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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전 강의 - 전진하는 세계 성찰하는 인간 고전 연속 강의 2
강유원 지음 / 라티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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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틀을 깨우치게 해주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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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의 시선으로 세계사를 즐기다 - 쾌락으로서의 역사 읽기 코기타툼 2
버트런드 러셀 지음, 박상익 옮김 / 푸른역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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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일종의 서사적 감상이다. 들여다보면 때와 장소, 사람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렇게 삼박자가 갖추어지면, 여러 퍼즐 조각들을 이리저리 맞추어본다. 그런데 역사를 맞추면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상관없어 보이는 퍼즐 조각이 서로 꿰맞추어 진다는 것이다. 마치 대륙간의 이음새가 얼추 맞추어지는 것처럼.

러셀은 '러셀의 시선으로 세계사를 즐기다'에서 쾌락의 역사를 한마디로 즐길 수 있는 여유로움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명시한다. 일단 역사에서 배움은 배제하고, 호기심과 흥미라는 시동을 걸면 된다. 시동이 걸리면 또 다른 형태의 일상의 여가라는 목적지로 출발할 수 있다. 일상의 여가야말로 과정이 아니라 목적이다. 러셀에 따르면 그렇다.

역사는 방대하다. 그렇게 방대한 역사의 가짓수 역시나 방대하다. 우주의 역사에서 인류의 역사는 제외할 수 있다. 인류의 역사도 마찬가지로 우주의 역사를 무시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두 역사를 엮음으로써 역사에서 과학을 끄집어낼 수 있으며, 인류의 역사에서 반목의 역사를 꺼냄으로써 전쟁의 역사를 뽑아낼 수도 있다. 이런 저런 역사를 뽑아냄으로써, 좁게는 인과적 영역부터 넓게는 상관적 영역까지 역사라는 시선으로 우주를, 인간을, 삶을 읽을 수 있다.

앞서 역사는 방대하다 말했지만, 이 방대한 역사에 현미경을 들이댈 수 있다. 거시적 역사속에서 미시적 역사만을 따로 걸러 세상사를 읽어낼 수 있다. 미시적 역사는 개인의 역사일 수 있고, 한정된 뭔가의 역사만을 다룰 수 있다. 인생의 여가를 한정된 분야에 쏟음으로써 지적 희열은 앎의 쾌락으로, 호기심의 충족으로 여가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물론 대략적인 거시적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어디서부터 시작하든 개인의 맘이다.

러셀은 이 책에서 역사를 어떻게 읽었을까. 이 책은 두껍지 않다. 100페이지도 채 안된다. 따라서 거시적 역사를 읊어댄다. 역사속에 휘말린 인물과  소용돌이의 역사를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써댔던 인물들 위주로 풀어낸다. 시간과 장소를 선점했던 인물들 중심으로 말이다. 하지만 책에 기술된 몇가지 역사적 소재들은 러셀이 전하고 싶은 내용의 근거이기도 하다.

다시말해, 뚜렷한 구분이 된 것은 아니지만, 비스듬히 보면, 크게 고대, 중세, 근대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시대적 구분은 역사 읽기의 한 예시로 제공되었다 뿐이지 역사 그 자체를 열거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역사를 읽는 방법과 서로 다른 사건 또는 인물의 엮임에서 전혀 다른 시각을 꺼낼 수 있음을  일종의 에세이 형식으로 선보였다는 것이 이 얇은 책의 가치인 듯 하다.

우리가 역사를 읽어낸다는 의미는 일종의 보편적인 프레임을 선택하고 그 액자속에 그려진 역사를 보고 외우는 일종의 과정을 겪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러셀은 제안한다. 우리가 자신 마음대로 프레임을 선택하고, 여러 다른 퍼즐들을 이리 저리 끼워맞추어 자신의 생각을 밝혀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라고 말이다. 물론 자신의 시각에 책임질 필요는 없다. 우리는 아마추어가 아닌가.(자신의 시각에 책임질 필요 없다는 의미는 다른 의견 역시 귀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도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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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1 - 진시황과 이사 - 고독한 권력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1
김태권 글.그림 / 비아북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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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태권은 책의 머리말에서 동아시아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로 바로 한(漢)나라를 꼽았다. 한(漢)나라에 들어와서야 동아시아 패권체제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한을 중심으로 위로는 흉노, 아래로는 남월, 서쪽은 말 그대로 서역, 그리고 동으로는 고조선이 위치하였다. 한무제때에 이 모든 곳을 정벌하여 패권체제를 완성하였는데, 중국 중심의 천하, 즉 중화사상이라는 이데올로기는 파도를 타고 동아시아로 흘러들었다.

김태권은 한(漢)제국을 열 권의 책으로 그려내려 한다 했지만, 첫 번째 책의 제목인 「진시황과 이사」에서 보여지듯이, 한(漢)에서 시작하지 않고 그 유명한 진시황의 진(秦)제국에서부터 시작한다. 사실 진(秦)은 BC 221년 전국을 통일한지 15년째가 되던 해인 BC 206년에 멸망한다. 진이 중국을 통일하기 전에는 봉건제였고, 중국을 통일한 후에는 군현제로 바꿨다. 그리고 한은 봉건제와 군현제를 결합한 군국제를 시행했다.

진시황은 정치를 법가의 사상에 따라 행하였다. 즉 율령에 따른 정치체제를 확립하였는데, 모든 권한을 황제가 가진다는 의미이다. 이는 곧 세상 모든 것의 통일을 의미한다. 밖으로는 천하를 통일하고, 안으로는 모든 제도와 문자 등을 통일한다는 뜻이다. 황제를 거치지 않고서는 천하가 움직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왕의 많은 자제들과 일족에게 땅을 주어 다스리게 한다는 봉건제를 없애버리고, 지방을 다스리는 자를 임명제로 만들어 왕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수시로 바꿀 수 있는 군현제를 실시하게 된다. 이런 정책에 유가들은 반발하게 되었고, 이는 분서갱유와 유가 학자들을 산채로 묻어버리는 참극으로 이어지게 된다.

진시황은 통일 바로 다음 해부터 전국을 순행하기 시작했다. 또 순행을 위한 '치도'라는 도로를 건설하였다. 이렇게 순행하면서 자신의 치적 홍보와 백성들의 교화를 행하였다. 어찌보면 자신의 영토안에서 힘을 과시함으로써 법 질서의 안정을 꾀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전국 순행은 한제국의 한무제 때에도 나타났다고 한다. 이 역시 최고 군주임을 백성들에게 선보이기 위함일 것이다. 재밌는 것은 진시황은 순행중 병이 들어 죽는다. 진시황이 죽고 그의 막내아들 호해가 왕위를 이어 받는다.

하지만 한낱 날품팔이 노동자였던 진승과 빈농 출신의 오광은 농민 반란을 일으켜 진제국을 쓰러뜨린다. 결국 진은 그렇게 역사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앞으로 등장하게 될 한제국의 동아시아 패권을 위한 스케치를 그려봄으로써 조조와 유비에까지 이르는 간웅과 영웅들의 장대한 서사시가 시작된다.

개인적으로 중국사에 많은 관심이 있지만, 너무나도 방대하여 어디에서부터 손댈지 몰라 이 책을 집어 들었다. 몇몇 포인트를 잡아주어 이야기를 진행시키지만, 제대로 된 흐름을 타기가 쉽지 않다(1권은 쉽게 읽혔는데, 2권이 그렇다). 물론 개인차가 분명 있기는 할 것이다. 인물 따라가기도 벅차다면 제국은 커녕, 동아시아를 이해하기는 언감생심일 것이다. 그렇지만 읽을 가치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지만 집어주는 몇몇 포인트를 따라가다보면 몇가지 키워드가 보일 것이고, 그 키워드를 다른 책을 통해 따로 정리한다면 분명 나만의 지식이 쌓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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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07 2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09 18: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선의 힘 - 조선, 500년 문명의 역동성을 찾다
오항녕 지음 / 역사비평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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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술 읽혀대는 우리 역사관련 책들을 읽으면 다분히 사건 위주였던 기억이 난다. 사건 위주가 아니라면 역시나 인물 위주이다. 대부분의 조선사는 실록을 참고로 만들어질테니 인물(특히 왕..) 위주로 책 내는 것이 용이할 것이다.  사건이나 인물 중심으로 단조롭게 풀어나가는 책은 에피소드와 에피소드의 연관성 그러니까 역사의 배경이 되는 시간과 공간의 논리적 구도를 읽어내기란 상당히 어렵다. 이러한 구도를 모른다면 조선의 역사는 알아도 조선에 대해서 알기는 쉽지 않다. 사건이나 인물을 텍스트라 한다면 텍스트를 가리키고 있는 모든 것들은 콘텍스트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역사의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에는 수많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콘텍스트가 생략 되어 있다. 역사 읽기란 텍스트를 읽는다기보다는 콘텍스트를 읽는 것에 가깝다. 콘텍스트는 하나의 텍스트에 대해 과거 이곳 저곳을 훑어 놓은 것이다.

콘텍스트를 읽는다는 것. 이것은 문학 읽기와도 닮았다. 책속에 들어있는 텍스트로 된 여러 조합들을 건져내다 보면 어느덧 결말에 닿아있는 자신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문학 속 인물을 그려보는 것 만으로 책읽기를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읽어내는 자신을 투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앞서 말한 '결말에 닿아있다'라는 의미는 가령 소설 속 주인공이 해피 엔딩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 결말이 (주인공을 벗어나 나 자신에, 혹은 우리 사회에) 지금도 유효한가 아닌가로 봐야하지 않을까 싶다.  역사도 그렇다. 조선시대에 이미 결과로써 드러난 몇가지 결론들이 지금은 형태를 바꾸어 다시 꿈틀거리고 있지 않은가를 느껴야 하지 않을까.

얼마전에 읽은 오항녕의 '조선의 힘'이라는 책과 비교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어렸을때 읽었던 하나의 문장을 예로 든다. 물론 이 문장은 내 임의대로 꽤 축약시켜 놓은 것이다.

"세조는 조카 단종을 내쫓은 후, 왕위를 차지하였으며 단종을 다시 왕으로 복위시키려 했던 여러 신하들을 고문하여 죽였다. 그리고 다른 가족들은 죽임을 당하였고 그의 아내와 딸은 모두 노비로 만들었다."

세조의 왕위 찬탈을 '계유정난'으로 부른다. 이게 텍스트이자  콘텍스트의 실마리이다.

첫번째 콘텍스트는 바로 노비에 대한 것들이다. '조선의 힘' 첫 장이 조선의 문치주의에 대한 이야기인데 노비제도는 문치주의의 어두운 그림자로 볼 수 있다. 문치주의는 단순히 문을 숭상하고 기리려는 정책이 아니다. 문치주의는 바로 관료정치 특히 조선시대 택군을 실현시켰던 신하들의 권력의 무게에 의미를 둔다. 문치주의의 꽃인 '경연'은 왕과 신하들이 모여 옛 문장이나 성현의 말씀을 서로서로 물으며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신하들이 왕을 교육시킨다는 의미가 크다. 신하들이 왕을 교육시킨다는 것. 이것을 좀 더 넓게 보면 조선의 왕은 신하들이 꿈꾸는 나라를 대표하는 대표이사쯤으로 보면 된다. 그리고 왕은 신하들이 누릴 수 있는 이권에 직접적인 개입을 할 수 없다. 이권을 줄이기 위해 명령을 해도 그 명령을 받는 사람 자체가 또한 관료이기 때문이다. 물론 왕 자신도 더불어 꽤 많은 혜택을 보는 것도 사실이다. 신하들의 이권이 커지게 되다보면 관료주의는 다시 과거로 회귀하게 된다. 관료주의는 바로 (고려때의) 귀족주의를 극복한 조선의 정치적 제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러한 귀족주의를 가장한 관료주의는 노비제도를 타파할 수 없는 것이다. 노비야 말로 욕심에 물든 관료주의를 지탱한 거대한 자원이다. 그러니까 법제적으로 양천제(양인층과 천민층만을 구별한 제도)의 사회에서 사회적으로 반상제(양반층과 그렇지 않은 계층)가 더욱 더 치밀해져가고(이 치밀함으로 인해 결국엔 노비의 숫자가 줄어들게 만들긴 하지만), 이것이 조선 후기에 나타나는 다양한 사회적 모습의 영양분을 제공한다. 노비제도는 결국 조선이 망할 무렵에 가서야 조금씩 혁파된다. 영조(노비 쫓는 기관인 '노비추쇄관 폐지' 그리고 '노비종모법' 시행)와 정조(노비 쫓는 행위를 법으로 금지- 노비추쇄법 폐지)를 지나 순조때에 이르러서야 공노비가 폐지되고, 고종때에는 노비세습법이 폐지가 되며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갑오개혁(고종, 1894)으로 공,사노비의 해방이 이제서야 법제적화 되었다. 갑오개혁도 사실 개혁을 요구해오는 일제에 내정간섭을 위한 빌미를 주지 않기위해 스스로 개혁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있을 뿐 절반은 어쩔 수 없는 타의적인 개혁이었다. 결국 문치주의는 양지에 자리잡고 있긴 하지만 또한 짙은 그림자를 만들어 내었다.

물론, 책에서는 문치주의를 상당히 긍정적으로 본다. 맞는 말이다. 나의 경우에 그림자인 노비제도를 적었지만, '조선의 힘'에는 '실록'이라는 엄청 밝은 부분이 들어가 있다. 어쨌든 문치주의가 가진 그 양면성이 조선을 풍부하지만 누구에게는 가혹한 그런 나라로 만들었다. 심지어 신하인 그들 자신에게조차도 가혹함을 맛보게 했으니 말이다.

다시 윗 문장으로 가서 두번째 콘텍스트를 정해본다. 그것은 '단종'과 관련한 것들이 다. 단종은 세종의 손자이자 세종의 아들인 문종의 아들이며, 수양대군인 세조의 조카이다. '조선의 힘' 마지막 장인 8장이 단종과 사육신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나도 몰랐었는데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먼저 단종은 폐위되었으므로 왕이 죽은 뒤에 받는 '묘호(종이나 조로 끝나는...)' 를 받을 수 없다. 연산군이나 광해군도 묘호가 없다. 그렇다면 단종이라는 묘호를 받기전에는 뭐라 불리웠을까. 바로 '노산군'으로 불리었다. 또 재밌는 것은 '연산군'에 들어있는 '산' 그리고 '광해군'에 들어있는 '해'와 같은 글자는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한다. '노산군'에도 '산'이 들어가 있다. 그렇다면 언제 노산군에서 단종으로 제대로 된 '묘호'를 받게 되었을까? 물론 사육신과 생육신의 명예회복에 관한 질문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의 8장에 들어있는 이야기이다. 정답은 바로 숙종 24년의 일이다. 그러니까 단종이 영월땅에서 어린나이에 단명을 한 이후 243년 후에 일어난 일이다. 자그만치 강산이 24번이나 바뀐 뒤에 말이다. 그만큼 조선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에서 사람으로 이 모든 것이 기억되고 문제로서 제기되는 이러한 사항이 바로 또 다른 문치주의의 긍정적인 부분이다. 덧붙여서 '정종(태조 이성계의 둘째 아들)'의 묘호도 숙종때에 받았다.

세번째 콘텍스트는 '세조'와 관련한 것들이다. 이는 두번째 콘텍스트인 '단종'의 또 다른 얼굴이다. 세조는 누구나 알다시피 세종의 아들이다. 세종은 누구인가. 집현전을 설치한 대왕이다. 그렇다면 집현전은 어떤 곳인가. 이게 가장 중요한데, 집현전 학자들이 아닌 집현전이라는 공간을 제시한 것은 바로 세조의 일터였다는 의미에 무게를 두고 싶어서이다. 바로 이곳에서 세조는 아니 수양대군은 야망을 꾸었다. 세종은 학문을 중요시했던 왕인데 그의 아들들 그러니까 세자로 지명되지 않은 여러 대군들이 그들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를 재능들을 국가를 위해 쓰라고 공부도 시키고 일도 시킨것이다. 그럭저럭 평생동안 놀고 먹는 만고땡이 될 수 있는 대군들을 말이다. 세종 자신은 어떤가. 국가를 위해 자신의 아비인 태종을 위해, 백성을 위해 일을 하고 싶어도 당시 세자였던 양녕대군만이 재능을 펼칠 수 있음을 부러워하지 않았던가. 그런 세종이 자신의 아들들에게 재능을 펼쳐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수양대군은 야망을 펼치고 싶어했다는 것이 후에 비극으로 나타났지만 말이다. 결국 세조는 집현전을 통해 정치 세력을 키우는 일을 하게 된다. 신하들에게 평판도 높아지고 말이다. 얼마뒤 계유정난을 일으켜 왕위를 조카인 단종에게 선양받지만 찬탈과 크게 다를바 없다.  집현전은 바로 혁파된다. 자신이 부정한 음모를 꾸몄던 곳을 놔둘 수는 없는 일. 결국 집현전은 혁파되고 수양과 관계되어있지 않은 수많은 집현전 학자들 또한 죽음을 당하거나 쫓겨났다. 그 빈자리를 채운 공신들이 훈구파라는 이름으로 등장을 하게 되었다. 이 훈구파는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였는데 즉, 노비 만들기의 재능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러니까 농민을 노비로 바꾸는데 일등 공신이다. 이는 다시 첫번째 콘텍스트인 '노비'를 돌아보게 한다.

재밌는 것은 세조가 훈구파를 불러들였다면 임진왜란 당시의 왕이었던 선조는 또한 사림의 시대를 시작한 왕이었다. 정확히는 성종이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를 등용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러한 사림과 훈구의 반목속에 다시 '단종'이 등장하니 그것은 김종직의 '조의제문' 이 실록에서 발견된 일 때문이다. 다시 첫번째 콘텍스트에서 등장한 문치주의의 꽃 '실록'이 엄청나게 어두운 그림자로써 역사에 등장하게 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보면 안될 실록을 본 것이다. 누가? 연산군이. 결국 무오사화로 연결됨으로써 훈구파는 엄청난 정치적 학습을 하게된다. 맘에 안들면 왕의 이름으로 처단할 수 있다는. 결국 이런 학습을 너도나도 하게 되었고. 그 뒤에 쭉쭉 이름만 다른 사화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피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후에 가서는 왕도 학습하게 된다. 그 왕이 바로 숙종인데 사림이 계속 분화된 여러 갈래를 요리조리 바꿔 타가며 자신의 왕권을 유지하였다. 왕이 타지 않은 갈래에 있는 신하들은 환국이라는 이름하에 저세상 사람들이 되어갔고 말이다. 서인이라든지 남인 동인 결국 이런 갈래길의 중심에는 왕이 있었다.

'정종'과 '단종'의 묘호를 올린 숙종때에 일어난 것 중에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를 뒤흔들만한 것은 대동법의 시행이다. 이것마저 풀어쓰면 너무 길어질까봐 쓰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광해군때 처음으로 시도된 대동법이 그 뒤 100여년 동안 잠자고 있다가 숙종때부터 다시 꿈틀거리며 시행되니 그 유명한 '상평통보'가 시중에 쫙 깔리게 되는 계기가 된다. 결국 이는 조선의 경제 구조를 뒤흔들게 되었고 이는 (도망)노비들이나 (도망)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들게된 또 하나의 동인이다.

리뷰로 쓴다는 것이 너무나 길어져 리뷰가 아니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후딱 정리해본다.

사실 또 다른 콘텍스트로는 사화속에서 살아남은 사림이 자신들의 이상적인 학문으로 선택한 '성리학과 관계된 것들' 이 있다. 이는 중국과는 또 다른 성리학으로 조선땅에서 전개가 된다. 웃긴것은 '이황' 때문이기도 하며 덕분이기도 하다. 어쨌든 양명학이 중국땅에선 활개를 치지만 조선땅에선 활개를 치지 않게된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다른 왕과 달리 다른 시각(조선을 다시 왕의 나라로 만들려는)으로 자신의 위치(왕이긴 하지만 서울 말고 다른 곳(화성)에서 새로이 시작하려는)를 보게 된 정조는 새로운 세력을 물색하게 되었고 후에 이들은 실학이라는 바탕을 마련하게 되었다. 하지만 정조의 급격한 개혁은 정조의 죽음 이후로 위정자들에 의해 자취가 지워지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세도정치로 이뤄지게 된다.

보는 입장에서 역사란 재밌다. 양반의 위선을 한 몸으로 느낀 '이하응'은 결국 자신이 살고자 세도정치를 이용하게 되었고, 세도정치로 인하여 자신은 왕이 될 수 없었지만 결국 세도정치로 인하여 자신의 아들은 왕이 된다. 이하응이 바로 '흥선대원군'이며 아들이 바로 '고종'이다.

다시 앞에서 언급한 문장을 써본다.

"세조는 조카 단종을 내쫓은 후, 왕위를 차지하였으며 단종을 다시 왕으로 복위시키려 했던 여러 신하들을 고문하여 죽였다. 그리고 다른 가족들은 죽임을 당하였고 그의 아내와 딸은 모두 노비로 만들었다."

이 한 문장속에 얼마나 많은 콘텍스트들이 숨어 있는지 나도 '조선의 힘'을 읽으면서 놀랐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예전에 읽었던 여러 조선 관련 내용들이 내 머릿속에서 번뜩이며 되살아났다. 동네 도서관에서 빌려 본 책들이 많은지라 다시금 책을 펼쳐들고 좀 더 정확히 리뷰를 쓸 수는 없었지만 내가 적어간 내용이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을거란 생각이다.

다시 윗 문장을 살펴보면 가장 드러나지 않고 잘 숨어있는 콘텍스트는 바로 재밌게도 텍스트이다. 무슨 말이냐하면 저 문장속에서 꼭꼭 숨어있는 단어가 바로 '실록'이라는 의미이다. 실록은 기록이니까 말 그대로 텍스트로 말한 것 뿐이다. 수양대군의 조카인 단종이 죽은 뒤에 노산군에서 단종으로 묘호를 받기까지 243년이 걸렸다. 그러니까 243년 동안 신하들은 어떻게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을까. 실록은 조선인들에게도 단순히 역사책이 아니다. 문치주의이기도 했지만 실록 자체가 거대한 국가의 통치 과제다. 그들이 실록을 뒤져가며 현재와 끊임없이 비교해가며 뭔가를 끄집어 내고 있었다는 것.

그것은 마치 이것과 같다.

조선은 기록되기 위해 존재했다라는 것. 기록되지 못하면 조선은 그것으로 끝일 뿐.
(재밌는 것은 그렇게 기록된 실록을 왕들은 제대로 볼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정조는 왕들이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일기를 기록한다. 그것이 '일성록'이다. '일성록'은 실록보다 더 직접적인 기록이다.)

역사를 생각하면 독일의 과학자 '베게너'가 주장한 '대륙이동설' 이 생각이 난다. 어제와 비교한 오늘을 보면 변화는 없는 듯 보이지만 무수한 시간이 지난뒤에 보면 거대한 땅 덩어리, 대륙은 엄청난 물리적 변화를 겪어있다. 하지만 그래봤자 그 땅이 그 땅이다. 위치만 바뀌어있을 뿐 여전한 그 땅이다.

역사도 마찬가지라 생각된다. 어제와 오늘 별다른 변화는 없지만 한참 지난 뒤에 보면 엄청난 제도적 경제적 사회적 변화가 지난 뒤이다. 하지만 그래봤자 사람일이라고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다. 과거의 사람이나 오늘날의 사람이나 별반 다를 것 없다.

PS>
1. 글이 너무 길어졌다. 글 줄이는 것도 능력이라고 위에 열거한 콘텍스트 관련 내용을 빼려다 아쉽기도 해서 집어넣었다. 그래서 글이 지루한 티가 난다. 그럼에도 다시 간략히 이 책 '조선의 힘'에 대한 감상을 적어본다.

이 책은 조선이라는 텍스트를 가리키는 몇가지 콘텍스트를 이야기한다. 그 첫번째가 문치주의이며 다음이 실록, 그리고 다음이 법제화와 관련된 내용들이다. 그 다음의 대동법이나 성리학까지 모두 조선을 이루는 제도와 관련되어 있다. 마지막에 단종을 내세우며 역사바로 세우기로 끝맺음을 하고 있다. 세종이 문치주의를 이상향으로 국가 건설에 시동을 걸었지만 그 문치주의를 이어받을 문종과 단종이 왕이 되고 얼마 안되어 죽게된다. 개인적으로 문종의 이른 죽음은 조선의 방향을 크게 틀게 되는 요인으로 생각하고 있지만(문종은 자신의 이상국을 실현하기 위해 그 얼마나 많은 책을 보았는가. 모든 지식을 익히고 그래서 책을 덮은 그 순간 그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쨌든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함으로써 조선은 이성계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리셋되어버린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은 조선의 제도사와 끝까지 맞물려있다. 또한 저자(오항녕)가 주장하는 콘텍스트가 다른 이(이덕일)의 콘텍스트와 어떻게 다른지 예전 한겨례에서 설전했던 글이 부록같이 포함되어 있다. 노론사관과 관련한 이야기인데 몇가지 사안이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흥미롭다.

개혁이란 것은 꽤 흥미로운 것이다. 훈구파가 여러 사화를 통해 그 얼마나 많은 사림파들의 피를 흘리게하였는가. 수많은 사림파들의 죽음에도 결국 사림들은 정치적 승리를 이끈다. 숙종 때에 사림파 서인의 노론이 결국은 가장 꼭대기를 차지하게 된다. 그런데 그 사림들을 죽였던 훈구파들은 도대체 다 어디로 갔는가? 결국은 시간이 흘러가며 훈구파도 사림파화 되어 간 것이다. 훈구들도 시간이 흘러가며 사림화가 되어 갔지만 그 전에는 훈구파에게 사림파는 숙적이었다. 훈구파들은 운명을 이겨 보려 했던 것. 나이를 못속인다고 하지만 역사에서는 시간을 이길 수는 없다. 개혁이란 그 시간이 되기 이전에 조금이라도 빨리 이뤄내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물론 이 개혁이란 것도 거대한 세계사의 흐름안에선 또 다르게 읽힌다.

2. 계유정난으로 왕위를 찬탈한 세조는 성삼문을 비롯한 단종 복위파들을 죽음으로 이르게 만들었다. 단종 복위파의 가족들 또한 죽음을 당했는데 세조는 그들의 아내와 딸들만은 노비로 만들어 다른 공신들에게 성노리개로 주었다. 성삼문의 아내와 딸 또한 마찬가지로 이름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다른 공신들의 성노리개로 주었다 한다. 이 내용을 읽었을때 나에게는 꽤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그래서 세조가 더 재수없는 왕으로 문종과 단종은 자신의 능력을 펴보지도 못한 비운의 왕으로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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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볼 효과 - 우연적 사건의 연쇄가 세상을 움직인다
제임스 버크 지음, 장석봉 옮김 / 바다출판사 / 200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아인슈타인이 말했다. 이 말의 의미는 우리 세상이 가지고 있는 모든 사건들은 확률적으로 발생하지 않고, 인과율이라는 섭리에 의해서만 발생한다는 의미이다. 인과율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알고있는 가장 합리적인 말이다. 원인이 있으니 결과가 있다라는 이 말은 또한 우주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단어이다.

그런데 의미론적인 면에서 인과율은 한가지 모순이 있으니 모든 사건들의 처음은 과연 무엇 때문에 일어났느냐는 것이다. 어떤 시초로 여겨질 법한 사건은 또한 그 사건 이전의 어떤 사건이 있음으로 해서 발생하게 되었으니 파도 파도 바닥이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합리적이라는 말은 또한 편리한 단어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건, 사물의 시초엔 신이 있으므로 해서 골치아픈 문제를 회피할 수 있다. 신 이전의 그 무엇은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말 그대로 원초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인슈타인 말대로 한다면 신은 초기값만 던져줬을 뿐이게 된다.

아인슈타인을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다. 원자론을 만들어낸 '보어'를 필두로 한 '코펜하겐 학파'이다. 이들은 아인슈타인의 인과율을 부정한다. 우주를 포함한 이 세상을 오로지 확률론적으로 보는데 이는 양자역학의 초기부분에 해당한다.(확률은 정보를 수량화하는 방식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사고실험은 확률론에 대한 설명이다. 이는 납으로 만들어진 상자안에 고양이가 있다고 했을때 이 고양이가 죽었는가 살았는가 하는 문제인데 몇가지 조건이 주어진다. 가령 방사성 핵과 그것의 반감기라든지, 계수기, 독가스라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이에 관해선 언급하지 않겠다. 아무튼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고양이가 박스안에 있다고 했을때 박스안 고양이는 살아있는 상태인가, 죽어있는 상태인가를 알아보는 사고실험이라는 것만 상기하자. 인과율로 따진다면 '고양이는 죽었거나 살아있다'이다. 독가스가 방출되었다면 죽었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살아있을 거라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여기의 논리 게이트는 'OR' 개념이다. A이거나 B이거나 말이다.(이 OR 논리 게이트는 지금 현재의 비트를 말한다. 이를 과학에선 고전적 비트라한다.)

확률론적으로 본다면 고양이는 살아있고 죽어있다(혹은 살아있으면서 죽어있는)라는 좀 애매모한 말이 된다. 다시말하면 살아있는 상태 반, 죽어있는 상태 반을 총칭한다. 여기의 논리 게이트는 'AND'이다. A이고 B라는 개념인데, 한마디로 두 상태가 같이 공존하는 '중첩'상태에 있게된다는 것이다.(이 AND 논리 게이트는 연구중에 있는 미래의 비트를 의미한다. 이를 과학에선 큐비트(qubit)라 한다.)

물론 이 사고실험의 답을 내리기는 뭐하다.

철수가 영화보러 극장에 갔다고 하자. 극장에 가면서 철수 곁을 스쳐지나간 이름모를 수많은 사람들. 철수랑 같은 시간대의 영화를 보면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수많은 익명들. 이들은 철수의 행동을 통해 이 세상에 존재하게된 사람들이다. 철수가 극장엘 가지 않았다면 철수는 얼핏 스쳐지나가며 얼굴을 본 많은 이들은 존재할 수 조차도 없게되는 것이다. 말이 이상하지만 그런대로 받아들이자. (더 쉬운 예는 관광지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된다. 관광지에 사람이 바글바글하여 어쩔수없이 의도하지 않은 사람들이 찍힌 사진을 봄으로써, 그 이름모를 사람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수많은 사람들은 누구의 관찰로 존재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데, 결국 철수도 또 다른 누군가의 눈으로 관찰되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자, 그렇다면 (존재하기 위해서) 서로서로 관찰한다 했을때 이 세상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잘 돌아갈 수 있게 되는데, 이름모를 식물이며 알수 없는 동물, 곤충 혹은 미생물들은 어떠할까. 우리가 관찰한 순간 존재하게 된다고?

마치 있을 것이라는 가정은 이미 결과를 내포하게 된다. 이 세상에 없는 것은 가정조차 하지 않는다. 말장난같이 느껴진다. 그래서 혹자는 우리들 위에는 모든것을 꿰뚫어보는 눈이 하나 있다고 하는데 그 존재를 신이라고 부른다한다. 왠지 정리가 된다는 느낌이다. 이 신이라는 존재는 과학적 행위를 하는데, 하나의 결과값만 놔두고 중첩 상태에 있는 모든 확률값들을 붕괴시켜버린다.(이에 대한 소설은 <쿼런틴>이라는 SF 소설이 있다. 신 대신에 특수한 능력을 가진 자가 나온다. 또 하나의 값만 남겨두고 가능성있는 모든 값들을 붕괴시키는 예는 '빛의 직진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암튼 설렁설렁한 면도 있지만 확률이라는 우연과 인과율의 차이를 말하기 위함이었다.

서론이 길었다.

얼마전에 책 한권을 읽었는데 <핀볼 효과>라는 책이다. 우연이라는 것과 인과율이라는 것이 적절히 섞여 있는 세상을 핀볼 기계로 보고 핀볼 게임 자체가 우리의 세상이 지금껏 진보하게된 원리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내용은 철학적이지도 않고 물리적이지도 않다. 그러니까 깊은 뜻이 숨어있지도 않으며, 완벽한 논리를 지향하지도 않는다. 핀볼게임을 철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아니며, 핀볼 기계를 물리적으로 분해하지도 않는다. 한마디로 핀볼 게임이 갖는 성향만 머릿속에 기억하고 책속에 나열되어 있는 수많은 사건들을 그냥 읽어내려가면 된다. (핀볼은 이 책 본문에는 등장하지도 않는다.)

이런 것을 소위 '카오스'라 한다. 여러 사건들이 난립해있고 또 독립적으로 보이지만 이들은 결국 하나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 질서는 각 사건들을 원인과 결과로서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겉보기에는 굉장히 무질서하게 보인다. 결국 이 무질서는 예측의 가능성을 낮춘다. '나비효과'는 카오스의 또 다른 하위 범주에 속한다. 물론 이런 복잡스런 인과 관계를 양자역학이라는 확률론으로 접근하려는 시도를 현재 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시도가 곧 가동될 CERN의 LHC이다. 이 CERN에서 인터넷이 처음 탄생하였다. 인터넷의 아버지는 '팀 버너스 리'이다. CERN을 무대로 한 소설은 곧 개봉될 '댄 브라운'의 <천사와 악마>이다. 겉보기에는 종교와 과학과의 싸움을 테마로 하고 있다. 참고로 이 책을 저술하려고 자료를 왕창 모은 댄 브라운은 남은(?) 자료가지고 책 하나를 또 하나 내놓는데 그게 <다빈치 코드>이다.)

재미난 예가 있다. 증기기관을 만들어낸 '제임스 와트'는 세상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올까?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써 증기기관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유츄할 수 있는 것들은 (직관적인 의미의) 인과율로 표현할 수 있으며, 증기기관가지고도 도저히 유추할 수 없는 것들은  단순히 우연이라고만 설명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이것도 엄연히 따진다면 인과율의 범주안에 포함되겠지만, 우연이라는 맥락이 더 잘 들어맞는다. 가령, 철수가 극장엘 가면서 아는 친구를 만났는데, 이 친구 만난것을 우연이었다고 하지, 자연의 섭리요, 인과율에 따른 인연이라고 하지 않는다. (물론 이름모를 이쁜 아가씨를 보고 맘에 들어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고도 할 수도 있겠지만.)

인과율로써 증기기관을 통해 나타나는 여러 결과는 우리가 많이 들었던바와 같이, 좀 더 효율적인 시대로의 진입이다. 본격적인 에너지를 소비하는 시대로 들어서게 되는데, 그럼으로써 세상의 산업은 기계에 많은 부분 의존하게 되었고 이는 상품의 대량화와 자동 공정시대를 불러오게 만들었다. 이를 산업혁명이라고도 한다. 아무튼 바다로는 더 많은 화물을 싣고 나갈 수 있으며 이는 식민지를 끼고 사는 제국시대를 여는 원인으로 작용하였으며, 육지로는 철도의 발전과 더불어 통신의 발전까지도 이루어내게 되었다. 이것이 큰 힘 들이지 않고 교과서적으로 유추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우연이 불러온 증기기관에 의해 유발되는 결과는 뭐가 있을까. 책에 소개되어 있는 것 중의 하나(책에는 없어도 또 다른 뭔가를 불러 왔을 수도 있다)는 비즈니스 세계의 또 다른 기반이다. 그 기반이란 것은 바로 서류이다.

정황은 이렇다.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이 잘나가는 상품이 되면서 무수히 많은 주문을 받게 되었다. 주문을 말(대화)로 받는 것도 아니고 주문장이라는 서류를 통해 받게 되는데, 그 당시엔 주문장이라는 명세서가 따로 없었다. 그래서 손으로 일일이 모든것을 적어서 만드는 주문장은 하나 만들기에도 너무 힘든 작업이었다. 그 결과 일정한 형식을 갖춘 주문장 사본을 만들게 되었고, 이는 주문처리를 한결 쉽게 만들었다. 똑같은 서류를 여러장 만들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카본지의 발명으로 연결되었다.  더욱 효율적인 비즈니스 세계의 문을 연것이다. 이것이 우연이 유발한 또 다른 결과이다. (사실 이 책에서 언급한 두번째 결과는 카본지가 아닌 생물학의 발전이었다. 그런데 생물학 발전의 단계까지 설명하려면 지금까지 쓴 글의 5배이상은 언급을 해야한다. 책 자체 내용이 그정도 분량이 된다. 그래서 다음 단계가 되는 카본지의 발견까지만 예시로 들었다.)

 이 책에서 선보인 여러 사건들은 그 연결 고리가 불투명한 것들도 있다. 저자가 나름대로 연결고리를 이었지만 약간은 억지성도 보인다. 그렇다고 기록되어 있는 사건들이 거짓은 아니다. 실제로 그런것들이 있어왔으며 어떤것은 필연적으로 어떤것은 우연적으로 만들어졌다.

책의 결론은 사실 허무하기도 하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를 불러온다. 하지만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수백권의 책속에서 뿌리 역할을 하는 어떤 사건들을 재미있게 그리고 이해하기 쉽도록 연결성을 부여하여 이 세계는 여러가지의 거대한 조합으로 이루어져왔으며, 또 그렇게 이루어져가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있다. 그러니까 책 내용도 중요하겠지만, 책 말미에 있는 <찾아보기> 즉, 'index'항목이 매우 중요하다. ㄱ,ㄴ, ㄷ, ㄹ... 순으로 나아가는 인덱스는 이 세상의 중요한 여러 지표를 빠르게 읽을 수 있는 중요한 정보를 포함하고 있다.

하이퍼링크와 같은 편집도 있는데 이는 중복된 인덱스 혹은 키워드를 통해 새로운 사건들을 잇는 또하나의 고리 역할을 한다. 책의 단점인 링크걸기를 간단한 표현으로 완성한다. 뭐 그렇다고 편리할 것도 없다. 귀찮아서 링크된 곳을 펼치지 않는다. 기다리다보면 나오니까. 링크가 걸려있다는 것을 잊어도 상관없다. 나중에 <찾아보기>코너로 또 다른 탐색을 하면된다.

나에게는 괜찮은 책이었다. 특히 여러 챕터별로 따로 따로 기술하고 그것으로 그만인 역사서나 과학서를 그리 좋아하진 않는데(요즘은 경제학 관련책들도 이런식으로 많이 나온다..아래 -덧붙임 4번 참조 -), 내용이 매우 단편적이고 그 하나의 사건이 이 세상을 이루는데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했는지는 가늠하기조차도 어렵기 때문이다.

연결성은 쉽게 기억해낼 수 있으며, 역사의 이런 연결성을 의외의 조합이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좋은 공부도 될 듯 싶다.

비록 단편적인 지식들의 모음이지만, 이런 지식들조차 찾아보기 힘들며(이 책은 수백권의 책을 뒤진 효과를 준다), 키워드를 알지 못한다면 영영 알 수 없는 것들도 있다. 이런것은 심한 의외성이다. 누가 IBM의 천공기를 여인들이 어깨에 두르는 숄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참, IBM은 원래 회사이름이 아니다. 기계이름이다. 그 이름하여 '국제 사업 기계(International Business Machine'이다. 그 기계 앞자를 따 그냥 회사이름으로 지은 것이다.

이 책의 요점은 이렇다. 이 세상을 이루는 모든 것들은 하나의 네트워크위에 놓여져 있는 것이다. 다만 방향은 비가역적이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숄에서 천공기가 탄생했지만, 천공기에서 숄로 역행할 수는 없다. 세상이라는 네트워크는 비가역적인 동시에 병렬적이다. 1대 다의 관계도 성립한다. 또 다대1의 관계도 성립된다. 그래서 그림을 그려보면 계층이 없는 네트워크가 아니라 매우 계층적인 네트워크이다. 상위 루트에서 계속 아래로 트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 책이 허무한것은 상위 루트와 맨 마지막 트리의 종단이 없다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뭔지 아직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는 흙을 보고 생각한 관념을 흙이라는 물질로 끝맺음을 한다. 사실 글로 적기가 어려운 말인데, 흙을 보고 뭔가를 떠올리고 그 뭔가를 계속 이어내려가다보면 흙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로 결론을 낸다는 의미이다.(물론 실제로 흙을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있는 것은 아니다. 흙을 만든다는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겠다.) 챕터들이 이런식이다. 그래서 약간은 허무하다.

<덧붙임>

1. 글은 길지만 결론은 이거다. 세상은 뒤죽박죽 섞여있는 듯 하지만, 그럴듯한 순서에 의해 진행되어져왔고, 앞으로도 그럴것이라는 것. 이 뒤죽박죽을 네트워크(망)로 표현하였고, 그럴듯한 순서는 우연적 사건의 연쇄반응을 말한다. 하지만 우연적인것보다는 필연적인 혹은 인과적인 것들도 많아서 이런 조합들이 그리 부드럽지 못한 것들도 많다는 사실. 이는 하나의 흐름으로 표현하려는 욕심에 약간의 무리수를 둔 것이라는 생각.

2. 기회되면 포스팅하겠지만, 이 모든 사건이나 사물의 본질은 '정보'에 있다는 것. 이 정보는 우리세계의 패러다임이 바뀌면서(산업사회에서 정보화사회로의 이동) 새 로운 인터넷이라는 관념적 네트워크안에서 표현되어지고 있다는 것. 여기서 관념적이라는 것은 전기적 작용에 의한 정보의 흐름은 비록 물질적이지만 결국 이런 물질의 흐름은 종단에서 멈추어지고 이는 레지스터에 '자화'의 상태로 저장되어지는데 이를 컴퓨터의 애플리케이션으로 표현할때에는 전혀 다른 형태(하지만 실제는 아님...예로 워드프로세서로 된 문서...)로 발현한다. 물론 직접적인 정보의 상태가 모니터에 발현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오실로스코프'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

3. 우리가 휴대전화에 쓰이는 방식인 CDMA가 나오기까지의 우연적 사건의 연쇄는 무었일까? 이는 얼마전에 읽다가 우선은 한쪽에 밀어둔 <열정이 있는 지식기업 퀄컴이야기>라는 책에 나오는데, 그것은 '액스터시+피아노+어뢰'의 조합이다. 이것이 CDMA의 원류이다. 기회가 되면 이 책도 리뷰를 쓸 예정...

4. 이 책이 말하는 바대로 풀이해놓는다면,  우연적 사건의 연쇄는 소수의 사람들의 뜻하지 않는 발명이나 창조적 노력의 결과로 보고 있는데 그렇다면 한가지 의문이 든다. 대다수의 사람들의 의도치 않은 행동으로 세상이 변해가고 있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단지 소수의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것들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을 또 어떤식으로 빚어가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서 주목할 단어는 '이용'이라는 단어이다. 그러니까 소비를 한다는 의미인데 이는 규모의 경제학으로 표현할 수 있을 듯 싶다. 요즘 읽고 있는 또 다른 책은 <경제학 콘서트>의 저자 '팀 하포드'의 그 두번째 책 <경제학 콘서트2>이다. 물론 모든것에 대한 답을 들려주진 않지만 읽다보면 뭔가 걸리는 것도 있을 듯 싶다. 이 책의 키워드는 원제이기도 한 'The Logic of Life'이다. 

약간 곁들인다면, 삶의 논리는 무엇일까? 이는 인간위주의 논리이며, 지구적 시스템을 인간중심으로 본 다는 말일 수도 있다. 가령 환경을 예로 들 수 있다.. 환경보호를 하는 이유는 하지 않으면 앞으로 천문학적인 돈이 그쪽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게 삶의 논리이다. 물론 책에서는 이런말은 나오지 않는다. 하나더, 우리는 왜 휘발유 자동차를 타고 다닐까? 즉, 전기 자동차는 누가 죽였는가?(이것은 다큐멘터리 제목이다.) 이것도 또 하나의 삶의 논리이다. 답은 그때 당시엔 기름이 가격도 쌌으며 소수가 소비하기엔 충분히 많아서이다. 물론 여러 답들중에 하나이긴하다.

참고로 <경제학 콘서트>와 같은 독립적 챕터로 이루어진 책들을 그리 좋아하진 않는다라고 본문에서 언급하였다. 그럼에도 가볍게 읽기에 좋을 듯 싶어 골랐다. 기회되면 이 책도 리뷰를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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