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저택 공사하는 거 어제 구경하고 왔다. 왜 거대한 공사장에 엄빠가 우리를 데려가 보여주면서 그렇게 뿌듯해했는지 알 거 같았다. 모임 끝나고 다 땅부자야 나만 없더라구 땅, 하니까 동생이 그래써 쫄리든? 해서 아니, 안 쫄리더라. 쫄리면 어디 백씨 여자라 할 수 있을까. 하니까 우리 아빠는 바다에 모래를 쏟아부어 땅으로 만든 사람인데 그런 거 갖고 쫄리지 않지 그러면서 둘이 깔깔 웃었다. 엄마는 할아버지, 할머니, 오빠, 언니, 동생들이 다 말리는 결혼을 기어코 했다. 아빠가 숙이, 여기가 내가 만든 땅이오, 라고 간척지에 데려가 보여주어 그만 홀딱 반해버려서 모두가 반대하는 결혼을 감행했다. 아빠의 그 허세는 내가 제일 많이 물려받았다. 우리 남동생도 꽤 하지만. 가진 거 없는데도 잘난 척 하는 년이란 말을 고딩때 선배들에게 들었는데 가진 게 없다는 건 공부도 잘하지 못하고 얼굴도 예쁘지 않고 몸매도 안 예쁘고 성격도 더럽다는. 나중에 뒤돌아보니 잘난 척 하지 않고 조신하게 잘 살았는데 할 말 안할 말 다 해서 선배들이 그렇게 미워했던 게 아닌가 싶다. 대저택 공사하는 거 구경하고 왔어, 하고 친구한테도 말하니 그래서 쫄리든? 하여 아니 안 쫄리더라, 난 네 사랑을 듬뿍 받는 몸이니 어디 땅부자들에게 비할 바인가. 둘이 그러고 키득거렸다. 책 어제 거의 읽지 못했으나 정지용 다시 읽고 가슴 떨려 죽는 줄 알았다. 김수영도 백석도 다시 읽는데 떨리지 않았다. 열일곱 모두 내 심장에 들어온 남자들인데 전혀 떨리지 않았다. 예전에 좋아하지 않았던 시들 다시 눈여겨보게 되어 좋았다. 백석은 인간에 대한 연민이 살갗에 달라붙은 사람이구나 새삼 깨달았다. 김수영은 좋긴 좋은데 예전만큼 좋지는 않네 했고 정지용 읽고 좋아 죽겠네 이 남자 했던 열일곱 기억이 그대로 소로록 살아났다. 당시 친구들에게도 이야기했지만 만일 이런 시 쓰는 남자가 같이 도망가자 하면 나 도망갈 수 있을듯? 하니 친구들이 미친년이라고 보름달 빵 먹으면서 후두두두 같이 웃어댔던 기억 났다. 공부는 안 하고 남자랑 도망칠 궁리를 했네 열일곱에. 새벽에는 꿈을 꾸었다. 철학자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떤 하얀 수염 잔뜩 기른 할배가 윤리학 가르쳐준다면서 질질 끌고 이 상황에서 넌 어떻게 할래? 또 질질 끌고 가서 너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할래? 해서 다 나름대로 선택하고 결론내리고 그랬는데 할배가 자꾸 회의심을 품게 만드는 것이다. 너 그게 맞아? 진짜 윤리학적으로 네가 내린 그 선택이 옳다고 여기는 거야?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사람들을 모두 불행하게 만드는 거 아니야? 네 사람들도 다 불행하게 만드는 길 아닐까? 그래서 헉헉거리며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났다. 물 한잔 마시고 양치질하고 윤리학이 사람 잡겠네 싶더라. 마사 누스바움 언니가 한 말 때문인듯. 꿈에서 깨고보니 철학자일지 신일지 알 수 없다 싶었다. 근간부터 제대로 무너지게 해보자 이거신가요? 할배! 하고보니 소크라테스였네! 소크라테스였어! 소크라테스 꿈 꿨네! 깨달았다. 아침 먹으면서 딸아이한테 소크라테스 할배 꿈 꿨어! 흥분해서 이야기했더니 적당히 해, 적당히, 요즘 너무 철학에 빠져들었어. 그래서 소크라테스 할배 꿈에까지 나온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