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말 종교적인 혼란이 지나간 뒤 17세기 유럽사회(지도)는 구교의 카톨릭 세계와 신교의 프로테스탄트 사회가 서로 자리를 잡는 시기였습니다. 두 세력은 적대적이었지만,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완전히 밀어낼 수 있을 만큼 절대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지금의 네덜란드에 해당되는 플랑드르 지방은 16세기이래 구교권인 스페인의 지배아래 놓여 있었지만 캘빈주의로 개종하면서 오랜 투쟁 끝에 비로소 종교의 자유와 정치적 권리를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여전히 카톨릭으로 남았던 남부 홀랜드(지금의 벨기에)를 제외한 네덜란드는 근검하고 철저한 청교도적인 생활을 기본으로 독자적인 미술을 만들어 갔습니다.

 

도1 얀 베르메르 < 델프트 풍경 >
1659-60년, 캔바스에 유채, 98.5×117.5cm
헤이그 마우리츠호이스 박물관
 
 
 
도2 피터 드 호흐 < 델프트 저택의 위뜰 >
1658년, 73×60cm, 런던 국립미술관
 
 
 
 

바다를 끼고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해 나갔던 네덜란드는 상업에 종사하는 시민들이 모인 공화국 사회였기 때문에 권력이 한 집단 또는 개인에게 집중되어 있던 이탈리아나 스페인과는 달리 다수의 소시민에 의한 경제, 정치구조가 형성되었습니다. 베르메르(Varmeer: 1632-75)의이 고요한 델프트의 풍경화와 드 호흐(Peter de Hooch, 1629-1684)의 거리풍경은 네덜란드 사회의 한 단면을 놀랍도록 정밀하게 그렸습니다(1,2). 별다른 장식 없는 교회와 붉은 색 벽돌로 지은 일반 가정집이 낮은 지평선에 따라 펼쳐진 17세기 네덜란드 도시의 모습일 것입니다.

 

 

네덜란드인의 취향은 그들의 건축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네덜란드의 번영이 절정에 이르렀던 17세기 중엽에 국가적인 자부심을 위해 세운 시청사 (市廳舍)는 크고 당당하기는 하지만 장식이 없는 수수한 모습니다(도3, 4). 이 건물의 조촐한 실내는 베르사이유의 사치스러운 궁전과 크게 대조됩니다. 네덜란드 시민들은 카톨릭 국가, 교회의 사치와 허영을 혐오하여 당시 전 유럽을 휩쓸었던 화려한 바로크 양식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도3 야콥 드 탐펜 < 네덜란드 시청사 >
1648년, 현재는 왕궁, 암스테르담
 
 
 
 
도4 네덜란드 시청사 실내, 1648년
 
 
 
 
 

이러한 사회의 변화는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의 모습을 특징 지웠습니다. 그러나 종교적인 검약은 당시 미술가들에게 큰 위기였으며 그들은 다른 대안을 찾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대규모의 교회나 왕궁을 중심으로 한 장식미술이나 조각대신 이곳에서는 가정집에 걸만한 다양한 장르의 작은 그림들이 활발하게 제작되었습니다.

 

 

하를렘에서 활동하였던 프란츠 할츠(Frans Hals, 1580-1666)는 17세기 네덜란드 시민들의 유쾌함과 당당함을 생생하게 포착하는데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였습니다(도5). 독립투쟁시기에, 네덜란드가 스페인의 왕실에 맞서 당당하게 자유를 쟁취할 수 있었던 것은 시민들로 이루어진 민병대들의 활약이 있어서였습니다. 독립이후 네덜란드 사회가 성숙해 가면서 이들 민병대의 모임은 보다 유쾌하고 상징적인 사교모임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기념일에 기수를 앞세우고 거리를 행진하고는 성찬의 식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자부심을 기록하기 위한 집단 초상화를 주문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지금의 단체사진과 같은 것이겠지요.

 

도5 프란츠 할스 < 성 조지아 시민 민병대의 연회 >
1627년 경, 캔버스에 유화, 179×257.5cm,
하를렘 프란츠 할스미술관
 
 
 
도6 코르넬리스 반 하를렘 <성 조지아 시민 민병대의 연회 >
1599년, 캔버스에 유화, 169×223cm,
하를렘 프란츠 할스미술관
 
 
 

대금을 지불한 조합원들을 공평하게 그리면서도 활기 있게 그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할스가 이 그림을 그리기 삼십여년전 하를렘의 또 다른 화가 코르넬리스(Cornelize van Haarlew, 1562-1638)는 인물들을 무표정하게 늘어놓는 방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도6) 그러나 할스는 다양한 포즈들을 그럴싸하게 조합하고 활달하게 붓을 놀려 시끌벅적한 연회의 장면을 되살렸습니다.

 

 

이러한 집단초상화의 영역을 한단계 올려놓은 이는 다름 아닌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의 대가 램브란트(Rembrandt, 1606-1669)였습니다. 네덜란드 미술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커서 그에게는 다시 한 시간을 할애해야 할 것입니다.(다음 주제에서는 루벤스와 함께 다시 다룰 예정입니다.)

 

도7 램브란트 < 직물조합 길드원들의 초상 >, 1662년
191.5×279cm,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1662년 렘브란트는 한 직물길드 임원들의 모임을 기념하는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눈앞의 붉은 직물의 두툼한 질감을 통해 주문한 길드의 특성을 살리고 검고 흰 신교도들의 의상의 조화가 더없이 아름다운 이 초상화의 주인공은 네덜란드 번영의 주역인 상인들의 초상화였습니다. 한 역사가는 "형제애를 보여주고 있는 이 다섯 명의 평의원들은 네덜란드 공화국의 힘과, 상업, 그리고 관용의 전형적인 상징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대가의 능숙한 솜씨에 초상화는 역사화에 버금가는 가치를 지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중산층들을 기품 있게 그려낸 집단 초상화들이 공적인 역할을 한다면 그들의 가정집을 위해서는 풍속화와 정물화 그리고 풍경화 등 소위 장르화들이 요구되었습니다. 아드리안 오스타데(Adriaen Jansz van Ostade, 1610-1685)의 이발소에서 이빨을 뽑는 장면과 같은 시민들의 일상이나 거나하게 취한 술꾼들의 잡담과 수작을 다룬 부라우에르(Adriaen Brouwer, 1605년경-1638)의 선술집 장면과 같은 통속적인 풍속화들은 우리를 즐겁게 합니다.

 

도8 아드리안 오스타데 <이빨을 뽑는 이발사 >
1630-35년, 나무패널에 유채, 34×41.3cm
빈 미술박물관
 
도9 아드리안 부라우에르 < 담배피는 남자들 >
1637년경, 나무패널에 유채, 46×36.5cm
뉴욕 매트로폴리탄 박물관
 
 

그러나 아래 얀 스텐(Jan Steen, 1626-79)의 <인생극장>(도10)의 전면에 들어 올려진 장막이 암시하는 것처럼, 그러한 일상은 단지 막이 내려질 한편의 드라마는 아닐까요? 때로 네덜란드의 통속적인 장르화 에서는 냉소와 풍자의 느낌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도10 얀 스텐 < 인간극장 >, 1665년, 68.2×82cm
헤이그 마우리츠 호이스 미술관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한 정적을 느끼게 하는 화면으로 20세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작가 베르메르는 독특한 실내연작을 그렸습니다. 카메라 옵스큐라라는 장치를 이용하여 깊이감과 하얀 작은 색점으로 빛을 포착하였습니다.

 

도11 베르메르, < 우유 따르는 여인 >
1658년 경, 45.5×41cm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도12 도11의 부분
 
 
 
 
 

방의 한 구석 빛이 부드럽게 스며드는 창을 마주하고 우유를 따르는 여인의 일상적인 모습이 하나의 의식처럼 보이는 것은 왜 일까요. 여인의 몸과 흰 머리쓰개의 색채와 형태적인 대비, 테이블 위에 놓인 마른 빵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 촉각적인 질감의 표현, 화가는 모든 정성을 다하여 눈에 보이는 이 작은 공간을 캔바스의 화면에 응결시킵니다. 베르메르의 일련의 풍속의 장면들에 여러 가지 상징과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그의 세계에 매료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조형적인 공간의 완벽성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캔버스가 자연의 거울인양 사물들을 더 없이 성실하게 관찰하고 그것에 상징성을 담는 것은 얀 반 아이크 이래 북유럽 미술의 한 전통이었으며 이러한 정물화의 전통은 17세기 네덜란드에 와서 그 절정기를 맞이합니다. 수많은 전문화가들이 꽃, 과일, 모든 종류의 음식과 값비싼 금은 식기류에서 베네치아 산 유리잔과 델프트의 그릇, 책과 필사본 악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물들을 그려냅니다. 이들은 언뜻보아 단순한 일상의 장면같지만 많은 상징이 내재하고 있습니다.

 

도13 클라스 헤다 < 파이가 있는 아침식사 >
1631년, 나무패널에 유채, 54×82cm
드레스덴 독일 미술관
 
 
 
도14 피터 클라즈 < 바니타스 >
1630년, 39.5×56cm
헤이그 마우리츠 호이스 미술관
 
 
 

헤다(Willem Claesz Heda, 1594-1680/82)의 <아침식탁>(도13)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방금전에 사람이 손댄 흔적이 있는데, 파이는 벌써 상하려하고, 위태롭게 누운 유리잔은 바닦에 금방이라도 떨어져 깨져 버릴 것만 같습니다. 헤다의 정물화는 네덜란드 정물화에 사실성과 상징성이 얼마나 멋지게 결합할 수 있는 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러한 정물화들은 때때로 함께 그려지는 해골이 명시하고 있듯이 인간의 삶이 무상하다는 것을 보는 이들에게 일깨우는 도덕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도14). 그러나 수없이 그려지는 다양한 사물들의 객관적인 묘사에 화가들과 네덜란드인들이 매료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그들이 그린 꽃이나, 동물들의 모습은 도감을 보는 듯 너무나 생생하며 이러한 사실성이 극에 달하면 때로 '눈속임 그림 Trompe d'Oeil'이 되기도 합니다.

 

도15 보스하르트, < 꽃 >
1620년, 나무패널에 유채
헤이그 마우리츠호이스 미술관
 
 
 
도16 후그스타텐, < 정물 >
1666-68년, 63×79cm
칼스러흐 미술관
 
 
 

이처럼 교회나 절대군주와 같은 권력자들의 후원이 뚝 끊긴 네덜란드의 화가들은 다양한 장르의 주제를 개발하여 17세기 네덜란드의 중산층과 소시민들의 취향에 맞추어 나갑니다.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오랫동안 역사화나 종교화의 배경이었던 풍경 그림은 점차 독자적인 화풍으로 자리잡혀 가게 됩니다. 그들의 삶의 터전인 바다의 다양한 표정, 야트막한 둔덕의 해안풍경과 농가의 모습이 수많은 전문 화가들에 의해 그려집니다.

 

 

그들의 풍경화는 하나같이 낮은 지평선에 하늘과 구름의 표정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도17, 18). 낮게 깔린 지평선은, 저지대인 이곳 네덜란드의 지형이 반영된 것이지만, 덕분에 풍경화가들은 옛날 방식대로 전경, 중경, 후경을 어떻게 구성할지 고민하지 않고 바로 시원한 화면을 얻어 낼 수 있었습니다.

 

도17 윌램 반 데 벨데 <정적: 항구로 되돌아 오는 네덜란드 선박>
1665-70년, 161×233cm, 캔버스에 유채
런던 왈라스 컬렉션
 
 
 
도18 반 루이스달 < 에이크의 풍차 >
1670년경, 83×101cm, 캔버스에 유채
암스테르담 국립술관
 
 
 

그러나 네덜란드의 풍경화는 단순히 풍경의 사실적인 스케치는 아닙니다. 화면의 넓은 부분을 차지하는 하늘, 때로는 고요하게 맑지만 언제 먹구름을 몰고 와 비를 쏟을 지 모릅니다. 멀리서부터 피어오르는 검은 구름과 미풍의 전조를 <에이크의 풍차>(도18)그림의 오른쪽에 서 있는 네덜란드의 여인들은 분명히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17세기 네덜란드의 풍경화에는 자연에 깃든 신에 대한 감사와 자신들의 터전에 대한 애정, 그리고 두려움이 묻어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알아본 것처럼 네덜란드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직업화가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자연에 대한 관찰과 유머로서 자신들의 사회를 풍부하게 그려냈습니다. 규모는 작으나 그들의 삶에 밀착된 흥미로운 이젤화들을 많이 생산해낸 성과는 무엇보다 17세기 네덜란드 사회의 반영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은 그리스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미술이 다수의 시민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였던 유일한 시기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미술의 대중성과 회화성의 융합은 현재에 있어서도 미술가들의 커다란 과제가 아닐 수 없으며 그런 면에서 17세기 네덜란드 황금기는 하나의 모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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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ika 2004-10-15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행에서 보고온 그림들이 많아서 반갑네요.. 누군가 유럽여행가다면 판다님 서재에 꼭 들렸다 가라고 말해줘야겠어요...^^
 

17세기, 바로크시대(지도) 회화의 놀라운 변화는 이탈리아 북부 출신의 화가 카라바지오(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3-1609)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아니발레 카라치와 같은 시기에 활동하였지만 고전주의의 고상함을 따르기보다는 오직 자신의 눈으로 본 것에 의지하여 추하더라도 현실을 그리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카라바지오의 리얼리즘을 일반적으로 '자연주의'라 부릅니다.

카라바지오는 밀라노 근처의 롬바르디 지방에서 태어났는데 이 곳은 이탈리아의 다른 지역보다 북유럽 사실주의의 영향이 강했던 곳이었습니다. 초기에 카라바지오는 이곳에서 정물화나 장르화를 주로 그렸습니다(도1).

 

도1 카라바지오 < 과일바구니 >, 31x47 cm
밀라노, 피나코데카 암브로지아나도
 
 
도2 카라바지오 < 바커스 >, 1596년 경
캔버스에 유채, 95x85cm
피렌체, 우피치박물관
 

포도넝쿨로 관을 만들어 쓰고 포도주 잔을 건네는 그림의 주인공은 고대와 르네상스시대에 즐겨 다루어졌던 주신 바커스가 분명합니다(도2). 그러나 볼이 발그레한 이 이탈리아의 소년은 어쩐지 신화 속의 불멸의 신이기보다는 분장한 어린 모델 같습니다. 게다가 소년은 우리의 응시를 의식하고는 미묘한 눈길을 던지며 넘칠 듯한 포도주를 권하기까지 합니다. 소년이 조심성 없이 받쳐든 투명한 잔이 떨어진다면 아마도 포도주가 관객들에게 쏟아져 버릴지도 모릅니다. 화면에 바짝 다가앉은 주인공의 시선과 내민 팔은 관객의 공간을 침범하기 때문에 보는 이들은 이 그림을 편안하게 감상하기 어렵습니다. 이같은 세밀한 관찰에 바탕을 둔 카라바지오의 자연주의는 압축된 공간과 강렬한 빛으로 보는 이들의 감정에 직접 호소하는 획기적인 표현방식을 구사하였습니다.

 

 

아래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는 장면을 그린 <엠마우스의 저녁식사>는 카라바지오의 그러한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소스라치게 놀란 한 제자는 경이로움에 우리쪽으로 의자를 반쯤 밀치며 일어나고 있으며, 베드로의 뻗친 팔은 화면을 뚫고 나오는 것 같습니다. 식탁의 모서리에 비죽 나온 접시는 이러한 극적인 장면을 더욱 긴박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화면의 긴장감은 강렬한 빛의 사용 때문에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어둠속에서 예수는 침묵하고 있지만 그에게서 나오는 듯한 빛은 어떠한 소란한 설명보다도 훨씬 웅변적입니다. 그러나 그 빛은 자연의 빛이 아니라 예수의 신성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도3 카라바지오 <엠마우스에서의 식사 >, 1601-02년
139x195cm, 런던, 국립박물관
 
 
도4 카라바지오 < 엠마우스에서의 식사 > 도3의 부분
 
 
 
 
 

카라바지오는 성격이 난폭하고 다혈질이어서 늘 다툼을 일으켰지만 그의 종교화는 인기를 끌었습니다. 밀라노를 떠나 로마에 온 카라바지오는 성 프란체지 교회의 콘타렐리 가족예배실 제단화(도5)를 주문 받아 본격적인 종교화를 그리게 됩니다. 아래 사진은 콘타렐리 예배실의 광경입니다.

 

도5 로마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지 교회
콘타렐리 예배당 실내
 
 
 
 
 

카라바지오는 이곳에 복음서가 마태의 세가지 사건, 즉 예수의 부름을 받고, 천사의 인도로 복음을 남겼으며, 마지막에 순교하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기독교에서 성인들을 고귀하고 품위 있게 묘사하는 것은 오래된 전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카라바지오는 성인들을 그리는데 앞시대의 전형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았습니다. 맨발을 드러낸 채 의자에 엉거주춤 걸쳐 앉아 천사의 목소리를 받아 기록하는 마태는 매우 당황한 모습니다(도6). 그의 두 손은 너무 어색해서 이전에 사도들이 학식 높은 철학자로 그려졌던 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그러나 벽화로 걸린 이 그림도 카라바지오에게는 한껏 미화시킨 결과였습니다. 주문자로부터 거절당한 첫 번째 작품에서 성인 마태는 그야말로 고집 세고 무식한 당시의 하층민처럼 묘사되었던 것입니다.

 

도6 카라바지오 < 마태의 부름 >, 1602년
로마,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지 교회 콘타넬리 예배당
 
 
도7 카라바지오 < 성마태와 천사 >
1602년, 2차대전에 소실
베를린 프리드리히황제 박물관
 
 
 

반종교개혁시기의 다른 벽화들처럼 화려하게 교회를 장식하는 종교화를 과감하게 거부한 또 다른 작품은 <성모의 죽음>(도8)입니다. 카라바지오는 로마의 강변에서 건진 여자의 시체를 모델로 삼아서 그렸다고 하는데, 흐트러진 머리와 옷 매무새, 퉁퉁 부은 몸과 푸르뎅뎅한 피부색까지 그대로 그려져 있습니다. 원죄 없이 태어난 천상의 여인을 이렇게 속되고 비천하게 그린 예는 미술사에서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도8 카라바지오 <성모의 죽음>, 1606년
369x245cm, 파리 루브르박물관
 
 
 
 

이 그림역시 주문자에게 거절당했는데 그러나 카라바지오가 그린 신앙인들의 모습이 비천하다해서 그가 당시 카톨릭 교회의 이념을 왜곡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의 생존 당시 그를 따른 가난한 무리들을 상상한다면 아마 카라바지오의 그림이 오히려 성경에 더 가까운 전달일 것입니다. 이처럼 순진한 사람들에게 체험적으로 다가오는 종교를 강조하는 것은 당시 교회의 대중화를 추구하였던 반종교 개혁의 반영이기도 하였습니다.

 

 

동성애 성향으로 물의를 일으키거나, 사소한 놀이 끝에 동료를 살해한 경력과 잦은 투옥 등 곡절 많은 생애를 살았던 카라바지오는 평생 제자를 두거나 일가를 이루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시도하였던 혁신은 이탈리아에서 많은 추종자를 낳았으며, 스페인, 프랑스, 플랑드르 등 전 유럽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아래 보이는 프랑스의 지방화가 조르주 드 라 투르나, 네덜란드 유트레히트지방의 혼트호스트 작품은 카라바지오 화풍이 전 유럽으로 속속들이 퍼져나갔음을 잘 보여줍니다.

 

도9 조르즈 드 라 투르
< 성 세바스티안을 돌보는 성녀 이렌느 >
1649년 경, 파리 루브르박물관
 
도10 혼트호스트 < 재판관 앞에 선 그리스도 >
 
 
 
 
 

카라바지오 화풍을 따랐던 이탈리아의 아르테미지나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 1593-1653년 경)는 여성화가라는 점과 작품이 그녀의 생애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여성주의 미술사'에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적장을 유인하여 목을 베는 유대의 여걸 유디트의 이야기는 잔혹한 그림을 선호하였던 바로크 시대에 많이 그려졌습니다(도11). 그러나 억센 여자들의 손놀림과 화면을 뚫고 나오는 홀로페르네스의 반쯤 잘린 머리 때문에 젠틸레스키의 이 그림은 다른 미술가들의 작품보다 더욱 끔찍합니다. 이는 카라바지오의 유디트와 비교해 볼 때 더욱 분명한데, 젠틸레스키가 그린 여자들이 사건에 보다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도11,12). 아버지의 조수에게 추행 당했던 젠틸레스키의 생애와 이 그림이 얼마나 관련되어 있는가 하는 것은 질문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남성화가들의 시선의 대상으로 재현된 유디트의 모습과 여성화가인 젠틸레스키의 유디트가 다른 방식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도11 젠틸레스키 <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
1612-21년, 199x162cm, 피렌체 우피치 박물관
 
 
도12 카라바지오 <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 1598년경
캔바스에 유채, 145x195 cm, 로마, 도리아 팜필리미술관
 
 
 
 

17세기는 스페인에서는 신비주의가 만연해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 리발타의 <예수의 품에 안긴 성 베르나르>(도13)는 종교적인 체험을 주로 다루었던 17세기 스페인 회화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런가 하면 오른쪽의 코탕의 작품과 같은 매우 사실적이며, 동시에 함축적인 정물화도 자주 그려졌습니다(도14).

 

도13 프란치스코 리발타
< 예수의 품에 안긴 성 베르나르 >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도14 후안 산체스 코탕 < 정물 >, 1600년경, 69x85cm
샌디아고 박물관
 
 
 
 

그러나 흔히 17세기를 스페인 회화의 황금기라고 부르는 이유는 놀라운 회화의 솜씨를 발휘한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 1599-1660)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래의 <세비야의 물장수>(도15)는 그의 나이 스물살에 그려진 것입니다. 투박한 느낌을 주는 커다란 항아리와 헤진 망토를 입은 남자의 옆모습이 화면을 꽉 채우고 있는 이 그림은 화면 뒤쪽으로 인물들이 엇갈려 있습니다. 당시의 정물화들이 종교적이거나 도덕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던 점을 생각하면 그가 그린 큰 질그릇과 물컵, 그리고 작은 항아리도 역시 상징으로 보입니다. 세사람의 연배가 서로 다르다는 점, 그들이 서로 지그재그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인생의 세 단계를 은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그림의 의미가 어찌되었든지 놀라운 것은 벨라스케스가 젊은 나이에 이미 다양한 질감들을 묘사해내는 기술을 거의 완벽하게 터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도15 디에고 벨라스케스 < 세비야의 물장수 >
1623년, 106.7x81cm, 런던 웰링턴미술관
 
 
 
 
 

마드리드는 16세기 스페인의 영토가 확장되면서 유럽 미술의 중심지의 하나로 부상하였습니다. 당시 펠리페 4세의 궁전에는 티치아노를 비롯한 수많은 르네상스 대가들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었으며 루벤스와 같은 국제적인 화가도 이곳을 방문하였습니다. 이곳에서 벨라스케스는 스페인 왕실의 공적을 알리는 선전화나 왕가의 초상화를 제작하며 화가로서의 입신을 이루었습니다.

왼쪽의 올리바 공작의 초상화는 성난 말 위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귀족의 위풍당당함을 잘 묘사하였습니다(도16). 이러한 그림은 권력자들을 위엄 있고 매력 있게 보이도록 하는 전형적인 이미지 표현법이었으며, 벨라스케스로서는 왕실화가로서 자신의 임무에 충실한 그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벨라스케스는 한편으로 왕실의 노리개감이었던 난쟁이, 시종들 그리고 걸인들의 모습도 많이 남겼습니다(도17).

 

도16 벨라스케스 < 말을 탄 올리바 공작 >
1634년, 313x239cm,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도17 벨라스케스 < 난장이 발레카스 >
1642-45년, 107x83cm, 마드리드, 프라도박물관
 
 
 
 

벨라스케스의 작품에는 왕실 주문자를 만족시켜 영예를 얻고자 하는 공적인 화가로서의 희망과, 대상을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화가의 시선이 공존합니다. 뒤늦게 로마의 교황청을 방문하여 제작한 교황 이노센트 10세의 초상에서 벨라스케스의 이 두가지 시선을 교묘하게 결합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도18).

 

도18 벨라스케스 < 교황 이노센트 10세 >
1650년, 캔바스에 유채, 139.7x115cm
로마 도리아 팜필리아 미술관
 
 
 

그러나 벨라스케스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순수한 회화적인 아름다움이란 무엇보다도 붓의 자유로운 흐름과 물감의 흔적을 통해 얻어지는 생생함일 것입니다. <이노센트 10세>의 초상은 한 권력자의 냉혹한 초상이지만, 동시에 붉은 빛의 공단과 사그락거리는 흰 레이스 대비가 눈부십니다. 아래 라스메니나스의 황녀의 빛나는 금발과 레이스를 표현한 부분에서도 볼 수 있듯이(도20), 벨라스케스는 단 몇번의 붓질로도 사람의 머리카락이나, 개의 보드라운 털, 그리고 화려한 의상의 반짝임을 표현해 낼 수 있었는데 이러한 시각적인 효과를 누구보다도 높이 샀던 이들은 근대의 인상주의 화가들이었습니다.

 

 

말년에 그려진 <시녀들>(도19)은 3m가 훌쩍 넘는 크기 뿐 아니라 흥미진진한 구성과 회화적인 솜씨로 인하여 이 화가의 화업을 결산하는 대표작이 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도19, 20 21). 벨라스케스는 이렇게 큰 캔바스에 무엇을 그리고자 한 것일까요? 거울에 어슴프레 포즈를 취하고 선 왕과 왕비가 있는 것으로 보아 왕실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도19 디에고 벨라스케스 < 라스메니나스 >
1656년, 318x276cm, 마드리드 프라도박물관
 
 
 
도20 벨라스케스 < 라스메니나스 > 부분
 
 
 
 
도21 벨라스케스 < 라스메니나스 > 부분
화가의 초상
 
 
 
 

그러나 어쩌면 이 그림의 진짜 주인공은 화가 자신일지 모릅니다(도21). 그는 자신을 이젤을 당당히 들고선 화가의 모습으로, 동시에 가슴에 붉은 기사훈장이 선명한 귀족의 모습으로 그렸습니다(도21). 그는 이제 장이가 아닌 상류사회의 일원이 된 것입니다. 이 그림은 궁정화가로서 성공한, 자의식이 강한 화가가 자기 세계를 자랑스럽게 반추하는 장면처럼 보입니다.

 

 

17세기 로마에서 시작된 카라바지오의 회화는 인접한 카톨릭 지역이었던 스페인은 물론이고 플랑드르 회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벨라스케스의 초기 작품도 카라바지오식의 명암대비법이 두드러집니다. 우리는 17세기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두 걸출한 화가 카라바지오와 벨라스케스의 작품에서 대가다운 솜씨와 창조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그림에서 절대적인 종교와 권력 이면의 어두운 부분이 드러나 있음을 보게 되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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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신교의 도전으로 위기에 처했던 카톨릭 세계(지도)는 스스로 교회의 부패를 정화하고 새로운 교회체제를 마련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됩니다. 이러한 반종교개혁을 거치면서 로마는 다시 카톨릭세계의 중심이 되었으며, 교황의 권위는 다른 어떤 시기보다도 막강해졌습니다. 더 나아가 카톨릭 교회는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미술의 역할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이러한 시기에 로마에 세워진 일제수교회는 하느님의 군대를 자처하였던 예수회의 본산으로, 반종교 개혁의 이념이 고스란히 적용된 새로운 형식의 교회였습니다(도1).

 

도1 피에로 델라 포르타, 1575-1584년,
로마 일제수 교회 전면
 
 
 
 
 

일제수 교회는 외관에서부터 르네상스 시대의 교회와 그 느낌이 달랐습니다(도2). 알베르티가 100여년 전에 만토바에 지었던 교회와 비교하여 봅시다(도3). 알베르티의 성 세바스티안 교회는 엄격하게 보이는데 비해서 일제수 교회는 한결 장엄한 느낌을 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코린트식 기둥과 벽주를 이중으로 하였을 뿐 아니라, 위층에는 소용돌이 장식을 덧붙여 화려한 느낌과 움직임을 강조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르네상스의 건축은 기본 구조를 반복하고 있는데 반해서 바로크의 건축물의 여러 부분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도2 피에로 델라 포르타, 1575-1584년, 로마 일제수 교회전면
 
 
 
도3 알베르티, 성 세바스티안 교회, 만토바
 
 
 
 
 

교회의 내부도 이전 시기와는 달라졌습니다. 17세기에 카톨릭 교회는 성직자와 신도들이 모여 하늘의 영광을 성대히 찬양하는 예식의 공간이었습니다. 제단에서 신자들의 자리까지 탁 트인 일제수의 교회의 넓은 내부도 바로 이러한 목적에 알맞게 설계된 결과였습니다(도4). 안드레아 사치의 그림은 일제수 교회를 방문한 교황 우르반 8세 일행과 교회안에서 벌어지는 예식을 묘사하고 있습니다(도5). 과장되게 많은 사람들이 그려진 것은 아마도 이 교회의 넓은 실내에 들어섰을 때의 느낌을 강조한 결과일 것입니다. 이후에 그려진 가울리의 <그리스도의 승천>(12주 주제1, 도3)이 천장에 펼쳐진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실로 장대한 하느님의 영광을 마치 궁전같이 꾸민 것입니다.

 

도4 일제수 교회의 도면과 입면도
 
 
 
도5 안드레아 사치 < 교황 우르반 8세의 일제수 방문 >
1639-1641년, 캔바스에 유채
 
 
 
 

17세기 이탈리아 건축가들은 점차 이전시대의 엄격한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변화무쌍하고 율동감 넘치는 교회를 고안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누구보다도 활발한 활동을 하였던 건축가는 프란체스코 보로미니(Francesco Borromini: 1599-1667)였습니다. 그가 로마에 지은 작은 교회, 산 카를로 알레 콰트로 폰타네의 파사드는 들고 나는 곡선을 따라 출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도6, 7).

 
도6 프란체스코 보로미니, 1664-67년,
로마 성 카를로 알레 콰트로 폰타네 교회 파사드
 
 
도7 프란체스코 보로미니, 1664-67년
로마 성 카를로 알레 콰트로 폰타네 교회 파사드 옆면
 
 
 
 

성 이보 델라 사피엔자 교회(도8)에서 보로미니는 더 기발한 디자인을 고안합니다. 교회의 내부는 직선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자유롭게 처리하였으며 천장에도 굴곡을 주어 독특한 모양을 만들어내었습니다. 이처럼 바로크 교회건축은 풍부한 장식과 자유로운 상상력을 펼쳐 보일 수 있는 미술의 무대였습니다(도8, 9, 10).

 

도8 프란체스코 보로미니
1642-44년(1646-65)
로마, 성 이보 델라 사피엔자교회
 
 
도9 프란체스코 보로미니
로마, 성 이보 델라 사피엔자교회의 쿠폴라
 
 
 
도10 프란체스코 보로미니
로마, 성 이보 델라 사피엔자
교회의 랜턴
 
 
 
 

17세기 로마 카톨릭의 영광이 결집된 무대는 다름 아닌 카톨릭의 총본산, 바티칸의 베드로 대성당이었습니다. 이곳은 기독교의 반석이 된 사도 베드로의 시신이 묻혀있는 곳으로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기독교인들의 순례지였습니다. 16세기까지 이곳은 크고 작은 교회 부속 건물들이 덧붙어진 볼품없는 곳이었기 때문에 르네상스 시기의 야심만만했던 교황들은 교회의 권위에 맞는 당당한 새 교회를 세우고 싶어했습니다. 교황 줄리오 2세가 브라만테, 미켈란젤로에게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의뢰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6세기 말 한 화가가 만든 한동판화는 당시 베드로 교회의 광장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도11).

 

도11 도메니포 폰타나, <로마 라테라노 대성당>, 1585-1590년, 인그레이빙
 
 
 
 
 
 

그러나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이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거듭난 것은 바로크 시대에 이르러서였습니다. 여러분은 17세기의 신심이 두터운 한 평범한 신도가 이곳을 순례하면서 느끼게 되는 종교적인 체험을 마음속으로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높게 선 오벨리스크를 이정표 삼아 산 안젤로 다리를 넘어 베르니니(Gianlorenzo Bernini: )의 열주에 들어설 때 아마 하느님이 내민 팔이 자신들을 영접하는 것처럼 느꼈을 것입니다(도12,13).

 

도12 로마 바티칸 대성당의 전경
 
 
 
도13 조반리 바티스타 팔다, 1667년
베르니니 성베드로 광장 열주를 위한 동판화
 
 
 
 

그리고 미켈란젤로의 거대한 도움과 마데르노가 설계한 교회의 전면을 지나 교회 안에 첫발을 들여놓을 때, 멀리서 광채를 내뿜는 제단과 거대한 닫집, 발다키노를 보면서 천상의 권위를 실감하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극적인 체험을 위해서 베르니니는 조각과 건축의 경계를 넘나들며 한편의 웅장한 드라마를 꾸미듯, 그렇게 교회를 장식하였습니다(도14, 15).

 

도.14 카를로 마데르노
1607-1626년, 로마 바티칸 대성당 정면
 
 
도15 조반리 바티스타 팔다, 1667년
성베드로 대성당 내부
베르니니 성베드로 광장 열주를 위한 동판화
 
 
 

베르니니는 17세기 이탈리아의 가장 탁월한 조각가이자, 교회 장식가였습니다. 로마에 있는 성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교회의 코르나로 가족예배실 장식은 그의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된 곳입니다(도16). 청동 빛줄기를 배경으로 테레사 수녀는 신의 은총이 자신의 가슴을 꿰뚫는 종교적인 환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수녀의 황홀함은 펄럭이는 옷자락을 타고 흐르는 빛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됩니다(도17). 그리고 코르나로 가문의 사람들은 한편의 오페라를 구경하듯 제단에서 벌어지는 환상을 바라봅니다(도18). 그의 교회 장식이 신비한 체험을 중시하는 반종교개혁에 매우 알맞는 방식이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베르니니는 극적인 효과를 더하기 위해서 화려한 색깔의 대리석, 석회벽토, 청동과 같은 다양한 재료를 자유자재로 사용했을 뿐 아니라 위에서 쏟아지는 자연채광도 적절히 이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도16 베르니니 < 성녀 테레사의 환상>
1647-52년, 로마 산타 마리아 델라 빅토리아 교회
 
 
 
도17 베르니니 < 성녀 테레사의 환상 >
 
 
 
 
도18 베르니니, 코르나로 가문 사람들
로마 산타 마리아 델라 빅토리아교회
 
 
 
 
 

베르니니는 교회의 장식에서 뿐 아니라 단독 조각에서도 놀라운 기술을 발휘하여 역동적인 작품을 남겼습니다. <아폴로와 다프네>(도19)는 신화속의 안타까운 사랑의 순간을 묘사합니다. 달리는 아폴로와 막 나무로 변해가는 다프네, 옷자락에서 머리카락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동작에서 정지해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한편 그는 매우 사실적인 묘사와 심리가 표출된 초상 조각들을 남겼는데 이는 이전 로마시대 초상조각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도 20). 그러나 인물의 순간적인 표정을 포착하는 방식이나 옷주름, 머리카락을 동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고전조각, 미술과는 다른 바로크 시대의 특징이라 하겠습니다.

 

도19 베르니니, <아폴로와 다프네>
1622-25년, 대리석, 높이 243cm
로마 보르게제 박물관
 
도20 베르니니 < 콘스탄차 보나넬리>
1636년경, 대리석, 높이 70cm
피렌체 국립 바르젤로 발물관
 
 
 

17세기 카톨릭 교회는 신교국가들의 성상타파에 대항이라도 하듯, 더욱 더 화려하고 기발한 방식으로 교회를 장식하였습니다. 로마에서 이루어진 건축과 조각은 점차 하나의 국제적인 양식이 되어 오스트리아와 남부 독일에서 18세기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 도나우 강변에 환영처럼 우뚝 솟은 멜크 수도원은 그 화려함과 규모에 있어서 장관을 이룹니다(도 21, 22).

 

도21 야곱 프란타우어 뭉그나스트, 1702-38 년
도나우 강에서 바라본 멜크 베네딕투스 수도원
 
 
도22 야곱 프란타우어 뭉그나스트, 베네딕투스 수도원의 내부
 
 
 
 
 

또한 스페인에서는 그곳 특유의 신비주의를 바탕으로 토착적인 장식들이 더해져 기괴한 느낌마저 드는 채색 목조각들과 제단들이 앞다투어 제작되었습니다. 마치 실제 벌어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 스페인의 장인들은 목조조각에 사실적인 채색은 물론, 실제 옷을 만들어 입히기까지 하였습니다. 스페인의 반종교개혁 미술은 예수회 선교사들의 포교활동으로 남미에 많은 유적들을 남기게 됩니다.

 

도23 페드로 룰단 < 십자가에서 내려짐 >
1670-72년, 세비야, 호스피탈 드 라 카리다드 제단
 
 
도24 페드로 데 메나 < 막달라 마리아 >
1664년, 채색 목조가, 높이 165cm
 
 

이탈리아나 스페인의 예에서 두드러지듯 17세기 바로크 교회미술은 지나치게 연극적이고 수사적이어서 과장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17세기 바로크 미술이 상당부분 로마 카톨릭 교회의 힘과 열정에 힘입어 피어났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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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17세기(지도)의 회화, 조각, 건축을 일컬어 '바로크' 시대의 미술이라고 합니다. '바로크'라는 용어의 어원에 관해서는 여러 다른 설명이 있겠지만, 스페인의 금세공사들이 형태가 비틀어진 큰 진주를 부르던 데서 연유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말의 속뜻은, 무엇인가 귀한 것이 과장되고 왜곡되어 그 원래의 가치가 떨어졌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여기 두 개의 작품이 있습니다. 하나는 16세기 라파엘로의 <성가족>(도1)이고, 나란히 있는 것은 17세기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의 작품입니다(도2). 더 없이 고요한 르네상스기의 그림과 비교해 볼 때 루벤스의 작품은 대단히 격렬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균형과 조화를 이상적인 아름다움의 조건으로 평가하였던 고전주의 미학의 관점에서 볼 때 루벤스의 그림은 지나치게 과장되고 소란스럽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이러한 평가는 17세기 회화 뿐 아니라 조각이나, 건축에도 적용되었으며, 그래서 후대의 감식가들은 17세기의 미술을 경멸하는 의미로 바로크라 불렀습니다.

 

도1 라파엘로 <성모자>
1507년, 캔바스에 유채, 122*80cm
 
 
도2 루벤스 <뤼시퍼스 딸들의 납치>
1618년 경, 캔바스에 유채, 224*211cm
 
 

이러한 17세기의 미술을 르네상스의 고전문화의 쇠퇴가 아닌 독자적인 미술로 인정하고 이시기의 다양성이 새롭게 발견된 것은 근래에 와서입니다. 20세기초 뵐플린과 같은 미술사가의 연구는 바로크 미술을 다시 보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미술의 대가로 의심치 않는 벨라스케스 램브란트의 명성도 사실 현대에 와서 새롭게 조명된 결과인 것입니다

유럽의 17세기 미술은 지역과 종교, 장르에 따라 매우 다채롭게 진행되었습니다. 당시 유럽은 로마를 중심으로 한 카톨릭 세계와 종교개혁이후 교황으로부터 독립한 독일, 네덜란드의 신교세계로 크게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카톨릭 교회는 손상되었던 교황의 권위를 다시 세우고 하늘의 무한한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서 그 어떤 시대보다도 미술의 힘을 적극적으로 이용합니다. 이러한 반종교개혁 시기의 미술은 단순히 문맹자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대신 설명하고자 하였던 중세 종교미술 이상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아래 왼쪽그림은 반종교개혁에 앞장섰던 예수회의 본부 교회인 로마, 일제수 교회의 천장화입니다(도3). 속세의 죄로 추락하는 인간군상들 사이로 영광을 한몸에 받으며 천상의 세계를 지배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황금빛으로 눈부시게 꾸며져 있습니다. 어디까지가 천장의 건축물인지, 그리고 어떤 것이 조각이고 그림인지 구분할 수 없는 아찔한 천장화를 보면서 사람들은 천국을 미리 맛보았으며, 신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받았을 것입니다. 로마교회의 이처럼 호사스럽고 연극적인 미술은 독일 로르지방 교회의 제단 장식에서 더욱 놀라운 장면을 연출하기에 이릅니다. 제단에서 벌어지는 성모의 날렵하고 화려한 승천의 모습은 물질감이 느껴지지 않아 마치 눈앞에서 환영을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도4). 카톨릭 교회는 이러한 효과를 위해서 모든 시각적인 표현 기법들을 총동원하였던 것입니다.

 

도3 조반니 바티스타 가울리 <그리스도의 승천 >
1672-1672년,프레스코, 로마 일제수 교회의 천정화
 
 
 
도4 퀴린 아잠 <성모승천>, 1717-25년
바르바리아 로르 순례자교회, 대리석과 치장벽토
 
 
 
 
 
 

그러나 새롭게 등장한 신교 국가들, 즉 북부독일이나 네덜란드인들은 교회의 제도나 교리보다는 성서의 말씀에 더 의지하였으며, 신의 소명을 받들어 청빈하고 성실하게 사는 것이 구원의 열쇠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또한 교회에 하느님의 모습을 본뜬 그림이나 조각을 안치하는 것을 우상숭배라 여겼습니다. 17세기 신교지역에는 로마의 교황이나 프랑스의 군주처럼 절대적인 권력과 부를 지닌 미술의 후원자도 없었으며, 우상숭배 논쟁이 있은 뒤로는 더 이상 제단화나 교회의 장식 주문도 없었습니다. 피터 산레담(Peter Janse Sanredam)이 그린 유트레히트의 교회모습과(도5) 하를렘 <성 바보교회의 실내>(도6)는 검소하고 아무 장식도 없이 밋밋한 네덜란드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바로크 교회와는 매우 대조된 모습이죠. 대신 이 지역의 미술가들은 새롭게 부상한 소상인들의 취향에 알맞은 작은 풍경화나 정물화, 그리고 초상화를 그렸으며, 이것들을 미술시장에서 경쟁을 통해 판매해야 했습니다(도7,8). 우리는 신교세계에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미술체제가 탄생하게 됨을 목격하게 됩니다.

 

도5 산레담 <유트레히트 성 마리아교회>
1662년, 캔바스에 유채, 109.5*1395,cm
 
 
 
도6 산레담 <하를렘의 성 바보 교회의 실내>
1660년, 나무패널에 유채
 
 
도7 호베마 < 미들하니스의 오솔길 >
1689년, 캔바스에 유채, 103.5*141cm
 
 
도8 아버캄프 < 겨울 >
1610년 경, 캔바스에 유채
 
 
 
 

북유럽과는 달리 프랑스에서는 교황에 버금가는 막강한 힘을 지닌 세속 군주가 등장합니다. '짐이 곧 태양'이라 했던 루이 14세의 프랑스가 가장 먼저 절대왕정을 확립하였으며,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군주들은 그러한 프랑스를 뒤쫓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하게 하기 위해 엄청난 규모의 왕궁들을 건설하는데,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은 그 가장 대표적인 예입니다. 또한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과시적인 초상화나 기마상을 제작하기를 즐겼습니다(도9,10).

 

도9 프이 르 보, 망사르 < 베르사이유 전경 >, 1669-1685년
 
 
 
도10 리고 <루이 14세의 초상 >
1701년, 캔바스에 유채, 279×190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당시 최고의 솜씨를 자랑하던 루벤스는 프랑스 왕실의 사건들을 신들의 이미지에 뒤섞어 그림으로써 권력자들을 미화하는 궁정장식의 그림을 수없이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출신의 프랑스 왕비가 마르세이유 항구에 도착하는 장면을 그린 루벤스의 아래 기록화는 바로크 시대 미술이 권력자들을 미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던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하겠습니다(도11). 19세기까지 이어지는 이러한 왕과 귀족들의 무제한의 사치와 영광의 뒤에서 점차 계몽의식이 싹트고 근대적 개인들의 자각이 준비되었을 것입니다.

 

도11 피터 파울 루벤스 < 마르세이유 항의 도착>
1621-25년, 캔바스에 유채, 394×295cm
 
 
 
 

우리는 로마 교회의 장중하며 사치스러운 장식과 프랑스의 궁정미술 그리고 네덜란드의 소박하지만 그들의 생활과 자연에 대한 애정이 담긴 회화들을 17세기 미술에서 동시에 만나게 됩니다. 바로크 미술이 펼쳐 보이는 이러한 다양성이야말로 미술이 당대의 사회, 정치와 어떻게 맞물려 이루어지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예일 것입니다.

바로크 미술의 새로운 분위기는 16세기 말 로마에서 시작됩니다. 1520년대 이후 유럽을 풍미하였던 매너리즘은 점차 기발한 효과와 세련된 솜씨를 뽐내며 자연과 고전적인 미의 이상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16세기가 끝나갈 무렵 일부 미술가들은 이러한 미술에 싫증을 느끼고 이전 르네상스 시대의 고전적 이상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습니다.

이탈리아 북부, 볼로냐 출신의 아니발레 카라치(Annibale Carracci: )는 당시 이러한 경향을 대변합니다. 그는 한세기 전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티치아노, 그리고 코레지오의 미술을 완벽한 고전미술의 정수로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옛 대가들의 장점들을 잘 섭취하여 재구성한다면 가장 이상적인 아름다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러한 목적을 위해 그는 일찍이 동생, 아고스티노 카라치, 조카, 루도비코 카라치와 함께 볼로냐에 아카데미를 세우고 제자들을 키웠습니다. 카라치의 명성이 높아지자 로마의 파르네제 추기경은 자신의 아름다운 저택을 장식하기 위해 그를 로마로 불러들입니다. 아래 보시는 왼쪽 파르네제 궁전의 천장화가 바로 그것입니다(도12).

 

도12 아니발레 카라치, 로마 팔라초 파르네제 궁 천장화
1557-1601년
 
 
도13 미켈란젤로, 로마 바티칸 시스틴 예배당 천장화
1508-1512년, 프레스코
 
 
 
 

카라치는 20미터에 이르는 회랑의 반원형 천장(배럴 볼트)을 신들의 사랑의 이야기로 가득 채웠습니다. 그는 길게 천장을 삼등분하고, 거인족(아틀란티드)은 건축물처럼 회색으로 그리고 그 앞에 미덕을 의인화한 알레고리들을 실제 살아 있는 사람처럼 그렸습니다. 아마도 여러분들은 미켈란젤로의 시스틴 벽화를 연상하였을 것입니다. 실제로 당시 사람들은 카라치가 제작한 파르네제 가문의 천장화를 90년전 미켈란젤로의 작품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고 여겼습니다(도12,13,14,15).

도14 카라치 < 비너스와 안티시스 >
1577-1601년, 로마, 팔라초 파르네제 천장화
 
 
도15 미켈란젤로 <낙원추방>, 바티칸, 시스틴 예배당 천장부분
 
 
 
 
 

카라치는 미켈란젤로를 모범으로 삼았는가 하면, 티치아노와 같은 16세기 베네치아 화가들도 염두에 두었습니다. 천장의 가장 중심을 차지하는 그림인 <바커스와 아리아드네의 승리>가 보여주는 밝은 색채와 활기찬 움직임의 흥분된 분위기는 베네치아 대가들의 솜씨와 흡사합니다(도16,17).

 

도16 아니발레 카라치, <바커스와 아리아드네의 승리>
1600년경, 로마 파르네제 궁 천장화
 
 
도17 티치아노 <바커스와 아리아드네 >
1528-24년, 캔버스에 유채, 175*190cm
 
 

당시 카라치의 미술은 로마에서 매우 인기가 있었으며 그를 따르는 게르치노, 귀도 레니 같은 화가들이 속속 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미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의 독창성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대적인 관점에서 볼 때 고전기의 미술을 모범으로 삼아 그것을 끊임없이 모방하며, 다른 대가들의 양식을 절충하는 카라치의 방식을 이해하기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상적인 아름다움과 도덕적인 교훈을 중시하는 고전미술은 17세기 이탈리아 미술에 새로움을 불어 넣으며 막다른 골목에 이른 것처럼 보였던 매너리즘 미술을 다시 한 걸음 진행할 수 있게 하였던 큰 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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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8주부터 지금까지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럼 이러한 미술품을 제작한 화가나 조각가 또는 건축가들은 어떻게 미술을 배우고 사회적으로는 어떤 지위에 있었을까요. 14세기 초에서 16세기 중엽에 이르는 250여 년 사이에 미술인들의 지위는 장인에서 예술가로 승격되었습니다. 14세기 중엽의 안드레아 피사노(Andrea Pisano: 1290년경-1348)가 지오토의 종탑에 새긴 <조각>(도1)을 보면 조각가의 모습을 돌을 쪼아 인물상을 만들고 있는 수작업 광경으로 나타낸데 반해 16세기 중엽의 조각가 바치오 반디넬리(Baccio Bandinelli: 1493-1560)는 자신을 깨끗한 스튜디오에서 작품구상의 데생을 가리키고 있는 귀족적인 모습의 작가로 나타내고 있습니다(도2). 화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안드레아 피사노의 <회화>(도3)에서는 제단화를 그리고 있는 제작실의 화가인 반면 16세기 중엽의 조르지오 바자리(Giorgio Vasari: 1511-1574)는 <자화상>(도4)에서 붓을 들고 있는 것으로 화가임을 암시할 뿐, 품위 있는 의상에 금목걸이를 하고있는 귀족의 모습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250여 년 동안 미술가는 장이에서 귀족적인 예술가로 변모한 것입니다.

 

도1 안드레아 피사노, <조각>
1334-1342년, 부조
피렌체. 델오페라 델 두오모박물관
 
도2 바치오 반디넬리, <자화상>
1530년, 유화
보스턴,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미술관
 
도3 안드레아 피사노 <회화>
1334-1342년, 부조
피렌체, 오페라 델 두오모박물관
 
도4 조르지오 바자리 <자화상>
유화, 피렌체, 우피치
 
 
 
 

 

도5의 그림은 공방들을 나타낸 필사본 삽화입니다. 왼쪽 위부터 필사본의 필경실, 시계제조공방, 갑옷을 만드는 공방이 그려져 있고 오른쪽에는 제단화를 그리는 화가의 공방, 사람형상을 만드는 조각가의 공방, 오르간 제작자의 공방입니다. 당시의 화가나 조각가는 시계를 만드는 기술자나 갑옷을 만드는 장인들과 같은 기능공이었던 것입니다. 14세기의 기술직이나 상인들은 일종의 동업자 조합인 아르티(arti, 영어로는 guild)를 형성하였는데 조각가와 건축가는 석수장이와 목수 길드에 속해 있었으며 화가는 약재상 길드에 속해 있었습니다. 조각가와 건축가는 모두 돌이나 나무를 다루는 기술자이며, 화가는 약재상 같이 식물이나 광물질로 된 안료를 다루기 때문입니다.

 

도5 필사본, 1450년경. 모데나, 비블리오테카 에스텐세,
이 미니어처는 水星의 영향아래 있는 작업들을 묘사하고 있다.
 
 

 

한편 화가나 조각가들은 공방(이탈리아어로 보테가 bottega, 영어로는 work shop)을 운영하면서 조수와 견습공들을 두었습니다. 공방의 주인을 마에스트로(이탈리아어 maestro, 영어 master)라고 하였죠. 화가나 조각가가 되기 위하여는 마에스트로 밑에 들어가 3-4년은 청소와 안료제작, 공구관리들을 하면서 눈으로 익히는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차츰 마에스트로의 기술을 익혀 배경이나 덜 중요한 부분들을 그리고, 점차 옷이나 사물들을 그릴 수 있는 조수가 되었습니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자기의 공방을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마에스트로가 되기 위해서는 보통 10-12년의 기간이 필요했습니다.

 

 
 

 

14세기 후반 조합이 커지고 상업이 발달하면서 원래 모두가 수공예가에 속했던 화가, 조각가, 건축가의 세계도 기능공과 예술가로 분리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기능공이나 예술가들의 대부분의 활동은 여전히 공방에서 이루어졌으나 공방, 즉 보테가의 규모와 성격은 모두 달라서 작은 방 하나짜리부터 주문 없이 그린 그림을 상설 전시하는 전시실을 갖출 정도까지, 보테가 주인의 예술적인 능력과 재력에 따라 천차만별이었습니다. 물론 작가의 유명세나 작품의 수준에 따라 가격차이도 많아서 거의 자유시장에 가까웠습니다. 르네상스 시기에 접어 들면서 조합을 통해 주문 받는 예는 현격히 줄어들고, 이름을 얻은 예술가들은 귀족이나 공공기관으로부터 직접 개인적으로 주문을 받았습니다.

 

 
 

 

회화와 조각, 건축이 기능적인 수준에서 지성을 갖춘 예술의 수준에 오르기 위해서는 이론의 뒷받침이 필요했습니다. 이를 가능케 한 사람은 단연코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 1404-1472)입니다. 15세기 전반에 알베르티는 미술을 자유인문학(liberal arts)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하여 실로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알베르티는 그의 『회화론De pictura』(1436)에서 '현대 미술가'는 기하학과 원근법 그리고 구성의 법칙에 능통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영혼의 움직임'은 '몸의 움직임'에 의해 나타나므로 인체 해부학의 필요성도 역설하였습니다. 그는 기하학을 이용한 線원근법을 발달시킴으로써 공간을 과학적으로 나타내고자 하였습니다. 미술을 수학과 기하학에 접근시킴으로써 미술은 더 이상 기능이 아니고 자유 인문 영역에 속하게 한 것입니다.

 

 
 

 

화가나 조각가가 장이로 취급되었던 것은 손과 육체를 사용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미술의 格이 높아지기 위하여는 육체노동임을 부정하고 고도의 정신노동임을 증명하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16세기까지 진행된 미술이론의 과정은 이를 위한 끊임없는 투쟁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닙니다. 많은 논의들 가운데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의 미술이론은 이러한 과정을 가장 잘 보여줍니다.

 

 
 

 

그는 『회화론』에서 회화와 과학, 회화와 詩, 더 나아가 회화와 조각을 비교하면서 회화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의 비교는 매우 구체적이고 논리적이었지만 언제나 회화의 우위를 증명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회화를 구체적인 경험과학의 하나로 생각하였습니다. 그의 회화를 특징짓는 공기 원근법, 스푸마토(sfumato)등의 기법은 모두 회화를 구체적인 과학탐구로서 지향한데서 얻은 회화적인 기법인 것입니다. 그러나 회화를 과학의 수준에 놓는 것으로 만족치 않고, 이를 넘어 회화의 우수성을 논합니다. 즉 과학은 量의 문제를 다룰 뿐 회화가 나타내는 質의 문제에 접근하지 못한다고 결론짓고 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또한 회화는 詩와 인문학보다 우수하다고 말합니다. 그는 "회화는 말이 없는 詩이며, 詩는 보지 못하는 회화이다." 다시 말해 회화는 視覺을 통한 예술이요, 詩는 언어와 청각을 통한 예술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는 다시 "장님과 벙어리 중 누가 더 버림받은 괴물(dannoso monstro)이겠느냐?"라고 물으면서 매우 집요하게 회화의 우수성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16세기 중엽엔 미술의 이론적인 논의가 어느 때보다 왕성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회화와 조각의 비교 우위론은 가장 뜨거운 논쟁거리였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우열의 기준을 어느 것이 정신노동에 가까운가에 놓던 지금까지의 쟁점을 새로운 관점으로 전환시켰습니다. "내 생각엔 회화는 부조에 가까울수록 좋은 것 같고, 부조는 회화에 가까울수록 나쁜 것 같다고 말하겠다. 그러나 내 생각엔 조각은 회화의 등불 같으며 서로 해와 달의 차이 같다. 만약 정확한 판단력(maggioregiudizio)과 제작의 어려움(difficulta)때문에, 여러 장애요인(impedimento)과 힘든 노동(fatica) 때문에 훌륭한 품격(maggiore nobilta)을 지닐 수 없다면 회화나 조각은 마찬가지 입장이다. 둘 다 같은 知性(intelligenza)에서 나오므로 둘이 평화로이 지낼 수 있으니 논쟁들은 이제 그만두자."

 

 
 

 

미켈란젤로는 제작의 어려움이나 장애요인, 힘든 노동들은 회화나 조각이 품격을 지니는데 하등 방해요인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천함과 고귀함은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궁극의 목적이 천하면 노동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며, 궁극의 목적이 품위 있으면 반대로 노동 또한 품격이 높아진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에 의하면 물체를 초월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바로 知性(intellettuale)의 비전에 따라 움직이는 손에 작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유명한 詩 「아무리 위대한 예술가라도…」는 육체노동과 정신의 관계에 대한 그의 생각을 매우 정확하게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예술가라도 관념을 가질 수는 없으며, 대리석 또한 덩어리가 충만해도 스스로는 어찌할 수 없으니 知性을 따르는 손에 의해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미켈란젤로에게 있어서 손노동은 더 이상 추한 것이 아니고 지성의 모습을 구체화하는 구현자인 것입니다.

 
 

 

16세기 중엽 그림, 조각, 공예 등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미술가는 아직 보테가에서 일하며 길드에 소속되어 옛 방식의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우리가 강의에서 거론한 소수의 예술가들은 '기능인'과 자신들이 속하는 '지성적인 예술가'를 구분하였습니다. 그러면 기능인과 예술가를 차별 짓는 '지성'은 어떠한 과정으로 작품에 나타날까요.

 
 

 

16세기 미술이론을 주도한 바자리는 이를 '디세뇨(disegno)'개념으로 설명합니다. '디세뇨'는 현대에서 쓰고 있는 소묘라는 의미의 데생(dissin)과 상업미술계에서 사용하는 디자인(design)이라는 용어의 어원이지만 그 뜻과 사용에는 현재와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현재 이탈리아語에서의 디세뇨(disegno)는 '그리다', '구상하다', '계획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disegnare'의 명사형이며 지금도 '소묘', '도안', '설계도'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바자리가 사용한 '디세뇨'는 이 의미들을 모두 함축하고 있습니다. 개념이 손을 통해 구체화되는 것을 '디세뇨'라 이름한 것으로 건축의 도면, 조각을 위한 스케치나 소묘, 회화의 밑그림 등이 모두 이에 속합니다. 그는 건축, 조각, 회화, 모두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을 다 사용하는데 정신작용은 디세뇨의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구체화한 것입니다. 따라서 디세뇨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미술을 지성적인 미술(arte intellettuale)이라고 부르며 반대로 디세뇨의 과정 없이 기능적인 재주로만 만들어지는 미술을 기능적인 미술(arte meccanico)이라고 구분 지웠습니다.

 
 

 

미술가는 이렇게 미술을 이론화시킴으로써 노동자 계급임을 거부하고 장이에서 지성적인 예술가가 되었습니다. 물론 소수의 미술가만이 이론을 論하며 엘리트층을 형성하였습니다. 그리고 1562년 설립된 디세뇨 아카데미아(Accademia del Disegno)는 그들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디세뇨 아카데미아는 바자리의 디세뇨論을 교육의 場으로 제도화한 것이었습니다. 해마다 명성 있는 건축가, 조각가, 화가 한 명씩을 초청하여 재능있는 학생들을 가르치던 이 아카데미아는 현재와 같은 정규 교과과정을 가진 교육체제를 갖추지는 않았지만 15-16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미술의 변화를 확인시키고 제도화한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큰 의의는 작가들의 사회적 소속의 문제입니다. 길드는 같은 직업인이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사회적인 보호를 받고자 하는 직업인의 이익단체이지만, 아카데미아는 엘리트를 교육하고, 문화활동을 주관하는 일종의 문화단체였으니 그 차이는 참으로 큰 것입니다.

 
 

 

주제3의 시작부분에서 예로 든 반디넬리의 <자화상>(도2)과 바자리의 <자화상>(도4)을 다시 보면 많은 내용이 새롭게 보일 것입니다. 반디넬리는 검은 옷에 그의 작위, 산티아고 수도회 기사(Cavaliere dell' Ordine di Santiago)의 마크인 조개 형태 안의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있는 귀족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른쪽 아래에 깨다 만 대리석 덩어리로 자신이 조각가임을 암시할 뿐 그가 자랑스럽게 손으로 가리키고 있는 것은 준비 작업인 소묘입니다. 그를 귀족이게끔 한 것은 그의 본업인 조각이 아니라 돌에 옮기기 위한 구상인 소묘, 즉 디세뇨 덕분이라는 것입니다. 바자리의 <자화상>또한 오른손에 붓을 집어 화가임을 나타내었을 뿐 궁정인의 옷에 금목걸이를 하고 있습니다. 붓을 들고 작업하고 있는 화가라면 어깨와 소매가 넓은 귀족의 옷을 입고 있을 이 없을 텐데 말입니다. 그리고 바자리 또한 왼손으로 가리키고 있는 것은 건축의 도면, 즉 디세뇨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14세기까지만 해도 장이의 신분이었던 화가와 조각가가 16세기 중엽에는 지성적인 예술가가 되는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를 위하여 손노동임을 부정하고 정신노동임을 강조하는 화가와 조각가의 이론화 작업은 실로 끊임없는 투쟁이었습니다. 그 결과 미술은 자유 인문학과 같이 고상한 수준으로 상승하고, 미술가는 궁정인에 이르는 신분상승을 하였습니다. 그들의 소속도 직업조합인 길드에서 엘리트들의 문화, 교육기관인 아카데미아에 속하는 변화를 갖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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