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틈만나면 퇴직을 할까 말까 고민하던 때에 이 책을 구입했다. 당연히 책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보니 그럴만도 했다. 뭐랄까. 이 책은 술술 넘기기에는 너무나 교과서 같은 책이다. 마치 예전에 아카데미 토플이나 이재옥 토플 같은 영어학습서를 공부하는 느낌이 난다. 살강, 뼈물다, 주루막, 따비밭 같은 어휘를 검색하고 옮겨 써보는 행위는 새 영어단어를 공부하는 것 같고, 허투루 쓰인 문장이 하나도 없는 완벽한 글은 영어 문장에서 틀린 부분을 찾을 때 처럼 집중력을 요한다. 에세이 쓰기의 모범이랄까 교과서랄까. 문장이면 문장, 내용이면 내용, 감탄하며 읽게 된다. 두꺼운 토플 책 두 권을 샅샅이 공부하고나서야 영어에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는데 이 책을 꼼꼼하게 읽고나면 문리가 좀 트이려나. 트이겠지. 트일 것이다. 훌륭한 책이니까.


<앞자리>라는 글은 하늘을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보고 써내려간 글이다. 옮겨본다.


  기러기 떼의 앞자리는 영광의 자리일까? 희생의 자리일까? 영광의 자리든지 희생의 자리든지 맨 앞자리에서 나는 새가 한 마리 있어야 무리가 형성된다. 앞으로 불쑥 나선 새의 뒤를 따라서 무리(無理) 없이 재편성되는 기러기 떼의 대형으로 보아서 그 앞자리는 자기를 희생하는 자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러기들이 무리의 맨 앞자리를 영광의 자리로 탐냈다면 다툼으로 대형이 흔들려 대장정은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하고 까마귀 떼처럼 흩어졌을지 모른다.

  늦가을 빈들 위를 나는 까마귀 떼를 보면 혼란스럽다. 거기에는 선두가 없든지, 전부 다 선두든지 하다. 오합지졸인 것이다. 선두가 없는 것은 선두가 살신성인하는 자리로 인식되어 기피하기 때문일 것이고, 전부 다 선두인 것은 선두가 영광의 자리라서 서로 탐을 내기 때문일 것이다. 그 정도 의식 수준의 무리라면 통제나 질서 유지가 안 된다.

  기러기들은 맨 앞자리의 필요성을 잘 안다. 그래서 존중한다. (중략) 기러기 떼의 앞자리. 기러기들은 그 자리에서 나는 기러기를 고마워할지언정 선망하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 날지 못하는 자신의 힘 모자람이 부끄럽다기보다 미안할 뿐이다. 그 자리는 유세(有勢)하는 자리가 아니고 살신성인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중략) 

  기러기 떼는 높이 난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는 말은 비단 시계(視界)에 국한된 말은 아니리라. 안데스산맥 높이 나는 독수리는 눈으로 사냥감을 보는 정도지만 추운 밤하늘을 높이 날아가는 기러기 떼는 가슴으로 구만리 장천 너머에 있는 도래지를 본다. 그것은 관점(觀點)을 말하는 것이다. (중략) 

  앞자리로 나서려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것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 없다. 누가 맨 앞자리에 서든지 나는 어차피 끝에서 앞 사람의 날갯짓이 일으킨 상승기류를 얻어 타고 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맨 앞에서 항로를 잡아 주려는 제일인자에 대한 믿음이 서지 않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p.89~91


'불행'한 나날을 보내는 요즘. 구만리 장천 너머에 있는 도래지를 볼 수 있는 관점을 장착하지 못한 권력자를 허구헌날 보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다. 살신성인하는 자리에서 골목대장 노릇하는 꼴을 보는 건 참으로 민망하고 역겨운 일이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시우행 2023-08-31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살신성인하질 못한다고 생각해요. 내 눈엔 그 사람이 보여요,ㅠㅠ

nama 2023-08-31 15:35   좋아요 0 | URL
저는 욕심보다는 권력욕이 보여요. 권력에 취해 있으니 보고 싶은 것만 보겠지요.

잉크냄새 2023-08-31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심이 가 찾아보니 저자 목성균님의 짧은 작품 활동이 안타깝네요.

nama 2023-08-31 15:37   좋아요 0 | URL
저 책 한 권만으로도 존재감이 드러나고, 짧지만 강한 족적을 남겼다고 생각해요.

라로 2023-09-04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전자책 신청을 했는데... 늘 좋은 책을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잘 지내시는지요? 건강은 많이 좋아지셨나요?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나마님.

nama 2023-09-04 15:08   좋아요 0 | URL
그렇잖아도 라로님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공부하느라 몹시 바쁘시구나, 했지요.
좋은 글이 많이 실린 책인데 진도는 빨리 나가지 않아요. 늦은 저녁, 마음에 와닿는 글을 읽다보면 술이 당기기도 해요.
공부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 라로님.
 
느네 아버지 방에서 운다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백가흠 지음 / 교유서가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서관에서 우연히 눈에 들어온 책. 아무런 사전 정보없이 읽으니 마치 스스로 발굴한 느낌이 들었다. 백가흠...그의 글을 읽은 적이 있던가. 


책 제목에 나와있는 것처럼 '느네 아버지'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어서 옮겨본다. '어렸을 적 가장 좋은 친구'로 아버지를 두었다는 부분에선 부러움과 한숨, 그리움이 밀려왔다. 아버지....



아버지는 쓰고 싶었으나 쓰지 못했다. 아버지의 문학적 비애가 조금 위안받은 순간은 내가 신춘문예로 등단했던 바로 그때였을 것이다. 내가 소설 쓸 줄 몰랐으니까, 등단할 줄 몰랐으니 조금 기뻤을까. 아버지는 실제로 내게 기쁨을 직접 표현한 적은 없었다. 마찬가지로 소설을 쓰면서 정말 기뻤던 적은 당선 통보를 받았던 날밖에는 없는 것 같다. 그날, 오후에 통화하던 일이 생각이 난다. 학교로 전화를 걸어 소식을 알렸는데, 금방 다시 전화를 하니 이미 학교에 없었다. 집에 전화를 걸었더니 엄마가 전화를 받았다.
"야, 느네 아버지, 학교 조퇴하고 와서, 방에서 운다." - P44

어렸을 적 잊지 못할 소꿉친구 하나는 있기 마련이건만, 우리 삼형제는 그런 친구 기억이 없다. 어렸을 적 가장 좋은 친구는 아버지였다. 세상에서 아버지가 가장 재미있었다. 우리 형제는 아버지하고 놀았다. 아버지가 엉덩이를 흔들며 춤을 추는 게 가장 웃겼고, 읽어주는 동화책이 가장 흥미진진했다. 나란히 턱을 괴고 엎드려 흑백 TV와 주말 영화를 보던 일이 가장 신나는 일이었다. - P46

옛날, 푸세식 화장실이 마당에 있을 때, 아버지는 볼일 보러 가서, 웬만해선 나오지 않았다. <옛날의 금잔디>나 <옛동산에 올라>같은 가곡에서 헨델이나 바흐, 독일 가곡, 찬송가까지 화장실에서 흘러나왔다. 우리 형제는 화장실 앞에 쭈그려 앉아 아버지의 노래를 들으며, 신청곡을 부탁하곤 했다. 얼기설기 베니어합판으로 만든 화장실 문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아버지의 노래를 들었다. 우리 형제가 클래식광이 된 연유다. 아버지가 화장실에 볼일 보러 간 것인지, 노래를 부르러 간 것인지 궁금하기도 하던 시절이 있었다. - P47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진 2023-08-31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렸을 적 가장 좋은 친구는 엄마였지요

nama 2023-09-01 09:32   좋아요 0 | URL
고마운 말씀이지요.
 
난처한 미술 이야기 : 내셔널 갤러리 특별판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양정무 지음 / 사회평론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도 읽었는데, 10월 9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 갈 수 있으려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말의 발견
박영수 지음 / 사람in / 202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꽃다짐'은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이기 위해 다져 놓은 봉숭아 꽃잎을 이르는 말이다. 예전에는 여름이 되면 손톱 가장자리에 밀가루 반죽을 붙이고, 손톱 위에 꽃다짐을 올려서 봉숭아물을 들이곤 했다. 봉숭아물을 진하게 들이고 싶을 때는 꽃보다 잎을 더 많이 넣어서 꽃다짐을 만들었다.'



꽃다짐이라는 단어도, 

밀가루 반죽을 붙이는 것도, 

잎을 넣어야 진하게 물들일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Great Women Artists (Hardcover)
Phaidon Editors / Phaidon Inc Ltd / 201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수자 Kimsooja 를 알게 된 것으로 흡족.
작품 <떠도는 도시들-보따리 트럭 2727킬로미터> 가 실렸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