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것들
앤드루 포터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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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먹은 마음이 달라질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마음은 변할 수 있다는 걸 몰라서가 아니라 믿음과 관계에 대해서 말이다.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는 유연함이 삶이며 그게 필요하다는 걸 몰랐던 것이다. 그러니까 20~30대에는 말이다. 2년마다 건강 검진을 받을 때마다 긴장하고 두려울 거라 그때는 짐작했을까. 늙어간다는 게 어떤 건지 피부로 느낄 수 있다고 생각이나 했겠냐는 거다. 내가 도달한 나이에도 삶은 여전히 어렵고 알 수 없는 게 많다는 사실을. 그래서 이런 소설을 만나면 오랫동안 연락이 닿지 않았던 친구를 만난 기분이 든다.


앤드루 포터의 소설을 읽으면서 선명하게 떠오르는 몇 장의 사진과 기억들. 몇 달 전 정리하다 발견한 사진을 친구에게 문자로 보냈더니 친구는 “오래전이네” 란 답을 보내왔다. 오래전 내 곁에 있던 친구와 머리 염색에 대해 건강에 대해 농담 어린 대화를 나눈다. 아무렇지 않던 그 사실이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친구는 알까. 아마 모를 것이다. 나도 몰랐으니까. 앤드루 포터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으니까.


같은 지역의 같은 학교를 다니고 곳곳을 어울려 다니며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술을 마시고 좋아하는 배우에 열광하며 영화를 보던 시절. 그 시절을 추억하기에는 여유가 없고 삶의 일선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소설 속 주인공의 모습은 애틋한 동질감을 불러온다. 그들은 모두 사십 대로 학생을 가르치고 영화나 음악 등 예술에 관련된 일을 한다. 직장에 매여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그것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다. 가정을 이루고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무게 때문만은 아니다. 중년의 나이라는 게 그렇듯 선뜻 어느 시절로 돌아갈 수 있는 용기도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 나서기도 두려운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뭐라 불러야 할까.





예전과는 다른 것에 몰두해야 하고 나 아닌 가족이나 연인에게 집중해야 한다. 친구들과의 만남에서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아무 말 없이 슬그머니 자리를 떠나 집으로 돌아오는 「오스틴」의 나가 겪은 감정들. 아내와 아이들을 바라보며 드는 생각들.


예전에 지녔던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혹은 버려두고 떠나왔다는 느낌이 늘 있었다. 이런 기분을 아내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눈을 감고 다시 쇼팽 음악에 집중했다. 이제는 다른 곳이었다. 녹턴. 섬세한, 서정적인, 부드러운( 「오스틴」, 21쪽)


밤중에 자다가 깨어 뒷마당을, 세탁실을, 차고를 확인하는 일, 이상한 소음의 정체를 알아보는 일, 창문을 단속하고 잠금장치를 더 단단하게 세우는 이런 일. 이것이 우리가 들어온 새로운 세상, 우리가 꾸기 시작한 새로운 꿈의 일부가 되었다. 그런데도 가끔은 그 굼에 균열이 생기는 때가 있었다. 과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는, 그 다른 삶이 살짝 윙크를 보내는 때가 있었다. ( 「오스틴」, 24쪽)


누군가 마치 자신의 감정을 들킨 것 같아 움찔할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나만 그런 게 아니라며 안도할지 모른다. 괜히 적적해지고 서글퍼질지도 모른다. 산다는 건, 나이를 먹는다는 건 어떤 다양성에서 점차 줄어드는 무언가를 마주하는 일이며 선택에 있어 주저하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연인, 가족, 동거인의 감정에 무뎌지고 비밀 아닌 비밀을 간직하는 것, 대단한 비밀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공유하지 못하고 혼자만 간직하고 싶은 이상한 마음.


그런 마음을 예술 단체에서 일하는 아내 칼리와 말이 프로젝트 진행이지 백수로 지내는 나와 아파트 아래층에 거주하는 이십 대 후반의 여자 히메나의 관계를 그린 「히메나」 속 부부에게서 만난다. 서른여덟 동갑 부부에게 히메나는 특별한 의미로 존재한다. 아내나 남편과는 나눌 수 없는 대화를 할 수 있는 상대, 그러면서도 베일에 싸인 것 같은 히메나를 통해 부부가 찾고자 했던 건 무엇일까.


어떤 나이가 되었을 때 선명하게 보일 것 같았던 삶은 오히려 살면 살수록 불투명 그 자체라는 걸 알려준다. 뭔가 잃어버리고 결국 사라지게 만든다. 그것을 인정할 수 없어 분노하고 통곡한다. 어떤 관계가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음을 받아들지 못해 고통스럽다. 과거의 내가 아니듯 상대도 그때의 그가 아니라는 걸 깨달음은 항상 뒤늦게 도착한다. 어디 마흔세 살뿐일까? 그 이후의 시간이 와도 미래를 아는 건 불가능하다.


참 이상한 일이다. 마흔세 살이 되었는데 미래가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다니, 삶의 어느 지점에 잘못된 기차에 올라타 정신을 차려보니 젊을 때는 예상하지도 원하지도 심지어 알지도 못했던 곳에 와버렸다는 걸 깨닫다니. ( 「라인벡」 , 127쪽)


사라진 친구의 집을 친구의 연인과 정리하는 표제작 「사라진 것들」에서도 마찬가지다. 가장 친한 친구가 실종될 거라 상상하겠는가. 오늘이 아니더라도 내일 연락을 하면 나중에 만나면 된다고 여기며 살아간다. 어느 순간 사라져 영영 볼 수 없는 존재가 된다는 걸 누가 믿겠는가. 그러니 죽은 친구의 연인과 같이 수영장 물 위에 뜬 채로 보내는 반 시간은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이기에 그 자체만으로 소중한 것이 된다.


모든 것은 사라지고 돌아갈 수 없는 순간이며 앞으로 살아갈 시간도 사라질 거라는 자명한 사실. 도저히 알 수 없는 불가해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진실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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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4-01-30 18: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퇴근하면 이 책이 와 있을 듯 합니다. 까오~~ 빨리 읽고 싶네요!!

자목련 2024-01-31 16:47   좋아요 0 | URL
어젯밤은 이 책과 함께 보내셨을까요?
즐겁게 읽으시길 바라요^
 

책을 샀다, 처음인 것처럼 말이다. 처음 맞다. 그러니까 2024년 1월의 처음. 처음은 얼마나 좋은가. 다음이 있으니까. 처음에는 실수해도 좋고 처음에는 미완성도 좋다. 뭐든 처음에는 일정의 배려가 있고 수용이 있다. 처음에 잘해야 나중에도 잘 한다는 생각, 처음부터 잘못하면 기대를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누군가 더 주의 깊게 지켜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2024년의 처음인 1월도 끝이 보인다. 계획 같은 거 세우지 않지만 나름 하루의 할 일들을 한 날도 있고 그렇지 못한 날도 있다. 조금 게으르고, 조금 느리고,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날들이 있다. 누군가 1월은 더 가열하게, 더 빠르고, 더 빡빡할 것이다. 그렇게 각자의 1월을 살고 있다.






아무튼 책을 샀다, 처음인 것처럼. 앤드루 포터의 소설집 『사라진 것들』, 조해진의 중편소설 『겨울을 지나가다』, 김소연의 시집 『촉진하는 밤』까지 세 권이다. 문득 한 작가의 글을 계속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그들과 나의 첫 만남에 대해서. 그 만남의 느낌의 여부에 따라 그다음이 결정되었으니까.


그렇게 보면 앤드류 포터는 완벽한 첫 만남을 떠올릴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첫 소설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다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다음을 기대했고 다음인 이 소설집을 읽고 좋구나, 이런 글이 우리에겐 필요하구나 생각하는 건 무슨 이유일까.






그에 반해 조해진의 첫 만남은 불투명한 슬픔이었다. 너무 맑고 너무 아름다웠다면 오히려 그의 소설을 계속 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렇다. 앤드류 포터의 짧은 이야기와 조해진의 조금 긴 이야기는 쉽고도 따뜻하다. 애틋하고도 아련하다. 먹먹하고도 포근하다.







김소연의 시집은, 시집은 그냥 좋기도 하고, 닿을 수 없어서 더 끌리기도 하고, 시집은 묘하다. 김소연의 시집은 대체로 길고 어렵구나! 읽다 보면 어려움이 조금 사라질 것이다. 아니, 계속 어려워도 뭐 어쩌겠는가.







이렇게 나는 책을 샀다. 처음인 것처럼. 사고 싶은 책이 또 있지만 참고 있어야지. 참을 수 있어야 한다. 참은 뒤에 찾아오는 기쁨이 더 크니까. 나는 그걸 아니까. 그래도 사고 싶은 책을 말하자면 이 책이다. 곧 살 것 같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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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1-26 12: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책을 샀어요! 며칠전에도 그랬듯이, 지난주에도 그랬듯이..
그중 겹친 책이 있어 반갑습니다. 훗.
:)

잠자냥 2024-01-26 12:13   좋아요 0 | URL
저는 요즘 퀴폐들 지켜보는 재미에 책도 안 사고 있어요!!! (순기능ㅋㅋㅋㅋㅋㅋㅋ)

자목련 2024-01-29 09:15   좋아요 0 | URL
오늘도 책을 사실 것 같은!!
겹친 책은 언제나 반갑죠^^

망고 2024-01-26 1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집을 꾸준히 사고 읽으시는 자목련님. 시를 못 읽는 저는 그저 자목련님의 좋은 리뷰로 늘 대리만족을 하고 있습니다ㅜㅜ

자목련 2024-01-29 09:17   좋아요 1 | URL
시집에 대한 마음은, 알 수 없고 놓을 수 없는 그런 마음인 것 같습니다. ㅎ

2024-01-26 1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1-29 09: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얄라알라 2024-01-26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의 리뷰는 산문시라는 생각^^ [아무튼 책을 샀다, 처음인 것처럼.] 이 부분은 자목련님 책 내실 때 제목, 아니 최소 챕터 제목으로 쓰셔도 되실 것 같아요^^

자목련 2024-01-29 09:19   좋아요 0 | URL
얄라 님의 응원 같은 일이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날이 많이 풀린 것 같아요.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멀고도 가까운 -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 반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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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독자를 책 안으로 들어오게 만들고 어떤 책은 책 밖으로 보낸다. 어느 경우가 좋고 나쁘냐를 말하려는 게 아니라 책을 분류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안과 밖으로 자유자재로 이끄는 책도 있다. 리베카 솔닛의 책은 안과 밖을 자유자재로 이끄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멀고도 가까운』 를 읽으면서 그런 확신이 더 강해졌다. 이렇게 말하면 리베카 솔닛의 책을 많이 읽은 줄 알겠지만 나는 겨우 2권 읽고 계간지에 실린 글을 읽었을 뿐이다.


『멀고도 가까운』 은 우리에게 이야기가 왜 필요한지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에 왜 귀를 기울이고 들어야 하는지 말하는 책이다. 그것이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라 해도 결국엔 서로에게 다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나비효과가 아니라 우리 삶이란 그런 것이라고 말이다. 태어남과 죽음, 돌봄과 희생, 타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 이 모든 것이 현재를 살아가게 만든 가장 기본적인 힘이자 지탱해 주는 강력한 힘이라고.


누군가 그저 살구로 시작된 이야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 그저 살구로 시작된 이야기. 어머니가 살지 않는 어머니의 나무에서 따온 살구. 처지 곤란의 살구 더미. 솔닛의 살구가 누군가 김치로, 누군가 양말로, 누군가 책으로, 누군가 여행으로 바뀌고 확대된다. 그것이야말로 이야기의 힘이고 치유다. 그렇게 솔닛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나의 이야기를 꺼내게 만들고 그 이야기를 함께 나눈다. 아픔, 시련, 상처, 분노가 향하는 곳에는 공감과 연대가 있었다. 물론 그렇게 닿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솔닛과 어머니의 관계만이 아니라 나와 당신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이 그렇다.


나는 멀리 있었다. 나는 어머니를 연구하고, 파악하려 했다. 어머니의 풍경을 그려 보고 그곳에서 빠져나올 길을 찾는 일에 나의 생존이 달려 있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이야기에서는 영웅이다. 다른 이야기라는 무대에 우리를 세워 놓고 그렇게 작아진 스스로를 보는 것, 당신과 관련이 없는 세상의 광활함을 보는 것도 바라보기의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의 능력을 보고, 스스로의 삶을 만들어 나가고, 다른 사람의 삶을 만들고 혹은 그것을 부수기도 하며, 다른 사람에 의해 이야기되기보다는 우리가 이야기를 해 나가는 것이다. (50~51쪽)


가족이지만 가족보다 못한 사이를 그대로 방치하고, 왜 굳이 타인의 아픔을 들여다보고 이해하려 노력해야 하는지 알고 싶지 않음 마음, 그냥 그렇게 흘러가고 싶을지도 모른다. 나의 문제만으로 버거워 모든 게 다 귀찮을 지경이니까. 그러나 솔닛의 어머니 사이의 갈등, 남동생과 자신을 대하는 어머니의 태도, 아픈 어머니를 바라보는 마음을 읽다 보면 그것과 지독하게 닮은 우리를 발견하게 된다. 솔닛이 대단한 건 개인적인 것을 시작해 문학, 영화, 지리, 역사까지 매끄럽게 확장시킨다는 점이다. 어떤 이론이나 주장 없이 오직 글로써 그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 아무 의심 없이 그녀의 글에 감탄하고 빠져들게 된다.


우리가 책이라 부르는 물건은 진짜 책이 아니라, 그 책이 지닌 가능성, 음악의 악보나 씨앗 같은 것이다. 책은 읽힐 때에만 온전히 존재하며, 책이 진짜 있어야 할 곳은 독자의 머릿속, 관현악이 울리고 씨앗이 발아하는 그곳이다.(99쪽)





글쓰기는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두에게 하는 행위이다(…) 글쓰기는 전혀 모르던 사람에게 침묵으로 말을 걸고, 그 이야기는 고독한 독서를 통해 목소리를 되찾고 울려 퍼진다. 그건 글쓰기를 통해 공유되는 고독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눈앞의 인간관계보다는 깊은 어딘가에서 홀로 지내는 것 아닐까? 그것이 둘만으로 구성된 관계 일지라도, 말이 전하기에 실패한 것을 글이, 아주 길고 섬세하게 전할 수 있는 것 아닐까? (100쪽)


나는 그녀의 책이 그러하다고 말하고 싶다. 『멀고도 가까운』 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 살구를 모르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고 아이슬란드의 작은 섬에 대 생각도 하지 않고 그녀의 친구 앤이 만든 작품을 상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살구를 아는 사람이고 솔닛의 글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고 다른 이에게 이 책을 권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씨앗을 심을 수 있는 사람이며 나만의 이야기의 소중함과 그것이 갖는 힘을 믿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몰라서 실수하고 불경해지는 것에 대해 안도하다. 하지만 그것은 무책임한 생각이다. 타인의 고통과 상처는 어느 순간 내 것이 될 수 있고 감당해야 할 몫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에서 예외란 없다는 걸 우리는 아픔을 겪어야만 아는 무지한 인간이다. 그러니 배워야 하고 가르쳐야 할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솔닛이 감정이입에 대한 글을 그래서 더 좋고 훌륭하다.


어떤 감정이입은 배워야 하고, 그다음에 상상해야만 한다. 감정이입은 다른 이의 고통을 감지하고 그것을 본인이 겪었던 고통과 비교해 해석함으로써 조금이나마 그들과 함께 아파하는 일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이 어떤 기분일지 당신 스스로에게 해주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고통받아 마땅하다는 이야기, 그 사람 혹은 그런 사람들과 당신과 아무 상관없이 없다고 말하는 이야기들 때문에, 그런 감정이입이 차단될 수도 있다. (157쪽)


우리에게 필요한 감정이입을 생각하며 내가 누군가에게 어떤 감정이입을 차단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야 한다. 나와 동떨어진 삶이라고 여겼던 삶을 돌아봐야 한다. 고독을 즐기되 서로의 고독을 돌아봐 한다. 나의 아픔만 존재하고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실 이것은 꽤나 어렵다. 고백하자면 여러 차례 수술실 입구에서 두려움에 빠졌던 시간이 있음에도 나는 종종 그것을 잊고 별거 아니었다고 여긴다. 물론 나에게는 그렇다. 하지만 지금 수술실 입구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기억을 헤집어 그 두려움과 공포를 달래주고 괜찮다고 용기를 건네야 한다. 내가 아무에게도 건네받지 않은 마음이라고 해도 말이다. 나눌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이지 새삼 깨닫는다.


이제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어 버렸는데도 나는 멸종해 버린 과거의 어머니와 여전히 다투고 있고, 과거를 해결하고 싶어 하고, 과거를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어머니를 돌보는 일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너무 작아졌지만 여전히 내게 무언가를 가르쳐 주는 어머니를 나는 진심으로 걱정하고, 열린 마음으로 대할 수 있다. 과거의 어머니와 과거의 나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독특한 방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불러낸다. (339쪽)


솔닛의 글은 나의 그런 감각을 깨우고 나의 어머니와 큰언니를 불러왔다. 돌이켜보면 아쉽고 안타까운 시간들, 그러나 그녀의 말처럼 독특한 방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불러내는 일은 정녕 기껍다. 그녀의 책이 그런 역할을 해주었다는 사실도 말이다.


삶에도 우리는 무언가와 거리를 두고, 되돌아가고, 결심하고, 다시 시도하고, 멈췄다가 다시 출발하고, 그렇게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나아간다. 변화는 대부분 천천히 이루어진다. (259~250쪽)


똑같은 하루하루를 반복하며 지겹고 더디게 가는 삶은 얼마나 특별한가. 이 모든 게 우리의 이야기다. 나와 멀고도 가까운 당신의 이야기가 된다. 나만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당신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마쳤다. 감탄하고 감격할 준비를 말이다. 어딘가에서 당신은 어떠냐고 솔닛이 묻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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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4-01-25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솔닛의 글이 개인에게는 위로가 될 것이고 그것을 사회로 확장했을 때 연대의 힘이 될 수 있겠다 싶어요. 자목련님 말씀처럼 누군가에게는 살구로, 저에게는 김치로... 소중하거나 그리운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은 그만큼 독자의 기억과 예민한 감각을 깨울 줄 아는 저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리뷰 감사히 잘 읽었어요^^

자목련 2024-01-26 10:29   좋아요 0 | URL
이 책에서 솔닛의 글은 뜨개질을 하듯 하나하나 연결해서 하나의 다른 작품을 만드는 것 같았어요.
화가 님 덕분에 읽게 되었어요, 제가 더 감사해요^^
 
슬픔이 택배로 왔다 창비시선 482
정호승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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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집을 만나는 일은 즐겁다. 좋다는 건 개인적인 느낌이라서 함부로 쉽게 권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시집은 슬그머니 아무 데서나 펼쳐두고 싶다. 암송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가만히 오래 읽다 보면 마음에 새겨지는 시가 되기도 할 것이다. 나는 정호승의 이런 시가 정말 좋다.


실패는 나의 애인이다

결코 나를 사랑하지 않는 애인이다

나는 애인의 손을 잡지 않으려고

맨발로 도망쳐 왔으나 결국

애인의 손에 목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나는 전생에서도 실패했다

전쟁에서도 인간으로 태어나

불행으로부터 멀리 도망치는 일에

최선을 다했으나

결국 실패한데 무릎을 꿇고 울었다


실패한 뒤에는 꼭 비가 온다

우산을 펼치면 우산살 또는 부러져 있다

실패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실패했기 때문에 성공했다는

당신의 말을 나는 믿지 않는다


실패의 부고장은 오지 않는다

신문 부고란에 실패의 별세 소식은 없다

실패는 이제 나의 나다

사랑하지 않는 애인도 애인이다

실패한 사랑도 사랑이다 (「실패에 대하여」 , 전문)


아무렇지 않게 실패를 노래하는 시, 아무렇지 않을지 몰라도 우선은 그렇게 읽는다. 한 번 그렇게 읽고 두 번에는 실패를 뚫어지고 보고 실패를 놔주고 실패를 잊는다. 나의 실패에 대하여, 내가 실패라고 여기며 속상했던 것에 대하여, 그것이 정녕 실패인가 생각한다. 실패하면 또 어떤가, 실패했기에 실패를 알고 실패를 안고 실패를 사랑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리 실패를 노래해 보자.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아름답다고

이제는 내 뒷모습이 아름다워졌으리라

뒤돌아보았으나

내 뒷모습은 이미 벽이 되어 있었다

철조망이 쳐진 높이 시멘트 담벼락

금이 가고 구멍이 가 곧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제주 푸른 바닷가 돌담이나

예천 금당실마을 고샅길 돌담은 되지 못하고

개나 사람이나 오줌을 누고 가는

으슥한 골목길

담쟁이조차 자라다 죽은 낙서투성이 담벼락

폭우에 와르르 무너진다

순간 누군가

담벼락에 그려놓은 작은 새 한마리

포르르 날개를 펼치고

골목 끝 푸른 하늘로 날아간다

나는 내 뒷모습에 가끔 새가 날아왔다고

맑은 새똥을 누고 갈 때가 있었다고

내 뒷모습이 아름다운 때도 있었다고 (「뒷모습」 , 전문)


내가 뒷모습을 좋아하는 걸 아는 이는 가끔 나의 뒷모습을 사진에 담는다. 나는 모르는 나의 뒷모습, 나는 상상할 수 없는 그 뒷모습에 담긴 당신의 애정. 그래서 언제나 뒷모습을 노래하는 시는 반갑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그 뒷모습이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향해있는지 상관없이 말이다. 정호승의 시를 읽으면서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을 생각한다. 그는 분명 내가 사랑한 사람이다. 그는 분명 돌아보지 않던 사람이다. 가슴 한편 이 싸해지며 아프지만 그래도 뒷모습은 시는 아프지 않다.


찻잔을 들고 고요히

마음을 담지 못하고

찻잔을 떨어뜨렸네


하늘의 마음은커녕

차를 끓인 당시의 마음조차 담지 못하고

흘러간 마음을 찾아다니다가

그만 찻잔만 떨어뜨렸네


당신을 속이는 일이

나를 속이는 일인 줄도 모르고

내 일생은 당신을 속이는 일로 무척 바빴네


오늘도 찻잔을 듣고 고요히

먼 산을 찾아가

산새의 마음도 담지 못하고

찻잔을 깨뜨리고 돌아서 우네 (「찻잔을 들고」 , 전문)


어지러운 마음 때문에 혼란스럽다면 이런 시를 따라 읽다 보면 조금 고요해진다. 내가 좋아하는 고요, 닿을 수 없는 고요, 가질 수 없는 고요, 그래서 더 갈망하는 고요. 찻잔을 들지 않아도 차를 마시는 기분이다. 마음을 담을 수 있는 커다란 찻잔을 곁에 둔 것 같다. 얼핏 명상을 해야 할 것 같은 시, 두 손을 모아 찻잔을 받치는 순간 시와 하나가 된다. 그러나 끝내 돌아서서 울지는 않겠다는 다짐. 새로운 찻잔에 마음을 담고 말겠다는 다짐.


시간의 의자에 앉아 있으면

의자가 먼저 쓰러질 때가 있다

의자와 함께 땅바닥으로 굴러떨어질 때가 있다​

땅바닥에 쓰러지면 땅바닥에 쓰러지면 되고

땅바닥에 굴러떨어지면 땅바닥에 굴러떨어지면 되는데

사람들은 대부분 땅바닥이 되지 못하고

땅바닥에서 얼른 일어나

기어이 의자에 앉으려고 한다


땅바닥에서 고요히 찾아오는 흙냄새

작은 자갈 사이로 고개 내민 어린 풀들의 맑은 웃음소리를

땅바닥에 누워 있어도 듣지 못하고

얼른 의자에 앉자 의자가 되려고 한다


이제 시간의 의자에는

햇살보다 거친 폭풍우가 더 세차게 불어와 앉고

사랑보다 분노가 더 빨리 찾아와 앉고

상처와 증오의 마음이 더 오래 앉아 비켜주지 않는다


나는 아침마다 시간의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말을 먹다가 화장실에서 희망의 똥을 눈다

시간의 의자는 썩지 않는다

썩어가는 것은 의자에 앉은 인간일 뿐이다 (「시간의 의자」 , 전문)


이러니 이 시집이 좋을 수밖에 없다. 왜냐면 나는 의지도 좋아하니까. 좋아하는 것들을 생각하고 웃고 사유할 수 있는 시. 내가 만드는 시간이라는 의자, 나만의 의자, 나만이 앉을 수 있는 의자. 낡은 의자를 부수고 새로운 의자를 만들 때를 알아야 하는데, 망가진 의자를 붙잡는 미련한 짓은 그만두리라.


좋은 시를 읽는 시간은 완벽하다. 혼자여도 고독하지 않다. 오히려 시가 흐르는 시간이니 얼마나 충만한가. 한 권의 시집이 내어준 말할 수 없는 기쁨. 오래 담아둘 수 있는 시를 만나는 일은 언제나 반갑다. 그래서 자꾸만 당신에게 권하게 된다. 당신의 시간에 당신이 만든 의자에 이런 시집은 어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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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라탄이즐라탄탄 2024-01-22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히 보게 된 시인데 시가 참 담백하고 좋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자목련 2024-01-24 12:54   좋아요 1 | URL
즐라탄 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따뜻한 오후 이어가세요^^
 

힘겹게 읽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정말 힘겹게 읽은 것 같다.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도리스 레싱의 단편집 『19호실로 가다』 이야기다. 11편의 단편을 다 읽으면서 이전에 읽은 단편이 있다는 걸 알았다. 제목을 보고는 어떤 내용인지 몰랐는데 그 결말이 생각난 것이다. 나머지 10편은 처음 읽었고 그 가운데 가장 특별한 건 역시나 표제작인 「19호실로 가다」였다. 이 단편집에서 레싱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아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정체성과 자신만의 공간의 필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여성에게 말이다.


소설 속 1960년대가 아닌 현재와도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여성의 일과 공간은 여전히 중요한 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에 대한 관념이 달라졌지만 현실에서 결혼 후 경력이 단절되고 재취업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 언급하지 않아도 이미 다 알고 있다. 누군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해 보이는 결혼 생활을 하는 「19호실로 가다」 속 수전에게 묻고 싶을지도 모른다. 뭐가 부족하냐고. 당신은 넓은 저택에 건강한 아이들과 든든한 남편과 살고 있지 않냐고. 그러나 우리는 안다. 살다 보면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마주하게 된다는 것을. 수전과 매슈에겐 무엇이 필요했던 것일까.


두 사람이 “다른 것은 모두 이것을 위해”라고 말할만한 것이 없었다. ( 「19호실로 가다」 중에서)


권태로운 결혼 생활의 위기라고 하면 맞을까. 남편의 외도를 확인했기 때문일까. 아이들이 수전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지 않아서 그랬을까. 정원을 가꾸고 집안일을 하는 기쁨을 얻지 못해서 그랬던 것일까. 아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찾을 수 없다. 그것을 인정하고 알아야 한다. 우리는 수전이 아니지 않는가. 우리는 수전이 될 수 없다. 그러니 그녀가 가족들이 엄마의 방을 만들어주고 그곳에서 쉬라고 배려했을 때 그녀가 왜 그곳에서 오롯이 혼자임을 느끼지 못하는지 알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수전의 내부에서 일어난 복잡한 감정의 변화를 아무도 알 수 없다. 아내가 호텔에서 보내는 시간을 위해 돈을 지불하면 된다고, 설령 외도를 해도 눈감아주겠다는 식의 남편의 태도는 그녀의 감정이 별게 아니라는 무관심과 뻔뻔함이다. 수전은 아무렇지 않게 외도를 인정한다. 가상의 남자를 만들고 직업을 정한다. 호텔에서 아내도 엄마도 아닌 익명의 존재로 충분했던 수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19호실에서 보내는 그 시간이 수전에겐 필요했다. 철저히 혼자였으면 좋겠다는 수전의 말에 나도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겹쳐들린다. 40대인 수전이 느끼는 그 감정은 뭐라 불러야 할까. 고독이라고 하기엔 부족한 그것의 이름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녀가 선택한 죽음.


이 세상에서 철저히 혼자였으면 좋겠어요. ( 「19호실로 가다」 중에서)

그래, 난 지금 여기에 있어. 만약 다시는 식구들을 만나지 못하게 되더라도, 난 여기에 있을 거야……. ( 「19호실로 가다」 중에서)


그러나 나는 수전의 선택은 존중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 방법만이 그녀가 만족하는 유일한 것, 그녀를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한다면 수긍할 수밖에. 다만 수전에게 공감하면서도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족과 거리 두기, 상담, 같은 것.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싶기도 하다. 수전도 몰랐을 리 없다. 60년이 흐른 지금도 가부장제와 남성 중심의 사회와 문화가 여전할 걸 보면 말이다. 차별, 편견, 위선과 싸우며 고통받는 여성의 삶이 이어진다는 게 화가 날 뿐이다.



도리스 레싱의 소설을 읽으며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과 애거사 크리스티의 『봄에 나는 없었다』가 생각났다. 아무리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나만의 방을 갖는 일은 말이다. 일상을 벗어난 공간, 주기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어도 필요할 때마다 찾을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지지하고 격려할 이도 있어야 한다. 수전의 마음을 읽고 헤아리고 연대할 이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40대의 수전은 50대, 50대의 멋지고 당당한 수전으로 살지 않았을까.



애거사 크리스티 소설 『봄에 나는 없었다』의 중년 여성 조앤도 다르지 않다. 조앤이 느낀 공허. 어쩌면 애써 그것을 부정하며 살아왔을지도 모른다. 여행 중 의도하지 않게 사막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그녀는 달라질 것을 결심한다.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기 위해 돌아가는 거라고.





사막에 온 건 그것 때문이다. 이 맑고 무지막지한 빛줄기가 그녀에게 자신의 본래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그동안 외면했던 모든 진실을 보여줄 것이다. 사실은 그녀도 다 알고 있었던 모든 것을 보여줄 것이다. ( 『봄에 나는 없었다』 중에서)


그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이며 용기가 필요한 일인가? 소설 밖 현실에서 경력이 단절되고 재취업을 위해 다시 공부를 하는 이들을 생각한다. 제도적 보완과 정책이 간절하다. 소설은 그저 소설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19호실로 가다』 속 수전, 『봄에 나는 없었다』의 조앤은 그렇게 거울이 된다. 여성만 비추는 게 아니라 사회 전체를 비추는 거대한 거울.


우리에게 저마다의 19호실이 필요하다. 산다는 건 궁극적으로 나의 삶을 사는 것이다. 나를위해 사는 삶, 어떤 면에서는 이기적인 삶이 가장 행복하고 완벽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자신만의 방을 위해 비상금을 모으고 가족이 아닌 절 처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위해 애써도 괜찮다. 나를 아는 일, 나를 돌보고 알아가는 시간은 필요하니까. 나와 만나 원하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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