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 확인할 메일이 있어 피씨방에 들렀더니 이상한 제목의 메일이 한 통 눈에 띄었다.

'이제 난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알아서 하십시오!'

어, 낯이 익은 말인데 어디서 봤더라?
확인해 보니 예전에 내가 다니던 영등포의 작은 민중교회 목사님이 보내신 것으로
지난주 설교문의 제목을 파일로 동봉하며 제목으로 띄운 것이었다.
(낯이 익었던 건 한겨레신문에 연재중인 문동환 목사님의 그 무렵 글 중
가장 인상적인 독백이었기 때문.)
백골단을 다시 만들어 촛불집회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공공연하게 언론장악을 획책하고,
복지예산을 대거 삭감하고, 그 와중에 60일 넘게 단식중인 기륭전자 김소연 노조분회장이
급기야 소금과 효소마저 끊겠다고 선언하자 파렴치하고 딱한 이 현실을 개탄하는 내용이었다.

--하나님, 이제 난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알아서 하십시오.

뻔뻔스럽게 한 일이 뭐가 있다고, 나도 이 말을 입속으로 읊조려봤다.

여름 휴가 중에 이청준 선생님의 부음과 서울시교육감 선거결과를
라디오방송으로 전해들었다.

집으로 돌아와 제일 먼저 손에 든 책이, 이청준 선생의 소설집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
'부처님은 어찌하시렵니까?'는 선생의 절친한 벗 김선두 화백의 가족과 관련된 이야기를
쓴 빼어난 단편이다.
스님과 불자들의 대규모 집회 소식이 연일 들려온다.
"부처님은 어찌하시렵니까?"
아침에 신문을 펼치면 나도 모르게 이 말이 입속을 맴돈다.

'최악의 악인'이 버젓이 활개치는 세상인데, 답답한 현실은 더 답답한 소설로
푸는 것도 괜찮다.
내친김에 오쿠다 히데오의 <최악>과 요시다 슈이치의 <악인>을 연달아 읽어댔다.
주인공들이 처한 곤경과 기막힌 현실이 목을 죄어왔고
희미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이것이 바로 일본소설이다!)

'최악의 악인'이라는 제목으로 근사한 리뷰를 쓰고 싶었는데
다행히 컴퓨터가 고장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를 다 읽고 부랴부랴 임권택 감독의 <천년학>을 찾아봤다.
장흥시외버스정류소. 영화의 첫 장면, 이청준 선생님이 주인공(조재현)의 뒤를 따라
무심하고 태연한 얼굴로 버스에서 내리셨다.
그 장면을 몇 번이나 되감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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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09-04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께는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저희로써는 굉장히 아쉬운데요-

최악의 악인, 그놈을 다시 잊어야 천년이 화평하다,
뭐 이런 제목의 리뷰 써주세요 ^_^ (여기까지 와서 말장난이라니~)

로드무비 2008-09-04 15:02   좋아요 0 | URL
웬디양 님, 아아 눈부십니다.
님의 재치, 젊음, 고소한 방귀냄새.^^

치니 2008-09-04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요, 아쉬워요.
다시 써주세요.

로드무비 2008-09-04 15:01   좋아요 0 | URL
치니 님, '근사한 리뷰'라고 큰소리부터 쳐놓은 게 주효했네요.=3=3=3

라주미힌 2008-09-04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어쩌란 말이냐.. 흩어진 이 마음을...
아... 어쩌란 말이냐.. 이 아픈 가슴을...

세상을 긍정하기 참 힘들게 하네요..

로드무비 2008-09-04 14:59   좋아요 0 | URL
~~안녕하며 돌아선 뛰어가는 네 뒷모습
동그랗게 내버려진 나의 사랑이여

아 어쩌란 말이냐 흩어진 이 마음을...
저도 따라부릅니다. 라주미힌 님.^^

마노아 2008-09-04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이미 추천했다고 나오다니, 제가 추천 두번 하고 싶었나봐요. 로드무비님의 리뷰를 기다리는 마음일 거예요^^
라주미힌 덕에 노래도 따라부르고, 제목 생각 안 나서 검색하고 돌아와 추천 버튼 또 누른 마노아였습니다^^

로드무비 2008-09-06 12:52   좋아요 0 | URL
마노아 님, 저 컴퓨터 새로 샀어요. (오늘 설치!)
리뷰 기다리시라요.^^
(전 가사가 잘 생각이 안 나서 검색해서 찾아보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불러봤습니다. 물론 오리지널 버전으로요.)

에로이카 2008-09-05 0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로드무비님 글 읽으니 무지 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에 연재되는 문동환의 '길을 찾아서'를 보시는군요. 저도 다른 기사는 안 읽어도 그 꼭지는 꼭 봐요. 고집스런 어른의 글을 읽는 것이 주는 독특한 즐거움이 있는 것 같아요. 나중에 로드무비님도 그 연세가 되시면 그런 재미있는 이바구를 쓸 수 있지 않을까.. 기대됩니다.

로드무비 2008-09-06 12:50   좋아요 0 | URL
에로이카 님, 아이고 오랜만입니다.
전 요즘 신문이고 뉴스고 보기가 싫어요.
혈압이 올라서......
말씀처럼 고집스런 어른의 글이 참 좋습니다.^^
그런데, 전 그 연세까지 못 살 것 같아요.=3=3=3

샤론 2008-09-06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도 넘~~ '화' 듣고 싶어~~
오늘 가면 틀어줄거지?

로드무비 2008-09-06 12:46   좋아요 0 | URL
'화' 틀어줄게.
열 번이라도.^^

2008-09-30 1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장난우주선 2009-04-18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목숨을 버리긴 쉽지만, 조용히 뜻을 이루기는 어렵다고 하더군요.
 












오늘 아침, 출근 준비를 마친 책장수님이 왠지 뻐기는 표정으로 나를 불렀다.
"돈 3만 원만 줘봐."
"왜? 뭐하려고?"
그러면서도 나는 자동반사적으로 지갑을 꺼냈다.
"2만 원뿐인데......"
"에잇, 너무 손해잖아!"
짐짓 투덜거리며 책장수님이 내게 건넨 건 1만 원짜리, 5천 원짜리 도서상품권 몇 장.
합쳐 보니 무려 5만 원이다.
"야호, 수지 맞았다!"
나는 출근하는 그의 궁둥짝을 요란하게 두들겨 주었다.

며칠 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결혼생활은 멋진 알리바이라고.
밑도 끝도 없이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설거지를 하면서 어제 오후 알라딘 상자로 전해 받은 '사월과 오월'의 음반을 틀었다.
'화'를 두 번 연이어 들었다.
이 노래가 왜 그렇게 좋은지 이유를 몰랐는데
거짓말처럼 반짝, 머릿속 전구에 불이 들어왔다.
대학 1학년 때 마음속으로 좋아했던 남자아이가
'톱니바퀴'라는 학교 그룹사운드의 리더싱어였다.
그는 베이스기타도 함께 연주했는데 언젠가 과의 회식자리에서 기타를 치며
이 노래를 부른 적이 있었던 거디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이 아침, 혼자만의 쾌적한 시간.
사월과 오월을 꺼내고 어제 함께 도착한 백현진의 CD를 넣었다.
기묘하지만 심금을 울리는 목소리와 멜로디가 흘러 나온다.
"에잇, 아침부터 녹작지근해지네..." 구시렁거리며 이동도서관에서 빌려온
황병승의 시집을 딱 펼치는데,
'멀고 춥고 무섭다'라는 제목의 시(74쪽)가 눈에 들어오는 거다.

(...)어딘가 몹시 불안해 보이는, 꼬일 대로 꼬여서, 도무지 내 인생 왜 이래? 하는 표정의,
지저분한 턱수염, 충혈된 눈알의 시인 아무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갑자기 문짝을 걷어차며, 다 대가리 박어! 그러는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음악가들인데, 지지리 궁상의 끝에서 도무지 쓸쓸하게 취해버렸는데
왜 갑자기 난데없이 나타난 시인 나부랭이가 우리에게 대가리 어쩌고 하는 것일까.(...)
(황병승 시집, <트랙과 들판의 별>, 문학과 지성사 刊)

알고보니, '멀고 춥고 무섭다'는 어어부 밴드의 노래 제목이었다.

"나는 엉망으로 늙어간다"라는 황병승 시인의 시구에 움찔해서
오늘아침의 불로소득 3만 원을 고스란히 모 단체('버마' 관련)에 후원금으로 보내고 말았다.
(새벽에, <닥쳐라, 세계화!> 버마 부문을 읽었다.)



2층 사는 남자가 창문을 부서져라 닫는다, 그것이
잘 만들어졌는지 보려고

여자가 다시 창문을 소리나게 열어젖힌다, 그것이
잘 만들어졌다는 걸 알았으니까

서로를 밀쳐내지 못해 안달을 하면서도 왜 악착같이
붙어사는 걸까, 더 큰 집으로 이사하려고

바퀴벌레 시궁쥐 사마귀 뱀 지렁이 이 친구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미움받고 있는지 알기나 할까, 파티에 초대받은 적이 없어서

아줌마 아저씨들은 '야 야 됐어' 그런다, 조금 더 살았다고

그러면 다리에 난간은 뭐 하러 있나 입을 꾹 다물고
죽은 노인네에게 밥상은 왜 차려주나

그런 게 위안이 되지

두리번 두리번거리며, 빵 주세요 빵 먹고 싶습니다
배고픈 개들이 주춤 주춤 늙어가는 저녁

춤추는 언니들, 추는 수밖에

(황병승 詩  '춤추는 언니들, 추는 수밖에' 全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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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08-05-23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그 알리바이 참 좋네요... ^^ 오랜만에 보는 로드무비님 페이퍼 읽고 기분 좋아졌어요... 이 맛입니다...

로드무비 2008-05-23 15:54   좋아요 0 | URL
에로이카 님, 이 맛이라니, 기분좋은데요?^^

라주미힌 2008-05-23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뭔가를 얻고 갑니다.
로드무비님 페이퍼 보면 나이 한 살 더 먹는거 같고.. ㅎㅎㅎ
자주 오셔용.

로드무비 2008-05-23 15:59   좋아요 0 | URL
라주미힌 님, 나이를 매일 열 살씩 먹는 기분입니다.
자주 오라니 말씀은 고마운데 기운이 영 딸리는군요.^^

twoshot 2008-05-23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간만에 오셨네요! 반갑습니다. 팬관리 차원에서 좀 자주 오셔요~~

로드무비 2008-05-23 15:58   좋아요 0 | URL
twoshot 님, 반갑습니다.
저에게도 팬이 있다니, 황홀합니다.^^

2008-05-23 17: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5-24 09: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5-23 1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5-24 08: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L.SHIN 2008-05-23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입니다, 로드님. 좋은 글 읽고 갑니다.^^

로드무비 2008-05-24 08:51   좋아요 0 | URL
Lud-S 님, 반갑습니다.^^

2008-05-24 0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5-24 08: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08-05-24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요즘 엉망으로 늙어가고 있는 중이 아닌가 싶습니다..^^

로드무비 2008-05-24 10:12   좋아요 0 | URL
메피스토 님, 표정!ㅋㅋ
좀 곱게 늙고 싶은데 그게 쉽지가 않네요.^^


2008-05-24 14: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5-25 2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5-26 0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5-26 2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5-25 1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5-25 2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5-27 22: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5-29 1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5-31 07: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얀마녀 2008-06-02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경스럽습니다. 저같이 쪼잔한 넘은 흉내도 못 낼 거에요.

로드무비 2008-06-03 12:17   좋아요 0 | URL
하얀마녀 님, 쪼잔....뜨끔.=3=3
저야말로.^^

2008-07-03 1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장난우주선 2009-04-18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커튼 뒤의 그만이 이미 모든걸 안다네~
 

8.
책 속에 묻혀 사니 마음은 봄날이고
온 들에서 들려오는 농부가도 장관이네
분수대로 살아가니 나의 생계 족하여
털끝만 한 세상사도 관여하지 않는다


13.
초동은 풀을 베러 산속으로 들어가고
어미새는 새끼 데리고 낮은 담장에 모인다
검은 옷에 관을 쓰고 괭이를 잡으니
선비와 농부는 옛부터 같았다네


- <성호 이익 시선> 閒居雜詠二十首 중에서, 예문서원 刊




지난달, 강명관의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를 읽다가 조선 시대의 학자 성호 이익에 꽂혀
그의 책들을 몇 권 주문했다.
요즘은 대부분의 책들을 이동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있는데(2주에 여섯 권)
사서 읽는 것보다 좋은 점도 더러 있다.
시간에 쫓긴다거나 여차저차하여 평소 거들떠보지도 않는 작가나 어떤 부류의 책들을
고르게 되기도 하는데 생각지도 않은 재미와 감동을 선사받기도 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의 접점도 그렇게 이루어지고 새로운 물꼬를 튼다.
(문학평론가 방민호가 묶은 <모던 수필>을 주문해 읽다가
김기림 시인의 재기발랄한 글에 꽂혀 그의 평전과 시집을 사들여 읽어댄 것이 시초였다.)

지난 달,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를 읽고 조선 시대와 성호 이익에
관심이 생기는 바람에 조선 시대 역사책과 이익의 저작을 꼼꼼히 챙겨 읽게 되었다.
듣자하니 조선의 관리나 양반, 선비들은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를 반기지 않았다는데
그 이유가 가관이었다. 어리석고 간악한 백성들이 글자를 알면 이것저것 따지고
기어오를 것이라나?!
그들이 이룬 학문의 성취가 어떠하든 그 우월감과 독점욕에는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저자 강명관 씨에 의하면 이익의 <성호사설>은 조선의 지식인이 접근할 수 있는
지식의 극한치까지 도달한 책이란다.
성리학이 판치는 지적 풍토에서 당대의 사회를 치열하게 고민한 그였다.
'대저 재물이란 하늘이 내려주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백성의 노동으로 생산되는 것이다.
백성이 부유하면 나라도 흥성한다.'
이 구절을 읽고 그에게 반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성호 이익의 시선집도 재미나게 읽힌다.
'분수대로 살아가니 나의 생계 족하여 털끝만 한 세상사도 관여하지 않는다'고 그는 쓰고,
선비와 농부는 뿌리가 같다고 말한다.
선비와 농부는 뿌리가 같단다.

<선조실록> 32년 5월 25일의 기록에 의하면 허균은
'오직 문장의 재주로 세상에 용납되었다'고 적혀 있다는데,
내게 있어서는 문장의 재주도 재주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랄까
그런 데 제일 먼저 시선이 가는 것 같다.
엊그제, 전경린의 산문집 <붉은 리본>을 아주 재미있게 읽고 나서,
나의 그런 생각에 도장을 찍었다.

전경린의 글을 통해 <수단 항구>라는 소설을 구하게 된 것도 조그만 수확이라면 수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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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19 2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20 09: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20 0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20 09: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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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3 08: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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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4 11: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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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07 1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얀마녀 2008-06-02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제 무식함이 새삼스레 다가오는군요.
 

"고독하지 않나?
미안하네, 이상한 소릴 지껄여서.
그냥 내가 요새 고독해서 말야.
문득 돌아보니 마누라는 뚱뚱한 아줌마가 돼 있고.
아들은 미국 갱단 흉내낸다고 애비더러 "YO!" 이러질 않나."

"말해 주겠어. 난 아버지고, 남자고, 역시 나는 나고, 그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아사노 이니오 <이 멋진 세상> 2권, 에피소드 13편 '잘 자요' 68쪽)

"정말 싫어. 지긋지긋해! 일하는 보람도 없고, 윗대가리들은 하나같이 바보고,
보너스만 받으면 당장 때려치울 거야, 이 따위 회사."
"그래그래, 이 지랄 같은 세상 거저 준대도 안 갖는다. 그럼 우리 둘 사랑의 도피라도 할까?"

"아가씨, 가족은 안녕하십니까? ...애인은 있습니까?
...그 정도면 충분한 것 아닙니까."
(2권 에피소드 14편 '달과 어묵' 중에서.)


.......................

지지난해인가 7천 원짜리 미니어처 인형을 주문했더니
어찌된 일인지 인형은 안 오고 달랑 가발(가로세로 5센티 정도)만 왔다.
그 미니어처 인형 전용의......
(당연히 나에겐 그 인형이 없었다.)

옛날옛적 처음 상경했을 때 청계천에서 "청바지 500원!"이라는 노점 상인의 말에 혹해
청바지를 하나 골라들었다가 오백 원이 아닌 오천 원임을 알고
뒤통수가 뜨끈했던 때보다 100배는 더 무안했다.

도처에 구멍이다.
시덥잖은 쇼핑에서 낭패를 보는 것 정도는 애교에 속한다.
뭐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다.(고 엄살을 떨지만 사실 그럭저럭 잘 살고 있다.)

1980년생 아사노 이니오.
필명 '이니오'는 집에 있던 보험증의 여러 기호에서 따온 것이라고.
(책날개에 그렇게 소개되어 있으니.)

함께 주문한 단편집 <빛의 거리>보다 <이 멋진 세상> 1, 2권이 더 마음에 들었다.
장래 꿈이 만화가(화가에서 만화가로 바뀌었다)인 딸아이를 위해
책값이 좀 비싸더라도 출혈을 감수하고 쟁여 두어야 한다는 생각.=3=3=3

연작도 아니고 옴니버스도 아니고 아무튼 좀 묘한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만화.
예를 들어 에로 잡지 창간작업에 동원된 30대의 카스카베와
그를 불러들인 마흔 혹은 오십줄 중견 편집자의 대화(순서는 거꾸로)가
에피소드 13편 '잘 자요'라면,

에피소드 14편의 위에 소개한 장면은 거리 한 모퉁이의 라면 포장마차가 배경으로,
술이 떡이 되어 거리에서 헌팅되어 온 아가씨가 취하여 내뱉는 대사이고
라면을 말던 노인이 "그 정도면 충분한 것 아니냐"고 한 마디 툭 던지는데.
등장인물들은 가족이나 친구, 혹은 사돈의 팔촌이거나 스치고 지나가는 행인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제법 익숙한 형식이지만 나는 늘 참신하다고 느낀다.)

그런데 이 페이퍼를 쓰는 중요한 이유.
--문득 돌아보니 마누라는 뚱뚱한 아줌마가 돼 있고.

영악한 초등학생, 사춘기의 소년소녀, 미혼남녀, 무능한 중년,
노인의 고독과 애환이 각 에피소드로 거의 망라되어 있다면
그 뚱뚱한 아줌마의 이야기만 쏙 빠진 것이다.

아사노 이니오의 다음 작품에서 그녀를 꼭 만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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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8-01-25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싸 보관함으로 골인...헤트트릭입니다..세권이다 보니.

로드무비 2008-01-26 09:08   좋아요 0 | URL
앗싸, 헤트트릭이라니!^^
요즘은 자살골 연속이었는디.=3=3=3

2008-01-25 18: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26 08: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twoshot 2008-01-25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얼마 전에 읽은 책인데 어째 저 주옥같은 대사들이 저에겐 남아있지가 않네요-_-;;
기억력과 감수성....부럽습니다.

로드무비 2008-01-26 08:58   좋아요 0 | URL
twoshot 님, 바로 어제 읽은 책이니 기억력이 좋은 건 결코 아니고,
책을 맛있게 읽는 능력은 타고난 것 같아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답니다.
잊을 만하면 나타나시는군요. 반가워요.^^

2008-01-25 2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26 09: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08-01-26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저도 보관함으로 넣어요. 호감이 모락모락해요. :)

로드무비 2008-01-27 22:42   좋아요 0 | URL
다락방 님, 그 '호감'을 믿으시라요.
김까지 모락모락 난다니.^^

2008-01-29 04: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30 14: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29 1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30 14: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10 06: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13 1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11 2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13 1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13 19: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립은 도시주의의 현실이지만, 그 고립의 일반 운동은
반드시 계획될 수 있는 생산과 소비라는 요구에 의존하여
노동자들의 통제되는 재통합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체제 내로의 통합은 고립된 개개인들이 재포획되고
함께 고립되어 있기를
요구한다.
다시 말해 공장들과 문화시설들, 관광단지와 주택개발은
명백히 고립된 개인권리를 따라가 마침내 가족세포까지 쫓아가는
사이비 공동체봉사하기 위해 조직된다.
스펙터클적 메시지를 수신하는 기기들의 광범위한 활용으로 인해
개인은 자신의 고립을 지배적인 이미지들 - 그 힘은 바로 이 고립으로부터
끌어오는 이미지들 - 로 채울 수 있게 된다.
(기 드보르 <스펙터클의 사회>139쪽)

1.
어제 아침 방송에선가 얼핏 우리나라 인구가 오천만 명을 넘어섰으며
그 절반이 수도권에 밀집되어 있다는 뉴스를 접했다.
아침밥을 준비하고 아이 등교 준비를 돕는 바쁜 시간이라 그냥 흘려들었는데
어젯밤 '도시적 생산조건에 의해 위험할 정도로 군집하게 된 노동자들(138쪽)'
어쩌고 하는 구절을 읽다보니 문득 아침의 그 뉴스가 생각 났다.

어제 내 눈에 들어온 또 하나의 뉴스는  해고된 E랜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생계비 지원 약속을 어겼다는 민주노총 소식이다.
겨우 9월 한 달, 약속한 50만 원씩을 지급할 수 있었다는 것인데
지원을 약속한 산하 15개 연맹의 납부율이  21프로에 그쳐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대기업 정규직 조합원이 많을수록 납부율이 저조한데 제일 기가 막힌 건
언론노조교수노조는 그나마 예정액 중 한푼도 내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 그럴 줄 알았다. 서비스연맹과 여성연맹, 보건의료노조의 순으로
납부금액과 납부율이 제일 높았다.)

2.
10년 구독하던 신문을 끊은 지 1년이 넘었는데 문득 신문의 냄새와 촉감이 그리워
어제 다시 구독 신청을 했다.
컴퓨터를 켜면 굳이 내가 알고 싶지도 않은 괴상한 뉴스들이 무차별로 달려든다.
이혼소송에 휘말린 연예인 부부의 잠자리 횟수까지 알게 되고
한 방송 프로그램에 첫 출연해 남자 패널들의 혼을 빼놓은 외국인 미녀가 얼마나 섹시한지
남이 퍼다놓은 동영상으로 확인한다. 침울한 낯짝으로......
내것이 아닌 미모와 몸매와 거액과 남의 로맨스와 질탕과 끌탕을 훔쳐보며
아까운 시간을 흘려 보내는 꼴이라니.
그런 의미에서 오늘 아침, 오랜만에 커피를 마시며 내가 선택한 신문과 기사를
골라 읽는 기분이 썩 괜찮았다.

신문과 관련하여 생각나는 이야기.
얼마 전 부산에 내려갔을 때 방에 굴러다니는 신문이 하도 꼬질꼬질해
무심코 버리려고 했더니 엄마가 못 버리게 했다.
아직 다 못 읽었다고.
예전부터 정치에 얼마나 관심이 많았던지, 어쩌다 우리가 <신동아> 한 권을 사면
처음부터 끝까지 구석구석 읽는 사람이 당신이었다.
요즘은 사나흘에 한 번 가까운 신문 지국에 가서 남는 신문 있으면 한 부 달라고 하여
얻어 읽는다는 것이다.(허탕 칠 때도 있다니 가슴이 찡했다.)
엄마 앞으로 신문 구독을 신청하겠다고 했더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극구 말리셨다.
이번에 박완서의 책을 몇 권 가져다 드렸더니 아주 좋아하셨는데
생각난 김에 그의 모든 책들을 읽게 해드려야겠다.

3.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을 읽다가 기 드보르의 <스펙터클의 사회>를 읽고,
오래 전 건성으로 읽어치운 하비 콕스의 <세속도시>가 문득 생각나 책꽂이에서 빼들었다.
이상하게 요즘은 책을 이런 식으로  엄벙덤벙  읽게 된다.
마무리는 최승호 시인의 <세속도시의 즐거움>이 어떨까 싶은데,
아쉽게도 그의 시집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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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1-20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울 경기도에 2천 2백만....언젠가는 그 지역만 숟가락처럼 움푹~ 가라 앉을지도
몰라요.(웃음) 난, 한적한 곳이 좋은데.

로드무비 2007-11-20 12:22   좋아요 0 | URL
L-SHIN 님, 반갑습니다.
숟가락처럼 움푹 가라앉는 정도에서 그쳤으면 좋겠어요.(찌그러진 웃음)
우리집 햄스터 보여드릴게요. 페이퍼 만드는 중.^^



Mephistopheles 2007-11-20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로드무비님과는 반대로 사무실로 들어오는 신문을 끊어버리고 싶습니다.
M모 경제일보인데 사회적으로 큰 이슈인 S기업의 내부고발에 대해 지나치게 기업두둔주의의 모습을 노골적으로 보이더라구요. 경제신문이라는 이유때문인 것은 알겠는데 너무나 지나치게 편파적인 활자모음을 보고 있으면 이것도 언론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얼굴인가 하는 불신까지 생겨날 판인거죠..(이미 안믿은지는 오래되었지만.)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도 신문을 끊어버리던가 할려고요. 내가 일해 번 돈 몇만원이 이 신문을 정기구독하는데 쓰이고 이따위 기사를 쓰는 기자들의 밥값으로 지불된다는게 생각할수록 억울하더라구요.

로드무비 2007-11-20 12:57   좋아요 0 | URL
저는 서재활동에 매진하느라 신문을 거의 읽지도 않고 내다버리게 되고
마침 이사까지 하게 되어 아무 생각 없이 끊었는데요.
신문을 안 읽고 포털 뉴스로만 세상을 접하니 세상이 너무
기괴하게 느껴져서요.
신문으로 접하는 세상도 뭐 다를 건 없겠지만 아무튼 하다못해
삼겹살 구워먹을 때 바닥에 깔 것도 필요하고 해서.^^
(그 경제신문은 확 끊어버리시지. 정신건강상 안 보는 게 더 좋은 것들이
세상에는 너무 많아요.)

치니 2007-11-20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님을 닮으셨군요. ^-^

로드무비 2007-11-22 11:06   좋아요 0 | URL
치니 님, 책 읽는 걸 좋아한다는 점은 닮았고요.
신문지국에 가서 신문 공짜로 달라고 할 수 있는 용기와 바지런함은
아쉽게도 물려받지 못했습니다.^^

icaru 2007-11-21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어머님께서 저희 시어머니하고 비슷하시다는~ ㅎ
수잔 손택의 책을 위시하여~ 요즘 읽고 계시는 책들이... 인용문구를 봐도 글코.. 내공이 장난이 아닌 책들. 언젠가는(지금 당장은 목구멍에 풀칠이라..ㅜ.ㅡ) 제 손에 들렸으면 하는 책들 임돠~!

로드무비 2007-11-22 11:10   좋아요 0 | URL
우리 엄마는 옷을 사는 데는 돈을 안 아끼셔요.
icaru 님 시어머님은 어떠신지?ㅎㅎ
<스펙터클의 사회>는 짐작건대 번역이 제일 이상하게 된 부분을
제가 인용한 것 같은데요. 페이퍼를 하나 쓰려다 보니.
사실은 제목처럼 거침없는 문장이며 내용이 스펙터클한 책입니다.
내공 하나도 없는 제가 심지어 재밌게 읽은 책이니까
님은 훨씬 가볍게 읽으실 수 있지 않을까요?
갑자기 이상은의 노래가 듣고 싶네요.^^




니르바나 2007-11-22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절이 계절이다보니 '세속도시의 즐거움'보다는 '대설주의보'생각이 나는군요.
최승호 시인하면 언젠가 들었던 시인의 아내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소설같은, 아니 소설 이상이였던 이야기가요.
그런데 시인은 왜 시 아니면 시같은 우화집만 발표할까요.
시인의 내면읽기에는 수필집이 있으면 좋을텐데요.^^


로드무비 2007-11-23 12:45   좋아요 0 | URL
전 그 우화 식의 글들이 싫어요.^^
니르바나 님, 님도 알고 계시는군요.
어떤 소설보다 더 소설적인 이야기였죠.
꽃을 들고 온 여인도, 시를 쓰던 아내도......
눈도 왔지만 전 11월을 아직 가을이라 우기고 싶은데
'겨울의 한가운데'라고 오늘 아침 어느 아나운서가 그러더군요.

니르바나 2007-11-22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론노조와 교수노조들은 그간 입으로 적선을 많이 하셨으니까
그냥 패스해주면 안될까요. 로드무비님 ㅎㅎ

로드무비 2007-11-23 12:40   좋아요 0 | URL
니르바나 님, 글고보니 저도 입만 나불나불.ㅎㅎ
우리 모두 나빠요.
니르바나 님은 빼고요.^^


2007-11-25 1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