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미세먼지로 뿌연 날이다. 아파트에는 공사가 한창이다. 기회가 되면 이 공사에 대해서도 글을 쓸 수 있기를 바란다. 급하면 급한 공사라서 그런지 휴일에도 소음이 가득하다. 아무튼 공사는 진행 중이고 날씨는 조금 부드러운 표정으로 변했다. 표정 관리를 하려는 듯 내일은 비가 온단다. 비가 오면 미세먼지, 초미세먼지도 조금은 나아지겠지.


뿌연 기분을 걷어낼 책, 책 이야기는 언제나 즐겁다. 2월의 책에 이어 3월에는 이 책으로 충분하길 바란다. 그러니까 내가 구매한 책 말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모두 2월에 구매한 책이다. 이제 3월의 시작이니 3월에 사고 4월로 넘어갈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어떤 책인지 책 이야기를 하자.







출판사 <시간의흐름>에서 나온 책을 종종 산다. 어떤 작가의 산문이 나오나 살피고는 있지만 구매로 곧장 이어지지는 않는다. 이제니의 산문집이라서, 그의 산문을 읽은 기억이 없어서. 나만 안 읽었을 수도 있지만. 그래서 『새벽과 음악』이란 멋진 제목의 책을 샀다. 문진영의 장편은 최근 단편집을 읽고 다른 소설도 더 읽고 싶어서 검색하다 『딩』을 구매했다. 이미 읽었다. 좋았다. 많이 좋았다.


어쩌다 보니 자꾸 세계문학을 산다. 아, 어쩌자고 사는 것인가. 이러다 책장에 세계문학, 고전문학만 남을 것 같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산문 『이게 다예요』를 읽었지만(무척 얇은 책이라 읽었다고 하기엔) 그의 소설은 읽은 적이 없다. 영화 <연인>의 원작과 고민하다가 믿고 보는 분의 리뷰와 댓글로 이 소설이 더 좋다는 걸 보고 『태평양을 막는 제방』을 선택했다. 그리고 마지막은 솔 벨로의 『오늘을 잡아라』는 얇기도 하고 제목에 끌리고 평도 좋아서 샀다. 사실, 중고를 사고 싶었지만 중고는 찾지 못했다.


3월에 읽게 되기를 바란다. 2월보다는 이틀이나 많고 휴일도 이제 없으니까. 꽉 찬 날들에 알뜰살뜰 챙겨서 읽을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러려면 속도를 내야 하는데, 느릿느릿 거북이의 날들이다. 주변에 경주를 할 토끼가 있다면 좀 나을까 싶다가 토끼가 어마어마하게 많구나 싶다. 온라인의 책 모임, 책 리뷰만 생각해도 그렇다. 그럼 나는 그냥 내 속도대로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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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4-03-04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을 잡아라˝ 제가 좋아하는 책^^ ˝새벽과 음악˝은 정말 제목이 멋지네요.
자기 속도대로 읽는게 제일 좋죠 저도 느림보;; 봄이 성큼 다가온 3월! 자목련님 속도대로 여유롭게 독서하는 3월 되시길요😄

자목련 2024-03-05 15:58   좋아요 0 | URL
와, 정말요? 빨리 읽어봐야겠습니다^^
봄에는 꽃도 봐야 하는데...
망고 님, 마당의 싹들은 많이 자랐나요?

은오 2024-03-04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어쩌자고죠?! 사놔도 한국문학 위주로 먼저 읽으셔서 남는 건가요...?! ㅋㅋㅋㅋ
자목련님은 3월에도 알찬 독서생활 하실 게 이미 보입니다~!!

자목련 2024-03-05 15:59   좋아요 0 | URL
맞아요, 한국소설과 에세이 먼저 읽어서...
은오 님은 학교에 계실까요?
 

만약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면, 저는 기꺼이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몇몇 쓸데없는 사건들, 그러니까 자동차 사고들이나 병원 신세를 진 일들이나, 사랑 때문에 가슴 앓이를 했던 일들은 피하면서 말입니다. 하나 저는 아무것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제 대외적인 이미지나 전설, 그 안에 거짓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는 바보 같은 짓들을 좋아하고, 술을 좋아하며, 과속을 좋아합니다. 물론 제게는 그것 말고도 위스키나 자동차들만큼이나 수많은 취향들이 있습니다. 예컨대 음악이나 문학처럼 말이죠. (372쪽)


프랑수아즈 사강의 인터뷰집 『아무것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를 읽기 전 그동안 내가 읽은 그녀의 글을 검색해 보았다. 소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다고 그녀의 소설을 많이 읽은 건 아니었다. 첫 소설이자 대표작인 『슬픔이여 안녕』은 읽지 않았다. 그 소설의 내용에 대해 아는 것도 없다. 열아홉의 나이에 소설을 썼다는 정도만 알뿐이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인생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그런 이유로 『아무것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가 궁금했다. 그런데 그런 궁금증과 기대를 생각하면 진도가 팍팍 나가야 하는데 이상하게 그렇지는 않았다.


1954년부터 1992년 사이에 가졌던 인터뷰의 내용은 질문이 비슷한 것도 많았고(아, 당연한 것인가) 그러니 중복된 느낌의 답도 많았다. 내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내 느낌으로 사강은 솔직하고 유머를 좋아하고 유쾌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사강의 소설과 에세이만 읽었던 나는 그가 희곡도 쓰고 영화도 만들고 드라마도 썼다는 건 몰랐다. 그는 희곡과 소설에 대해 소설은 작가 자신이 더 많이 개입되기에 어렵고 희곡은 바깥을 향하는 장르라서 훨씬 쓰기 쉽다고 설명한다. 연극은 재미를 주고 소설은 열정을 준다고 말한다. 기회가 되면 그의 희곡을 읽어보고 싶다.






독자는 착각한다. 그러니까 소설에서 작가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소설 속 인물이 작가의 일부라고 여기는 거다. 아마도 많은 독자가 사강의 소설에서, 연애와 사랑에서 그것이 사강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라 결론지었을지도 모른다. 나도 비슷한 생각을 했으니까. 잘은 모르지만 사랑의 사랑은 인간에 대한 애정에서 확장된 것 같다. 친구를 좋아하고 함께 지내고 그들을 도와주는 사강의 마음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보인다.


사강의 말대로 그는 운이 좋았다. 물론 소설에 대한 비평가의 혹독한 비평이나 문학의 진정성에 대한 비하는 있었지만 사강은 그런 문제에 신경 쓰지 않았고 돈에 대한 부분에서도 풍족함을 누렸다. 술을 마시고 도박을 좋아하고 스피드를 즐긴 모습과 다르게 그녀는 차분한 분위기를 말하는 부분도 인상적이다. 독자가 안다고 느끼는 사강은 진짜 사강은 아닌 것이다.







저는 차분한 분위기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 제게 슬픈 일이 생겼을 때, 제가 마음의 안정을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과도함 속에 빠져드는 일뿐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피로함의 극단에서만 쉴 수 있고, 불안함의 극단에서만 안정을 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절망의 심연에서만 새로운 책을 쓰기 시작할 수 있지요. (171쪽)


이 인터뷰집에서 가장 중점적인 분야인 글쓰기에 대한 그의 생각은 단호하게 느껴진다. 글쓰기의 어려움이 분명 있을진대, 그것에 대한 구질구질한 변명 같은 것 찾을 수 없다. 있는 그대로 솔직하고 명확하게 말한다. 좋아서 쓴다는 것, 얼마나 당당한가. 글에 대한 사강의 생각과 정의는 정말 아름답고 멋지다.


제가 글을 쓰는 이유는 단지 글 쓰는 게 좋아서입니다. 그것은 악덕인 동시에 미덕이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이며, 쾌락으로 바뀌는 미덕입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대단히 내밀한 일입니다. (250쪽)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창조해 내기… 우리들의 모든 약점들, 지성과 기억력의 약점들, 마음과 취향과 본능의 약점들, 그것들이 마치 무기라도 되는 것처럼 한 군데로 모으기… 그렇게 모은 무기들을 돌격해 오는 ‘무’를 향해 우리 자신의 상상력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백지의 힘의 돌격을 향해 집어던지기. (285쪽)


사강이 좋아하는 프루스트와 생일이 같았던 사르트르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적이다. 사르트르와 보낸 시간, 그들은 서로의 책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고 바보 같은 농담을 주고받았다고. 실명이 된 사르트르와 식사를 하는 부분에서 사강은 그의 어머니가 된 느낌이었다고 전한다. 매력적이고 지적이고 유머가 많은 사르트르와의 관계, 사강은 그것을 사랑의 한 형태라고 말한다.


앞으로 사강의 소설을 읽을 때 아무것도 부인하지 않겠다는 사강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 어쩌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을 사강,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당돌할 정도로 직진한 사강, 산책을 학 사람을 보고 멍하게 있기도 하는 사강, 그리고 항상 담배 연기와 함께 한 사강을. 그러면서 소설 속 이런 문장이 사강이 삶을 대하는 태도가 아닐까 짐작한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상관없이 휘바람을 불며 하루를 시작할 것 같은 사강, 한 손에는 담배를 쥐고서 말이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나는 결코 심연을 좋아하는 그런 취향을 가지지 않을 거야.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나는 늘 아침에 짧은 사냥 노래를 휘파람을 불면서 잠에서 깨어날 거야. (『잃어버린 옆모습』, 94쪽)






아직 읽지 못한 사강의 소설이 더 궁금해진다. 지난 삶에 대해 후회는커녕 단호하게 기꺼이 자신의 삶을 껴안고 살아가는 당당하고 멋진 사강이 들려줄 사랑과 삶의 이야기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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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4-03-01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인용문 참 좋네요!
그런데 피로의 극단에서만 쉴 수 있고 불안의 극단에서만 안정을 취하다니.. 게다가 절망의 심연에서만 새 책을?? 책이 꽤 많던데..

자목련 2024-03-04 15:00   좋아요 1 | URL
사강에 대해 잘 모르지만 자신만의 가치나 신념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기도 하고요. 쓰는 일은 사강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졌어요.

책읽는나무 2024-03-01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강!
막 좋진 않아도 왠지 끌리는 작가로 다가옵니다. 인터뷰집은 작가를 더 가깝게 느낄 수 있겠군요?^^

자목련 2024-03-04 15:01   좋아요 1 | URL
맞아요, 꽂히는 작가는 아닌데 또 그냥 지나치지는 못하는. 인터뷰집은 그녀의 소설을 더 읽고 싶게 만들고요,

coolcat329 2024-03-02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랑스 여자들은 참으로 당당하고 솔직하고 자신을 한층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 거 같아요. 저돌적이고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모습이 저는 좀 부담스러워 그다지 관심이 없는 작가지만 그 자신의 캐릭터만으로도 문학계의 스타가 되기 충분한 사람인 건 확실하네요.

자목련 2024-03-04 15:03   좋아요 1 | URL
저돌적이고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딱 사강에게 어울리는 것 같아요.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던 걸 보면 스타는 스타였구나 싶어요.
 
눈물꽃 소년 - 내 어린 날의 이야기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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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다. 어떤 이는 지금보다 더 젊은 시절로, 어떤 이는 그리운 이가 존재하던 시절로, 어떤 이는 현재를 뛰어넘어 미래로 가고 싶을 지도 모른다. 그 모든 순간은 돌아갈 수 없기에, 닿을 수 없기에 그립고 애틋하다. 어쩌면 시인 박노해에게는 할머니와 아버지가 살아계시던 어린 시절인지도 모르겠다. 『눈물꽃 소년』은 시인 박노해가 아닌 어린 소년 박기평의 이야기로 순하고 맑고 시린 글이라서 울컥해질 수밖에 없다. 시인의 어린 날의 이야기를 읽노 라면 어느새 내 어린 날의 이야기를 꺼내고 싶어진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자신을 키워준 이들의 이야기를 말이다. 박노해 시인이 직접 그린 연필그림과 함께 짤막한 33편의 글은 우리를 모두 그 시절의 소년, 소녀로 이끈다.


“잘 몰라도 괜찮다. 사람이 길인께. 말 잘하는 사람보다 잘 듣는 사람이 빛나고, 안다 하는 사람보다 잘 묻는 사람이 귀인이니께.” (12쪽)


할머니의 심부름을 받은 어린 소년은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그 길을 간다. 만나는 사람마다 어디 가냐고 묻고 이것저것 말을 건넨다. 처음 가는 길이라 겁먹고 두려운 길을 물어물어 간다. 물어보면 된다고, 답하는 이의 말을 잘 들으면 된다고. 진한 사투리 가득한 그 시절을 나는 잠시 상상한다. 시골에서 자랐기에 소년 기평의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고백하자면 내 할머니는 그렇지 않았다. 할머니는 무서웠고 엄격했다. 기평의 할머니처럼 다정하고 손주를 위하는 분이 아니었다.


귀여운 기평의 일상을 쫓다 보면 웃음이 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내가 모르는 그 시대의 아픔이, 곳곳에 묻어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인생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사람들과 어울려 자랐는가에 따라 얼마나 달라지는지 알아서다. 그런 의미에서 소년 기평의 주변에는 사랑이 많은 어른이 많은 듯하다. 할머니, 부모님, 동네 어른들, 공소 신부님, 학교 선생님, 친구들까지. 꼬마 기평이 소년 기평으로 성장하는 과정은 한 편의 동화처럼 예쁘지만 마냥 아름다울 수 없다. 우리 삶이 그렇듯이.


아버지와 단 한 번의 기차여행이 마지막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할머니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형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아이들을 남겨두고 공장에 다녀야 했던 어머니.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흰 고무신이 소년을 기다렸다. 그 마음이 어떠했을지, 그 슬픔을 묵묵히 쌓아두었을 소년. 수업 시간엔 선생님께, 훈장 선생님께, 성당에서는 신부님께, 알 때까지 질문을 하던 소년. 선생님의 질타와 매에 부당함을 말하는 소년, 그 소년이 노동운동가, 저항 시인이 된 건 당연한 일이다. 형이 가져다준 시집을 읽고 시를 쓰는 모습을 상상하면 절로 흐뭇해지고 소년이 쓴 시를 읽으면 감동이 밀려온다.


폼을 잡고 시를 쓰다가, 홀로 웃고 울다가 책상에 엎드려 잠들던 그때. 그렇게 시가 내게로 왔고 그렇게 내가 시에게로 갔다. (159쪽)


고운 꽃이 피었다

높은 벼랑 끝자리에

나는 너무 작아서

까치발로 서 봐도

닿을 수가 없어

꽃들아 꽃들아

내 키가 자라기 전에

떨어지지 말아라 (191~192쪽)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시절, 들과 산이 놀이의 전부였던 굴곡진 현대사를 체험한 시인이 들려주는 이야기. 첫사랑 소녀와의 이별은 아프고 외갓집에서 본 자전거를 타고 싶어서 저금통에서 몰래 동전을 꺼내 자전거를 빌려타던 모습은 깜찍하다. 그 시대에 자전거 대여라니, 생각도 못 했던 부분이다. 그런가 하면 졸업식날 할머니와 단둘이 사느라 농사일을 하며 매번 꼴찌를 하는 친구에게 외상으로 국밥을 사주는 호기로운 소년. 중학교에 올라가 신문배달로 외상을 갚았다니 기특하고 대견하다. 그곳에 내가 있었다면 칭찬을 하고 꼭 안아주고 싶다.


“사람의 이름은 말이다. 저마다 깨끗한 비원이 담긴 것이고 이름을 부르면서 그 뜻을 알려주는 것이제. 네 이름대로 네 길을 걸어가면 이미 유명한 사람 아니냐. 다른 사람 이름 가리지 말고, 제 이름 더럽히지 말고, 자기 이름대로 살면 그게 유명한 사람 아니냐. 알겄느냐. 평아, 이 유명한 놈아!” (220쪽)


꿈에 대해 어떤 사람이 될까 고민하는 기평에게 훈장 선생님의 말씀은 지금의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말이다. 내 이름으로 반듯하게 성실하게 살라는 당부. 박노해가 들려주는 어린 소년 기평의 이야기는 결국 소년, 소녀의 시절을 지나 어른이 된 모두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빠르게 변하고 쉽게 잊고 쉬운 것, 새로운 것만 쫓는 우리에게 말이다.


어린 나를 품어 기른 이들은 나보다 더 힘들고 괴로운 시대를 견뎌냈다. 그들이 내 안에 살아있다. 그들이 내 안에서 말을 한다. 우리는 그 모든 걸 품은 위대한 역사적 존재다. 아무리 오늘이 힘들어도, 다시 고난이 닥쳐와도, 그래도 우리는 살아왔고 그래도 우리는 살아갈 것이다. (「작가의 말」, 247~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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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4-02-26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 이름대로 살면 유명한 거라는 말씀!! 좋네요. 기억해 둬야겠어요^^

자목련 2024-02-28 15:04   좋아요 0 | URL
그죠? 그런 의미로 독서괭 님의 이름을 불러드립니다.
독서괭 님!!
 
마고 - 미군정기 윤박 교수 살해 사건에 얽힌 세 명의 여성 용의자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1
한정현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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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사라지면, 너에게로 갈게.” (186쪽)


한정현의 『마고』는 궁금한 소설이 아니었다. 단편을 읽은 기억은 있지만 한정현이 어떤 소설을 쓰고자 하는지, 그가 소설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까 한정현의 산문 『환승 인간』을 읽기 전에는 말이다. 산문을 읽고 그의 장편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마고』를 만났다. 제목 『마고』는 한국 신화에서 여신, 거인신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마고를 뜻한다. 여신에 대한 이야기일까 싶었지만 '미군정기 윤박 교수 살해 사건에 얽힌 세 명의 여성 용의자'란 부제를 보며 추리소설이 아닐까 살짝 기대했다.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추리소설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소설은 광복 직후 혼란스러운 한반도를 배경으로 윤박 교수의 살인 사건으로 시작된다. 미군정이 시작된 시대 범인은 미군이었다. 그러나 미군 입장에서는 그 사실은 밝혀져서는 안 되었고 다른 용의자가 필요했다. 사건 당인 윤박 교수와 같은 공간에 있었던 세 명의 여성이 용의자가 된다. 세 명의 용의자는 잡지 편집장 선주혜, 과거 식모였고 술집 여성이었지만 지금은 가정주부인 윤선자, 윤박 교수의 조교이자 신인 소설가 현초의는 안타깝게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종로경찰서의 검안서이자 '세 개의 달'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는 여성 탐정 연가성은 문화부 기자 권운서와 함께 사건에 연루된 세 명의 여성에 대해 추적한다. 가성과 운서는 오랜 친구 사이로 서로를 위해 전부를 내어줄 수 있는 사이다. 둘은 사건이 일어난 장소인 호텔 포엠의 사장 에리카를 만나 당시 상황과 세 명의 여성에 대해 묻는다.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에리카는 세 여성과 윤박 교수의 관계와 행적에 대해 애매모호하게 답한다.


미국의 지원을 받아 유학을 다녀오고 대학 강의와 문단에서 권력을 행사했던 윤박 교수와 세 여성, 그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하나씩 진실이 드러날수록 윤박 교수의 추악한 본성은 밝혀진다.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그들을 착취하고 협박한 사실이 세 여성에게 충분한 살인 동기가 된다. 세 명이 협공해서 윤박 교수를 죽였다 해도 무방할 정도다.


범인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소설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세 명의 여성을 비롯한 여성의 삶에 집중하면서도 일본이 사라지고 그들에게 충성했던 이들의 고스란히 미국을 향해 복종하는 역사의 모습도 조명한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축이 되는 가성과 운서의 사랑을 시작으로 동성과 이성으로 규정된 사랑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이야기다. 여성의 사랑이자 소수자의 사랑이며 미군정기의 지배와 폭력의 이야기, 시대에 저항하고 고발하는 모두의 이야기인 것이다. 폭격으로 인해 살아남을지조차 의문인 시대에 아이를 구하려는 여성의 모습.


“이곳에 만약 신이 있다면 그 신은 남자이고 좌익이거나 우익일 테죠. 여성과 아이와 노인의 목숨 따윈 안중에도 없겠죠. 이 조선 땅에서 저 순교 같은 거 안 합니다.” (129쪽)


나는 그 시대를 알지 못한다. 그건 한정현도 마찬가지다. 한정현의 소설을 통해 나는 조금이나마 그 시대를 상상하고 기록으로 남지 못한 삶을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정현이 소설에 대해 들려주는 작가의 말은 남다르게 다가온다.


작중 세 개의 달은 이 소설 속 세 명의 용의자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조금씩 모양이 변하며 종내는 하나의 원형을 만드는 달처럼 이 세계 속 모든 소수자, 약자들의 연대하는 얼굴이기를 바라며 써넣었다. 강렬한 태양에 맞서지는 못할지언정 늘 우리 곁에, 서로의 곁에 있는 그런 모습으로 말이다. (「작가의 말」, 211쪽)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는 뻔한 말로는 위로할 수 없는 이들의 사랑이자 삶이다. 여자로 태어났지만 남자로 살고 싶었던 가성과 반대로 남자로 태어났지만 여자로 살고 싶었던 운서의 사랑은 시대가 바뀐 현재에도 흔쾌히 인정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서로를 위하고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로 충분할 텐데. 우리에겐 여전히 연대와 공감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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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보고 리뷰를 남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나중에 한 번 더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책에 대한 글을 마주할 때마다 소설로 꼭 읽어보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소설을 읽은 건 정말 잘한 일이다. 아름다운 산문시 같은 소설,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게 되는 문장들, 가만히 눈을 감고 내가 알지 못하는 그곳을, 내가 닿을 수 없는 그곳의 공기와 냄새를 상상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에 누가 반하지 않겠는가.


습지는 늪이 아니다. 습지는 빛의 공간이다. 물속에서 풀이 자라고 물이 하늘로 흐른다. 꾸불꾸불한 실개천이 느릿느릿하게 배회하며 둥근 태양을 바다로 나르고, 수천 마리 흰기러기들이 우짖으면 다리가 긴 새들이 ㅡ 애초에 비행이 존재의 목적이 아니라는 듯 ㅡ 뜻밖의 기품을 자랑하며 일제히 날아오른다. (13쪽)




그러나 그곳의 어린 소녀 여섯 살의 카야를 생각하면 마음이 시려온다. 떠난 엄마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소녀, 조디 오빠까지 떠나고 아빠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조심 행동하는 소녀, 모든 걸 혼자 감당해야 하는 소녀 카야가 어떻게 살아게 될지 걱정이 돼서다. 그러니 이 소설은 카야의 성장을 담은 소설이자 홀로서기로 볼 수 있다. 그렇게 보자면 1960년대 미국의 노스캐롤라이나의 습지를 배경으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인물들 속에서, 그러니까 백인 우월주의와 습지에 사는 카야에겐 그게 가능할까 싶기도 하다. 아무리 소설이라 할지라도 소설을 읽다 보면 저절로 그 시대의 문화와 관습에 가까이 다가갈 수밖에 없다.


카야는 습지에 산다는 이유로, 여자라는 이유로, 아예 관계를 단절하고 자신을 혐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으로 나가기를 거부한다. 어린 소녀에게는 모든 게 무섭고 두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카야는 자포자기하지 않는다. 혼자만의 방식으로 자신을 지키고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한다. 엄마가 돌아올지 모르는 집을 지키며 외부인이 찾아올라치면 용케 숨어버린다.


가끔 알 수 없는 밤의 소리가 들려오고 코앞에 내리꽂힌 번개에 소스라쳐 놀랄 때도 있었지만, 카야가 비틀거리면 언제나 습지의 땅이 붙잡아주었다. 콕 짚어 말할 수 없는 때가 오자 심장의 아픔이 모래에 스며드는 바닷물처럼 스스르 스며들었다. 아예 사라진 건 아니지만 더 깊은 데도 파고들었다. 카야는 숨을 쉬는 촉촉한 흙에 가만히 손을 대었다. (49쪽)


홍합을 따서 필요한 물건을 사고 요트의 기름을 채우고 자신을 품어주는 습지에서 깃털과 조개껍질을 모으며 살아간다. 카야를 아끼고 돕는 이도 있었다. 홍합을 사주고 교회에서 옷과 신발을 가져가 카야에게 주는 흑인 점핑 아저씨와 메이블 아줌마, 그리고 테이트. 자연에 대해, 요트를 운전하는 법에 대해 카야에게 알려준 조디 오빠의 친구 테이트.


그는 카야에게 깃털로 마음을 전하고 천천히 다가왔다. 단 하루 학교에 갔던 카야에게 글을 가르쳐 주고 책을 가져다준다. 둘은 금세 서로를 향한 마음을 확인하고 사랑에 빠진다. 테이트는 카야의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고 미래를 약속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를 외면할 수 없다. 대학에 가야 하고 그동안은 카야와 떨어져지내야 한다. 돌아올 것을 굳게 다짐하지만 테이트는 끝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테이트도 자신을 떠났다는 사실에 카야는 절망하고 자신만의 세계로 깊게 들어간다.






그런 카야에게 바람둥이 체이스가 다가오고 결국 그와 사귄다. 달콤한 말로 결혼을 약속하고 멋진 집을 지어주겠다는 체이스는 카야를 농락하고 버린다. 카야는 예전처럼 혼자가 된다. 카야 곁에는 갈매기와 바람과 버섯과 자연뿐이다. 여전히 카야를 사랑하는 테이트는 학업을 마치고 고향 근체 연구소에 취직하고 카야를 찾는다. 자신을 거부하는 카야에게 용서를 구하고 카야가 습지에서 수집하고 기록한 것들을 출판할 수 있도록 돕는다. 자신의 책을 낸 카야는 집을 고치고 여유로운 생활을 이어간다. 책 덕분에 자신을 떠났던 조디 오빠가 집을 찾아와 재회한다. 카야가 습지를 떠나지 않았기에 둘은 만날 수 있었다.


이 소설은 카야의 성장에 관한 아름다운 소설만은 아니다. 체이스의 시체가 등장하는 것으로 시작하기에 범인을 밝히는 추리소설로 볼 수도 있다. 소설은 현재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과 카야의 어린 시절을 교차하며 이어지는데 예상했듯 카야는 범인으로 지목된다. 세상의 시선에 체이스를 죽인 범인은 카야였고 카야여야만 했다. 영화는 소설과 다르게 카야가 재판을 받는 과정을 집중해서 보여준다. 20미터 망루의 난간에서 떨어져 죽은 체이스, 카야와 체이스가 다투는 모습을 본 증인들, 체이스의 옷에서 발견한 붉은 털실이 카야의 모자의 것과 같다는 증거로 검사는 카야를 용의자로 지목한다. 그러나 그 시간 카야는 출판사의 편집자를 만나기 위해 마을을 떠나 있었다. 카야는 적극적인 방어를 하지 않는다. 변호사만이 강력하게 증거에 맞선다. 재판이 끝나고 카야의 울부짖음에 가까운 말은 모두를 아프게 한다.


“난 한 번도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았어. 사람들이 날 미워했어. 사람들이 날 놀려댔어. 사람들이 나를 떠났어. 사람들이 나를 괴롭혔어. 사람들이 나를 습격했단 말이야. 그래, 그 말은 맞아. 난 사람들 없이 사는 법을 배웠어. 오빠 없이, 엄마 없이! 아무도 없이 사는 법을 배웠다고!” (434쪽)


카야는 그저 혼자 모든 것을 배우고 익혔다. 누구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았고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카야를 폭력과 따돌림으로 무시하고 괴롭혔다. 1960년대가 아니라 지금이라면 어떨까? 습지의 소녀를 우리는 어떻게 대할까. 그 당시 사회와 얼마나 다르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카야의 슬픔과 고통을 헤아리는 이는 그와 같은 외로움을 아는 흑인 점핑 부부밖에 없었다. 카야가 기댈 곳은 카야 곁으로 날아오는 갈매기, 은은하고 찬란한 빛을 품은 습지, 그 자연이었다.





아름답지만 슬픈 소설이다. 서정적이지만 아픈 소설이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어디일까? 문득 궁금해진다. 카야가 카야답게 살 수 있는 곳. 카야가 자유롭고 편안하게 숨 쉴 수 있던 그곳, 별이 된 카야는 지금 그곳의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 같다.


카야는 조수간만처럼 확실한 이런 자연적 과정의 일환으로 살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녀만큼 이 지구라는 별과 그 속의 생명체들을 끈끈하게 유착되어 살아가는 사람은 찾기 힘들었다. 흙 속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대지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나서. (4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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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2-16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저 이 책 독서괭 님이 선물해줬는데........

독서괭 2024-02-16 11:59   좋아요 0 | URL
읽겠다고 했었는데…

잠자냥 2024-02-16 12:17   좋아요 1 | URL
읽기는 할 거라던데....

자목련 2024-02-16 14:26   좋아요 0 | URL
혹 주말에 읽을지도...

잉크냄새 2024-02-16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13의 내용이 영화의 첫 내레이션 부분 같네요.
영화도 영상미가 좋았는데 소설 또한 아름다울것 같아 읽고 싶게 만드네요

자목련 2024-02-16 14:26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프롤로그의 처음이기도 하고요.
영화도 나쁘지 않았지만 소설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레삭매냐 2024-02-16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년 전에 읽었을 때, 리즈 위더스푼이
영화 만들기 시작했다고 들었는데
어느새 영화로도 나왔나 보네요.
구해서 한 번 보려구요.

슬펐던 소설로 기억합니다.

자목련 2024-02-16 14:28   좋아요 1 | URL
영상미가 뛰어난 영화였어요. 영화도 좋았고 소설도 좋았어요,
소설 쪽으로 살짝 기울어요.
넷플릭스에서 봤는데 아직 있지 않을까 싶어요. 저도 한 번 더 보고 싶은 영화입니다.

독서괭 2024-02-16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리뷰가 참 좋아요^^
영화에서는 카야가 저렇게 소리를 치는군요? 소설에서는 그런 장면 없지요? 어떤 자기변호도 안 했던 것 같아요. 그게 더 카야에게 어울리지 않나 싶네요.
저는 소설 먼저 읽고, 이미지가 깨질까봐 영화는 안 봤는데, 영화보다 소설이 더 좋았다고 하시니 다행(?)입니다 ㅎㅎ

자목련 2024-02-19 17:06   좋아요 1 | URL
소설이 더 좋았는데, 영화도 괜찮았어요. 저는 다시 돌려서 보는 장면이 있었어요.
독서괭 님의 리뷰도 이 소설을 읽게 만든 이유였어요. 감사해요^^

steal0321 2024-02-29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플레이리스트에 넣어 두기만 했는데, 자목련님의 후기를 읽으니 당장 읽고, 보고 싶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자목련 2024-03-04 15:39   좋아요 0 | URL
즐겁게 읽으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