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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것들
앤드루 포터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평점 :
한 번 먹은 마음이 달라질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마음은 변할 수 있다는 걸 몰라서가 아니라 믿음과 관계에 대해서 말이다.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는 유연함이 삶이며 그게 필요하다는 걸 몰랐던 것이다. 그러니까 20~30대에는 말이다. 2년마다 건강 검진을 받을 때마다 긴장하고 두려울 거라 그때는 짐작했을까. 늙어간다는 게 어떤 건지 피부로 느낄 수 있다고 생각이나 했겠냐는 거다. 내가 도달한 나이에도 삶은 여전히 어렵고 알 수 없는 게 많다는 사실을. 그래서 이런 소설을 만나면 오랫동안 연락이 닿지 않았던 친구를 만난 기분이 든다.
앤드루 포터의 소설을 읽으면서 선명하게 떠오르는 몇 장의 사진과 기억들. 몇 달 전 정리하다 발견한 사진을 친구에게 문자로 보냈더니 친구는 “오래전이네” 란 답을 보내왔다. 오래전 내 곁에 있던 친구와 머리 염색에 대해 건강에 대해 농담 어린 대화를 나눈다. 아무렇지 않던 그 사실이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친구는 알까. 아마 모를 것이다. 나도 몰랐으니까. 앤드루 포터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으니까.
같은 지역의 같은 학교를 다니고 곳곳을 어울려 다니며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술을 마시고 좋아하는 배우에 열광하며 영화를 보던 시절. 그 시절을 추억하기에는 여유가 없고 삶의 일선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소설 속 주인공의 모습은 애틋한 동질감을 불러온다. 그들은 모두 사십 대로 학생을 가르치고 영화나 음악 등 예술에 관련된 일을 한다. 직장에 매여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그것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다. 가정을 이루고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무게 때문만은 아니다. 중년의 나이라는 게 그렇듯 선뜻 어느 시절로 돌아갈 수 있는 용기도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 나서기도 두려운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뭐라 불러야 할까.
예전과는 다른 것에 몰두해야 하고 나 아닌 가족이나 연인에게 집중해야 한다. 친구들과의 만남에서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아무 말 없이 슬그머니 자리를 떠나 집으로 돌아오는 「오스틴」의 나가 겪은 감정들. 아내와 아이들을 바라보며 드는 생각들.
예전에 지녔던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혹은 버려두고 떠나왔다는 느낌이 늘 있었다. 이런 기분을 아내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눈을 감고 다시 쇼팽 음악에 집중했다. 이제는 다른 곳이었다. 녹턴. 섬세한, 서정적인, 부드러운( 「오스틴」, 21쪽)
밤중에 자다가 깨어 뒷마당을, 세탁실을, 차고를 확인하는 일, 이상한 소음의 정체를 알아보는 일, 창문을 단속하고 잠금장치를 더 단단하게 세우는 이런 일. 이것이 우리가 들어온 새로운 세상, 우리가 꾸기 시작한 새로운 꿈의 일부가 되었다. 그런데도 가끔은 그 굼에 균열이 생기는 때가 있었다. 과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는, 그 다른 삶이 살짝 윙크를 보내는 때가 있었다. ( 「오스틴」, 24쪽)
누군가 마치 자신의 감정을 들킨 것 같아 움찔할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나만 그런 게 아니라며 안도할지 모른다. 괜히 적적해지고 서글퍼질지도 모른다. 산다는 건, 나이를 먹는다는 건 어떤 다양성에서 점차 줄어드는 무언가를 마주하는 일이며 선택에 있어 주저하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연인, 가족, 동거인의 감정에 무뎌지고 비밀 아닌 비밀을 간직하는 것, 대단한 비밀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공유하지 못하고 혼자만 간직하고 싶은 이상한 마음.
그런 마음을 예술 단체에서 일하는 아내 칼리와 말이 프로젝트 진행이지 백수로 지내는 나와 아파트 아래층에 거주하는 이십 대 후반의 여자 히메나의 관계를 그린 「히메나」 속 부부에게서 만난다. 서른여덟 동갑 부부에게 히메나는 특별한 의미로 존재한다. 아내나 남편과는 나눌 수 없는 대화를 할 수 있는 상대, 그러면서도 베일에 싸인 것 같은 히메나를 통해 부부가 찾고자 했던 건 무엇일까.
어떤 나이가 되었을 때 선명하게 보일 것 같았던 삶은 오히려 살면 살수록 불투명 그 자체라는 걸 알려준다. 뭔가 잃어버리고 결국 사라지게 만든다. 그것을 인정할 수 없어 분노하고 통곡한다. 어떤 관계가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음을 받아들지 못해 고통스럽다. 과거의 내가 아니듯 상대도 그때의 그가 아니라는 걸 깨달음은 항상 뒤늦게 도착한다. 어디 마흔세 살뿐일까? 그 이후의 시간이 와도 미래를 아는 건 불가능하다.
참 이상한 일이다. 마흔세 살이 되었는데 미래가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다니, 삶의 어느 지점에 잘못된 기차에 올라타 정신을 차려보니 젊을 때는 예상하지도 원하지도 심지어 알지도 못했던 곳에 와버렸다는 걸 깨닫다니. ( 「라인벡」 , 127쪽)
사라진 친구의 집을 친구의 연인과 정리하는 표제작 「사라진 것들」에서도 마찬가지다. 가장 친한 친구가 실종될 거라 상상하겠는가. 오늘이 아니더라도 내일 연락을 하면 나중에 만나면 된다고 여기며 살아간다. 어느 순간 사라져 영영 볼 수 없는 존재가 된다는 걸 누가 믿겠는가. 그러니 죽은 친구의 연인과 같이 수영장 물 위에 뜬 채로 보내는 반 시간은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이기에 그 자체만으로 소중한 것이 된다.
모든 것은 사라지고 돌아갈 수 없는 순간이며 앞으로 살아갈 시간도 사라질 거라는 자명한 사실. 도저히 알 수 없는 불가해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진실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