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신규대졸자 실업문제

이와 같이 강력한 통제 정원 정책으로 전환하게 된 정책 배경은 고급인력의 실업률 증가 및 경제발전 정책의 추진, 사립대학의 기업화 및 부실운영, 정치적 안정에의 필요 등으로 집약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도 강하게당시의 고등교육 정원에 대한 문제의식이 제기되게 된 배경은 고급인력공급의 과잉 현상이다. 해방 이후 지속적으로 확대된 고등교육 인구는1960년대 들어 대량의 고등 실업자군을 양산하였다. 1962년 대학 정비를단행하기 이전의 고등교육기관 졸업자의 취업률은 40%를 넘지 못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으며(공보부, 1962: 158. 송광용, 1989: 17에서 재인용),
1963년에는 45.5%, 1965년에는 37.6%였고 이중 4년제 대학 졸업자의 취업률은 1963년에는 38.7%, 1965년에 34.7%에 불과하였다.18) 고등 실업은 국가적으로 볼 때나 개인적으로 볼 때나 모두 자원의 낭비를 초래하는한편, 좌절로 인한 사회 불안을 초래할 여지를 안고 있어 특히 정책 결정에 주요 고려사항이 되었다. ‘학교정비기준령‘에서 전국 대학생 정원 총수를 책정할 때 ‘국가의 인력 수요‘를 첫 번째 기준으로 삼은 것은 당시 고급 인력의 유민화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이와 관련하여 1960년대는 한국의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된 시기로서, 경제발전에 필요한 인력의 양성이 교육계의 중요한 과제로 던져ㅈ던 출발점이다. 국가발전은 1960년대 이후 ‘학교정비기준령‘을 비롯하ㅇ정원정책의 주된 이유 혹은 목적으로 일관성 있게 강조되었고, 여기에대학정원에 대한 국가 통제가 정당화되었다. - P19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브레즈네프가 죽고 몇 달이 지난 1983년 4월 경제학자와 사회학자 수백 명이 소련의 영속적인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시베리아의 노보시비르스크에 모였다. 이 모임에서 다룬 질문은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와 “어떻게 해야 하는가”였다. 세계 두 번째 강대국을 다시 움직이게 만들라는 안드로포프의 요구에 용기를 얻은 회의 참가자들은 쇠락하는 경제 성과의 원인을 분석하려고 애를 썼고 열악한 기후 환경, 숙련된 인력 부족, 근무 기강 해이 등의 상투적인 설명은 제외하고 중앙계획경제의 훨씬 폭넓은 폐단에서 문제점을 찾으려 했다. 학자들이 내린 평가에 따르면 소련 경제는 낮은 생산성, 조잡한 생산물, 천연자원의 낭비라는 스탈린 시대의 낡은 틀에 갇혀 있었다. 모르는 것이 없어 보이는 경제정책 담당자들이 만든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개인의 진취성을 말살했다. 모든 중요한 결정을 중앙에서 내리는 중앙통제체제는 산업기반이 형성되던 시기에는 꽤 잘 작동했지만 이때의 경제 난국은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다.

노보시비르스크 회의 참가자들은 검열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자신들의 결론을 마르크스-레닌주의 용어로 포장하는 데 신경을 썼다. 결과보고서는 58부로 한정하고 번호를 매겼다. 표지에는 “기밀-대외비”라는 도장을 찍었다. 이렇게 보안에 신경 썼지만 한 부가 서방에 유출되어 하룻밤 사이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178 소위 노보시비르스크 보고서는 세계를 휩쓰는 기술혁명이 제기한 문제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놓고 벌어진 소련의 막후 논쟁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었다. 획일적이고 정체된 것처럼 보이는 겉모습 뒤에서 뭔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1991: 공산주의 붕괴와 소련 해체의 결정적 순간들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농촌 지역에서는 효과적인 정부 통제와 별도로 농민들이 영주들을 몰아내고 저택을 불태우는 등 나름의 방식으로 복수했다. 복수가 대강 완수되자 그들의 복수는 지역사회의 더 부유한 농민들, 이른바 쿨라크Kulak에게로 향해 그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몰수’라는 전문용어는 새로운 유행어가 되었다.

양측이 벌이는 내전은 잔인하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었고 극심한 고통과 슬픔을 남겼다. 러시아 서부 지역에 사는 유대인들은 집단학살을 당했는데 그 야만성이 러시아제국 말기보다 더 심했다. 무정부주의와 혼란이 그 지역을 휩쓸었다. 옛 러시아제국 군대의 장교들이 이끄는 백군(볼셰비키 반대파)은 이전의 러시아전쟁 동맹국(영국, 프랑스, 미국)과 일본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주변 도시에 조직되었다. 그들은 볼셰비키를 몰아내고 구체제를 회복하고 싶어 했다

아주 짧은 소련사 중에서



1920~21년 겨울에 거둔 성과는 농민들의 지지 덕분이었다. 농민들은 백군이 승리하면 영주들이 복귀할까 봐 두려워했다. 똑같은 이유로 러시아제국의 비러시아계 사람들도 ‘나뉠 수 없는 하나의 러시아’를 강조하는 백군에 시큰둥했다.

아주 짧은 소련사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련 전 지역에서 장·단기 계획에 따라 근대화와 전통 해체가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서구 국가가 사용한 그레고리력보다 13일 더 빠른 러시아제국의 율리우스력은 일찌감치 폐기되었다(1918년에 율리우스력이 그레고리력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10월혁명’의 기념일은 11월 7일이 되었다).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한 뒤 몇 달 만에 옛 문자 표기법 변경, 여러 법적인 족쇄로부터 여성 해방, 낙태 합법화, 당사자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이혼, (특히 미신의 심각한 온상으로 간주된) 동방정교회 해산, 사회적 계급 철폐 등이 이루어졌다

아주 짧은 소련사 중에서


새해 연휴가 끝나면 곧이어 크리스마스다. 러시아에서 크리스마스는 12월 25일이 아니라 1월 7일이다. 서구의 크리스마스와는 14일 차이가 난다. 가톨릭에서는 그레고리력을 사용하지만, 러시아 교회를 포함한 동슬라브 교회는 율리우스력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지극히 사적인 러시아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러시아 사람에서 자유란 혼돈, 혼란, 무질서와 같은 말이다. 책임질 사람이 없고 질서나 규칙이 없으며 누구나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혼란이라 생각한다. 질서는 자유의 반대말이다 - <러시아는 왜 그럴까?>, 벨랴코프 일리야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XtZKbp4ygQXAcJXW9

1991년에 소련이 무너지면서 새 정부 구호 중 하나가 바로 자유였다. 옐친 전 대통령은 공산주의로부터 자유, 표현의 자유, 시장의 자유를 외치며 정권을 잡았다 - <러시아는 왜 그럴까?>, 벨랴코프 일리야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tQpkNkH8fiLdFYDa

표현의 자유는 책임 없는 발언으로, 거짓말과 동의어가 되어 버렸다. 나날이 가난해지는 국민은 자유를 외치는 위선에 지쳤다. 정치의 자유는 정치를 해서는 절대 안 되는 사람이 정계에 들어오려는 꼼수에 불과했고, 시장의 자유는 부자만 돈을 벌고, 국민은 가난해지는 빈익빈 부익부와 같은 말이었다 - <러시아는 왜 그럴까?>, 벨랴코프 일리야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7TtojrFxE2Dw8LJC6

우리에게 필요한 건 자유가 아니라 질서가 필요하다는 생각, 이 상황을 현명하게 이용한 사람은 바로 푸틴이다. 러시아에 필요한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질서가 있는 강한 사회라고 강조한다. 자유가 없는 게 아니라 혼돈과 혼란이 없는 거라고 우긴다 - <러시아는 왜 그럴까?>, 벨랴코프 일리야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UjhmAhBo4WQpmB9c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