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에 호어스트 에버스의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를 읽고
내가 제일 먼저 결심한 건 미루고 미루었던 컴퓨러 방 책상 위 정리였다.
(낯간지러워서 '서재'라는 말은 도저히 못 쓰겠다.)

더러운 집안 꼴을 보지 않기 위해 불도 켜지 않고 몇 날 며칠을 지내다가
동가숙 서가식 친구들 집을 떠돌기 일쑤인 호어스트란 작자가
책상 정리랑 무슨 상관이 있냐고?
그의 "질질 새는 바가지 같은 친구 토마스"가 처음으로 약속시간을 지킨 날,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봤더니 어떤 잡지의 심리상담 코너를 읽고 인생관을 바꿨다는데
거기 실린 "성공과 행복으로 이끄는 열 가지 심리 트릭" 중 하나가 그럴싸했던 것이다.

--잠들기 전 귀찮은 일 한 가지를 정하라.
그리고 다음날 일어나자마자 그것을 해치워라.
벌써 한 가지를 해치웠다는 성취감에 스스로 놀라게 될 것이며,
또 이를 통해 그날 하루에너지와 활력을 얻을 것이다.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 26쪽)

호어스트는 일생 처음 유리창을 닦기로 했다가 바지가 창밖으로 날아가고
그걸 보고 놀라 달려나갔다가 문짝이 코앞에서 잠겨버리고 열쇠를 잃는 등 
여러 가지 봉변을 당했지만 나는 아주 사소한 사고를 당했을 뿐이다.
금요일밤 워밍업을 하는 기분으로 박스째 침대 발치에 2주째 뒹굴고 있는
조그만 CD장을 문앞에 옮겨놓았다가 그만 발을 부딪혀, 왼발 네 번째 발가락이
검푸르게 멍들고 부어오른 것 말고는......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도 재미있었지만, 역시 첫번째 읽은 그의 책
<느낌으로 아는 것들>만큼은 아니었다.
순서를 바꾸어 읽었으면 어땠을까?
한 가지 확실한 건 "귀찮은 일 한 가지를 다음날 아침에 하겠다"는
하찮은 결심 따위를 했을 리 없다는 것이다.
나는 역시 호어스트의 게을러빠진 생활 묘사와 연속 실수와 능청에 배꼽을 잡았을 것이다.
그리고 제목이 좀 다른 '주옥 같은'(  '') 리뷰를 올렸겠지.

호어스트풍으로 한 가지 소개하자면,
디지털카메라가 고장나,  우리 집에서 두어 달 나뒹군 게 지난해 여름인가 가을.
그것을 본사에 보내어 수리해 보겠다고 남편이 사무실로 가지고 간 것이 몇 개월 전.
그 디지털 카메라는 아직도 출판사 책상 서랍 속에 있을 것이고,
두세 번 그를 찔러 보다가 포기하고 한 달 보름 전,
크게 세일하는 싼 디카가  눈에 띄어 과감하게 지르기에 이르렀다.


냉장고 스티커 사진을 페이퍼로 꼭 올리고 싶다는 열망을 품고 있었음에도
카메라를 컴퓨러와 연결시켜 달라고 남편을 조르려고 마음먹는 데
무려  한 달이 걸렸다. 조르려고 마음먹는 데만.
험상궂은 표정으로 그 사실을 다시 상기시킨 것 역시 이 책을 막 읽고 난  탓일 거고.
책장수 님은 나의 처음 부탁 이후  딱 보름만에 발빠르게 거사를 실행에 옮겼다.

책상 정리는 어제 아침 남편 출근 뒤에 두 시간 걸려 해치웠다.
배고프다는 아이들 입에는 배 한 조각씩 물려놓고.
내 인생에 이렇듯 즉각적인 반응을 유발한 책이 또 있었던가?

호어스트 에버스는 정말이지 대단한 '작자'가 아닐 수 없다.
이제 말끔해진 책상 사진을 올릴 차례.=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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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7-02-27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저한테는 별로 필요하지 않을 듯 싶은 책이네요. =3=3

로드무비 2007-02-27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 님, 님께 선물할까 했는데.( '')

urblue 2007-02-27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맛, 그러고 보니 필요한 것도 같고... (.. ) ( '')

nada 2007-02-27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암~ 두 분은 천생연분이셔요. 보름 만에 발 빠르게..ㅋㅋ 그 발 겁나 빠르기도 하여라~

2007-02-27 15: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7-02-27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레그로 비바체 님, 지금 그 발은 괜찮아지셨는지요?
전 발가락 하나를 잃는 줄 알았습니다.
순식간에 시커먼 보라색으로 변하고 발등도 부분적으로
멍이 번지더군요.
그렇게 심한 타박상은 일생에 처음이었습니다.ㅎㅎ
토마토깡통이라니 끔찍합니다.
제발 조심하셔서 제 상상 속의 우아한 여인으로 남아 주시기를.
필름포럼이나 씨네큐브에서 우연히 만나는 건
더 바라는 일이고요.^^*
갑자기 남포동 원산면옥 앞 길에서
큰댓자로 넘어졌던 기억이 나는군요. 길 가다가......^^

꽃양배추 님, 나보다 더 게으른 남자
구박하면서 사는 재미도 괜찮습니다. 하하.
님도 만만치 않을 것 같은디.^^

마태우스 2007-02-27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의 그다음 책, 그러니까 세번째 책은 별루였어요.. 근데 처음 책이 더 낫단 말이죠??

로드무비 2007-02-27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 님, 세 번째 책은 모르겠고요,ㅋㅋ
전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출간된 <느낌으로 아는 것들>을 먼저
아주 재밌게 읽었습니다.
금요일~도 괜찮았는데 그와의 첫 만남만큼 좋지는 않았다는 거죠.
금요일~을 먼저 읽었어도 아주 좋아했을 거란 생각은 듭니다.
대신 느낌으로~는 조금 덜했겠죠.
인간이 우직하다보니 뭐든 첫정이어라.=3=3=3

블루 님, 경락 마사지 페이퍼 읽고 나니
책을 좀 빌려드려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 ' ')
언제 적어준 메모를 못 찾겠네요.

Mephistopheles 2007-02-27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달달 볶으면 2분안에 해결되지 않을까요..??

로드무비 2007-02-27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 님, 달달 볶는 재주가 없어서요.
구워삶는 재주는 있는데.^,.~

비로그인 2007-02-28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이렇게 팍팍 찔리는건 나 역시 최강 게름뱅이이기 때문인가.
해야 할 일을 화이트보드에 줄줄이 적어놓고 실행하기까지 몇주나 팽팽~ 놀아버리는
나 같은 놈에겐 정말 좋은 자극제가 될 것 같은 책 -
'로드'님의 서재에 놀러오는 것이 즐거움이지만, 올 때마다 사고 싶은 목록이 불어나니..
이거 참, 난감한 기쁨입니다. (웃음)

로드무비 2007-03-02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L-SHIN 님, 최강 게으름뱅이.ㅎㅎ
알라딘 서재활동 중 최고의 즐거움이 바로 그 난감한 기쁨을 맛볼 때죠.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고 얼마나 오금이 저리는데요.
정신 차리고 보면 십중팔구는 주문 버튼을 누른 뒤죠.

그런데 참, 책 살 때는 꼭 땡스투를 누르시는 게 좋은데.
땡스투 받은 사람도 누른 사람도 책값의 1프론가 적립이 되거든요.
몇십원씩 모이면 그것도 꽤 됩니다.
모르시는 듯하여 한수 가르쳐 드립니다.^^

비로그인 2007-03-02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이쿠 - 이런, 안그래도 [Thank to]가 뭘까...하고 궁금하던 차에 적절한 대답.
사실, [추천하기] 버튼도 최근 처음 알아서 은근슬쩍, '로드'님의 글 어딘가에 눌러봤는데
어디냐고 묻는다면 대답 못합니다. 기억 못하거든요. (웃음)
참, 기다리던 책들이 왔습니다. 그래서 한권을 읽고 투덜대는 글을 쓰고 말았습니다.
끙..'로드'님의 서재에서 기분전환하고 나가야겠습니다. (웃음)
 

-- 한 개인의 올바름은 도덕적 순수에 있다.
연민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심한 영웅의 허약함. 연약함과 속수무책.
(평생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뼈빠지게 일했음에도!)
                
                 <타르코프스키의 순교일기> 중에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1997년, 두레 刊


오래 전 평전이나 일기만 줄기차게 찾아 읽던 시기가 있었는데
정작 타인에 의한 그 사람의 평가보다  사소한 일화들,  그 사람의 친필 일기와
벗들과 주고받은 편지, 사진 등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애인의 집에 처음 인사를 갔을 때 얼마나 긴장했던지
쩔쩔매다가 급기야 간질 발작으로 쓰러졌다는 일화는 나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내 인생에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고 어린 나이에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 게 병폐였지만!
(사랑하는 남자의 부모형제 앞에서 갑자기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질까봐
제대로 된 연애도 못해본 걸까?)

어제 김병욱 감독 인터뷰를 페이퍼로 올리면서 소심함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다.
내가 그렇게도 지긋지긋해 한 타인의 소심함은 바로 내 속에 있는 것들이었다.
언젠가 어떤 이와 '매력'과 '성실'이라는 덕목에 대해 이야기 나누며
"성실함의 우스꽝스러움이라니!"하고  시건방을 떨었지만
(마치 자신은 굉장히 매력적인 사람인 것처럼,)
기본적으로 나는 수줍고 소심한 사람이 좋다.
지나친 자기연민이나 피해의식은 곤란하다고 생각하지만.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평생 뼈빠지게 일했음에도'라는 타르코프스키의 어느 날 일기에
소스라치며 밑줄을 친 게 딱 10년 전.
(좀전 책장을 훑다가 눈에 띄어 펼쳤는데, 97년 1월 22일에 이 책을 샀다고 메모가 되어 있다.)
나 자신, '이상'이라고 할 것도 없고, 더구나 뼈빠지게 일하는 스타일이
절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상을 위해 평생 뼈빠지게 일하는 것 이상의 즐거움이 사람에게 또 있을 것인가?
설령 연민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연약하고 속수무책이라는 결론이 나더라도.

아무튼 나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왜 저런 구절에 눈이 자꾸 가는지 모르겠다.
'한 개인의 올바름은 도덕적 순수에 있다.'는 구절은 10년 전과  좀 다르게 읽힌다.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는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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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7-01-30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딱 그런 사람입니다.. 수줍고 소심한..
그래서 로드무비님이 절 좋아하시는 거였군요..히히~ ^^

2007-01-30 14: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sooninara 2007-01-30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지운감독의 소심함에 놀랐었는데..세상엔 소심한 사람이 참 많네요.
덕분에 저도 힘을 얻습니다. (제가 보여지는 이미지보다 실제론 엄청 소심해요ㅠ.ㅠ)

로드무비 2007-01-30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니나라 님, 보여지는 이미지도 그런데요?=3=3=3
헤헤, 님이 가끔 페이퍼에 그런 이야기 쓰시면 씩 웃습니다.
유쾌해서요.
김지운 감독 <숏컷> 읽으셨나 봅니다.
저도 마저 읽어야 할 텐데.......^^

날개 님, 날개 님은 그 반대라서 지가 좋아하지유.^-^*
(거짓말을 할 땐 나도 모르게 사투리가...)

생각하시는 게? 님, 님 책꽂이 좀 뒤벼보고 메모 남길게요.^^

2007-01-30 17: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7-01-30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뼈빠지게 일하지 말자는 님, 잘 생각하셨어요.
전 '공동선'보다 제 '영혼의 이익' 쪽에 손을 들어줍니다.
'이상'이 없는 게 콤플렉스고요, 심정만 있는 게......
무지 반갑습니다, 그 아디와 이미지.^^
(골방에서 깊은 밤 혼자 생각할 때 아마도
자신이 대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듯......)

 


                                                                            1987년, 박이소, 종이에 먹


설치미술가 박이소(1957~2004)는 미국에서 작품활동을 할 당시
박모(朴某)라는 이름을 썼다. 박 아무개라는 말이다.
이현주 목사가 이 아무개로 글을 발표하고 책을 내는 것처럼....
이름 따위는, 하는 결기가 느껴져 좋다.

사진작가 추영호를 검색하다가 지난해  '박이소의 잔상 展'이라는
사진전시회를 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느 잡지사의 인터뷰 관련 일로  화가의 작업실에 사진을 찍으러 간 일이 있는데 
작업실 분위기랑 화가의 수줍은 모습에 매료되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꼭 다시 와서 친구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그 다음해인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들었단다. 미혼인 채로......
'박이소의 잔상' 展은 그를 추모하는 전시회인 셈이다.

추영호가 찍은 화가의 얼굴과 작업실 사진에 매료되어  그의 이름을 검색해 보니
어느 블로그에  이 그림이 걸려 있다.
제목, '그냥 풀'.
이름 박모와 상통한다.

'박이소'는 그가 한국에 돌아와 활동하게 되자 지인들이 지어준 이름이라 한다.
다음은 그의 얼굴과 房 사진이다.










 

 

 

 

 

 

 

 

 

 

 

 

 

 

 

 

 

 

 

 

 


'허공을 응시하는 그'   추영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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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랑비 2006-08-26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서늘한 느낌...

로드무비 2006-08-26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아서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한 얼굴.

클리오 2006-08-26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너무나 다가오는 얼굴이여요. 마음을 움직이는.... 그냥 풀도 맘에 들구요...

건우와 연우 2006-08-26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표한 분이네요...

Mephistopheles 2006-08-27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걍풀~ 이라고 읽어버리고 만화가 강풀을 생각해 버렸다는...^^

로드무비 2006-08-27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걍풀이라니, 메피스토님, 메피스토님답습니다요.=3=3=3

건우와 연우님, 그렇지요?

클리오님, 마음을 움직이는.....^^

비자림 2006-08-27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풀"이 참 좋네요.
힘주어 말하는 말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로드무비 2006-08-30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자림님, 제목과 그림이 일치하지요?
아무것도 내세우지 않는 무연한 어른의 얼굴이 보고 싶어요.
 

--나는 평범한 인간들의 내면에 괴물이 한두 마리쯤은 숨어 있다고 늘 생각한다.
수효가 문제일 뿐, 없는 사람은 없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다.
구불구불하고 어두운 통로를 지나 깊고 깊은 지하실로 내려가면
좁고 더러운 감방 안에 추악한 괴물 하나가 웅크리고 앉아
내가 내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김영하 <포스트잇> 책 맨 앞에...)

영화 <괴물>을 보면서 제일 인상 깊었던 게 한강 둔치 어드메쯤의,
주인공 가족이 생계를 의탁하는 손바닥만한 매점이었다.
가만히 살펴보면 그 조그만 콘테이너 박스 안 진열대에는 없는 것 빼고는 다 있었다.
바람개비와 풍선, 뻥튀기, 캔맥주, 음료수, 과자, 컵라면, 유동골뱅이, 캐러멜, 막대사탕, 껌......

시도때도 없이 추리닝 하의 속에 손을 넣어 북북 긁어대는 양아치스럽기 짝이 없는 송강호가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은 손님의 주문으로 오징어를 굽다가 아버지 몰래
오징어 다리를 하나 떼어먹는 모습, 그리고 들켜서 아버지 변희봉에게
잔소리를 듣는 장면에서 나는 그만 뒤집어지고 말았다.

그런 소소하고 퀴퀴한 일상 속으로 갑자기 괴물이 나타나는 것이다.

미군 부대에서 한강에 몰래 방류한 독극물이 씨가 되어 올챙이 같은 모습으로
낚시꾼의 시야에 잡히다가, 약 2년 후 엄청난 괴물로 출현한 것.
괴물이 갑자기 나타나 사람들을 덮치고 닥치는 대로 해치는 장면보다
수면 속에서 부글부글 거대한 생명체로 자라고 있는 것을 암시하는 영화의 앞 장면이
가장 무서웠다.

매점과 함께 내 눈에 눈물겹게 보여진 곳이 동네 변두리의 작은 세탁소.
쫓기는 박해일과 몰래 접선한 선배가 세탁소 앞에 걸린 양복을 몰래 훔치는 장면에서
그 불켜진 세탁소의 아늑함이라니.....
세탁소 주인은 증기를 팍팍 뿜으며 손님이 맡긴 드라이크리닝이 끝난 옷을 다리고,
그의 아내는 재봉틀 앞에서 누군가의 바지 밑단을 줄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고단한 노동과 남루한 일상도 <괴물>이라는 영화 속에서는 파라다이스로 보였다.

봉준호 감독, <플란다스의 개>에서 작은 문방구를 따분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지키는 
뚱뚱한 처녀의 일상을 보여주더니, 이번에는  한강 둔치의 손바닥만한 매점 안이다.

조금전, 김영하의 산문집 <포스트잇>을 꺼내들었는데 이 작가  다짜고짜
서문을 괴물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다.
평소 군것질과 싸구려 소소한 장난감 사는 것이 유일한 취미인 나는
봉준호 감독이 괴물을 통해 전달하려는 어떤 메시지보다 매점 풍경에 그만 마음을 홀딱 빼앗겼다.
밥통까지 갖추고 뜨신 밥을 지어 소년과 마주앉아 밥을 퍼먹는 장면은 얼마나 정겹던지.

그러고 보니 오래 전 한 초등학교 내의 작은 문구 코너에서 두어 달 아르바이트를 한 적도 있구나.
어쩐지 그 초라하고  작은 공간이 몹시 땡기더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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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da 2006-07-31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맛 어디서 저런 아늑한 사진을 구하셨어요, 그래.. 사이를 비집고 부스러기를 긁어모으시는 무비님 시선이 참 좋습니다.

날개 2006-07-31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다운 시각이로구만요..^^ 매점이 참 따뜻해 보입니다..

해리포터7 2006-07-31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마지막에 보고 참 마음이 편해졌어요..그 아이와 딸을 잃은 아빠가 행복해보여서요..TV에서 아무리 그 괴물에 대해 떠들어대도 관심조차 없는 그들의 모습에...그 매점에 소복히 내리는 눈을 보며 행복할거라고 다 그런거라고....

로드무비 2006-07-31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리포터 7님, 어머, 반가워서 악수하고 싶어요.^^

날개님, 영화 <파이란>에서는 또 그 개판인 방이 저는 좋더라고요.
취향에 문제가 좀 있는 것 같아요.
<괴물> 속 매점 보러 가세요.^^

꽃양배추님, 부스러기밖에 쓸 수 없어서 고민입니다.
저도 초대작 심오한 글을 쓰고 싶은디.....
아무튼 님이 좋다고 하시니 저도 좋구만요.^^

Mephistopheles 2006-07-31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저 매점에서 주로 밤에 폭죽을 산 기억이 나는군요..^^

로드무비 2006-07-31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강에서 내 몫의 남자랑 폭죽 터뜨려 보는 게 저의 로망이었건만....
메피스토님다운데요? 그 다음 품목은 캔맥주?^^

기인 2006-07-31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괴물 유쾌하게 봤어요. :)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단편 빼고는 3개 다 봤는데 정서가 잘 맞는 것 같아요. 일상과 역사(초월적 순간?)을 연속적으로 보여주는 점도 좋고요. 살인은, 괴물은, 일탈은 그렇게 일상의 연속 속에서 어느 순간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구나, 라는 것이 무서웠어요. 설득력도 있고요. ㅎㅎ 386정서이기는 하되, 굳이 후일담계 소설처럼 분노하거나 비아냥되거나 냉소하거나 섣부른 반성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 풍자와 위트를 섞는 것. 아직은 그 정도가 괜찮은 것 같아요 ^^

물만두 2006-07-31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괴물 안본 분들이 없네요^^ 한강 매점은 가본적이 없어서리^^;;;

치니 2006-07-31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 오는 매점 장면, 참 좋았어요. ^-^

플레져 2006-07-31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점 씬, 정말 좋았어요. 밥 먹는 강두의 등 뒤 창문으로 괴물이 나타나진 않을까... 괜히 또 공포 영화 법칙을 떠올리면서 긴장하고 그랬어요 ㅎㅎ
강두가 밥 다 차린 다음에 밥 먹자, 그러니까 자고 있던 아이가 벌떡 일어나잖아요.
그 장면에서 정말... 자지러지게 웃었어요 ㅋㅋ
로드무비님에게서 피어난 괴물 이야기는 한 떨기 꽃 같습니다 ^^

nada 2006-07-31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비님은 부스러길 모아서 맛난 경단을 빚어내시는 걸요. 그나저나 위에 플레져님 표현이 참 이뿌네요. 한 떨기 꽃...^^

2006-07-31 1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달팽이 2006-07-31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쓰는 로드무비님이 쓴 글을 다 읽으면 보아야 할 영화의 재미가 반감될까봐
건너 뛰며 읽습니다.
김영하의 괴물 서두가 재밌군요.,.

mong 2006-07-31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비님도 보셨군요~
괴물은 저런 디테일은 디테일 대로 살아 있으면서
괴물같은 사회가 흠칫 무섭게 느껴지도록 잘 만든 영화 같아요
그리고 세탁소 씬에서 그 뒤로 보이는 빌딩이 어찌나
어둡고 기분 나쁜 이미지로 잘 살아 나는지 말이죠 ^^

야클 2006-07-31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다들 부지런하시네. 전 한 일주일 정도 더 있다가 한가해지면 보려고 했는데. ^^

하루(春) 2006-07-31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랑 보셨어요?

국경을넘어 2006-07-31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은 매점, 컨테이너, 골방, 구석텡이 저 같은 폐인들이 즐겨 찾는 곳입니다. 마음의 고향이죠 ㅋㅋㅋ

waits 2006-08-01 0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로드무비님의 시선은...^^
마지막 사진은 꼭 이명세 감독 영화의 한 장면 같아요~

건우와 연우 2006-08-01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천천히 보러가려고 했검만 로드무비님의 글을 읽으니 서두르지 않을수가 없군요...^^

로드무비 2006-08-01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우와 연우님, 꼭 볼 영화면 빨리 보세요.
너무 나중에 가면 재미가 좀 반감되지 않을까요?ㅎㅎ

올리브님, 우와, 좋으시겠습니다.
영화도 보고 멋진 시간 되시길 바랄게요.^^

FTA 반대 나어릴때 님, 이명세의 <첫사랑>?^^

폐인촌님, 저 역시, 문간방 이런 데가 마음이 편하더이다.^^

FTA 반대 하루 님, 책장수님과 남동생요.^^

야클님, 휴가 마지막 날의 행사로 서둘렀습니다.^^

mong님, 우와, 세탁소 뒤편으로 보이는 빌딩까지 잡아주시는군요.
님의 레이더에 안 잡히는 게 뭡니까?^^

달팽이님, 김영하의 서문 덕분에 페이퍼라도 하나 남기게 되었습니다.
<괴물> 재미있습니다. 달팽이님은 어찌 보실지 궁금합니다.^^

따우님, 요 위에 해리포터 7님의 댓글 보세요.
마지막 장면인데......^^

염치불구님, 오오, 화전민이셨군요.=3=3=3

꽃양배추님, 경단 빚는 모습이라니 너무 안 어울린다. 저랑.ㅎㅎ
넙적한 파전을 부치는 거라면 몰라도.^^

한 떨기 꽃같은 플레져님,
님이야말로 그런 찬사에 합당한 분인걸요.
그런 매점에서 사흘쯤 아르바이트를 하며 숙식을 해보고 싶더라고요.^^

치니님, 그죠? 그 따뜻한 불빛.^^

FTA 반대 물만두 님, <괴물>나중에 꼭 챙겨보세요.
매점 나오면 잠시 제 생각 해주시고요.^^*

기인님, 그의 단편 <지리멸렬>도 괜찮았어요.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 풍자와 위트, 거기에 페이소스까지 곁들이면......
으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니르바나 2006-08-01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봉준호감독은 영화속 배우들을 편애하는 모양입니다.
이 영화 저도 한 번 꼭 보고 싶어요.
매점속 인물이 로드무비님으로 겹쳐보일 듯 싶어요.^^

비로그인 2006-08-01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보고 싶어요 ㅜ.ㅡ 마지막 사진이 너무 귀엽습니다.

로드무비 2006-08-02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anci님, 침 흘리고 자는 송강호 배우는 안 귀엽습니까?ㅎㅎ

니르바나님,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수사반장의 변태 혹은
범인으로 나오는 변희봉 씨를 좋아했다는군요.
자신의 영화에 변희봉 씨가 나오는 게 꿈만 같다고 하는 인터뷰를
본 적이 있습니다.
'편애'는 아무리 공정하고 올바른 사람이라도 어쩔 수 없는
부분 같아요.
그리고 영화 보러 가셔서 송강호의 모든 행동에 저를 대입하시면
틀림없습니다요. 헤헤^^

따우님, 제가 님 방에 가서 귓속말로 갈챠드려야 되겠군요.^^
 

--세잔은 생트 빅투아르 산을 20년간 그렸다.
한 사람의 화가가 하나의 산을 20년간 그렸을 때,
그런 경우 그가 '산'을 그렸다는 표현이나
"자연에 대한 철저한 탐구"라고 한 말은 적당하지 않다.
그는 '산'을 '살았다'고 해야 한다.
                                 (오규원, <날이미지와 시>, 66쪽)


제3회 EBS 다큐 축제가 어제로 끝났다.
특히 '존 앨퍼트 감독의 회고전'으로 틀어준 두 편을 이틀 연속 아주 재밌게 시청했는데,
<파파>와 <마지막 카우보이>였다.

<파파>는 감독이 여든 살 자신의 아버지 밥 알퍼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은 것.
사업가였고 운동선수였고 밴드의 리더이기도 했던 밥 알퍼트는
생의 마지막 10년, 신경 계통 이상으로 거동이 불편했는데 78세에 병원에서 만난
꽤 젊은 물리치료사 여성과 펜팔이 된다.
비교적 건강한 존의 어머니는 살짝 핑크빛이 맴도는 남편의 그녀를 향한 연정을
조소와 연민 어린 시선으로 지켜보는데......
80세에 아내와 함께 자신의 젊은 여자친구를 방문하며 설렘을 감추지 못하는 아버지를
존 알퍼트 감독의 카메라는 짓궂게 따라다닌다.

 

 

 

 

 

 

 

영화배우같이 잘생긴  밥 알퍼트의 젊은 시절.
몇십 년 전 젊은 시절의 모습을 사진으로 보면 그가 누구라도 가슴 뭉클하다.

여든 살의 생일케이크의 불을 끄고 자신의 아들이 이 다큐를 완성한 직후
2002년 6월 세상을 떠났다.

또 한 편의 다큐, <라스트 카우보이>는 존 알퍼트 감독이 1980년부터 2003년까지
24년간 기록한 한 카우보이의 삶이다.
미국 사우스 다코타의 대평원, 아내마저 지긋지긋하다며 아들네가 사는 소도시로 떠나버리고
혼자 남은 늙은 카우보이 번 세이거.
그의 어린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고 결혼하고 또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카메라는 고스란히 보여준다.
번 세이거가 정말 이 지상의 마지막 카우보이이건 아니건 간에 무려 이십몇 년을 그의 뒤를 좇은
감독의 시선에 생각이 미치면 문득 옷깃을 여미게 된다.
그 성실함과 한결같음과 집요함이라니!



라스트 카우보이 번 세이거


두 할아버지의 그 여유와 유머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세잔도 자신이 사는 동네의 언덕에 올라 생트 빅투아르 산을 20년간 줄기차게 그렸다고 한다.
그렇게 남긴 산의 그림만 88편에 이른다니. 

<날이미지와 시>를 읽다가,  지난주 다큐로 만난 두 할아버지가 큰 맥락 없이 떠오르고,
또  시인 오규원의 방 벽에 붙어 있다는 세잔의 복제품 그림(그 나라에서 인쇄한)
 '작은 산'을 인터넷으로 검색하다가  오전이 홀랑 가버렸다.
책 읽다가 자꾸 이렇게 딴짓하면 안 되는데......




세잔,  생트 빅투아르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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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06-07-17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난 무엇을 살아야 하나 한참 생각했습니다.

nada 2006-07-17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 파파를 못 본 게 안타까워 죽겠어요. 시간만 있으면 죄다 보고 싶을 만큼 작품들이 어찌나 훌륭하던지.. 어제 밤에는 songbirds란 작품을 봤는데요, 여자교도소의 죄수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생활을 랩으로 만든 음악이 곁들여진 다큐였는데요, 아, 정말 너무 참신하고 감동적이었어요.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무비님 덕분에 저도 좋은 작품들 감상해서 너무 좋았답니다.^^

하루(春) 2006-07-17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이미지와 시, 그 날이라는 게 한자로 '生'을 뜻하는 게 맞나요? 생방송 뭐 이런 것처럼요. 아닌가?

국경을넘어 2006-07-17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숙연해지는 글입니다. 중학교 때 미술 선생님 한분은 문 만을 그렸습니다. 격자 무늬 살과 창호지 그리고 빛이 어우러지는 단순하면서도 그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들. 한참 버스 타고 문화원(시골 동네라 미술관이나 갤러리는 없고 ^^)에 가서 작품 전시된 것 보았는데 그때는 이해하기 힘들더군요. 지금 보면 무언가 느낌이 다를 텐데...

건우와 연우 2006-07-17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밥알퍼트의 늙은 사진과 세잔의 그림에서 고집과 집요한 아름다움이 비슷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로드무비님의 글을 읽고난 후의 영향인가요?^^
장마에 별일 없으신가요? 늘 건강조심하세요^^

로드무비 2006-07-18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우와 연우님, 밥 알퍼트 정말 미남이죠?
형형한 눈빛이 특히.
나이 여든에 몸은 비록 불편하더라도 저렇게 살 수 있다면
바랄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세잔에 대한 책이 여러 권 나와 있더군요. 읽어보려고요.^^

폐인촌님, 언젠가도 그 미술 선생님 말씀을 해주셨던가요?
어느 페이퍼에서 슬쩍?
너도나도 가시적인 성과나 결과물에만 집착하는 요즈음 아니겠습니까.
하긴, 이 정도나마 생각할 수 있게 된 것도 나이 탓이려나요?ㅎㅎ

FTA반대 하루님, 맞아요. 날것 할 때의 '날'.
이미지라는 단어 앞에 '날'자가 붙으니 묘한 느낌이지요?

꽃양배추님, 토,일요일 안타깝게도 한 편도 못 봤어요.
'지일'이라는 작품은 꼭 보고 싶었는데.....
songbirds, 꽃양배추님이 보시면 좋겠다 생각했더니 보셨군요.
호호~ 프로그램 퍼나놓기 잘했군요.
파파는 처음부터 보지 못해서 저도 아쉬워요.^^

에로이카님, 님에게선 일관된 관심과 그 무엇이 느껴지는데요?
주옥 같은 댓글입니다.^^

2006-07-18 16: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7-19 1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07-19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소한 결심님, 그래도 가끔은 뵙고 싶어요.
여기서, 님의 글로.^^

농업샘님, 아 그러셨군요.
그런데 왜 전 그렇게 기억하고 있을까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