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삼국지 2 - 한실의 풍운
요코야마 미쓰테루 지음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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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포를 적토마로 회유한 동탁의 폭정과 조조의 동탁 암살 실패..흥미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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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삼국지 1 - 도원결의 만화 삼국지
요코야마 미쓰테루 지음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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돗자리 장수 유비...관우, 장비와 도원결의를 맺다...황건적 괴멸 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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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짐승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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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 한줄기 새지 않는 캄캄한 밤을 묘사하는 데에는 글로 나타내는 것이 최적이다.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는다거나 손짓, 발짓해가며 밤을 표현하는 데에는 제약이 따른다. 어둠을 표현하기로는 글에 견줄 만한 것이 없다. 단어의 궤적으로 어둠 안을 비춰가며 샅샅이 훑어내기에 그렇다. 빛도 색깔도 형체도 무엇 하나 분간할 수 없는 어두컴컴한 공간은 에두르는 언어 묘사로 충만하게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글이라는 것은 결국 작가가 지닌 단어의 나열이다. 즉 단어야말로 작가가 고심하여 고른, 최전선에 투입되는 무기이다. 종종 강력한 단어가 장착된 책을 만나면 뭔가를 발굴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다시 말해 '헤르타 뮐러'의 「마음짐승」은 글보다는 문장, 문장보다는 언어조각(=단어)에 힘을 쏟아내는 책이다.

  작가는 독재시대라는 어둠을 나른하면서도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그럼에도 이야기라는 통으로 읽었다기보다는 언어의 조각 엮음으로 읽었다. '헤르타 뮐러'는 자신이 겪었던 어둠의 실체를 보이기 위해, 어둠안에 퍼져있는 공포의 냄새를 알리기 위해 보편적 언어에 숨을 불어넣어 자신만의 언어조각을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언어의 조각 조각을 엮은 글이
「마음짐승」이고
「숨그네」이다(물론 그녀의 다른 작품도 그럴 것이다). 「숨그네」는 몇 달 전에 읽었고, 그녀의 다른 작품들은 읽어보질 않았다.
 

'마음짐승' 첫 페이지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침묵하면 불편해지고, 말을 하면 우스워져, 에드가가 말했다."
<p. 7>
그리고 글의 끝, 마지막 페이지의 끝 문장은 이렇게 맺는다.
"침묵하면 불편해지고, 말을 하면 우스워져, 에드가가 말했다."
<p. 309>
 
  마치 고리처럼 처음과 끝이 이어져 있다. 그래서 마지막 문장을 읽고 처음으로 되돌아가 또 한번 읽었다. 다시 읽어야만 첫 페이지의 첫문장을 이해할 수 있다. 처음 읽을때에는 무슨 의미인지 새길 필요없이 지나쳤지만, 다시 읽어보니 확연히 작가의 심정이 들어온다.
머릿속에 풀이 자란다. 말을 하면 풀이 잘린다. 침묵해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제멋대로 두번째, 세번째 풀이 계속 자란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운이 좋다.
<p. 8>
  여기에서 풀이란 누구나 자유롭게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이나 사상이다. 생각을 한다는 것을 무성히 자라나는 풀로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말을 하면 김매는 것이고, 누군가 사상을 통제하면 그런 풀들이 무참히 짓밣힌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마지막 구절이 의미심장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운이 좋다." 이 의미는 자신이 받은 죽음의 번호를 내팽겨쳤다는 뜻이다. 운좋게 망명함으로써 말이다. 그럼에도 지난 과거의 일을 함부로 떠들수 없음을 은연히 내비친다. 그래서 '헤르타 뮐러'는 머릿속 김을 매기 위해 이 소설을 썼나 보다.

  다시 읽음으로써 미안하지만 소설 속 인물들은 다시 한번 고통을 받는다. 몇몇은 죽
음을 향해, 몇몇은 망명을 향해 내달린다. 다시 읽어낸 문장 속에선 죽음이, 새로운 삶이 중요하지 않았다. 한 문장 한 문장 안에 들어있는 응축된 감정, 싸늘한 공간, 생생한 인물이 중요했다. 난 그녀가 이 소설을 쓰면서 공포스러웠던 당시 상황에 몸을 움찔거렸다기보다는 아찔한 추억을 더듬어 내려오며 주변 인물들이 그리워 눈물지었을 거로 생각한다.

  「마음짐승」안에 묘사된 독재체제가 공포스러웠냐 하면 솔직히 그렇게 느끼지 못했다. 내가 방금 뱉은 '솔직히'라는 단어는 작가의 의도와 상반될 때야만 그 의미가 유효할 것이다. 따라서, 바로 전에 언급한 문장안에서 '솔직히'라는 단어를 지운다. 재차 언급해본다면, 「마음짐승」 안 에 묘사된 독재국가가 공포스러웠냐 하면 그렇게 느끼지 못했다, 이다. 작가는 작품 속에서 체제와 관련하여 공포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체제의 치사함과 얍삽함, 그리고 더러움만을 내비친다. 치사한 놈들이 조종하는 사회를 담담히 써 내려갈 뿐이며, 주인공은 말려 죽이려드는 통제에 순순히 따르지 않을 뿐이다. 기숙사 동료 롤라가 자살하자 국가는 죽은 이의 당원 자격을 박탈하였고,  더불어 대학에서도 제적시켰다. 이 얼마나 치사한 짓인가. 롤라는 성폭행 당하였는데도 말이다. 산 자도 죽은 자도 도구일 뿐. 이런 세상은 공포스러운 세상이 아니라 더럽고 치사한 세상이다. 공적인 부분을 담당하는 국가 시스템이 사적인 부분을 침범하면서까지 권한을 행사하는 더럽고 치사한 세상 말이다. 한마디로 사적 생활은 없는 세상. 언어유희를 부리자면 정말 '투명한 세상'인 것이다.

  공포스러운 세상은 동시다발적 죽음이 만연한 세상이다. 혐오와 증오의 세계는 주위 사람들의 순차적 죽음이 대기하고 있는 세상이다. 죽음이 누적되어가듯이, 감정의 찌꺼기 또한 가슴 한 켠에 응어리지며 쌓여만 간다. 결국 살아남은 자는 시대를 기억하고, 그 사람들 중 누구는 당시대 사람들의 숨소리를 기록한다. 숨멎음까지도. 이 슬픈 기록은 작가 마음속 짐승을 해소시키려는 작용일 수 있다. 시간이 흐를 수록 마음속에서 짐승이 자라고 있다는 그 절묘한 표현은 독재시대 누구나 예외일 수 없는 답답하지만 슬픈 침묵의 시대를 대표한다. 속에선 짐승이 울부 짖지만 겉으론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일상을 보내야만 하는 침묵과 무덤덤의 시대.

           
<표지를 벗긴 책이 예뻐서 사진을 찍어봤음...>

  작가는 침묵의 시대를 언어의 미끈거림과 아름다움으로 포장한다. 역설적이다. 하지만 침묵을 강요 당할 수록 생각은 복잡해진다. 이 모든 것은 작가의 심리적으로 복잡했던 경험과 관계있다. 스스로에게 무수히 많은 말을 하였지만 밖으로 내뱉는 말은 몇 없다. 그래서 소설「마음짐승」에서는 대화는 있지만 대화체로 표현하지 않은 듯 하다. 그러니까 큰 따옴표가 없다. 또 생각을 나타내는 작은 따옴표도 없다. 대화와 생각 모두 같은 형식으로 표현하였다. 이 모든것은 하나의 문장안에 고스란히 숨겨져있다. 읽다보면 대화이고 생각이다. 독재시대를 표현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중인 듯하다.

  이 소설의 또 다른 특징은 최소한의 챕터를 구분하는 숫자 표시마저 없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통짜로 하나의 이야기가 흘러가는 모양새다. 마치 날짜 없는 일기 모음과 같다. 그만큼 소설에서 벗어나 사실적 글쓰기로 보이지만 표현의 유려함으로 인해 사건의 객관적 진술보다는 주관적 색체가 강하다. 그만큼 사물을, 사건을, 인물을 보는 콘트라스트(대비)의 차이가 나타난다. 사실과 은유가 섞여있어 주인공은 마음에 강력한 지배를 받고 있는 듯이 느껴진다. 비관적 삶과 그에 대한 저항과 순응이 카드패 섞여 있듯이 교차되어 진행된다. 결국 이 모든 것이 마음짐승이 커 나가는 하나의 과정이다. 마음짐승은 사람이 느끼는 감정의 콘트라스트이다. 나를 기준으로 외면의 세계와 내면의 세계 그 콘트라스트의 차이가 크면 클수록 마음속에서 키우는 짐승도 자라난다. 그럼에도 외부로 분출시킬 수 없음이 답답하고 안타깝다. 내면의 세계에서는 결코 마음짐승을 죽여낼 수 없다. 머릿속에서 자라는 풀과 가슴 언저리에서 자라는 마음짐승, 이 또한 당시에 견뎌내야만 했던 인생의 무게였으리라.

  이 소설을 읽기도 전에 제목만 보고서 떠오른 또 다른 소설이 하나 있다. 국내 소설이다. 바로 윤대녕의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이다. 여기서 '호랑이'는 헤르타 뮐러의 '마음짐승'과 닮아있다. 두 책의 큰 차이점은 윤대녕의 소설 속 주인공은 '호랑이'를 낚기 위해 낚시질을 하지만, 헤르타 뮐러는 아예 망명의 이름으로 자신의 세계를 떠난다. 시대가 두 소설 속 주인공을 나락으로 몬 것은 분명하지만 윤대녕의 주인공은 여전히 공간 속을 활보하며 (마지막엔 제주도라는 공간에서) 인간관계를 통해 내면에 입은 상처를 어느 순간 치유하지만, 헤르타 뮐러의 주인공은 망명이라는 수동적 행위를 통해 자신의 세계를 일탈한다. 따라서 상처는 여전히 내면에 남아 있고, 사실상 극복하기엔 벽이 너무 높다. 작가의 말대로 자신은 운이 좋았음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책의 광고와는 달리 공포스럽지는 않았다. 정말로 시대의 공포가 만였했을 망정 헤르타 뮐러는 자신의 언어로 중화시켰기 때문일 듯. 지금은 작가에게 한낱 기억 일부로써, 추억의 단편으로써 남아 있을 수 있겠지만, 마음짐승이 할퀸 가슴의 상처는 그녀를 때때로 당시 독재시대로 언제든지 불러들일 수 있음을 생각하니 마음이 불편하다. 그래도 그녀는 운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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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1
김은국 지음, 도정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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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주인공은 '나', 계급은 대위. 다른 이들은 '이 대위'로 부른다. 가진급 상태. 소속은 육군본부 정치졍보국. 상관은 육본 파견대 정치정보국장을 맡고 있는 '장 대령'.

6.25.전쟁이 터지고 같은 해 9월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유엔군이 인천 상륙작전에 성공, 그 기세를 타고 내륙으로 뚫고 들어가 즉시 서울 점령, 그리고 10월 둘째 주, 평양을 탈환한 상황에서 소설은 시작된다.

장 대령이 정보를 가져왔다. 북한군이 평양을 빠져 나가면서 목사 열네 명 중 열두 명을 총살하고 단 두 명만을 살려 보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을 국제 뉴스에 올릴 좋은 선전 자료가 된다는 이유로 주인공인 '나'에게 뒷조사를 시킨다. 주인공인 '나', 이 대위는 주변을 탐문하면서 조사를 시작한다. 신을 믿으면서 공산주의자들에게 살아나온 두 목사는 어떤 사람들일까?

굉장한 정보를 얻었다. 믿을 수 없는 정보. 순교자로 이름을 올린 12명의 목사가 죽음을 목전에 둔 그 상황에서 목사들은 영혼의 지도자에서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섰다는 정보. 이 대위는 사건의 바닥에 접근할수록 사건의 정황을 뒤집을 수도 있음을 알아챈다.

2.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려움에 처하면 상황 반전을 모색한다. 그런데 어떤 방법도 찾을 수 없을 때 기적을 갈구한다. 소설 「순교자」는 6.25 전쟁이라는 정치적, 군사적 대립속에서 방황하는 개인과 군중을 그린다. 가장 큰 뼈대는 기적적으로 공산당원에게서 살아난 목사가 어지러운 사회속에서 어떻게 해석되는지 아니 어떻게 해석 되어야만 하는지를 등장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전광석화처럼 그려나간다. 소설의 배경은 6.25전쟁 당시이지만 실은 누가 점령하든 점령군에게 환영 일색 박수 갈채를 보내야하는 일률적인 해석만을 강요하는 편향적인 사회이다.

3. 대부분의 목사들은 죽음에 임박했을 때 '신의 개입'을 바랬다. '신의 개입'은 기적에 대한 직접 진술이다. 신의 손길이 처형장에 미치기를 원했다. 하지만 신이 강림했다는 어떤 낌새도 없었다. 그 순간 목사들은 자신의 알량한 목숨이 신의 것이라고 주일마다 내뱉었던 그 맹세에 허망함을 느꼈을 터. 신이 배반했는지 신을 배신했는지는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죽어가는 그 순간에 신을 더 이상 부르짖지 않았다는 그 사실.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신을 향한 기도는 공산당들을 향한 애걸로 바뀐다. 더불어 신에 대한 항명으로 침묵하는 목사마저 생긴다.

공산당원에게 애걸하는 그 순간 목사들이 믿고 섬기는 마음속 신의 자리에서 신은 사라지고 총 든 공산당원이 대신 들어선다. 하지만 단 한 명의 목사만이 총 든 자를 짐승의 위치에 놓고 호통을 친다. 총구가 어딜 향해 있건 상관치 않았다.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자들에게 애원하지 않음으로써 여전히 신의 자리는 신만이 있을 수 있다. 목사에게 호통을 받은 총을 든 공산당원은 목숨을 애걸한 다른 목사들과는 달리 이 목사의 저항에 흥미를 느끼고 목숨을 살려 준다. 미쳐버린 목사도 살려준다. 정말 신의 개입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끝까지 신을 믿은 자는 흔히들 말하는 '소설 속 이야기처럼'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4. 목숨을 잃은 자와 목숨을 구한 자 사이에서 신의 논리를 읽을 순 없다. 아니 신이 애초에 논리를 가질 필요나 있을까. 반대로 전지전능하지 못한 인간은 논리가 있다. 이제 그 논리 싸움이 후속 이야기로 펼쳐진다. 인간의 논리, 그럴 듯 하지만 결국엔 이득을 많이 가져가는 계산법이다. 좋은 게 좋은 거다는 것, 인간사에서 보편적이고 최상인 논리이다.

5. 평양 신도들은 당연하게도 죽은 열두 명의 목사를 순교자로 높여 부르기 시작한다. 다만 죽은 목사들이 마지막 자리에서 행했던 믿음에 대한 부정 행위는 숨겨진다. 이러한 과정에서 살아 돌아온 목사는 걸리적거린다. 사람들 사이에서 일말의 의구심은 없다. 어떻게 선과 악으로 뚜렷이 나눠진 세상에서 복잡다단한 진실이 덩굴처럼 얽혀있단 말인가. 공산당에게 죽은 목사와 그들 손에 살아 돌아온 목사, 이 둘 중 누가 더 신을 진정으로 섬겼다고 보이는가. 누가 더 좋은 목사인가. 답은 뻔하다. 뻔히 보이는데 어떻게 믿지 않겠는가.

6. 군중과 종교, 거기에 이들의 심리를 전쟁에 이용하고자 했던 군대. 각자의 위치에서 최상의 답만을 본다. 인간의 역사를 발전시켜온 동인 중 하나는 바로 인간이 가진 의심이다. 의심속에는 선과 악이 들어설 공간이 없다. 선한 의심이나 악한 의심 그 자체가 없다는 의미이다. 의심 그 자체로는 중립이다. 의심을 적절히 이용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정치다. 따라서 의심을 어떻게 일소시키는지도 중요하다. (소설속에서 얘기하는) 관찰만 하는 신의 논리에서 보면 최상의 의심 해소는 진실을 알리는 것이다. 혹은 시간속에 묻혀두는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진실이 드러난다. 신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을 동일시하면 안된다. 그렇다면 인간의 논리에서는 어떻게 의심을 해소하는가. 그것은 바로 정치적 공격과 방어 사이에서 맺은 암묵적인 동의이다. 좋은 게 좋은 것 아닌가.

7. 이 소설의 특징은 결말이라는 부분이 없다는 점이다. 전쟁은 진행중이고 또 급격하게 변해가는 중이다. 다시말해 잠시 전쟁의 포연이 살짝 걷히고 난 뒤, 평양에서 목사들을 총살시키는 이런 사건이 있었고, 다시금 북한군과 중공군이 합세하여 남하하자 목사들의 죽음은 수많은 죽음 속에 묻힌 것이다. 수많은 죽음. 그렇다. 당시 서부전선 또한 여전히 이상 없을 뿐.

8. 앞서 결말이 없다고 했는데, 사실 내가 읽은 이 소설의 결말은 다시금 앞을 가리킨다. 그것은 장대령의 죽음이다. 평양을 탈출한 주인공 '나'는 장대령의 부음을 장대령 친구인, 예전에 '군목(군대목사)'이었던 '고 목사'에게 듣는다. 장 대령의 죽음을 알리는 군대에서 보낸 편지 한 통. 그 속엔 장 대령이 첩보 활동을 하다 장렬히 산화하였다고 쓰여있다. 이렇게 또 인간사에서 또 한 명의 영웅(혹은 순교자)을 알린다.

9. 연극 같은 소설. 소설 속 인물들의 대화에 힘들이 실려있다. 마치 서로 자신의 논리가 맞다는 식으로, 무대 밖 관객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쓴다. 관객이 고개를 끄덕이면 그들의 논리는 탄력을 얻는다. 물론 끄덕이는 관객이 많으면 많을수록 자신의 논리를 선택한 관객의 숫자만 늘어갈 뿐 진실 규명과는 관계 없다.

이 소설이 왜 연극 같을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등장인물들의 대사에 힘이 들어간 소설이기도 하거니와, 소설 속 배경이 평양임에도 북한 사투리, 더 엄밀히 말한다면 평양 사투리가 울리지 않는다는 점이 흡사 외국 작품의 연극을 국내의 연기자들이 우리말로써 공연하는 것과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책의 마지막 몇 장이 할당된 해설을 읽어보면 된다.
『「순교자」가 'The Martyred'라는 제목으로 뉴욕에서 출판되어 나온 것은 1964년이다.』
한국도 아닌 미국에서 출간이, 그것도(물론 당연하게도) 영문으로 먼저 나왔단다. 6.25. 전쟁이 끝난지 10년 조금 지나서 영문으로 책이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영문으로 이 책을 냈고, 다시 역자(도정일)가 한글로 번역을 하여 이렇게 번역서를 낸 것이다. 다시금 번역 재판을 냈음에도 북한 사투리를 살리지 못한 것이 좀 아쉬운 부분이다. 북한(평양) 사투리를 어느 정도 살려냈다면 한국 독자들에게 사실적이고 좀 더 실감나는 독서가 되지 않았을까라고 소설 외적인 부분 또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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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6 00: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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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 노래 Mr. Know 세계문학 27
시배스천 폭스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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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새의 노래』(시배스천 폭스 | 열린책들, 2006)라는 책을 들게 된 이유는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 열린책들, 2006) 라는 책 때문이다. 레마르크의 이 책을 올해 초에 읽었었다. 참호속의 어린 병사 '파울 보이머'의 눈을 통해 전쟁의 본질을 들여다 보았는데, 시종일관 건조한 문체임에도 작가가 그의 조국(독일)에 극치의 조롱을 던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시배츠천 폭스의『새의 노래』의 배경 역시 세계 제1차 대전이다. 그리고 레마르크가 그려냈던 독일의 그 서부 전선이다. 서부 전선은 프랑스 북동부를 일컫는다.『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독일군의 시각으로, 『새의 노래』는 영국군의 시각으로 이 위선으로 치장된 전쟁을 노래한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전투들속으로 두 작가(시배스천 폭스와 레마르크)가 안내하는데로 이끌렸지만, 전쟁속의 작디 작은 개인을 그린다는 점에서 ,국적이 다른 이 작가들의 이야기는 별반 다를 것이 없었지만 그 효과는 중첩되어 이른다.

잃어버린 세대.

전쟁터의 병사들은 시간이 등져버린 세대이다. 역사가 이들 세대를 기록했지만, 수많은 개인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국가가 있기전에 국민이 있지만 이미 국민, 아니 개개인의 삶은 국가에 통채로 먹혀버렸다. 특히나 총을 들고 전쟁터에 나선 이들은 더더욱. 인간이 '적'이라는 개념을 갖는 것이 얼마나 비극적인지를 『서부 전선 이상 없다』와 『새의 노래』에서는 명확히 보여준다.

1차 대전의 특징은 가스전과 참호전, 그리고 철조망이다. 참호전이 얼마나 드셌으면, 우리가 입는 코트 이름에 참호(혹은 도랑)라는 이름을 가져다 붙였겠는가. 이 코트의 이름은 '트렌치 코트'이다. '트렌치(trench)'가 바로 참호라는 뜻이다. 그리고『새의 노래』에서 알게되었지만, 땅굴도 같이 파면서 전쟁을 치루었다. 영화속에서나 문학속에서 땅굴을 크게 다루어오지는 않았지만(땅굴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해다), 어쨌든 여기서의 땅굴은 전쟁을 치루는 아군들끼리의 계통을 가르는 경계이다. 참호는 서로 다른 이념을 가르는 경계로 해석하면 되겠다.(사실, 무의미한 해석이긴 하다.) 굳이 철조망까지 언급해본다면, 이는 상대의 참호에 다다르기 위해 비용(혹은 희생)을 치러야만 하는 고지서나 다름없다. 시배스천 폭스의 이 책은 바로 '참호전'과 '땅굴전' 그리고 '철조망'에 얽힌 전쟁이다. 그리고 주로 부각되는 것이 참호와 땅굴이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서는 철조망이 부각된다. 이 두 책에는 흥미로운 것이 하나 있는데,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서는 야밤(혹은 새벽)에 독일군이 철조망 치러 나가는 모습의 묘사가 잘 나타나있다. 철조망 치는 것을 끔찍이도 치기 싫어하는 어린 병사들을 주로 다룬다. 『새의 노래』에서는 영국군이 철조망을 끊어야한다는 의지를 문맥속에서 암암리에 드러낸다.

수많은 전쟁 영화가 있겠지만, 문득 생각이 나는 영화가 있다. 본지가 오래되었고, 기억도 가물가물하여 세세한 기억은 나진 않지만 분명 맞을 듯 싶다. 영화의 제목은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가을의 전설』이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잊었다. 다만, 참호를 뛰쳐나가려는 영화속 병사들의 긴장한 모습이 단편적이긴 하지만 생생하다. 수킬로미터에 걸친 참호속에서 일렬씩 정렬한 병사들이 호각 소리에 맞추어 참호밖으로 기어올라 독일군 진지로 향하는 모습은 정말 가관이었다. 죽음을 향해 뛰어드는 형국 그 자체였으니까. 그리고 이 영화속 또 하나의 인상깊은 장면은 '철조망'에 걸린 한 병사이다. 찾아보니 이 병사는 '브래드 피트'의 극중 막내 동생이었다. 동생은 거미줄에 걸린 힘없는 곤충처럼 수차례 날개짓만 하더니, 결국 철조망에 걸린채 죽음을 맞는다. 독일군의 기관총에 난사당한다. 형인 '브래드 피트'는 울면서 구하러가지도 못하고 지켜만 본다. 그래도 이 영화는 양반이었다. 『새의 노래』에서도 비슷한 장면의 묘사가 나오는데, 철조망에 걸린 병사의 형체가 조각 조각 사라지는 모습을 차근차근 순서대로 묘사해놓았다. 그것을 보고 있는 주인공인 '스티븐'(직책은 중대장)의 마음 역시 그 병사의 형체 그대로 갈갈이 찢겨진다.



-- 그림은 '가을의 전설' 中에서...
출처 : http://blog.naver.com/blueskysite?Redirect=Log&logNo=80043905038 --


국가가 전쟁을 하는 이유는 많겠지만, 그 수많은 이유들을 단 두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단순하다. 무언가를 뺏으려하거나, 무언가를 지키려하거나. 하지만 병사들에게 있어서 이 개념마저도 희박하다. 그래서 국가는 '적'을 주입시킨다. 그 다음부터는 자동이다. 왜냐하면, 알아서 상대를 향한 분노로 몸안 가득 차게 될테니까. 자신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총알을 고이 날려주어서만은 아니다. 자신의 동료가 끔찍하게 죽어가는 것을 보고, 스스로 분노를 키우는 것이다. 이름없는 병사들은 쓰러진 또다른 이름없는 병사들을 위해 자신이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한가지를 아낌없이 내던진다. 그들이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것은, 그들의 목숨이다.

시배스천의 이 책은 흥미롭다. 전투신에서는 그냥 빨려들어간다. 하지만, 가끔 책을 읽는데 장애를 만난다(나에게는 그랬다). 이 책은 총 세가지 부분으로 나뉘어져있는데, 전쟁전, 전쟁 당시, 그리고 전쟁이 한참 지난후의 이야기로 나누어 놓았다. 개인의 비극사를 더욱 확장시키려는 작가의 의도가 있겠지만, 나에게는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다. 전쟁전 그 당시 프랑스 북부는 평화롭고, 다양한 색깔이 어우러졌으며, 느렸다. 그리고 전쟁후의 이 지역은 고통의 신음소리, 질척이고 칙칙한 어두운 단색, 그리고 긴박함으로 묘사하고 있다. 물론 이 두가지 차이가 극명하니 대비를 보이긴 하지만, 전쟁에 대입되어진 개인사가 솔직히 장난스럽게 느껴진 부분도 있다. 한마디로 전쟁전의 개인의 삶을 약간은 잘못 투영시키지 않았나 하는점이다. 만약 작가가 '전쟁 = 국가의 미친 선전 + 개인의 도피'라는 공식을 다루고 싶었다면, 좀 더 설득력있는 개인사를 다뤘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이다(내가 잘못된 해석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또 전쟁후는 좀 더 실망이다. 잃어버린 세대의 후손을 다루었는데, 이 역시 다뤄진 개인사의 스펙트럼이 너무 좁아 몇가지 상황을  어거지로 이어붙였다는 느낌이다. 1차 세계대전을 치루었던 할아버지의 실체를 찾음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완성시키려는 한 여인의 이야기인데, 둘의 유전자 코드가 너무 닮아있다. 역사가 주는 우연과 필연, 두가지 관점에서도 너무 어설프다.

주인공 '스티븐'이 가지고 있는 '암호만들기' 특기는 그 소재가 주는 독특성과 새로운 이야기를 이끌어낼 수 있는 파워를 가졌음에도, 너무 긴 이야기를 쓰다 작가 자신이 미처 까먹고 있다가, 뒤늦게 발견하고 부랴부랴 그 '존재의 이유'를 낭비해버린 느낌을 받았다.

그래도 전쟁신과 작가가 의도하려는 이야기는 특별한 어긋남없이 독자에게 전달되어지는 것 같아 이것으로 만족하긴 한다. 내가 읽고 싶은 부분은 오직 전쟁신이었기에 말이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오히려 훨씬 간결한 이야기임에도 모든 것들이 충격으로 다가왔던 바, 전쟁관련 책을 읽길 원한다면 이 책부터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덧붙임>
 
1. 제1차 세계 대전을 다룬 (내가 알고있는) 몇가지 책들...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열린책들'에서 출간한 것으로 읽었기에 사진을 이것으로 올린다. 정말 최고의 책이다. 이 책을 읽고 1930년에 '루일스 마일 스톤'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도 봤을 정도이다. 영화 또한 수작이다. 1931년에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았다한다.

『참호에서 보낸 1460일』이라는 책은 소설은 아니지만, 충분히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1차 세계대전중의 참호와 관련된 내용들을 다큐멘터리처럼 이야기한다. 참호가 단순히 땅만 판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 휴전, 큰 전쟁을 멈춘 작은 평화』, 이 책은 영국군 병사들과 독일군 병사들간의 크리스마스 휴전을 한 이야기인데, 읽어보진 않았지만 감동의 이야기라는 것을 확신한다.

2. 혹, 좀 더 색다른 전쟁 이야기를 읽고 싶다면, '로버트 카파'의 책 두권을 권하고 싶다.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로버트 카파 | 필맥, 2006)『로버트 카파』(알레스 커쇼 | 강, 2006)이 그것이다. 정말 재밌게 읽을 것이다. (각각의 링크는 나의 독후감이다)

3.그리고 소개할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이라는 책은 개인의 삶(후손을 포함한)이 어떻게 역사에 개입당하는지, 혹은 평범한 개인이 역사속에서 어떻게 필연과 우연으로 실타래를 풀어오는지를 이야기하는 책이다. 한 꼬마의 시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긴 하지만, 현재 그 꼬마를 잉태시킨 집안의 내력은 폭력의 역사속에서 결코 나약하지 않다. 꼬마도 강한놈이다.(링크는 간단한 나의 독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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