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부르는 숲 - 미국 애팔래치아 산길 2,100마일에서 만난 우정과 대자연, 최신개정판
빌 브라이슨 지음, 홍은택 옮김 / 동아일보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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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부르는 숲』을 보건데 '빌 브라이슨'은 에둘러 말하길 좋아한다. 그게 그러니까 심각한 상황에서도 특유의 낙관적인 자태(?)를 잃지 않으려는 모습이 독자인 나에게 선하다. 확실히 그에게 성급함은 손해를 불러온다. 그의 행동은 미래의 어느때 경제적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가 유머와 위트를 지닌 채 어떤 위급함을 넘겼다면, 후에 나올 그의 책에선 좋은 소재거리가 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그의 익살맞은 행동은 경제적 가치를 불러온다. 마치 DNA에 새겨진 것 같다. 유머가 있어라. 너에게 지폐 몇 장을 내려보내줄 테이니.

언젠가 읽어야지 하는 책들중에 『나를 부르는 숲』은  리스트 제일 위쪽에서 나름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젠 내가 읽은 책 리스트의 제일 아래에 위치한다. 이번 여름은 나에게 '빌 브라이슨'을 느낄 때이다. 재미도 없는 세상, 어디서 키득거리며 한가로움을 느낄 수 있겠는가. 항상 읽어야지 하는 책이었지만 그 내용은 아무것도 몰랐다. 그냥 숲에 들어가서 야영하고, 등산하면서 새삼 자연의 위대함과 변덕사이를 왕복하는 그런 책인줄 알았다. 방금 적은 이 말이 얼마나 무책임한 말인지 이 책을 보고서야 알 수 있었다. '그냥 숲'이라니. 도시 한쪽에 밀려나 있는 작은 '그냥 숲'도  보이지 않는 역사가 있을 것이다. 가령 나의 먼 먼 조상들이 재난을 피해 몸을 숨겼다든지, 아니면 보릿고개를 이겨낼 수 있는 작은 풀뿌리라도 대접을 해주었던지 말이다.

'숲'의 정체를 알고나서 사실 소름이 돋았다. "이봐. 어느 누가 3,400Km가 넘는 산맥을 숲이라 불러~~." 책 몇 장 펴들고 든 생각이다. 이 산맥이름은 '애팔래치아 산맥'이다. 중학교땐가 고등학교때 어느 수업에서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다. 사실 이건 무슨 '오호츠크 해 기단'만큼이나 나에게 거리(존재하고 있다는 인식조차  하지 않았다면 그 거리감도 느끼지 못할때지만...)가 있는 이름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나의 뇌세포 몇개를 할당해가며 저장해놓은 걸 보니 단순한 세포의 낭비는 아닌 듯 싶다. 마치 목말라 죽어가는 뇌세포에 물 몇방울  떨어뜨린 기분이다. 책을 읽고 재밌어서 친구에게 책 이야길 해 주었는데, 이 친구는 '애팔래치아 산맥'을 모르더라. 뭐 모를 수도 있지.

책속에 등장하는 재밌는 사람이 또 있다. 이 책의 저자 '빌 브라이슨'과 애팔레치아 트레일을 같이 종주한 친구이자 잠시동안 동반자였던 '카츠'라는 인물인데, 이 사람이 이 책에서 얼마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냐면 이 책의 '장르'를 바꾸게하는 거룩한 힘을 지닌 존재라 봐도 무방하다. '빌 브라이슨'도 유머스러운 사람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은 '카츠'가 옆에서 '빌'에게 자신을 관찰당하게 하고, 때로는 빈정거리게도 해주고, 때로는 '빌'을 성자로도 만들어주고, 떄로는 '빌'을 공황상태로도 빠지게 해주고, 때로는 '빌'에게 친구이자 동반자로서의 가치가 얼마나 귀중한 것임을 일깨워주는데 있어서 한 몫 톡톡히 하는 친구라는 점 때문이다.  그런데 종주 도중 둘이 잠시 헤어지고 저자인 '빌' 혼자 등산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때 책의 장르가 잠시 바뀐다. 무척 교훈을 준다. 물론 잠시 교양서적을 보고 있는 착각도 들며. 그렇다고 부정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 부분은 이것대로 흥미있다.

암튼, 책 머리에 저자가 '당연히 카츠에게 바친다'라는 땡스투 문구는 이 책을 읽어가며 절감한다. '카츠'는 숲을 돌아다니며 혹 만날지도 모를 '곰'만큼이나 긴장감을 준다. 곰이 할일을 이 친구가 대신 해준다.

이 책은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당장 배낭을 싸서 떠나!!'라는 강력한 환청을 들려준다. 또 환청만큼이나 강력한 추억을 꺼내준다.

' 아.. 그때 그 겨울 지리산의 햇살은 정말 달콤했지. 날씨는 추워서 모든 것을 얼려버렸지만, 그 때 그 햇살만큼 감미로운 것도 없었지. 또 어느 해 겨울 한라산은 어땠어. 눈속에 푹푹 파묻히며 걷는 그 길. 조금 걷고서야 알았지. 발 아래에 채이는 것이 눈 속에 묻혀버린 길 안내하는 봉이라는 사실을. 또 어느 해 여름 지독한 가뭄이 지리산 자락에 자리를 피고 꿈쩍도 하지 않을 그 무렵, 곳곳의 샘이 말라버려 분명 지도에 있을 샘이 증발했을때 그 당혹감이란 정말. 또 예기치 않게 도중에 만난 한방울씩 떨어지는 샘을 만난 그 기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대충 이런 추억속 기쁨과 고난을 증폭시켜 되살려준다. 더불어 등산 당시 스쳐지나간 모든 동,식물 예를들어 잠자리, 까마귀, 개나리(맞나?) 등등 이 모든것들에게 존재의 이유를 부여해주는 관대했던 당시의 나로 돌아보게도 만든다. 저자인 '빌'의 경우 만나지 못했던, 하지만 종주 당시 꽤나 오랫동안 머리속에서 들러붙어 공포감을 선사해준 곰에게 오히려 살아서 숲을 나가야 하는 존재의 이유를 부여받긴 하였지만.

이렇듯 이 책은 저자의 추억+ 나의 추억을 섞어준다. 산에서 만나서 눈인사하고 몇마디 건냈던 같은 시간대 산 속에 있던 얼굴 모르고 이름 모르는 사람들한테 마저도 야릇한 그리움과 궁금증을 느끼게 해준다. 물론 저자의 경우엔 예의없는 산사람들도 있었고, 시끄러운 사람들도 있었지만.

올 여름에는 '빌 브라이슨'의 또 다른 책들도 들어야겠다. 다른 책속엔 무슨 이야기가 있을지 궁금하다.

한마디 더, 삶의 기운이 메말라가거나 세상의 혼란속에서 길을 잃어 배회하고 있을 영혼들에게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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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선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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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스포일러를 피해가려 노력은 했지만 사소한 몇가지는 드러난 듯 싶습니다. 하지만 이런것들은 책의 표지에 설명되어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책을 읽지 않은 분들도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될 듯 싶기도 한데, 물론 결말의 대한 스포일러는 없지만, 그래도 신경쓰인다면 무조건 넘어가길 권고합니다.

얼마전에 일본 도쿄의 아키하바라에서 무차별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인터넷에서 접한 이 뉴스에서 슬프지만 흥미롭기도 한 부분이 살인자의 성장과 관련한 보도였다. 그는 결국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것이다. 지극히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차츰차츰 네트워크의 링크를 끊어버리며 보이지 않게 되었다. 또 이번 범죄의 다른 속성으론 예고 살인이라는 것도 등장했다. 일본 미디어는 가정문제에서부터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까지 그의 하나하나를 분석하였다. 이런 행위는 잘못된 사회적 메커니즘으로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한 오작동 감지에 대한 노력의 일환일 것이다. 일어난 것은 또 일어나기 마련이다.

네트워크에서 하나의 노드 혹은 객체는 다른 것들과 실타래같이 연결되어있다. 문제는 오작동을 일으킨 부분의 네트워크를 고쳐야는데 완벽히 고칠 수 없다는데 모든 이가 동의할 것이다. 오직 링크를 끊어버리는 역할뿐이 할 수 없다. 리셋이란 사실 우리의 군집에서 일어날 수 없는 행위이다(하지만 비슷한 의미로 갱생 혹은 개화라는 말을 쓴다). 그렇다면 격리뿐이라는 소리인데.. 이는 또 다른 메커니즘의 시작일 수 있다.


주말에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의 책을 읽었다. 이 책은 두권으로 되어있는 『검은 선』이라는 작품이다.

내가 추리소설이나 스릴러물을 읽고 항상 생각하는 것이지만, 특별히 작가가 말하고 싶어하는 소설속 주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어떤 스토리로 전개되느냐가 아니라 스토리가 보여주는 재미이다. 재미가 없다면 사실 책읽기는 곤혹스럽다. 물론 이러한 스토리가 주는 재미위주의 독서 또한 또 다시 작가의 의미부여라는 소설속 주제로 회귀되는 경향이 있는것은 사실이지만 작가의 재능이 바탕이 깔려있지 않고서야 꺼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장르물을 애독하는 독자에게 좋은 작가는 우리에게 교훈이 아니라 재미를 주는 작가쯤으로 해석해도 무방하겠다.

그러니까  "이 책은 재밌냐?"라는 질문이 장르물에 있어서 매우 의미심장하고 중요하고 무서운 질문이다.
"볼만해" 나는 이 책에 대해 이렇게 답할 것이다. 정말 볼만하다.
"그러니까 재밌냐고?" 이렇게 다시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

장르물에서 재미를 추구한다는 사실은 당연한 듯 싶지만 어떤 양념이 첨가되었느냐에 상당한 무게감을 가진다. 따라서 쉽게 답할 성질은 아니다. 암튼 "볼만했다."

이 속에 쓰인 양념을 한번 살펴보자. 물론 무의미한 나의 해석이기도 하다.

작가가 바라보는 이 한 단어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전에 '악'에도 역사가 있을까? 물론 여기에서의 역사는 태고적부터 내려오는 계승적인 '악'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역사는 원인을 가리킨다.

한마디로 악의 원인이다. 원인이 있는 '악'은 '순정의 악'이 아니다. 어떤 '악'의 원인을 알았다면 '악'은 고칠 수 있는가?

가령, 정상적인 동작을 하는 기계가 있다고 가정하자. 어떤 부품이 빠지거나 고장난 것이라면 그 기계는 '순기능'을 잃고 만다. 물론 '기능' 자체를 잃어버리는 상태까지 도달할 수도 있겠지만(이는 마비라 부를 수 있겠다), 어떤 기계는 오동작을 할 것이고 이 기계는 속해있는 전체적인 메커니즘에 영향을 줄 것이다.

이러한 메커니즘을 한 네트워크를 구동시키는 시스템적 능력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러니까 이 능력은 네트워크의 효율을 의미한다.

부품과 기계와 연관되어 있는 네트워크는 효율이 떨어지면서 점차적으로 이상 감지를 느낄것이다. 어떤식으로 처리를 할까. 소프트웨어적이라면 버그를 잡아야하고, 하드웨어적이라면 장비를 고치든, 교체하든 이런 기계적 수단을 써야 할 것이다.

네트워크가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면. 잘못된 부품이 범죄자라면. 이 '악'에 대한 처방을 우리 사회는 어떤 식으로 내려야 할 것인가? 당연히 리셋은 할 수도 없고, 부품 교체도 없다. 엄밀히 말해서 부품 수리도 없다. 범죄자의 개화는 수리가 아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악의 본능을 없앨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억제는 수리라 할 수 없겠다. 사회는 교육을 통해 억제를 가르친다. 사람들은 억제를 학습할 뿐, 본능을 버리지는 못한다.

『검은 선』에서 악의 원인은 무엇일까?. 물론 원인을 찾기위한 그의 탐구는 이 책 뿐만 아니라 세번째 시리즈까지로 이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만 본다면 단편적이고 부분적일 수 있겠다. 하지만 작가는 한가지를 말하는 듯 싶다.

악의 이력(hysteresis).


이력(hysteresis)은 간단히 말해서 외부적인 힘에 의한 어떤 물질의 성질 변화가 변화의 원인이 제거되었는데도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지 않는 성질을 말한다. 이는 주로 물리학에서 쓰는 용어이다. 전자기학에서 나온다. 물론 공학이라든지 경제학 등의 여러 분야에서 쓰이기도 한다.

작가가 말하고 싶은 한가지는 나왔다. 앞서 말한 이력(hysteresis)이 그것이다. 이 소설에 대입해보자. 범죄자(이 소설의 주인공중의 한명이라 할 수 있겠다)는 어떤 원인에 의해서 악의 성질을 띄게 되었다. 그리고 원인이 고쳐졌든 어쨌든 이 성질은 그가 죽을때까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의 상태는 항상 악한 상태로 머물러있다.

두번째, 작가의 삼부작 중 그 첫번째는 이력이었다. 그렇다면 이 이력에 쓰이는 소재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 책의 제목인 '검은 선'이다. 그 중에서 '검다(black)'라는 것.

일반적으로 '검다(black)'라는 의미는 모든 색이 혼합되어져 있는 색을 말한다. 서로 다른 색이 섞이면 섞일 수록 더욱 짙어진다. 물론 이 색들중에는 흰색은 제외다. 흰색은 명도를 높인다. 그러니까 검은색은 한마디로 잡스런 모든 색들이 섞인 상태이다. 그리고 이런 상태는 통제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혼잡은 엔트로피를 증가시킨다. 생물에게 엔트로피가 증가되면 공통적인 사건이 하나 발생한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다.

인간에게 피는 생명이다. 붉은피는 어느 한가지를 잃으면 색깔이 짙어진다. 그러니까 검게 변한다. 붉은 피를 유지하게 하는 한가지 것은 산소이다. 피가 산소를 가짐으로써 이 피는 신선한 피이고 피는 산소의 운반을 통해 여러 기관과 세포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서 검은 피는 통제되지 않은 죽은 피이다. 소설 속 범죄자는 피해자의 피를 빼앗음으로써 피해자뿐만 아니라, 모든 정황을 통제하려 한다.

이러한 통제 방식의 습득은 그의 어린시절의 정신적 학대에서 기원하며, 이 정신적 학대에서 피하는 방법을 그는 일시적으로 숨을 쉬지 않음으로 해서 깨우친다.

결국, 그는 후에 어른이 되어 몸속으로 산소의 공급을 일시적이긴 하지만 꽤 길게 차단시킬 수 있는 능력으로 발전시켜 무호흡 잠수 챔피언으로까지 성장한다. 그의 모든것은 산소의 통제이다.

세번째, '선(line)'은 무엇인가? 사실 선(line) 자체는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소설에서의 선은 역시 검은 이라는 형용사와 어울려야 하는데, 검은 선은 두가지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이 책에서 살인마로 나오는 '르베르디'의 직업과 관련되어 있다. 숨참는 것을 통제할 수 없는 선. 그것은 무호흡 잠수부가 최고로 내려갈 수 있는 한계이다.(사실 이 한계라는 것은 엄밀히 말해 계산된 추정값이다. 바다속의 이 한계선까지 잠수하였다가 다시 물 위로 올라와야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하나는 말 그대로 산소가 없는 피의 걸쭉한 향연. 즉, 뿜어져 나오는 죽은 피의 줄기를 말한다. 참고로, 이 소설속에서 범죄를 추적하는 기자인 주인공 '마르크'가  사건들을 종합하여 낸 책이 <검은 피>라는 제목이다.

책에선 숨어있지만, 의미있는 것들이 있다. 하나는 통제이다. 통제는 드러나지 않는 키워드이다. 이야기속에서 통제는 곧 산소와 관련되어 있다. 숨을 참는다는 것. 이것이 곧 통제이다. 소설속에서 '사스(SARS)'라는 질병이 나온다. 이 질병의 정식 명칭은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Severe Acute Respiratory Syndrome'이다. 산소가 개인간의(혹은 개인의) 통제의 의미로 쓰였다면, 사스는 거대 집단의 통제의 의미로 쓰인다. 바로 국가와 사회라는 집단이다.

'르베르디'가 수감되어 있는 교도소는 말레이시아에 있는데, 소설 속 배경은 한창 중국과 홍콩, 대만을 위주로 하여 동남아시아에 '사스'가 한창 맹위를 떨던 때이다. 그때의 '사스'는 이 소설에서 말하는 악과는 또 다른 성질의 소재이다. 이 질병이 교도소에도 위세를 떨쳤는데 수감되어있는 범죄자들도 질병의 무서움을 톡톡히 인식하고 있었다. '악인'들도 공포에 떨게한 것이 바로 '사스'이다. 사스는 거대하며 근원적인 악이다. 원인도 없는 악이다. 물론 악당 주인공인 '르베르디'는 이 사스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몇가지 할말은 있는데, 이는 스포일러와 직접 연관되어 있어서 이 포스팅에는 쓸 수 없을 듯 싶다.

스포일러와 관계없는 한가지만 더 말해보자면, 과연 산소가 통제니 뭐니 그랬는데 과연 산소는 무슨 의미일까. 산소는 바로 '독(毒)'을 의미한다. 산 소가 아이러니한 것은 우리가 숨을 쉬며 생명을 이어갈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우리를 죽음으로 인도하는 무서운 산화제이다. 생명체는 양초와 같다. 양초는 자신의 몸을 태워서 불을 밝혀주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산소를 호흡해서 피를 통해 우리에게 에너지를 공급하지만 그 찌꺼기는 우리에게 독이된다. 이와같은 산소의 이중성을소설에서는 진실과 거짓이라고 내포하였다. 산소를 마시면 살 수 있다는 것은 또다른 거짓이다. 바로 영원성에 대한 거짓이다.

결론을 말한다면, 산소가 가지는 이중성과 통제의 의미. 그리고 검은 선을 추구하려는 범죄자 '르베르디', 그리고 악에서 구원받은 또 다른 여자 주인공. 그리고 이들을 맺어주는 기자인 '마르크'. 이 모두가 하나씩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악'과 관련하여...

<덧붙임>

1. 작가에 관하여....

작가인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는 르포를 썼던 저널리스트였다. 그래서 그런지 소설을 쓰기 위해 불러들이는 그만의 소재는 다양하다.  범주를 크게 잡으면  인문학과 자연과학 그리고 사회과학으로 나눌수 있으며 특히 내가 좋아하는 분야는 '과학'분야이다.

그가 인기를 얻어 이름을 떨치게 한 소설 『크림슨 리버』' 우생학'과 관련된 생명공학을 소재를 불러들였다. 『크림슨 리버』도 재미있는 의미를 가진다. 리버는 강을 뜻하는데,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강은 바로 유전적 형질을 의미하며, '크림슨'이라는 뜻과 합쳐져 '피'를 뜻하게 된다. '크림슨 crimson' 은 다름아닌 붉은 계통의 색을 뜻한다. 진홍색이라고도 한다. 참고로 유명한 잠수함 영화『크림슨 타이드』의 '크림슨'이라는 단어도 이 단어이다. 붉은 색이라는 뜻. 연관되어 하나 덧붙이자면 이 영화보다 더욱 갈채를 받는 유명한 잠수함 영화가 있다. 그 영화는 『붉은 10월』이라는 영화로 '존 맥티어난'이 연출하였으며 , '숀 코너리'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물론 이때의 '붉은'은 원제에서는 'red'이다.

『크림슨 리버』는 영화로 봐서 소설로 읽진 않았지만 영화보다 소설이 더욱 강렬할 듯 싶다.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의 또 다른 소설은 『돌 의 집회』와 『늑대들의 제국』이 있다. 『돌의 집회』는 핵융합과 관련된 소재가 쓰였다. 그리고 『늑대들의 제국』은 뇌과학, 특히 기억의 조작이라는 과학기술이 사용되었다. 아무튼 그만큼 이 작가는 여러 분야, 특히 과학과 관련된 소재를 끊임없이 사용하고 있는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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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볼 효과 - 우연적 사건의 연쇄가 세상을 움직인다
제임스 버크 지음, 장석봉 옮김 / 바다출판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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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아인슈타인이 말했다. 이 말의 의미는 우리 세상이 가지고 있는 모든 사건들은 확률적으로 발생하지 않고, 인과율이라는 섭리에 의해서만 발생한다는 의미이다. 인과율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알고있는 가장 합리적인 말이다. 원인이 있으니 결과가 있다라는 이 말은 또한 우주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단어이다.

그런데 의미론적인 면에서 인과율은 한가지 모순이 있으니 모든 사건들의 처음은 과연 무엇 때문에 일어났느냐는 것이다. 어떤 시초로 여겨질 법한 사건은 또한 그 사건 이전의 어떤 사건이 있음으로 해서 발생하게 되었으니 파도 파도 바닥이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합리적이라는 말은 또한 편리한 단어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건, 사물의 시초엔 신이 있으므로 해서 골치아픈 문제를 회피할 수 있다. 신 이전의 그 무엇은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말 그대로 원초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인슈타인 말대로 한다면 신은 초기값만 던져줬을 뿐이게 된다.

아인슈타인을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다. 원자론을 만들어낸 '보어'를 필두로 한 '코펜하겐 학파'이다. 이들은 아인슈타인의 인과율을 부정한다. 우주를 포함한 이 세상을 오로지 확률론적으로 보는데 이는 양자역학의 초기부분에 해당한다.(확률은 정보를 수량화하는 방식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사고실험은 확률론에 대한 설명이다. 이는 납으로 만들어진 상자안에 고양이가 있다고 했을때 이 고양이가 죽었는가 살았는가 하는 문제인데 몇가지 조건이 주어진다. 가령 방사성 핵과 그것의 반감기라든지, 계수기, 독가스라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이에 관해선 언급하지 않겠다. 아무튼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고양이가 박스안에 있다고 했을때 박스안 고양이는 살아있는 상태인가, 죽어있는 상태인가를 알아보는 사고실험이라는 것만 상기하자. 인과율로 따진다면 '고양이는 죽었거나 살아있다'이다. 독가스가 방출되었다면 죽었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살아있을 거라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여기의 논리 게이트는 'OR' 개념이다. A이거나 B이거나 말이다.(이 OR 논리 게이트는 지금 현재의 비트를 말한다. 이를 과학에선 고전적 비트라한다.)

확률론적으로 본다면 고양이는 살아있고 죽어있다(혹은 살아있으면서 죽어있는)라는 좀 애매모한 말이 된다. 다시말하면 살아있는 상태 반, 죽어있는 상태 반을 총칭한다. 여기의 논리 게이트는 'AND'이다. A이고 B라는 개념인데, 한마디로 두 상태가 같이 공존하는 '중첩'상태에 있게된다는 것이다.(이 AND 논리 게이트는 연구중에 있는 미래의 비트를 의미한다. 이를 과학에선 큐비트(qubit)라 한다.)

물론 이 사고실험의 답을 내리기는 뭐하다.

철수가 영화보러 극장에 갔다고 하자. 극장에 가면서 철수 곁을 스쳐지나간 이름모를 수많은 사람들. 철수랑 같은 시간대의 영화를 보면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수많은 익명들. 이들은 철수의 행동을 통해 이 세상에 존재하게된 사람들이다. 철수가 극장엘 가지 않았다면 철수는 얼핏 스쳐지나가며 얼굴을 본 많은 이들은 존재할 수 조차도 없게되는 것이다. 말이 이상하지만 그런대로 받아들이자. (더 쉬운 예는 관광지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된다. 관광지에 사람이 바글바글하여 어쩔수없이 의도하지 않은 사람들이 찍힌 사진을 봄으로써, 그 이름모를 사람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수많은 사람들은 누구의 관찰로 존재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데, 결국 철수도 또 다른 누군가의 눈으로 관찰되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자, 그렇다면 (존재하기 위해서) 서로서로 관찰한다 했을때 이 세상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잘 돌아갈 수 있게 되는데, 이름모를 식물이며 알수 없는 동물, 곤충 혹은 미생물들은 어떠할까. 우리가 관찰한 순간 존재하게 된다고?

마치 있을 것이라는 가정은 이미 결과를 내포하게 된다. 이 세상에 없는 것은 가정조차 하지 않는다. 말장난같이 느껴진다. 그래서 혹자는 우리들 위에는 모든것을 꿰뚫어보는 눈이 하나 있다고 하는데 그 존재를 신이라고 부른다한다. 왠지 정리가 된다는 느낌이다. 이 신이라는 존재는 과학적 행위를 하는데, 하나의 결과값만 놔두고 중첩 상태에 있는 모든 확률값들을 붕괴시켜버린다.(이에 대한 소설은 <쿼런틴>이라는 SF 소설이 있다. 신 대신에 특수한 능력을 가진 자가 나온다. 또 하나의 값만 남겨두고 가능성있는 모든 값들을 붕괴시키는 예는 '빛의 직진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암튼 설렁설렁한 면도 있지만 확률이라는 우연과 인과율의 차이를 말하기 위함이었다.

서론이 길었다.

얼마전에 책 한권을 읽었는데 <핀볼 효과>라는 책이다. 우연이라는 것과 인과율이라는 것이 적절히 섞여 있는 세상을 핀볼 기계로 보고 핀볼 게임 자체가 우리의 세상이 지금껏 진보하게된 원리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내용은 철학적이지도 않고 물리적이지도 않다. 그러니까 깊은 뜻이 숨어있지도 않으며, 완벽한 논리를 지향하지도 않는다. 핀볼게임을 철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아니며, 핀볼 기계를 물리적으로 분해하지도 않는다. 한마디로 핀볼 게임이 갖는 성향만 머릿속에 기억하고 책속에 나열되어 있는 수많은 사건들을 그냥 읽어내려가면 된다. (핀볼은 이 책 본문에는 등장하지도 않는다.)

이런 것을 소위 '카오스'라 한다. 여러 사건들이 난립해있고 또 독립적으로 보이지만 이들은 결국 하나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 질서는 각 사건들을 원인과 결과로서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겉보기에는 굉장히 무질서하게 보인다. 결국 이 무질서는 예측의 가능성을 낮춘다. '나비효과'는 카오스의 또 다른 하위 범주에 속한다. 물론 이런 복잡스런 인과 관계를 양자역학이라는 확률론으로 접근하려는 시도를 현재 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시도가 곧 가동될 CERN의 LHC이다. 이 CERN에서 인터넷이 처음 탄생하였다. 인터넷의 아버지는 '팀 버너스 리'이다. CERN을 무대로 한 소설은 곧 개봉될 '댄 브라운'의 <천사와 악마>이다. 겉보기에는 종교와 과학과의 싸움을 테마로 하고 있다. 참고로 이 책을 저술하려고 자료를 왕창 모은 댄 브라운은 남은(?) 자료가지고 책 하나를 또 하나 내놓는데 그게 <다빈치 코드>이다.)

재미난 예가 있다. 증기기관을 만들어낸 '제임스 와트'는 세상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올까?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써 증기기관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유츄할 수 있는 것들은 (직관적인 의미의) 인과율로 표현할 수 있으며, 증기기관가지고도 도저히 유추할 수 없는 것들은  단순히 우연이라고만 설명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이것도 엄연히 따진다면 인과율의 범주안에 포함되겠지만, 우연이라는 맥락이 더 잘 들어맞는다. 가령, 철수가 극장엘 가면서 아는 친구를 만났는데, 이 친구 만난것을 우연이었다고 하지, 자연의 섭리요, 인과율에 따른 인연이라고 하지 않는다. (물론 이름모를 이쁜 아가씨를 보고 맘에 들어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고도 할 수도 있겠지만.)

인과율로써 증기기관을 통해 나타나는 여러 결과는 우리가 많이 들었던바와 같이, 좀 더 효율적인 시대로의 진입이다. 본격적인 에너지를 소비하는 시대로 들어서게 되는데, 그럼으로써 세상의 산업은 기계에 많은 부분 의존하게 되었고 이는 상품의 대량화와 자동 공정시대를 불러오게 만들었다. 이를 산업혁명이라고도 한다. 아무튼 바다로는 더 많은 화물을 싣고 나갈 수 있으며 이는 식민지를 끼고 사는 제국시대를 여는 원인으로 작용하였으며, 육지로는 철도의 발전과 더불어 통신의 발전까지도 이루어내게 되었다. 이것이 큰 힘 들이지 않고 교과서적으로 유추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우연이 불러온 증기기관에 의해 유발되는 결과는 뭐가 있을까. 책에 소개되어 있는 것 중의 하나(책에는 없어도 또 다른 뭔가를 불러 왔을 수도 있다)는 비즈니스 세계의 또 다른 기반이다. 그 기반이란 것은 바로 서류이다.

정황은 이렇다.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이 잘나가는 상품이 되면서 무수히 많은 주문을 받게 되었다. 주문을 말(대화)로 받는 것도 아니고 주문장이라는 서류를 통해 받게 되는데, 그 당시엔 주문장이라는 명세서가 따로 없었다. 그래서 손으로 일일이 모든것을 적어서 만드는 주문장은 하나 만들기에도 너무 힘든 작업이었다. 그 결과 일정한 형식을 갖춘 주문장 사본을 만들게 되었고, 이는 주문처리를 한결 쉽게 만들었다. 똑같은 서류를 여러장 만들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카본지의 발명으로 연결되었다.  더욱 효율적인 비즈니스 세계의 문을 연것이다. 이것이 우연이 유발한 또 다른 결과이다. (사실 이 책에서 언급한 두번째 결과는 카본지가 아닌 생물학의 발전이었다. 그런데 생물학 발전의 단계까지 설명하려면 지금까지 쓴 글의 5배이상은 언급을 해야한다. 책 자체 내용이 그정도 분량이 된다. 그래서 다음 단계가 되는 카본지의 발견까지만 예시로 들었다.)

 이 책에서 선보인 여러 사건들은 그 연결 고리가 불투명한 것들도 있다. 저자가 나름대로 연결고리를 이었지만 약간은 억지성도 보인다. 그렇다고 기록되어 있는 사건들이 거짓은 아니다. 실제로 그런것들이 있어왔으며 어떤것은 필연적으로 어떤것은 우연적으로 만들어졌다.

책의 결론은 사실 허무하기도 하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를 불러온다. 하지만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수백권의 책속에서 뿌리 역할을 하는 어떤 사건들을 재미있게 그리고 이해하기 쉽도록 연결성을 부여하여 이 세계는 여러가지의 거대한 조합으로 이루어져왔으며, 또 그렇게 이루어져가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있다. 그러니까 책 내용도 중요하겠지만, 책 말미에 있는 <찾아보기> 즉, 'index'항목이 매우 중요하다. ㄱ,ㄴ, ㄷ, ㄹ... 순으로 나아가는 인덱스는 이 세상의 중요한 여러 지표를 빠르게 읽을 수 있는 중요한 정보를 포함하고 있다.

하이퍼링크와 같은 편집도 있는데 이는 중복된 인덱스 혹은 키워드를 통해 새로운 사건들을 잇는 또하나의 고리 역할을 한다. 책의 단점인 링크걸기를 간단한 표현으로 완성한다. 뭐 그렇다고 편리할 것도 없다. 귀찮아서 링크된 곳을 펼치지 않는다. 기다리다보면 나오니까. 링크가 걸려있다는 것을 잊어도 상관없다. 나중에 <찾아보기>코너로 또 다른 탐색을 하면된다.

나에게는 괜찮은 책이었다. 특히 여러 챕터별로 따로 따로 기술하고 그것으로 그만인 역사서나 과학서를 그리 좋아하진 않는데(요즘은 경제학 관련책들도 이런식으로 많이 나온다..아래 -덧붙임 4번 참조 -), 내용이 매우 단편적이고 그 하나의 사건이 이 세상을 이루는데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했는지는 가늠하기조차도 어렵기 때문이다.

연결성은 쉽게 기억해낼 수 있으며, 역사의 이런 연결성을 의외의 조합이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좋은 공부도 될 듯 싶다.

비록 단편적인 지식들의 모음이지만, 이런 지식들조차 찾아보기 힘들며(이 책은 수백권의 책을 뒤진 효과를 준다), 키워드를 알지 못한다면 영영 알 수 없는 것들도 있다. 이런것은 심한 의외성이다. 누가 IBM의 천공기를 여인들이 어깨에 두르는 숄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참, IBM은 원래 회사이름이 아니다. 기계이름이다. 그 이름하여 '국제 사업 기계(International Business Machine'이다. 그 기계 앞자를 따 그냥 회사이름으로 지은 것이다.

이 책의 요점은 이렇다. 이 세상을 이루는 모든 것들은 하나의 네트워크위에 놓여져 있는 것이다. 다만 방향은 비가역적이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숄에서 천공기가 탄생했지만, 천공기에서 숄로 역행할 수는 없다. 세상이라는 네트워크는 비가역적인 동시에 병렬적이다. 1대 다의 관계도 성립한다. 또 다대1의 관계도 성립된다. 그래서 그림을 그려보면 계층이 없는 네트워크가 아니라 매우 계층적인 네트워크이다. 상위 루트에서 계속 아래로 트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 책이 허무한것은 상위 루트와 맨 마지막 트리의 종단이 없다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뭔지 아직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는 흙을 보고 생각한 관념을 흙이라는 물질로 끝맺음을 한다. 사실 글로 적기가 어려운 말인데, 흙을 보고 뭔가를 떠올리고 그 뭔가를 계속 이어내려가다보면 흙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로 결론을 낸다는 의미이다.(물론 실제로 흙을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있는 것은 아니다. 흙을 만든다는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겠다.) 챕터들이 이런식이다. 그래서 약간은 허무하다.

<덧붙임>

1. 글은 길지만 결론은 이거다. 세상은 뒤죽박죽 섞여있는 듯 하지만, 그럴듯한 순서에 의해 진행되어져왔고, 앞으로도 그럴것이라는 것. 이 뒤죽박죽을 네트워크(망)로 표현하였고, 그럴듯한 순서는 우연적 사건의 연쇄반응을 말한다. 하지만 우연적인것보다는 필연적인 혹은 인과적인 것들도 많아서 이런 조합들이 그리 부드럽지 못한 것들도 많다는 사실. 이는 하나의 흐름으로 표현하려는 욕심에 약간의 무리수를 둔 것이라는 생각.

2. 기회되면 포스팅하겠지만, 이 모든 사건이나 사물의 본질은 '정보'에 있다는 것. 이 정보는 우리세계의 패러다임이 바뀌면서(산업사회에서 정보화사회로의 이동) 새 로운 인터넷이라는 관념적 네트워크안에서 표현되어지고 있다는 것. 여기서 관념적이라는 것은 전기적 작용에 의한 정보의 흐름은 비록 물질적이지만 결국 이런 물질의 흐름은 종단에서 멈추어지고 이는 레지스터에 '자화'의 상태로 저장되어지는데 이를 컴퓨터의 애플리케이션으로 표현할때에는 전혀 다른 형태(하지만 실제는 아님...예로 워드프로세서로 된 문서...)로 발현한다. 물론 직접적인 정보의 상태가 모니터에 발현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오실로스코프'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

3. 우리가 휴대전화에 쓰이는 방식인 CDMA가 나오기까지의 우연적 사건의 연쇄는 무었일까? 이는 얼마전에 읽다가 우선은 한쪽에 밀어둔 <열정이 있는 지식기업 퀄컴이야기>라는 책에 나오는데, 그것은 '액스터시+피아노+어뢰'의 조합이다. 이것이 CDMA의 원류이다. 기회가 되면 이 책도 리뷰를 쓸 예정...

4. 이 책이 말하는 바대로 풀이해놓는다면,  우연적 사건의 연쇄는 소수의 사람들의 뜻하지 않는 발명이나 창조적 노력의 결과로 보고 있는데 그렇다면 한가지 의문이 든다. 대다수의 사람들의 의도치 않은 행동으로 세상이 변해가고 있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단지 소수의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것들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을 또 어떤식으로 빚어가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서 주목할 단어는 '이용'이라는 단어이다. 그러니까 소비를 한다는 의미인데 이는 규모의 경제학으로 표현할 수 있을 듯 싶다. 요즘 읽고 있는 또 다른 책은 <경제학 콘서트>의 저자 '팀 하포드'의 그 두번째 책 <경제학 콘서트2>이다. 물론 모든것에 대한 답을 들려주진 않지만 읽다보면 뭔가 걸리는 것도 있을 듯 싶다. 이 책의 키워드는 원제이기도 한 'The Logic of Life'이다. 

약간 곁들인다면, 삶의 논리는 무엇일까? 이는 인간위주의 논리이며, 지구적 시스템을 인간중심으로 본 다는 말일 수도 있다. 가령 환경을 예로 들 수 있다.. 환경보호를 하는 이유는 하지 않으면 앞으로 천문학적인 돈이 그쪽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게 삶의 논리이다. 물론 책에서는 이런말은 나오지 않는다. 하나더, 우리는 왜 휘발유 자동차를 타고 다닐까? 즉, 전기 자동차는 누가 죽였는가?(이것은 다큐멘터리 제목이다.) 이것도 또 하나의 삶의 논리이다. 답은 그때 당시엔 기름이 가격도 쌌으며 소수가 소비하기엔 충분히 많아서이다. 물론 여러 답들중에 하나이긴하다.

참고로 <경제학 콘서트>와 같은 독립적 챕터로 이루어진 책들을 그리 좋아하진 않는다라고 본문에서 언급하였다. 그럼에도 가볍게 읽기에 좋을 듯 싶어 골랐다. 기회되면 이 책도 리뷰를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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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kg의 수수께끼 - 인간의 뇌, 그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떠나는 여행
섀넌 모페트 지음, 신두석 옮김 / 거름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우리의 환경은 하나의 과학, 기술적 패러다임에 의해 순식간에 변해버린다. 증기기관이 발명되면서부터 이 세상은 산업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더불어 '전기'의 발견은 인간이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까지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였다. 에너지를 이용한다는 것은 곧 기존의 세상과는 차원이 다른 세상을 향한 문이었다. 에너지는 인간이 가진 욕구 그 자체이며, 인간 집단에서 내세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이제 21세기가 되면서 또 다른 패러다임이 등장한다. 이 개념은 20세기 때부터 줄창 예견되었던 그러한 세상이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정보화 세계'이다. 기존 근대적 과학의 산물인 에너지를 한단계 업그레이드 한 것이다. 에너지 자체가 '정보'가 된다는 개념은 다른 기회에 다른 포스팅에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다.

우리는 계획을 세우고 있는 중이다. 지구라는 공간을 떠나 머나먼 외계를 탐사하고, 우리의 공간안에 있지만 우주처럼 쉽게 갈 수 없는 극한의 환경인 심해를 탐사하려고 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내부적 탐사도 진행중이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기관이 바로 '뇌'이다.

'뇌'라는 곳은 우리 다음 세대의 또 다른 패러다임이다. 이는 인간이 가진 '정보'의 수원지이다. 전 세계적으로 '차세대 신 동력원'으로 활발히 연구중에 있는 기관이다. 우리나라가 비록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우주나 심해 탐사는 뒤쳐져 있을지 모르지만, 이 '뇌'라는 영역만큼은 결코 뒤쳐져서는 안된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인간 자체의 정보'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은 거의 비슷한 출발선에 있다고 봐도 괜찮을 듯 싶다.

지난달에 읽은 책 『1.4kg의 수수께끼』(섀넌 모페트, 거름, 2007) 는 뇌의 일생과 더불어 저자가 만나보았던 '뇌과학'을 다루는 과학자들과의 대화와 그들의 연구 과제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해부적으로 만난 '뇌'를 시작으로 사람의 기억과 정신을 담당하는 좀 더 고차원적인 뇌까지 간략하나마 두루두루 이야기한다.

예전에『바보의 벽』을 쓴 저자로 잘 알려진 '요로 다케시'의 『유뇌론』을 읽은 적이 있다. 이 책도 물론 뇌에 관한 호기심에집어 든 책이었다.『유뇌론』은 주로 뇌가 가진 이중성(물질이면서 마음을 만들어내는, 이원론적인)에 대한 저자의 고찰이 들어있었데 반해,『1.4kg의 수수께끼』에선 저자의 고찰보다는 뇌를 연구하는 이들을 직접 찾아가 그들의 연구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연구를 통해 인간의 무엇을 알 수 있는지를 함께 고민하고, 더 나아가 뇌를 대하는 사회적 이슈(일명 뉴로마케팅이라 불리는)까지 그 영역을 넓혀 훑어보는 그런 책이다. 뇌와 관련하여 일반인이 접하기엔 괜찮은 책이라는 생각이다.

우리의 뇌는 대략 1.4kg이라 한다. 아인슈타인의 뇌가 이보다 작은 1.2kg이라는데, 뇌의 크기와 천재성은 큰 관련이 없다는 하나의 사실로 이해할 수 있다. 뇌의 무게가 1.4kg이라 하지만, 우리가 느끼는 무게는 이정도는 아니다. 좀 웃긴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자아'를 만들어내는 곳이 머리보다 아래에 위치해 있다면, 분명 머리가 무겁게 느껴졌을 것이다. 머리 자체가 우리이기에 그 머리의 무게를 느끼는 신경은 아예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이다. (어디서는 영혼의 무게가 21그램이라는 소리도 있지만....)

이 책에 따르면, 약 80%가 물로 이루어져 있는 인간의 뇌는 뇌척수액 때문에 그 유효 무게가 1.4Kg에서 60g으로 줄어든다고 한다. 뇌 척수액은 뇌가 머리안에서 떠 있게 만든다고 한다. 또한 같은 이유로 뇌가 두개골 바닥에 떨어지지 않게 해주기도 한다고 나와있다. 60g이라... 이 60g도 느끼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물론 두통기가 있을때면 머리의 무게감도 상당하다는 것을 느낄때도 있긴하다.

뇌가 마음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일 것이다. 마음과 관련한 이야기를 알고 싶다면, 이 책보다는 예전에(2006년)  방영했던 다큐멘터리를 보라고 권하고 싶다.  KBS에서 '마음'이라는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6부작으로 만들어 방영했던 적이 있다.  굉장히 흥미로운 프로그램이었다.  물론  이 다큐멘터리가 책으로도 나왔다.  제목 역시『마음』(이영돈, 예담, 2006) 이다. 나의 경우엔 다큐로 봐선지 책은 읽지 않았다.

그렇다면 뇌가 가진 또다른 중요한 기능은 뭘까. 물론 이것은 뇌의 지엽적인 기능이다. 마음을 만들어내는 기능에 포함되어질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바로 '기억'이라는 메커니즘일 것이다. '기억'은 어떤 형태로든 우리가 경험했던 감각과 느낌을 뇌의 어느 특정한 공간에 배열하고 분류하여 집어넣는 기능이다. 물론 끄집어 낼 수 있어야 이 메커니즘이 완성되어진다.

** 기억의 매커니즘을 연구하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

우리의 기억이 매일 지워진다면 어떻게 될까. 심지어 지워지는 주기가 매우 짧아지면, 그래서 10초 정도된다면? 책에서는 이러한 기억에 관련된 이야기도 다루고 있다. 책에서도 소개하고 있지만, 이 이야기를 다룬 대표적인 영화로 『첫 키스만 50번째』라 는 영화가 있다. 주인공인 <드류 베리모어>가 사고로 뇌를 다쳐 아침에 눈만 뜨면 머릿속이 백짓장으로 변한다는 이야기인데, 이러한 불행을 <아담 샌들러>가 사랑으로서 극복한다는 코믹 로맨스물이다. <아담 샌들러>는 <드류 베리모어>의 기억을 매일 아침마다 엄청난 노가다를 통해 주입시켜 준다. '사랑'이 있어야만, 이러한 '노가다'도 할 수 있다는 내용쯤 된다. 자세한 내용은 영화를 보면 된다. 나의 경우엔 괜찮게 보았다.

이 영화에선 '10초 톰'이라는 또 다른 인물이 등장하는데, 말 그대로 기억력이 10초 정도 유지되는 인물이다. 책에서는 실제 이와 비슷한 HM이라는 인물에 대해 이야기한다. 간단히 이야기해보자면, 뇌의 오른쪽과 왼쪽의 측두엽에 있는 해마와 그 부근을 수술로 제거함으로써 이 사람은 말 그대로 기억력을 10초 정도만을 유지할 수 있다. 삶이 없는 인간으로 변해버렸다.

현재 우리의 세상은 정보의 세상이다. 정보를 발굴하고, 가두고, 내보내는 이 모든 과정들이 과학과 공학의 이름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선보이고 있다. 우리가 상품을 소비하고 있는 이 시대는 인간 군집들의 활동이 중요한 정보이다. 기업은 물건을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소비자들에게 원초적인 모습으로 다가간다. 이 원초적인 모습은 바로 마케팅이다. 이러한 마케팅은 우리 자신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뇌안의 잠재된 의식을 깨운다. 이 책의 말미에서는 이러한 뉴로 마케팅과 그로 인한 신경윤리학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든다.

웹의 시대에는 우리의 클릭과 관련된 정보가 매우 중요하다. 이는 메타데이터로써 기업에서 관리하고 있다. 우리가 온라인으로 어떠한 상품을 사는 순간 우리가 처음 회원으로 가입했을 당시의 자료는 정보로써 중요하게 쓰인다. 우리의 나이라든지, 성별, 직업, 그리고 주로 사는 상품들. 이젠 이와 같은 것이 온라인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는 오프라인에서도 크게 쓰일 수 있다고 경고한다. 책에서는 심지어 신랑감이나 신부감을 고를때 상대 집안측에서 뇌 사진을 요구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한다. 신경질환이나 본인도 알지 못하는 성격을 뇌 사진으로 알아낼 수 있다는 의미이다. 또한 우리가 재미로 스티커 사진을 찍듯이 뇌사진도 그만큼 대중화가 되어질 수 있다고 책에서는 내다본다. 그래서 그 방편으로 신경윤리학의 도입을 주장하기도 하고, 실제로 신경윤리학을 연구하는 이들의 소개도 있다.

이제 뇌는 국가적 역량을 측정하는 하나의 잣대이다. fMRI라는 장비도 그렇다. 우리나라에선 가천의대에서 가장 활발히 연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갈수록 뇌와 관련된 연구 사항들이 학문으로서 경제적인 면으로서 그 가치가 뛰어오르고 있다.

분명한 것은 뇌에 대한 연구는 또 하나의 자원으로 점차 변모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덧붙임>

1. 요즘 또 다른 뇌에 대한 책을 보고 있다. 그 책의 제목은 『시냅스와 자아』(조지프 루드, 소소, 2005)

'과연 우리의 마음은 단순히 시냅스의 공간에서 만들어낸 이미지에 불과한가?' 라는 이야기가 있을지 없을지는 더 읽어봐야 알겠다...

2. 우리의 뇌의 가용성에 대한 말들이 많다. 아인슈타이은 그의 뇌 몇 %를 써서 천재라는 소리를 듣고, 일반인은 보통 뇌의 몇 %를 쓴다든지 하는 이야기들 말이다. 그에 대한 자료로 관심 있으신 분은 한번씩 읽어보시기를..

** <The brain may use only 20 percent of its memory-forming neurons>

3. 작년 연말에 읽었던 책중에『글로벌 시대의 한국과 한국인』(이어령외, 아카넷, 2007) 이 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은 10명의 인사가 '경원대학교'에서 '지성학'이라는 강좌를 한 내용을 출판한 것이다. 그 중에 '뇌과학'과 'fMRI'라는 장비의 간단한 이야기가 들어있다.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가볍게든 진중하게든 어느쪽으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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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광인 - 상 - 백탑파白塔派, 그 세 번째 이야기 백탑파 시리즈 3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07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 스포일러가 들어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 책을 보실 분은 이 글을 읽어보지 않으심이 현명하실듯...**


드디어 '김탁환'의 『열하광인』(2007, 민음사)의 마지막 장을 읽음으로써, 일명 '왕과 나' 트릴로지(trilogy)를  완결지었다.'왕과 나'는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열하광인』을 내놓기 전에 붙인 '가제'로 알고 있다.(2편인 '열녀문의 비밀'에서 언급되어 있다.) 가제인 '왕과 나'를 내리고 결국 '열하광인'으로 바꿔단모양인데 이 3부작을 마땅히 가리킬 말이 없어 내 임의대로 '왕과 나'라 가칭해본다.(KBS의 '왕과 나'라는 사극과는 별개이다.)

여기에서 '왕'은 곧 정조대왕을 가리키고, '나'는 왕의 종친이자 의금부 도사인 이 책의 주인공 '이명방'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왕과 나'는 의금부 도사의 미션수행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암행어사와 관련된 것도 아니고, 정조와 이명방 중심으로 풀어가는 이야기도 아니다. 사실 3부작의 완결에 이르기까지 정조는 그 캐릭터가 뚜렷이 드러나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냥 흐릿하다.

소설 읽어가는 눈높이를 시종일관 왕의 신하인 이명방의 눈높이에 맞추어서인지 정조는 그리 특색있게 나오지 않는다. 작가가 왕의 의중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놓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작가야 직접 인물들의 내면까지 들어다볼 수 있는 전지전능한 힘이 있음에도, 이 권한을 내려놓고 (작가가) 백탑파의 일원에게 논리적 성찰을 줌으로써 정조의 실체를 한꺼풀 덮어버린 듯 하다. 이 성찰은 이명방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앞서 트릴로지라 언급했는데 이는 소설 자체보다는 소설을 그려내려한 작가의 노력과 공들인 시간에 대한 나의 칭찬이다. 3편의 이야기를 무려 6년에 걸쳐(2년마다 하나씩 내놓았다) 풀어놓았으니, 작가의 말대로 소설속 인물들도, 작가도, 독자도 모두다 같이 늙어갔다. 물론 외국에서야 이런 구성이 많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극히 드물것이다. 그래서 작가의 공로를 높이 산다.

하지만 소설의 대미가 크게 와닿지 않아, 3부작의 완결이 그렇게 아쉬웠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행인지조차도 모르겠다.

소설의 무게가 한 곳에 쏠리지 못한 느낌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소설의 큰 축은 4개로 구분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들 4개의 축중에서 이야기를 떠받치고 있는 '왕과 나'라는 축이 있겠다. 하나는 정조이고 나머지 하나는 이명방이다. 그리고 그 외 나머지 두개의 축은 노론이라는 축과 백탑파의 축으로 나뉠 것이다. 이야기는 흥미롭게 전개되기는 하나, 그 축에 쏠리는 중심은 사뭇 가볍다. 노론은 거의 등장하지도 않고, 오직 캐릭터들의 상상 저 너머에서 존재만 한다. 정조는 메시지를 던져주는 역할 만 하고, 이명방은 그 메시지를 전해주는 역할만 한다. 사건이 이명방을 따라 일어나기는 하지만, 사실 사건과는 독립적이다.(소설속에서 아무때나 죽어도 된다. 결말을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이명방은 전체 스토리를 지배하고 있다. 좀 모순같기도. 이명방은 그냥 소설 속 장치일 뿐이다. 백탑파는 소설속에서 그 세력이 많이 약해진바, 백탑파는 단순 퀘스트일뿐이다. 주인공인 이명방을 성장시키는 미션수행이라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사건해결은 이명방의 손을 빌리지도 않는다. 작가는 이명방의 행보에만 유독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줌으로써, 독자에게 제대로 된 추리를 내리지 못하게 하고 계속 알쏭달쏭하게 만든다. 사실 별것 없는 사건이고, 추리이다.

모든 캐릭터는 대립관계도, 공생관계도 아닌 좀 흐지부지한 관계이다. 특히 대립관계가 매우 약한게 흠인 듯하다.

전지적 시점을 가지고 있는 '김진'이라는 인물은 모든 사건을 해결하는데에 가장 큰 공을 세우는 존재이다. 하지만 앞의 2부작보다는 다르게 이번 3편에서는 그의 등장과 활약이 부자연스럽다고 할까? 내용 초반부터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지 마치 작가의 강한 개입으로 뿐이 보이질 않는다. 물론 이야기에 활력을 불어넣고, 독자들의 몰입을 더 기대할 순 있게지만, 너무 '한방'이다. 김진의 노력이 보이질 않는다. 사건을 해결하는 인물은 김진인데, 화면은 김진을 비치지 않고 엉뚱한데를 비추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계속 이명방만 비춘다.) 독자가 화면밖을 의식하지 않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화면안에서 김진만을 애태우며 기다릴 수도 없다. 이야기의 구성이 조화롭지 못하고, 또한 임팩트가 분산되어버린다.

비록 김진이 사건을 해결은 하나, 역사를 배경으로 하였기에 모든 갈등이 해소되어지지는 않는다. 이 해소되지 않은 사건의 마무리는 결국 이명방이 짓긴한다. 이명방은 주인공이지만(사실 주인공인지조차 의심스럽다), 김진을 부각시키려는 장치일 뿐이고, 김진은 주인공은 아니지만, 작가 자신을 위한 장치(갈등부를 빠르게 수습시키려는 장치)임을 고려하면, 이 둘의 조화는 앞선 2편보다는 좀 더 못하다. 같은 공간을 점유하는 둘의 행보가 많은 부분 생략되어 있는 것이 아쉽다. 책의 분량도 사실 그 당시 조선의 배경이나 사상을 생각해서 보게끔 여유도 주지 않는다.

이 소설의 주제는 "군왕은 군왕의 편일 뿐이다" 라는 것인데, 군왕은 실종되어 있고, 결국 남는 것은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대한 소개만이 남는다.

이렇듯 많은 부분에 있어서, 특히 추리라는 장르적 부분과, 역사성이라는 서사적 구도가 매끄럽지 못해, 캐릭터들의 특성을 많은 부분 중화시키기는 하지만, 흥미를 이어가고 있기는 하다. 앞서 언급한 것들은 그 흥미를 조금 갉아먹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차피 『열하광인』은 앞의 2편의 이야기들의 힘을 어느정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열하광인』을 독립적으로 보고 싶진 않다. 비록 '왕과 나' 트릴로지의 3부작의 마무리가 다소 미진하기는 하였으나 의미는 있다고 생각한다.

계속 궁금증이 일어나는 것이, 과연 몇 가지 에피소드를 가지고 한 시대의 풍경과 당시 인물들의 활약에 생명을 부여한 한국의 작가가 있는지 그것이 궁금하다. 나의 경우에 있어서 2006년부터 읽었지만, 그 전부터 읽어왔던 독자들은 나보다는 더욱 애정이 깊으리라는 생각이다.

작가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이 시리즈의 (또다른) 시작을 장식하고 또 한국 소설계가 보여주고 있는 스펙트럼의 확장을 위해서라도 '화광 김진'의 가상인물을 바탕으로 한 '번외편'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작가의 특별판이라 해도 좋다. (나만의 거창한 생각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한국의 소설계와 작가 자신에게도 하나의 이정표가 되는 것이다.


<덧붙임>

1. 이 소설은 3부작이긴 하나 그 간극이 너무 떨어져 있다. 시간의 흐름이 너무 빠르다. 이는 분명 소설속 정조의 태도변화라는 중요한 역사적 배경을 (세가지 이야기만에) 도입시켰지만, 소설 속 양념으로 끝난 느낌이다. 그래서 그런지 소설의 마무리에서는 못다한 정조의 꿈을 정말로 꿈꾼 것 같이 만들어  '몽유소설 夢遊小說' 의 느낌을 받게 만들었다. 대단한 정치의 장이자 활극의 무대였던 그 당시 역사라는 공간을 밋밋하게 중화시켜 버렸다.

2. 다음 '김탁환'의 소설은 더욱 더 짜임새가 있었으면 한다. 재밌게 보았는데, 남는 게 그리 없다. 비록 추리소설이라고는 하지만...

3. 정말 '김진'의 활약을 바탕으로 한 조선판 홈즈도 나왔으면 한다.


4. 백탑파 그 첫번째 이야기에 대한 나의 리뷰(『방각본 살인사건』)

5. 백탑파 그 두번째 이야기에 대한 나의 리뷰(『열녀문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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