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무개의 장자 산책
이현주 지음 / 삼인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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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장자를 읽는다. 이현주 목사의 장자 산책을 옛날 책으로 읽을 때는 좀 짜증났더랬는데(너무 구판이어서) 이번 책은 산뜻하게 예쁘다. 요즘 책들이 쓸데없이 두껍고 종이 질이 좋으며 비싸다는 비판적 기사가 엊그제 난 적도 있지만, 이런 고전들은 좀 두툼한 종이로 만들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고전이니까...

이번 읽기에서는 <장>별로 생각을 모아 가며 읽으려고 노력했다.

1장. 소요유. 소요한다는 말은 마음을 편하게 먹고 빈둥거리며 느릿느릿 다닌다는 말이고, '놀 유游'자도 특정한 목적없이 즐기며 마음 편하게 논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인생 짧은 데 그리 아둥바둥 살 필요 있나, 젊어 노세... 까지는 아니더라도, 삶을 <옳음>에 얽매고 사는 것만이 잘 사는 건 아닐세~하는 장자 영감의 눙치는 소리를 들었다.
사람은 '이용 가치'가 아닌 '존재 가치'로 봐야 한다. 교육을 '인적 자원' 관리라고 보는 정부는 나쁜 정부다. 나를 버리고, 공을 버리고 이름을 버려라. 이런 말은 금강경에서도 숱하게 만난 말이 아닌가.
우리의 성모님, 어디에서 죽어가는 당신의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 아, 이런 말들이 이아무개 님의 글로 읽는 고전의 맛이다. 무하유의 고향을 말하면서, 피폐해지는 인간 존재를 사랑하는 하나님, 성모님, 하눌님, 그리스도를 읽을 수 있는 기쁨. 나는 행복하다.

2장. 양생주. 양생은 말 그대로, 웰빙이다. 그런데, 우린 너무 육체의 웰빙에 얽매인다. 텔레비전에 무슨 비타민 어쩌고 하는 것들은 몽땅 육신의 양생만을 추구한다. 물질의 양생은 결국 웰빙보다는 부유함을 추구하게 된다. 지나쳐도, 결핍되어도 병이 되는 것이 바로 비타민이다. 중도, 중정, 중용을 지키는 것, 그것이 양생이다. 웰빙은 결코 돈이 많아 '잘사는 rich' 경지가 아닌 것이다.
야생의 새는 아무리 기름진 음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어도 새장에 갇히려 하지 않는다. 인간도 야생의 새가 되어 '육신의 웰빙', '물질의 웰빙'이란 감옥에 갇히지 말고 먼 하늘을 날아야 할 거다.

3장. 제물론. 온 세상이 잡다구레한 물질로 가득하다. 일 주일도 되기 전에 재활용되지 않는 재활용 쓰레기들은 가득 생산된다. 부끄럽다. 사물을 가지런히 하라... 세상을 가지런히 하라... 그 근본과 가지끝을 생각하면 모든 것을 자연에 맡겨 물과 자신을 떼어 놓지 않을 수 있으련만...
자기를 잃는 일, 그것을 상아 喪我, 또는 좌망 坐忘이라 한다. 물에 사로잡히지 않는 경지. 곧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다. 얽매이지 말고 마음을 내는 것.
근본을 알고 끝을 아는 사람은 '덕'이 뿌리요, '다스림'은 가지 끝임을 안다.
흐르는 물에 있으면서 젖지 않는 달의 경지, 빛을 옴기면서 빛에 물들지 않는 허공의 경지에서 이루어지는 초연한 참여를 읽는다. '物'에 젖지 않는 경지를 만난다. 모든 '물'은 저를 있게 한 <하나>를 모신다. 하나님, 한울님, 예수그리스도...

4. 인간세. 엊그제 한 수학자가 법관을 석궁으로 쏘아 죽이려 한 사건이 발생했다. 법관이 대학측의 손을 두 번이나 들어줘서 한 수학자의 생을 망쳐놓았다. 법으로 처벌할 수 없는 법관을 수학자가 처벌해 버렸다. 마치 일본의 추리소설 줄거리 같다. 인간에게 '지식'과 '이름'은 흉기다.
우리의 교묘한 언술과 몸짓, 그 깊은 곳에 숨어있는 명예와 이익을 향한 탐심,을 백일하에 드러내어 마음을 닦고, 텅 비게 하기 위해 <장자는 유가를 비판>한다.
수학자처럼 석궁을 쏘고 싶은 일은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독재자나 살인마, 사소하게는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주는 이들에게도 석궁의 욕망은 들끓지 않는가. 그렇지만, 장자는 툭 던지는 말로 마음의 팽팽한 줄을 툭, 끊는다. 물론 석궁은 발사되지 않겠지.
서로 해치고, 당하는 세상을 사는 법 : 거울의 마음, 배웅도 마중도 하지 앟으며, 응하되 간직하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사물을 이기면서 상하지 않는다. 아상을 버리고, 공명심을 버리라... 무아, 무공, 무명... 결국 마음을 다스시는(심재 心齋) 길. 뜻을 한 곳에 모으고, 소리를 마음으로 듣고, 감각에 얽매이지 말고 氣로 들어라.
세속을 떠날 것 아니고, 세속 한가운데서 하늘나라 백성으로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 삶. 아멘, 소리가 나게 만드는 아무개님의 글. 연못의 더러움에 뿌리내리되, 오히려 아름다운 연못으로 피어야 하는 인간 세상.
사마귀는 자기 능력을 과신하고, 호랑이 조련사는 상대에 맞는 수단을 쓰지 못했고, 마부는 상대의 처지를 헤아리지 않다가 망신하고 몸을 버린다. 하, 살기 어렵다. 인간 세상은...
다른 누구에게 "쓸모"가 되려고 안달하지 말고, 하늘이 준 생존의 길을 좇는 참사람이 <신인의 나무>가 되어 오래 견딜 수 있는 것이 인간 세상이다. 비정한 세상. 그 신인은 천수를 누려 가늘고 길게 삶을 다하는 것에 매이지 않고, 자유자재한 삶을 논한다. 지리소는 병신이다. 그렇지만 그는 전쟁에 끌려나가 죽지도 않았고, 그의 열 식구를 너끈히 먹여 살렸다. 인간들아, 인간아, 글샘아, 누가 병신이냐?

5. 덕충부. 덕이 가득하면, 덕이 가득 차야 겉으로 드러난다. 덕은 껍데기에 있지 않다.
장자는 <공부>를 감각과 인식에 사로잡히지 않고 세속의 굴레를 벗은 자유인으로 세속 한복판을 당당하고 의연하게 걷는 길을 찾는 것, 으로 본다.
무위당 선생님 꿈을 꾼 이아무개 씨. 곧장 들어가... 문자로는 안 돼... 문자에 빠지지 말어... 마음을 잡어... 마음을 항복시키라고...
못생겼는데, 왜 사람이 끓느냐... 애태타를 바라 보라. 자기를 주장하지 않고, 남들을 제 뜻대로 움직이려 하지 않는... 꾀하지 않고, 깎아내리지 않고, 잃지 않고, 사고 팔지 않는 하늘처럼 사는 사람에겐 주변이 끓는다.

6. 대종사. 큰 꼭대기가 되는 스승님. 그를 지인, 신인, 성인이라 한다. 거울처럼, 하늘처럼... 물처럼... 나이가 무슨 상관이랴, 도에 더 가까운 이가 마땅히 스승이어야 하거늘, 나로 하여금 바라건대 자네 뒤를 따르게 하라...(이 책은 가끔 이런 말들과 게송, 싯구들로 가슴을 따스하게 한다.)

7. 응제왕. 제왕에게 응답함. 어떤 지도자가 훌륭한 지도자인가. 다시 소요유를 반복한다. 무기, 무공, 무명... 지인은 자기가 없고, 신인은 공이 없고, 성인은 이름이 없다. 그 이름, 하느님 아버지일 따름.
마지막의 혼돈의 죽음은 인간의 '함 爲'이 얼마나 작은지 본다.

장자를 읽는 일은, 장기판에서 움직이는 말을 <훈수두는 눈>으로 보는 일이요,
싸움판에서 흥분한 두 사람에게 <심판>을 서는 일이며,
야단치는 시에미와 당하는 며느리 사이에서 말리는 <시누>의 눈을 갖는 일이다.

얄밉게도 세상에서 조금 비스듬하게 서 있으면서도, 그 자리가 세상 바라보기에 더없이 좋은 자리란 것을, 아는 사람은 안다.

'너 죽을래?'하면서 쫓아오며 시비거는 사람에게 아큐정전의 '아큐'는 <정신적 승리법>으로 대응한다.
실컷 밟힌 후에 '난 똥이야, 넌 똥을 밟은 거야. 재수 없게도...'하는.

아큐는 어리석지만, 장자의 이야기도 시비에 맞대응하지 않고, <정신적 승리>를 바라본다.

장자더러 아큐라고 하면, 글쎄, 꿈속에서 나비였더랬는데, 이제 그 나비가 나냐, 아큐냐?하고 웃으려나?

장자같은 남자라면, 이런 허풍쟁이라면, 같이 대폿집에서 푸지게 막걸리 한잔 걸쳐야 제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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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7-01-17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그 자리는 달팽이도 참석하겠습니다.
근데 제가 좀 느려서 늦더라도 기다려주실거죠?ㅎㅎ

글샘 2007-01-17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님이 다 올라오셨을 무렵이면, 꽃나무 가지마다 복사꽃 요염하게 피었겠습니다. 하하하
 
이현주 목사의 대학 중용 읽기
이현주 지음 / 삼인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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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한문 공부 한답시고 대학과 중용을 들여다보던 때가 있었다. 철도 없게도.
선생님 없이 한문 공부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적어도 이 책에서처럼 책으로 설명해주는 선생님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학교 다닐 때, 훈고학이란 것이 있었다고 배웠다. 난 그저 문맥에 맞는 글자 풀이와 원문 주해에 빠진 비실용적 학문이라 생각했었는데, 요즘엔 생각이 바뀌었다.
훈고학이란 옛날의 경전에서 배우는 것으로, 온고이지신할 수 있는 한 방법인 듯 하다.
옛날 경전을 재해석하고 현실에 맞게 옮기고, 후학에게 가르치는 일, 그것이 바로 <철학>이란 것 아닌가.

이아무개 님은 그래서 훌륭한 철학자이시다.
물론 그분의 풀이에 예수님 말씀이 들어가지만, 나도 교회기피자이긴 하지만 예수님은 좋아한다.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비근한 예를 들어가며 풀어가는 것은 또다른 온고이지신의 하나일 것이다.

<대학>은 큰 공부의 시작이다. 그런데 실로 이 내용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격물 치지와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 이것이 전부라고 해도 된다.
그러나 격물, 물로써의 세계에 대한 궁구는 '과학'이란 이름으로 아직도 인간 세계를 풍미하고 있으며,
수신 하나도 못하여 세상은 혼미하기도 한 것을 보면, 여기서 종교가 나오기도 한 것이다.
참으로 작은 근본을 건드려 큰 세계를 흔드는 말이다.

이 개념들은 단계적이고 기계적인 개념이 아니라, 근본과 말단의 개념이라고 한다.
예수님 비유에서(123) 포도나무에 몇 년 동안 열매가 달리지 않자 주인이 포도원지기에게 나무를 베어 버리라고 했을 때 포도원지기는 이렇게 대답한다. "주인님, 이 나무를 금년 한 해만 더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열매는 가지 끝에 열리지만, 가지 끝이 아니라 그 뿌리에 거름을 주어야 한다는 원리.
참 간단하고도 심오하다. 한 아이가 앙상한 모습으로 삶의 근원을 잃었을 때, 그 가지를 나무랄 것이 아니라 근원에 거름을 주어야 하는 것이 '군자'로서의 교사 모습임을 본다. 부끄럽다.

이것들이 기계적인 단계가 아님을 <아이기르는 법을 모두 배운 뒤에 시집가는 일은 없다.>는 비유를 쓴다. 공자나 예수나 뛰어난 사람들은 비유의 달인들이다.

군자는 혈구지도(絜矩之道)라고 하는 말도 의미심장하다.
혈은 헤아린다는 듯이고, 구는 잣대라는 뜻이다. 반듯한 자로 헤아리는 도란 의미다.
헤아림의 근거를 '마음'에 둔다는 의미라고 한다. 사람을 헤아리는데 자기 마음으로 잣대를 삼는다.
윗사람의 행동이 아랫사람에게 미치는 효력이 빠른 것은 그들이 동일한 바탕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수신의 근본이 제가, 치국, 평천하의 말단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

<현란한 말末 쪽으로 치달리는 우리의 눈길을 어떻게든지 단순하고 소박한 본 本쪽으로 향하게 하려는 옛 스승의 깊은 뜻이 참으로 간절하구나!>하는 저자의 맺음말로 대학은 철학의 근본을 더듬는 책으로 거듭난다. 이런 풀이가 없었더라면, 나같은 범부는 어리석게도 대학은 배울 것도 없는 책이라는 둥,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기계론적 이야기만 반복되더라는 둥 했을 테니 말이다.

<중용>은 몇 번은 읽었는데, 쉽지 않은 경전이다. 그래서 겁을 먹고 있는데, 첫페이지에 이런 말이 나온다. <유가의 심오한 철학이 여기에 담겨있다 하거니와 미리부터 겁먹을 것까지는 없다해도 마음으로 신중할 필요는 있다> 쿡, 찔렸다.

중은 天이요, 용은 人이라. 그래서 중용은 하늘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철학이란다.
이 둘 사이를 제대로 맺어주는 것이 <성誠>이라는데 성의 의미는 중용보다 더 어렵다.

내가 날마다 쓰는 가르칠 교(敎) 자에 대한 설명이 중용에 잘 나와 있다.
천명을 성이라 하고, 성을 좇음을 도라하고, 도를 닦음을 교라한다. 이것이 중용 첫머리다.
하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인생의 도>인데, 이 도를 닦음이 <교>인 것이다.
당연히 <교>는 지난한 수련의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고, 하늘의 뜻에 합당한 것이어야 하며, <인생의 도>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이어야지, 엉뚱한 삽질을 하면서 <교>라는 이름을 붙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선생 노릇 할 바에야, 똑바로 올바르게 해야겠다.

인생의 도는 5륜에 담겨있다는 것이 맹자의 풀이다. 의, 친, 별, 서, 신의 다섯이 오륜이다.
인생길을 제대로 걷게 해 주는 것이 <지, 인, 용>이다. 지는 길을 잘 아는 것, 인은 그것을 실천하는 것, 용은 굽히지 않고 나아감이다. 이것이 <인생의 도>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가지 덕을 도로 갖추려면 꼭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誠>이다.
성하지 못한 지는 <술수>로 빠지고, 인은 <마르고>, 용은 <폭력으로 바뀌>고 만다는 것.
별 논리적이지도 않은 것 같기도 하지만, 이 <성>이란 개념은 돈오 점수의 점수하는 마음이 아닐까 한다.

이 <성>의 중요함을 이렇게 비유한다. 성실하지 못함. 이 한 마디 말은 수학에서 0과 비슷하다.
아무리 많은 정수라도 영을 곱하면 없어져 버린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옳고, 실천력이 강하고, 굽힘이 없는 지,인,용의 사람이라도, <誠>이 없다면 0이란 것이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서 <결정적인 무엇>이 없어서 결정적으로 결함이 되는 것을 많이 본다. 그런 것을 통틀어 성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배울 때는 <못함을 그냥 두지 않고>, 물을 때는 <무지함을 그냥 두지 않고>, 바랄 때는 <얻지 못함을 그냥 두지 않고>, 가릴 때에는 <밝지 못함을 그냥 두지 않고>, 행할 때에는 <착실치 못함을 그냥 두지 않는>,
그래서 남이 한 번에 할 수 있으면 나는 백 번 하고 남이 열 번에 할 수 있으면 나는 천 번 한다.
이것이 <성>이란 개념을 설명한 것이라고 한다.
내가 요즘 피아노를 뚱땅거려보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처음에 쉬운 것은 없다는 것. 손가락을 바꾸어야 하고, 리듬을 부드럽게 타야 하는데, 남들보다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남들보다 연습을 덜 했음을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것. 천 번 연습하지 않고 어렵다고 불평할 필요는 없다는 것.

공자는 요순과 문무의 뜻을 따라 살았고, 천명의 도를 걸으며 살았다고 하는데, 그에게 의(사사로운 뜻), 필(반드시 하려는 뜻), 고(단단한 고집), 아(나)의 네 가지가 없었다는 '논어'의 증언에서 그가 얼마나 빈틈없이 <성>을 이루며 살려 했던지를 읽을 수 있겠다.

고전을 읽는 일은, <나>를 읽는 일이다.
옛사람들의 글이 제시하는 하늘의 별을 우러러 보면서, 이 자리에 선 나의 좌표를 둘러보는 일이며,
간혹 나침반을 들여다보며 항로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게 하는 일이며,
성경, 불경, 각종 철학서들이 뱉어낸 말들에 휘둘리는 내 마음의 밭에 근본은 어디쯤 놓여 있는 것인지를 살펴보게 하는 일이다.

고전은 읽을 때마다, 그 십분의 일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렇다고 엄두도 못낼 책들은 아니라는 '조금은 건방진' 생각을 먹기도 한다. 그래야 백분의 일이나마 성인들의 삶 변두리를 산책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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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7-01-14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에 고전의 뜰을 거니는 모습을 봅니다.
그렇다고 고전이 가리키는 길에서 그리 벗어나 있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때로는 세상 모든 이들이 다 알고 있는데...
나만 어리석게도 이리 저리 헤매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고 생각들 때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나'만 제대로 알면
그 세상의 문제가 다 해결되는데...
그 '나'에게 깊이 천착할 힘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글샘 2007-01-14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이 책엔 이아무개님의 풀이가 많지 않은 것 같아 좀 아쉽더군요.
세상 사람 다 아는 걸 내가 모르고 있을 수도 있지요.
'큰 공부'의 거리도 결국 '나'에 대한 천착이고, '중용'의 공부거리도 '성'이었는데요,
올해 큰 화두를 얻은 기분입니다.
 
장자 - 눈썹에 종을 매단 그대는 누구인가 - 삶의 등불이 되는 고전의 지혜, 장자 철학 우화 3
윤재근 지음 / 나들목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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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이 된 책들의 주제는 단 하나다.

나는 누구인가... 그걸 찾아보자.

눈썹에 종을 매달고, 일 분에도 몇 번씩 눈을 깜박여야 하는데, 계속 종소리가 뎅~뎅~ 울리면서 우리는 정신없이 앞만 보고 살고 있다.

그대는 누구인가... 하고 실없는 질문을 던지는 이가 장자다.

장자는 직설적으로 말하는 법이 없다. 변죽을 울리고 독자에게 알아서 핵심을 파악하도록 말한다.
그것이 장자를 읽는 재미고, 장자의 위험성이다.

몸을 편하게 하가. 마음을 온전히 하라.

세상 만사 시비에서 벗어나서 조용히 살고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나를 고집하는 것을 벗어나라는 말을 하면서, 나를 잊어서도 안 된다고 한다.

끊임없이 나는 어디서 왔으며, 이 순간에 어떻게 살 것이며, 어디로 가고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는 것은, <나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에 게으르게 대답하는 사람의 삶이라고 할 것이다.

행복하고 싶다는 의욕에서 우러난 구호가 야망과 성취욕의 굴레에 묶여 불행의 늪으로 빠져드는 것을 본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보면서 쓴 장자란 텍스트는, 미국 일국주의의 횡포에 휩쓸려 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듯한 현대에 읽어볼 법한 고전이란 생각이 읽을수록 강하다.

나를 자유롭게 해 줄 수 있는 분은, 예수님도, 부처님도, 알라도 아니다. 바로 나다.

나만이 나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 나를 온전히 하느님 앞에 내려놓을 수 있는 것도 나이며,
내가 부처임을 깨닫고 성성적적하게 사는 것도 나임이다.

무위는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세상에서 빌려가고 돌려줄 뿐.

진리는, 도는, 세상 만물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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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을 읽는다
박희병 지음 / 돌베개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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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의 글에 참 오래도 매달렸다.

정민 선생님이 풀이한 글 이전에도 열하 일기를 읽었고, 고미숙의 잡담도 읽었고, 박지원의 삶에 대한 글도 읽었고, 논문도 몇 편 봤고...

그랬는데, 여전히 박지원은 전체적인 모습을 읽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내가 기다리던 책이 바로 이런 책이다.

인문학이란 바로 이런 책을 쓰는 학문이다. 오랜만에 읽고 나서 사고 싶은 책을 만나다. 역시 가을을 독서라기 보다는 지름신 강림의 계절인 모양이다. 벌써 책을 마구 사고 있다. 박정만 시 전집, 리영희 21세기 아침의 산책... 비싼 책으로만...

내년 봄쯤 다시 읽고 싶어지면 사 두고 싶다.(학교 도서관이 있는 나로서는 좀 배부른 꿈이지만...)

아니, 이 외에 박희병 선생이 쓴 책을 더 사야겠단 생각이 든다.

열하일기의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글을 읽어 보면, 그럴 듯 하지만, 솔직한 심정으로 국어 교사인 내 주제에 열하 일기를 읽는 일은 고역이었다. 난 내가 책을 읽어 보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쉽게 책을 권해 주지 못한다. 열하 일기 같은 책이 권장 도서 목록에 들어있는 것은 웃기는 일이다. 책 읽지 않는 어른들이 만든 권장 도서 목록은 쓰레기다.

낱말 풀이가 각주로 가득하게 붙은 열하 일기를 읽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소설도 아니고, 중수필에 가까운 200여년 전의 이야기를 술술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알지도 못하면서 깔보는 들뢰즈... 따위를 들먹이는 고미숙의 열하일기는 슬펐다. 열하일기에 다가가서 박지원을 보기 보다는, 박지원과 연관된 에피소드를 읽은 느낌이어서 목마를 때 달착지근한 음료수 마시고 더 목말라 진 경험처럼 아쉬움을 남긴 책이었다.

정민 선생님 책은 풀이가 있긴 한데, 원문과 풀이가 거의 비슷하다 보니 깊게 읽기는 어렵다. 그런 식으로 읽어서는 연암을 이해하는 데 별로 도움이 안 된다.

이 책의 장점 1. 한문 원문을 팽개쳤다. 학자라면 쉽게 구할 수 있는 그 한문 원문은 사실 일반 독자에겐 필요없는 것이었다.

장점 2. 짧은 글이라도 문단을 나누어, 문단별로 내용을 주해하고, 평설을 붙인 뒤, 총평을 함으로써 작품의 부분적 이해와 전체적 이해를 아우르게 한다. 필요한 고사도 적절하게 풀이해 준다. 각 문단이 어떻게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기능하고 있는지도 정확하게 집어 준다.

장점 3. 연암의 매력을 끈적거릴 정도로 잘 느껴지게 한다. 연암의 글솜씨, 그 표현력, 호방함, 그리고 연암이 그 시대와 맞물려 가장 뛰어난 글쟁이인 이유를 이 책을 읽으면 연암에 반하지 않을 수 없도록 잘 적고 있다. 산문을 적으면서 운문의 상상력을 집어 넣고, 갖가지 역설, 알레고리, 비유, 해학으로 상징 가득한 연암을 이 책처럼 잘 느끼게 하기도 쉽지 않다. 그의 언에에 대한 쇄신이 사상의 쇄신에 연결된 것임을 깊이있게 드러낸 수작이다. 

장점 4. 짧은 글들을 적절한 길이로 설명함으로써 독자를 기죽게 하지 않는다.

대략 생각나는 것만 적어 보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 공부 잘 하는 아이들이 인문학부, 자연학부에 가득해야 그것이 선진국임을 절실하게 느낀다.

돈 잘 버는 의사, 법조인들이 국가에 기여하는 바는 얼마나 될까?

국가의 경쟁력은 바로 이 기초 학문이 아닐까?

말로만 온고이지신을 외친다고 예전 것이 갑자기 돈이 되거나 힘이 되진 않는다.

인풋이 없는 아웃풋은 없다.

박지원 같은 씽크 탱크를 요리조리 요리할 수 있는 학문적 바탕이 그 나라의 힘을 펼치는 데 얼마나 큰 콘텐츠가 될 것인지... 온고지신 하지 못한다면, 맨날 남의 뒤꽁무니나 쫓아다녀야 할 것일 뿐인데...

이런 복잡한 생각들이 얽히지만, 박희병 선생님의 안내를 받으며 연암을 느끼는 동안은 즐거움과 흥분됨으로 사색적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런 주례사 비평을 자주 쓸 수 있다면 이 가을, 정말 행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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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일레스 2006-09-18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희병이라는 분, 학적으로 굉장히 엄격하면서도 융통성 있는 분인 것 같습니다. 작년에 나온 [韓國漢文小說 校合句解]라는 책 서문에서는 이런 말을 하셨죠.
"한국에서 정밀성의 문제는 비단 학문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물건 만들기, 집 짓기, 다리 건설하기, 도로에 줄 긋기 등등 사회경제적 부문에서도 우리를 이류로 만드는 요인이다. 이 점에서 학문은 별건물(別件物)이 아니요, 사회와 나란히 가는 것이라 할 만하다. 한국학이 안고 있는 이 정밀성의 부족이라는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21세기의 초두인 지금부터 우리의 자세를 가다듬어 교감주석학을 정당하게 복원시킬 필요가 있다."

글샘 2006-09-18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정밀성의 문제는 바로 인문학적, 자연과학적 치밀함을 두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대충대충 따라하기가 학문에선 쥐약인 걸 아시는 분이죠.

해콩 2006-09-18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야지!!

글샘 2006-09-19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0^님... 저도 박지원 팬입니다. 꼭 읽어 보세요. 여느 책과 격이 다르답니다. 과찬이시옵니다.
해콩님... 사세요.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잘 사시죠?

석란1 2006-09-21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고미숙씨의 <열하일기, 웃음과...>는 읽었는데요. 그 책을 통해서 박지원은 처음 만났었습니다. 단순한 저는 고미숙씨가 들뢰즈를 들먹이길래 또 <들뢰즈의 생명철학>을 샀습니다. 무식에서 탈피해 보려고.

글샘 2006-09-21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석란님... 고미숙이 쓴 책의 얕음에 대하여 이 책에서는 꾸짖고 있습니다. 박지원을 들뢰즈로 읽을 수도 있는 것이지만, 퓨전의 깊이는 전통의 깊이와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니까요. 전통은 영원한 것이지만, 퓨전은 일시적인 거라고 생각해요.

석란1 2006-09-22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네요. 하나를 배우면 둘을 깨우쳐야 하는데, 저는 하나를 알았나 싶으면 어느새 둘,셋이 멀어지는 느낌입니다.

글샘 2006-09-23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석란님... 하나를 배우면 둘을 잊는 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 최근의 학문 경향이 퓨전으로 가는 것을 박희병씨가 지적하고 있어서 한 말이랍니다.

역전만루홈런 2006-10-12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학기에 고미숙 선생님에게 강의를 듣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재로 쓰는 <나비와 전사>로 통해 뭐랄까, 고미숙 선생님이 다루는 것들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는데요, 연암도 매우 흥미롭더군요, 고미숙 선생님이 쓴 열하일기를 읽어볼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이책의 리뷰를 읽어보니 아주 끌립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글샘 2006-10-12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미숙 선생님의 열하일기 독법은 한 방법은 될지언정,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열하일기를 모르면서 아는 체하도록 만들기 쉬운 무서운 책이죠.ㅎㅎ

역전만루홈런 2006-10-12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느낀 점이 그것입니다.. 도서관에서 훑어보니 연암의 글들을 여기저기 인용하면서 글을 풀어나가면서 껍데기는 훑어보는 것 같았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하기에 그 텍스트만 제대로 보고 싶은 맘이 있었는데, 이 책이 마침 잘 걸려든 것 같습니다.. 방금 도서관에서 훑어보니 딱입니다..^-^
그래도 고미숙 선생님으로 인하여 연암을 조금이나마 알게되고 흥미를 가지게 되었으니 고마울 따름이죠..
이 책 읽고 다시 오겠습니다..정말 공부할 것은 너무 많습니다..^^;

글샘 2006-10-12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습니다. 정말 공부할 것은 너무도 많은데...
박희병 선생님 책 읽고 나면 정말 감사할 일이라 생각하실 겁니다.^^
 
장자 2 : 털 끝에 놓인 태산을 어이할까 - 삶의 등불이 되는 고전의 지혜 윤재근의 장자 2
윤재근 지음 / 나들목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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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쯤 전에 서울가는 버스 안에서 읽으려고 1권을 사 뒀는데, 그 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책들을 요즘 다시 읽는 맛은 색다른 맛이 있다.

집에서 1권을 읽고 있고, 학교에서 2권을 읽었는데, 역시 바쁘게 일하는 중에 읽는 맛이 있다. 집에서는 책 읽기가 쉽지 않다.

이 책의 장점은 장자라는 텍스트를 해체하여 나름대로 양념을 해서 우리에게 권해준다는 것이다.

장자의 황당하기만 한 이야기들, 뭔가 비꼬이고 반어적인데 그 의미를 깨우치기가 쉽지 않은 장자를 인물을 중심으로 의미를 슬쩍슬쩍 짚어 준다.

어느 시대나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어."하고 말한다고 하듯이, 춘추시대 그 옛날에도 분별과 시비의 병을 퍼뜨린 유가의 도덕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장자는, 눈으로는 미인과 명품만을 추구하고, 귀로는 아름다운 소리만을 밝히는 현대인들에게도 필요한 텍스트임을 잘 풀어 준다.

자연은 존재하는 것 자체로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인위는 욕심 자루 가득하게 교환 가치를 끝없이 따지는 것이다.

사람도 <좀 더 나은 너로 만들어 주겠어, 니 옆에 앉아있는 그애보다 더~> 하면서 견적을 뽑아 수술을 하고, 학벌을 만들고, 있는 그대로의 자연미를 끝없이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오죽하면 아이들을 가르치는 부서가 <인적 자원>으로 아이들을 파악하고 있을까...

<자연스러운...>과 <사람다운...> 사이에서 사람들은 갈등하고 있는데, 갈수록 <사람다운...> 쪽으로 편입되기 위하여 많은 투입량이 소요되는 듯 하다.

목수가 선비의 글을 보고 <찌꺼기>라고 했다는 말은 참 통쾌한 맛이 있다. 중요한 것은 몸으로 터득해야지 글이나 말로 전할 수 없다는 진실을... 요리책을 아무리 연구한다고 해도, 그 손맛의 대충대충, 적당히를 따라잡을 수 없는 이치다.

편안하지 않고 즐겁지 않은 것은 대체로 덕이 아니다. 덕이 아니면서 오래 가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세상은 자꾸 나를 편안함과 즐거움보다는 질서와 체제 속으로 끌어 들이려 한다. 남들보다 낫다는 것을 증명하도록 경쟁 사회로 들어가는 것이다.

날마다 자동차를 운전하고, 컴퓨터를 갖고 놀면서
기계를 가진 자는 기계에 따른 일이 반드시 생기고, 기계에 얽매이는 마음이 생긴다.

컴퓨터가 버벅거리면 짜증이 나고, 자동차가 긁히기라도 하면 속이 상한다. 機心(기심)은 인위적인 인간의 가장 큰 속성인 것이다.

건널목을 건너는 영감님이 강아지를 몰고 가는데, 개줄과 손잡이를 멋진 것으로 사서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영감님을 보는 순간, 강아지와 개줄과 손잡이에 영감님이 따라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의 네 발로 걷는 자연스러움을 버리고, 인간은 자꾸 코뚜레를 잡는 것을 추구한다. 코뚜레가 아무리 아름답다손 치더라고, 소에게는 자연스럽지 않은 일이거늘...

무슨 일을 하면서도 안 하는 것처럼 하는 것만큼 사람을 편하게 하는 방법은 없다. 뛰어난 재주는 서툴러 보이듯이, 뭔지 서툴러 보이게 하여 남들로 하여금 편안하게 하는 것이 가장 뛰어난 자연주의 처세술이다.

입맛을 잃어가는 세상에, 씀바귀를 먹어 입맛을 회복하듯, 장자는 맛있는 것만을 추구하는 현실을, 밑바닥부터 반성하게 한다. 결국 장자라는 텍스트도 쓸모가 없다. 세상의 도는 <말할 수 있는 것>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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