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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간에 집을 짓고 - 임원경제지에 담긴 옛사람의 집 짓는 법 ㅣ 참 우리 고전 7
서유구 지음, 안대회 옮김 / 돌베개 / 2005년 7월
평점 :
먹고 살기 바빠, 엄밀히 말하면 쓰잘데 없는 데 돈 다 쓰려고 허덕거리다가 죽는 것이 삶이라고 한다면 좀 허망하다.
내 나이 이미 불혹을 넘었다. 이제 20년 정도 지나면 이 안정적인 직장이지만 퇴직을 해야 할 것이고, 그후 짧아도 20년 길면 3,40년을 더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끔찍하다. 어리석은 인간이 오래만 사는 것은 불행한 일이라 생각하므로...
그래서 조용한 시골 마을로 숨어 들어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래서 나는 무슨 점수 따는 일에 나설 마음을 전혀 내지 못하고 있다. 점수를 따 놓으면 그게 누가 되어 훌쩍 떠나지 못할 지도 모르니깐. 나도 산골마을에 숨어서 살 팔자는 아니라 생각하지만, 땅 넓고 경개 좋은 곳으로 가서 살기에 너무 늦지 않은 나이에 마음을 움직이고 싶다.
우연히 산수 간에 집을 짓고... 하는 제목의 책을 집어 들었는데, 야, 이거 대단하다.
조선 후기의 대학자로 정약용은 알고 있었지만, 풍석 楓石 서유구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이번에 '임원 경제지'라는 책에 실린 일부, 건축에 대한 글만을 접하는데도 입이 떡 벌어지거늘, 그의 농학과 의학에 대한 실학적 접근에 대해 듣기만 해도 기함을 할 노릇이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 조상들은 이미 물질 문명에 개화를 할 준비를 차근차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일본이 쳐들어와서 나라를 잃고 말았지만...
388쪽에 실린 임원 경제지의 구성을 보면,
1. 본리지 : 농업 일반
2. 관휴지 : 채소, 식물류, 약초류
3. 예원지 : 화훼류
4. 만학지 : 과실, 수목, 차, 대, 담배
5. 전공지 : 여성 농사, 길쌈, 삼베와 솜
6. 위선지 : 기상 관측
7. 전어지 : 목축, 사냥, 어업
8. 정조지 : 요리, 술과 시절음식
9. 섬용지 : 건축, 가재도구, 의복, 재봉, 교통, 공업제도
10. 보양지 : 섭생, 양생, 육아
11. 인제지 : 한방 의약 일반
12. 향례지 : 일반 의례, 관혼상제 풍속
13. 유예지 : 독서법, 수학, 활쏘기, 서화, 음악
14. 이운지 : 취미, 오락, 여행, 예술품 감상, 서적 등 여가
15. 상택지 : 주거지 선택, 지리
16. 예규지 : 상업과 재산 증식, 팔도의 시장 등
이렇게 꼼꼼하기 그지없다. 그야말로 백과사전이다.
총 66권의 인용서를 붙인 이 책의 자료들의 박학함에도 입이 딱 벌어질 지경이다.
정약용이 경세치용의 대가라면, 서유구는 그야말로 이용후생의 대가로 손색이 없다.
그런데, 이런 실학적 정신의 철저함에 문약한 위정자들은 무지하기 짝이 없었던 점은 너무도 아쉽다.
오늘날 헛되이 곡식만 축낼 뿐, 세상이 보탬이 되지 않는 자로는 저술하는 선비가 실로 우두머리라고 말하겠다. 그중 용렬한 자는 가짜를 빌리고 품을 팔아 죽은 사람의 울타리 아래에 붙어사는데, 좀 똑똑하다는 자조차도 궤변을 늘어 놓으며 이치 속으로 숨어들고 허위를 꾸미며 실용에 절실하지 않고, 쓸모없는 학문에 정신을 소모시킨다...
이런 비평문을 쓴 것을 볼 때, 당시에 서유구의 업적을 어느 누가 알아 주었으랴 싶으니 마음이 쓰라릴 따름이다.
한국의 건축, 주택이라고 하면 풍수 지리 정도라 생각하고 말았는데, 그 섬세함이 정원의 나무와 풀 한 포기, 책의 배치까지 섬세하기 이를 데 없다. 우리가 가진 것을 모르는 주제에, 알 생각도 하지 않은 주제에, 서양의 그것만을 부러워했던 일을 생각하면, 옥시덴탈리즘의 어리석음의 영향은 크기도 하다.
인가 주변에 대나무를 울창하게 심되, 집의 동쪽에는 복숭아 나무와 버드나무를 , 서쪽에는 산뽕나무와 느릅나무를, 남쪽에는 매화나무, 대추나무를, 북쪽에는 사과나무와 살구나무를 심으면 잘 된다.
동쪽에 살구나무를 심어서는 안 되며, 남쪽과 북쪽에 배나무를 심어서는 안 되고, 서쪽에 버드나무를 심어도 안 된다. 중문에 회화나무를 심으면 3세가 번창하며, 집뒤에 느릅나무를 심으면 귀신이 도망하여 숨는다.
뜰앞에 오동나무를 심으면 주인이 하는 일을 방해한다. 파초를 많이 심으면 시간이 흐른 뒤 재앙의 빌미를 부른다. 대청엪에 석류를 심으면 후손이 번성하고 크게 길하다. 안마당에 나무를 심으면 좋지 않다. 그늘을 드리운 곳에 화단을 만들면 음탕한 마음을 부르고 손해를 부른다. .. 큰 나무가 난간에 가까이 있으면 질병을 부르고, 문 앞에 두 그루 대추나무가 있으면 상서로운 일이 생긴다.
이렇게 섬세한 관찰을 대 저서로 만들 생각을 했던 사람들의 삶을 어찌 얕볼 수 있겠는가.
내가 제일 재미있게 읽은 부분은 1부의 '이운지'의 뒷부분, 형비포치 부분이다. 형비는 은자가 살아가는 집을 가리키고, 포치는 배치의 뜻인데, 소란스런 세상을 피해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의 모습을 참으로 상세하게 보여준다. 가구의 배치, 집의 배치, 정자와 문, 담장, 울타리, 기와, 방아와 맷돌을 놓은 방향까지... 상세하게 다루지 않은 점이 없을 정도다.
타샤 할머니 집처럼 울타리에 꽃사과 나무를 가득 심고, 수선화며, 접시꽃이며를 피워올리고, 수줍게 딸랑거리는 꽈리도 울타리 아래 둘러친 조용한 집에서 방바닥에 배깔고 누워 책읽고 있는데, 마당을 두들기는 소낙비 거센 소리라도 들릴라치면 이 아니 즐거울 것인가... 생각만으로도 흐뭇한데, 이런 책을 발견하게 된 것도 한껏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