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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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는 그의 시대를 상실의 시대라고 한다. 그가 상실한 것은 무엇일까. 자아의 상실? 목적의 상실? 희망의... 즐거움의... 낭만의... 순수함의... 어쩌면 이 모든 것의 상실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 책을 읽기 싫어한 가장 큰 이유는 한창 하루키가 유행이던 시절, 그의 날개잃은 새라는 장편을 읽었는데, 정말 짜증나는 환상과 몽상과 공상과 정신분열적인 소설이었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번 읽으려고 마음을 먹었더니, 정말 지겹게도 오래 읽었다. 바빠서 화장실에서 하루 열 페이지 정도 읽는 날도 있어서 그랬지만, 역시 나는 하루키가 싫었다. 그래도 다 읽은 건, 학생들이 종종 이 책의 독후감을 썼기 때문에, 정말 지도의 차원에서 비판적으로 읽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하루키의 (일본 사람들이 모두 그렇다고 볼 순 없어서) 개인적 성향에 염증을 느꼈다. 성적인 집착, 변태성욕적 고착, 퇴행적 추상적 사고, 파편화되고 고립된 자아. 그런 것이 그의 말들에서 곳곳에 배어있다.

'죽음은 삶의 대극으로서가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친구의 죽음에서부터 허무를 끌어내어,

'고독을 좋아하는 인간이란 없다. 그저 실망하는 것이 싫을 뿐이다.'며 미도리에게 털어놓는 파편적 인간상으로 전개되다가,

'우리가 정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이라며 정신분열적 자아의 반영을 보이면서,

'나는 내가 이 기묘한 혹성 위에서 삶을 보내고 있다는 것에 대해 무엇인가 이상한 감동을 느낀다'며 객관화된 거울 속에 비친 굴절된 나를 바라보더니,

'인생은 비스킷통, 비스킷 통에 비스킷이 가득 들어있고, 거기엔 좋아하는 것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래서 먼저 좋아하는 것을 자꾸 먹어 버리면 그 다음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만 남게 된다. 괴로운 일이 생기면 그렇게 생각한다. 지금 이걸 겪어 두면 나중에 편해진다고, 인생은 비스킷 통이라고' 스스로 위안하면서 인생론으로 마감한다.

그가 바라본 인생은 이렇게 부스럭거리고 가벼운 비스킷이기에(시쳇말로 쿨~~한) 한없이 외로워보이면서도 주변의 죽음과 성적 욕구들과 제자리에 놓이지 못한 것 처럼 보이는 고장난(out of order) 인생들을 관찰하는 것이다.

난 그가 별로 상실한 게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 시대엔 별로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순수, 희망, 꿈, 목적, 즐거움, 아스라한 환희와 희열감, 성취감... 이런 것들은 인간의 존재와 역사에 본래 부재하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린 이런 것들을 '추상명사'라고 부른다. 추상명사는 결국 이 세상에 없는 것들이란 뜻이니까.

쿨하게 가슴은 뜨겁게... 하고 노래부르던 어느 가수의 노래가 우리 가슴을 싸늘하게 찍어 내리는 이유는 예전처럼 착각하고 살지 못하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보여 주는지도 모르겠다.

원래 잃을 것이 없는 것이 인간인데, 지금 우린 잃고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우리 선조들도 - 백년 전 사람들도, 천년 전 사람들도, 아니 그 이전의 사람들도 - 모두 상실감과 영원한 노스탤지어(향수)의 손수건 한 장씩은 가슴에 품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백년간의 고독은 결국 세대를 이어 되풀이되던 것이기에.

하루키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판기 커피를 맛있게 감상하다가 바로 커핏잔을 구겨버리는 모습이 떠오르며 입맛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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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 2004-03-08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정확하게 짚어 내고 있습니다. 저는 상실의 시대를 읽지 않았지만, 인간이 원래 상실할 것이 없다는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원래 텅빈 가슴을, 텅 빈 채로 이미 완성되었음을,
보는 지혜가 "상실"되었을 뿐이라고 봅니다.

sayonara 2004-04-12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두줄이 꼭 저를 보고 하신 말씀 같네요.
날카롭고 독특하고, 잡지나 신문의 구태의연한 서평에서는 읽을 수 없는 소중한 글이었습니다.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동문선 현대신서 50
피에르 쌍소 지음, 김주경 옮김 / 동문선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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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 하루 단위로 배달되던 뉴스가 실시간으로 중계되기에 이르렀고,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없는 세상을 향해 지구는 달려간다. 그러나...

시간은 원래 간다, 흐른다는 개념이 없는 것이거늘... 사람이 그렇게 느낄 뿐이다. 이런 글을 쓰는 피에르 쌍소도 참 재미없는 인물이고, 그런 걸 읽는 나도 참 재미없는 인종이다.

살면 되는 거지, 느리게 산다는 것에 의미까지 부여할 이유는 또 뭔가. 그건, 우리가 너무도 빨리빨리 병에 걸려 살면서 주변을 살필 여유를 갖지 못한다는 사소한 지적에 불과할 따름이다.

난 일을 빨리 하기 좋아했다. 뭐든지 마무리되지 않으면 애가 달아서 마무리짓기 위해 골몰했고, 남들이 좋아하는 '빠릿빠릿한' 인간이 되었던 적이 있다.

그런데, 요즘은 만만디를 배우고 있다. 빠릿빠릿했던 나에게 만만디는 정말 학습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 고통은 금세 내 핏속에 스며들어 쾌락이 되었다.

악마가 지옥에 가니 그곳이 바로 천국이었다.(이건 예전에 듣던 좀 외설스런 이야기였는데... 지금 딱 어울린다.)

천성이 게을렀던지, 일을 미루고 술을 마시고, 게임을 하고 만화도 보고, 필요한 책이 아닌 눈 가는 대로 읽는 책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렇다. 나는 너무 분별하며 살아왔다. 세상은 '저절로 그렇게(自然)' 거기 있거늘, 난 바른 생활, 도덕, 시민과 국민과 세계인의 윤리... 이런 것들에 맞춰 살아왔다.

그래서 느리게 사는 죄악을 부끄럽게 생각했던 것이다. 느리게 걷고, 느리고 숨쉬고, 느리게 눈 돌리고, 느리게 눈 거두고, 느리게 마음주고, 느리게 맘 거두는 안단테의 삶을 놓치고 살았던 거다.

느리게 산다는 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법정 스님의 수필집 제목' 산다는 것이다.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하고 고흐보다는 덜 고독했다던 킬리만자로의 조용필도 이젠 알리라. 우리 삶이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가는 것임을... 21세기가 자신을 간절히 원한 것이 아니었음을...

말 업슨 청산(靑山)이요 태(態) 업슨 유수(流水)ㅣ로다
갑 업슨 청풍(靑風)이요, 님자 업슨 명월(明月)이라.
이 중(中)에 병(病) 업슨 이 몸이 분별(分別) 업시 늙으리라.

우계 성혼의 시조를 읊노라면, 소유도 능력도 자연 앞에 분별 없음을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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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의 천국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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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에디는 불의의 사고로 저승으로 간다. 저승(천국)에서 겪은 일은, 다섯 사람을 만나 자신의 삶이 알지 못하는 것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늘 나 혼자라고 생각하며 외로워하지만, 그리고 내가 잘 한 일은 내 능력이고, 내가 못한 일은 조상 탓이라고 하지만, 그것들은 우연히 내게 일어난 일들이 아니라, 모든 인연의 결과라는 것이다.

인연.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지금 여기 있으며,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가.
나와 연관되었고, 지금 연관되고, 앞으로 연관될 사람들은 무슨 인연일까.

심심한 이야기지만, 재미있게 곱씹으며 읽어볼만 한 책이다. 화장실에서 읽기 좋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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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08 1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탈로니아 찬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6
조지 오웰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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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의 이력을 읽으면서 아멜리 노통을 떠올렸다. 식민지를 가진 국가의 사람. 식민지에서 자라났고 그만큼의 여유를 가지고 살았던 사람. 여러 곳을 다니면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던 어린 시절, 그 경험에서 우러난 객관성의 발견. 자유의 외침.

조지 오웰은 냉전시기에 반공작가로 선전되었다. 그의 동물농장은 독재에 대한 반발로 읽어야 할 것인데, 그 대상이 하필이면 스탈린 독재와 맞물린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1984년 같은 작품은 미래 세계의 통제 사회를 그린 것이지만, 요즘의 정보화 사회를 예견한 작품으로 인정 받는다.

오웰의 1984년이란 이름때문에 내 고등학교 시절엔 그의 이름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이제 그를 안 20 여 년 뒤에 다시 새로운 오웰을 만났다. 스페인의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건, 고야를 읽으면서였고, 산티아고 가는 길을 읽으면서였다. 카탈로이아 지역의 특성도 여기 저기 드러났고.

오웰의 뜨거운 피가, 그의 자유를 향한 의지가 이 좁은 갈라진 땅덩어리에 와서 반공작가로 오해받는 줄도 몰랐으리라. 이 책을 읽으면서 오웰이 왜 그런 소설을 썼던지 좀 이해가 간다. 오웰은 자기 편이든 적이든, 자유가 억압받는 모습을 용서할 수 없었던 거야. 이렇게 생각했다.

오웰이 지금처럼 이념적으로 자유로운 시대에 태어났다면 반드시 노통이 되었을 것이다. 억압에서 탈피하고 싶은 절규의 목소리.

카탈로니아 찬가는 자유의 노래이며 억압에 저항하는 모든 아름다운 이들의 찬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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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클래식 레터북 Classic Letter Book 5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육후연 옮김 / 인디북(인디아이)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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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의 문체는 참 경쾌하다. 한창 자신감에 차있는 일본의 근대를 반영하고 있는듯, 그의 인기는 대단하다고 한다.

우리가 폐허의 가난에서 벗어난 새마을 운동의 추억을 아련하게 간직하고 있듯이, 일본의 근대를 열어준 많은 사람들 중, 나쓰메 소세키의 영향은 대단한가 보다.

간결한 문장과 재미난 표현으로 가득한 재치있는 소설이었다. 백년 전에 나온 글이라 요즘 쓰이지 않는 표현들도 많았지만, 원문과 대조해 가며 읽는 맛은 색다르다. 일본 문장을 읽는데 어려운 단어 못지않게, 긴 문장은 맥을 잃게 하기 쉽다. 그러나 소세키의 글은 단어 수준에서 많은 부분 해결 된다.

일본인의 습성이랄까. 뭔가 우리와는 다른 근성이 다양하게 나타나 있고, 또 어느 사회에나 있을 갈등과 모함과 의뭉이 소설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글을 읽고 나서 느끼게 되는 강한 페이소스를 그의 간결체로 해결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일문학에 깊은 관심은 없지만, 몇몇 일본 작품을 읽으면서 왠지 모를 이물감을 느껴왔던 나로서는 참 오랜만에 소세키 덕분에 유쾌하게 읽었다. 학교가 배경이라서 더 그랬을 수도 있다.

한 5년 전쯤 읽었을 때에는 무모하지만 용기있는 봇짱에게 관심을 두고 읽었다. 이번 독서에서는 세상 사람들 사는 모습이 더 재미나게 눈에 띄는 걸 보면, 나도 그만큼 늙은 모양이다.

세상에 대한 관심의 중심이 '나'에서 '그들'로 옮겨 졌다는 건, 늙었다는 징표니깐... 늙어갈수록 마음이 잔잔해 져야 하는데, 아직도 내 심장엔 '야마아라시(거센 바람)'이 불고 있는 건 나의 어리석음 탓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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