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만에 신혼여행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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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이 말하는 페미니즘은 원론적이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페미니즘은 여성들이 주장한다고 관철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남성들이 같이 문제의식을 가져야 하고, 먼저 움직이는 부분도 필요하다.

 

이 책은 장강명과 아내가 보라카이로 결혼 5년만에 신혼여행을 다녀온 이야기이다.

여행기는 뭐, 그럭저럭 심심했으나, 장강명의 결혼과 불임수술, 아내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읽을 만하다.

 

신문기자로 일하던 그는 어느날 직장을 때려치우고 소설가가 된다.

 

소설은 출간되지 않았고,

돈은 1년 30만원 벌었다.

내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내가 옳은 선택을 한 걸까?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걸까?

마흔이 되어서까지 그런 걸 고민한다는 게 이상했다.(21)

 

난 그렇게 못 산다. 용감한 그가 부럽기도 했고, 신기하기도 했다.

 

부모가 뭐라하건 간에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을 벌여야 할 때가 반드시 찾아온다.

그렇지 않다면 그건 인생이 아니다. 그건 사는 게 아니다.(41)

 

자신의 의지로 무언가를 해야 하는 사람.

그게 어른이고 사는 건데, 대부분 그러지 못한다.

반성하고 돌아봐야 하는데, 핑계를 대며 살지들 않는가... 한다.

마음 속에 불평이 가득한 채...

 

결혼이라는 행사.

왜 이런 미친 짓거리가 사라지지 않을까?

모든 사람들이 이 미친 짓거리에 협조하고 있기 때문(49)

 

그렇다. 결혼과 장례 문화,

부자들만 돈벌게 하는 허례허식이다.

그 돈이면 큰 집 얻어 시작하겠구만.

 

알랭 드 보통도 베르나르와 좀 닮았다.

한국에서 아이돌 취급받는 거 하며,

대머리하며, 스스로 대단한 깊이와 성찰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 자부심 하며,

몇 페이지 읽지 못하고 나는 금방 책장을 덮어버렸다.(77)

 

ㅋㅋ 난 이런 부분이 통쾌하다.

시시한데 유명한 넘들이 있다. 무시하기 힘든데 그걸 무시하고 잠이 든다. 좋다.

 

선글라스를 쓴 채로

점점 붉게 물들어 가는 해를 바라보고 있으니 정신이 멍해졌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왜 사람들이 아름다운 풍경을 찾아다니는지.

사람들은 멍해지려고 그런 일들을 하는 것이다.(122)

 

여행에서 마치 무언가 큰 것을 얻은 것처럼 '구루' 흉내를 내는 자들이 많다.

근대의 여행자들은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비행기로 휘리릭 떠도는 여행자들임에랴.

멍해지는 순간의 체득. 그런 것으로도 현대의 여행은 주는 바가 크다 하겠다.

 

끊임없이 직업을 바꾸고,

분기마다 새 취미에 열정적으로 도전하며,

어딘지 모를 이상향을 찾아 쉴 새 없이 떠돌아다니는 삶이 바람직한 걸까?

그걸 낭만이라고 포장하는 건 시시한 사기 아닐까?

그것은 기실 그 사람의 세계가 그만큼 황량하고 별 볼 일 없음을 폭로할 따름이지 않은가?

어느 정도 날씨가 괜찮고 마실 물과 식량이 있는 평평한 땅을 찾으면 방랑을 멈추는 게 정상이다.(157)

 

많은 여행기들이 이상향을 찾아 떠돈다.

그리고 유명인이 되어 사람들을 자극한다.

제자리 지키고 있는 사람에게 사기치지 말라는 말도 통쾌하다.

 

다음에 여행온다면,

첫째 날은 무조건 몸을 만들어야 돼.

그러자 나는 이 여행이 인생에 대한 비유와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정의 중반을 넘기고서야 어떻게 하면 시간을 의미있고 즐겁게 보낼지 알게 된다.

다시 한번 처음부터 하면 진짜 잘 할 수 있는데, 하면서.

스스로 즐거워지는 법을 찾아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여행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수도 없이 계획을 변경하다가 겨우 즐기는 법을 깨달았을 때

그때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 딱 이틀만 더 놀다 가면 좋겠는데, 하고 아쉬워하면서.(197)

 

어깨에 힘주지 않는 에세이여서 좋다.

그래서 시시하게 넘어가는 페이지도 많지만,

뭐 어떤가.

매 순간 빡세게 보낼 거라면 그건 여행이 아니라 군대 훈련소인 게다.

 

힘들고 성가신 일은 '마냐나(내일)'로 미룬다.

우리는 여행 이후로 결코 다투지 않는다.

그렇게 서로 사랑하며 함께 살다 같은 날 눈을 감는다.

그런 우주를 상상한다.(247)

 

시시하고 심심한데

얻을 게 많은 에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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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게서 온 편지 - 제22회 전태일문학상 소설 부문 당선작
하명희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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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든 자신에게 덤비는 것들에게 던져버리려고 넣어두었던 돌멩이가 손에 잡혔다.

하도 만져서 모난 곳 없기 반질거렸고 따뜻했다.

돌멩이는 만지면 만질수록 따뜻해져서 나중에는 던지고 싶은 마음을 녹이는 힘이 있었다.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벽에 냅다 던져버리라는 아저씨의 목소리는 말랑말랑한 찰흙 같았다.

못난 사람은 못난대로 살고 잘난 사람은 잘난 대로 산다.(24)

 

그런 시대였다.

분노와 울분으로 돌멩이를 어디엔가 던지고 싶어 가슴 속 한가득 품고 살던 시대.

그런 시대에 난 대학생이었고, 바로 교사가 되었다.

인구가 늘던 시절이어서 임용고사는 없었지만, 월급은 과외 2개하던 때보다 적었다.

대학생 때는 고등학생 캠프에도 참여해 보았고, 발령받던 해 바로 전교조가 생겼다.

군대를 마치고 복직했을 때, 날마다 사람들이 맞아죽고 분신했고... 그랬다.

그 시절 이야기여서,

너무도 생생하게 명동 거리가,

포장마차를 철거한다고 저항하며 죽어간 이야기를 읽은 시간들이, 고스란히 되살아 났다.

그 와중에 다시 탄핵이 되고, 마지막 촛불집회까지 열렸다.

 

바위가 사라졌을 뿐인데,

바위는 바위 아닌 것들을 모두 바꾸어 놓았다.(8)

 

웅덩이는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었다.

서서히 조용히 참고 참으며,

스스로를 파먹으며, 빈 우물을 만들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

그 속을 보여준 것이다.(159)

 

세상은 한 순간에 바뀌는 것처럼 보이지만,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바탕에서 조용히 흔드는 울음들이 있게 마련이다.

참 서정적인 부분도 드러나고,

여고생의 시점으로 그리는 세상 이야기도 가슴이 조마조마하게 이어진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비상식이 상식으로 통하는 것 같아요.

저 무덤들을 볼 때마다 최소한의 상식이 통하는 시대가 이렇게 어려운건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193)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났건만, 아직 세상은 그대로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제 바위를 움직이게 할 힘이 조금 생긴 것처럼 보인다.

나무에게는 보이는 것 만큼의 뿌리가 보이지 않는 곳에도 있는 법이니.

이제 <비정상의 정상화>, <혼이 비정상> 같은 시대는 조금 흘려 보내야 하리라.

 

사랑을 종류별로 묶고 일반화하면 싸구려 도식이 되어버리듯

두려움 또한 개별적인 것 같았다.

다들 각자 책임져야 할 두려움의 질은 다 다를 수밖에 없다.(205)

 

이 글의 작가도 지난 겨울, 열심히 광장으로 나갔으리라.

그러면서, 고등학생의 두려움보다는 훨씬 적은 두려움을 안고 나섰으리라.

그만큼 세상이 진보되었다고 믿었으리라.

 

그 시절은 두려운 시절이었다.

김기춘의 그림자가 드리웠던 시절. 분신 정국에 유서 대필 사건을 날조한 짐승은 이제 수인이 되었다.

이제 검버섯 핀 노인네의 일생은 참 공포정치의 그늘에서 자라난 화려한 버섯같은 것이었다.

 

도은에게 두려운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데도 누군가 따라오고 있었고,

누군가 자신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실체가 보이지 않는 자기 검열이었다.

무엇을 하든 주변을 의식해야만 했던 일상의 병, 가난한 병.(207)

 

그런 시대를 살았다.

가난해서 두려웠고, 싸우다 죽거나 감옥에 갈까 두려웠고,

경찰서에 가서 맞는 날이면 구속될까 두려웠다.

군대도 두려웠고, 빨간 줄도 두려웠다.

 

강경대가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죽었을 때,

박승희가 분신했을 때,

김영균과 첸세용이, 김기설이, 김철수가 분신하기 전에,

김귀정이 차가운 땅에 숨을 박기 전에

딱 정원식만큼만 언론이 보도를 해주었다면,

김지하가 생명선언을 하기 전에,

그 안타까운 죽음들에 돌을 던지기 전에,

한 번만 더 아파하고 그들의 생명을 존중해 주었더라면 어땠을까.(268)

 

한 사람 한 사람을 호명하며, 아프게 썼을 그 91년의 봄...

김영삼이 비굴하게 민자당을 만들며 권력의 개가 되던 봄이 생각나며 마음이 아려왔다.

 

패륜아란 단어를 너무 많이 듣다 보니

패륜아는  방랑자처럼 고독하고 자유로운 떠돌이로 느껴지기도 했다.(276)

 

슬픈 물고기와 나무,

그리고 '안녕?'

 

반가운 만남의 인사이기도 하고,

영원한 헤어짐의 인사이기도 한, 안녕,은

그 처절했던 불행의 시간들과의 작별과,

환한 세상을 기대하는 기대를 모두 담고 있었다.

 

그 시절에 퇴학을 당하고, 자퇴를 해서 검정고시를 보고 노동현장으로 들어가고 햇던 청춘들이

이제 탄핵의 앞마당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 가기를...

그 시절에 해직 교사들이 떡볶이 가게를 하고, 사진관을 열고, 과외 수업을 하면서 밥벌이를 하던

불행하던 시절이 이제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기를...

 

어두운 날들이여,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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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바람 2018-08-12 0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글샘님!

글에 쓰신 것처럼 박근혜 탄핵 인용이 있던 날
헌재 앞에서 모르는 사람과 부등켜 안고 울었던 것이 1년 전이네요.
소설을 쓴 사람, 그날 그곳에 있었다고 말씀 드리고 싶은 리뷰여서요^^
기억하실지 모르겠어요.
저는 예전에 서재에서 간간 소식 올렸던 돌바람이랍니다.
이 책의 리뷰를 보고 따라 들어와 소식 전합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민음의 시 149
허연 지음 / 민음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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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을 섞었다는 말처럼 어리숙한 거짓말은 없다.

그건 섞이지 않는다. 안에 있던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

다시 밖으로 나갈 자다.

숨 막히게 아름다운 세상엔 늘 나만 있어서 이토록 아찔하다.(안에 있던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 부분)

 

섹스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가령, 이런 시를 보면 그렇다.

 

호명되지 않은 자의 슬픔을 아시는지요.

대답하지 못하는 자의 비애를 아시는지요.

늘 그랬습니다. 이젠 투신 하지 못한 자의 고통이 내 몫입니다.

내게 세상은 빙하시대입니다.(슬픈 빙하시대 1, 부분)

 

어떤 조직의 안에 오래 있으면 익숙해 진다.

모난 부분이 거칠게 마찰하며 서걱대던 시간들이 닳아 가면서

부드러운 그러나 좀 지겹고 나가고 싶은 기분으로 차는 시간이 온다.

그래서 나가고 나면 다시 그 서걱대는 시간들을 맞게 된다.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있다.(나쁜 소년이 서있다, 부분)

 

젊은 날은 푸르다.

꽃을 떨구고 광합성에 열중인 갈맷빛처럼

푸른색은 흐르고, 기억으로 남는다.

나쁜 소년은, 그 기억의 총평일까? 반성일까?

 

외부자(아싸)로 지내던 슬픈 빙하시대를 지낸

그런 푸른 시절을 돌아보면 스스로 나쁜 소년이었던 것으로 자괴감이 드는 걸까.

 

내 나이에 이젠 모든 죄가 다 어울린다는 것도 안다.

때 묻은 나이다.

죄와 어울리는 나이.

안된 일이지만 청춘은 갔다.(슬픈 빙하시대 2, 부분)

 

요즘 아이들 말로 복학생 선배를 '화석'이라 부른다.

속된 말로 '대가리 피가 마른' 노땅이 되면

거시기 대가리에 피가 마르면 꼴리지도 않아 '불혹'의 나이가 되면 '지층' 이 되어버릴지도 모르겠다.

 

열병 앓는 머리맡에서 아주 오래전 노래가 흐른다.

지층의 흉터를 따라 흐르던 노래.

지층이 파 놓은 아주 미세한 홈을 따라 흐르던 노래.

누구의 뼈를 깎아서 만든 노래.

그 뼈를 기억하고 있는 검은 노래.

판판이 깨진 노래.

한 시대와 또 한 시대가 장중하게 죽어갔던 노래.

모닥불에 던지면 한 줌도 안 됐던 노래.

애저녁에 영원할 수 없었던 노래.

손쓸 수 없는 파멸을 담았던 노래.

일몰 후에는 단조로 변했던 세월의 노래.(검은 지층의 노래, 부분)

 

지층으로 불리는 시절이 오면,

그 노래들을 추억하며 살아야 하는 것인지도...

 

그리고 어느 마른 날, 떠나온 길들이 아득했던 날

만난 붉은 지층,

왜 나는 떠나 버린 것들이 모두 지층이 된다는 걸 몰랐을까.(지층의 황혼, 부분)

 

지나간 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모두 지층이 되어 켜켜이 시루떡같은 증거를 남긴다.

그게 삶인지, 스스로 나쁜 소년이라면서 노래부른다.

 

이제와서 후회한다 나의 사유가 늘 복잡햇던 것을

내 사랑이 모두 음란했던 것을

마트를 걸어 나오며 깨달았다.

말라가는 것이 내가 아는 생의 전부라는 걸.(멸치, 부분)

 

요즘 드라마를 보면 범죄 스릴러물이 많다.

스스로 반성할 줄 모르는 사이코패쓰들을 추적하는 이들은

또한 괴물이 되어간다.

 

그걸 만드는 방송국이나 시청자들이나 모두 말라가는 인간들이 아닌가 싶어 섬뜩할 때가 있다.

국정을 파탄내고 탄핵된 주제에 스스로 반성할 줄 모르는 삐쩍 마른 멸치같은

어떤 인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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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모래 - 2013년 제1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구소은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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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디아스포라들의 이야기

 

제주도 우도 출신 해녀 잠녀 가족이 일본 바다로 출가 물질 갔다가

도쿄 남쪽섬 미야케지마에 정착하며 시작되는

잠녀로서의 신산한 삶과 재일조선인으로서 겪게 되는

민족차별, 모국의 분단상황에 따른 이념적 갈등 등이 담긴 이야기.(328)

 

간단하게 요약한 것이 심사 소감에 적혀있다.

 

이 할미가 글쎄 여행중이라는 걸 깜빡하고 있었지 뭐냐.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우리 부모님과 동생을 데리고 기미가요마루라는 연락선을 타고

제주를 떠나오는 순간부터 여행이 시작되었던 거야.(321)

 

삶은 여행이란 비유도 있지만,

디아스포라의 삶은 신산하다.

일본 역시 패전의 우울 속에 잠겼고,

패전국 내의 디아스포라는 더 우울했으리라.

 

나는 쿼터가 아니라 하프야

 

할머니의 피가 섞인 것이기만 한 줄 알았던 손녀는

아버지가 한국인의 자손인 것을 알고 당황한다.

이런 말은 실제로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그 서늘함을 느끼기 어렵다.

 

바다가 아무리 험악하고 모질게 굴어도

절대로 원망하지도 말고 탓하지도 말아라.

바다는 말이다.

우리 잠녀들의 목숨 줄을 쥐고 있으니가.

우리네 인생이 바다에 달렸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101)

 

구월이가 해금에게 들려주는 인생이다.

어쩌면 이 소설 전체의 주제를 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소설은 스토리보다는 상황에 대한 서술이 더 많다.

자칫, 형상화보다는 역사에 대한 서술로 읽혀 읽는데 어려움이 있다.

 

자주 나타나는 영탄조의 발언은 적절치 않고,

설명으로 처리한 부분이 너무 많은데,

그중 일부는 묘사로 바꿨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329)

 

내가 느낀 아쉬움을 심사평에서 읽었다.

 

우악스럽게도 질긴 뿌리가 살아있는 한,

식물은 홀씨를 퍼뜨리며 제 깜냥대로 생존의 사명을 다할 것이다.

인간의 삶이 어찌 그와 다르겠는가.(126)

 

이 구절은 원폭 이후의 생명에 대한 이야기다.

 

서로의 욕망을 채워주고

서로에게 길들여지는 것이

지속적인 공존의 방법임을 인간보다 식물이 먼저 깨달았다.

사람들은 주도권을 인간이 쥐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지만

생존을 위해 선택된 진화를 해나가는 식물에게

인간은 수단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식물이 인간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식물은 그런 속된 마음을 품을 줄 모른다.

오히려 깊은 신뢰와 충정을 다할 뿐, 결코 배신은 하지 않는다.(144)

 

작가가 식물에 대한 애정도 많다.

그런 사유가 담긴 구절들이 아름다운데,

소설의 형상화와 더 어우러질 수 있도록 탐구를 요한다.

 

중독성이 강한 양념 고추, 역시 식물이다.

식물도 욕망이 없는 인간에게는 아마 관심이 없을 것이다.(152)

 

우도에 검은 모래 사장이 있단다.

여수에도 검은 모래 사장이 있고, 일본에도 있다.

 

검은바다

우연은 체념을 완성하기 전에 오는 기회다.

체념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거두는 것이다.

운명을 받아들이듯.

포기와 체념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포기는 중도에 그만둬버리는 것이지만 체념은 도리를 깨달아 자신의 의지를 거두는 것이다.

그러므로 체념은 달관한 자의 미덕이라 할 수 있다.(87)

 

포기와 체념은 다르다.

포기하는 사람은 노력을 접은 것이지만

체념한 사람은 노력해보고 자신의 한계를 깨달은 것이다.

삶의 자세를 탐구한 책으로도 의미있는 책이다.

다만, 스토리가 쭉쭉 전개되는 재미를 주지 못하는 것은 아직 작가의 역량이 덜 발현된 탓이리라.

 

충만은 소각이었고,

소각은 새로운 시작이었다.(190)

 

해금과 한태주가 만났을 때를 묘사한 구절 중 하나다.

작가의 글솜씨를 느낄 수 있다.

 

더 많은  인물과 스토리를 통해 만날 수 있었으면 한다.

 

제주라는 섬을 좋아한다면 읽어볼 만한 책.

제주의 낭만에 대한 묘사는 없지만, 제주 사람들의 삶이 묻어있는 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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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덕 성령충만기
이기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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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호의 단편집이다.

표제작 최순덕~을 처음 찾아 읽었는데,

성경 구절처럼 2단 인쇄 그리고 구절앞에 장구 번호까지 붙인 뒤,

모자라는 인간의 종교 세계를 그리고 있다.

어쩌면 태극기 흔드는 교회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는지 모르겠다.

맹목적이고 광신도적인 성령 충만한 괴물들....

 

여기부터 다양한 밑바닥 인생들의 해학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ㅋㅋ 거리면서 웃으며 읽다가도,

타도 노태우 시절의 최루탄 가득한 구호를 읽노라면 숙연해지기도 한다.

 

보도방을 그린 '버니'나

시봉이의 옆에서 본 저 '고백 같은 이야기'는 밑바닥 인생들의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머리칼 전언'이나 '발밑으로 사라진 사람들'의 판타지는

인간의 본능과 욕망을 환상적 리얼리즘에 녹여낸다.

'백미러 사나이'나 '간첩이 다녀가셨다'에서는 시대에 비추어진 모습이 뒤틀려 해학적으로 그려진다.

 

이기호,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잡생각들을 채집하고 싶다.

재미있는 생각이 가득한 작가인데,

사실 이런 것을 소설로 엮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시대의 밑바닥도 좀 지속적으로 그려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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