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여인 Another Woman>, 우디 앨런 연출,
지나 롤랜즈, 미아 패로우 주연, 1988년
--더이상 당신은 숨을 곳이 없으니, 이제 삶을 변화시킬 때...
텔레비전을 끄러 마루에 나갔다가 아무 생각 없이 채널을 돌리는데
13,4년쯤 전에 본 영화의 한 장면과 내레이션에 꼼짝없이 붙들렸다.
나이 쉰을 맞으며 그 사실에 새삼 당황한 철학교수 마리온(지나 롤랜즈)은
시내에 집필실을 따로 마련하는데,
심리상담을 하는 옆 사무실의 방음벽이 문제가 있는지 상담 내용이 너무나 또렷이 들려온다.
임신을 한 젊은 여성 호프(미아 패로우)의 밑도 끝도 없는 인생에 대한 의문과 불안.
낯선 여인의 목소리를 들으며 흔들리기 시작하는 그녀.
인생에서 바라던 모든 것을 거머쥐었다고 자족하고 있었는데
눈앞에 갑자기 낭떠러지가 펼쳐진다.
자기자신에 대한 의문과 회의에 붙들리자 그녀의 불안은 걷잡을 수 없다.
마리온에게 여전히 친절하긴 하지만 둘이 있는 걸 슬금슬금 피하는 눈치인 남편 샘.
결혼기념일 선물을 사러 들어간 골동품 가게에서 울고 있는 호프 양을 마주치는데,
그녀가 울고 있는 곳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 액자 '희망' 앞.
그림 속 모델은 만삭의 배를 드러낸 여인이다.
호프 양이 그림 '희망' 앞에서 울고 있다니!
그녀와 저녁을 먹으며 자신의 혼란과 불안을 모두 털어놓는 마리온.
늙어간다는 것,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잃어버린 기회에 대한 아쉬움 등을 털어놓다가
문득 저쪽을 보니 남편 샘과 자신의 절친한 친구가
연인의 포즈로 앉아 밀어를 나누고 있는 게 아닌가.
--더이상 당신은 숨을 곳이 없으니, 이제 삶을 변화시킬 때...
그만하면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사실은 얼마나 위선적인 인간이었으며,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가족과 친구들에게도 몰인정했으며, 이기적이었는지 깨닫는 그녀.
마지막으로 상담을 하러 온 호프 양이 벽 속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들린다.
--한 여자를 만났어요. 무척 성공하고 똑똑한 여자였어요.
그런데 내 눈엔 그녀가 얼마나 방황하고 있는지 다 보여요.
난 그 나이에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아요.
오래 전 이 영화를 비디오로 빌려 보고 충격을 받았다.
거의 모든 대사와 장면에.
그리하여 언젠가 꼭 한 번 다시 보고 싶었던 영화를 조금 전 케이블로 우연히 다시 보게 되었다.
내게는 여전히 가슴 철렁한 영화였다.
이렇게 우연히 다시 보게 된 것도 신기하기 짝이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