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멋진 세상 1
아사노 이니오 지음, 천의성 옮김 / 애니북스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나라는 인간은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제 입으로 좋다고 난리를 친 작가의 신작이 나와도 한동안 딴청을 부린다.
몇 안 되는 믿어 의심치 않던 것으로부터도 거리를 두는 이 몹쓸 습관이라니.

--솔직히 난 니가 아니니까 니 인생 따윈 몰라.
그렇지만 말이야. 살다보면 나쁜 일도 있지만 좋은 일도 반드시 있는 법이거든.
그러니까 일단은 열심히 살아보란 말야
.(아사노 이니오 <빛의 거리> 85쪽)

"일단은 열심히 살아보란 말이야" 라는 말 따위가  
앞이 보이지 않는 저마다의 구체적인 문제에 맞닥뜨린 인생에 위로가 될 리 없다.
그런데 때로는 그 어떤 심오한 말보다 힘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

--그런데 지금 이대로 괜찮을까?

 이것은 아사노 이니오의 전 작품 ('소라닌'이나 '빛의 거리'나 '이 멋진 세상' 등)을 
관통하는 질문이다.
짐작건대 그의 이 질문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그냥 이렇게 살다가 인생 종쳐도 괜찮을까?)

어른의 세계로 오래 전 진입한 주제에 감기 시럽을 달고 살아서
'시럽'이라고 불리는 녀석이 있다.
어쩌다 저쩌다 대학 4수 중인 두 녀석과 만나 친구가 되었는데.
대학이니 뭐니 자신의 꿈을 접고 가업인 생선가게를 잇겠다고 선언한 녀석이
언제나 카메라를 목에 걸고 다니는  친구에게 악을 쓴다.

"우리 같은 평범한 떨거지들에겐 말야, 꿈을 논할 자격조차 없단 거 몰라?"

씩씩거리며 옥상에 오른 미래의 사진작가는 차마 자신의 카메라를 던져버리지 못한다.
그 꼴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삶에 아무런  관심도 애착도 없는 시럽의 한 마디.

--무리하지 마라. 각자 살아가는 법이 있고,
그게 맞는지 어떤지 불안하고 초조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 거야.
너희 둘 다 그냥 그대로 좋은 거야.(194쪽)

요시다 슈이치의 <동경만경>을 읽었을 때와 흡사한 감흥이 차올랐다.
'청춘의 만화'로 소개하고 싶다.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8-01-23 1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23 1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24 04: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24 1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건우와 연우 2008-01-24 0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끝이 가늠되지 않는 터널같았던 청춘이 있었습니다.
이젠 그시절에게도 어깨를 두드려주고 싶은 나이네요...
뒤늦은 새해 인사!
건강하세요^^

로드무비 2008-01-24 12:24   좋아요 0 | URL
건우와 연우 님, 반갑습니다.^^
그런데 그 터널은 끝이 없네요.
더 길고 컴컴한 터널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님도 건강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08-01-24 13: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24 2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24 23: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25 1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16 0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간절하게 참 철없이 - 2009 제11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창비시선 283
안도현 지음 / 창비 / 200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밥 한 그릇이
소반 위에 놓여 있다
소반이 적막하여서
무밥도 적막하여서
송송 채를 썬
흰무의 무른 살에 스민
뜨거움도 적막하여서
무밥 옆에 댕그라니 놓인
양념간장 한 종지도
옛적에 젊은 외삼촌이
여자를 만난 것처럼
가난하게 적막하여서
들척지근하고 삼삼한
이 한 저녁을
나는 달그락달그락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무밥' 안도현 시집 <간절하게 참 철없이>)


떡잎이 누렇게 진 시든 채소를 다듬어 삶아 나물 한 접시를 무치고,
냉동실에 굴러다니는 꽝꽝 언 생선을 녹여서 굽거나 찌개를 만들어
버젓이 한 끼를 해결하고 나면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다.
나의 알뜰살뜰함과, 소박한 찬이 주는 만족감이라니......

'달의 변화 관찰'이라는 딸아이 학교숙제 도움을 받기 위해
몇 달 전 늦은 밤 딸아이 친구의 집을 찾았을 때
열 살, 여덟 살인 두 살 터울의 자매가
소매끝이 나달나달하고 목이 늘어져
어깨가 드러날락 말락 하는 내복 차림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낡은 내복을 입은 보름달 같은 어린 자매의 모습은
김치냉장고 사는 데 보태기 위해 마트 일을 나간다는
그 엄마의 말과 함께 그립고 순정한 풍경으로 다가왔다.

<간절하게 참 철없이>는 평소 그립고 순정한 풍경을 보여주는
안도현의 신작 시집이다.
특히 2부에 묶인 22편의 시는 시인이 밤새도록 끓인 뜨끈한 국밥 같다.
그가 차린 개다리밥상 위에는 찌그러진 알루미늄 냄비나  손때 묻은 막사발에
무밥이나 갱죽(53쪽, "밥알보다 나물이 많아서 슬픈 죽")이 
김을 피워 올리고 있다.
'통영 서호시장 시락국'(73쪽)은 내 언젠가 꼭 가서 먹어보고 말
맛집 명부에 오르고......
"들척지근하고 삼삼한" 무밥이나 시락국은 음식이라기보다 내게는 뭐랄까,
소박하고도 견고한 정신성의 상징 같다.

날씨가 춥다.
정육점에 딸린 동네의 허름한 식당에서,
프라이팬에 파채랑 수북히 얹어서
삼겹살이나 지글지글 구워 먹었으면 좋겠는 저녁이 온다.



 

***창비 서평단으로 받은 시집입니다.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8-01-18 2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9 07: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8-01-18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오늘 낮에 시락국 먹었어요.^^
어느 샘과 이름도 예쁜 '꽃마을'이란 동네의 할매집이라는 식당에서요.
소박하고 견고한 정신성의 상징.. 마음에 닿는 구절입니다.
뚝배기에 담긴 시락국에 소박한 밑반찬 몇가지와 쭉쭉 찢어먹는 벌건 김치가
어찌 맛나던지요. 무조림이랑 빡빡하게 끓인 된장찌게도요~

로드무비 2008-01-19 00:07   좋아요 0 | URL
시락국이란 이름 참 구수하고 예쁘죠?
맑은 된장국 잘 끓이는 게 힘들까요, 툭한 된장국 잘 끓이는 게 힘들까요?
이상한 의문들이 머리속을 오갑니다.
혜경 님, 저도 오늘 저녁 가자미와 함께 얼큰하게 졸인 무조림 먹었어요.^^

2008-01-18 2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8 2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9 07: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게다예요 2008-01-19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밤새도록 끓인 뜨끈한 국밥, 같다니... 말만 들어도 속이 뜨끈뜨끈해지는 것 같아요.
예전엔 옆에 끼고 많이 보면서 그의 시가 연탄처럼 너무 뜨끈뜨끈해 좋았더랬는데, 요즘엔 냉랭한 것들에 익숙해져서 인지 최근엔 그의 시를 별로 읽질 않았거든요. 그래도 신작이 나왔다니 궁금하네요. 반가워요^^

로드무비 2008-01-22 13:08   좋아요 0 | URL
이게다예요 님, 그러니까요.
저는 안도현 시인의 시를 언젠가부터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모처럼 읽어보니 참 좋더라고요.
음식 시들은 특히 좋네요.^^


2008-01-20 0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22 1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두근두근 우타코 씨
다나베 세이코 지음, 권남희.이학선 옮김 / 여성신문사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영감 따윈 필요없어!"라며 노년의 삶을 홀로 만끽하며 살아가는 우타코는
자신의 나이(77세)를 ‘골든 에이지’라고 부른다.
사별 당번, 생이별 당번, 병 당번, 재난 당번 등 '희미한 그림자'(神을 지칭하는 것)가
차례로 걸어주는 인생의 간난신고를 모두 완수한 그녀의 목에는
더이상 걸려 있는 패찰이 없다.

인생의 고난도 당번을 서는 것과 같다니, 이를테면,
학교에 다닐 때 어김없이 차례가 돌아와 화장실 청소를 한다든가
학급 아이들이 마실 물주전자를 낑낑거리며 교실까지 날랐던 것처럼?
병이나 명퇴나 사랑하는 사람의 사별 등 참을 수 없는
인생의 고통도 그렇게 당번을 선다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앙탈을 부려봤자 소용이 없으니 내 차례가 되었을 때 선선히 맞아들이라는데
그렇게 생각하니 우리가 전전긍긍하던 그 모든 일들이 '그까짓것!' 싶어진다.

남편을 앞서 보내고 분연히 일어나 쓰러져가는 집안을 일으켰던 그녀.
자식들이 함께 살자는 걸 마다하고 고급 맨션에서 혼자 사는 우타코는 맛있는 것 챙겨먹고,
철마다 예쁜 옷 맞춰 입고, 이것저것 마음 가는 대로 공부도 하면서
화사하고 유쾌하게 지내는데......
자유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며,
연애나 섹스나 결혼에는 크게 관심이 없지만,
우정이든 연애든 한 인간과의 사이에서 오고가는 '설렘'이야말로
인생 최고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타코 씨는 각자가 마음을 굳게 먹고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자식이라고, 또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여 호들갑을 떨며
엎어지고 자빠지는 것이 사랑이라 굳게 믿는 사람들의 대열에서 멀리 벗어나 있다.

우타코 씨를 보며 문득 생각나는 일 하나.
혈관이 약해 뭐가 잘못되어 지난달에 다시 수술을 받은 엄마는
마취에서 깬 직후 홍콩에 출장 간 내 남동생과 통화하는 아버지를 보더니
핸드폰을 달라고 했단다.

"니 홍콩 출장 갔다며?  올 때 랑콤 딱분 사온나. 다 떨어졌다."

순간 6인실의 병실에 웃음꽃이 터졌다고.
밤에 전화로 여동생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배꼽을 잡았다.
갑자기 닥친 병마와 두 번의 수술로 기운을 잃으시면 어쩌나 했는데
그것은 기우였던 것이다.

예쁜 옷 좋아하고 자기중심적인 성향이 강하다는 면에서 이 책의 주인공을 많이 닮은
우리 엄마.
우타코 씨를 만나고 어떤 표정을 지으실지 자못 궁금하다.


----------------------------


이 책은 1923년생인 '과천의 이야기 할머니'이학선 여사와
최고의 일본문학 번역가로 명성이 자자한 권남희 씨의 공동번역이다.
이학선 여사는 10여 년 전 작가 다나베 세이코(<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 원작자)를 만나고
이 책을 읽으며 우타코 씨에 반해 가슴 설레며 번역을 마쳤다고 한다.
권남희 씨는 나이 마흔을 맞으며 우울증이 찾아왔는데 소설 속의 우타코 씨와
그때 일흔몇 살이었던 이학선 여사를 만나면서 우울증이라는 종기가
싹 나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의문이 있다.
공동번역인데 책 뒤에 왜 한 사람의 말만 실었는가?
권남희 씨의 이 책 소개를 읽으며 이학선 여사의 '옮긴이의 변'이 궁금해
급히 책장을 넘겼는데 허무하게도 그게 끝이었다.
내가 정말 궁금했던 건 출판을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도 기약도 없는 가운데 
10년 전 노트 세 권에 우타코 씨를 한 자 한 자 옮겼다는 이학선 여사의 소회다.
이런 무례무신경함이라니......
이럴 때는 책을 확 집어던지고 거리로 뛰어나가고 싶다.
우라질 세상, 책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여성신문사에서 나왔다.


















댓글(2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치니 2008-01-11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이섬 입장권은 왜 주는걸까요? 갸웃. ^-^ 로드무비님, 반가운데 딴 소리만 하네요.

로드무비 2008-01-11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치니 님 반가워요.^^
제가 이 책 살 땐 안 줬는데.
뭐 줘봤자 안 갔겠지만 그래도 궁시렁.
심술 모드.=3=3=3

2008-01-11 15: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1 16: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1 16: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1 2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1 23: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2 1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2 09: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2 1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2 15: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4 1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2 15: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4 13: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2 16: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4 1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8-01-12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또 이래~ 비밀댓글들의 행렬ㅎㅎ
어머니 수술 후 몸은 좋아지셨는지요?
우타코 씨는 로드무비 님의 어머니와도 닮았고 울엄마와 시어머님과도 닮았네요. ^^
고희를 한 해 앞둔 용띠 엄마에게 사드려야겠어요.
다나베 세이코의 소설은 개운한 레모네이드 같단 생각을 했드랬어요.
그나저나 이학선 여사의 소회가 저도 궁금해져요.
우라질..(이거 한번 따라해보니까 재밌네요.ㅎㅎ)

로드무비 2008-01-14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 님, 비밀댓글 궁금하세요?ㅎㅎ
그냥 소소한 대화예요.

엄마는 두 번의 수술로 많이 쇠약해지셨는데
몇십 년 간의 아침 등산이 그래도 버티게 해주는 힘인 것 같습니다.
어머님도 많이 좋아지셨지요?
'개운한 레모네이드'라는 표현이 신선하네요.
정말 한 모금 마신 것처럼.

우라질~ 뱉고나니 조금 시원하죠?^^

프레이야 2008-01-14 17:43   좋아요 0 | URL
몇십 년간이나 등산 다니신다니 참 좋으네요.
뭐든 꾸준히 오래도록 하는 건, 남다른 장기라고 생각해요.
울엄마는 6개월간(한달에 다섯번씩) 항암제 투여하고 1월 초, 아무 이상
없는 걸로 결과 나왔어요. 어제 노래방에 함께 갔는데 예전처럼 특유의
고음으로 노래도 잘 부르던걸요. 어머니들, 화이팅!! 입니다.^^

로드무비 2008-01-18 12:09   좋아요 0 | URL
혜경 님 어머니와 우리 엄마가 비슷한 병으로 고생하시는 것 같아요.
아무 이상 없는 걸로 결과가 나왔다니 저도 기쁩니다.
어머니가 무슨 노래 부르셨는지 궁금하네요.
우리 엄마는 이난영의 '목포는 항구다'가 18번인데.
세상의 모든 엄마들 파이팅입니닷!
혜경님과 저도 포함해서요.^^

2008-01-17 2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8 1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명랑한 밤길
공선옥 지음 / 창비 / 200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애교랍시고 남편에게 한때 "남양주의 공선옥"을 사칭한 적이 있다.
작년에 이사를 오면서 사는 동네가 바뀐 김에 이제 또 누구를 사칭해 볼까 궁리해 보지만
적당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더욱 서글픈 건 누군가 잘 나가는 사람의 이름을 갖다붙이면 내 상황이
'유머'나 '재치'가 아니라 '주책바가지'가 되어버린다는 사실.
흰머리를 더이상 새치라고 우길 수 없는 날이 당도하고야 만 것이다.

--아침에 식구들이 나가고 설거지를 끝내고 나는 쌀통 안에 숨겨뒀던 소주를 꺼낸다.
아무 감정 없이 아침 드라마를 보면서 나는 소주를 마신다.
아침햇살이 부드럽게 거실로 스며드는 그 시간에 소주는 내 가슴 안으로 스미는 것이다.

('79년의 아이' 197쪽)

'맛술 조심'이라는 제목으로 언젠가 페이퍼도 하나 썼지만,
저녁 메뉴로 닭매운탕이나 돼지불고기를 하려고 고기에 소주를 붓다가
그 맛술을 한 모금 맛본다는 것이 그만 거나한 술상으로 이어진 경험이 몇 번 있다.
 "눈부신 햇살이 비쳐준대도 내게 무슨 소용 있겠어요?"하는
'이치현과 벗님들'의 노래 가사가 절로 생각나는 인용구가 아닐 수 없다.

감출 수 없는 주름살이며 거친 피부, 흐린 눈 때문에라도 '아침 햇살'이라면
도망부터 가고 싶은, 그것이 꼭 껍데기의 문제만이 아닌, 단지 술을 마시지 않는다 뿐이지
두렵고 스산한 마음으로  아침을 맞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그들은 하나같이 망연자실한다.
먹고살기 위해 발버둥치며 열심히 사노라면 언젠가 좋은 날이 있을 줄 알았는데
서방이나 새끼들은 이 모양이고, 도대체 내 꼴은 이게 뭐란 말인가.
삶은 여전히 막막하고 앞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먹고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지 않아도 최소한의 먹을 것이 늘 입에 들어왔던 나는
공선옥의 소설 속 여주인공들이 왜 이리 정답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그들과 다르게 약아빠져서 좀처럼 남에게 먼저 마음을 열지 않았던 나의 삶이
문득 뒤돌아봐지고.

글을 쓴답시고 노트북과 책, 좋아하는 음반만  달랑 챙겨
도시를 떠나 면소재지의  한적한 별장에 기어든 남자가 그 곳의 단 두 명 처녀인 
간호조무사 둘을 차례로 후리는 장면('명랑한 밤길')도
작가는 그럴 수 없이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내 곁에 있어주>라는 싱가포르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영화관 로비에서
웬 묘령의 여성과 나란히 서서 거드름을 피우고 있는 중견 소설가와 마주친 적이 있다.
내게는 그 소설 속 남자나 극장에서 만난 소설가나 
명랑한 밤길의 소녀나 그 귀부인이나 하나도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공선옥은 이 소설집에서 경제적으로 보면 형편이 어려운,
나이로 치면 이른 폐경 직전 여성들의 신산한 삶이나 마음의 풍경을
('폐경 전야'라는 제목의 단편도 있다) 
덤덤한 필치로 보여주고 있는데 몇 걸음 뚝 떨어져서 보는 관찰자의 시점이 아니라
자신의 사는 꼴이나 누추한 마음의 지경으로 거의 동화된 것이어서
독자로 하여금 바로 나의 현실(이나 미래)인 듯 몰입하게 한다.
흥분하지 않고 인간의 어리석음과 위선을 꼬집는 솜씨도 놀랍고.

어제 오후,  '작가의 말'까지 다 읽고 이 소설집을 덮자마자 나는 혹시 싶어
쌀통 속을 휘저어 보았다. 
쌀도 거의 바닥이 나서 휘젓고 말고 할 것도 없더라.





















댓글(25)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7-12-13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쌀통 속의 소주라.

그런데, 로드님 서재 벽지가 근사해졌군요.(웃음)

로드무비 2007-12-13 15:31   좋아요 0 | URL
L-SHIN 님, 알라딘에서 얻어온 저 벽지 이름이 '선셋'이랍니다.^^
압정으로 붙인 영화 전단지와 잘 어울리죠?

비로그인 2007-12-13 20:42   좋아요 0 | URL
네, 너무 근사합니다. ^^

로드무비 2007-12-14 14:59   좋아요 0 | URL
L-SHIN 님 방만큼이야 하겠습니까.^^

2007-12-13 15: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13 16: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치니 2007-12-13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제가 애칭을 지어드려볼게요.
알라딘의 사치에상 (카모메식당의 주인장) ^--^
비록 사치에 상보다는 덜렁거리시는 거 같지만 (ㅋㅋ), 그 은근한 카리스마와 대장 다운 모습이 저에겐 로드무비님을 닮았어요.

로드무비 2007-12-13 16:32   좋아요 0 | URL
치니 님, 말씀은 고맙지만, 사치에가 아니라 전 미도리라니까요.^^
그리고 제가 은제 덜렁거렸어요?==3==3==3(몸이 무거워서.)

치니 2007-12-13 17:51   좋아요 0 | URL
그러고보니 미도리도 ㅋㅋ 좀 닮았어요.
왠지 로드무비님도 독수리오형제 같은 노래를, 아니 어떤 시를, 그렇게 줄줄 읊을 것만 같은...

로드무비 2007-12-13 23:05   좋아요 0 | URL
딱 미도리라니까 그러시네.ㅎㅎ
전 독수리오형제 노래 몰라요.
황금박쥐 첫머리는 압니다.^^

2007-12-13 17: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13 17: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13 2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07-12-14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때 공선옥의 작품은 사야 한다는 의무감에 닥치는대로 읽어댔는데... 지지리 궁상 떠는 꼬라지에 어느날 비위가 확~ 상하더군요. 나 사는 것이나 그녀가 사는 것이나 오십보 백보 같아서요. 그 후 손에서 놓았는데, 이제 다시 봐줘야 할 것 같은 맘이 듭니다. 님 리뷰 덕분에 ^^ 감사!

로드무비 2007-12-13 22:58   좋아요 0 | URL
순오기 님, 사줘야 한다거나 봐줘야 한다거나
그런 표현은 조금 거시기한 것 아닌가요.ㅎㅎ
전 여유가 없어서 마음 가는 쪽 책만 읽습니다.
고맙다고 하시니 저도 덩달아 즐겁긴 하지만요.^^

순오기 2007-12-14 10:49   좋아요 0 | URL
옙, 제가 실수했네요. '줘' 지웠어요 ^^

로드무비 2007-12-14 14:58   좋아요 0 | URL
아이코, 실수라고 할 것까지야.=3=3
순오기 님 섬세하시군요.
고맙습니다.^^

Mephistopheles 2007-12-14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리뷰를 보면서 "아 속삭이듯 다가와 나를 사랑한다고~~"흥얼거리고 있습니다.^^

로드무비 2007-12-14 10:15   좋아요 0 | URL
"아 헤어지며 하는 말, 나를 잊으라고~ "
메피스토 님, 그런데 저 가사 맞아요?
<사랑의 슬픔>이 듣고 싶네요.
이치현과 벗님들 노래는 좋아하는데 가사가 늘 오락가락합니다.^^

rainy 2007-12-14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쌀통.. 우리집엔 쌀통도 없더라(ㅋㅋ)는..
잘 지내시죠? 오랜만..
공선옥 읽어야지 , 박완서도 읽어야지,
행복한 계획 세우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세상은 넓고 위로받을 대상은 많다!!!
따끈하고 맛있는 점심 드세요 ^^

로드무비 2007-12-14 14:56   좋아요 0 | URL
rainy 님, 몇 달 전 양철통으로 하나 샀더니 꽤나 요긴하더라고요.
님도 잘 지내시죠?
점심 맛있게 드셨는지요?
어쩌다 보니 전 아직 못 먹었습니다.
위로받을 대상이 많으시다니 다행.
그 중에 하나가 저의 리뷰라니 기분 좋습니다.^^

2007-12-14 1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14 14: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22 15: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31 09: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Graphic 그래픽 4호 - 2007
프로파간다 편집부 엮음 / 프로파간다(잡지)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한국 북디자이너 21인의 인터뷰가 실렸다는 신문 기사를 보고 주문했다.
책을 주무르는 사람들의 얼굴과 생각이 궁금했던 것인데
계간 그래픽 4호는 나의 그런 기대를 제법 충족시켜 주었다.
이번 호는 '동시대 한국 책의 초상'이라는 에디터의 짧은 말 이외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21인의 인터뷰와 대표작품들로 빼곡히 채워졌다.

북디자인에 뛰어들게 된 계기를 묻는 것을 시작으로 질문은 총 열다섯 개인데
'최근 한국 북디자인의 트렌드에 대해 저항감을 느끼는 편인가?'라는 항목에는
대부분 '그렇다'고 답하고 있다.
요즘 책 표지에 손글씨가 너무 많이 사용된다는 것과
일러스트레이션의 남용 문제를 지적한 사람이 많았다.
물론 평소 독자적으로 그런 의문을 품고 고민해온 사람도 있겠지만,
'저항감을 느끼는 편인가?'라는 식의 부정적인 답변을 유도하는 질문은  잘못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대부분의 인터뷰이들이 앵무새처럼 그 문제만 지적하는 것도 실망스러웠고.

'북디자인이 다른 그래픽디자인과 다른 점은 무엇이라 생각하나?'하는 질문에
<통섭>이나 <희망의 밥상>을 디자인한 '사이언스북스'의 정재완은
이렇게 명쾌하게 정리했다.

--잡지가 '초저녁 명동거리'이고 포스터가 '63빌딩'이라면 책은 '중랑구 망우1동 578번지'다.
잡지나 포스터의 세계와 달리 책의 세계는 관찰하고 사유하지 않으면 좀체 열리지 않는다.
(292쪽)

그는 타이포그래피를 자신의 작업에 적용하는 데 있어서도,
'넘치지 않을 것, 없어도 된다면 없애기, 오해 사지 않기'라는 원칙을 세워놓고 있다고.
'책의 내용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스스로 우러나오는 이미지가 있다'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요즘 대부분의 책표지들처럼 컬러풀하고 요란해질 필요는 없는 것이다.

<기형도 전집>(문지刊)과, <치즈와 구더기>라는 인상적인 표지를 디자인한
아트디렉터 조혁준은
'당신을 자극하는 사람은?'이라는 문항에 이렇게 대답했다.

--조나단 반브룩(Jonathan Barnbrook)의 최근작을 자주 접하기 힘들다는 게 아쉽다.
내가 보기에 그는 자신의 작업을 디자인이 자본에 비굴하게 봉사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자본에 굽신거리는 디자인에 대한 거부는
자유롭고 건전한 실험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416쪽)

'자본에 굽신거리는 디자인'이라는 표현이 주는 시원함이라니......
세련도 좋고 예술도 좋고 독자들의 시선을 끄는 마케팅 차원도 좋지만,
자신의 작업을 좀더 넓고 깊게 고민해 보는 북디자이너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들의 대표작으로 엄선된 책 표지들이 얼마나 근사한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혹은 놓치고 있었던 책들을 무더기로 발견한 건 의외의 수확이라고 해야 하나,
주머니 사정으로 보면 재앙이라고 해야 하나......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7-12-10 15: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10 16: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11 0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11 1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니르바나 2007-12-11 0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 디자인이란게 헛돈쓰는 일이라고 생각하던 출판점주들에게
이것도 출판비용이라고 알아먹게 설득했던 분들께
북디자이너라는 계관이 쓰여졌던 일도 따지고 보면 그리 오래 전이 아니지요.
그 전에는 책 장정이 화가들의 작은 화판이었으니까요.
위 책표지의 정병규씨가 일본에 가보니 우리 책에도 북디자인이 필요하겠구나
해서 공부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기억나구요.
한수산의 <부초>가 북디자인의 효시라나 그런 글을 읽은 것도 같은데
정작 소설<부초>를 읽으면서도 책표지에 별 감정이 없었다고 하면
제가 너무 감각이 없었던가봐요.^^

로드무비 2007-12-11 11:19   좋아요 0 | URL
니르바나 님, 저도 감각이 부족해서 그런지(ㅎㅎ)
한수산의 <부초> 표지가 기억날 듯 날 듯하다가 결국 안 나네요.
오래 전 옛날 책 정리하는 일을 잠시 했는데
표지며 일러스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중섭, 김환기 등 쟁쟁한 화가들이 많이 참여했더라고요.
단아하고 격조 있는 멋진 책들이 많았습니다.
님의 말씀처럼 당시엔 책 장정이 화가들의 작은 화판이었던 듯.
잡지를 읽어보니 이 분야에서 정병규 씨의 영향력이 대단하더군요.
짐작은 했지만.^^

2007-12-14 09: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14 09: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14 0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14 0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