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이상하게 왼쪽 손목이 뻐근하여 고개를 갸웃거렸더니

잠자리에 드는 순간, 한 시간 후 저절로 불이 꺼지는 침대맡의 독서등을 켜는 순간, 깨달았다.

김문경의 <구스타프 말러>가 원인이었다.

한 시간 남짓 누워서 이 두껍고 무거운 책을 읽다보니 책을 잡은 왼손에 무리가 왔던 것이다.

언젠가부터 침대 옆 두 칸짜리 작은 책꽂이엔 평전이나 회고록, 자서전 비슷한 책들이 꽂혀 있다.

 

잠자리에서 읽는 책으로는 평전이나 자서전 만한 게 없다.

미구에 닥칠지도 모르는 가난과 병고와 노년의 고독 등에 대처하기 위해 나는

세상에 용감하게 뛰어드는 대신 한 인간의 적나라한 삶이 한 권에 담긴 

평전이나 자서전 류의 책을 택한 것이다.

 

올해 초 연달아 읽은 건 <케테 콜비츠>와 <펄벅 평전>이다.

평소에 관심이 없었던 펄벅 여사에게 갑자기 꽂힌 건 파란만장한 인생과 함께

진정한 평등주의자로서의 그녀의 면모를 어디서 주워 듣고서이다.

중국을 떠나온 펄벅이 미국에서 케테 콜비츠와 노신의 열렬한 전도사가 되는 것도 인상깊었다.

나이 마흔에 자신이 너무 늙었다고 탄식하는 케테 콜비츠도 귀여웠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모시며 더욱 커진 늙음에 대한 두려움도 절절이 공감했다.

평전이나 자서전에서는 어떤 인간의 성취나 영광보다 끔찍한 실수와 수치가 더 눈에 들어온다.

곤경에서 빠져나오는 인간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큼 가슴 졸이는 일도 없을 것이다.

 

 

<구스타프 말러>는 2011년에 선물받았는데 웬일인지 조금 읽다 말았다.

처음에 소개되는 다소 이기적이고 완벽주의자로서의 모습에 실망이라도 했던 것일까?

어제는 아주 재미있는 대목을 만났다.

1905년 메이데이 오후에 말러의 아내 알마에게 애인 피츠너와 남편이 

아슬아슬한 시간차로 나타난다.

피츠너는 길에서 시위하는 노동자들을 보고는 그 누추하고 천한 모습에 몸서리를 치고,

말러는 그들과 함께 잠시 발을 맞춰 행진하고서는 돌아와 싱글벙글이다.

 

내 마음에 쏙 드는 책은 완독 후에도 두 칸의 책꽂이에 그대로 자리를 잡는다.

<이탁오 평전>과 <레이먼드 카버>가 대표적이다.

언젠가 꼭 리뷰를 쓰겠다는 생각이 있는 듯한데 그날이 과연 언제 올지...

다음은 <이탁오 평전>에 소개된 명나라 신종 황제 주익균에 대한 묘사다.

 

- 아무리 백성의 원성이 들끓고 변고를 알리는 급박한 격문이 잇달아 들이닥쳐도

황제는 전혀 마음의 동요 없이 이미 정한 방략을 그대로 밀고 나갔다.

그는 세상 무슨 일에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그는 나름대로 비책이 있었다.

말로 하는 것이야 무슨 말이든 맘대로 해라, 나는 그저 흘려들으면 그뿐 아니냐,

자기들끼리 그러다 말겠지.(20~21쪽)

 

몇백 년 전 중국 황제가 우리 나라에 대통령으로 환생한 것은 아닌지 참으로 신기해 하면서

이상하게도 그게 위안이 되어 신나게 밑줄을 그었던 기억이 난다.

이탁오는 고희에도 시력이 좋아 독서를 계속 즐기는 것을 천행으로 여겼다고 한다.

 

한편 레이먼드 카버는 찌질하기 짝이 없는 그의 사는 모습에 갑갑하고 속에 천불이 나지만

다 읽고 나면 인생의 전모를 슬쩍 본 듯한 느낌이다.

소설가 박완서가 어느 글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카버의 작품으로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을 꼽아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리흐테르>는 최근 김희애와 유아인이 주인공인 드라마 <밀회>에 나오는 것을 보고

간사하게도 가까운 책꽂이로 옮겨졌다.

회고담과 음악수첩인데 주변 인간들에 대해 꼬일 대로 고인 리흐테르의

심사를 읽는 재미도 각별하고, 말러처럼 늘 책을 끼고 산 독서가로서의 책 이야기도

흥미롭다.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간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은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도

최근 가까운 책꽂이에 떠억하니 입성했다.

사사키 아타루는 밤마다 자기 전 평전을 읽던 습관에서 얼마 전 벗어났다고 한다.

그도 혹시 나처럼 책상에 앉지 않고 침대에 누워서 그 두꺼운 책들을 읽어대다가

손목에 탈이라도 났던 것일까?

('기도'에 '독서'를 대입해도 어색하지 않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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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4-04-03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령=책 이군요.

로드무비 2014-04-03 17:41   좋아요 0 | URL
<구스타프 말러>는 1.5킬로그램입니다.^^
 

(...)

일어나지 않았어야 할 일들이

이미 너무도 많이 일어났다.

또한 기대했던 수많은 일들이

발생하지 않았다.

 

(...)

인생을 즐기려고 마음먹은 사람은

결코 실현되지 못할 임무를

떠맡은 것과 매한가지.

 

(...)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누군가 내게 편지로 물었다.

이것은 내가 다른 이들에게 묻고 싶었던

바로 그 질문이었다.

 

또다시, 늘 그래왔던 것처럼,

앞에서 내내 말했듯이,

이 순진하기 짝이 없는 질문보다

더 절박한 질문은 없다.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詩 (<20세기의 마지막 문턱에서> 중에서)

 

 

 

쉼보르스카의  <끝과 시작>은 신기한 시집이다.

가끔 펼쳐보면  처음 본 듯 좋은 시를 한 편씩 만난다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하는 저 질문에

까맣게 잊고 있던 노래 가사가 떠올랐다.

<잼 다큐 강정>이라는 영화 속에서  연주 장면을 처음 보고

소름이 돋았던 곡이다.

 

 

 

왜 내가 이러고 있나(다같이!)

왜 내가 이러고 있나(아이고!)

왜 내가 이러고 있나(어머니!)

왜 내가 이러고 있나(아버지!)

 

그냥 잘살고 싶다오

편히 잘살고 싶다오

있는 그대로 살고 싶다오

그게 그리 큰 꿈이었던가

(...)

 

왜 내가 이러고 있나

왜 내가 이러고 있나

왜 내가 이러고 있나

왜 내가 이러고 있나

(...)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살아야 하네

살아야 하네

살아야 하네

살아야 하네

 

   -  무키무키 만만수의 노래 (<투쟁과 다이어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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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전인가?

광화문 인디스페이스에서 잠깐 개봉된 영화

장률의 첫 다큐 <풍경>을 보러 갔을 때

어찌나 피곤했던지 영화를 보며 졸다 말다 했다.

장률 감독의 영화를 보다 졸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실제로 일어났다.

 

영화를 보고 나왔더니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허무하기도 하고 망연자실해서 잠깐 서있는데

극장 마당, 저만큼 뒤쪽에

혼자 서있는 늙수그레한 남성이 아무래도 장률 감독 같았다.

 

자신의 영화 첫 개봉일,

열 명 남짓한 관객 중 머리통을 찧으며 졸고 있는 아줌마 관객을

그는 아마도 풍경으로 바라봤을 것이다.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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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10 21: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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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11 11: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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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11 00: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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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11 11: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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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15 11: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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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16 22: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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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17 02: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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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24 17: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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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25 13: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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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엄마의 8순 생신에 부모님과 함께 <변호인>을 보러 갔다.

초등학생인 조카가 방학을 하면 부산에서 상경하여

한두 달 지내다 가시는데 남동생의 이사와 엄마의 생신과

아이의 방학이 겹쳤다.

 

요 몇 년, 두 분이 방학 때 북한산 기슭의 남동생 집에 머무시는 동안

나는 가끔 그곳으로 출동하여 극장에 모시고 갔다.

가볍게 볼 수 있는 코믹 영화 위주로 골랐는데 두 분은 한 번도 재미있다고 하신 적이 없다.

어떤 영화를 보는 일은 정말 고역이었다.

 

그런데 며칠 전 그날, 극장을 빠져나오며 아버지의 떨리는 음성을 들었다.

"오랜만에 영화다운 영화를 보았다! 로드무비야 고맙다."

엄마의 반응은 따로 물어볼 것도 없었다.

영화를 보며 엄마가 한 번도 졸지 않은 건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까!

 

극장에서 나와 근처의 예약해둔 참치집에 모여 저녁을 먹었다.

언젠가 맛있게 드시던 모습을 기억하고 정한 집인데

이런 고급식당은 처음 와본다는 말씀에 깜짝 놀랐다.

밥을 먹기 전 엄마가 아버지에게 감사기도를 부탁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미루셨고, 나는 생전 처음 가족 앞에서 대표기도를 해야 했다.

허둥지둥 두 분의 건강과 온 가족의 화목을 비는 짧은 기도를 올렸다.

 

기도가 끝나고 엄마를 흘낏 봤더니 딸의 짧은 기도가 미진했던 듯

한참 동안 손을 모으고 눈을 감고 계셨다.

5년 전인가, 결혼 50주년을 맞아 두 분이 중국여행을 가시기로 했는데

갑작스러운 엄마의 암 발병으로 무산되었다.

아버지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쭈욱 엄마의 소원대로 교회에 나가고 계신다.

 

젊은 날 멋장이 해군이었던 아버지는 영화를 보고 나서

주인공과 함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색연필로 그리고 그 밑에 짧게 감상을 적어놓으셨다.

주로 헐리우드 영화였는데 16절지 묶음이 꽤 두터웠던 기억이 난다.

밥을 먹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아버지, 나중에 그 영화수첩  저 주세요!"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셨다.

 

나는 그동안  혼자만 영화 보러 다니는 게 죄송해서 두 분을  극장에 모셨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두 분의 의견을 여쭤본 적이 없다.

내 맘대로 시시껄렁한 영화들을 고르고, 모시고 가서 보게 하고,

식당에서 밥 한 그릇 사먹고 나오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그 영화들이 아버지의 성에 조금도 차지 않았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나 혼자 산다>에서 데프콘이 MBC 연말 시상식에서  예능상을 받고

수상소감을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고 머리를 쥐어뜯는 모습을 보니

엄마 생신상 앞에서 너무 형식적이고 짧았던 나의 기도가 생각났다.

좀더 간절하고 감동적인 기도를 했으면 좋았을걸, 하는 미련이 남는 것이다.

 

우리 아버지 한창 날리실 때의 기록인 그 영화수첩을 하루빨리 보고 싶다.

앞으로 몇 편의 멋진 영화가 그 수첩에 추가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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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07 23: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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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08 09: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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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11 00: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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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11 11: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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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죽(毛竹)'이라는 게 있다는 건 작년인가 재작년 자기계발서 교열교정 작업 중에 알게 되었다.

모죽은 중국 대나무로 씨를 뿌린 뒤 5년 동안 조그만 순만 틔우고 꿈쩍도 안하다가,  

어느 날 하루에 80센티미터씩 쑥쑥 자라서 몇 주 만에 30미터까지 자란다는 것이다.

 

물이 끓기까지는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던 냄비속 물처럼 모든 사물에는 임계점이 존재하며

여기에 도달하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이치로 모죽이 인용되고 있었다.

그럴싸하다고 생각했는데 두 번째, 세 번째 다른 원고의 저자도 약속이나 한 것처럼

'모죽'에 대한 썰을 펼쳤다.

 

세 번째 모죽 인용 저자는 안타깝게도 모죽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 없이 얼렁뚱땅 소개하여

글의 감동이 훨씬 덜했다.

나는 성의껏  '모죽'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원고에 보탬으로써 빈약한 페이지를

풍성하게 살렸다.

그랬더니 편집자가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앞으로 책을 낼 출판사에 상관없이

자신의 원고를 모두 나에게 맡겼으면 하는 저자가 한 명 생겼다고...

 

새마을운동 정신을 강조하던 박근혜 대통령이 최근 새로운 용어를 입에 올렸다.

'퀀텀점프(Quantum Jump)'로 퀀텀은 물리학 용어라고 한다.

퀀텀점프는 어느 순간 비약적으로 다음 단계로 올라가는 현상을 말한다.

한 단어로 표현하면 '도약' 정도가 될 것이니 그런 면에서 모죽 이야기와 일맥상통한다.

지금의 고생을 참고 이겨내면 분명 눈부시게 도약하는 인생의 순간이 있다는 뜻이겠지.

 

나는 우리나라에서 모죽을 제일 먼저 자신의 책에 소개한 사람이 누군지

그게 몹시 궁금했다.

얼마 전 교보에 갔을 때 청년들의 멘토로 부상한 베스트셀러 저자의 책이 눈에 띄어

혹시나 싶어 훑어보았다. 역시나 '모죽 이야기'가 있었다.

그런데 책의 발행연도를 보니 그 역시 모죽 씨를 숨겨가지고 들어와

우리나라에 처음 전파한 사람은 아니었다.

 

'퀀텀'이라는 단어를 처음 찾아본 건 3, 4년 전

'인생의 도약'에 대한 원고를 한 출판사로부터 전해 받고서이다.

찾아보니 '벼룩'이 튀어나왔고, 심지어 국내 어떤 미용단체와 침대회사에서도

 '퀀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침대는 그렇다고 치고, 미용과 퀀텀은 무슨 상관관계인지 고개를 갸웃거리다
무릎을 딱 쳤다.

'빠마"를 처음 하면 무지 어색하고 이상한데 꾹 참고 손질을 잘해주면

어느 순간 무지 자연스럽고 예쁜 웨이브를 갖게 된다, 뭐 그런 뜻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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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02 13: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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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02 13: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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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4-01-02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니까 점프의 그 순간까지는....닥치고 참으라..는 말도 숨어 있군요....(이거 무서운 말이군요)

로드무비 2014-01-02 13:43   좋아요 0 | URL
닥치고 있으라는 숨은 메시지꺼정!

역시 메피님은 훌륭하십니다.^^

2014-01-05 00: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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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07 17: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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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11 00: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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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11 11: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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