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고 있는 공장 굴뚝 위로

웬 연기일까, 다시 보니

햇살과 구름 그늘 헤집는 긴 항렬

철새 떼 지어 날고 있다

어디선가 추위 몰려오는가, 탁발로

고단한 길들이

악착같이 구불거리며

이어졌다 끊어진다, 가난은

함께 끊고 함께 잇는 것

울음소리가 틔워놓은 동절의 하늘로

철새떼 간다, 한 입

이 빠진 식탁에 둘러앉으려

 

       김명인 시 , <악착>  전문

 

 

 

 

 

 

 

 

 

 

 

 

 

 

 

 

 

 

 

 

 

 

 

 

 

 

 


댓글(6)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3-12-24 18: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24 2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3-12-24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공장 굴뚝에 연기가 더 자주 팡팡 났으면 좋겠습니다.
철새가 지나가며 만드는 연기 말고요...^^
시인은 시 제목을 다른 말 다 두고 <악착>이라고 붙였군요.
악착이란 단어가 이렇게 절절하게 느껴지긴 처음입니다.
로드무비님, 연말 잘 보내시고 새해에도 건강하세요.

로드무비 2013-12-24 21:19   좋아요 0 | URL
hnine님~
오늘 낮에 김명인 시인의 이 시와 권정생 선생 <빌뱅이 언덕>에 나오는 '악착'이라는 단어 가지고 페이퍼 쓰려고 알라딘 들어왔다가 시만 간신히 옮겨 적었는데요.
이 시가 페이퍼로 떠억하니 올라와 있는지 정말 몰랐습니다.

그런데 정말 반가워요.
저의 실수가!^^

마태우스 2013-12-25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그간 안녕하셨어요. 저랑 님이랑 들어오는 시기가 엇갈려서 그런지 통 님한테 인사를 못드렸네요. 서재 화제의 글에서 님 존함 보고 "어 그 로드무비님인가" 했답니다. 반.갑.습.니.다.

로드무비 2013-12-25 21:55   좋아요 0 | URL
마태우스님, 반갑습니다.
이게 얼마만이에요?!
알라딘이라는 공간은 참 특별해요.
몇 년 만에 봐도 어제 본 듯 반갑고!^^
 

어젯밤 <나에게서 온 편지>라는 제목이 눈에 띄어 검색해 봤더니
바로 내가 열광해 마지않는 종류의 영화였다.

광화문이나 안국동 아니라 전라도 광주라도 바로 달려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럴 수가, 우리 동네 극장에 오늘내일 딱 이틀 상영 일정이 잡혀 있는 거다.

 

냉커피를 타고 싶었는데 시간에 쫓겨 냉동실 생수병에 꽝꽝 얼려 두었던
양파 끓인 물을 가방에 던져넣었다.

급한 마음에 무단횡단도 불사하고 싶을 정도인데
아뿔싸, 건널목도 아닌 곳에서 흔들흔들 몸을 흔들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그녀와 마주쳤다.

비교적 젊은 나이(60대 초반?)에 풍을 맞은 것으로 짐작되는 우리동네 주민이다.
냅다  달려가 팔짱을 끼고 그녀를 아파트 쪽 인도로 안내하는데,
반가운 빛을 숨기지 않고 묻는다.
자신은 치료차 D대 병원에 다녀오는데 이 더운 날씨에
어디에 가느냐고......

"극장에 갑니다" 했더니 영화 제목을 묻길래 "프랑스 영화"라고 얼버무렸더니,

차들이 씽씽 다니는 차도 한가운데서 "나도 프랑스 영화 봤는데!" 하는 것이다.
궁금해서  "제목이 뭔데요?' 물었더니, <아무르>라고 했다.

그리곤 묻지도 않았는데  인도영화도 봤다고 덧붙이는 것이다. 
<어느 예술가의 마지막 일주일>이라는 제목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내가 아무리 외롭다곤 하나, 또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영화 취향이 같은 친구를 만났다곤 하나,  
차들이 씽씽 다니는 도로 위에서 계속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지 않은가!
사실 두 영화 모두 개봉을 손꼽아 기다렸다가 바로 달려가  보았다.

<아무르>는 개봉 몇 주 전 , 광화문의 한 극장에서 무슨 행사의 일환으로 봤는데
영화가 끝난 후, 표를 구하지 못한 60대 초중반의 여성이 
로비에서 우리 일행을 붙잡고 간절한 얼굴로 물었다.
'영화 어때요?" 라고.

그 얼굴에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절박함이 흘렀다.


영화 시작 전 자리를  잡고 앉아 꽁꽁 언 생수병을 꺼내 한 모금 마셨더니
이상하게 건건찝질하다.
한참 생각해 보니 멸치와 무와 다시마와 대파와 표고를 넣고 끓인 육수 얼린 물.

나는 냉커피 대신 조금씩 녹는 육수를 감질나게 마시며 영화를 보았다.

 

사는 게 황송하다는 생각이 든다.

 

 

 

 

 

 

 

 

 

 

 

 

 

 

 


 

 

 




 

 

 

 

 

 

 

 


댓글(37)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Mephistopheles 2013-08-12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나 진하게 육수를 끓이셨으면....커피색이 나올까요...??

로드무비 2013-08-13 11:41   좋아요 0 | URL
메피스토님, 반갑슴돠.
이상하게 님만 보면 어깨가 올라가면서 말투가 불량해져요.ㅎㅎ
육수가 하도 맛있어서 몇 병 만들어 내다팔아볼까 생각중입니다.

Mephistopheles 2013-08-13 11:46   좋아요 0 | URL
ㅋㅋㅋ 껌도 씹고 침도 뱉으면서...가 붙으면 완벽한 불량빙의...ㅋㅋㅋ

로드무비 2013-08-13 12:07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프레이야 2013-08-12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흐ᆞᆢ 전 내일 이 영화 볼 생각이에요. 뭔가 감동받고 훈훈해지고 싶은 간절함^^

로드무비 2013-08-13 11:43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도 이 영화 보고 나면 뭔가 끄적이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할 것입니다. 저처럼요.^^

2013-08-13 0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8-13 1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8-14 0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선인 2013-08-13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육수를 마시며 영화를 보다니... 왠지 흐믓합니다.

로드무비 2013-08-13 11:51   좋아요 0 | URL
조선인님,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보냉병에 맥주는 어떨까요?^^

조선인 2013-08-15 08:15   좋아요 0 | URL
꺄아아 좋아요 좋아요. 다음번에 저도 도전을. 응??

로드무비 2013-08-19 01:16   좋아요 0 | URL
옛날에 강남의 모 극장에서 <일 포스티노>를 맥주 마시며 봤거든요.
캔맥주를 까만 비닐봉다리에 숨겨서...

지금도 생각납니다.
그 좋은 걸 왜 잊고 있었을까요?ㅎㅎ

2013-08-13 1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8-13 1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aru 2013-08-13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로드무비 님 반가버서,, 글렁글렁(*.*)해요.
육아 치여 개봉관 영화는 지브리, 디즈니, 픽사, 드림웍스 제작류뿐인 와중에도
이 영화 예고편을 우연히 보고,, 저건 하늘이 두쪽나도 당장 봐야지 했었는데 찌찌봉요~~~ ㅋㅋ
일단 보고 나서 다시 ㅋㅋ
ㅠㅠ 로드무비 님 이 영화 개봉관이 이렇게 없을수가요

로드무비 2013-08-13 15:07   좋아요 0 | URL
이카루님, 이게 을마만입니까?
그런데 부근에 상영하는 극장이 없어요?
가까운 거리지만 저도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했는데
어제는 정류장 불볕 속에서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이카루님도 꼭 그 기쁨을 맛보시길!^^

건우와 연우 2013-08-16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는게 답답해 부아가 나는 날은 껄렁거리며 햇빛쏟아지는 거리를 홀로 가로질러 영화관에라도 가면 기분이 좀 나아질까요?

.
.

아, 영화관에 가고 싶어요, 무얼 보고싶은지는 그 다음에 생각해 볼 일이고...

로드무비 2013-08-19 01:12   좋아요 0 | URL
건우와 연우님, 멋진 영화 발견하면 알려드릴게요.
극장 가서 좋은 영화 보면 기분이 나아집니다.
어떤 영화는 그 기분이 사나흘 가기도 해요.^^

2013-08-20 14: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8-21 0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8-21 1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8-22 1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08 0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10 17: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11 15: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11 15: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16 2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07 15: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09 0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10 18: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11 1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03 0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22 0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22 1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22 0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22 1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난주 충무로의 한 극장에서 더스틴 호프만이 직접 연출한 영화
<콰르텟>을 보았다.

은퇴한 오페라 가수들이 모여 사는 '비첨 하우스'가 배경이었는데
 나는 처음 영화 소개 글을 읽을 때 '비첨'을  '비참'으로 읽었다.

영화 중간에 자막이 통째 사라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나를 포함, 이삼십여 명의 관객은 휘파람을 불지도 않고 야유를 퍼붓지도 않고
점잖게 자리에 앉아 자막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어쩌다 아는 단어가 한 개씩 귀에 걸리면  대사를 눈치로 때려잡으며 흐뭇했다. 
그 재미가 얼마나 좋았는지 이렇게 영화가 끝나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5분이 지나도 자막이 돌아오지 않자 성질 급한 누군가가 달려 나가고

안내원이 나타나고 또 5분쯤 지나서야 겨우 사태가 수습되었다.

 

<콰르텟>은 엔딩 크레딧이 아주 중요한 영화다.

음악과 함께 매기 스미스를 비롯한 주인공 역할의  배우들 외에
영화 속에 등장하는 비첨하우스 속 실제인물(은퇴한 오페라 가수들)을
한 명 한 명 젊은 날의 사진과 함께 보여준다.
멋을 부리지 않아도 반짝반짝 빛나는 젊은 날의 사진과

몇십 년 뒤 현재의 모습을 대비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이상하게 영화 속 그런 장면에 환장했는데

지금은 오죽하겠는가!

그런데 누군가 나타나 화면을 가로막고 뭐라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영사기사(?)였다.

사람들이 비로소 항의를 하기 시작했다. 좀 비켜달라고.

그는 그 큰 몸으로 화면을 가로막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사과를 계속했다.

 

그는 마지막 관객이 모두 극장을 빠져나갈 때까지 굳건하게 자리에 서서

한 명 한 명에게 고개를 숙이고 사죄할 작정인 듯했다.

그의 앞을 지날 때 눈을 맞추거나 괜찮다고 말해주는 관객은 한 사람도 없었다.
나는 그를 쳐다보며 뭐라고 뭐라고 입속으로만 달싹였다.

내 뒤의 시인 언니가 큰 목소리로 괜찮다고 그를 격려했다.

 

우리 일행은 경복궁앞의 한 식당에 늦은 저녁으로 도다리쑥국을 먹으러 갔다.

아직 차가운 봄밤에 도다리쑥국은 정말 시원하고  맛있었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3-04-07 2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08 0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08 0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선인 2013-04-08 0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에요. 부비부비.

로드무비 2013-04-08 13:58   좋아요 0 | URL
조선인님 아그들 많이 컸겠어요.
그나저나 부비부비~라고 쓰려니 어색하네요.헤헤

Mephistopheles 2013-04-08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콰르텟에서 도다리 쑥국으로 점프를 해도 전혀 거부감이 없다니...이히히히히.

로드무비 2013-04-08 13:56   좋아요 0 | URL
메피스토님, 그게 저의 특기잖아요. 헤헤헤~

2013-07-14 0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24 0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남편의 단벌 '골덴 마이(코르덴 재킷)'가 하도 후줄근해 세탁소에 드라이를 맡기러 가는 길,
촉감이 이상해 뒷목 닿는 부분을 보니 올록볼록한 골이 다 닳아 없어졌다.
생각해 보니 10년이 훨씬 넘었다.
드라이를 하지 말고 새것을 한 벌 사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하기 싫은 일감이라  계속 미루고만 있던
출판사 발행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상의 하고많은 조용한 곳을 다 놔두고 하필이면 세탁소가 보이는 건널목 앞에서
차들이 씽씽 달리는데 큰 목소리로 악을 쓰며 통화했다.
그리곤 좀 느긋해져서 '1년만 더 입지 뭐!' 하며 예정대로 세탁소에 드라이를 맡겼다.

다음날 우리 동네 커피집에서 그를 만났다.
운전면허가 없으니 기동력도 없고, 게을러빠져서 원고나 교정지를 갖다주기는커녕
집 앞으로 무조건 오기를 원하는, 거기다 약속은 밥 먹듯 어기는 늙은 아줌마 아르바이트생에게 
일감이 끊기다시피 한 지는 꽤 되었다.
그 출판사 발행인은 누군가의 소개로 통화만 몇 번 하고 처음 보는데
무슨 기분 좋은 일이 있는지 희색이 만면했다.
얼마 전에 나온 것이라며 책 한 권을 내미는데 어제 하루에만 주문을 천 부 넘게 받았다는 것이다.
귀에 익숙한 자기계발서였다.
일을 맡기로 하고 용기를 내어(!) 받고 싶은 금액에서 얼마를 깎은
금액을 제시하니 그 당장 오케이다.

그날 저녁 퇴근한 남편에게 달포 전 야심차게 낸 책이 좀 나가느냐고 물었다.
아주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가수 한대수 식으로 표현하면 '양호한' 책이다.
그런데 하루에 10부 정도 나간다나!
거기에는 친구와 동생에게 내가 주문하여 보내준 책도 포함되었으리라.

오늘 아침 <인간극장>을 보는데 55세와 45세에 결혼 20주년을 맞은, 
작은 중국집을 하느라 정신없는 아빠와 엄마에게 축하선물을 하기 위해 9남매 중
집에 있는 일고여덟 명의 아이가 저금통을 깨는 장면이 나왔다.
그렇게 하여 모은 돈이 4만 원이 채 안되는데 아이들이 마트에 가서 고른 것은
엄마의 분홍 립스틱과 아빠가 그렇게 좋아한다는 김훈의 신작소설 한 권이었다.
립스틱 한 개 값과 책값은 맞춘 것처럼 비슷비슷했다.
아이들이 몇 달간 모은 책값 14800원!
권정생 선생이 살아생전 농부들의 배추 한 리어카로 환산했던 원고료가 생각났다.

다음날 세탁소에서 옷을 찾아오는데 세상에나, 너무 멀쩡한 거다.
골덴 마이는 모름지기 칼라와 소매가 희끗희끗 낡은 게 또 맛이어서
한 2, 3년쯤 더 입어도 괜찮겠다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댓글(52)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2013-01-11 2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12 0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사과 하나를 먹는 행위도 따지고 보면 사실 엄청나게 복잡한 과정이다.
소화작용에 필요한 각종효소들을 합성하는 일과 음식에서 에너지를 얻는
일련의 화학반응들을 의식적으로 하나하나 챙겨서 수행해야 한다면,
나는 결국 굶어죽고 말 것이다.
그렇지만 박테리아같이 보잘것없는 존재도
산소가 없는 곳에서 당을 자동으로 분해할  줄 안다.
이것이 사과가 썩는 이유다.
                                                     
                                           - 칼 세이건 <코스모스> 445쪽


먼지떨이를 들고 모처럼 청소를 하려다 책꽂이를 한 칸 한 칸 살피니 
읽지 않은 책이 태반이다.
웃긴 건 그 책들을 대부분 읽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
이런 식의 자기기만은 사실 애교에 속한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가 눈에 들어와 무작위로 펼쳤더니
위의 구절에 연필로 밑줄이 쳐져 있다.
언젠가 내가 쳐놓은 밑줄 부분을 읽는 건
점쟁이가 건네준 내 점괘를 읽는 것만큼이나 흥미롭다.

'수행遂行'의 遂는 굳이 찾아보니 '드디어 수'이다.
보잘것없는 일상의 작은 행동들을 하나하나 해나가는 것이
'수행修行'이라고 마음 깊이 받아들인 건 사실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수행'을 생각하니 왠지 <일상 예찬>이라는 책 제목이 떠올랐다.
그림들이 재밌어서 가끔 꺼내 보는 책이라 바로 찾아 페이지를 펼쳤다.
몇 장 넘기니 '불행이나 행복 앞에서 날뛰지 않았다는 스토아 철학풍의 현자'
스피노자의 한마디와 함께 꽤 마음에 드는 구절에 밑줄이 쳐져 있다.

"현실과 완벽, 나는 이 두 가지를 같은 뜻으로 여긴다."
일상생활을 그린 네덜란드 화가들은 도덕의 존재를 순순히 수긍하면서도,
매우 자발적인 행위라 할 수 있는 삶에 대한 강렬한 애착을 통해
그 도덕을 초월하는 것이다.
(...)
네덜란드 회화는 미덕도 악덕도 부정하지 않으며,
그것들을 존재하는 세계 앞에서의 충일한 기쁨으로 초월시킨다.
(...)
화가들은 아름다움이 가장 무의미한 오브제,
가장 평범한 행위 속에 깃들일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 츠베탕 토도로프 <일상 예찬>(165~167쪽)


책들이 일제히 말을 걸어오는 날이 있다.
뻔히 아는 사실이나 미루어 짐작할 뿐인 어떤 이치도
활자로, 눈으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날들이 있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2-01-31 2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31 2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31 2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31 2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01 15: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02 15: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aru 2012-02-02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언제고 꼭 읽고 싶다. 아직은 나와 멀어, 일단 책부터 사야하고! 했는데, 집에 있는 책이었네요 ㅎ 일단 읽는 일부터 해야겠는데, 청소는 언제 할겨??!!
로드무비 님의 이 글을 읽고, 앉은 자리에서 쉼표(,) 찍으며 생각해요~
그래 천천히 살자, 책들이 일제히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날..! 만끽하고 싶어요..

로드무비 2012-02-02 15:38   좋아요 0 | URL
icaru님 저도 그런 책이 꽤 되더군요.
<사람들은 자가 집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다>라는 제목의
이승우 소설집도 있는데...
심지어는 이 소설집이 어떻게 우리 집에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청소 작파하고 책 읽는 재미가 그저그만이었습니다.
덕분에 페이퍼도 하나 건지고.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