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오후 4시에서 6시 사이에 책상자가 도착한다는 알라딘의 반가운 카톡.)

 

며칠 전 오랜만에 책을 주문했다.

신간알림 메일을 보고 알라딘으로 건너와 책을 주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5만원을 채우고 2천원의 적립금과 사은품까지 챙기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만화 <고독한 미식가> 원작자가 쓴 목욕탕과 술에 관한 쾌락 에세이,

<낮의 목욕탕과 술>(구스미 마사유키).

사노 요코의 책 100자 평에 썼듯이 내게 있어 독서는 쾌락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요즘 그 쾌락에 자주 제동이 걸린다.

 

장바구니에 너무 오래 두고 있는 소설집 <너무 한낮의 연애>와 <씨네21>과 함께

결제를 하려는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장바구니로 돌아가 목록을 훑어보는 순간 깨달았다.

<시인 신동문 평전>이 있었지!

그의 시 <내 노동으로>를 줄줄 외울 정도로 좋아한다.

(밑에 몇 줄...)

 

달포 전 한 텔레비전의 다큐 프로그램에서 신동문 시인의 문학과 삶을 다룬 걸

우연히 보았다.

평전이 나왔다는 걸 알고 컴퓨터 앞으로 달려와 검색했다.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고
결심을 한 것이 언제인가

머슴살이 하듯이
바뀐 청춘은

다 무엇인가

 

돌이킬 수 없는

젊은날의 실수들은

다 무엇인가

......

 

- 신동문 시 <내 노동으로> 중에서

 

김금희의 소설집을 뺐다.

베스트셀러라니 관리사무소 안의 작은 도서관에 있을지 모른다.

갖고 싶은 손창섭의 전집 중 단편소설집 한 권을  새로 넣었다.

<낮의 목욕탕과 술>은 결국 밀려났다.

(아니, <낮의 목욕탕과 술>이 어때서!)

 

몇 달 전 메일을 보고 홀린 듯 들어와 주문한 책들은 버릴 게 하나도 없었다. 

조성기의 <우리는 아슬아슬하게 살아간다>와 권여선의 <주정뱅이여 안녕>은

한 번 더 읽으려고 가까운 책꽂이에 모셔두었다.

 

조성기의 <우리는 아슬아슬하게 살아간다>는 책 장정이 한마디로 '근조(謹弔)'이다.

복사집에서 날림으로 제본한 듯한 장정, 그리고 검은색 속표지의 책을 펼쳤을 때

한마디로 부고장을 받은 것 같았다.

세월호가 침몰하던 날 하루를 실시간으로 전하는 듯한 그의 단편이 책 제목이 되었다.

 

몇 년 전 읽다가 만 카를 융의 자서전 <기억꿈사상>을 꺼내봤더니

검정색 속표지는 같은데 느낌은 사뭇 달랐다.

<우리는 아슬아슬하게 살아간다>를 쓴 역자에 대한 무한한 신뢰감으로

<기억꿈사상>을 한달에 걸쳐 정독했다.

 

그뿐 아니다.

'작가의 말'에서 그가 극찬한 젊은 소설가의 이름과 작품에 주목했는데

관리사무소 도서관 책꽂이에서 어느 날 발견했다.

손아람의 <소수의견>.

소설이 영화보다 더 박진감 있고 재미있어 단숨에 읽혔다.

웃긴 건 나중에 확인했더니 작가가 칭찬한 건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

(무엇 때문에 손아람과 황정은을 착각했을까? ...짐작되는 게 있다.)

 

저녁에 도착할 책상자를 기다리며 사부작사부작 책 이야기를 늘어놓자니

문득 옛날 그리운 어느 날로 돌아간 것만 같다.

 

 

 

 

 


댓글(109)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2018-10-12 2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0-14 15: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0-16 0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0-16 18: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0-16 1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1-09 02: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1-09 2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03 18: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05 1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언제부턴가 책장수님이 집에 있는 토요일에 택배를 받는 일이 불편해졌다.

도둑이 제발 저린 격이다.

결혼 당시 여차하면 내가 벌어 먹여살리겠다고 큰소리까지 쳐놓고는

나몰라라, 정말 급하다고 부탁하는 일도 해주지 않고

남의 출판사 일만 가물에 콩 나듯이 해서

근근이 책값과 영화표를 벌고 있다.

 

모처럼 들른 알라딘에서 <사는 게 뭐라고> 책베개를 보는 순간 이성을 잃고

장바구니에 책을 담기 시작했다.

(사노 요코의 이 책은 최근 읽은 것 중 가장 재미있었다.)

레이먼드 카버의 <내가 필요하면 전화해>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걷는 듯 천천히>가 눈에 띄었다.

김용택 시인의 <어린이 인성사전>도 드디어 장바구니에 담겼다.

사은품을 위해 일정 금액 이상의 책을 주문한 것은 근  1년 만의 일이다.

 

그런데 주문을 마치고 보니 배송이 토요일.

알라딘에 전화를 걸어 월요일에 배송해줄 것을 요청했다.

(빨리도 아니고 늦게 보내달라고 애걸하다니!)

담당직원은 출고를 조정할 수는 없고 택배사에 전화해

월요일에 받을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토요일 아침에 늘어지게 자고 있는데 책장수님이 건네주는 전화기,

택배 기사님이었다.

그는 책상자를 지금 가지고 왔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큰소리로 물었다.

 

"월요일에 받게 해달라고 그렇게 부탁했는데...

그럼 할 수 없죠. 전화 받은 김에 지금 갖다주세요."

 

통화가 끝나자마자 택배 기사님은 요란하게 인터폰을 울리고

대문 앞에 잠복하고 있었던 것처럼 

큰 상자를 내게 안기고는 번개같이 내뺐다.

 

무심한 척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책장수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곤 상자의 테이프를 뜯어내며 이실직고했다.

이러저러하여 여차저차 요로코롬 되었다고.

 

그런데 주문한 책들이 하나같이 얼마나 예쁘고 책베개는 또 얼마나 근사한지

어제의 노심초사와 잠깐의 쪽팔림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특히 <어린이 인성사전>은 나왔을 때부터 자꾸 눈길이 가더라니,
수첩에 옮겨 적고 싶을 정도로 사려 깊고 멋진 구절들로 가득했다.

 

 

 

 

 

 

 


댓글(47)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바람돌이 2015-09-20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에 인사드려요. 잘 지내시죠? ^^

로드무비 2015-09-20 15:00   좋아요 0 | URL
바람돌이님 반갑습니다.
몇 년 만에 님 방에 들렀어요.
직접 만든 맛난 빵이랑 근사한 서재 구경하고 왔습니다.
터키 페이퍼는 시간 여유 있을 때 차근차근 볼게요.^^

Mephistopheles 2015-09-21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저는 마님의 눈총을 받을 만한 택배는 무조건 직장으로 입니다....ㅋㅋㅋ

로드무비 2015-09-21 17:55   좋아요 0 | URL
메피스토님,
저도 그 용도로 직장을 구할까 봐요.ㅎㅎ
(댓글을 그리워하며 잠복하고 있었습니다.)

2015-09-22 0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22 0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22 1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22 16: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24 16: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05 0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05 23: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10 0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14 14: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15 0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15 0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15 2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16 14: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16 16: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17 15: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24 14: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02 15: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10 16: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05 18: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10 16: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25 0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25 19: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01 1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02 17: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11 0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17 0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17 17: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17 16: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17 17: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22 0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22 0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03 16: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29 0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02 15: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14 1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01 2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01 15: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01 2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10 17: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01 2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04 14: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07 2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07 22: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늘 오전 알라딘에는 '구운가지무침'이라는 엉뚱한 제목의 영화 페이퍼가

잠시 떠올랐는지도 모른다.

 xx 인터넷슈퍼에 들렀다가 접시에 담긴 가지요리 사진과 레시피가
하도 먹음직하여 알라딘 창고에 옮겨놓는다는 것이 그만 열린 페이퍼 카테고리였다.

지난번에도 그 비슷한 일이 한 번 있어서 건망증이 정점을 찍고 있는 요즘

페이퍼 하나 쓰는 것도 무서울 정도다.

다행히 5분 만에 발각되어  '구운가지무침'은 창고로 옮겨졌다.

그런데 갑자기 뭔가 하나 쓰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해진 것이다.

 

오늘 아침 반찬 이야기나 해볼까?

단연코 고구마줄기볶음이다.

어젯밤 우리집 강아지와 산보 겸 동네 쇼핑에 나섰다가 노점에서 사들게 된

고구마줄기다.

양도 많고 어찌나 굵고 싱싱한지 3천원이라는 할머니의 말이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밤에 삶아놓았던 고구마줄기를 절반만 덜어 우묵한 프라이팬에 볶았다.

간장, 고추장과 함께 양파, 청양고추를 썰어 넣어 매콤했다.

아침에 책장수님을 위한 도시락을 만들고 나면 하루의 일과가 끝나는 기분이다.

어떤 날은 도시락을 위해 만든 반찬과 국이 저녁까지 일용할 양식이 되기도 한다.

 

최근에는 김치도 직접 담근다.

배추고 열무고 알타리고 간에 딱 한두 포기(단)만 하는데

'이렇게 맛있게 될 줄 알았으면 좀 더 할 걸!' 하는 후회를 하면서도
딱 그만큼만 한다.

우리 동네에는 없는 채소가 없는 '장터'라는 이름의 가게가 있는데

몇 주 전 얼갈이를 사면서 잎부분이 좀 시들시들하다고

한마디 했다가 경을 쳤다.

주인 아저씨가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치는데,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와

얼갈이를 다듬다가 그 이유를 깨달았다.

달팽이가 한 마리 유유히 기어 나온 것이다.

농약을 안 치거나 덜 뿌린, 나름 최상의 상품을 가져다 팔고 있는데

그걸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단골이 몰라주니 억울했던 것.

 

지지난 해인가?

고구마줄기를 벗기느라 몇 시간을 낑낑거렸던 적이 있다.

그 이후 고구마줄기볶음은 우리집 밥상에서 퇴출됐다.

고구마줄기 껍질 까는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누렇게 물들고 비누로 씻어도 끈끈한 손이 불쾌했다.

그런데 할머니는 그렇게 말끔하게 손질한 한 무더기의 고구마줄기를  건네며

한마디의 공치사도 하지 않으셨다.

 

오늘아침 고구마줄기볶음이 얼마나 맛있던지,

새로운 메뉴를 개발한 것만큼이나 기쁘다.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4-07-21 16: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7-21 17: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선인 2014-07-21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러워요. 게으르고 나태한 저는 나물요리가 세상에서 제일 어려워요. 로드무비님의 밥상에 초대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부비부비. 잘 지내셨죠?

로드무비 2014-07-21 18:03   좋아요 0 | URL
조선인님 반갑습니다.
게으르고 나태한 거는 제 앞에서 명함도 못 내미십니다.
'허름한 밥상' 카테고리 새로 열까요?
반찬에 대한 욕망이 갑자기 스멀스멀...ㅎㅎ

프레이야 2014-07-21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이게 얼마만인가요^^ 허름한밥상, 다시 열어주세요ㅎㅎ 게으르고 나태하기론 따를 자가 없을 듯한 사람 여기 또 있어요.

로드무비 2014-07-21 21:23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무신 말씀을!
얼마나 바지런하고 야물딱진 분인지 이미 알고 있는데요.

허름한밥상은 제가 가장 아끼던 겁니다.
마이도러와 함께...
그때가 그립네요.ㅎㅎ

하늘바람 2014-07-21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부러워요 하는 족족 맛없어서리

로드무비 2014-07-22 10:19   좋아요 0 | URL
하늘바람님, 하는 족족 맛없기도 쉽지 않은데!=3=3=3
ㅎㅎ 농담이시죠?
반갑습니다.

조선인 2014-07-22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름한 밥상, 원해요, 원해요!!!

로드무비 2014-07-22 22:21   좋아요 0 | URL
솔깃하네요.^^

2014-08-28 1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8-29 17: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8-30 14: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9-02 1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9-04 18: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영화소식은 다음주부터 다시 보내드리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영화 <고령화 가족>을 보고 나와서는 삼겹살 한 근과 소주를, <우아한 거짓말>을 보고 나와 우리 가족은 집에 와 짜장면을 시켜 먹었다. 내 눈에 영화 속 가족이 함께 둘러앉아 나누는 음식만큼 이 세상에 맛있어 보이는 건 없다.

 

그런데 신기하다. 존 웰스 감독의 <어거스트, 가족의 초상>에는 분명 만찬 장면이 있으나 내 눈에는 어떤 음식도 보이지 않았다.

영화는 T. S. 엘리엇의 시집과 한 줄의 시구와 함께 시작된다.

- 인생이 너무 길다.

 

바이올렛(메릴 스트립)의 남편 베벌리(샘 쉐퍼드)는 구강암에 걸린 아내의 시중을 위해 인디언 원주민 가정부를 구해놓곤 그 길로 집을 나가버리는데...

아버지의 실종소식에 그동안 코빼기도 비치지 않던 장녀와 막내딸이 각자 가족과 애인을 대동하고 한여름 무더위에 비지땀을 흘리며 나타난다.

장녀 바바라(줄리아 로버츠)와 이혼 직전인 남편(이완 맥그리거) 사이에 난 14세 소녀 진은 낯이 익다 했더니 영화 <리틀 미스 선샤인>(2006년)의 막내였던 올리브, 아비게일 브레슬린이다. 

<리틀 미스 선샤인>이 대표적인 '콩가루 집안' 영화 중 하나였다면, <어거스트, 가족의 초상>은 한술 더 떠 "싸이코 소굴"(바바라 남편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자매 중 혼자 고향에 남아 부모 집 가까이 살던 미혼의 둘째 딸 아이비(줄리엔  니콜슨)는 이모의 아들 '백수' 찰스(베네딕트 컴버베치)와 사랑에 빠졌다며 집을 떠나겠다고 선언하는데, 곧이어 더 놀라운 출생의 비밀이 밝혀진다.

꼬일 대로 꼬인 모녀간 자매간 부부간의 갈등과 악다구니의 대폭발을 보여주는데, 우울이나 센티멘털도 하루이틀이지, 사실은 각자 자신의 문제에 골몰하여 가족에게 관심과 애정을 줄 여건이 안 되는 것이다.

 

아버지의 장례식날 밤, 만찬에서 가족은 격돌한다.

간신히 버티며 살고 있는 각자의 비밀이 까발겨지고, 그것은 장례식의 주인공인 아버지도 예외는 아니다. 술에 억병으로 취해 바지에 실례를 하는 바람에 다시는 동창회에 초대받지 못한 그의 수치스러운 과거가 약물에 취한 아내의 입을 통해 드러난다.

"살다보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지. 코너에 몰리다보면..."

누군가 이렇게 중얼거리지만 공허하기 짝이 없는 독백이다.

 

장례식 만찬 기도를 제부(크리스 쿠퍼: 영화 <아메리칸 뷰티>의 옆집 그 싸이코)에게 시켜놓고 심술궂은 얼굴로 한 명 한 명 살펴보는 노년의 엄마를 맡은 메릴 스트립의 연기는 압권이다. 젊음이 딱 한 가닥 남아 있는 듯 뭔가 위태롭고 아슬아슬해 보이는 장녀 역 줄리아 로버츠의 얼굴에서도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다. 

 

'늙으면 여잔 추해진다. 너희들만 봐도 딱 알겠구만!"

"네 남편이 어린 여자랑 바람났다고? 젊은 년은 절대 못 당해!"

남편의 장례식 만찬에서 딸들에게 쏟아붓는 엄마의 선전포고다.

이 영화는 가족의 문제 외에도 점점 더 늙어가는, 혹은 자신에게서 젊음이 달아나는 것을 속절없이 지켜보는  여성들의 초조와 공포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한밤중에 집 안에서 일어난 있을 수 없는 일을 목격하고 몽둥이를 들고 뛰쳐나오는 건 다름 아닌 인디언 원주민 가정부다.

 

막장이나 콩가루 가족 드라마와 영화에 익숙해져 웬만한 사건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편인데도  이 영화는 정말 압도적이었다. 서로 잡아먹지 못해 으르렁대는, 영화 속 메릴 스트립과 줄리아 로버츠 모녀는 깜짝 놀랄 정도로 늙었지만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했다. 오랜만에 보는 막내딸 역 줄리엣 루이스도 반가웠다.

알람을 제대로 못 맞춰 이모부의 장례식에도 참석 못하고 변명을 늘어놓는 청년 찰스(베네딕트 컴버베치)와 14세 소녀 역 아비게일 브레슬린도 뭐 젊다고 해서 눈부시거나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다.

극장 문을 나서는데 무엇인가 내 속의 꽉 막혀 있던 것이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지독하게 삭힌 홍어에 막힌 코가 뻥 뚫리듯...

 

'지긋지긋한 집구석'이라는 황지우의 시구가 생각나 부리나케 책상 앞에 앉았다.

 

 

치열하게 싸운 자는

적(敵)이 내 속에 있다는 것을 안다.

지긋지긋한 집구석

 

    - 황지우 <나는 너다> 시집 중에서

 

 

 

 


댓글(9)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4-04-10 0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10 10: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정은 2014-04-10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언니 서재 오랜만이네요^^
화욜 얘기듣고 꼭 극장에서 보고싶어 수욜 오전에 열일 제치고 가서 봤어요.
역시나 명품 배우들의 연기는 명불허전입니다.
특히 메릴 스트립이 아니었다면 누가 이 엄마역을 이렇게 잘 연기할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늘 좋은 책과 영화 소개해 주는 언니 덕분에 간신히 교양의 실 줄기를 이어갑니다.
행복하시고 짧은 봄날 가기전에 꽃단장한 안산에도 산책겸 놀러오세요

로드무비 2014-04-10 23:24   좋아요 0 | URL
무의도 정말 좋았어.
거기 안 갔으면 이 봄이 허무할 뻔했지.

책과 영화라도 있어서 다행이야.
비로소 그런 생각이 드네.
안산이라면 이대 후문 쪽 거기를 말하는 거야?
(서재 없는 거지? 댓글 오픈해야겠네. 하나 만들어.)

2014-04-14 14: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14 16: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밤섬 2014-04-15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인터파크 이용하다 언니 생각나서 오늘은 알라딘에서 3년만에 책주문해보네요^___^
언니 덕분에 고객이 한명 늘었다는걸 알라딘이 알아줘야 하는데 아쉽네요. ㅋㅋ
행복한 하루 되세염~~!

로드무비 2014-04-15 16:03   좋아요 0 | URL
봉원사도 하루 가고 싶은데...
서재 만들었네? 반가워라.
자주 글 올릴게.^^

2014-05-27 1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