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간이 범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죄를 저질렀다. 나는
행복하지 못했다
(보르헤스)

오래 전 나의 여동생은 몇 년째 뻔뻔한 얼굴로
용돈 좀 나눠쓰자고 요구하는 나에게
"언니 니의 그 자부심의 근거는 무엇이고?"하고 물었다.
"내가 뭐, 그리 잘난척한 게 있다고 그라노." 하고 어물쩍 넘어갔지만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분명 그런 게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근거 없는 자부심과 관련하여 생각나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어느 해 대선을 앞두고 내가 받는 월급의 두달치를 주겠다며
퇴근 후 자신의 오피스텔(1인 출판사)에서 한 달여 숙식하며
모 대통령 후보 부인의 책을 만들자는 제의가 들어온 걸 거절했다.
한강변 그 오피스텔의 전망이 무지 좋아서
이런 곳에서 그런 경험을 해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이 뭐 그리 엄청난 제안인 것처럼 거들먹거리며 잘난척하는 모습에
순간적으로 내린 결정이었다.(자기가 영부인인 것 같았다.)
내가 선생님이라고 깍듯이 모시는 분의 절친한 친구였지만
그렇다고 그가 나의 선생님인 건 아니지 않는가.

"얘길 들어보니 제가 적임자가 아닌 것 같아서요."라고
예의 바르게 그 선생님껜 이유를 댔지만,
그렇게 안 봤는데 엄청 건방지고 못됐더라는 이야기까지 전해 들었다.
그런 말을 듣고도 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어릴 때부터 '행복'이니 '희망'이니 하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이 우스워 보였다.
<샘터>니 <작은 행복>이니 하는 잡지를 무지 싫어해서 
어떤 빤한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마음속으로 그걸
'샘터식 행복'이라고 명명하고 피식 웃었다.

그런데 언제부터 나는 행복에 목을 매는 인간이 돼버렸을까.

호세 카를로스 카네이로의 보르헤스 전기
<책과 밤을 함께 주신 신의 아이러니>를 읽는데
다음 시가 소개되어 있다.

나는 인간이 범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죄를 저질렀다. 나는
행복하지 못했다.  망각의 빙하가
내 몸뚱이를 끌고 가 무참하게 내동댕이쳤으면.
부모님은 위험하고도 아름다운 삶의
유희를 위해, 땅과, 물과, 공기와, 불을 위해
나를 낳으셨다
나는 그분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나는 행복하지 못했다.
그분들의 푸른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는 하찮은 것들을 교직하는 예술에
매달려 온통 정신을 쏟았다.
그분들은 내게 용기를 물려주셨지만 나는 용감하지 못했다.
불행한 사람의 그림자는 나를
떠나지 않고 언제나 내 곁에 머물러 있다.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이라도 하던 교만이 있었는데
어딘가 조금만 이상해도 혹시 하여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마음을 안 먹어서 그렇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라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마음을 안 먹은 게 아니라 마음을 먹을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 막연한 자부심은 시건방이라는 결론.

그런데, 온순한 얼굴을 목 위에 내걸고
마음속으로만 한없이 시건방졌던 날들이 그리울 때도 있다.










페이퍼 제목 '노름꾼의 트럼프'는 이 시가 소개된 페이지
다음에 나오는 글 제목.(보르헤스의 에세이집 제목이라고.)
그냥 그렇게 적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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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03 16: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7-07-03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색깔 님, 컴이 신통찮아 서재 마실을 거의 못하고 있는데 다정한 메모 자주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프레이야 2007-07-03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백하건데, 전 아직 마음속은 한없이 시건방져요.
보르헤스의 시를 넘고서 등장하는 에세이집 제목이군요, 노름꾼의 트럼프란.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로드무비님이 다는 페이퍼의 제목이 신선발랄,
허를 찔러요.^^

nada 2007-07-03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 그런 모종의 제의를 다 받으시고.. 재야의 거물이셨군요.(시건방지게 장난 거는 중.^^) 용돈 좀 나눠 쓰자니, 깡패 언니 같잖아요. 절대 '온순한 얼굴'이라고 볼 수 없어요.ㅋㄷㅋㄷ 근데, 전 무비님 글에서 가끔 '근거 있는' 자부심을 느끼곤 하는걸요.

2007-07-03 18: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얼음장수 2007-07-03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뭐 똥건방이라고 부릅니다. 꽃양배추님 말마따나 로드무비님은 근거있는 자신감으로 보입니다^^ 당연히 근거있는 자신감에서 나오는 건방은 아름답습니다. 얼마전 스타크래프트 경기를 보면서 다시 한 번 실력으로 무장한 자신감의 아름다움을 느꼈습니다. 제목에 낚인 건가요? ㅋㅋ

비로그인 2007-07-03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제가 샘터식 행복에 간절히 목말라하는 건...
삶을 바라보던 오만함이나 용기가 사라진 다음이기 때문일까요?

마노아 2007-07-04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로드무비님의 이 글을 읽은 것만으로도 이 순간 행복해요. ^^

2007-07-04 0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치니 2007-07-04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겸손함이 더이상 미덕이지 않은 세상인데도, 이런 겸허한 글이 주는 감동은 여전하네요.
^-^

로드무비 2007-07-04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니 님, 겸허한 글이라고요? 아직 건방이 쬐매 남아 있는데......^^(다행히!)

여전히 낯선 서재 길목에서 님, 사실 저만 그런 게 아니라
모두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요? 은밀한 자부심.
그런데 알고봤더니 애초에 그럴 만한 게 없었더라는 거죠.
내 손에 좋은 패가 있다고 믿고 있을 때가 좋았다는 생각도 들고 그래요.
그리고 '진정한 빨강'이라고 쓰셨는데, 이상하게 끌리는 색이라는......
그게 심정에만 머물러서 거시기하지만.
님의 요즘 생각들이 궁금합니다. 이것저것.^^

마노아 님, 님의 다정한 인사에 저도 오늘 이 순간이 행복합니다.^^

체셔고양이 님, 님의 그 당당함이나 용기 계속 지니시길요.
아무것도 없으니 인생이 너무 시시해지는군요.

얼음장수 님, 똥건방 마음에 들어요.ㅋㅋ
근거가 있든 없든(사실 그걸 누가 판단하겠습니까) 모두 자신에게
당당해졌으면 좋겠어요.
전 스타크래프트가 뭔지 모르는데요.
뮤지컬 가수이자 탤런트인 박해미를 보면 항상 감탄합니다.
어쩜 저렇게 사람이 활기찰까.
10분의 1이라도 닮았으면 좋겠어요. 그 에너지.^^

좋은생각 님, 사실 그런 잡지에 실린 글들 어쩌다 한 편씩 읽으면 괜찮거든요.
그런데 제가 언젠가 독자들의 사는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묶는 일을 했어요.
80여 편의 짧은 글을 추리는데 읽으며 멀미가 날 것 같더라고요.
'행복'에 대한 강박, 과시, 작위성.
정말 행복한 사람은 입 다물고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고.
님도 그렇게 생각하셨나요?^^

꽃양배추 님, 동생은 학교 선상님이었거든요.
출근하는 동생에게 돈 한 푼 놓고 가라고 이불 속에서.ㅋㅋ
이상의 날개가 따로 없었다니까요.
백 배 천 배로 갚겠다는 생각은 했는데 발설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요.
제발 발설 안했기를......=3=3=3
(깡패언니, 듣기 좋군요.)

혜경 님, 제목은 자신 있어요.=3=3=3
(제목만.)
님은 뭐 겉으로 건방을 부리셔도 무방할 것 같은데요?^^













2007-07-04 1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7-07-04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맛있습니다.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글일수록 맛은 있지만, 저는 아무 말도 쓸 수 없네요.
그것은, 여운을 남기는 힘을 글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자주 못봐서 아쉽지만, 가끔씩의 로드님의 글을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로드님이 알라딘을 떠난게 아냐, 바빠서 그래' 라는 '희망'과 '기대'를
가지게 되니까 말입니다. (웃음)
저도 '행복'이라는 단어에 시니컬해지는 녀석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것만큼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요.
[알라딘]에서의 추억들은 현재 행복진행형이고, 앞으로는 좋은 추억일 것이라고.^^

2007-07-07 1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7-08 15: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14 16: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람이 너무 되어버린 사람
어딘가 가까워지지 않는 구석이 있다.

--가장 무관심한 듯한 미소, 무비판적인 미소.
세상만사를 다 경험한 듯한 초연한 미소, 거의 조소에 가까운 미소...
그것은 기실 하나의 느낌에 불과하면서 달관으로 가장한 부도덕한 미소.

--하나하나의 사물이 참된 제 얼굴 그대로 마음에 비칠 때,
비로소 그 각각의 사물은 우리 마음속에서 각기 '자신의 장소'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외계의 사물 각각이 우리 마음속에서 '각자의 장소를 갖는다'는 것은
우리가 진실함과 아름다움과 영원을 파악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무목적의 달리기가 진보로, 칠면조의 볏 같은 변화가 개선으로,
잡무와 외적 의견의 여파 속의 생활이 활동으로, 복종적이고 충실한
환경의 노예가 적응으로, 무례한 산만함이 쾌활로......가장되고, 오해되고......
모름지기 좀 더 후퇴, 후퇴하라.
좀 더 물러나서 바라보라.

                          <現代詩學> 1989년 8월호, 김달진 미발표 유고 단상 중에서







뜬금없이, 옛날 묵은 잡지를 갑자기 읽고 싶을 때가 있다.
오래 전의<현대시학> 몇 권을 간직하고 있는데
좀 전 그 중 한 권을  펼쳤더니 1989년 6월 2일에 작고한
김달진 시인 추모특집 기사가 실려 있다.

김달진 시인의 시를 유념해서 읽어본 기억은 별로 없다.
현암사 刊 <장자>와 <법구경>의 빼어난 역자로 그는 내게 뚜렷이 입력되어 있을 뿐.

1990년 6월 초, 정릉 언덕배기 상정사라는 절에서 제1회 '김달진문학상' 시상식이 열렸다.
햇살이 눈부신 날이었다.
수상자는 박태일 시인.
평소에도 기교와 장식이 배제된 그의 덤덤한 시들을 좋아했는데
먼 발치에서 지켜보니 선선한 시인의 얼굴은 더  좋았다.
유족(사위는 문학평론가이자 시인인 고려대 최동호 교수)의 부탁으로 절에서 마련한
점심이 맛있었던 기억도 나고.

불교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한때 금강산의 한 절에서 수도생활을 직접 했던 
김달진 시인.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올 6월 초 책이 발간되었다.
<큰 연꽃 한 송이 피기까지>.
올해 제18회 김달진 문학상 시 부문은 엄원태 시인이 수상했단다.
얼마전 내 페이퍼 카테고리 '오늘 읽는 시'로 소개한 적이 있는 시인이다.

짧고 긴 서른 몇 편의 미발표 단상 중에서 특히 입에 착착 감기는 넷을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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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6-29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도생활의 하셔서 그런지 4편의 시 내용이 사람의 마음 속을 통찰하는 느낌이
드는군요..

로드무비 2007-06-29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 님, 당시엔 제가 너무 어려서 그런지 노승 같은 이 시인의 시들이
눈에 잘 안 들어오더군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3=3=3
이상하게 시보다 단상이, 우리 말로 옮긴 글들이 더 좋아요.
글고, 단상에서 통찰 빼면 남는 게 있나요!.^^*

비자림 2007-06-29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름지기 좀 더 후퇴, 후퇴하라.
좀 더 물러나서 바라보라.


이 문장을 몇 번 읽어 보고 갑니다. 로드무비님, 예전에 님의 페이퍼 정말 좋았어요^^

네꼬 2007-06-29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름지기 좀 더 후퇴, 후퇴하라.

저도 이 구절이 좋아서 댓글에 쓰려고 했는데. (비자리님, 저 베낀 거 아니에요. ㅠㅠ)

로드무비 2007-07-03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 님, 비자림 님, 컴이 자주 다운되어 댓글 달기도 힘들어요.
전 뭐 이이상 더 후퇴할 것도 없답니다.=3=3=3
 

-- 시는 사용되어야 한다,
단순히 처먹혀서는 안 된다

----------------------------


모든 생산품들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사용되어진 것들이다
찌그러지고 가장자리가 다 닳아빠진 구리그릇
여러 사람들이 사용해 나무 손잡이가
다 닳아버린 칼과 포크, 이러한 형태가
내겐 가장 고귀하게 여겨진다. 또 많은 사람들이
밟고 다녀 반질반질해지고 사이사이 잡초들이 자라난
오래된 집가에 깔려 있는 포석(鋪石)들, 이러한 것들이
복받은 생산품들이다

여러 사람들에 의해 사용되면서 또한 자주 겉모습을
바꾸면서 이 생산품들은 자신의 형상을 개선하고 또한 고귀해진다
이유는 이것들이 자주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손이 떨어져 나간 조각들의
부서진 파편들조차도 나는 좋아한다, 이것들도 역시
살아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지금은 무너져내렸더라도
전에는 이리저리 운반되며 사용되었다
비록 무너지고 그 위로 많은 것이 밟고 지나갔다 하더라도
그 전에도 이 조각들은 그렇게 높이 서 있지는 않았다
반쯤 부서진 건축물은
거대하게 계획된 것이 아직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건축물들의 아름다운 크기는
벌써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우리의
이해를 필요로 한다. 한편으로
이들은 벌써 이용되었다. 정말 이들은 극복되었다. 이 모든 것이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 詩  '인간에 의해 생산된 모든 것에 대해' 전문
                             브레히트 시론 <시의 꽃잎을 뜯어내다>(이승진 편역, 한마당 刊, 1997년)






<두이노의 비가>를 읽다가 브레히트 시론을 읽다가, 책꽂이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마구잡이 독서를 하고 있다.
두서없는 듯하지만 서정적이고 뭔가 심오한 릴케의 시구에 질질 끌려들어가는 중인데
브레히트가 눈을 흘긴다.
"시는 사용되어야 하며 단순히 처먹혀서는 안 된다"고.
통쾌한 표현이긴 하지만, 사실 그 "처먹히는 즐거움"이야말로 얼마나 큰 즐거움인데......

나는 앞으로도 계속 시에 처먹히기도 하면서, 또 구체적으로 사용도 할 생각이다.
브레히트는 이 책에서 시인 릴케를 이렇게 표현했다.
"릴케는 민중적이지 않다."
글쎄, 현실의 토대 위에서 사람들의 삶에 구체적으로 소용이 되는 그런 시를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생이랄까 향수랄까 사랑이랄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읊으며 빠져들어
좀 흐느적거려도 무방하지 않을까.
예전엔 시고 산문이고 희곡이고 그가 한 말이라면 무조건 경도되었는데,
지금은 브레히트가 좀 빡빡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건 그렇고,  위 시의 시구처럼 찌그러지고 가장자리가 다 닳아빠진 구리그릇 같은 게 나도 좋다.
요즘 세상은 왜 그렇게 으리으리한지......
동네에 새로 생긴 미장원이나 식당엘 가면 인테리어라든가 그 규모에 깜짝 놀라게 된다.
짐작건대, 땡빚을 내서라도 이웃 가게 코를 납작하게 하고 시작해야 직성이 풀리나 보다.
그렇게 기세등등하게 시작한 가게가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닫는 광경을 종종 본다.
좀 작게 시작해서 당장은 힘들더라도 느긋하게 이어가면 좀 좋아?
형편에 맞게 아담하게 시작하면 초기비용도 유지비도 적을 테니.

오래 전 내가 다니던 영등포의 한 교회는 예배를 마친 후 두세 명의 교인이 짝을 지어
돌아가면서 식사를 준비했는데 나는 교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플라스틱 면기 대신
어디서 굴러들어온 것인지도 모르는 때묻고 찌그러진 낡은 코펠 뚜껑이나
휴대용 양은 대접을 악착같이 찾아내어 밥과 국을 담아 먹었다.
그러다 결국은 어느 날 그 코펠 뚜껑과 대접을 몰래 집에 가져오기에 이르렀으니.

그 그릇이야말로 오랜 세월 그곳을 드나들던 많은 사람들이 밥과 국을 떠 먹던 것이었다.
하나님도 나의 그 절도행각은 모른척 눈감아 주셨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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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5-16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쌩뚱맞긴 하지만 "이퀄리브리엄"이라는 영화에서 예이츠의 시가
멋지게 사용되었어요..인간적인 소양이 말살된 미래에서 감성적인
문학이나 자료는 모두 금지가 되어 있는데..주인공 동료가 예이츠의
시를 읽으면서 감성에 눈을 떠요..그걸 주인공 앞에서 읽어주지만 결국
주인공에게 사살되는 장면이 있는데..^^
"But I, being poor, have only my dreams. I have spread my dreams under your feet. Tread softly because you tread on my dreams." I assume you dream, Preston.
"나는 가난하여 가진 것이 꿈뿐이라. 내 꿈을 그대 발 밑에 깔았습니다. 사뿐히 밟으소서, 그대 밟는 것 내 꿈이오니."

영화는 썩 좋진 않았지만...이 장면만큼은 정말 멋졌습니다.^^

2007-05-16 16: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7-05-16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단과 댓글 쓰기 사이 님,
아무 뜻 없습니다. 죄민수 표정. ( '')
여백이 많은 건 순전히 실수예요.
다른 시인들에 대한 브레히트의 독설이 예전엔 통쾌했는데
오늘 다시 읽다보니 좀 아닌 부분도 있더군요.
이렇게 저는 점점 성숙하고 무르익어 가는가 봅니다.=3=3=3
(구리주전자 좋은 놈 보면 우리 정보 나누기로 해요. 헤헤~)

메피스토 님, 이퀄리브리엄이요?
제목은 들어봤는디유.
예이츠의 시 좋지요.
그리고 보면 '사랑'이라는 말은 입에 올리는 것이 금지된
가상도시의 영화 <알파빌>도 있었잖아요.
책이든 영화든 아무튼 흥미로워요.^^

mong 2007-05-16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당췌 시라고는 알라딘에서 주워 읽는 것 뿐입니다
비도 오는데 또 한편 잘 읽고 갑니다
로드무비님, 거기도 아카시아 내음 나요? ^^

로드무비 2007-05-16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킁킁, 안 나요.
mong 님, 창을 열어 볼까요?
저도 알라딘에서 주워 읽는 것 많아요.
너무 유식해질까봐 걱정.^^
(이런 날 황해집 이야기나 한 편 풀어놓으시면 좋겄는디.)

비로그인 2007-05-16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래된 것을 좋아합니다.
수년에서 수백년의 시간과 역사와 희로애락을 가지고 있는 사물이나 건축물일수록 더욱-
그래서 30년 이상의 나이을 먹었을 것 같은 물려받은 목걸이나 옷, 물건 등을 아끼고
최첨단 휴대폰보다 아날로그 (번호판을 돌려 전화를 거는) 전화를 더 좋아하죠.
좋은 글 담아가겠습니다.

영화 [이퀼리브리엄] 한번 보십시오. 괜찮은 영화입니다.
인간에게 진정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 느끼게 해주는 영화입니다.

푸하 2007-05-16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다른 얘기지만, 마지막의 자기고백에 아주 조금 망설이셨겠어요? ㅎㅎ

2007-05-16 2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5-17 0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5-17 08: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7-05-17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논란의 여지가 매우 많은 척도 님, 저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움과 쓸모, 내용과 형식 등 이 시론집에서 브레히트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두부모 자르듯 잘라지는 것도 아닌데.
하지만 대부분 저는 그의 이야기에 공감합니다.
브레히트의 균형감각을 믿거든요.^^

두 가지 명언 님, 우하하~~
이왕이면 우리말로 옮겨주시잖고.( '')
초라한 몰골로 시립도서관을 드나들던 때가 가장 좋은 때였다는 걸
나중에 깨달았지요.
지금은 독서라고 할 것도 없고, 껄렁껄렁한 자세로 책을 대한달까.
보르헤스와 올콧이 눈을 흘길 것 같아서 이만.=3=3=3

다른 옷이랑 매치하면 확 살아나는 빛깔 님,
식당 이름조차 으리으리하군요.
표현이 참 멋집니다.
그나저나 그 편지 빨리 받아보고 싶네요.
생전에 안 읽던 릴케가 문득 눈에 들어와 읽기 시작했는데,
이런 교감(너무 과장했나요?)이 즐겁습니다.^^

푸하 님, 하하, 고백이라 할 것도 없는 가벼운 것인데.
저의 모랄은 좀 자기중심적이거든요.^^

L- SHIN 님, '이퀄리브리엄' 메모합니다.
인간의 손때 묻은 것에는 어떤 것도 못 당합니다.
남대문 시장 유명한 갈치조림 식당에서 제일 소중하게 다루는 게
그을리고 찌그러진 양은냄비라고 하더군요.
새 냄비에 갈치조림을 내가면 단골들은 난리가 난답니다.
또 하나의 유행이 돼버린, 거들먹거리는 앤티크 말고요.
소박하고 순한 그 무엇.
님의 말씀을 그대로 알아듣습니다.^^




2007-05-17 1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7-05-17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총칼부림 영화요? 그렇군요.
제 취향까지 짐작해 주시고.
감읍하는 중입니다.( _ _ )

진달래 2007-05-17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용한다는 것과 처먹힌다는 것의 정의가 제겐 뭘까... 생각해봐야겠어요. ^^
이름만 들은 브레이트를 저도 읽고 싶습니다. ^^;;

건우와 연우 2007-05-17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의 리뷰를 읽으면 도통 관심이 없던 브레히트조차 사고싶어진다니까요...

oldhand 2007-05-17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에겐 시인들과 그들의 시가 그저 경외스럽게만 느껴집니다. 시인들의 감수성은 제겐 범접하기 어려운 영역인것 같아요. 엊그제 열 여덟 소녀가 썼다는 5월 광주에 대한 아주 대단한 시 하나를 봤는데요. 김지하의 <오적>이나 김남주의 <나의칼 나의 피>를 읽었을때 만큼 큰 임팩트를 주던걸요. 저의 시적 감수성은 아마도 이 동네가 그나마 공감이 좀 가나 봐요. :)

비로그인 2007-05-17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사물에는 그만의 정령이 있거든요.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는 시간과 함께 -
물건을 버리면, 그와 함께 했던 시간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마늘빵 2007-05-18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님 엘신님 / 이퀼리브리엄 저도 최고의 영화라 생각해요. 로드무비님 글보고 저도 이퀼리브리엄 생각났습니다. 예이츠의 시. 아... 이 영화의 예이츠 시 때문에 예이츠 시만 따로 나와있는 책이 없나 찾아봤던 적이 있습니다. 없더군요. 게다가 시는 원어로 읽어야할거같은. 원어는 또 약하고 해서 포기. 이럴 때 취약한 영어가 원망스럽더군요.

마늘빵 2007-05-18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엘신님 마지막 댓글... 간직합니다.

로드무비 2007-05-22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 님, 저에게도 뭐라 한 마디 걸어주시잖고.=3=3=3

L-SHIN 님, 멋진 말씀입니다.
그런데 옷도 그렇고 안 버릴 수 없는 게 딜레마.^^

올드핸드 님, 브레히트 시랑 콩주 아빠랑 잘 어울려요.
그 시는 저도 읽었는데 어리둥절하더군요.
천재시인의 탄생도 좋지만 시가 너무 구성져서
그의 나이를 도저히 믿을 수가......
그만큼 시가 좋았다는 말이 되겠지요.^^

건우와 연우 님, 에잇, 책을 못 올리는 것이 유감.
툴바가 안 보여 사진이든 책이든 못 올립니다.
땡스투 몇십 원이 아쉽군요. 히히.=3=3=3

진달래 님, 브레히트와 노신이 좋아요.
브레히트 선집이 열 권 정도 나와 있어요.
시부터 읽어보시길.^^

아키타이프 2007-05-22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가고 일그러진 걸 사랑할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상한 살을 헤집고 입 맞출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로드무비 2007-05-23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키타이프 님, 이를 말씀이겠습니까.
그런데 상한 살 헤집고 입 맞추는 건 무서워요.=3=3=3

밥헬퍼 2007-05-24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이 서재는 써놓은 글보다도 덧달린 글들이 더 많을까요? 모름지기 깔끔과 투박함 속에서 저는 가끔 마음과 행동이 따로 논다는 느낌이 들때가 있습니다. 투박한 듯한 것을 그려보다가, 이내 깔끔한 것으로 움직여지니 말입니다. 오랫만에 들렀는데 여전하시군요.

로드무비 2007-05-25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밥헬퍼 님, 깔끔과 투박함이라든가 마음과 행동이 따로 논다는 느낌을
제 방에서 받으셨나요?
냉정과 다정, 세심과 무심, 그 외에도 다양한 것들이 혼재합니다.
하지만 마음과 행동은 함께 가는 편인데......
그렇게 보셨대도 할 말이 없지요.
서재 다시 여신다는 소식 접하고 무척 반가웠습니다.^^
 

 

문학적 사색을 잉태하게 하는 것은 허심(虛心)과 고요함이다.
이러한 허심과 고요함의 성취는
마음속을 깨끗이 하는 것과 정신을 맑게 하는 일을 필요로 한다.
또한 인간은 학식을 축적함으로써 보물을 저장해야 하고
사물의 이치를 분명히 밝힘으로써 재능과 학문을 풍부하게 해야 하며,
경험을 연구함으로써 철저한 관찰을 수행해야 하고,
그것들을 문학적 사색에 잘 조화시킴으로써 아름다운 언어를 이끌어내야 한다.
그런 다음에라야 비로소 그는 자신의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그 신묘한 영감에 위탁함으로써 성률(聲律)에 조화되도록 글을 쓸 수 있게 되며,
또한 자신의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견줄 것이 없을 만큼의 독특한 견해를 지닌 장인(匠人)으로 하여금
자신의 직관적 통찰력과 조화될 수 있도록 도끼를 휘두를 수 있게 된다.
 

                                 --<문심조룡> 유협 지음, 최동호 역편, 2005년, 민음사 刊


컴퓨터가 고장 나 수리를 한다고 했는데
어찌된 셈인지 딱 5분(에서 7분)만 연결된다.(그것도 2,3일 전부터)
덕분에 한 2주간 알라딘 책도 장난감(!) 쇼핑도 올스톱이었다.
5분 동안 미친듯이 읽어야 하는 글이 특별히 있을 리 없으며
또 5분 동안 급히 써제껴야 할 만큼 절박한 글이 있을 리 없다.
5분 안에 미친듯이 장바구니에 넣어야 할 상품도 없다.

올해 들어 짬짬이 읽고 있는  <문심조룡>을 오늘 낮에도  몇 장 읽는데(제26장 神思 편)
이건 뭐 창작론 중 거의 총론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베껴 쓰고 싶다.
꾀를 내어 '한글 2005'로 써서 바탕화면에 저장하고
긁어서 급히 페이퍼로 올린다.

덧붙이는 글도 5분 안에 마쳐야 해서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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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7-03-27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분만 연결되는 컴퓨터라니..참...
로드무비님 쇼핑 그만 하시고 책 좀 많이 보라는 심오한 뜻일까요? ^^

비로그인 2007-03-27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분 안에"...그랬군요. 요즘 로드님의 글이 안보여서 섭섭했는데. 그런 이유가.
그런데 왜인지, 세상에 5분밖에 남지 않은 심정으로 무언가를 해치우는 기분은 -
근사할 것 같다는 생각과 가슴이 계속 두근두근거립니다.
그러니까, 로드님의 불행이 저에게 교훈이 되었다는...이제 귀찮은 일을 할 때마다
"5분 안에 해치우자 !" 라고 마음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루빨리 컴이 정상화되어 로드님의 글을 만나고 싶습니다. (웃음)

로드무비 2007-03-27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L-SHIN 님, 스위치까지 모두 껐다가 켜야 다시 연결되니
보통 귀찮은 일이 아닙니다.
님의 '5분' 해석이 근사하군요.
이제 방법을 알았으니 리뷰나 페이퍼 써서 저장해놨다가
올릴게요.^^

블루 님, 하하, 겸손한 저도 그런 메시지로 받아들였는데.( '')
그런데 내가 뭘 그리 많이 샀다고. 징징.

Mephistopheles 2007-03-27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컴퓨터가 공중전화기도 아니고..^^

히피드림~ 2007-03-28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일이 있었군요.
소개해주신 책은 어떤 책인지 구경하고 왔슴다.
아주 옛날 책이라 깜딱 놀랐어요 ^^;;

비로그인 2007-03-28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벽에 걸어져 있는 화이트보드에 "5분 안에!"라고 써놓았더니 뭔가 근사해진 것
같은 기분입니다. 제한 시간을 두니 집중력이 평소보다 2,3배 높아진 것 같은.(웃음)
그래도 역시 우주 최강 게으름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습니다만...(긁적)

로드무비 2007-03-28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 쓰다 두 번 날렸어요.(어제와 오늘)
5분 안에 쓰지 못하여.ㅎㅎ
<문심조룡> 옮겨 적고 싶은 구절이 많네요.
말 걸어주신 님들 반가워유.^^

2007-03-28 15: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니르바나 2007-03-28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안녕하세요.
우리집에도 저 책 한 권 있거든요.
손을 안 타서 깨끗한 책이요.
로드무비님 文才에 날개를 달아드려야겠군요. 용의 날개 ㅎㅎ

2007-03-28 19: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3-28 2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로밋 2007-03-28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네요. ㅋㅋ
저도 때때로 '5분안에'가 될때가 있더라구요. 아들놈 때문에^^
언제쯤 '5시간안에'가 될런지....
간만에 어려운 글을 읽었더니 머리가 아파요^^

국경을넘어 2007-03-28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올리시는 게 거의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군요. 긴장...

그러나



임무 완수 뒤에 남는 감정은 ?

(아마도 쾌감은 아닐 것 같은 느낌 -.-;;;)

로드무비 2007-04-03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폐인촌 님, 인천상륙작전이랄까.
이런 상황도 아슬아슬하고 재밌어요.^^

그로밋 님, 아들놈 때문에~의 그 시간이 얼마나 달콤하고
소중한 시간인가요.^^

플래시 모드 님, 전 언제나 글을 쓰든 안 쓰든
아무튼 글을 쓰고 있는 듯합니다.^^

품절 님, 오늘 책이 도착하여 일착으로 읽었답니다.
재밌었어요. 능청스러우시긴......^^

니르바나 님, 이게 웬일일까요?
로그인하고 20여 분째.
주옥같은 글을 밤새 써제끼고 싶어요.^^
 

햇반과 김치를 사온 남자는 1미터 남짓밖에 안 되는 그녀의 짧은 씽크대 앞에 서서
붙박이 찬장의 위아래 문을 모두 열어보더니,
거의 아무것도 해먹지를 않는 부엌이구만, 하고 중얼거렸다.
(...) 아니 무슨 사람 사는 집에 프라이팬 하나가 없어? 진짜 없어?
(...) 남자는 프라이팬 대신 하나밖에 없는 라면용 편수냄비를 찾아내 가스버너 위에 올렸다.
기름 없어? 기름?
(...) 남자는 할 수 없다는 듯 달군 냄비에 그대로 김치를 쏟아붓다가
손목에 살짝 스냅을 주어 김치봉지를 꺾었다.
내가 왜 김치를 다 안 넣는지 알아?
아뇨.
남자는 이유를 말하는 대신 냄비에 햇반 두 그릇을 넣고 일회용 숟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이건 뭐 김치볶음밥이 아니라 김치찜밥이 되겠네, 라고 투덜거렸다.
떡처럼 켜를 이룬 밥 밑에서 김치가 지글거리며 타는 냄새를 풍겼다. 경이로운 냄새였다.

                                                               --  권여선 '가을이 오면' 22~ 25쪽에서 발췌.


어느 날인가 같은 과 남학생에게서 담배를 한 대 얻어 맛있게 피우는 모습이
어찌나 깊은 인상을 줬는지 글을 좀 쓸지도 모르겠다는 오해를 불러일으켜
지도교수의 소개로  한달 반 동안 모 출판사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로라.
"주제 파악을 못한다"(어떤 글의 주제를 파악 못한다는 말인지,
인간이 변변찮다는 뜻인지 모르겠지만.....)는 이유로 그나마 짤리고
몇 푼 안되는 수고비를 확인하다가 충격으로 길거리에서 넘어지는데.

그녀는 외모든 성격이든 우아함이나 화사함이나 상냥함이라는 여성의 덕목과는
거리가 먼, 그래서 자신의 너무 예쁘고 튀는 이름이 항상 부끄러운,
늙다리 전문대 학생이다.

--그녀는 장 속에 박힌 장아찌처럼 되도록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죽은 듯 살아가기를,
아니 차라리 삭아가기를  원했다.(16쪽)

넘어져 크게 다친 자신을 부축하여 근처의 정형외과로 데려다준 모르는 남자가
말없이 사라지더니, 어느 여름날 혼자 사는 그녀의 옥탑방을 찾아온다.
그 날 길에서 주웠다면서 빈 지갑을 손에 들고.

밥을 한끼라도 사는 게 도리가 아니냐며.

근래에 읽은 그 어느 소설의 그 어느 장면보다 가슴 설레는 장면이었다.
로라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가난하고 못생기고 외로운 처녀다.
길에서 그렇게 우연히 만난 남자는 허우대는 멀쩡하고 얼굴은 멀끔하지만
그동안 세상에서 어떻게 굴러먹었는지 짐작이 될 정도로 얼굴이  두껍다.
그는 그 반반한 낯짝을 무기로 여자들을 등치며 간신히 살아가는 듯.
"장 속에 박힌 장아찌처럼 박혀 죽은 듯 살아가기를 바라는" 소원밖에 없는 로라는
그런 남자와 함께 일회용 숟가락으로 퍼먹는 햇반김치볶음밥도 황홀하다.

남자가 담배 한 개비를 꺼내더니 망설임 없이 그녀 쪽으로 내밀었다.
둘은 말없이 담배를 피웠다. 그녀는 스물일곱 해 인생에 남자와 이토록 정답게
같이 앉아 있어본 적이 없는 듯했다. 도대체 어떤 남자가 그녀에게 한 대 피웁시다라든가,
통째로 놓고 다같이 먹는 거야라든가, 매우면 물 떠먹고 같은 경이로운 말들을 할까.
남자는 담배꽁초를 햇반 그릇에 눌러 끄며  지갑을 내밀 때처럼 불쑥 이렇게 물었다.
그쪽은 뭐 좋아해? 이름은 어떻게 되고?(26쪽)



-----------------------------
'가을이 오면'의 로라 비슷한 심정(?)으로 세상을 오래 떠돌았던 것 같은 나는
위와 같은 장면이 나오면 바로 내가 여주인공인 듯 빠져들어 읽는 경향이 있다.
가령 영화 <우묵배미의 사랑>에서의 여관 풍경.
홍상수의 영화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술집이나 밥집 등에서의 뭐 그런
시금털털한 장면들과 속이 빤히 보이는 남녀의 수작들.

로라의 인생에 하나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반건달 애인이 생긴 게 얼마나 좋은지,
겨드랑이에서 시큼한 땀냄새를 풍기며 모르는 여자의 부엌에서 프라이팬도 식용유도 없어
냄비에 김치를 붓고 밥과 함께 들들 덖는 그 유능한 사내가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위의 장면에서 그 엉터리김치볶음밥 냄새는 또 얼마나 내 콧구멍을 간질였는지.

"나이 드니까 맛없는 걸 먹고 나면 화가 나!"('분홍리본의 시절' ) 같은
하나도 안 웃기는 대사에  낄낄거리며 일곱 편의 단편을 게걸스럽게 단숨에 읽어치웠다.
리뷰를 쓰고 싶었는데, 또 온갖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을까봐
제일 인상 깊었던 소설의 장면을 하나 소개하는 것으로 그친다.









소설가 권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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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4 14: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진달래 2007-03-14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읽고 있는데, 느낌이 괜찮네요. 이 작가, 이 작품... ^^
엉터리 김치볶음밥...

로드무비 2007-03-14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페인 님, 오래 전부터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첫 장편 <푸르른 틈새>를 재밌게 읽었거든요.
반지하나 옥탑방, 술자리, 그리고 진절머리나는 인간의
어떤 면모 등에 대한 묘사가 탁월해요.
윤대녕 소설과는 또 다르지요?^^
(님의 리뷰 기대해도 되죠?)

이렇게 은근히 님, 일부러(!) 야박하게 넣었습니다.
혹여라도 부담 느끼실까봐.
소설가 김지원에 대한 그의 글이 참 좋았어요.^^

2007-03-14 16: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진/우맘 2007-03-14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녀치마의 작가죠? 그때 차력당 선정도서로 읽고 나서 강하게 각인이 되어 있는데....신간이 나왔나? 얼른 담아야겠어요.^^

2007-03-14 17: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분홍달 2007-03-14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궁금하게 만드는 리뷰네요 함 읽어 봐야겠어요^^

얼음장수 2007-03-14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약콩이 끓는 동안을 쓴 그 권여선인가요? 읽으면서 작가의 힘이 느껴진다라는 인상을 받았는데 로드무비님의 추천도 있고 하니 관심을 더 관심을 가져봐야겠어요~

2007-03-14 19: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7-03-14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치를 왜 다 안 넣은 건지 님, 심오한 뜻이 있답니다.
밥과 김치가 익고 나서 나중에 남은 김치를 넣어주면
아삭아삭 씹히는 식감이 좋은 김치와 부드러운 김치가 섞여
볶음밥이 더 맛나다는 거죠.
저도 제 이름 끝글자의 모음 'ㅗ'가 'ㅜ'가 아닌 게
무지 아쉬웠습니다.^^
(이름을 제게 끝까지 안 가르쳐주셨던 것 같은데요. ㅎㅎ 그런 사연이...)

얼음장수 님, 네, 맞습니다.
'약콩이 끓는 동안'도 재밌게 읽었어요.
전 그의 모든 단편이 다 재밌었는데 그게 또
취향 혹은 연령의 문제와도 깊은 연관이 있는 것 같긴 해요.^^

부용 님, 제가 옮겨 적은 저 부분을 읽고 땡기신다면
읽어보셔도 좋을 듯합니다.^^


이번 주말에는 님, 잘 알겠습니다.
아픈 데는 ..가 최고, 간사한 인간의 마음을 그리도 잘 헤아리시니!
그런데 어제부로 깨깟이 다 나아서 양심상 그럴 수가 없네요.ㅋㅋ

진/우맘 님, 그때 님도 리뷰 쓰셨죠?
비발 님께 처녀치마를 선정도서로 해달라고 졸랐던 기억이.
그 책이 좋으셨다면 이 소설집도 확실합니다.^^


비로그인 2007-03-14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제 읽어보려고요. 기대가 큽니다^^

에로이카 2007-03-15 0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맛없는 음식을 먹으면 화가 나는 이유가 제가 이제 나이가 먹었기 때문이군요... 엉엉...

로드무비 2007-03-15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로이카 님, 전 옛날부터 그랬는데.ㅋㅋ
나이 드니 더 심해지긴 했어요.
거의 울분을 느낄 정도.^^
(울지 마시라요.)

바람난책 님, 안녕하세요?
기대 너무 많이 하고 읽으면 실망하실까봐 약간 걱정.
아무튼 좋은 시간 되시길요.^^

2007-03-16 1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3-16 1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7-03-16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해 황순원 문학상 수상 작품집에서 읽었던 단편이네요. 불편함이 매력으로 다가오던 작품이어서 작가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새로 단편집이 나왔나 보네요. 저도 보관함에 담아 넣으렵니다.^^

로드무비 2007-03-16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돈토코이 님, '가을이 오면'이 황순원 문학상 후보작에 올랐군요.
몰랐습니다. 그런데 아마도 수상은 못했나 봅니다?
불편함이 매력으로 다가왔다니 흥미롭습니다.^^

2007-03-16 15: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3-16 18: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7-03-17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우고 남은 말들 님, 좋았어요. 고마웠고요.
한 번 독자는 영원한 독자, 아시죠?
그 역할을 계속 하게 해주세요.
아마도 '사리' 같은 무엇을 원하시는 게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담아요, 님, 가끔 독수리타법으로나마 한 자 한 자
옮겨 적어보고 싶은 글이 있어요.
26쪽의 장면이 바로 그랬답니다.^^

2007-03-22 17: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3-23 1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3-25 2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