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삿짐을 대강 정리한 후 빨래를 하려고 보니 세탁기가 작동을 거부한다. AS를 신청하니 일주일 후에야 가능하단다. 손빨래를 하고 싶어도, 발코니 확장형 아파트이다보니 젖은 빨래를 널어 말릴 곳이 없다, 새로 이사온 동네에서 빨래방을 찾자니 여행지에서 길거리 헤매는 기분이 나는데, 흠, 나쁘지 않다. (이건 또 뭔지...)


일주일을 꽉 채운 후 기사가 왔는데 끌끌 혀를 차신다. 세제통의 액체세제를 비우지 않고 이동해서 고장이 났단다. 121,000원을 주고 세제통을 새것으로 교체했다. 약 한 달 후 이번엔 세탁기의 두뇌에 해당하는 액정부분이 뇌사상태에 빠졌다. 역시 세제통의 액체가 뇌회로에 스며들었다며 뇌적출과 이식 수술에 들어갔다. 177,000원이 들어갔다. 지난번과 같은 기사님이었는데 나의 깊은 시름이 안돼 보였는지 출장비는 받지 않겠노라고 하신다. 고마우면서도 속이 쓰렸다.


세탁기 문제에서 한숨 돌리는가 싶었더니 이번엔 세탁기가 요동을 친다. 비행기 이착륙 소리까지는 참을 수 있는데 문제는 탈수가 끝나면 세탁기가 삐져서 전면이 한쪽으로 돌아가 있다는 것. 세탁할 때마다 삐져 돌아가니 내 마음도 삐지기 직전. 나보다 힘 센 남편만 바쁘다. 세탁기 돌려세우랴 내 눈치 살피랴.


며칠 후 새로 구입한 tv를 설치하러 온 기사분께 부탁해서 세탁기 수평을 맞췄다. 아, 이제야 한시름 놓겠구나 싶었는데... 기사분이 한말씀 하신다. 탈수할 때 소리가 나는 건 탈수부분이 고장났기 때문인데, 수리를 하거나 새것을 구입해야 한단다. 지금까지 내 생애에서 내가 구입한 세탁기가 네 대인데 그동안 얻은 교훈이 있다면, 세탁기는 고쳐서 쓰는 물건이 아니라는 것. 역시 이 지론이 맞는구나 싶었다. 고장이 났으면 눈 딱 감고 새것을 구입하는 게 속이 편하다.


며칠 동안 세탁기 검색으로 휴대폰에 코를 박고 있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남편, 낡은 수건 한 장을 가져오란다. 세탁기 한쪽을 들어올릴 테니 바닥에 수건을 받치라고 한다. 그러고서 조심스레 빨래를 돌렸다. 비행기 이착륙 소리도 많이 줄어들고, 요동치던 몸체도 조신해지고, 탈수과정도 얌전해졌다. 하, 내 남편은 천재인가보다. 


그런데 며칠 후. 역시 세탁기가 탈수 후에는 몸부림으로 조금씩 제자리를 이탈한다. 그럴 때마다 남편이 다시 제자리로 돌려세우는데...이 세탁기를 5년만 더 사용하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세탁기로 피곤해진 저녁. 시원하고 달콤한 과즙이 줄줄 흐르는 인천의 남동배가 그리워졌다. 2만 원이면 B급쯤 되는 배를 한아름 사서 한동안 저녁마다 베어 먹었는데, 그렇게 평생 배를 먹을 줄 알았는데 상황이 바뀌었다. 새로 이사온 동네엔 배밭이 없다. 작년만해도 쌀독에 있는 쌀처럼 떨어지면 큰 일 날것처럼 항상 쟁여놓던 사과마저 먹기 힘든 과일이 되었다. 비싸도 너무나 비싸다. 볼품 없는 사과를 비싸게 사먹으려니 차라리 눈에 담는 것도 피하게 된다.


그렇게해서 배 대신 무를 깎아먹는 저녁이 되었다. 아직은 저렴하기 이를 데 없는 무. 한조각 베어물면서 배맛을 상상하는 맛이라니. 게다가 위장병으로 시름시름 아프던 배도 무를 먹고나면 뱃속이 무탈의 평온을 되찾는다. 담석으로 고생할 때는 배를 먹고 위장이 심하게 요동치기도 했었는데 그 일도 이제는 지난 일이 되었다. 무는 無와도 통하는구나.


이름도 당찬 대파 얘기도 해야겠다. 대파는 내게 낭비의 대명사였다. 도대체 대파 한단을 끝까지 먹은 적이 없었다. 반찬에 한주먹씩 대파를 썰어 넣어도 남아도는 게 대파여서 마지막에는 종량제봉투로 직행하곤 했다. 그랬었는데 이제는 먹을만큼만 냉장고에 넣고 못다먹고 버릴 분량은 썰어서 냉동고에 얼렸더니 버리는 게 없더라는 말이다. 이런 단순한 사실을 이제야 깨닫고 대단한 일을 해낸 양 의기양양해진다. 그간 살림살이를 대충했다는 말이다. 대파를 제대로 보기 시작했다.



요즘 영화를 자주 보면서 깨닫는 것. 잘된 작품과 그저 그런 작품을 구분짓는 건 감독이 영화를 장악하고 있느냐 영화에 끌려가느냐의 차이라는 것. 교사의 수업에서 수업장악이 수업의 질을 좌우하듯 영화 역시 그렇고 조직을 이끌어가는 원리 또한 그럴 것이다. 교단에 서면 학생 하나하나의 얼굴을 살펴야 하듯 어떤 조직을 이끄는 자는 구성원 하나하나를 보려고 부단히 애써야 한다. 그건 군림이 아니다. 무는 무답게 대파는 대파답게 대접하면서 제 역할을 다할 수 있게 하는 것. 부실한 세탁기를 끝까지 고쳐가며 사용하는 것. 진즉에 깨우쳤으면 나는 훌륭한 선생이 되었을 텐데....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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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로 뛰는 작가 유재현의 책을 내리 읽고 있다. <메콩의 슬픈 그림자 인도차이나>를 구매한 지 20년이 되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해본다. 기행문은 보통 재독하면 김이 빠지는데 유재현의 기행문은 읽을수록 내용이 명료하게 다가온다. 비로소 눈을 뜬 느낌이랄까. 서가에 꽂아두고 오랫동안 읽어야겠다.


최근에 읽은 책.















사놓고 한동안 눈에 안 들어와 방치하였는데 동유럽을 두번이나 다녀오고서야, 그리고 코카서스 여행을 앞두고서야 읽기 시작했다. 다소 딱딱하지만 진중하다고 할까, 진실하다고 할까. 무게감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이젠 기억도 가물거리는 홍은택의 <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를 내내 떠올리게 했다. 두 책 모두 미국이라는 나라를 통째로 여행하며 미국의 실상을 파헤쳤다. 미국을 좋아할 수 없는 이유가 너무나 넘쳤다. 그럴수록 미국을 공부해야겠다.

















이 책 역시 발간 연도 따위를 따질 필요가 없다. 어제 쓴 오늘의 이야기이다.



세상에 뭔가 보탬이 되어야 하는데...하면서 읽게 되는 책. 유재현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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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분리수거장 앞에 엔틱 의자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앉아보니...세상에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쿠션만 새것으로 갈아주면 환골탈태하여 여생을 함께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의자를 버린 분이 누군지는 몰라도 고맙기 이를 데 없었다. 얼마 후 인터넷으로 찾아서 쇼파 천갈이 하는 곳에 갔더니 구하기 힘든 의자라나 뭐라나. 좌석과 등판을 가죽으로 교체하는데 시간이 걸린단다. 며칠 후 설레는 마음으로 갔다. 수선비 20만 원을 흔쾌히 지불하고 의자를 모셔왔다. 그런데...구관이 명관이라 해야 할까. 법고창신을 기대한 게 무리였다는 것을 앉아보고서야 깨달았다. 좌석 쿠션을 제거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대로 새 가죽으로 덧댓으니 좌석이 두꺼워져서 본래의 착착 붙는 듯한 물아일체 같은 착석감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다. 아, 20만 원이면 새 의자를 사고도 남는다는 것을.


밥상에서 밥을 먹던 좌식생활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되었을 무렵 이사를 했다. 식탁이 필요했다. 딸이 사용하던 책상의 상판에 다리를 붙여 식탁으로 만들었다. 훌륭했다. 의자가 필요했는데 이번에는 제대로 된 걸 사고 싶어서 이케아로 향했다. 착석감이 우선, 최선에 가까운 의자를 골랐지만 재고가 없었다. 일단 철수.


일삼아 당근에 들어가 샅샅이 뒤졌더니 엔틱을 표방한 짝퉁 의자가 두 개 나왔다. 제대로 된 물건을 사야한다는 다짐은 슬그머니 사라져버렸다. 그럭저럭 쓸 만했다. 식탁은 해결했으나 이번엔 컴퓨터 의자가 남았다. 그동안 사용했던 의자들은 낡기도 했지만 새로 이사한 집에 도저히 어울리지 않았다. 멀쩡한 가구를 버리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번엔 내가 이해 받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낯선 경험이다.


열심히 당근을 들락거린 보람이 있었는지 이번엔 제대로 된 엔틱 의자가 떴다. '가격 제안 불가'에도 불구하고 20% 할인을 제안했더니 응답이 왔다. 엉? 좀 더 기다릴 걸 그랬나. 순간 망설였으나 내 입으로 제안했고 어쨌거나 사진상으로는 탐나는 물건이었다. 우아하고 고전적인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명품으로 보였다. 설렌 마음으로 집에 모셔와서 앉아보는데...빛 좋은 개살구는 분명 아닌데 착석감이 떨어진다. 게다가 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다. 이 편하지 않음은 무엇인고? 남편이 의자의 네 발 길이를 내 앉은 키에 맞게 만들어 주었다. 1~2cm 를 잘라냈다. 비로소 발이 바닥에 착지하는데 이번엔 쿠션이 없는 좌석과 등판이 배긴다. 겉모습에 홀린 대가려니...


침대는 과학이라더니 의자야 말로 과학이구나, 새삼 깨달았다. 몸에 맞는 의자 찾기가 배우자 찾기 만큼이나 어렵다. 사람이 진화하지 않듯(혹은 느리게 진화?) 의자 역시 진화하는지, 진화가 가능한지 묻고 싶은 심정이다. 물론 한가지 의문은 남는다. 진짜 값비싼 물건은 어떨까?


답답한 마음에 찾아 본 책.















'350가지 의자의 역사와 디자인'을 실었다고 한다. 가히 의자의 역사서로 손색이 없는데 찾는 사람이 없는지 '특별 할인가'로 판매중이다. 이만하면 당근 가격이다.


책에서...

 

현존하는 의자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의자는?

지금으로부터 약 4600년 전에 만들어진 헤테프헤레스의 의자라고 한다. 현대의 의자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이걸보면 의자의 진화에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옛날 사람이나 현대 인간이나 다를 바 없듯 의자 또한 그런 것 같다. 설명을 읽어보면, ' 현재 카이로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의자는 오늘날에 사용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사각형 좌석에 등받이가 있고, 팔걸이의 틀도 사각형이다.전체적으로 직선 라인이 눈에 띄는데, 팔걸이 안쪽은 파피루스 줄기를 끈으로 만들어 묶은 듯한 부드러운 느낌으로 디자인되어 있다."(p. 11~12)


미국의 20세기를 대표하는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얘기도 나온다. 건축 작품마다 의자를 디자인했다고 하는데 디자인을 우선했기 때문에 실용성 면에서 문제가 남을 만한 것도 있다고. '사생활 면에서는 아내 캐서린과의 사이에 여섯 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고객의 아내인 체니 부인과의 불륜, 유럽으로 사랑의 도피 행각, 그에 따른 업무의 격감, 하인이 체니 부인과 아이를 살해, 평생 4번의 결혼을 하는 등 상당히 파란만장한 인생을 보냈다.'(p.155) 



의자가 아니었으면, 당근 거래가 아니었으면 만나기 힘들었을 의자에 관한 책이다. 쓸모는 없지만 소장할 만한 책이다. 세상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는 걸 깨우치게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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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을 보고 걸어야겠지만 때로는 뒤로 걸어볼 만하다.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2>를 먼저 읽고, <익명의 ~1>를 나중에 읽었다. 뭔가 매끄럽지 않아서 자꾸 뒤돌아보았지만 되려 낯설어서 좋았다.


 













 


그러다가 원조를 접했다.


















' 이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의 절대 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다. 그들은 평생 동안 살아 있는 자연만을 마주하고 살아간다.'

'

'사자가 위장에 탈이 나면 풀을 먹듯이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


이 말들이 저 작은 책에 실려있는 글이라니.... 작지만 야무진 책을 보니, 작지만 야무진 사람이 되어야겠다....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되는....


하여튼.


p.10

야훼는 잔인하고 가차 없다. 자식을 죽여서 자신에게 바칠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중략) 야훼는 히브리 민족을 자신의 백성으로 선택하고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한다.(~~) 그들은 사막과 같은 황량한 땅에서 덧없는 삶을 살아간다. 그리하여 '젖과 꿀'이라는 알량해 보이는 약속 하나에 모든 것을 내버리고 야훼만을 숭배할 것을 다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야훼는 이것을 거저 주지 않는다. 그것을 주겠다고 해놓고는 그 땅을 차지하고 있던 성읍의 주민을 칼로 쳐죽일 것을 명령하는 것이다. 이는 자기를 따르기만 한다면 외부 집단을 폭력적으로 살상해도 괜찮다는 정당화를 제공함과 동시에, 자비롭게 보이는 약속 뒤에 숨어 있는 피에 굶주린 야훼의 잔인함을 어김없이 드러낸다.


----------------


오랫만에 들어오니 약간 정신이 없다. 쪼금 부지런하게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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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4-01-01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ama님 오늘부터 2024년입니다.
올해도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한 시간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새해복많이받으세요.^^

nama 2024-01-02 16:2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도 좋은 기운으로 한 해를 시작하시길 소망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사진 설명: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의 어느 구도심 골목. 촛불을 켜는 여인 너머로는 작은 벤치가 몇 개 있는데 기도하는 사람도 몇 명 있다. 간절한 마음이 얼굴에 담겨 있어 차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무심한 듯 지나치게 된다.



'기도하는 마음'과 '기도'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기도'면 '기도'지 '기도하는 마음'은 뭘까? 기도를 했으나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래도 간절한 마음에 무언가에 기대고 싶을 때 끝까지 버리지 못하는 것이 '기도하는 마음'일 것이다. 어쩌면 기도보다도 더 애절한 목마름이 아닐까.


내 뜻대로 되는 게 없는 게 세상살이인 줄은 알지만 그래도 기도하는 마음 하나만은 꼭 붙잡고 있어야겠다. 혹시 모르니까. 세상은 알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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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1 1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1-02 16:3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