그런 철학적 태도는 어려운 게 아니란 거야.
문제는,
실천하는 사람이 적다는 것. 그런 거지. 

이 노래는 16세기에 지어진 시조란다.
근데, 하나 살펴볼 게 있어.
18세기에 상당히 앞서나간 사상을 가졌던 박지원같은 사람도 한문으로 소설을 썼단다.
교과서에서 배운 <허생전>도 사실은 한문 원본을 번역한 거야.
그런데, 왕조의 성리학적 토대의 핵심 요원이던 퇴계 요원이 <시조>로 교가를 지어 부른 이유가 뭘까? 

그 내용이 <도산십이곡 발>에 잘 적혀 있어.
'발'은 '창작 동기, 배경, 작가의 견해' 등을 적은 글이야.
읽고 설명해 볼게.

도산 노인은 평소에 음률을 이해하지 못하나, 세속의 음악은 싫어하였다.
그러나 노인은 한가롭게 병을 요양하던 중에 무릇 마음에 느끼는 바가 있으면 시를 짓곤 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시는 옛날의 시와는 달라서 읊기는 좋아도 노래하기에는 적합하지 못하여,
이를 노래로 부르려면 우리말로 지어야 되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음절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별이 지은 ‘육가’를 본을 삼아 ‘도산육곡’ 둘을 지으니,
그 첫째는 ‘지(志)’를 말한 것이고, 둘째는 ‘학(學)’을 말한 것이다.
이를 아침 저녁으로 아이들에게 익혀 부르게 하며, 의자에 기대어 듣기도 하려니와
또한 아이들이 스스로 노래하고 춤추게 하면 비루함과 인색함이 사라지고 마음이 감동하고 서로 통하여
노래 부르는 자와 듣는 자가 서로 이로움이 있을 것이다. <이황, 도산십이곡 발에서>

오늘의 시는 옛날의 시와는 달라서 읊을 수는 있겠으나, 노래하기에는 어렵게 되었다.
이제 만일에 노래를 부른다면 반드시 이속(俚俗)의 말로써 지어야 할 것이니,
이는 대체로 우리 국속(國俗)의 음절이 그렇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내가 일찍이 이별의 노래를 대략 모방하여 ‘도산 육곡’을 지은 것이 둘이니,
기 일(其 一)에는 ‘지(志)’를 말하였고, 기 이(其二)에는 ‘학(學)’을 말하였다.
아이들로 하여금 조석(朝夕)으로 이를 연습하여 노래를 부르게 하고는 궤(几)를 비겨 듣기도 하려니와,
또한 아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노래를 부르는 한편 스스로 무도를 한다면
거의 비린(鄙吝)을 씻고 감발(感發)하고 융통(融通)할 바 있어서,
가자(歌者)와 청자(廳者)가 서로 자익(資益)이 없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이 시를 창작한 배경을 알 수 있는 자료야.
도산 노인(이황)은 우선 세속의 음악과 지금의 한시와 다른 노래를 짓고자 했대.
그리고 아이들로 하여금 이 노래를 불러 ‘지(志)’와 ‘학(學)’을 깨닫게 하고자 하는
후학 양성의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어.
또한 아이들이 밤낮으로 이 노래를 통해 정신 수양을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지었으며,
나아가 이 노래를 듣는 자도 부른 자와 같은 마음이 일어나도록 유도했다고 그래. 

우리 나라의 음률에 적합한 노래를 지어 부르게 한 것이지.
결국 이 노래를 부르면서 마음 속에 <내면화>되도록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었을지,
생각해 보면 이 노래의 주제를 알 수 있단다.
내가 몇 번 반복해서 이야기한 것처럼
<언지>에서 선비의 바람직한 삶의 자세를,
<언학>에서 <성리학>에 대한 학문적 탐구의 자세를 가르치려 한 것이겠지. 

이렇게 노래는 그 시대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거란다.
요즘 노래들이 '가벼운 만남과 헤어짐'을 노랫말에 담고 있다면,
시대가 그렇게 변하고 있음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 

자, 이제 바쁜 학기초가 되겠구나.
민우도 마음을 잘 가다듬고 새학기를 맞기 바란다.
곧 겨울눈을 찢는 아픔을 겪고 새싹과 봄꽃들이 치열하게 돋아날 것이다.
그 꽃들을 보면서 삶의 원리도 곰곰 생각해 보는 봄을 맞기 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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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이상을 이야기하면서, 1930년대에 도무지 이해받지 못할 짓을 한 시인이라고 이야기했다.
오감도라는 특이한 용어를 쓰면서 말이지.
오늘은 그의 작품 중 '거울'이란 작품을 살펴 보자.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이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게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이상, 거울>

띄어쓰기를 하지 않은 것은 큰 특징이라 보기 힘들어.
일본어는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고,
일제 강점기의 책들 중에서 띄어쓰기가 없는 것도 많이 있었단다.
근대 이전의 책에서 띄어쓰기가 있는 다음엔
임금을 가리키는 '상(上)'같은 말이 나오곤 했지. 

거울 밖의 세계와 거울 속의 세계는 닮았지.
아니 똑같아 보이기도 한단다.
그렇지만, 자세히 보면 다른 것이 많다.
그럴 발견하는 시인의 창의성, 한번 따져 볼까? 

우선 거울 속엔 소리가 없어. 여긴 있는데 말이야.
내 귀는 소리를 듣지만, 거울 속에도 귀는 있으나 듣지 못하지. 소리가 없으니...
나는 오른손잡이인데, 거울 속에선 반대지.

거울은 내가 비춰지지만 거울 속의 나를 나는 만질 수 없다.
만날 수 없는 <단절>의 역할을 거울이 하는 거야.
그렇지만, 또 거울 덕분에 나를 만나게 되었으니,
거울은 <소통>의 역할도 하고 있겠지? 

내가 거울을 보고있지 않을 때도, 거울 속엔 내가 들어 있어.
나는 거울 속 내가 뭘할지 모르지만
아마도 잘못된(나와 반대로 된) 일에 골몰하고 있을 거라는구나. 

거울 속의 나는 참나와 반대지만, 한편 똑같이 닮았지.
'참나'는 '거울 속의 나'를 제대로 알지 못해서 답답하고 힘들단다.
그걸 근심하고 진찰할 수 없으니 퍽 섭섭하다고 표현했어. 

이상의 <거울>은 <참 자아>와 <분열된 자아>에 대한 생각을 표현한 것이란다.
내가 살아가는 <참 자아>는 늘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비추어지는 것이기도 하지.
혼자 있을 때는 까칠한데 사람들은 부드럽다고 느낀다든지,
혼자 있을 때는 게으른데 사람들은 부지런하다고 여기기도 하지.
세상엔 <참 자아> 이외의 <분열된 자아>도 있는 거야.  

이상은 일제 강점기에 건축을 전공해서 공무원 생활을 하기도 했단다.
그렇지만 열심히 하려는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세상은 엉망으로 돌아가기도 했지.
심지어 병까지 들어 요양하러 시골에 오래 내려가 있기도 했대.
<나>와 <거울 속의 나>는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느꼈던 혼란상이 잘 그려져 있는 시야.  

  나는 무얼 바라/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눈물과 위안으로 잡은 최초의 악수. <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

 

거울은 이렇게 세상을 똑같이 비춰주는 역할을 하면서,
사실은 따져볼수록 세상과 다른 점이 많기 때문에 영화에도 자주 등장하지.
거울에서 연상된 공포 영화도 많을 수밖에...

다음에 읽어주는 시는 이가림의 시란다.
그의 '유리창'은 어떤 역할을 하는지 한번 살펴 보렴.
임은 부재하지만, 저편에서 오는 빛을 아무도 볼 수 없지만,
나는 느끼고 나는 보인다. 임의 눈동자가 말이야. 

리창에 이마를 대고
모래알 같은 이름 하나 불러 본다
기어이 끊어낼 수 없는 죄의 탯줄을
깊은 땅에 묻고 돌아선 날의
막막한 벌판 끝에 열리는 밤
내가 일천 번도 더 입맞춘 별이 있음을
이 지상의 사람들은 모르리라
날마다 잃었다가 되찾는 눈동자
먼 부재의 저편에서 오는 빛이기에
끝내 아무도 볼 수 없으리라
어디서 이 투명한 이슬은 오는가
얼굴을 가리우는 차가운 입김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물방울 같은 이름 하나 불러 본다 <이가림,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어때? 시적 화자는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기대섰다.
처음과 끝이 대응되고 있지? 수미상응.
거기서 <모래알/물방울 같은 이름 하나 불러 본다>고 하고 있어.
유리창에서 모래알처럼 가슴 속에서 서걱거리는 이름을,
눈물 방울처럼 가슴 아리는 이름을 불러 보는 이는 이별의 슬픔을 또는
임의 부재를 서러워하는 마음이라 상상할 수 있겠구나. 

'기어이 끊어낼 수 없는 죄의 탯줄을 깊은 땅에 묻고 돌아선 날'이란 구절에서,
영원히 이별할 수 없는 당신을 땅에 묻은 날, 정도로 해석한다면,
임과 사별한 이의 슬픔이라고도 추측해 볼 수 있겟다. 

화자인 '내'가 일천 번도 더 입맞춘 별은 '사별한 임' 대신이겠지? 
날마다 잃었다가 되찾는 눈동자는,
정지용의 <유리창 1>에서와 같이 사별한 임을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거기서 떠올리는 상황인 듯.

어디선가 오는 이 투명한 이슬.
눈물이 주루룩 흐르는 느낌이구나.
유리창에 기대어 차가운 입김만 뿜고 섰는데,
물방울로 남은 그대의 이름,
이제 다신 만날 수 없는 그대의 이름을 하염없이 반복해 불러 보는 이의 마음을 상상해 보렴.  

이상의 <거울>은 '참 자아'와 '분열된 자아'가 어떻게 다른지를
곰곰 생각해 보는 시였다면,
이가림의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는
사별한 임을 떠올리게 되는 공간으로서의 '유리창'을 만나게 되었다.
이가림의 다른 시 중에 이상의 <거울>을 떠올리는 시가 있다. 읽어 보자.

나를 보는 나
나를 보는 나를 보는 나
나를 보는 나를 보는 나를 보는 나...
무한한 반사의
환한 허공 속으로
뚫린 길 

없는 나를 찾아
그림자 하나
홀로 헤매고 있다 <이가림, 순간의 거울 3>

내가 나를 보는 상황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지.
그런데 그것이 무한 반사 되는 것을 보면,
엘리베이터 양면에 붙은 거울들이 반사하고 반사하는 모습 속의 나를 떠올리게 된다.
또는 제주도 '거울의 집' 안에 비친 삼각형 거울들에 비치는 나의 옆모습 뒷모습들...  

거울에 비친 <가짜 나>는 이렇게 많은데,
거기 <진짜 나>는 없다.
세상에는 <가짜 나> 또는 <분열된 자아> 내지는 <남들이 본 나>는 많지만,
정말 <나>는 어디 있을까?
<내 마음>이란 것은 어디 있을까? 

'없는 나'를 그 '숱한 나들'로부터 찾아내는 눈이 신선하다.
세상에 '없는 나'를 찾아서,
세상을 홀로 헤매는 그림자가 있다. 그 그림자가 현실의 '나'다.
자기가 자신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신은 어떤 인간인지 제대로 알기는 참 어려워보인다.
이가림의 '순간의 거울' 다시 한 번 읽어보기 바란다.
이상의 '거울'과 함께. 

세상의 삶은 자기가 살려는대로 살아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쓴 시가 있다.
<환목어>라고 한다. 우리가 <도루묵>이라 부르는 생선의 이름의 유래가 담긴 시다.

목어라 부르는 물고기가 있었는데
해산물 가운데서 품질이 낮은 거지.
번지르르 기름진 고기도 아닌데다
그 모양새도 볼 만한 게 없었다네.
그래도 씹어보면 그 맛이 담박하여
겨울철 술안주론 그런대로 괜찮았지.

전에 임금님이 난리 피해 오시어서
이 해변에서 고초를 겪으실 때
어가 마침 수라상에 올라서
허기진 배를 든든하게 해 드렸지.
그러자 은어라 이름을 하사하고
길이 특산물로 바치게 하셨다네.
난리 끝나 임금님이 서울로 돌아온 뒤
수라상에 진수성찬 서로들 뽐낼 적에
불쌍한 이 고기도 그 사이에 끼었는데
맛보시는 은총을 한 번도 못 받았지.
이름이 삭탈되어 도로 목어로 떨어져서
순식간에 버린 물건 푸대접을 당했다네.

잘나고 못난 것이 자기와는 상관없고
귀하고 천한 것은 때에 따라 달라지지.
이름은 그저 겉치레에 불과한 것
버림을 받은 것이 그대 탓은 아니라네.
넓고 넓은 저 푸른 바다 깊은 곳에
유유자적하는 것이 그대 모습 아니겠나. <이식, 환목어> 

목어(묵)가 푸대접 받다가,
임금이 피란왔을 때 대접을 받아 '은어'라 불렸대.
그렇지만 전란이 가라앉자 다시 '목어'가 되었단다.
(도로 묵이 되었다고 <도루묵>이란 이름으로도 불린대.) 

이 이야기에서 얻은 교훈을 마지막 연에서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단다.
이름은 그저 겉치레에 불과한 것인데,
세상 사람들은 필요하면 칭송하고,
필요하지 않으면 버리는 세태임을 비판적으로 바라본 것이지. 

목어는 원래 푸른 바다 깊은 곳에서 유유히 헤엄칠 뿐인데 말이야.  

인간은 원래 모두 <부처>라고 했잖아.
그런데 세상에서는 누구는 1등급이고 누군 9등급으로 나누기도 하고. 한우도 아닌데 말이지.
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사람의 <본질>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평가>일 뿐임을 안다면 마음을 넓게 가질 수도 있겠구나. 

<환목어>같은 시는 세상을 '풍자'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필요하면 등용하고 쓸모가 없어지면 금세 잊어버리는 세태를 비꼬려고 주워든 이야기니 말이야. 

자, 오늘은 우리가 세상을 보는 두 가지 관점을 다룬 시들을 만나 보았다.
세상은 내가 보는 것처럼 한쪽 면만 가진 것은 아님을 이야기하고 있어.
나와 다른 편에서 바라보는 시선도 있음을 깨닫는다면
세상이 불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배움도 얻을 수 있겠다. 

내일부터 며칠간은 좀 푹 쉬자.
새 학기 시작할 때 활기차게 시작할 수 있도록.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에서도 '분열된 자아'가 등장하지만,
차이점이라면, 이상의 시에선 분열되기만 했던 것이,
윤동주의 시에선 <악수>를 함으로써 <화해>의 분위기가 보인다는 정도겠지. 

오른손잡이끼리 악수를 하면, 당연히 오른손끼리 잡아야 하는데,
그 아이는 반대니 악수를 할 수 없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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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1-02-28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 정말 오랜만입니다^^
거울속의 나도 유리창의 기댄 나도 어쨌든 "나"이고 나로서 사랑하고 싶고, 사랑하고 있다면 자기애가 심각한 수준인거요? 아무래도 시대를 걱정하기보단 일상을 즐기며 살고 있어서 이런가 봅니다~
거울이 보이지 않아도 그속에 나는 있고, 오른손이라 악수를 못해도 마주 웃어줄수 있으니 행복하게 삽니다~

글샘 2011-02-28 21:40   좋아요 0 | URL
일상 속의 '나'도 시대를 걱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대 속에 있겠지요.
행복한 나날을 보내며 사신다니 감사합니다.
이런 말을 듣는 일이 하도 드물어서요. ^^
저도 요즘 날마다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