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두 노동자가 채석장에서 돌을 채취하고 있습니다(도1,지도). 해머를 두드리는 나이든 오른쪽 인물과 돌덩이들을 힘써 들어 올리는 젊은 남자는 시선을 돌린 채 묵묵히 자신의 일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화면을 꽉 채운 인물들의 단순한 윤곽선과 거친 듯한 무채색의 표면으로 인해 화면에 바짝 다가선 두 인물의 현장감은 더욱 고조됩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보기에 이 그림에는 '건강한 노동의 모습'이라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사회적인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이 1850-51년 살롱에 출품되었을 당시에는 노동자의 모습을 화면에 당당하게 그렸다는 것만으로도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도1 쿠르베 <돌깨는 사람>, 1849년, 1850-51년 살롱 출품
캔바스에 유채, 2차 대전으로 파괴
 
 
도2 매독스 브라운 <노동>, 1852-63년, 캔바스에 유채
137×197.3cm, 맨체스터 미술관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가 일으킨 스캔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세기 중반 서유럽의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1840년대에 이르러 프랑스에서는 산업혁명의 결과가 눈에 띄게 분명해졌습니다. 그 결과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격차는 더욱 벌어지게 되었지요. 노동자들은 프랑스 혁명때부터 봉건질서를 넘어뜨리기 위한 시민혁명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으며, 들르크르와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도3)에서 보듯이 1830년 공화정을 다시 세울 때에도 학생, 지식인과 함께 희생을 감수하였습니다. 그러나 1830년 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루이 필립은 금융가나 사업가들의 이익을 중시하는 금권정치를 펼쳤기 때문에 노동자나 농민들의 불만은 점차 고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빅토리아시대의 번영을 구가하고 있던 영국 역시 노농자의 문제가 중요했는데, 매독스 브라운(Ford Maox Broun, 1812-1893)의 <노동>(도2)은 바로 이러한 시대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을 발표한 것이 1848년 런던이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프랑스에서의 이러한 갈등은 결국 1848년 혁명으로 폭발하게 됩니다. 메이소니에(Jean-Louis-Ernest Meissonier, 1815-1891)의 <바리케이트>(도4)는 1848년의 노동자 봉기의 현장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노동자, 농민들의 불만이 점차 사회적인 문제로 등장하던 시기에 그려진 쿠르베의 <돌깨는 사람>은 그 소재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던 것입니다. 20세기 공산주의의 실험과 실패를 경험한 지금의 상황에서 되돌아볼 때 사회주의 사상이 형성되는 19세기 중반은 매우 중대한 역사적인 지점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도3 들라크르와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년, 캔바스에 유채, 260×325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4 메이소니에 <바리케이드, 모르텔르거리 >
1849년, 1850-51년 살롱, 캔바스에 유채
파리, 루브르 박물관
 
 
 

쿠르베가 자신의 고향 오르낭을 배경으로 그린 대작 <오르낭의 매장>(도5)은 발표 당시부터 너무나 혁신적인 작품으로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으며, 그 후로는 19세기 리얼리즘의 대표작으로 인정받아 미술사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오르낭의 시골뜨기들을 이렇게 큰 화면에 그려야 할 필요가 있는가? 이러한 질문은 <돌깨는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던져볼 수 있겠지요. 쿠르베의 <오르낭의 매장>에 등장하는 다양한 부류의 인간군상들을 보면 1842년 발자크의 『인간희극』에 나오는 19세기 전반 부르조아혁명 시기 인간들의 파노라마를 접하는 것 같습니다. 일부러 좌우로 죽 늘어놓는 형식은 영웅을 중시하는 낭만주의 미술의 구성과는 너무도 다른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부상하던 '인민의 미술 (art of the people)', '평등주의(egalitarism)'를 반영하는 것일까요? 이 그림을 의심하는 파리 부르조아 관객들은 시골사람 쿠르베가 부르조아들의 '매장'을 암시하였다고 여겼습니다.

도5 쿠르베 <오르낭의 매장>, 1849-50년, 캔바스에 유채
315×663 cm,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19세기 중반 농촌풍경을 즐겨 그렸던 프랑스와 밀레의 노동자상에 대해서도 쿠르베처럼 여러 가지 다른 해석들이 있었습니다. 앞 주제에서 이미 살펴보았던 것처럼 밀레의 풍경화는 여러나라에서 매우 평화로운 전원풍의 복고양식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런 한편에서 <씨뿌리는 사람>(도6)과 같은 인물화는 노동자, 농민의 힘을 부각시키는 그림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러시아와 같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밀레의 농민상이 찬미되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일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농촌출신의 밀레나 쿠르베의 미술은 본질적으로 세련된 파리인들의 미술운동이었던 인상주의와 그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었지 않았나 합니다.

도6 밀레 <씨뿌리는 사람>, 1850년
캔바스에 유채, 101.6×82.6 cm
보스톤 미술관
 
도7 밀레 <일하러 가는 길>, 1851년
캔바스에 유채, 55.5×46 cm
 
 
 
 
미술에 있어서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는 쿠르베가 1855년 파리 박람회에서 자신의 그림이 거부되자 전시관을 짓고 '사실주의'라는 이름으로 反官展을 열었던 데서 기인합니다. 쿠르베는 1861년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습니다.

 

“그림은 본질적으로 구체적인 예술이다. 그러므로 그림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표현할 수 밖에 없다. (....)추상적인 것, 보이지 않는 것, 존재하지 않는 것은 그릴 수 없다.”

 

'자신의 시대에 존재하는 것'이 리얼리스트들의 구호였습니다. 쿠르베는 오랫동안 비현실적인 종교화나 신화화만을 중시하던 미술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리얼리티란 눈으로 보고 경험하는 현실을 넘어설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런점에서 그의 태도는 당시 콩트나 프루동처럼 실증적이며 유물론적입니다. 쿠르베의 리얼리즘은 '동시대'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사회비판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보다 정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미술가는 오노레 도미에(Honore Daumier, 1808-1879)였습니다.고야를 연상시키는 풍자적인 힘을 지닌 도미에의 판화와 삽화는 당시의 신문이나 여러 잡지에 개재되어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었습니다(도8,9). 뿐만 아니라 그의 뛰어난 비판적인 시선은 점토로 만든 유명인들의 커리커춰에서 유쾌한 힘을 발휘합니다(도10,11).

도8 도미에 <메넬로사와 빅타>
『고대사』연작 중, 1841년
파리, 국립도서관
 
 
도9 도미에 <런던 회담>
1832년, 채색 석판화,
미시간대학 미술관
 
도10 도미에 <기조의 초상>
1833년, 채색 점토
파리, 오르세이미술관
 
도11 도미에 <기욤의 초상>
1832-33년, 채색 점토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도시의 발달, 황폐한 농촌, 심화되어 가는 도시민간의 경제적인 격차는 근대사회가 안고 있는 깊은 모순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도12의 <삼등열차>에서처럼, 1860년대의 비좁고 열악한 열차 한켠을 묘사한 그림에서는 이러한 사회적인 갈등이 예리한 시선으로 포착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평생 프랑스 근대사회의 모순에 대해서 비판의 시각을 놓지 않았던 도미에는 사회적 사실주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업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도12 도미에 <삼등열차>, 1860-63년
캔버스에 유채.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한편으로 쿠르베는 미술사에 있어서 새로운 유형의 미술가상을 보여줍니다. 그는 1855년 사실주의 전시회에 자신의 미술을 회고하는 대작 <화가의 스튜디오, 알레고리>(도13)을 전시합니다. 고향 풍경을 그리는 자신을 중심으로, 진실을 상징하는 누드의 여인, 그리고 화가가 교류하였던 여러 동료들의 초상이 등장하는 커다란 그림입니다. 그러나 그림은 매우 우화적이어서 작가의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지는 않습니다. 쿠르베가 리얼리즘을 주장했음에도 아직 그의 회화는 과거의 역사화와 '근대성의 기록' 사이의 경계에 있음을 새삼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쿠르베의 태도에서 자신의 독자적인 미학적인 선택과 판단에 의해 작업하는 '전위화가(아방가르드)'의 출현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도14의 자화상에서 느낄 수 있듯이 그는 반항정신으로 가득했으며, 파리 브르주아 예술관객의 엘리트 의식에 정면으로 도전함으로써 기존의 예술에 저항하였습니다. 이러한 저항의지는 현대에 와서 매우 중요한 예술의 속성이 되었습니다. 쿠르베 이후로 예술의 역사는 사회의 '전위'로서 나름대로의 특권적인 영역을 확보해 나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도13 쿠르베 <화가의 스튜디오, 알레고리>
1855, 캔바스에 유채, 361×598 cm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도14 쿠르베 <검은개와 자화상>
1844년, 1842년 사인, 캔바스에 유채
파리 뮤제 드 프티 팔레
 
오늘날 예술가가 사회적인 관례에 앞서 금기의 영역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은 예술가들의 의무이자 특권인 것이지요. 과거 르네상스 시기의 미술가들이 인문학적인 식견을 가지고 자신들의 작업을 당당하게 생각했다지만, 교황이나 군주들의 후원을 벗어나 독자적인 기반을 주장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랜 인류의 역사에서 현대처럼 예술가의 자율성이 이처럼 강조된 시대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쿠르베 이후의 인상주의, 추상회화로 이어지는 '전위미술'이 예술로서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과 비교해 볼 때 도16과 같은 19세기 아카데미 미술은 한동안 키치처럼 취급되었습니다. 이러한 대접은 17세기 푸생이래 다비드까지 이어지는 아카데미 화가에 대한 당시의 융숭한 존경과 접대에 비한다면 격세지감을 느낄 만 합니다. 왕실이나 귀족을 상대로 하는 미술은 시민사회의 부상으로 더 이상 환영받을 수가 없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는 1830-40년대에 이르러 분명하게 나타났으며 관변미술은 이제 변화를 모색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점차 과거의 지나치게 장엄하고 교훈적인 양식보다는 풍속화적인 요소와 선정적인 장면을 섞어 절충적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은 토마스 쿠튀르의 <타락한 로마>(도15)입니다. 이 작품은 아마도 19세기 살롱에서 가장 성공한 작품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내용은 로마인들이 방탕한 생활에 빠져 몰락하게 되었다는 다소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만, 작품의 중심에는 당시의 고급창부(마네의 올랭피아에서는 더욱 확연하게 나타나지만)가 그려져 있어 역사와 현실묘사의 절충을 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쿠튀르는 당시의 평가와는 상반되게 20세기에 와서 한때 잊혀졌지만, 그의 아틀리에서는 많은 미술가들이 배출되었으며 마네 역시 그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이 작품은 다시 오르세이 미술관의 가장 눈에 띄는 장소에 걸려있어, 작품에 대한 평가와 관심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도15 토마스 쿠튀르 <타락한 로마>, 1847년
캔바스에 유채,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도16 부게로 <님프와 사티로스>
1873년, 캔바스에 유채, 260×180 cm
 
 
 
 

쿠르베의 <돌깨는 사람>(도1)이나 <오르낭의 매장>(도5)과 같은 작품들은 사회의 현실을 다룬다는 점에서 비판적인 내용을 담을 수 있다는 점을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쿠르베의 리얼리즘은 비판의식이기보다는 주변을 대하는 미술가의 태도의 변화라 하겠습니다. 도15의 <송어>에서처럼 줄에 걸린 물고기를 대상으로 삼아 관찰하고 그것을 화면에 꽉 차게 그려내는 미술가의 의도는 과거 역사화를 그리며 교훈을 찾던 미술가의 그것과는 판이합니다. 또한 도18의 <해변>을 보면 쿠르베가 붓보다는 나이프를 많이 사용하여 두툼하게 물감을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돌깨는 사람들>이나 <오르낭의 매장>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렇게 두텁고 밀도 있는 캔바스위의 물감자국은 회화라는 장르 본연의 물질성을 크게 강화시킵니다. 바로 이러한 점은 쿠르베의 <돌깨는 사람>이 같은 노동을 다루면서도 매독스 브라운의 설명적인 작품과 달랐던 이유이기도 합니다(도1.2)

도17 쿠르베 <송어>, 1872년, 캔바스에 유채
52.5×87 cm, 취리히, 쿤스트하우스
 
 
도18 쿠르베 <해변>, 1865년, 캔바스에 유채
53.5×64 cm, 쾰른, 발라프 리카르츠 미술관
 
 
 
 

쿠르베에서 싹이 튼 현실과 사건을 들여다보는 냉정한 리얼리즘의 시선은 '죽음'을 묘사하는 방식에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신고전주의나 낭만주의의 미술에 있어서 죽음은 이상화되고 영웅적으로 묘사되었습니다(15주 주제1과 2참조). 그러나 마네의 죽은 투우사(도19)는 보는 사람을 충격 속에 몰아넣는데, 이러한 이유는 숭고한 명분도 없이 죽음 그 자체만을 대면할 때 느끼는 전율과 같은 것입니다. 쿠르베의 미끼에 걸린 송어(도17)를 대할 때의 느낌과 비슷합니다. 쿠르베가 주장하였던 리얼리즘, 즉 '동시대성'과 캔바스의 '표면성'을 보다 현대적인 형태로 진전시킨 장본인은 바로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1832-1883)였습니다. .

도19 마네 <죽은 투우사>, 1864년, 캔바스에 유채
76×153.3 cm, 워싱턴, 국립박물관
 
 
도20 마네 <황제 막시밀리앙의 처형>
1867년, 캔바스에 유채, 252×305 cm
만하임, 쿤스트할레
 
마네의 회화는 그 주제를 다루는 방식이나 화면에 물감을 칠하는 형식에서 분명 '우리들의 시대'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보다 분명하게 합니다(마네에 대해서는 다음 주제에서 다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흔히 마네를 인상파로 여기지만 그는 모네, 르노와르와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과 함께 전시회를 여는 것을 꺼렸으며 외광 풍경화를 주로 그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공화주의자로 루이 나폴레옹의 제2제정에 대해 줄곧 냉소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었는데, <황제 막시밀리앙의 처형>(도20)에서 보듯 그의 정치성과 화면의 표면성은 아슬아슬한 경계에 있는 것 같습니다. 쿠르베에서 마네를 거치면서 미술은 바야흐로 현대로 진입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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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화는 다른 어떠한 그림보다도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장르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로마시대의 벽화나 중세의 필사본에서 보면 고대인들은 벽에 장식 삼아 생명감 있는 정원풍경을 묘사하여 즐기기도 하고 성서적인 이야기 중에 배경으로 자연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등 자연에 대해 끊임없는 관심을 지니고 있었습니다(도1,2). 그러나 화가들이 화구를 메고 야외로 나가 아름다운 자연을 그리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 된 것은 19세기(지도) 이후의 일입니다. 오랫동안 미술의 소재로 비중 있게 다루어진 것은 자연보다는 인간이었습니다. 특히 교훈적 가치를 중요시 여겼던 역사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인체묘사가 필수적이었는데, 17세기 푸생의 작품(도3)에서 보면 자연은 화면의 중심을 차지한 인물에 비해 배경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을 모든 것의 기본으로 중시한 계몽주의 사상은 19세기 풍경화가 등장하는데 중요한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인간의 감정이 도덕적인 이상이나 교훈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되면서 풍경화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됩니다.

도1 <리비아의 별장 정원그림>, 높이 2m, 기원전 20년경
로마, 테르메 국립박물관
 
 
 
도2 랭부르 형제 <10월>, 1409-15년
『베리 공의 호화로운 기도서』
상티에, 콩데 박물관
 
도3 푸생 <아르카디아 에고>, 1638-40년
파리, 루브르 박물관
 
 
 
 

19세기 풍경화의 만개에 앞서 처음으로 독자적인 풍경화가 등장하였던 곳은 17세기 네덜란드였습니다(13주 주제2 참조). 청빈함을 중시하던 이 지역의 신교도들은 도4의 고이엔의 그림에서 보듯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인 바다와 낮은 구릉들을 소박하고 정감 있게 그린 풍경화를 애호하였습니다. 또한 18세기의 로마와 베네치아의 화가들은 여행취미에 맞춰 유서 깊은 도시의 풍광을 많이 그렸는데(14주 주제3참조)(도5), 이러한 풍경화의 등장은 신흥 상인층이나 여행객들과 같은 수요계층의 형성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도4 얀 반 고이엔 <도르트레이트 풍경 >, 1644년
나무패널에 유채
 
 
도5 카날레토 <석조장>, 1726-30년
캔바스에 유채, 124×163 cm, 런던, 국립미술관
 
 
 

19세기 낭만주의자들은 자연의 외적인 모습 이면에 신의 질서나 우주의 화합과 같은 진실이 숨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자연에 초월적인 정신성을 투영하는 범신론적인 풍경화는 독일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제작됩니다. 18세기 이후 독일은 고전주의 미학을 선도하였고 괴테나 쉴러와 같은 걸출한 낭만주의 문학가들을 배출하였지만 미술에서는 이렇다할 국제적인 조류를 만들어내지 못하였습니다. 대신 당시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한 독일의 민족주의 정서와 결합한 종교성이 짙은 미술이 주를 이루었습니다(도6,7,8). 오토 룽게(Philipp Otto Runge, 1777-1810)의 <아침>(도6)은 당시 독일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다소 수수께끼 같은 종교화입니다. 종교적 순수함을 강조한 상징성이 강한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도6 오토 룽게 <아침>, 1808년
캔바스에 유채, 10985.4 cm
함부르크, 쿤스트할레
 
 
도7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자작나무 숲의 성당>
1809-10년, 캔바스에 유채, 베를린, 슐로스 칼로트부르그
 
 
 
도8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바닷가의 수도승>, 1809-10년
캔바스에 유채, 110×171 cm, 베를린, 국립미술관
 
 

풍경화에 있어서 독일의 음울한 풍토를 인상깊게 반영한 화가는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입니다. 폐허가 된 고딕성당을 찾는 순례자들을 그린 <자작나무 숲의 성당>(도7)은 인간 존재의 무상함을 넘어서 우주적인 고독까지 느끼게 하는 신비스런 그림입니다. 이처럼 그의 그림에는 자연과의 영적인 교감이 드러나는데 <바닷가의 수도승>(도8)은 그러한 독일 낭만주의 미학을 매우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탁트인 검은 바닷가의 수도승은 마치 점처럼 표현되어 있어 자연의 불가사의 한 힘과 인간의 유한함을 대비시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한한 자연에 대한 경이감, 비극적인 슬픔, 고립감은 낭만주의 시대의 미학인 '숭고미'의 가장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신대륙인 미국에서도 광활한 자연을 바탕으로 한 낭만주의 풍경화가 활발하게 그려졌습니다. 이들 풍경화가들은 주로 허드슨 계곡의 개척지에서 작품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허드슨강 화파'라 부르지만 그들을 지역적으로 한정할 수는 없습니다. 토마스 콜(Thomas Cole, 1801-1848)의 작품(도9)을 보면 미국의 자연은 경이의 대상으로, 그리고 세속을 넘어서는 진실을 담고 있는 신의 그릇처럼 묘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거대한 자연 앞에서 압도당할 때 느껴지는 종교적인 신심과도 흡사합니다. 비어스타트 (Albert Bierstadt, 1830-1902)는 로키산이나 요세미티와 같은 서부를 직접 여행하고 그곳에서 받은 감동을 화폭에 담아낸 화가로 유명합니다(도10). 미국의 유명한 국립공원들이지요. 이러한 사실을 볼 때 미국 낭만주의 풍경화는 서부 개척기의 미국역사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9 토마스 콜 <폭풍이 지나간 후 홀리요크 산에서 바라본 광경>
1836년, 캔바스에 유채,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도10 알버트 비어스타트 <로키산의 정경> 1863년
캔바스에 유채,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19세기 풍경화는 터너와 컨스터블 같은 걸출한 풍경화가들을 배출한 영국에서 가장 활발하게 제작되었습니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장 자크 루소의 철학과 영국의 호반시인들의 활동은 이전의 버려 두었던 영국자연에 대해 다시금 눈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영국의 부유한 농가출신이었던 콘스터블 (John Constable, 1776-1837)은 주로 자신의 영지주변을 성실한 눈으로 그려냅니다. 그는 직접 야외로 나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의 갖가지 표정을 담아내고자 하였습니다. 특히 변화가 심한 영국의 구름의 변화를 관찰한 그의 스케치를 대하자면 마치 기상관이 날씨를 관찰하는 듯합니다(도11). 스톤헨지의 인상을 수채화로 그려낸 습작(도12)에서는 자연에서 받은 첫 느낌과 인상을 중시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11 컨스터블 <구름습작>, 1822년
종이에 유채, 30.5×49 cm, 런던, 코톨드 미술관
 
 
도12 컨스터블 <스톤헨지>
1820-31년사이, 수채, 윌트셔
 
 
 
 

그러나 컨스터블은 그림의 마지막 작업은 화가의 작업실에서 하였습니다. 그렇게 완성된 대작의 풍경화에는 거친 나무둥치들의 질감과 바람에 따라 살랑거리는 작은 잎들의 반짝임이 그대로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습니다. 그의 <건초마차>(도13)가 파리의 살롱에 출품되었을 때 갈색톤의 고전주의 풍경화에 익숙해 있던 프랑스 화가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들르크르와가 컨스터블의 그림을 보고 이미 완성된 <키오스섬에서의 학살>에 붉은색의 덧칠을 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화입니다.

컨스터블은 자연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그 안에는 진리가 담겨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컨스터블의 풍경화를 보면 화가의 관심이 눈에 포착되는 시각적인 표면 그 자체에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컨스터블 이전의 어떤 화가도 실제 자연에서 풍기는 싱싱한 초록색의 느낌을 그렇게 풍부하게 그려내지는 못했습니다. 아카데미 화가들은 눈으로 보기보다는 관례적으로 가까운 곳에는 갈색톤을 사용하고 뒤로 멀어지는 배경에는 푸른색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도14의 그림을 자세히 보면 컨스터블은 그러한 공식을 따르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대로의 원색들을 사용하였을 뿐 아니라, 빛이 반사되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 서로 초록색과 병치되는 붉은색과 흰색의 반점들을 과감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이러한 방식은 프랑스의 바르비종 화가와 훗날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게 됩니다.

도13 컨스터블 <건초마차>, 1821년
캔바스에 유채, 130×185 cm, 런던, 국립미술관
 
 
도14 컨스터블 <수문>, 1823-24년경
캔바스에 유채, 141.7×122 cm
필라델피아 미술관
 
 
 

영국의 또 다른 걸출한 풍경화가 윌리암 터너(Joseph William Turner, 1775-1851)는 보다 서사적이고 영웅적인 자연의 한 순간을 포착하고자 하였습니다. 클로드 로렌을 연상시키는 초기의 작품 <카르타고 제국의 건설>(도15)을 보면 그가 전통적인 역사화를 중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터너는 주로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의 장엄함이나 숭고함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바다는 인간을 한 순간에 파멸시키는 엄청난 힘을 지녔기 때문에 많은 낭만주의 화가들의 사랑을 받았던 주제였습니다. 도16의 <바다에 던져진 노예>는 몇 십년전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을 연상시키는 바다의 재난을 다룬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보험을 노리고 노예들을 바다에 던져버린 노예상들의 비인간적인 처사를 주제로 다룬 것이지만, 이 같은 주제는 크게 원형을 이루며 소용돌이치는 색의 소용돌이 속에 파묻혀 버린 것 같습니다. 즉 터너는 무엇보다도 비극적인 사건을 담아낼 전체적인 색채의 효과에 중점을 두었던 것입니다.

도15 터너 <카르타고 제국의 건설>, 1815년
캔바스에 유채, 155.5×232 cm, 런던, 영국미술관
 
 
도16 터너 <바다에 던져진 노예. 태풍의 전조>
1840년, 캔바스에 유채, 보스턴 미술관
 
 
 
 

유럽에서는 17세기 과학의 혁명이후 어느 때보다도 광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였는데 터너는 특히, 색채는 빛과 어둠이 서로 경합하는 가운데 발현된다고 주장한 괴테의 이론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어두움과 밝음, 서로 다른 색조들이 서로 부딪히며 녹아드는 형태를 통해 터너는 자연의 광폭함을 유감없이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터너의 풍경화는 <비, 증기, 속도>(도17)에서 보듯이 점차 형태를 무시하고 보이는 것의 인상 그 자체만을 중시하는 경향으로 나아갑니다. 그 효과는 모네의 인상주의(도18)와 흡사합니다. 이는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색채추상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도17 터너 <비, 증기, 속도>, 1844년
캔바스에 유채, 90.8×121.9 cm, 런던, 국립미술관
 
 
도18 모네 <인상. 해돋이>, 1872년
캔바스에 유채, 48×63 cm
파리 마즈몽탕 미술관
 
 

풍경화의 영역이 확장되어가던 영국에 비해, 프랑스에서는 자연은 영웅적인 이야기를 위한 무대여야 한다는 고전주의 전통이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신고전주의식의 도덕적 윤리나 정치적인 관심이 점차 후퇴하면서 자연주의적인 경향의 독립된 풍경화가 점차 독자적인 장르로 부상하게 됩니다.

파리 교회의 퐁텐블로 숲 근처에서는 루소나 코로와 같은 화가들이 모여 자연을 벗삼아 사실적인 풍경화를 그리게 되었는데, 이들을 바르비종 화가들이라고 합니다. 현장에서 직접 관찰하고 경험한 자연의 모습은 그들 작품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카미유 코로(Camille Corot, 1796-1875)는 전통적인 아카데미 교육을 받았지만 자연의 풍경 그 자체를 더 중시하였습니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도중에 그린 도19와 같은 풍경화를 보면 그가 고대의 유적이나 거장을 묘사하기보다는 솔직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더 즐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파리로 돌아온 후에는 <님프들의 춤>(도21)처럼 고대 전원시를 소재로 한 신화적인 풍경을 주로 그렸지만 도20에서 보듯, 말년에 그린 소박한 풍경화의 풍부한 대기의 느낌과 분방하고 가벼운 터치는 훗날 시슬리나 피사로의 풍경화를 보는 것 같습니다.

도19 코로 <로마 파르네제 정원풍경>, 1826년
캔바스에 유채, 25.1×40.6 cm, 워싱턴 D.C, 필립콜렉션
 
 
 
도20 코로 <망트 대성당>
1865-69, 캔바스에 유채
렝스, 생 드니 미술관
 
 
도21. 코로 <아침. 님프들의 춤>, 1850년
캔바스에 유채, 97.1×130 cm,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바르비종 화가들이 보여준 이러한 자연에 대한 감수성의 발견은 19세기 중반의 사실주의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자신의 현실이나 주변을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끝없이 펼쳐진 풍경 속에서 일하는 농부들의 세계가 당당하게 펼쳐진 밀레의 농촌풍경화는 현실적인 시각이 반영된 새로운 풍경화였습니다. 사실 밀레(Jean-Fransois Millet, 1814-1875)의 풍경화는 너무나 많은 복제품을 통해 잘 알려져 있어서 그림의 진면목을 느끼기가 쉽지 않습니다. 밀레의 농민그림은 보는 사람들의 시각에 따라서 목가적인 전원풍경으로 보이는가 하면, 혁명적인 노동자상을 표현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작가 자신의 표현이라기 보다는 보는 사람들의 입장에 기인한 결과였겠습니다. 어찌되었든 컨스터블의 농촌풍경이나 밀레의 풍경화가 19세기 산업혁명으로 번창한 도회생활에 염증을 느낀 도시인들의 향수를 반영한 것임에 틀림이 없겠습니다.

도22 밀레 <만종>, 1857-59년
캔바스에 유채, 55.5×66 cm,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도23 밀레 <이삭줍기>, 1855-57년, 캔바스에 유채
83.5×110 cm,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19세기 낭만주의 풍경화는 처음에는 인간의 상상력에 가치를 부여하는 서사적이고 범신론적인 풍경이 주를 이루었으나 점차 눈에 보이는 것 경험할 수 있는 것 자체에 더 큰 의미를 두는 경향으로 변화하였습니다. 컨스터블이나 바르비종화가들의 풍경화는 이처럼 신화의 시대가 끝나고 사실주의가 도래하는 것을 예고합니다. 이제 다른 어떤 교훈적인 주제보다도 자연의 순간적인 느낌과 빛이 사물에 닿는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 다음 세대의 화가들에게는 중요한 과제가 되었습니다. 인상주의 미술은 바로 이러한 시각적인 실증성에 기반을 둔 풍경화였습니다. 부댕 (Eugene Boudin, 1824-98)이나 도비니 (Charles-Fransois Daubigny, 1817-1878)는 전환기의 시각을 잘 보여줍니다. 물론 이러한 사실적인 풍경화의 부상 이면에는 현실적이고 비정치적인 주제를 선호하는 중간계급들의 문화층이 두터워지고 있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도24 도비니 <옵트보의 수문>, 1859년
캔바스에 유채, 49×73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25 부댕 <투르빌 해변>, 1865년경
캔바스에 유채, 67.3×104.1 cm, 미네아폴리스 인스티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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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장소와 지나가 버린 먼 과거는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합니다(지도). 이국적인 것에 대한 열렬한 호기심은 이처럼 상상력을 중시하는 낭만주의의 중요한 특징이었습니다. 여기 보시는 지로데-트리오종(Anne-Louis Girodet de Roncy, 1767-1824)의 <아탈라의 매장>(도1)은 아메리카의 황야를 배경으로 종족이 다른 인디안 청년과 처녀의 이루지 못한 사랑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이 그림의 소재가 된 샤토브리앙의 소설 『아탈라』는 미국에 가본 적이 없는 프랑스인들의 낭만적인 환상을 자극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 그림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연인은 한눈에 봐도 인디언의 생김새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기독교의 사제복장의 노인이 등장하고 동굴 밖에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어서 여자의 순결한 죽음과 기독교적인 신성함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곧 알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이 재현하고 있는 것이 실제 인디언들의 모습과 무관한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겠습니다.

도1 지로데 <아탈라의 매장>, 1808년, 캔바스에 유채,
파리, 루브르 박물관
 
 
 
 
 
언젠가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미국 영화에서 농부들이 베트남식 모자를 쓰고 나오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실수는 단순한 외형적인 표현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서구인들이 동양인을 자신과 다르다고 생각되는 타자로 대하는 인식과 관념의 결과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19세기는 유럽의 열강들이 일찍이 발전한 산업혁명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영토와 시장을 확장하던 시대였습니다. 영국은 아프리카 대부분과 인도를, 그리고 프랑스는 북아프리카와 베트남과 같은 지역을 식민지로 경영합니다. 이번 주제에서는 이러한 팽창의 시대에 서구에서 생산된 시각이미지들이 이러한 문화적, 경제적 타자들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유럽인들에게 있어서 근동이나 아프리카는 지리적으로는 가깝지만 문화적으로는 먼 이질적인 공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동양'을 야만적이고 후진적인 것으로 상정하여 자신들과의 문화적인 경계를 설정하여 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불편한 만남은 이미 고대 그리스 미술에서도 나타나 있습니다. 파르테논 신전에 서 있었다는 거대한 아테네상의 방패에는 아마존과의 전투장면이 조각되어 있는데(도2), 파르테논 신전을 포위한 아마존은 페르시아 군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도3에서 보듯이, 아폴로 신전의 프리즈에도 그리스 병사와 싸우는 아마존이 묘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인들이 페르시아와 같은 동방의 적을 여전사인 아마존의 이미지로 표현한 것은 왜 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동방의 문명이 위협적이면서도 동시에 매혹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도2 아테나 파르테노스 신상의 방패모형복원
기원전 440년경, 토론토, 왕립 온타리오 박물관
 
 
도3 <아마존을 내리치는 그리스 병사> 바사이의 아폴론 신전 프리즈
기원전420-410년경, 대리석, 높이 64 cm, 런던, 대영박물관
 
 
 
 

들라크르와의 <사르다나팔루스>(도4)는 동양에 대한 유럽인들의 뿌리깊은 관념인 '오리엔탈리즘'을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자신의 제국이 멸망하는 마당에 후궁들을 모아놓고 살육의 축제를 벌이는 사르다나팔루스를 보면서 동양은 미개하고 잔인하다라는 통념을 무의식중에 다시 각인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정말 앗시리아의 왕이 이 같은 가학적인 최후를 마쳤을까요? 서양사에서 마라톤 전투와 같은 그리스와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동방의 무자비한 전제정치에 대한 서구식 민주주의의 승리'로 보는 것도 어찌 보면 매우 유럽인 중심의 역사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르다나팔루스』와 같은 희곡을 쓴 바이런이나 그림을 그린 들라크르와 역시 그러한 시각을 반영한 것이구요. 우리는 역사상의 명화라고 할 지라도 그것이 어떠한 입장과 생각을 대변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도4 들라크르와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 1827년
캔바스에 유채, 395×495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들라크르와의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도4)은 프랑스 낭만주의 미술의 '동방취향'을 잘 보여줍니다. 이러한 '동방취향'은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부터 등장하여서 1832년 알제리 합병을 계기로 커다란 유행이 되었습니다. 미술에 있어서도 동방을 기행하거나 그곳을 소재로 한 작업이 증가하면서 오리엔탈리스트라는 화가집단이 형성되기도 합니다. 1832년 북아프리카 여행은 들라크르와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때 스케치북에 남긴 이국적이고 감각적인 형상들과 불타는 색채는 이후 그의 작품의 원천이 되어 <사자사냥>(도6)과 같은 작품을 남기게 됩니다.

도5 들라크르와 모로코에서의 스케치
1832년, 수채물감, 19.3×12.7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6 들라크르와 <사자사냥>, 1861년
캔바스에 유채,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이때의 인상을 바탕으로 제작된 도7의 <알제리 여인들>은 회교여인들의 방인 할렘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그러나 붉은 계열의 따뜻한 색채와 느슨한 붓질로 나른한 분위기를 한껏 돋군 데다가 흑인 몸종까지 딸려 있어 이 곳이 알제리 가정의 실제 모습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렘'이라는 일상적인 용어가 점차 터어키 궁전의 여인들이 모여있는 관능적인 공간을 가리키는 말로 통용되고 있는 것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즉 '하렘'은 서구인들이 식민지를 대하는 관능적인 시선이 집중된 특별한 장소인 셈입니다.

이에 반해 대부분의 오리엔탈리스트들의 그림에서 식민지 남성들은 부재하거나 아니면 매우 무기력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제롬(Jean Leon Gerome, 1824-1904)의 <뱀부리는 사람>(도8)에서는 전통의상을 입고 무기를 든 터어키의 군인들이 구경거리나 기웃거리는 좀 한심스러운 모습으로 재현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시선은 동양을 후진성, 게으름, 태만함으로 바라보는 시선이기도 합니다. 당시 프랑스의 문인인 라마르틴느는 "회교도들은 게으르고 그들의 정치는 변덕스러워 미래가 없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도7. 들라크르와 <알제리의 여인들>
1834년, 캔바스에 유채, 180×220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8. 제롬 <뱀부리기>, 1870 년경, 캔바스에 유채,
83.8×122.1 cm, 매사추세츠, 클라크 안트 인스티튜트
 
 
 
 

들라크르와가 하렘을 그린 것에서 이미 보았지만, 서양인들의 동방에 대한 기억은 주로 관능적인 여인으로 집중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앵그르의 <노예가 있는 오달리스크>(도9)는 그 대표적인 경우가 될 것입니다. 제국의 남성들은 식민지의 이국적인 여인들에 대한 끊임없는 환상을 품어왔으며 미술가들은 이에 부응한 그림들을 계속 생산했습니다. 나중에는 주로 사진으로 이러한 수요를 채우게 되지만 그렇게 찍힌 사진들은 사실을 그대로 재현한다는 매체의 속성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오랫동안 틀지워진 오리엔탈리즘의 시선을 반복하게 됩니다. 도10의 1910년대 제작된 프랑스의 식민지 관광엽서에서처럼 말입니다.

도9. 앵그르 <노예가 있는 오달리스크>, 1839년
캔바스에 유채, 캠브리지, 포그 미술관
 
 
도10. 프랑스 식민지 엽서, 1910년 경
 
 
 
 
 

유럽을 중심으로 특히 아시아나 아프리카를 문화적인 타자, 즉 남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인종이나 민족을 표상할 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앵그르의 <노예가 있는 오달리스크>(도9)에서는 공교롭게도 피부색이 다른 세여인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차례로 등장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왕의 사랑을 받은 오달리스크는 백인으로, 그를 위해 음악을 연주하는 여인은 황인으로, 그리고 하녀는 흑인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실제 이 세 여인은 모두 아랍인이었는데 말입니다. 식민지 경영과 침략을 가능하게 하였던 바탕에는 지리, 풍토, 민속, 인종학적 분류학과 같은 실증주의 학문의 축적이 있었습니다. 지식이 권력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나폴레옹이 이집트 침략길에 수많은 학자들과 미술가들을 동행시키고 이집트 학회를 구성하게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도11에서 제롬은 이국적인 색채가 풍부한 의상과 흑인 소년의 인상학적인 묘사를 대단히 세밀한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의 대상으로서 말입니다. 이러한 시선은 어쩌면 분류학적인 목적으로 제작된 많은 기록사진들과 같은 시선일지도 모르겠습니다(도12). 그렇다면 흑인미술가가 자신들 스스로를 재현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도13의 <감사기도>를 그린 헨리 타너(Henry Tanner, 1859-1937)는 필라델피아에서 토마스 어킨스에게서 그림을 배운 미국 흑인 1세대 미술가입니다. 그는 소박한 식사를 위해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장면을 포착하였는데 화가의 시선이 관찰자의 시점에 있기보다는 따뜻한 분위기에 스스로 녹아들어 가 있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도11 제롬 <터어키 군인복장을 한 흑인 소년>, 1869년
 
 
 
도12 알퐁스 베르티옹 인종분류사진, 1893년
 
 
 
도13 헨리 타너 <감사기도>, 1894년
캔바스에 유채, William H and Camille Cosby 소장
 
 
 
 

미술가가 세상을 재현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입장 즉 어느 지역에 사는지, 남성인지 여성인지, 어떠한 계층에 속하는지 하는 것들의 관여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에 드러난 작가의 시선을 읽는 것은 미술의 양식을 분석하는 것 못지 않게 흥미로운 작업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19세기 서구의 미술을 보면서 열강의 남성이 중심이 된 사회의 시각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현재는 어떠할까요. 도14,15에서 보듯 우리가 현대미술의 대가로 주저 없이 손꼽는 고갱, 마티스의 그림에 분명히 이러한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미술관이 아닌 일상생활에서 접하게 되는 다른 이미지들은 어떠할까요? 유감스럽지만 자연과 야만 그리고 여성을 동일화하는 오래된 방식은 출판물의 표지, 광고, 관광포스터 등등을 통해 지금도 이용되는 있는 것 같습니다.

도14. 폴 고갱 <마나오 투파파우, 죽음의 영이 지켜봄>
1892년버팔로, 알브라이트 녹스 미술관
 
 
 
도15. 마티스 <목련꽃이 있는 오달리스크>
1923년, 캔바스에 유채, 65 81 cm, 개인소장
 
 
 
도16.『내셔널지오그래피』표지
 
 
 
 
도17. 모로코 관광 포스터, 19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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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전주의가 일관된 양식을 가지고 있는 것에 반해서, 미술사에서 낭만주의에 대한 정의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좁게는 19세기 초 신고전주의의 차가운 형식에 대한 반동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개인의 상상력을 중시하는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태도에 바탕을 둔 좀 더 광범위한 예술운동입니다. 18세기부터 유행한 신고전주의 역시 시간과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고대를 동경한다는 점에서 낭만주의 한 양상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낭만주의는 18세기말부터 몰아닥친 질풍노도의 혁명의 시대를 반영하는 정신적인 사조였으며 신고전주의는 낭만주의를 여는 그의 전초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19세기 전반기(지도)를 뜨겁게 달군 낭만주의는 한편으로 자유에 대한 신념을 가져온 '계몽주의의 또 다른 열매이기도 했습니다. 모순 되게 생각되지만 계몽주의는 이성과 더불어 상상력과 감정도 자유롭게 하였습니다. 고야(Francisco de Goya y Lucientes, 1746-1828)의 <잠자는 이성은 괴물을 깨운다.>(도1)는 이러한 낭만주의의 양면성을 잘 보여줍니다. 책상에 고개를 파묻고 있는 남자의 등뒤로 무지와 어리석음을 상징하는 부엉이, 박쥐들이 몰려드는 모습이 섬짓합니다. 18세기 말 계몽주의 시대에는 예술을 광기에 붙잡힌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런 점에서 고야의 작품은 르네상스 시기에 뒤러가 예술가를 우울증에 사로잡힌 천재로 묘사했던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도2). 고야는 내면의 상상력이야말로 예술 창조력의 보고라는 점을 인식하였던 것 같습니다. '상상력'은 자유와 개성을 중시하는 낭만주의 정신의 근간이었으며, 바로 이러한 점에서 낭만주의는 19세기 말의 상징주의나 표현주의와 상통합니다. 또한 현실과 충돌하는 초현실의 영역에 대한 탐구는 후에 프로이트의 무의식의 발견으로 이어집니다.

도1 고야 <잠자는 이성은 괴물을 깨운다>
판화집 카프리초스 43번
1799년, 21.6×15.2 cm
 
도2 뒤러 <멜랑코리아 I> 1514년
드라이포인트와 에칭
24×19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3에서 보듯 들라크르와의 회화는 격렬한 동세, 파격적인 색채의 사용, 그리고 휘몰아치는 붓놀림으로 신고전주의에 도전하였던 낭만주의 미술사조를 대표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양식적인 구분으로 낭만주의라는 광범위한 미술사조를 다 포괄할 수는 없겠습니다. 도4에서 보듯, 신고전주의를 끝까지 고수하였던 앵그르의 신화적인 상상력이나 자연에 대한 관찰을 중시하였던 영국의 컨스터블(도5), 그리고 영혼이 깃 든 듯한 프리드리히의 풍경화(도6) 역시 이러한 낭만주의와 맥을 같이 합니다.

도3 들라크르와 <사자사냥> 1854년, 유화스케치
86×115 cm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도4 앵그르 <안젤리카를 구하는 뤼지에르>
1893년, 캔바스에 유채
런던, 국립미술관
 
 
도5 컨스터블 <찰즈베리 대성당>
1831년, 캔바스에 유채
런던, 국립미술관
 
 
도6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안개 위의 방랑자>
1818년경, 캔바스에 유채, 34.8×74.8 cm
함부르그, 국립박물관
 
 
 
 

낭만주의, 즉 로맨티시즘이라는 용어는 중세의 모험담을 일컫는 로맨스에서 나왔습니다. 18세기에는 고대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고딕시대의 중세적인 상상력도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 영국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윌리엄 블레이크 (William Blake, 1757-1827)는 단테의 『지옥편』의 한 장면을 그린 <쾌락의 원형>(도7)에서 남녀의 결합을 휘몰아치는 소용돌이로 표현하였습니다. 이때 남녀들의 왜곡된 인체는 중세 고딕성당의 그로테스크한 조각상들을 연상시킵니다. 그런가 하면 『유럽: 예언자』라는 시집의 표지였던 <태고>(도8)에 등장하는 창조주의 모습은 그 영웅적인 신체에서 미켈란젤로를 연상시킵니다. 그러나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빛의 컴퍼스로 세상을 재단하는 창조자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어서 쉽사리 잊혀지지 않습니다. 블레이크는 자신의 꿈에서 독특한 장면의 영감을 얻었다고 하는데 내면의 무의식을 중시했다는 점에서 낭만주의 미술가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도7 윌리암 블레이크 <쾌락의 원형> 단테의 『지옥편』
중 제 5편, 1824년 경종이위에 펜, 연필, 수채화,
46×58 cm, 런던, 테이트 갤러리
 
도8 윌리암 블레이크 <태고> 1794년, 에칭에 수채,
23.3×16.8 cm
런던, 대영박물관
 
 
 
인간의 내면에 도사린 난폭함과 잔인함, 이성의 본 모습에 대해 고야처럼 놀라운 작품을 제작한 경우도 드물 것입니다. 프랑스의 다비드가 혁명의 신념을 나타내고자 하였다면, 스페인의 궁정화가였던 고야 는 그 혁명의 광기로 인한 비극적인 그림자를 표출하고 있어서 흥미롭습니다(다비드에 대해서는 15주의 주제1을 참조). 두 화가 모두 일국의 공식화가로서 혁명의 소용돌이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다비드의 차갑고 매끈한 화면이 관객의 감정이 극적으로 쏠리는 것을 막고 시대의 도덕적인 명분을 생각하게 하는 반면, 고야의 음울한 화면에서는 감정이 넘쳐나고 폭발하는 것 같습니다.
 

고야는 얼마전까지 티에폴로가 활약했던 마드리드 궁전에서 로코코 양식으로 화업을 시작하였습니다(14주 주제1참조). 도9에서 보듯이, 실크 스타킹에 모자를 쓴 멋쟁이 신사의 모습은 당시 궁정화가 고야의 자화상입니다. 그는 당시 왕실에서 사용할 타피스트리의 밑그림을 그리거나 왕실의 귀족들의 초상화를 주로 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시기의 걸작은 뭐니 뭐니해도 거대한 <카를로스 4세>(도10)의 가족 초상일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에 이 왕족들의 모습이 어떻게 비춰지는지 궁금합니다. 사실 이 작품은 왕가의 초상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냉소적이며 현대적입니다. 물론 고야는 카를로스 4세와 왕비 마리아 루이자를 비롯하여 자녀들을 화려하게 치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쩐지 세련되지 못한 벼락 출세자들처럼 그려져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 느낌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다비드의 <나폴레옹의 대관식>(15주 주제1, 도12)에 재현된 왕가의 권위를 생각하면 분명한 것입니다.

이 초상화는 이러한 점 때문에 봉건왕조가 몰락하는 징후를 포착한 시대의 자화상으로 평가되었습니다. 그리고 고야는 이 작품을 통해 민중의 시각을 반영하였다고 해석되었지요. 그러나 절대왕조가 몰락하는 혁명의 시대에 미술가가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을 공공연히 한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일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단두대에 갈 뻔한 다비드의 예를 보듯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왕조들이 그렇게 취약하게 그려진 것일까요.

도9 고야 <화실의 자화상>
1791-92년경, 캔바스에 유채, 42×29 cm
마드리드, 산 페르난도 왕립 아카데미
 
 
도10 고야 <카를로스 4세와 그의 가족>
1800년, 캔바스에 유채, 2.79×3.35 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도11 벨라스케스 <라스메니나스>
1656년, 캔바스에 유채, 3.2×2.7 m
프라도, 마드리드 박물관
 
 
도12 고야 <벨라스케스의 라스메니나스>
모사 동판화
 
 

마드리드 궁정은 지난 17세기의 위대한 화가 벨라스케스의 작품이 많이 남아있던 곳으로, 옛 대가의 명성은 고야에게 존경심과 경쟁심을 함께 자극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벨라스케스 역시 화가의 모습이 포함된 왕실초상화 <라스메니나스>(도11)를 그렸는데, 공교롭게도 두 작품은 그 크기도 흡사합니다. 도12에서 보듯이 고야는 <라스메니나스>를 동판화로 모사하기도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은 벨라스케스가 이작품에서 십자훈장을 단 자신을 당당하게 그렸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12주 주제3 참조). 그렇다면 고야가 이처럼 왕족들을 속물처럼 그리게 된 것도 왕실화가로서의 높은 자부심 때문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고야의 이 왕실초상화에서, 권력자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을 버리지 않았던 벨라스케스의 유산을 만나게 됩니다.

 
 

고야의 판화집『카프리쵸스 Los Caprichos: 변덕』에는 18세기말 불안정한 시대를 사는 스페인 민초들의 모습과 인간의 무의식을 사로잡는 불안, 광기, 폭력, 잔혹함에 대한 어두운 시선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거리의 뚜장이, 부랑자, 주정뱅이와 같은 어리석은 인간들과 마녀들이 등장하여 만들어내는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는 1870년대 스페인 왕가의 시대를 우울하게 반영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도13,14). 도13에서는 당나귀를 등에 메고 힘겨워하는 농민들을 묘사하고 있는데 두 마리의 당나귀는 '왕실'과 '교회'를 상징합니다. 혁명전야에 교회와 왕권에 눌려 신음하는 민중의 자화상이라 할 만합니다. 또한 도14에서 보듯 고야는 마녀나 정신병자들을 주제로 삼은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런데 이같은 주제는 피라네지의 <감옥>시리즈(14주 주제3, 도19 참조)나, 호가스의 <베들럼>(14주 주제2참조)에서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계몽주의 시대에 사회적인 규율이나 정상에서 배제된 것들에 공통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도13 고야 <너는 그것을 하지 못한다>
변덕연작, 42번, 1799년, 에칭과 아쿼틴트
 
 
도14 고야 <그들은 실을 잘 잣고 있다>
카프리치오소 제 44번
1797-98년, 동판화, 21.4×15 cm
 
 
 

나폴레옹의 군대가 스페인에 입성하였을 때 민중들은 내심 혁명군이 자신들에게 자유를 선사할 것이라 기대하였지만 제국주의적인 욕심을 지닌 프랑스 군대는 단지 침략자였을 뿐이었습니다. 고야의 <1808년 5월의 처형>(도15)은 전날 스페인의 기습공격을 당한 프랑스인들이 무고한 농민들을 상대로 무자비한 보복을 가하는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고야는 카라바지오을 연상시키는 강렬한 빛을 사용하여 참혹스러운 장면을 더욱 극적으로 만듭니다. 두려움에 얼굴을 감싸고 형장으로 올라오는 인물과 이미 주검이 되어 쓰러진 인물 사이의 흰 옷을 입은 인물은 그 강렬한 빛으로 인해서 이 그림의 하이라이트입니다. 고야는 이 무지랭이를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처럼 순교자로 그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스페인의 맹렬한 저항으로 마침내 무적의 나폴레옹군은 1814년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스페인인들은 프랑스와의 투쟁을 통해 새로운 민족의식을 싹 티울 수 있었습니다. 이 작품은 이러한 스페인의 저항을 기념하기 위해 1814년 페르디난트 7세의 요청으로 제작된 역사의 기록화이자, 혁명의 그림자가 어둡게 드리운 19세기 낭만주의의 걸작입니다.

도15 고야 <1808년 5월의 처형>
1814년, 캔바스에 유채, 266×345 cm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거인>이나 <전쟁의 참화>(도16,17)와 같은 고야의 작품들은 바로 이러한 전쟁의 시기를 거쳐 제작되었습니다. 전쟁이 가져다주는 공포와 잔혹, 인간의 내면적인 폭력성, 그리고 공포가 악몽처럼 거침없이 드러난 이 작품들을 접하면 인간이 정말 이성적이며 선한 본성을 지녔는가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계몽사상의 기본에 대한 신뢰의 상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0세기의 대량살상의 전쟁을 두 번이나 경험한 현대인들에게 고야의 이미지들은 소름끼치는 예언력을 지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도16 고야 <거인>, 1808-12년
캔바스에 유채, 116×105 cm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도17 고야 <이것이 더 나쁘다> 『전쟁의 참화』 제 37번
1810-15년 경, 에칭, 15.7×20.5 cm,
 
 
 
 

프랑스에서는 고전주의가 여전히 우세했지만 점차 다비드의 다음세대들에게서 낭만적인 기질이 반영된 작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다비드의 화실에서 배웠던 제자 그로(Baron Antoine-Jean Gros, 1771-1835) 제리코는 자유스럽고 제약받지 않는 창작욕구와 고전적인 규범 사이에서 특히 갈등을 겪어야 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종군화가였던 그로 남작의 <자파에서의 전염병>(도18)은 혁명전쟁을 기록한 전쟁기록화입니다. 당시 이집트에서 페스트가 발병하여 이집트군과 프랑스군 모두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다고 하는데, 두 진영은 빛과 어둠의 부분으로 화면을 크게 나누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로는 전경에 처참하게 죽어 가는 시신을 늘어 놓아 죽음에 대한 공포를 다루고 있을 뿐 아니라 회교사원을 배경으로 하여 보는 이들에게 이국적인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로는 다비드의 화실에서 신고전주의의 규범을 배웠지만, 죽음, 공포, 이국적인 것에 대한 관심은 그를 낭만주의 사조로 나아가게 하였던 것입니다.

도18 그로 <자파에서의 전염병>
1804년, 캔바스에 유채, 532×720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그로는 치명적인 전염병에 걸린 부하들의 몸에 손을 대면서까지 그들을 격려하는 나폴레옹의 두려움 없는 용기를 드러내고자 하였습니다. 여기서 나폴레옹은 병자들을 돌보는 예수의 모습으로 이상화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점에서 이 그림은 나폴레옹의 혁명전쟁이라는 동일한 이야기를 다룬 고야의 <1808년의 총살>과 여러모로 비교됩니다. 그로의 작품이 전쟁영웅을 미화하였다면 고야의 작품에는 혁명의 어두운 면이 폭로되어 있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사실 나폴레옹은 이곳을 다녀간 후 페스트에 걸린 병사들을 죽일 것을 명령하였다고 하니 통치자를 선전하는 이미지가 사실과 다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로와 마찬가지로 테오도르 제리코(Theodore Gericault, 1791-1824)역시 짧은 생애동안 줄곧 죽음과 폭력, 절망과 같은 극적인 장면에 몰두하였습니다. 이러한 기질은 고야의 음울한 상상력과도 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도19의 <메두사의 뗏목>은 그가 몇 년을 두고 몰두하였던 야심작으로, 낭만주의의 선언이 되었던 작품입니다. 나중에 들라크르와는 후일 <단테의 배>(도20)를 통해 제리코의 죽음에 경의를 표현하였다고 합니다.

제리코가 그린 이 장면은 1816년 당시 있었던 사건을 기초로 하였습니다. 프랑스의 범선 메두사호는 군인과 이주민들을 포함한 수백명의 승객을 태우고 세네갈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 배는 아프리카의 해안에서 난파되어 12일 동안의 표류 끝에 겨우 15명만이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이 사고는 프랑스 정부의 무능과 부조리 때문이었다고 알려졌기 때문에 제리코가 이사건을 장엄한 역사화의 스케일로 제작한 것에는 어떤 정치적인 의도가 있다고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성수대교의 붕괴와 같은 부패형 참사를 기록한 다큐멘타리 사진 전시회 같은 것을 상상해보면 수긍할 만하다고 생각됩니다.

도19 제리코 <메두사의 뗏목>, 1819년
캔바스에 유채, 491×716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20 들라크르와 <단테의 배>, 1822년
캔바스에 유채, 189×242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물론 이 작품에는 해부학적인 인체의 묘사라든가, 안정된 삼각형 구도와 같은 신고전주의적인 요소가 분명히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을 '낭만주의의 선언'이라고 말하는 것은 신고전주의처럼 도덕적인 교훈을 중시하기보다는 기아와 풍랑에 휩쓸리며 희망을 잃은 인간들의 참상 그 자체에 주제를 맞추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도21의 습작에서 보듯이 제리코는 이 작품을 위해 수많은 습작을 했을 뿐 아니라 생존자들을 만나 인터뷰를 가졌으며, 전경의 널부러진 시체들을 더욱 실감나게 묘사하기 위해서 시체보관소에 가서 절단된 사지나 참수된 두상을 관찰하여 그리기도 하였습니다(도22). 제리코는 이후 정신과 의사의 요청으로 편집광 환자들의 임상적인 표정을 포착한 초상화(도23)를 그리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작업들에서 제리코가 일찍이 역사나 신화보다는 현실적인 것과 눈에 보이는 것에 더욱 집착하는 실증주의적인 태도를 지녔음을 보게됩니다.

도21 제리코 <메두사의 뗏목>을 위한 습작
 
 
 
도22 제리코 <잘린 머리>
1818년, 캔바스에 유채, 50×61 cm
스톡홀름, 스웨덴 국립박물관
 
도23 제리코 <편집광 환자>
1822-23년 경, 캔바스에 유채
72×58 cm, 리옹, 미술관
 
 
 
 

그로와 제리코의 작품은 들라크르와(Eugene Delacroix, 1798-1863)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자신은 결코 낭만주의자가 아니라고 하였지만 들라크르와에게서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의 미술은 가장 만발하였습니다. 1924년 살롱에 <키오스섬에서의 학살>(도24)이 출품되자 관객들의 회화의 학살이라고 경악하였습니다. 전통적으로 살롱에 출품되는 작품은 명암법을 잘 구사하여 매끄럽게 마무리되어야 했습니다. <키오스섬에서의 학살>은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중경이 없이 급격하게 멀어지는 화면의 공간이나, 원색적인 붉은 색의 과격한 병치, 스케치처럼 그대로 남아 있는 붓자국 때문에 미완성의 작품이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루벤스를 연상시키는 이러한 파격적인 구성과 강렬한 색채 때문에 그는 푸생을 옹호하던 아카데미 화가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봇물처럼 터지기 시작한 인간의 감정을 미술에 투영하고자 했던 낭만주의는 이미 시대의 대세가 되었습니다. 사실 역사상 미술의 가장 근원적인 주제는 인간의 내면과 감정 그 자체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미술관에서 만나는 현대미술도 자세히 보면 인간의 내면의 문제를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도24 들라크르와 <키오스섬의 학살>
1822-24년, 캔바스에 유채, 4.2×3.5 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25 들라크르와 <키오스섬의 학살> 부분
 
 
 
 
 

들라크르와의 낭만주의는 1829년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도26)에서 더욱 고조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영국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의 동명의 희곡에서 따온 것으로, 앗시리아의 마지막 왕 사르다나팔루스가 최후의 순간에 후궁들을 살해하고 보물들을 모아 불을 지르는 장면을 그림으로 그린 것입니다.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파멸시키고 맞이하는참혹한 죽음은 신고전주의의 영웅찬미와 큰 대조를 이루는 낭만주의적인 소재입니다. 또한 동방의 이국적인 왕의 침실에서 일어나는 잔혹한 장면은 낭만주의 시대를 풍미하였던 이국적인 동방취미의 전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장면이 실제의 역사적인 사건이기보다는 유럽인들이 생각하는 동방에 대한 선입관이나 인상에 의해 상상된 장면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키오스섬의 학살>(도24)에서도 그리스를 침략하는 터키인들은 잔혹한 야만인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서구의 시선'에 대해서는 다음 주제에서 다시 한번 살펴보겠지만, 21세기인 현재에도 유효한 것이 많습니다.

도26 들라크르와 <사르다라팔루스의 죽음>, 1827년
캔바스에 유채, 395×495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신고전주의에 뒤이어 전개되는 열정과 상상력과 광기가 곁들어진 미술운동은 유럽과 신대륙을 휩쓸고 지나간 정치적인 격정과 그로 인한 긴장이 반영된 결과였습니다. 괴테는 이러한 19세기를 일컬어 "질풍노도의 시대"라고 하였습니다. 한편으로 블레이크, 그로, 고야, 제리코 등등의 작가에게서는 상상력과 자신들의 개성을 무엇보다도 중시하는 새로운 미술가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창조력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특별한 선물로 여겼는데 우리가 미술가에 대해 생각하는 고독한 천재의 이미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러한 예술에 대한 생각은 20세기 전위미술을 거쳐 지금도 상당부분 믿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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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4-10-20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으...스크롤의 압박....판다님은 읽을거리를 너무 많이 올려주셔서 힘들어요...으으..흐흐흐...(이게 왠 말도 안되는 투정이랍니까)

panda78 2004-10-20 0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곧 이것도 바닥나는데, 이번엔 어디서 뭘 퍼 와야 할런지..... ^^;;;
 

19세기는 구체제를 무너뜨리는 폭풍 같은 혁명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프랑스(지도) 대혁명과 산업혁명만큼 서양문명의 모습을 크게 변화시킨 사건은 없었을 것입니다. (산업혁명으로 생겨난 중산층의 삶이 미술에 반영되는 것은 19세기 중반이후로, 이 문제에 대해서는 16주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우리는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라든가 “국가의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만, 이러한 주장은 처음에는 너무도 과격한 것이어서 이를 성취하는데 피비린내 나는 투쟁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시대로 알려진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전반기 서구의 미술에는 이러한 정치적인 혁명의 소용돌이가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때로는 이성에 대한 열렬한 신념이 반영되어 있고, 그런가하면 개인의 내면을 중시하는 낭만적인 상상력이 한껏 발현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번주는 19세기의 전반기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미술을 통해, 정치적인 혁명, 개인의 발견, 민족국가의 형성과 제국주의의 시선과 같은 다양한 관점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신고전주의 운동은 1760년 즈음부터 일어나기 시작하는데, 이탈리아에서 꾸준히 진행되던 고대유적 발굴과 독일의 미술사가 빙켈만의 미학은 큰 자극이 되었습니다(고대 동경에 대해서는 14주의 3번째 주제에서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사실 그들이 발견한 고대 유물들은 로마 시대의 대리석 복제물이기는 하였지만, 고대건축과 조각의 명료함, 단순 장엄함은 계몽주의 지식인들이 갈망하였던 새로운 시대의 덕목과 잘 어울리는 것이었습니다. 바로크 시대의 과장된 특징이 왕정체제를 뒷받침해온 구시대의 미술이었다면, 고전주의는 계몽주의 시대의 신조류를 대변하는 문화양식이었던 것입니다. 계몽주의가 성숙하여 혁명의 기운이 무르익자 미술에도 역사적인 사건이나 영웅적인 주제를 다루는 역사화가 다시 등장합니다. 프라고나르부쉐의 감성적인 그림에 대한 반발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프랑스의 화가 다비드는 바로 이러한 혁명기의 신고전주의 양식을 대변합니다.

 
 

로마상(프리 드 롬: Prix de Rome)을 수상하고, 로마에서 유학을 마친 후 다비드(Jacqes-Louis David, 1748-1825)는 귀국하던 해의 살롱에 <구걸하는 발리자리우스>(도1)를 출품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다비드는 6년을 로마에서 지내며, 고대의 유적을 몸소 체험하고,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의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할 기회를 가졌었습니다. 그림의 원경에 보이는 오벨리스크와 로마풍의 건축물, 웅장한 기둥과 조각처럼 명암이 두드러진 인물들은 로마에서 체제하였던 경험의 산물이었습니다. 특히 다비드는 푸생의 고전적인 숭고함을 높이 샀는데, 이 작품의 배경이 된 로마는 그냥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푸생의 <포키온의 장례>(도2)에서처럼 영웅적인 행동에 걸맞는 무대일 것입니다. 게다가 두 그림에 동시에 나타나는 후경의 오벨리스크로 보아 다비드는 푸생의 그림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입니다.

도1 다비드 <구걸하는 발리자리우스>
1781년, 287×312cm, 캔바스에 유채,
릴, 보자르 미술관
 
도2 푸생 <포키온의 장례>, 1648년,
캔버스에 유채, 웨일스 국립미술관
 
 

발리자리우스는 6세기경, 로마의 재건에 큰 공을 세웠으나, 동료들의 모함으로 장님이 되어 추방되었던 유스티니아누스황제 치하의 장군이었습니다. 18세기 귀족들의 사치와 방종에 대한 혐오감이 확산되면서 계몽주의 지식인들은 시민으로서의 도덕적인 의무를 충실하게 따랐던 로마 공화정시대의 영웅들과 자신들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비록 발리자리우스처럼 비극적일 종말을 맞게 되더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고전미술의 장엄함이야말로 애국적 희생이라는 정신적인 숭고함을 발현시키기에 가장 적당한 양식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습니다.

 
 

<호라티우스의 맹세>(도3)는 혁명의 기운이 무르익던 18세기 말을 대변하는 다비드의 대표작입니다. 17세기 프랑스의 비극작가 코르네이유의 『호라스』는 영국의 햄릿이나 멕베스처럼 고전비극의 대표작으로 당시에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야기의 배경은 로마 건국시대입니다. 오랫동안 전쟁에 시달리던 로마와 알바 두 도시는 마침내 양쪽에서 3인의 전사를 내어 승부를 결정짓기로 하였습니다. 로마의 호라스 형제와 알바의 퀴리아스 3형제가 선택되었는데, 두 집안은 이미 사돈관계를 맺고 있었을 뿐 아니라, 호라스의 누이 카미유(오른쪽에 슬픔에 빠져 있는, 푸른 옷을 입은 여인)는 적군의 형제와 이미 약혼한 사이였습니다. 호라스 형제들은 상대를 차례로 죽이고 로마에게 승리를 안겨주지만, 연인을 잃고 절망하는 여동생을 살해한 혐의로 죄인의 몸이 되고 맙니다. 원래 프랑스 왕실로부터 다비드가 주문받았던 장면은 아버지의 열렬한 변호로 호라스가 법정에서 사면되는 극의 마지막 장면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비드는 출정전에 아들들이 아버지 앞에서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승리를 맹세하는 장면을 선택하였습니다. 물론 이 장면은 원작에는 없었던 장면이었습니다. 다비드의 의도는 모든 것이 파멸되는 비극적인 사건의 결과보다는, 고귀한 애국심 고취에 중심을 두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도3 다비드 <호라티우스의 맹세>, 1784년
캔바스에 유채, 330×425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1781년 로마에서 돌아온 다비드는 <구걸하는 발리자리우스>를 시작으로 <호라티우스의 맹세>를 포함하여 혁명이 일어난 1789년까지 고대 영웅들의 도덕적인 용기를 찬양하는 작품들을 연속해서 그렸습니다. 악법이지만 국가의 법을 지키기 위해 독배를 드는 소크라테스와(도4) 공화정을 지키기 위해 모반혐의가 있는 아들들을 참수시킨 부르투스(도5)는 자신들의 신념을 위해 죽음과 인륜을 넘어서는 행동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같은 일련의 작품들은, 다비드가 나중에 프랑스 혁명에 동조한 까닭에, 군주제를 반대하는 화가의 속마음을 담고 있다고 해석되기도 합니다. 다비드가 과연 자유주의에 대한 신념을 작품에 반영하고자 했던 것일까요?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그림들이 부르봉 왕실의 주문으로 제작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마도 그는 당시에 유행하였던 시민적인 덕목(civic virture)을 말하고자 하였을 것입니다. 국가가 왕의 소유물이 아닌, 시민들의 자발적인 애국심을 필요로 하는 구성체로 인식하게 된 것을 매우 근대적인 현상이며, 그런점에서 다비드의 실제적인 의도와는 상관없이, 19세기의 중요한 키워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도4 다비드 <소크라테스의 죽음>
1787년, 129.9×195.9 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도5 다비드 <브르투스와 주검이 되어 돌아온 아들들>
1789년, 322.9×422cm
 
 
 

다비드의 <호라티우스의 맹세>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도3,6,7). 그리스 부조나 도기화에서 그대로 빠져나온 것 같은 여인들은 슬픔에 자신의 몸조차 가누기 힘들어 보입니다. 어떠한 어려움에도 조국을 구하겠다는 결의에 찬 남성들과 여성들의 나약함이 분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계몽주의자들은 로코코 시대의 여성적인 장식성을 구시대의 타락한 문화의 표현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반대의 표시로 더욱 남성적인 강인함을 연상시키는 고전주의를 채택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남성이 ‘이성’이라면 여성은 ‘감성’을 대변한다고 여겼으며, 이러한 감수성에 분명한 위계를 두었습니다. 위를 향한 소크라테스의 손가락이나(도8), 부르투스의 머리로 향한 손은(도9) 그들이 이성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제스춰입니다. 성에 따라 타고난 감수성에 차이가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은 지금도 많은 논쟁을 낳고 있으며, 현대미술의 한 중요한 주제가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도6 <호라티우스의 맹세> 부분
 
 
 
 
도7 <호라티우스의 맹세> 부분
 
 
 
도8 <소크라테스의 죽음> 부분
 
 
 
도9 <부르투스와 주검이 되어
돌아온 아들들> 부분
 
 
 
 
 

다비드는 프랑스 대혁명에 동조하여 로베스피에르의 혁명정부의 일을 도왔습니다. 루이 16세를 단두대에 세우는 데도 기꺼이 찬성하였으며, 혁명정부가 주관하는 국민축제를 기획하기도 하였습니다. 도10의 <마라의 죽음>은 바로 이 시기에 제작된 작품입니다. 급진적 공화주의자였던 마라는 왕당파의 열성단원이었던 샤를로트 코르디에게 살해되었습니다. 그는 심한 피부병으로 늘 욕조에서 업무를 보았다고 하는데 욕실에서 무방비상태로 젊은 여자에게 칼을 맞은 이 사건 자체로는 어떠한 영웅적인 결말을 그려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비드는 현실의 사건을 영웅적인 순교의 장면으로 전환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는 화면의 절반을 비워두고 시선의 초점을 마라에게만 집중시킵니다. 현실의 욕조는 고대의 석관으로 변화되며, 다비드는 일부러 집무 테이블을 ‘마라에게,A MARA’라는 글씨가 새겨진 비석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흰 터번은 후광이 되어 마라를 혁명의 순교자로 이상화시킵니다. 이전의 역사화처럼 고대를 연상시키는 어떠한 직접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다른 어떤 신고전주의 역사화보다 숭고함을 추구하는 고전주의 정신이 적절하게 표현되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도10 다비드 <마라의 죽음>
1793년, 캔바스에 유채, 165×128.3 cm
브뤼셀, 벨기에 왕립미술관
 
도11 벤자민 웨스트 <울프장군의 죽음>
1770년, 캔바스에 유채, 151×213 cm
오타와, 캐나다 국립미술관
 

영국에서 활약하였던 미국인 화가 벤자민 웨스트(Benjamin West, 1738-1820)는 20여 년 전에 퀘백 전투에서 프랑스 부대를 물리치고 목숨을 버린 젊은 영국인 장교의 죽음을 묘사한 적이 있습니다(도11). 벤자민 웨스트 역시 울프장군을 종교적인 순교자의 모습으로 재현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 작품 모두 당대의 사건을 주제로 삼은 역사화입니다만, <마라의 죽음>과 비교하여 볼 때 그뢰즈식의 과장된 설교는 그만 그림의 숭고함을 감소시켜 버렸습니다.

 
 

19세기 혁명과 반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미술은 권력자의 정당성을 입증하는데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로베스피에르의 혁명정부가 실각한 이후 다비드는 다시 나폴레옹의 제정기의 미술가로서 다시 한번 선전미술을 담당하게 됩니다. 코르시카의 일개 장교에서, 프랑스를 구한 구국의 위인으로, 종신통령을 거쳐 황제의 자리에 앉게 된 나폴레옹은 아마도 역사상 가장 극적인 신분상승을 이룬 통치자였을 것입니다. 1804년 국민투표를 통해 압도적인 지지로 세습황제가 된 그는 그해 12월에 노틀담 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룹니다. 다비드는 이 역사적인 순간을 길이 1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파노라마로 재현하였는데, 그 호화로운 금실의 장식과 생생한 인물들의 초상이 보는이를 압도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림에 포착된 장면이 나폴레옹이 관을 쓰는 장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황제는 교황에게서 관을 받았는데 이는 왕실의 권위는 신에게서 부여받은 것이며(왕권신수설), 교회는 국가위에 존재한다는 것을 천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프랑스 혁명의 정신이 이러한 교회와 군주라는 봉건적인 질서를 거부하는 것이었던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굳이 교황에게서 관을 받는 장면을 묘사하지 않았던 것에는 무엇인가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나폴레옹이 국민의 제정을 다시 펴지만, 혁명의 정신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내보이기 위한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나폴레옹은 자신의 능력으로 황제에 자리에 올랐던 것에 걸맞게 이 놀라운 장면을 주관하는 마스터로 그려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도12 다비드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 1805-07년
캔바스에 유채, 629×979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13 다비드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 부분
 
 
 
 
 

나폴레옹이 권력을 구가하던 시기에 미술가들은 그의 초상이나, 전쟁기록화같은 선전미술에 동원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전장터의 열혈남아로(도14), 자연위에 군림하는 영웅의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하며(도15), 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1780-1867)의 그림에서는 제우스의 도상을 빌어 신의 영역에 입적하고 있습니다(도16). 이 모든 것들이 화가의 신념에 의한 것일까요? 정치적인 선전에 미술이 하녀의 노릇을 한 것일까요. 전체주의 시대의 미술은 항상 이러한 난처한 질문을 우리에게 남깁니다.

도14 그로 <아르콜 전장의 나폴레옹>
1796년, 74.9×58.4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15 다비드 <베르나르 산을 넘는 나폴레옹>
1800-01년, 캔바스에 유채, 뮤제 드 샤토 말메종
 
 
 
도16 앵그르 <옥좌의 나폴레옹>
1806년, 캔바스에 유채
파리, 무제 드 아메
 
 
 
 
 

숭고함과 단순함을 추구하는 신고전주의의 이상은 회화보다는 조각에 더 적합한 미학이었습니다. 카노바(Antonio Canova,1757-1822)는 조각에서의 신고전주의 양식을 대표합니다. 카노바는 18세기 ‘대여행’시대의 골동품 취미에 맞추어 이탈리아에서 작업하였는데, 그의 작품은 고전 조각에 버금가는 순수함으로 높은 인기를 누렸습니다. 카노바는 <테세우스와 미로타오르>(도17)에서 그리스 영웅의 결렬한 싸움의 장면 대신 미노타오르를 제압한 후 휴식을 취하는 모습을 묘사하였습니다. 그는 보통 바로크적인 운동감보다는 정적이며 안정된 구도를 더 즐겨하였는데, 사람에 따라서는 카노바의 신고전주의 양식을 생명력이 결여된 복고양식으로 여기는 것은 무리가 아닙니다. 특히 나폴레옹 제정기에도 그의 그리스풍 조각은 환영받았는데, 도18은 나폴레옹의 누이 보르헤스의 초상조각입니다. 손에 쥔 파리스 사과로 보아 왕가의 여인은 그리스 여신, 비너스로 분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17 카노바 <테세우스와 미로타오르>
1781-83년, 대리석, 73×74×50cm
런던,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
 
도18 카노바 <승리의 비너스로 분장한 파올리나 보르헤스>
1808년, 대리석, 높이 2m
로마, 보르헤스 미술관
 
 
 

우리는 이 시대의 다른 한편에서 우동의 고전주의에서 벗어난 리얼리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앙트완 우동(Jean-Antoine Houdon, 1741-1828)은 계몽주의 철학자나, 혁명기의 정치지도자들의 동상을 전문적으로 제작하였던 초상조각가였습니다. 도19의 볼테르의 주름진 얼굴의 묘사와 섬세한 근육의 표정을 보면 그가 볼테르를 이상화시키기 보다는 현실적인 인간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쇄한 육체는 오히려 그의 정신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역설적인 방식이 아니었을까요? 우동의 명성은 미국에도 전해져서 미국건국의 아버지 워싱턴의 기념동상을 의뢰받았습니다(도20). 우동은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그의 실제 몸 치수를 재고 어깨나 손을 캐스팅하여 작품제작에 참고하였다고 합니다.

도19 앙트완 우동 <볼테르>
1778-80년, 테라코타, 실물크기
프랑스 몽펠리에, 파브르 미술관
 
도20 우동 <조지 워싱턴>
1786-96년, 대리석, 실물크기
리치몬드, 버지니아 주의회사당
 
 
 

다비드 이후 프랑스 미술은 낭만적인 성향으로 기울게 됩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앵그르는 낭만주의에 맞서고자 하였으며, 혁명적인 성향에 반대하여 끝까지 왕정체제를 지지하였던 보수적인 화가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랑 오달리스크>(도21)에서 볼 수 있듯이 인체의 곡선을 추상적으로 왜곡시키는가 하면, 풍부하고 화려한 색상은 색채화가로서의 면모도 분명히 보여줍니다. 다음 주제인 낭만주의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이국적인 취미나, 낭만적인 신화이야기를 즐겨 다루었습니다.

도21 앵그르 <그랑 오달리스크>
1814년, 캔바스에 유채, 89.7×62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앵그르는 다비드와는 달리 역사화에는 큰 재능을 보이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그의 솜씨가 마음껏 발휘된 장르는 초상화입니다. 과거 아카데미 화가들의 역사화는 국가에서 구입하였으며, 국비로 그들을 지원하였습니다. 그러나 혁명의 혼란기를 겪으면서, 국가의 지원은 기대만큼 충분하지 않았으며, 아카데미 화가들은 초상화에 많은 수입을 기대하여야 했습니다. 아마도 앵그르의 초상화도 그러한 사회적인 변화를 반영하는 것일지 모릅니다. 앵그르의 초상화는 사진이 초상의 기록을 떠맡게 되는 시기 이전의 회화적인 리얼리즘의 정점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도22 앵그르 <마담 므와티시에>
1856년, 캔바스에 유채
런던 국립미술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기에 걸쳐 진행되었던 신고전주의는 대륙에서는 다비드, 카노바, 앵그르와 같은 회화나 조각을 통해 꽃을 피웠던 반면, 영국에서 팔라디오니즘이라는 건축양식을 통해 널리 유포되었습니다. 사실 팔라디오는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가로서 그의 빌라 로톤다(도23)는 그리스식 주식과 박공의 현관을 제외하고는 고대 건축물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계몽귀족들에게 도24의 치즈윅 하우스와 같은 팔라디오식 별장은 단순한 양식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치적인 진보적인 개혁성향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영국의 건축양식은 식민지 미국에도 전해져 ‘조지안 양식’으로 불리는 미국의 건축양식을 유포시킵니다. 특히 아마추어 건축가이기도 하였던 토마스 제퍼슨은 버지니아의 자신의 저택을 팔라디오식으로 개조하였을 뿐 아니라(도25), 도27의 드로잉에서 볼 수 있듯이 로마시대를 근거로 한 신고전주의 양식을 워싱턴의 도시계획에도 적용하고자 하였습니다(도26.27). 당시 미국인들 역시 신고전주의를 자유에 근거를 둔 미국의 이상을 표현하는 양식으로 여겼던 것이지요. 국회의사당이나 백악관과 같은 이때 세워진 미국의 공공건물들이 대부분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입니다.

도23 팔라디오, 빌라 로톤다, 비첸자
 
 
 
 
도24 벌링턴 경과 윌리암 켄트 <치즈윅 하우스>
1725년 시작, 런던근교
 
 
도25 토마스 제퍼슨, 몬티첼로, 버지니아
1770-84년 1796-1806년
 
 
도26 손튼 라트로브 벌핀치, <미국 국회의사당>
워싱턴, 1793-1830년
 
 
도27 <워싱턴 전경 상상의 드로잉>, 1852년
 
 
 
 
 
 
신고전주의는 곧이어 낭만주의의 반격에 직면하게 되지만,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서로 상반되는 양식을 지칭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고전주의는 넓게 말한다면, 혁명기의 낭만적인 열정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던 미술양식을 지칭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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