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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가분 - 마음주치의 정혜신의 나를 응원하는 심리처방전
정혜신.이명수 지음, 전용성 그림 / 해냄 / 201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두바이 칠성 호텔인가 어딘가에서 주방장을 하다 온 젊은이는 독설의 원조다.
한편으로 포스가 느껴지지만,
거침없는 반말과 '당신의 자격이 없다'는 등의 직설은 많이 심하단 생각도 든다.
과연, 저런 중세식 도제 교육만이 교육일까 하는 생각이 들고.
나도 학교에서 아이들과 교사란 자리에서 만난 것이 20년이 넘다 보니,
제자식보다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아이들에게 '친절'하게 웃자고, 아이들의 가능성을 예단하지 말자고 늘 마음을 가다듬지만,
매일 지각을 일삼는 녀석, 자주 엎어져 자는 녀석을 보게 되면,
비비 틀린 언어가 튀어나오곤 하는데,
내 앞에선 뻘쭘하게 웃는 녀석들은 아침부터 재수없단 생각을 할 것이다.
세상엔 끝없는 위아래가 있고,
해야할 것만 같은 일들이 각각의 순간 앞에 놓여 있다.
언제나 "예스, 셰프!!!"만을 외쳐야 한다면 인생 참 피곤할 것인데,
가끔은 '홀가분'한 마음을 느끼며 스스로 가치있는 존재임을,
스스로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데 여기서 이러고 있는가를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은 드물고,
날카로운 심판자는 주변에 가득하다.
너처럼 능력있는 애가 열심히 해야지, 하면서 동료를 일구덩이로 파묻고,
그따위로 할 거면 나가, 하면서 부하직원을 술구덩이에 파묻는다.
프랑스 파리에는 정신과 의사가 가장 많다는데,
한국인들은 파리 사람과 같은 기준으로 판별한다면,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매시간 한움큼씩 신경정신과 약을 타먹어야 할 것이다.
어린 아이들도 <타인의 욕망>을 이루기 위하여 노란 승합차에 오르고,
학생들 역시 <미래의 욕망>을 꿈꾸기 위하여 형광등 파랗게 켜진 교실에서 졸고 있고,
어른들도 <실업의 불안>을 미루기 위하여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며 불안한 술잔을 부딪치고,
여성들은 <시>자만 들어가면 시금치도 싫다는 이야기를 나누며 위안을 받는다.
노인들은 <복지>의 축소로 죄인처럼 살게 되고 죽지 못해 사는 날이 대책없이 길어지기만 해 한숨이다.
과연, 한국인에게 <당신은 누구인가>처럼 남의 이야기로 치부된 주제가 있을까 싶다.
시속 100킬로로 달리는 버스에서 춤을 추고, 술도 마시고, 노래도 부르고, 이야기도 나눠야 할 만큼 바삐 살아온 사람들.
조선이란 봉건제 신분 사회가 해체되기도 전에 식민지 하류 인생과 전쟁 이후 총구 앞에 선 불안한 생들에게,
찾아온 서양식 인생은 <공동체 없는> 학교, 교회, 가정을 만든 거나 아닌가 싶다.
백 살도 넘게 살도록 과잉 의료 시대와 초고령 사회를 맞으면서,
복지를 <포퓰리즘>이라고 쌩지랄을 떠는 정부와 여당을 떠받들고 사는 국민.
미래와 우리의 <복지>보다는 무조건 <나>의 돈벌이만이 해답이라 믿는 사람들,
그래서, 너네 집 인근을 뉴타운으로 만든다거나 잘 사는 나라 만들겠다면 무조건 뽑고 보는 사람들.
그 정신 세계가 황무지같은 것임은 살펴보지 않아도 등잔불인 터.
정혜신의 홀가분,은 쉽고 가벼우면서도 <당신은 누구인지>를 묻게 한다.
부담스럽지 않게, 누구인지 모르면서 아는 체 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그리고 당신, 좀 울어도 좋다고, 아니, 울어야 풀린다고 등허리를 토닥거리고 다독거려준다.
한참 울고 나면, 페이셜 티슈 한 장 주면서 잘 울었다고,
울고 싶을 때 우는 거지, 나라 망했을 때 우는 게 아니라고
아니, 그냥 옆에서 웃어 주리라.
조용필의 글발이 양인자만 못하다고 혀를 차기 시작하면 견뎌낼 장사가 없다.(45)
그렇지만 한국에선 조용필더러 양인자를 못따라간다고 난리고,
세 시간만 자면 양인자 뺨칠 거라고 속색인다. 휴=3
100의 출력을 가진 오디오 기기를 70 정도 해놓고 음악을 들을 때 가장 편안한 소리를 느낄 수 있는 것처럼,
허드레 공간이 있어야 인간의 마음은 정상적으로 순환됩니다.(67)
100의 출력 이상으로 고성을 지르다 지직거리는 성대결절이 생긴 '나는 가수다'의 가수들은 안쓰럽다.
그래서 나가수의 가수들은 어떤 날은 가수답지 않은 흉한 목소리로, 그러나 그날도 역시 쌩고함을 지른다.
탈락,의 고배를 마시지 않기 위해서... 알면서도 지른다.
누군가는 그걸 알면서도 지르지 않는다. 결국 잘린다. 세상은 그렇게 무섭기도 하다.
한 심리학자는 인간의 모든 심리적 문제를 사람이 숨을 참고 있을 때 생겨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71)
한국인은 전통적으로 '음인'이 되도록 교육받고 있다.
음인은 농경사회처럼 1년을 텀으로 살아가는 생에는 유리할지 몰라도,
현대처럼 숨가쁘게 변화하는 시대엔 숨을 참는 일처럼 고통스런 일도 없다.
'임신부 식성론'
자기 결정에 불안해하고 그 결정을 확인 받고 싶은 간절함에 외로운,
모든 이들에게 무한의 지지와 격려를 보냅니다.
당신이, 늘, 옳습니다.(101)
이기적인 태도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길 때 비판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인 태도를 흉보기도 한다.
<개인>적인 것은 <이기>적인 것으로,
아니, 건강한 이기심을 <개인적 이기심>은 모두 비판받아야 할 것으로 매도하곤 한다.
뒤집어 보면, 그 비판은 욕하는 자들의 <철저하게 개인적인 이기심>에서 나온 것이다.
결혼에 대한 만족도는,
정서적으로 친밀하고 대화가 잘 통할 수 있는 부부가 제일 높다고 한다.(106)
나이 들어가면서 진짜 친구는 아내밖에 없다. 그래야 한다.
직장 일이 아무리 중요해도 아내와 보내는 시간을 할애할 순 없다. 그래야 한다.
아니면, 혼자 살든가. 난 그건 못하겠다. ^^
나희덕의 시에서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을 인용하는데, 그렇다.
유홍준의 글에서도 높은 산을 <깊은 산, 깊은 절>이라고 표현했듯,
인생의 묘미는 깊이에 있다.
가파른 비탈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 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은 남아 있는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산을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 아래서 밥을 끓여 먹고 살던
그 하루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속리산은
단숨에 오를 수도 있는 높이를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주었다
- 나희덕, 「俗離山에서」<그곳이 멀지 않다>
천재지변의 사고로 딸을 잃은 엄마가 한 세미나에서
자신이 겪은 감정을 말하는 도중
눈물이 복받쳐 말을 잇지 못하고 발표가 중단되자,
사회자가 슬며서 겨텡 다가와 물컵을 건네주며 속삭이듯 말한다.
"눈물도 말(言)이에요." (176)
이런 지혜와 아량을 만나면, 축복이다.
죽기 전에 '나 자신(眞我)'과 만나보고 싶다는 작가를 만나는 일도 꽤 멋진 일이다.
매 순간, 숨쉬기 힘겨울 정도로 직장에서 피곤한 당신,
피곤해 죽겠는데, 누워서도 일거리가 머릿속을 빙빙돌아 한밤중 진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컴퓨터 앞에 앉았으면 눈물이 핑, 돌아서
이게 뭐하는 짓인가, 다 뒤엎어 버리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는 것도 아니고,
뿅, 하고 사라져 버리고 싶은 당신,
홀가분해 지고 싶다면, 정혜신의 홀가분도 한 잔의 시원한 물 정도는 될 일이다.
딸꾹질이 멈추지 않을 때, 나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시킨다.
물을 한 컵 뜨고,
그 물을 열 번에 나눠 마신다고 생각해라.
자, 물을 조금 마셔라.
그리고, 컵을 180도 돌리고, 다시 조금 마셔라.
다시 컵을 180도 돌리고, 마시고,
됐어?
그리고 다시 컵을 90도 돌리고, 마시고,
다시... 돌리고, 마시고,
...
열 번이 아니라, 다섯 번 정도 물 마시는 데 몰입하면서
호흡을 조절하면 딸꾹질은 똑, 떨어진다.
호흡 사이에 고통스런 생각도 딸꾹질처럼 똑, 떨어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