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기우스 신부
레오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 느낌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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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가 늘 생각하던 문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쉬운 이야기로 풀어 쓴 책이다. 줄거리가 너무 평면적이라 할 정도로 단순하고, 세르기우스 신부의 두 번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의 개성은 입체적으로 갈등하지 않는다. 참으로 쉽게 부와 명예를 던져버리고 깨달음을 추구하는 세르기우스. 그러나 그는 모든 면에서 뛰어나다는 이유로, 어디에서나 '낭중지추'의 고뇌를 짊어지게 된다. 결국 진실한 삶은 우리 가까이 있는 것이란 이야기다.

우리는 인정받고, 능력을 칭찬받으면 얼마나 오만해 지기 쉬운가. 남들의 칭찬 한 마디에 자기 본성을 잊고 가슴 팔딱거리며 자기를 잃기 쉬운가. 세르기우스 신부님은 욕망을 잠재우려 손가락을 자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런 노력도 생활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라면 진리와 거리가 있다는 깨달음을 전하고 있다.

훌쩍 떠나 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훌훌 털어 버리고. 그러나 그런 것은 또 하나의 범죄처럼 느껴진다. 정말 산다는 것은 苦다. 십 년 전에 촉망받던 의사, 변호사들이 머리를 깎고 절로 들어간 뉴스가 들렸다. 그 뒤는 뉴스거리가 되지 못하니 들을 수 없었지만, 그들이라고 고뇌에서 벗어났으리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랜만에 톨스토이의 이야기를 편안한 마음으로 읽었다. 톨스토이의 글은 아무리 길어도 어렵거나 식상하지 않다. 마치 매일 걷는 길을 산책할 때 느끼는 편안함이라고나 할까. 낯선 것을 발견할 수는 없지만, 매일 만나는 장면에서 친근하게 다가오는 편안한 순항. 즐거움의 종류도 참 여러 가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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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뫼비우스 그림 / 열린책들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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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별로 사고 싶지가 않았다. 그냥 베스트 셀러 자리에 얹혀 있는 걸 보고 건드리지도 않았다. 그런데 다 읽게 되었다. 우리 가족은 여름 피서지로 가장 좋은 곳을 꼽으라면, 집 주변의 까르푸와 이 마트를 찾는다. 거기 가면 없는 게 없기 때문이다. 없는 거 빼고 다 있다. 우선 앉아 쉴 자리 있고, 에어컨이 있고, 책방이 있다. 목 마르면 음료수가 있고(계산 후 드시라고 안내하지만, 목말라서 산 음료수를 마신다고 죄는 아니다), 간혹 장보기도 쉽다.

어떤 날은 몇 시간씩 책만 읽다가 그냥 나오면 좀 미안하기도 하지만, 이젠 별로 미안한 수준을 뛰어 넘었다. 깊이있는 독서는 어렵지만, 베스트 셀러를 읽기엔 딱 좋다. 이런 서평이 알라딘같은 책방 주인에게는 치명적이겠지만, 책 사랑이라고 붙여 놓은 사이트에서 비난하진 못하리라. 아무튼 야금야금 읽다 보니, 그것도 순서대로 읽지도 않았다. 처음엔, 왜 '나무'인지... 나무 이야기부터 읽었고, 그 뒤의 수 이야기도 읽었다. 그러다가 또 '손이가요 손이가...' 하다 보니 다 읽었다. 감동은... 별로 없었다. 그저 좀 재미있었다.

나는 어렸을 때 빨래집게를 가지고 잘 놀았다. 빨래집게의 다리가 두개였기 때문이다. 전투를 하기도 하고, 어머니가 쓰시고 두 개 남으면 멜로물로 놀기도 했다. 어린 시절의 상상력을 어른이 되면서는 많이 잃어 버렸다고 생각하는데, 베르나르를 보니 아직도 상상력을 놓치고 있지 않아 좀 부럽다.

그러나, 개미와 같은 역작은 역시 그에게도 무리인가. 수학자 가우스가 열 살도 안 돼서 수열에 대한 공식을 만들어 내고 스물도 안 됐을 때 수학적 정리들을 내세웠지만, 만년에는 별 볼 일 없는 수학자였다던가. 중국의 왕필(왕 삐)이란 학자는 노자 도덕경을 주해 했는데, 지금도 그 책이 가장 탁월한 해설서라고 하는데, 그의 나이 열 여섯 이었다고 한다. 베르나르를 읽으면서, 개미때의 통쾌한 감격은 없다. 개성을 갖춘 개미들의 의식 세계 속에서, 인간의(손가락들) 삶을 조망하고, 과학적 만남을 바라보는 감격적인 그 픽션의 감동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개미'에는 혁명적인 사고라는 엑소더스가 있고, 차원이 다른 세계라는 스타워즈가 존재한다. 탁월한 상상력과 판타지 소설의 재미를 동시에 느끼게 하는 역작이었다.

그 뒤의 타나토노트나, 개미혁명(이건 정말 유사품으로서, 1편 만한 2편 없다를 여실히 증명하는 졸작이었다.), 뇌 에서도 '별로임'으로 읽었다. 나무 역시 그렇지만, 재미는 있고, 시야의 확장을 보여주는 흥미는 인정, 동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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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일간의 세계일주 삼성 어린이 세계명작 10
쥘 베른 지음 / 삼성출판사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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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 교육청에서 초등학교 4학년 권장도서로 선정한 책이다. 아이에게 읽히기 전에 읽어 보았는데, 내가 어렸을 때 사정이 나빠서 이 책을 읽지 못한 것이 천만 다행이라고 느꼈다. 얼마나 오만하고 독선적이고 편견에 사로잡힌 영국인의 시각인가. 얼마 전 제인 구달의 글을 읽고도 비슷한 느낌을 가졌던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리라.

영국 런던에 사는 필리어스 포그라는 돈 많은 백수는 편집증적으로 정확함을 자랑하는 사람이다. 그는 카드 친구들과 이야기 도중, 세계 일주에 80일 걸린다는 획기적인 뉴스를 듣고, 실천에 옮긴다. 배를 타고, 유럽 대륙을 기차고 건너고, 수에즈 운하를 지나 인도의 봄베이에서 산을 넘어 코끼리를 타고 다시 중국의 상하이, 일본을 거쳐 샌프란시스코 미대륙 횡단, 대서양 횡단, 영국 도착에 시간이 늦었으나, 알고 보니 그는 동쪽으로만 계속 가서 80일을 시간을 소모했지만, 영국에서는 79일 밖에 지나지않았다는 이야기다.

백수 건달이 끝도 없이 돈을 써 대는 허풍노릇에 우선 질릴 지경이다. 돈이면 안 되는 게 없음을 보여 주는 자본주의의 첨병 역할을 한다고나 할까. 그리고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와 홍콩은 그야말로 인간이 사는 곳이 아닌 괴물들의 지옥으로 묘사된다. 일본의 우스꽝스런 묘사도 마찬가지다. 역시 인간다운 인간이 사는 곳은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밖에 없는 것이다.

해가 지지 않는 영국이던 시절에 쓴 소설이라는 걸 염두에 두는 나같은 독자에겐 그닥 해악을 끼칠 수 없는 이야기이지만, 우리 아이들이 이 책을 읽는다고 생각하면, 제3세계에 가까운 우리 나라가 의식만 제국주의 편에 서게 되지 않을지 상당히 걱정스러웠다. 안 그래도 우리 나라는 미국과 가깝다는 이유로 아랍권에서는 상당히 견제를 받는다고 하지 않는가.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권하기 전에 어른들이 꼭 먼저 읽어 볼 일이다. 정말 평화를 이야기하고, 아름다운 이야기 책들이 얼마나지천으로 깔렸는데, 이런 제국주의 시대의 망령이 활개치는 파렴치한 모험담, 허풍선이 영국인의 이야기를 아직도 읽히는 나라는 아마도 세계에서 몇 안 될 것이다. 혹시 모른다. 영국과 한국 두 나라일지...

이 글을 읽고 미국과 손 잡고 이라크 전쟁에 설쳐대는 '악의 축' 영국을(사실은 미국이 축이고 영국은 별로 축도 못 되는 게 현실 아닌가) 정확한 신사의 나라, 돈 많고 인심 좋은 나라, 세계를 주름잡는 세계의 중심, 동양의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는 구세주로 인식하는 충실한 독자가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제발 다음부텀은 권장도서에서 꼭 빼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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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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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우스갯소리로서의 유머가 아니라, 풍자로서의 죠크가 가까운 용어다. 유머러스하게 하는 농담이 결코 아닌 것이다. 줄거리는 별 거 아닌데, 참 절절히도 적어 놓았다. 나이가 들어 그런지, 소설에서 섬세하고 자세한 것이 싫다. 그것이 고통스러운 것이라면 더욱. 프라하의 봄을 지낸 밀란 쿤데라의 소설의 구석구석 배어 있는 몰개성적이고 획일화된 시선들로부터의 고통은, 우리 사회의 독재 시대의 유물과도 어쩜 그렇게 유사한 것일까. 그래서 고통이 고스란히 밀려 들어와 아프면서 이런 류의 작품을 읽기 싫어지는 건지도 모른다.

가난한 사람들은 지지리도 가난해서 모지라진 인생들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비극적인 작품보다는 해학적이고 유머러스하면서도 해피엔딩의 작품들에 매료되는 것이다. 우리 선조들이 힘겹고 가난하던 고난의 시절에 남긴 작품을 보면 알 수 있다. 임진 왜란의 고난 뒤에 임진록이란 호쾌한 작품(사명대사가 왜왕에게 항복을 받는 것으로 그려짐)을 써 냈고, 병자호란의 비극 뒤에는 유충렬전(주전파의 강경함을 비판하고 주화파의 합리적임을 역설한 소설)을 그려냈던 지혜를 가졌던 조상들이었다.

가난하기 그지없고, 비참하고 끝도 없던 1800년 정조의 죽음 이후 비극적 시기에는 세도정치와 함께, 삼정의 문란으로 우리 백성들은 '못살겠다 홍경래' 같은 궁지에 몰려 있으면서도, 해학적인 흥부가, 해피엔딩 심청전, 자유연애 춘향전, 기지 넘치는 약자 토끼전과 같은 이야기들을 즐겼던 것이다.

명쾌한 논리 아니면 사람 취급 받지 못했던 우스웠던 시절에 사람 취급 받지 못하고 우습게 살아온 나로서는 밀란 쿤데라의 <농담> 속에서의 좌절과 인간에 대한 믿음의 붕괴, 참 사랑을 희구하지만 헛됨을 깨닫을 수 밖에 없는 시대를 동감하며 가슴 저림으로 즐겁게 읽을 수 없었다. 농담처럼 비아냥거린 한 마디가, 인생을 바꾼 것 같지만, 그것은 시대에서 벗어날 수 없는 구조 속의 한 개체로서의 인간의 나약하고 무력한 삶은 조명한 것으로 읽을 것이다.

그는 결국 파괴된 인간의 마음을 붙인 곳으로 민속적 음악이라거나 종교라거나 그런 곳으로 귀결 지은 것도 불만 중의 하나이다. 애초에 우리가 온 곳도 없으며, 돌아갈 곳도 없기 때문이다. 결말을 위한 도정이 너무 지루한 것이 괴로울 따름이다. 하하, 우리 인생이 이러한 것일까. 결국은 허망한 것으로 결말지을 것인데도, 고통스럽게 하루 하루 살아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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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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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은... 책을 직접 읽어 보세요. 다 읽고 나면 알게 된답니다. 말미에서 주인공이 '근엄하게' 남긴 명언이니까요. 비극적 상황을 넉넉하게 살아가는 희극적 발언의 극치!!!

오랜만에 픽션다운 픽션을 한 편 읽었다. 문학의 서사 장르는 삶의 진실한 모습을 전하는 이야기 형식이란 특징을 갖지만, 언제나 일정정도의 허구를 담기 마련이고, 결국은 사회의 구조적 총체적 모순에서 연유하는 인간사의 문제들로 귀결되기 때문에 한동안 문학을 특히 소설을 의도적으로 멀리 해 왔다.

우연히 읽기 시작한 이 이야기는 상당한 아이러니를 담은 중국 소설이다.우선 그의 고난의 삶의 축에는 허옥란이란 아내와 일락, 이락, 삼락이란 아들들이 있다. 모두 좋은 이름들이다. 옥과 난초는 보배로운 것들이고, 자식은 즐거움(樂)을 주는 존재들이가. 그러나 그의 '매혈'이란 고난은 모두 이 가족들을 지탱하기 위한 것으로, 중국의 현대사와 적절히 짜인 비극과 아이러니의 소설로 탄생한다. 비극이 슬프기만 하면 좌절하게 되지만, 오히려 해학적 인물 허삼관의 언동은 우리를 생동하게 만든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우선 이범선의 <오발탄>이 떠올랐다. 혼란스런 해방 정국에서 월남한 가족의 가장인 철호가 치매에 걸린 노모, 산고로 죽는 아내, 양심을 어기고 잘 살아 보려다 경찰서 신세를 진 동생 영호, 양공주 여동생 명숙의 환경에 둘러싸여 결국 이를 두 개 뽑고 택시에서 쓰러진 우리 시대의 오발탄 이야기.

그러나 허삼관은 철호보다 어느 정도 낫다. 해피 엔딩으로 옥란이 맘껏 먹고 싶은 것을 사 주면서 더 이상 매혈이 불가능한 정도로 늙은 허삼관을 위로해 주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물질적 행복보다는 정신적 행복의 가치를 역설하는 박재삼의 '흥부부부상'이란 시와도 일맥 상통하는 긍정적 가치의 발현이다. 오발탄에는 긍정적 미래는 어디에도 없이 표류하는 철호가 쓰러질 뿐...

허삼관의 둘째 이락이가 일락이를 감싸안고 돌아오는 대목은 <화수분>의 눈 내리는 고갯마루에서 아기를 감싸안고 얼어 죽은 부부를 상상케 하고, 연속되는 매혈에도 우스갯소리를 떠벌이는 허삼관은 해학의 절창 <흥부>의 매품파는 모습과도 흡사하다. '문화 대혁명기'의 비판적 분위기를 제외하고는 사람 사는 세상 어느 곳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인간의 모습이리라. 가난한 어느 곳에서나 겪을 수 있는 인간의 고난.

그러나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계속 남는 질문은, 그 모진 고난 속에서도 왜 유독 우리 민족은 악착같은 속성을 갖게 되었나 하는 것이다. 중국처럼 대범하게 허허롭지 못하고... 그들은 분명히 우리와 다르지만 우리보다 지혜롭게 대처하는 무언가를 핏줄 속에 유전자 속에 품고 있었다. 우리 유전자 속에 각인된 우리 사회의 척박함을 어떻게 하면 개량할 수 있단 말인가. 이 화두로 더운 여름을 식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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