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목 박완서 아카이브 에디션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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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 때 내일이 오지 않을 꺼라 생각한 적이 없다.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날들이 있었을 뿐. 평범한 일상이 한순간 무너지고 살아가는 이유를 찾지 못하는 이에게 내일은 어떤 의미일까. 살아있기에 살아가가는 일은 고통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나목』의 ‘나’도 그랬을까. 전쟁이라는 폭력을 견뎌내며 폐허와 함께 살아가는 일을 지금을 사는 이는 알 수 없다.


미 8군 PX 아래층 초상화부에서 일하는 ‘나’는 미군을 상대로 초상화 접수와 가격을 흥정한다. 환쟁이에게 업무를 배분하고 독촉한다. 지루할 정도로 반복된 일상에 새로운 환쟁이 ‘옥희도’씨가 들어온다. 똑같이 미군 애인의 초상화를 그리는데 그는 달라 보였다. 물론 ‘나’에게 관심을 주는 남자는 따로 있었다. 전기부에서 일하는 ‘태수’였다. 태수는 적극적으로 호감을 표했고 ‘나’는 그게 싫지 않았다. 그러나 태수와 옥희도 둘 중 한 명을 꼽으라면 태수는 아니었다. 태수와 관계는 약간의 밀당 같은 것이라면 옥희도와는 자석 같은 끌림이었다. 옥희도도 ‘나’의 마음을 알고 ‘나’를 향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옥희도는 ‘나’를 아끼는 사람이었다. 아내가 있고 5명의 아이가 있다는 사실이 아니었어도 그는 ‘나’를 사랑하는 일을 멈추었을 것이다.


옥희도는 그런 사람이었다. 스물한 살 나의 마음을 어루만지면서도 적절한 거리를 두었고 그 마음의 끝을 맺을 수 있는 사람. 스물한 살인 ‘나’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솔직하게 옥희도에게 전한다. 아파서 일을 나오지 못한 그를 병문안을 핑계로 찾아가면서 아내와 아이들을 만나면서 그 안에 같이 있기를 바란다. 누군가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옥희도 같은 사람은 잊고 태수를 생각하라고 말할 게 분명하다. 어쩌면 옥희도를 사랑한다고 믿는 ‘나’의 착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금지옥엽으로 자신을 아꼈던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 여동생을 챙기던 오빠 둘의 부재가 만든 감정 말이다.


전쟁이 아니었다면 경험하지 않았을 감정이다. 피난을 갖다 돌아온 오빠들은 다락에 숨어지냈다. 계동의 고가에는 ‘나와 어머니만 살고 있어야 했다. 전쟁의 날들이었지만 숨어지내는 오빠들과 어머니가 있기에 두려움은 없었다. 큰아버지와 사촌 오빠의 방문이 있기 전까지. 네 명이 거하기에 다락은 좁았고 ‘나’는 오빠 둘의 거처를 옮기자고 제안했다. 거처를 옮기고 폭격으로 오빠들은 죽음을 맞았다. 자신 때문에 오빠 둘은 죽고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죄의식은 일을 마치고 계동의 고가로 오는 시간을 늦추었다. 실질적인 가장이 되었는데 어머니는 죽은 아들들만 붙자고 사느라 살아있는 딸은 봐주지 않았다. PX에서 돌아온 경을 환대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얼마나 추운지, 얼마나 무서운지 묻지 않았다. 부서진 고가 그 자체였다.


때문에 ‘나’는 퇴근 후 하릴없이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을 같이 보내고 견뎌준 이가 옥희도였다. 약속을 하지 않아도 장난감 가게 앞에서 만났다. 옥희도에게 어머니와의 갈등이나 고민을 털어놓은 적은 없지만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전쟁이 앗아간 삶을 그 역시 살아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돈벌이로 초상화를 그려야 해지만 화가로써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번뇌하며 말이다. ‘나’는 옥희도의 고독과 고통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옥희도가 그린 그림을 보고 죽은 나무, 고목으로만 보았으니까. 그의 아내를 책망하고 질투했을 뿐이다.


나는 그들의 삶에 다가갈 수 없다. 박완서가 세밀하게 담아낸 미 8군 PX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쓸쓸하고 황폐한 거리를 가득 채운 상념과 전쟁의 상흔이 남은 계동의 고가의 풍경을 그려볼 뿐이다. 그러나 주인공 ‘나’ 스스로 알 수 없는 감정들은 조금 알 것 같다. 어머니를 향한 원망과 한 번이라도 자신을 안쓰럽게 봐주기를 바라는 간절함, 자신을 사로잡는 우울과 죽음, 반대라 삶에 대한 열망과 욕구를 느낄 수 있었다. 소설 곳곳에서 빛나고 눈부신 문장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늙고 초췌한 어머니와 젊고 싱그러운 ‘나’의 모습, 한순간의 불꽃처럼 화려하게 타오르고 싶은 마음에 호텔로 향한 ‘나’의 마음, 요란하게 움직이는 장난감 침팬지의 몸짓을 무기력하게 바라보는 ‘나’와 옥희도의 눈빛.


죽고 싶다. 주고 싶다. 그렇지만 은행나무는 너무도 곱게 물들었고 하늘은 어쩌면 저렇게 푸르고 이 마당의 공기는 샘물처럼 청량하기만 한 것일까. 죽고 싶다. 살고 싶다. 죽고 싶다. (315쪽)


팽팽하게 대립한다고 여겼던 어머니와의 갈등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끝난다. 나의 반항적인 외박이 불러온 결과였을까. 약을 먹고 의사를 불러도 소용없었다. 어머니가 죽고 고가에 나 혼자 남았다. 그리고 나의 곁에는 태수가 있다. 시간이 흐르고 중년의 ‘나’는 남편 태수와 함께 고인이 된 옥희도의 전시회를 찾는다. 그곳에서 마주한 그림.


내가 지난날, 어두운 단칸방에서 본 한발 속의 고목古木, 그러나 지금의 나에겐 웬일인지 그게 고목이 아니라 나목이었다. 그것은 비슷하면서도 아주 달랐다. (390쪽)


나목에게는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봄에의 믿음. 나목을 저리도 의연하게 함이 바로 봄에의 믿음이리라. (391쪽)


박완서가 그려낸 소설 속 인물들은 전쟁을 살아내느라 삶이 파괴되고 부서졌다. 자신을 괴롭히는 고독과 싸우고 어찌할 수 없는 시대와 싸우고 버텼다. 잎이 지고 가지만 남은 앙상한 나무(裸木)처럼 살았다. 박완서 작가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부서진 삶이라고 해서 포기하지 않았다. 봄을 향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박완서 작가는 소설을 통해 폐허의 삶에서 발견한 한 가닥의 희망을 말한다. 시대는 다르지만 부서지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고독하고 외로운 이들에게, 곧 봄에의 믿음이 있다는 걸 알려준다. 1970년에 발표한 『나목』이 육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빛을 발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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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설은 읽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고 어떤 소설은 읽었다고 착각한다. 박완서 작가의 『나목』도 그런 소설이었다. 읽은 건 같은데 내용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박수근 화가, 한국전쟁, 그 정도만 생각났다. 읽었다고 하면 제대로 읽지 않은 것이고 읽지 않았다고 하면 방송이나 지인이 언급한 내용에 읽었다고 여긴 것이다. 읽고 있는데 읽은 것 같다. 그러니까 제대로가 아닌 대충인 것이다.


대학 때 교양 국어 수업을 들었다. 강사가 박완서 작가를 닮은 분이셨다. 그 수업이 좋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학점과는 상관없이 말이다. 친구는 아이가 어렸을 때 도서관에서 책을 많이 빌렸다. 종종 통화를 할 때면 책 목록에 대해 말하곤 했는데 당시 친구가 빌린 목록 가운데 박완서 소설이 있었다. 초등학생용 도서였다. 나중에 통화할 때 『나목』에 대해 물어봐야겠다. 친구는 제대로 읽었을 것 같다. 대신 내게는 『나목에 핀 꽃』이 있다. 좋아하는 동생이 선물한 책인데 시간의 두께가 가득하다. 이 기회에 다시 읽어봐야겠다.







매년 의식처럼 구매했던 젊은작가상을 올해부터는 수상작품 가운데 읽은 소설도 있어서 사지 않기로 했는데 읽고 싶은 작가의 단편이 있어 구매했다. 김멜라와 김남숙 소설만 읽을 것 같다. 다른 소설은 작가노트만 읽을지도 모른다.


카뮈의 에세이를 읽은 기억이 없다. 카뮈의 에세이 『결혼·여름』도 이번 여름에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실은 녹색광선에서 나온 『결혼·여름』를 구매하고 싶었는데 가격을 생각하며 미뤘는데 이번에 책세상에서 나온 걸 보고 구매했다. 예쁜 건 녹생광선의 책이 진짜 예쁘다. 덥다. 조금이 아니라 제법 많이 덥다. 읽는 즐거움이 더위를 잊을 수 있게 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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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6-17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나목 갖고 싶게 만들었네요.
요즘 드라마 ‘졸업‘ 보고 있는데 고등학교 국어에 박완서 작가의 작품을 가르치더군요.
가끔 국어 교과서도 좀 훑어봐야겠구나 싶더군요.
나목은 저도 읽었는데 내용이 기억이 안 나네요.ㅠ

자목련 2024-06-19 10:22   좋아요 0 | URL
네, 정말 예쁩니다. 읽는 맛이 좋다고 할까요.
국어 교과서 본 기억이 없는데 궁금해지네요.
 
우리의 여름에게 에세이&
최지은 지음 / 창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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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눈을 감는다. 그리는 얼굴이 있다. 그려지지 않는다. 떠오르지 않는다. 형체도 없는 얼굴, 그러나 선명하다. 가만히 세 글자, 당신의 이름을 불러본다. 최지은의 『우리의 여름에게』를 읽을 때는 몰랐다. 읽고 나서 나는 읽는 내개 그 얼굴을 그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여름에 돌아가신 엄마였다. 소소한 일상의 기쁨이나 환한 웃음 대신 무겁고 피곤한 낯빛이 전부였던 얼굴. 그러나 내가 모르는 얼굴이 있을 것이다. 내가 모르는 수줍음과 설렘 말이다. 우리가 보낸 여름에도 그런 날들이 조금은 있었을 것이다.

어떤 이의 부재는 강력하다. 끝내 다른 것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부재를 인정하는 노력도 할 수가 없다. 인정하는 순간 삶이 무너져내릴까 두려워서. 하지만 어느 순간 그 모든 건 자랑이 될 수 있다. 나의 유일한 자랑, 삶을 지탱하는 자랑, 시인 최지은의 글은 그런 자랑이었다. 오래 듣고 싶은 당신의 자랑이었다. ‘당신의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란 박준 시의 한 구절처럼 말이다.

가장 가까운 이를 떠나보내고 살아가는 일은 상실과 나란히 걷는 일이다. 때로 어깨동무를 하고 발을 맞추고 때로 상실을 부축하거나 상실에게 기대며 걷는 일. 어린 나이게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나의 어린이는 그걸 조금 일찍 감당했다. 할머니의 얼굴에서, 큰아버지가 주신 탕수육에서, 선생님의 화난 말투에서. 그러니 저자의 마음속에 자리한 어린이는 열한 살이 넘도록 할머니의 품에 안겨 머리를 감으면서도 할머니의 걱정이 되면 안 되었다.

어디 하나 모날까 봐 조심스럽게 그러나 강단 있게 들려주는 저자의 이야기는 맑은 동그라미 같았다. 조금씩 커져도 절대 터지지 않을 힘을 지닌 동그라미라는 게 느껴졌다. 기억의 시작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엄마,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 부재가 익숙했던 시간을 채우던 불안.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할머니의 돌봄과 보살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든든한 사랑이었다. 그 사랑은 자랑이었다. 우주 같은 사랑. 그 사랑을 딛고 앞으로 나간다. 슬픔을 바라볼 힘을 키우고 슬픔이 지나간 자리를 비추는 햇빛을 발견하다.

슬픔을 슬픔으로 바라보는 시간이 지나가면, 슬픔만으로 끝나지 않는 무언가가 오는지도 모르겠다. 그 무언가 때문에라도 슬픔은 슬픔으로 두고 싶다. 언제든 슬플 요량으로 이불 끝을 조금 더 끌어당겼다. 날이 밝으면 이 빛을 기억하며 씩씩하게 나가 걷자고 생각하면서. 한번 더 이불을 끌어당겼을 땐 처음 보는 햇빛이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63쪽)





어른이 된 후에 마주한 엄마, 아버지, 할머니, 큰 언니의 죽음이 가져온 상실과 부재는 나의 슬픔의 근원이 되었다. 슬픔의 그물에 빠져지내기도 했다. 저자는 어땠을까. 알 수 없는 어떤 마음이 담긴 글을 읽으며 헤아려본다. 읽다가 가만히 멈추고 읽다가 눈물을 흘리고 읽다가 대견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어진다. 저자의 마음속 어린이를 다정하게 안아주고 싶다. 그러다 금세 글을 읽으며 위로받는다. 특히 이런 글 앞에서 큰 위로를 받는다. 무거운 수박을 굳이 들겠다며 결국엔 수박을 깨트린 다섯 살 어린 손녀를 혼내는 게 아니라 쪼개진 수박을 붙여 모은 할머니. 두부와 콩나물을 사 오라는 할머니의 심부름.

할머니라면 이럴 때 나에게 어떤 심부름을 줄까. 어떤 말을 들려줄까. 할머니의 해답을 상상하면 조금 덜 속상해지는 마음이 있습니다. 두려움도 미움도 잊어버리고 ‘문득 다 괜찮다, 그럴 수 있다’ 하게 되는 마음이. 그러니 매일 아침 현관문을 나서며 상상합니다. 저 방에서 할머니가 나와 오늘 나에게 하나의 심부름을 준다면 무얼까?

ㅡ기쁘렴. 기쁘게 집으로 돌아오렴. (117~118쪽)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 막막함을 느낀다. 혼자 해결해야 할 일이라는 걸 알지만 누군가 붙잡고 하소연하고 싶다. 그럴 때 나는 큰언니를 생각한다. 이상하다. 엄마가 아닌 큰언니라니. 큰언니라면 어떨까. 어떻게 했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저자가 할머니가 어떤 심부름을 줄까 생각하는 것처럼. 기쁘게 집으로 돌아오라는 심부름. 큰언니는 마지막 순간에 행복하라고 말했다. 무엇을 하든 행복하라고. 행복이 우선이라고.

엄마는 초여름에 떠났고 큰언니는 막바지 더위와 함께 떠났다. 여름은 사랑하는 이의 부재를 더욱 확실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모든 게 성장하는 여름처럼 나 역시 여름을 먹고 살아간다. 술이나 길고 긴 대화에 의지하며 잠들었던 과거의 여름이 지나고 쌓여 고유한 여름밤의 기쁨을 안다. 여름에 물든 상처가 만들어 낸 삶의 풍경을 기억한다. 저자가 스스로를 돌보고 더 깊게 사랑하는 여름. 저자의 할머니와 아버지가 죽은 후에도 저자를 돌보러 오는 것처럼 나의 그들도 그렇다는 걸 느낀다. 저자는 그 사랑과 돌봄 덕분에 슬픔과 상처와 결핍은 채워졌고 아무런 조건 없이 선물을 주는 기쁨으로 나누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변했다. 내 마음은 달라졌다. 어린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다. 지금의 나는 어린 내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서로 달라졌다. 틈이 생겨버렸다. 구멍이 생겼고 어둠이 오갔고 바다가 출렁이고 그 위로 파도가 오고 또 갔다. 엉뚱한 구멍을 파기도 했고 어둠을, 바다를 손에 쥐려고 힘껏 애쓰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지금의 내가 됐다. (126쪽)

읽을 부분이 줄어드는 게 아쉬운 책이다. 가볍고 가뿐하면서 힘 있는 아름다운 글이다.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작은 바람을 감출 수 없다. 『우리의 여름에게』는 나누고 싶은 여름이 되었다. 여름이면 생각날 책이 되었고 여름이면 그리울 감정이 되었다. 우리가 지나온 여름과 앞으로 살아갈 여름이 얼마나 환하고 빛날까 기대한다. 어떤 여름은 지독해서 무릎이 꺾이고 주저앉아 빨리 지나가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뜨거운 여름의 열기를 식혀줄 한 줄기 바람이 함께 할 여름이라는 믿음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여름에 보태는 마음을 지키는 마음이 있어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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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있다. 슬프다, 아프다, 그립다, 이런 말로 정리하기 어려운 감정 말이다. 저마다 고유한 감정은 결과 폭이 다르다. 같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같은 이름으로 부른다. 같은 질량으로 판단하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딱히 고민하지 않았다. 사느라 바빠서 내면을 들여다볼 여유가 없어서, 뭐라고 불러야 좋을지 생각나지 않아서, 이유는 많다. 그런 복잡하고 엉킨 감정을 하나씩 풀어 이름을 붙인 이가 있다. 『슬픔에 이름 붙이기』의 저자 존 케닉이다. 감정이라는 거대한 가지에 붙은 잔 줄기에 이름을 붙이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것을 정리한 내용이 바로 이 책이다. 쉽고 단순하게 말하자면 신조어 사전이다.


슬픔에 이름 붙이기란 제목처럼 슬픔에 국한된 내용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숱한 감정들, 고독한 순간들, 내밀한 심연과 마주하는 순간을 새로운 단어로 설명한다고 할까. 여섯 장에 걸려 외부 세계, 내적 자아, 당신이 아는 사람, 당신이 모르는 사람, 시가의 흐름, 의미의 추구까지 주제별로 모은 300여 개의 단어를 만날 수 있다. 신조어 사전답게 그가 만든 단어는 어원에 대한 설명이 더해진다. 가령 이런 것이다. 슬립 패스트(slipfast)는 형용사로 어원은 slip + fast다. 뜻은 세상에 참여하지 않고도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전혀 발자국을 남지 않고도 사람들의 대화 속을 자유로이 헤맬 수 있게.


존 케닉의 설명을 읽고 나면 아마도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어떤 일에 개입하지 않고 그냥 지켜보게 되는 그런 순간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물론 이건 나의 생각일 뿐이다. 생각해 보면 이처럼 어떤 단어는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지만 똑같지 않을 수 있다. 어느 연인은 “사랑해”란 말 대신 둘만의 신호로 특정 숫자를 언급하기도 하고 “고요해”란 말로 대신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 이 책은 자유로이 해석될 수 있다.







영어로 만든 단어,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이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없다고 여길지도 모르다. 맞다. 그러나 가만히 이 책의 신조어를 하나하나 읽다 보면 깊은 밤 누구에게 들킬까 혼자만 돌아보았던 순간의 감정이나 막연하게 이해받고 싶었던 감정이 스쳐지나는 걸 느낄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낄 법한 감정의 순간이 겹쳐지기 때문이다. 여러 해 동안 알아온 누군가에게도 개인적이고 신비한 내적 삶이 존재한다는 깨달음이란 그노시엔느(Gnossienne)라는 단어를 만났을 때 그랬다. 짐작했듯이 에릭 사티의 피아노곡 제목에서 차용한 단어다. 사랑하는 연인이라고 해서 다 알 수 없다. 전부를 알고 싶지만 전부를 아는 일은 불가능하다.


우리 사이에는 늘 어떤 거리감이 존재할 것이다. 어쩌면 견유학파의 말이 맞는지도, 사랑은 그저 환상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성스러운 종류의 환상일지도, 아이들을 인도하기 위해 나타나는 파랗게 빛나는 신들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렇다고 믿기만 한다면, 그것은 힘을 지닌다. 그리고 그거면 충분하다. (137쪽)


그럼에도 더 알고 싶은 마음이 이런 신조어를 만들어내는 게 아닐까.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싶고 조금 더 상대의 슬픔이나 아픔을 이해하고 싶은 간절함에 말이다. 그런 마음 조각들이 프로젝트란 이름으로 모여 이런 사전이 되었다. 사실 이 책에 대해 말하는 건 어렵다. 한국어가 아닌 외국어라는 점에도 그렇지만 직접 읽었을 때 와닿는 기분이나 분위기를 제대로 전달할 수 없기에. 문득 떠오른 건 전시 같은 형태로 소개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책엔 단어를 표현한 콜라주 작품이 있기 때문이다. 앞서 끌렸던 단어 Gnossienne엔 이런 작품으로 만날 수 있다.






날씨 따라 마구 달라지는 감정, 계절마다 뒤바뀌는 감정, 그때의 감정을 획일적인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는 건 삭막한 일이다. 시대에 따라 유행하는 말이 다르고 같은 말인데 세대에 따라 다르게 사용된다. 그뿐인가, 어떤 말은 사멸한다. 그런 점에서 존 케닉의 이런 프로젝트는 의미 있다.

아마도 특정 단어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그 단어에 반하게 되거나 반가움을 표할지도 모른다. 한국어로 번역해 사용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내 안의 감정을 정리하여 이름을 붙이고 싶은 욕구를 느낄지도 모른다. 하나의 감정에 대해 고유하고도 차별적으로 펼쳐놓는다고 할까. 결코 같을 수 없는 무게의 슬픔 혹은 감정에 이름을 붙인다면 어떨까. 존 케닉의 이 책처럼 나만의 시를 쓰고 사전을 만들어봐도 좋을 것이다. 남다르고 각별하게 기억될 책이다.


단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왜곡되고 변화하면서 시대에 뒤처지거나 새로운 의미를 띠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단어는 겉으로는 제자리에 고정된 듯한 모습을 보이며 우리의 삶에서 우리를 달래주는 존재로, 우리가 길을 잃었다고 느낄 때마다 의지할 수 있는 무언가로 남는다. (292~293쪽)


독특하고 특별한 『슬픔에 이름 붙이기』을 읽다 보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책이 있다. 바로 이 책을 추천한 김소연의 『마음사전』이다. 김소연의 『마음사전』은 제목 그대로 마음사전이다. 나도 모르는 나의 마음, 알고 싶지만 단단한 문으로 가로막힌 당신의 마음을 향한 두드림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바람결에 달라지기도 하는 감정의 상태, 숨어버린 마음, 속이 상해 울컥한 기분을 달래주는 글의 집합체! 전부를 다 소개하고 설명하지 않아도 이런 단어로 충분하다.


은은한 것들은 향기가 있고, 은근한 것들은 힘이 있다. 은은함에는 아련함이 있고, 은근함에는 아둔함이 있다. 은은한 것들이 지닌 아련함은 그 과정을 음미하게 하며, 은근한 것들이 지닌 아둔함은 그 결론을 신뢰하게 한다. 은은한 사람은 과정을 아름답게 엮어가며, 은근한 사람은 아름답게 맺는다. (「은은하다: 은근하다」, 전문)


「은은하다: 은근하다」를 읽는다. 마음과 감정의 이름을 불러주면 그것들은 진정 선명한 형태를 지닌다. 명확하게 내게로 온다고 할까. 은은하고 은근한 사람을 생각한다. 그는 향기를 지닌 사람,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서는 빛이 난다. 그 빛은 멀리서 알아볼 수 있도록 환하고 아름답다. 어렵겠지만 은은하고 은근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성찰하는 고독의 시간을 통해 단련하는 사람.


다른 책으로 김신식의 『다소 곤란한 감정』이다. 모두에게 같은 감정을 강요할 수 없고 타인의 감정을 섣불리 예단해서도 안 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감정 비평이라고 말하고 싶다.


타인의 감정 상태에 이름 붙이기가 심해지면 어찌 될까. 당신의 하루. 본인의 감정을 굳이 해석하고 싶지 않은 상태로 자신을 자신을 잠시 내버려두고 싶은 날. 그러나 누군가는 당신의 심적 상태마저도 어떤 감정이라며 이름 붙이려 한다. 감정에 관해 스스로 무無의 상황에 놓이고 싶은 싶은 시공간을 확보하기란 점점 어렵다. 감정에 관한 무의 상황도 특정한 감정임을 확인하려 드는 시도 때문에. (『다소 곤란한 감정』, 212쪽)


하나의 현상에 대해서 모두가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사회적 이슈에 대해 언론이나 전문가의 말을 들으며 그들의 감정에 휩쓸리곤 한다. 그들과 다른 감정을 표출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할까. 다른 감정을 소유할 수 있고 다른 의견을 낼 수 있어야 한다. 개개인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그 안에서 다양한 감정을 읽어내는 일은 중요하고 필요하다.


나의 슬픔에 이름을 붙이는 것처럼 타인의 슬픔과 감정에도 내가 모르는 이름이 있을 수 있다. 서로의 이름을 알려주고 불러주는 일, 위로와 회복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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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6-16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딴 얘긴데 마음사전을 쓴 김소연 작가가 시인겸 건축가인 함성호 씨와
부부지간이더군요. ㅎ

자목련 2024-06-16 17:11   좋아요 1 | URL
네, 함성호 씨의 산문을 통해 알게 되었어요. 시인과 소설가 부부, 소설가 부부도 많더라고요.
 
가까이, 그녀
왕딩궈 지음, 김소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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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말할 때 세상은 고요해진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나와 당신, 둘 사이에만 고유한 침묵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말할 때 세상은 요란해진다. 나와 당신의 관계를 알리고 싶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고요하고 은밀하면서도 끝나지 않을 소란으로 가득하다. 처음 만난 왕딩궈의 장편소설 『가까이, 그녀』는 은밀하고도 고요한 사랑으로 다가왔다. 십 대 때 대만 유수의 문학상을 휩쓴 작가가 절필 후 20년 만에 쓴 장편소설이라고 한다. 내게 큰 의미가 되지 않는다. 『가까이, 그녀』란 제목과 꽃으로 입을 가린 표지가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가까이, 그녀’란 누구일까. 짐작대로 아내일까, 아니면 가까이 있지만 다가갈 수 없는 그녀일까. 아니면 사랑과는 무관한 그녀일까. 입을 가린 꽃은 무엇 의미하는 것일까. 말하지 못할 사정이 있다는 걸까.


소설은 작년에 57세의 생일을 맞은 남자, 그러니까 올해 58세인 화자인 ‘량허우’가 들려주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자신의 근황을 담담하게 들려준다. 량허우는 감옥에 있다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신혼부부인 아들의 집에 잠깐 있다가 따로 나왔다. 아들 ‘뤠이슈’와 사이는 좋지 않다. 량허우가 감옥에 간 이유, 어머니의 죽음 때문이다. 그렇다. 아내가 죽었다. 나는 아내가 무척 그립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량허우’는 자신의 이야기와 자신을 둘러싼 여자들에 대해 들려준다. 현재 자신의 주변에 가장 가까이 있은 며느리와 간병과 살림을 봐주는 아윈이 있다. 물리적으로 가까울 뿐 소원한 사이다. 기억 속 어머니와 누나. 그리고 시계점에서 일할 때 가게에 들어온 아내, 늦은 나이에 대학에 들어가 짝사랑한 종잉. 그녀들 가운데 가장 궁금한 건 스물한 살에 만난 아내 쑤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작가는 쉽사리 그녀의 부재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공들여 아주 천천히 들려주기로 작정한 것 같다.


어려운 가정 환경으로 일찍 시계점에 일을 한 사정과 군 복무를 마치고 대학이 아닌 시계점으로 돌아온 사연. 놀랍게도 감옥에 찾아온 종잉과 편지를 주고받은 내용까지 상세하게 전하지만 쑤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다. 그 편지를 통해 차별받은 어머니와 누나에 대한 애틋함과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자신의 부끄러움을 전한다. 그가 살아온 시대, 아니 그 가까이의 그녀들의 삶은 억눌림이 있었다. 가족과 사회는 그녀들을 억압했다. 아내 쑤도 그랬다. 아버지와 오빠들의 폭언과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출했다. 종잉도 다르지 않았다. 학생운동을 하는 남자친구를 위해 헌신했고 결혼했지만 결국 이혼했다. 그녀들의 삶은 없었다.


어쩌면 쑤는 돈과 권력을 쥐고 흔드는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마음으로 량허우와 결혼했을지도 모른다. 쑤가 사랑한 사람은 브라질로 이민을 간 남자였으니까. 하지만 량허우는 달랐다. 쑤를 사랑했고 그녀를 위해 뭐든 할 수 있었다. 안타깝게 그 방식을 몰랐다. 쑤가 바라보는 세상과 그가 바라보는 세상의 간극이 컸던 것일까. 그것은 아들 ‘뤠이슈’로 이어졌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어떤 설명도 하지 않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다. 가족으로 살아온 시간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경험한 바에 의하면 돈을 지불하고 시계를 산다고 해서 시간을 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시계를 착용하지 않아도 모두와 똑같은 시간을 공유한다. 유일한 차이점이라면, 시계를 착용함으로써 갖게 되는 일종의 완전성에 있다. 그건 마치 부드러운 미소가 얼굴에 광채를 더해주는 것과 비슷하달까. 그런 게 아니어도 시간은 살 수 없다. (202쪽)


소설에서 시계점과 시계가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량허우에게 삶의 공간은 집보다는 시계점이었고 그곳에서 아내 쑤를 만났기 때문이다. 쑤가 아버지에게 가출 후 자신의 삶을 잘 살고 있다는 의미로 선택한 롤렉스 시계와 스위스 장인의 마지막 작품으로 량허우가 아내에게 선물한 스위스 시계는 특별하다. 아내는 떠났지만 그 시계를 통해 그녀와의 시간을 간직할 수 있기에. 아마도 많은 이들이 그런 이유로 시계를 선물하는 게 아닐까.


엉킨 실타래 같은 삶을 풀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엉킨 부분을 싹둑 잘라내면 그만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엉킨 부분을 푸는 동안 실로 무엇을 짤까 계획할 수도 있다. 잘라냈으면 존재 불가능한 계획. 량허우가 종잉에게 편지를 씀 자신의 삶을 돌아본 시간이 그렇다. 아들에게 변명이나 변호를 하지 않았던 것도 아들이 엉킨 부분을 찾아 풀기를 바랐기 때문은 아닐까.


상대로 인해 고통을 느낀 적이 없다면 그건 진정으로 사랑이 없었다는 의미다. 아는 것도 없지만, 또 무엇이든 잃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251쪽)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쑤의 삶이 곧 나의 삶이기에 죽음 역시 나의 죽음이라는 것. (281쪽)


량허우의 삶과 사랑처럼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소설이다. 쑤의 죽음에 대한 궁금증은 끝까지 독자를 몰입하게 만든다. 잘 짜인 소설이다. 쑤를 향한 량허우의 사랑은 애절하고 애처롭다. 사랑의 소리와 몸짓을 조금만 키웠더라면 좋았을 텐데. 량허우가 되어 가까이에 있는 그녀들과 마주한다. 가만히 그녀들을 생각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삶을 선택하고 살아온 그들이다. 도움을 받을 이가 없어 안타까운 시절을 살아낸 그녀에게 가만히 손을 내밀어 본다. 입을 가린 꽃을 치우고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량허우가 사랑한 쑤의 목소리, 지금 곁에 있는 종잉의 목소리를 상상해 본다. 종잉과 량허우가 사랑을 말할 때 세상은 고요하고 은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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