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곡미풍 -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
위화 지음, 백도라지 옮김 / 푸른숲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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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코 알라딘을 보던 중 레이더망에 걸려든 책이다. 위화 산문집이라니 어떤 내용일까 궁금했다. 소설로는 몇 권을 읽었지만 산문집은 또 다른 느낌일테니... 무엇보다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산곡미풍‘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 습기가 가득한 주변의 공기가 순간 산뜻한 봄바람을 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산문집의 내용은 작가의 삶의 기억 어느 순간으로 데려간다.

작가는 현재 베이징에 생활하지만 태어난 곳은 항저우, 어린 시절은 그 부근의 하이옌이란 곳에서 십수년을 살았다. ‘바닷물이 왜 푸르지 않고 누렇지?‘라는 질문을 품고 그는 강에서 바다를 향해 나아간다. 바다는 늘 푸르다고 이야기하는데 정작 작가가 마주한 현실의 바다는 누렇기 때문이었다. 의문을 품은 그는 직접 뛰어들었고 그것이 수영을 진화하며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
세월이 흘러 그는 바다가 보고싶어져 부모님과 함께 갔다. 과거에는 바다를 자신이 더 좋아했지만 이제는 부모님이 바다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고 그는 말한다. 이는 자식이 크고 부모와 떨어져 살면서 함께 만나 경험하는 시간이 줄어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족들과 함께 간 바다란 특별하다. 장소가 특별하다기보다는 역시 함께하는 시간이 중요하겠지. 좀 울컥했다. 부모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드는데 날로 부모님의 건강은 좋아지기보다는 나빠지기 때문이다.

쿠스트리차 영화 감독의 신발끈은 늘 풀려있었다. 주변인들은 그가 왜 신발끈을 풀고 다니는지 궁금해했다. 마침내 얻은 그의 대답은 경직된 태도를 갖지 않고 몸과 마음을 이완시키기 위해서라고 했다. 작가는 유년 시절 말더듬증이 있었다고 한다. 극복하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나도 좀 비슷한 경험이 있는데 발표 시간만 되면 온몸이 떨려오면서 심하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혼미해지곤 했다. 말더듬은 물론이고 그건 거의 공포에 가까운 경험이었다. 발표시간만 되면 주눅이 들어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누군가 내게 질문이라도 할까봐 그 시간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었다. 그때 나는 몸의 긴장을 푸는 법을 몰랐던 것 같다. 지독한 긴장이 낳은 증상이 아니었을지.

천당풍의 여름 풍경은 눈을 감고 떠올리면 더 오롯이 즐길 수 있는 간접 경험이었다. 산들바람은 거센 바람도 얕은 바람도 아니다. 그 미묘한 세기의 느낌을 말로 정확히 표현하기란 쉽지 않을텐데 작가는 그 느낌을 내게 전해주었다.
유년 시절의 먹거리 중 프티드 마들렌을 이야기하자 작가도 그렇지만 자동스레 나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떠올랐다. 내 어린 시절의 먹거리는 뭐였지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처럼 빵집이 많았던 시절도 아니었기에 마들렌은 귀한 것이 아니라 아예 명칭 자체가 낯선 것이었다. 내겐 분식 메뉴가 그나마 가까웠다고 할 것 같다. 특히 중학교 시절 학교 앞 맞은편의 분식점에서 먹었던 떡볶이와 고구마 맛탕 맛은 잊을 수가 없다. 이처럼 맛은 추억을 재현하는 효과가 있는 것이 분명한 것 같다.

작가의 부모님은 모두 의사 출신이다. 아버지는 외과의사였고 어머니는 내과의사로 일하셨다고. 그런 환경 덕분인지 5년 정도의 치과 의사 경력이 있는데 좋아서 한 일은 아니었기에 자연스레 그만두었다고. 어쨌든 이런 환경이었기에 그는 병원이라는 환경과 친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10년 간 살던 집의 방은 창문 맞은 편으로 영안실이 있었기에 망자들이 오가는 곳이었다. 그래서 죽음은 상상으로 그치지 않았고 현실과 가까이에 있었다.
지금의 아이들은 어떻게 유년 시절을 보낼까 하는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물질이 유혹하는 소비주의 시대를 사는 아이들은 예전보다는 풍족하게 생활할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부익부빈익빈이 더욱 심해지지 않았는가. 오히려 비교할 거리가 더 넘쳐나는 요즘은 나의 부족함을 받아들이기 더 어려워진 환경에 놓인 게 아닌가 싶다.

작가는 베이징을 좋아한다 말했다. 모르는 사람 사이를 걷는 것을 즐기기 때문이라고. 나 또한 그렇다.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는 때가 오더라도 과연 내가 도시를 떠나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평생을 이동하며 살아오긴 했지만 나도 도시를 떠나 산 적이 없다. 완벽한 타인의 도시에 정착한 사람들은 어떤 질문을 품으며 일상을 살아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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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르타가 온다 - 냉전과 반공, 대량학살이 만들어 낸 세계
빈센트 베빈스 지음, 박소현 옮김 / 두번째테제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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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상 야카르타, 야카르타 비에네. 플란 야카르타,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로 된 이 표현들에서 ‘자카르타‘가 의미하는 바는 명백하다. 또한 이것은 트루먼 행정부가 ‘자카르타 공식‘을 따랐던 1948년에 자카르타가 의미했던 바와는 전혀 다르다. 그때의 ‘자카르타‘는 워싱턴이 위협으로 여기지 않아도 되는 독립된 제3세계의 발전을 뜻했다. 이제 ‘자카르타‘는 아주 다른 것이 되어 반공 대량학살의 동의어가 되었다. 자카르타는 미국에 충성하는 자본주의 권위주의 정권의 건설에 반대하는 민간인을 국가가 조직적으로 절멸시키는것을 뜻하게 되었다. - P334


1954년 과테말라, 1964년 브라질, 1965년 인도네시아에서는 비슷한 형태의 참혹한 일들이 벌어졌다. 사건(?) 이후 해당 국가들은 정치 경제적으로 미국 질서에 편입되었다. '냉전반공'이란 단어가 익숙하면서도 어느 순간 이 단어와 제발 좀 헤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이 질서와 무관하지 못하다. 여전히 분단된 한반도는 이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동맹국인 미국을 비롯하여 주변국과의 관계를 고려하며 줄타기를 해야 하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제3세계의 많은 국가들도 그렇다. 오랫동안 진실을 은폐해온 미국과 소련의 문서들이 하나 둘씩 해제되면서 과거에 벌어졌던 충격적인 진실이 수면 위에 올라오고 있다. 가족이 흩어지거나 다치거나 죽고 국적을 상실해 떠돌아야 했고 수용소나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갇혀 악질적 고문을 받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공산주의를 척결한다는 구실로 수없이 자행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그리스, 이탈리아, 프랑스 등에 공산당이 부상하자 이를 경계한 미국은 트루먼 독트린 하에 좌파 정권이 들어서지 않도록 조치를 취한다(물론 미국 내에서도 반공주의적 입장만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등장인물인 프랭크 위즈너와 하워드 팔프리 존스의 입장만 봐도 서로 달랐으니까). 식민지 국가는 종전 후에도 독립을 위해 제국주의 국가와 싸워야 했다. 게다가 냉전의 분위기 속에서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그들은 자유주의든 공산주의든 한 쪽에 서야했다. 미국은 CIA의 주도로 공산주의 확산을 저지하고 석유 확보를 위해 이란 정권을 무너뜨리려 했고 필리핀의 좌익 지도자인 훅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또 과테말라 정부의 집권자인 아르벤스도 몰아내려는 시도를 했다.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버마, 실론, 파키스탄, 인도는 반둥회의를 열어 절충주의를 표방했지만 이후 상황은 그들이 원하는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는 서구 자유민주주의 대신 내각인 정당과 시민집단인 국가위원회를 둔 교도민주주의로 인도네시아만의 정치체를 실현하고자 했다. 앞서 수카르노를 암살하려고 시도했던 미국 정부는 인도네시아 군부와 손잡고 반공전선을 결성한다. 당시 미국은 근대화론이 유행하고 있었는데 소위 근대화를 위해서는 군사 독재는 거쳐 가는 단계의 하나다라는 인식이다. 미국에 체류하던 인도네시아 지식인들은 이 영향을 상당 부분 받았을 것이다. 은연중에 스며드는 것이 무서운 법 아니겠는가. 미국에 의해 콩고 총리인 파트리스가 처형되고 콩고에는 군부에 의한 친미 독재 정권이 들어섰다.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진보를 위한 동맹'이라는 경제 협력 프로그램으로 미국식 경제 체제가 시작되었다. CIA는 만델라를 체포하고 이라크 공산당에 대항하고자 사담 후세인의 반공바트당 정권을 세우기도 했다. 


1959년 인도네시아 군부가 외국 국적자의 경제 제한법을 실시하면서 이민자들의 탈러시가 시작된다. 도착지는 브라질이었다는데 정작 브라질은 불평등에 의한 위계도, 인종차별도 심한 곳이었다. 1960년 브라질에 주앙 굴라르라는 사람이 등장해 개혁을 꿈꾸었다. 그러나 미국은 CIA에 자금을 투입하며 그를 끌어내리려 했다. 브라질 내 파시즘과 반공주의에 반대하던 민족해방동맹의 군인들이 해고된 동료들에 분개해 반란을 일으키자 정부는 학살로 대응했다. 대응차원에서 던진 수류탄이 폭발하자 정부는 이를 공산주의 봉기로 몰아가면서 좌파 인사를 모조리 잡아들이게 된다. 주앙 굴라르는 결국 미국이 참여한 쿠데타에 의해 자리에서 물러나고 새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영국이 영국령 말라야를 말레이시아로 세우려 하자 수카르노는 이에 반대했다. 그러나 케네디 후 들어선 린든 존슨 정부는 베트남에서 영국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영국의 말레이시아 연방안을 지지하기로 결정한다(거기에 인도네시아 원조를 완전 중단했다). 이에 복수하듯 인도네시아는 통킹만 사건이 벌어진 뒤 북베트남과 수교했고 말레이시아가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 이사국이 되자 유엔에서 탈퇴한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가 이런 복잡한 사정이 엮인 줄은 미처 자세히 알지 못했던 내용이다. 미국과 영국은 이에 정규 군인들로 구성된 조직원들을 인도네시아 군 장교 집에 투입시켜 체포한다. 다음 날 미국이 내세운 지도자인 수하르토에 의한 반공 반격 계획이 실행되면서 인도네시아 공산당과 수카르노는 악마화되었다 .


그후 아체, 발리 등에서는 소리 소문 없는 체포 이후 집단 학살이 이루어졌다. 여기에 인도네시아 무슬림 조직이 가담했다. 1945년 이후 한국 전쟁 시기 이후까지 한반도의 상황이 떠올랐다. 서로 간 이웃이었으나 죽고 죽이는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발리에서는 전 인구의 5%인 8만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결국 수카르노는 수하르토에게 모든 권력을 이양하고 권좌에서 내려왔다. 베트남, 과테말라, 중국, 캄보디아, 가나 등등 세계 곳곳에서 벌어졌다. 


책의 제목 중 '자카르타'는 의미심장한 말이다. 이 시기 반공 대량학살을 의미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정부에 반하는 민간인과 지식인들이 절멸의 대상이 되었다. 칠레에서는 미국의 등을 업은 군부가 독재 정권을 세우고 반공 작전 하에 3천명 가까이 되는 인명이 죽었다. '자카르타 방식'의 대량 학살과 반공 작전은 중앙 아메리카 지역으로도 확산되었다. "그들은 공산주의이므로 무신론자이며, 악마이므로 죽여도 된다." 정말이지 그 시절엔 붉은색 콤플렉스 또는 노이로제 망령이 단체로 걸려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이것이 광기가 아니고 무엇인지...


이렇듯 미국이 주도한 경제 협력 프로그램과 반공 군사 동맹은 각국 군대와 결합하여 미국식 체제에 길들여진 권위주의 정권을 공고히 했다. 결과적으로 냉전기 동안 공산주의는 '악마'로 규정되었으며, 이를 척결한다는 명목하에 전 세계적으로 폭력과 광기가 정당화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분명 이렇듯 많은 국가적 피해를 입은 이들이 있음에도 그들이 자본주의 경제 체제 하의 미국을 벗어날 수 없다는 현실이다.  


책은 여러 역사 문헌을 참고하고 관련 피해자의 직접 인터뷰를 함께 실었다.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면서 사건 속에 인물들의 경험담을 실어 그 역사가 실제적으로 느끼게 했다. 인물들의 이야기가 역사의 한 부분처럼 느껴지게 책의 내용을 편집한 기법이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 아닐까 싶다. 미소 냉전기 아시아에서 펼쳐진 열전에 대한 내용은 앞서 출간된 여러 책들을 통해서 접할 수 있는데 이 책은 그 범위가 아시아만으로 국한되지는 않고 미국을 제외한 아메리카까지 포함하고 있다. 


어떤 식으로건 냉전의 영향을 받아 온 나머지 세계에서 어떤 것은 변했지만 어떤 것들은 변하지 않은 채로 남았다. - P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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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브라질에서 이룬 빛나는 성과는 군대와 동맹을 맺은 케 - P190

네디가 추진한 새로운 전술 덕분만은 아니었다. 미국도 운이 좋았다.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브라질에 지난 500년 동안 흑인, 빈민, 폭력적이고 주변화된 이들에 대한 공포로 쌓아올린 아주 뿌리 깊은 자체적인 반공주의 전통, 그리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그럴듯한 반공 신화와 연례 의례가 있었다.
합법적으로 선출된 장구는 국민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반격에 나서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이번도 브라질 역사에서 벌어진 다른 쿠데타들처럼 체제의 재설정 같은 것이어서, 금방 지지자들을 재조직해서 다음 선거에 출마할 수 있으리라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브라질에서는 그후 25년 동안 민주적 선거가이 사열리지 않았다. 워싱턴의 군 주도 근대화에 대한 약속과 지지는 존슨행정부 아래서 확고했으며, 브라질은 이제 냉전 시기 가장 중요한 친미 동맹 중 하나가 되었다. - P191

말레이어 그리고 이제는 인도네시아어 개념인 아목은 영어화되면서 걷잡을 수 없는 폭력 일반을 뜻하게 되었지만, 본래는 의례적 자살의 전통적 형태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나 1965~1966년의 대규모 폭력이 인도네시아 전통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볼 이유는 전혀 없다. 인도네시아 역사에서 이런 종류의 대규모 폭력이 벌어졌다는 증거는 전혀 없으며, 있다 해도 외국인이 연관됐을 때뿐이었다. - P258

이 불가해하고 막연히 부족적인 (미국인 독자들이 이해하기 쉬운버전의) 폭력 이야기는 완전히 틀렸다. 그것은 분명한 목적을 위해 조직된 국가폭력이었다. 군의 완전한 권력 장악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은의도적인 절멸 프로그램, 곧 무고한 민간인 대량 살인을 통해 제거되었다. 장군들은 이 국가폭력을 통해, 대중의 지지 말고는 아무 무기도없는 정치적 반대파를 충분히 약화시킨 후 권력을 차지할 수 있었다.
희생자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몰랐기에 자신들을 쓸어 버릴 절멸에 저항하지도 않았다. - P259

1960년대 말이면 제3세계 운동은 몰락까지는 아니어도 혼란에빠졌다고 할 수 있다. "반둥 정신"은 유령이 되었다. 탈식민운동의 진보적 지도자들은 모두 사라졌다. 네루는 1964년 세상을 떠났고, 수카르노는 자신의 동맹이 학살되는 것을 보며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으며, 가나의 은크루마와 버마의 우 누는 쿠데타로 실각했다. 이라크좌파 상당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고 살아남은 소수마저미국을 등에 업은 사담 후세인에게 곧 쏠려 나갈 예정이었다. 이집트의 나세르는 다마스쿠스에서 일어난 쿠데타로 시리아가 탈퇴하게되면서 아랍연합공화국이 해체되자 크게 흔들렸으며, 시리아의 쿠데타 지도부는 시리아공산당을 숙청했다. - P286

오페라상 야카르타, 야카르타 비에네. 플란 야카르타,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로 된 이 표현들에서 ‘자카르타‘가 의미하는 바는 명백하다. 또한 이것은 트루먼 행정부가 ‘자카르타 공식‘을 따랐던 1948년에 자카르타가 의미했던 바와는 전혀 다르다. 그때의 ‘자카르타‘
는 워싱턴이 위협으로 여기지 않아도 되는 독립된 제3세계의 발전을 뜻했다. 이제 ‘자카르타‘는 아주 다른 것이 되어 반공 대량학살의동의어가 되었다. 자카르타는 미국에 충성하는 자본주의 권위주의정권의 건설에 반대하는 민간인을 국가가 조직적으로 절멸시키는것을 뜻하게 되었다. - P334

어떤 식으로건 냉전의 영향을받아 온 나머지 세계에서 어떤 것은 변했지만 어떤 것들은 변하지 않은 채로 남았다. - P380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정말이지 많은 이들이 미국에 갔어요."
안토니오 카바 카바가 내게 일롬 마을 이곳저곳을 보여주며 말했다.
우리는 그가 아는 거의 모든 남자들이 공산주의자라 의심받으며 처형당하는 것을 지켜봤던 광장을 지나고 있었다. "좀 웃기지요. ‘웃긴다‘라는 말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이 마을을 파괴한 폭력이 누구 때문인지를 알거든요. 그 뒤에 미국이 있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우리 자식들을 거기로 보내고 있어요. 왜냐하면 거기말고는 갈 데가 없기 때문이에요." - P386

제3세계가 진정 자유롭게 여러 체제를 실험해 보고 다른 무언가를건설할 수 있었다면 세계가 어떻게 재편되었을지 우리는 모른다. 어쩌면 발전도상국들이 힘을 합쳐 세계 자본주의의 규칙들을 바꾸자고주장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제3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아예 자본주의 국가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나는 이 폭력이 없었다면 권위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이 20세기에 승리했을 수도 있다고 (누가 피해자인지 그리고 미국의 국력을 생각하면 그 가능성은 낮지만) 생각한다. - P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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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하게도 식민지인이 유럽과 직접적으로 접촉한 일은 언제나 제3세계에서 혁명적 운동이 조성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인도네시아 독립운동의 초기 연원은 네덜란드에 있으며, 베트남의호찌민이 정치적으로 각성하고 교육받은 곳은 파리였다. 식민지 출신들은 제국의 수도에서 공부하거나 일하면서 절대 식민지에는 도달할 수 없는 사상을 가진 이들과 마주치곤 했다. 식민주의의 상당부분은 "내가 하는 대로가 아니라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라는 식의 논리에 의존해 왔다. 혹은 현실에서는 "백인이 하는 대로가 아니라 백인이 시키는 대로 해라"였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교육을 국민전체로 확대하며 지식인들은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장점에대해 논쟁하곤 했지만, 이 두 사상은 상당 부분 식민지에서는 금지되었다. 원주민들이 그 사상을 받아들일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었다. - P67

1953년 초 미국에서 새 대통령의 취임은 이란의 정권 교체를바라는 이들에게는 큰 희망이었다. 새로 당선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존 포스터 덜레스를 국방부 장관으로, 동생 앨런 덜레스를 CIA 국장으로 임명했다. 역사학자 제임스 A. 빌에 따르면 포스터에게는 평생 두 가지 집착이 있었는데 하나는 공산주의와 싸우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다국적기업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가 딱 이란의 상황에 걸려 있었다. 빌은 이렇게 썼다. "공산주의에 대한 염려와 석유 확보는 뒤얽혀 있었다. 두 가지가 동시에 미국을 직접 개입으로 몰아갔다."
rezes이는 덜레스 형제와 CIA에게는 청신호였다. - P75

그들은 과테말라군의 보수적인 장교들마저 하찮게 보는 카를로스카스티요 아르마스 장군을 중심으로 작은 세력을 조직했다. 이들은 미국이 통제하는 라디오 방송국에서 반군이 승전보를 울리며행진 중이며 과테말라시티가 공중폭격을 당하고 있다는 허위사실을 방송했다. 진짜 공격이 아니라 심리전이었다.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 국경의 오합지졸들은 진짜 군대를 물리치고 국경을 넘을 수있는 수준이 아니었으며, 미 공군이 수도에 떨어뜨린 폭탄은 술파토sulfatos, 곧 황산염 설사제 sulfate laxative라고 불렸는데, 그 목적이 파괴가 아니라 아르벤스와 측근들을 겁줘서 바지를 적시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 P83

식민주의도 현대적 복장으로 갈아입고서 한 국가 안의 소수 외국인 집단에 의한 경제적 통제, 지적 통제, 실질적인 물리적 통제라는 형태로 작동합니다. 그 식민주의는 기민하고 강력한 적이며 다양한 가면을 쓰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전리품을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어디서나 언제나 어떤 식으로건 식민주의는 악하며, 지구상에서 반드시 사라져야 할 것입니다. - P102

워싱턴의 태도는 사뭇 달랐다. 그들의 반응은 인종주의적 무시와 거들먹거림 쪽이었다. 한 국무부 관리는 반둥 회의를 "껌껌한 동네 사람들의 으스대는 파티"라고 불렀다."
그러나 아이젠하워, 위즈너, 덜레스 형제에게 수카르노의 언행은 농담이 아니었다. 이제 그들에게 중립주의는 그 자체로 미국에대한 공격이었다. 적극적으로 소련에 반대를 표하지 않는다면, 수카르노가 제아무리 목소리 높여 폴 리비어를 칭송했다 해도 미국에반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상원의원이 된 존 F. 케네디는 반둥 회의 이후 몇 년간 연 - P109

설을 통해 미국 정부의 이런 접근법에 대해 아주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무력으로 알제리를 차지하려는 프랑스의 시도를 맹렬하게비판한 연설에서 그는 "오늘날 미국의 외교 정책이 처한 가장 중요한 하나의 시험대는 우리가 제국주의의 도전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그리고 인간의 자유를 향한 열망을 지지하기 위해 무엇을 할것인가입니다. 무엇보다 이 시험에서 미국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있는 아직 누구와도 동맹하지 않은 수백만 아시아, 아프리카인들에게 날카로운 판단을 받을 것이며, 철의 장막 뒤에서 여전히자유를 사랑하는 이들은 미국을 불안하게 지켜볼 것입니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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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하원 비미활동위원회(이하 HUAC로 표기함)의 활동은 1938년에 시작되어 1975년에야 중단되었다. 유명한 공개 재판들이 있지도 않은 실체를 쫓은 ‘마녀사냥‘만은 아니었다. 미국에는 실제로 공산주의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노동조합, 헐리우드, 정부 여기저기서 활동했고, 많은 아프리카계 및 유대계미국인이 미국공산당에 입당했다. 1930년대에도 공산주의자가아주 인기였던 적은 없었지만, 2차 세계대전 후 달라진 것이 있다면이제는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매카시즘은 특히 대통령과 미국 연방수사국(이하 FBI로 표기함) - P43

이 주도한 하향식 과정이었다. 반공주의 합의를 도출하고 전파하는 데 앞장섰던 FBI 국장 J. 에드거 후버는 HUAC에 출석해 매카시즘이 바탕을 두었던 몇몇 가정들을 널리 알렸다." 후버는 공산주의자들이 미국에서 무장 반란을 일으키려고 계획 중이며, 그러한 반란이 일어나면 경찰력이 마비되고 모든 통신수단이 장악될 것이라고 했다. - P44

위즈너는 1944년 9월, 루마니아로 가서전쟁 중 미국이 임시로 세운 첩보기구인 전략사무국(이하 OSS로 표기함) 지국장을 맡았다. 그곳에서 그는 소련이 루마니아를 차지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렇게 믿었으나, 본국의 상관들은 동맹이 그런 짓을 할 리 없다는 분위기였다. 1945년 1월, 스탈린은 루마니아에서 독일계 남녀 수천 명을 소련으로 데려가 "노동동원"하라고 명령했다. 대상자 중 몇은 위즈너와 아는 사이였다.
강제 이주가 시작되자 그는 미친 사람처럼 시내를 돌아다니며 그들을 구출하려 했다. 하지만 위즈너는 실패했고, 수천 명이 유개화차에 실려 강제노동수용소로 끌려갔다. 그의 가족들은 그 장면들이 뇌리에 박혀 파란만장한 삶 내내 그를 괴롭혔다고 말했다. - P52

같은 시기, 미국 외교 정책 기구의 정반대 부분에서 일하는워드 팔프리 존스라는 아주 다른 류의 인물이 위즈너의 OSS 전 상사였던 앨런 덜레스와 함께 베를린에 도착했다. 그는 외교관이자참전용사로 일찌기 독일 국가사회주의의 참상을 목격했다. 그는1934년 독일에 여행을 갔다가 나치 깃발에 제대로 경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치 군인에서 두들겨 맞은 적도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이미 성인이었던 존스는 참전해서 독일에 있었다.
종전 직후 그는 국무부에 들어갔다. 존스는 단호한 전사인 위즈너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세계에 접근했다. 모든 상황을 전 지구적인 흑백 대결로 보지 않고 각 상황의 복잡성을 깊이 파고들어 해결책을 찾고자 했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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