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놔... 몇 년 전에 이 책을 읽고 별 넷을 줬는데, 오늘 북플 들어갔다가 내가 별 하나 줬다고 표시된 걸 봤다. 북플 보다가 졸았나?? 손이 삐꾸러졌나?? 폰이 굉장히 민감한가? 


이 책 역시 위고의 책답게 건축이나 사건에 대한 서술이 길다. 한 자 한 자가 다 돈이어서 그랬다지만 어찌보면 장황하고 어찌보면 그 시대를 잘 알 수 있게 해주니 싫다고도 좋다고도 하기 어렵다.


자신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선하다고 믿는 프롤로의 믿음은 어디서 왔을까? 콰지모도를 거두었지만 나쁜 일을 저지르는데 그를 이용했다. 신부이면서, 집시인 에스메랄다를 탐냈다. 하지만 에스메랄다의 마음은 태양을 뜻하는 페뷔스에게 가 있었고, 페뷔스는 자유로운 에스메랄다와 돈 많은 플뢰르 드 리스 사이에서 갈등하다 에스메랄다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데 일조한다. 아름다운 외모만큼이나 마음씨도 고운 에스메랄다는 결국 그 시대 권력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여자들처럼 이용당하고 누명을 쓰고 만다. 가지지 못하자 망가뜨리겠다는 심보와 자신의 죄를 엉뚱한 데 전가하는 이상한 심리 상태를 보여주는 프롤로는 자신이 죄를 지었음을 알면서도 자기합리화를 계속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에스메랄다는 사랑에 모든 것을 걸었으나 배신 당했다. 


<파리의 노트르담>은 프롤로와 에스메랄다의 이야기이다. 누가 누가 더 나쁜가, 위선이 나쁜가, 우유부단이 나쁜가, 회피가 나쁜가. 계급이 나쁜가? 당시에 여자도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면 훨씬 나았을까. 에스메랄다에게 자유와 가족은 동시에 가질 수 없는 것이었을까. 힘이 있는 사람의 선택은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휘두르지만, 그 안에서도 순수하고 자유로운 영혼은 굴복하지 않는다. 어쩌면 위고는 에스메랄다에게서 그런 점을 발견한 건지도 모르겠다.


 에스메랄다가 집시에게 납치 당해서 자라났다면, 여기 킨셀라 부부에게 맡겨진 소녀는 집안 사정상 생물학적 부모와 잠시 떨어져 있게 된다. 에스메랄다의 엄마가 죽을 때까지 잃어버린 아이를 찾았다면, 맡겨진 소녀의 주인공 소녀는 몇 달 안에 생물학적 부모에게로 돌아간다. 


어째서 에스메랄다를 떠올렸을 때, 이 소녀가 떠올랐을까. 에스메랄다가 킨셀라 부부처럼 말은 없어도 다정하고 섬세한 사람들을 만났다면 운명이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소녀가 환경이 바뀌어 매트에 실수를 해도 방 안에 습기가 찼기 때문에 매트를 빨아야 한다고 말하며 미안해하는 에드나와 우편함까지 뛰어가서 편지를 가져오게 하면서 시간을 재면서 빨라졌다고 칭찬을 하는 존은 멋진 부모처럼 보였다. 하지만 삶은 그들에게서 자식을 빼앗아갔다. 불의의 사고는 피해자의 탓이 아니다. 가끔 누구의 탓도 할 수 없는 상황이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자식을 앞세운 부모가 자신의 탓을 하지 않는 건 어려울테지. 하지만 그런 아픔이 있어도 킨셀라 부부는 소녀를 진심으로 대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받아보지 못한 관심을 받고, 예절을 배우고,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진심을 느끼면서 소녀는 성장했다. 부모를 선택할 수는 없지만, 마지막에 부르는 '아빠'는 누구를 부르는 말이었을까. 잘 키우지도 못하면서 소녀가 기침을 하자 존을 탓하는 소녀의 생물학적 아빠인 댄은 정말 얄미워 보였다. 루바브도 못 줍는데다 괜히 소녀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면에서까지 완벽하게.


어쩌면 여기 등장하는 록산느가 자신의 삶을 좀 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았던 여자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시라노와 크리스티앙 두 사람이 짜고 친 고스톱 때문에 일생을 외롭게 살긴 했으나, 그 상황에서 최대한 자신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려고 했으니.


어찌보면 에스메랄다처럼 록산느 역시 외모만 보고 크리스티앙에게 반했지만 결말은 달랐다. 적어도 크리스티앙은 페뷔스처럼 쓰레기는 아니었으니. 하지만 크리스티앙 자신이 아닌 시라노의 마음이 크리스티앙의 글인양 록산느에게 전해졌으니, 록산느가 진짜 사랑한 사람은 누구일까. 편지를 통해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일생을 그리워 한 사람이 사실은 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록산느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아니면 시간이 지날수록, 함께 편지를 나눈 시간을 곱씹을수록 크리스티앙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을까...


이 이야기 역시 참 재미있게 읽었는데, 새삼 생각났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할 때 외모가 먼저 눈에 들어올 수는 있으나, 결국 사랑을 완성하는 것은 그 사람의 성격, 교육 수준, 공감 능력이다. 성격에 공감 능력이 들어간다면 성격과 교육 수준이 중요할 것이다. 크리스티앙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자신의 언어로 록산느에게 다가갔어야 했는데... 사랑에 빠진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없고 사랑하는 이에게 눈높이를 맞추고 싶은 법이지만 말이다. 자신의 언어로 말하다 보면, 어쩌면 결국 록산느의 눈높이까지 갈지도 모르는데. 록산느의 진심이 가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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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3-12-24 00: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꼬마요정님께서 ‘파리의 노트르담‘에
별 1개 주셔서 손절할 뻔 했어요 ㅋㅋ
핸드폰 스크롤 하다보면 한 번씩 저도 그럴때가 있더라고요.
읽지도 않은 책을 읽었다고도 하고요.
시라노는 뮤지컬로 봤는데
넘 좋았어요.
시라노의 묵직한 사랑도 좋고
나중에 깨닫지만 록산느가 시라노를 사랑하는 것도 좋고요.
꼬마요정님!
냥이들과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꼬마요정 2023-12-24 00:14   좋아요 2 | URL
큰일날 뻔 했네요!! 저 손절 당할 뻔 ㅋㅋㅋㅋ
근데 정말 당황했어요. 아무리 그래도 별 1개는 진짜...
시라노 뮤지컬 보셨군요. 저도 참 재미있게 봤어요. 노래도 좋고 연출도 괜찮았죠. 류정한 배우님이 엄청 고생하셨겠더라구요. ㅎㅎㅎ

페넬로페 님, 즐거운 크리스마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Falstaff 2023-12-24 14: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라노, 매력적인 작품인데 그리 인기를 얻지 못한 거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오페라도 있거든요. 시라노가 노래도 잘 합니다. 록산느의 창문 아래 계단에 숨어서 세레나데를 노래하고 크리스티앙은 립싱크만 하는 장면... 애절합지요. ㅎㅎㅎ

꼬마요정 2023-12-24 18:44   좋아요 1 | URL
맞아요. 시라노 재밌는데 생각보다 인기가 없어요. 시라노처럼 살기도 진짜 어려울텐데... 오페라는 못 봤어요. 하지만 재미있을 것 같아요. ㅋㅋㅋ 크리스티앙 입만 벙긋벙긋, 시라노는 감정을 다해 부를텐데, 갑자기 가슴이 막 아려오네요. 크으... 시라노가 고백했다면 록산느랑 어떻게 됐을까요? 크리스티앙이 그렇게 죽지만 않았어도 어쩌면 <전쟁과 평화>에서 피에르랑 나타샤처럼 됐을지도 모르죠... (안드레이 좋았는데 죽어버리다니...)

희선 2023-12-25 0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는 부모를 고르지 못하다니... 그래서 예전에 아이가 부모를 고르는 시설 같은 게 나오는 이야기가 있었군요 책이 아닌 드라마를 봤지만... 시간이 지나서 잊어버렸네요 한국 소설에도 있기는 했는데, 청소년 소설이었던가 부모가 아닌 사람이 더 부모 같을 때도 있네요

자기 마음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자기 말로 전해야죠 이야기에서는 그러지 않을 때가 많죠


희선

꼬마요정 2023-12-25 14:09   좋아요 1 | URL
아이가 부모를 고르는 드라마가 있었군요, 궁금하네요. 어떤 이야기일지... 맞아요, 때론 부모보다 더 부모다운 사람들이 있죠. 아이가 그런 사람이라도 만난다면 다행인데... 가슴이 아프네요.

자기 마음은 자기가 전하는 게 맞다는 걸 알지만 두려운가 봐요. 그래서 이야기가 막 이어지게되나 봅니다. <시라노> 재밌는데 안타까워요.
 
귀신님의 완벽한 복수 네오픽션 ON시리즈 17
강엄고아 지음 / 네오픽션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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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범이라서, 반성문을 써서, 공탁금을 걸어서, 앞으로의 삶이 창창하여 등등의 이유로 수많은 범죄자들이 집행유예를 선고 받거나 지은 죄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은 형량을 선고 받기도 한다. 성범죄나 마약, 음주운전 등 아주 죄질이 나쁜 경우에 특히나 더 그런 면이 잘 보인다. 어쩌면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낌새가 보여서일지도 모르겠다.


이 이야기는 한 편으로는 속이 후련할 수도, 한 편으로는 씁쓸할 수도 있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인간이 살면서 언제 정의로운 사회가 있긴 했나 싶긴 하면서도 사적 복수가 문제 해결 방법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명당'이라는 당집을 차리고 억울하게 죽은 귀신의 복수를 돕는 채명. 그녀는 고등학생 때 끔찍한 범죄의 피해자가 되었다. 명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상태에서 조선시대 귀신인 막순을 만나 억울하게 죽은 귀신들의 복수를 하기 위해 다시 살기로 마음먹었더랬다. 그러면서 만난 귀신들은 각기 억울하고 안타까운 사연들을 가득 안고 있었고, 빙의의 형태로 복수를 실행했다.


하지만 죽은 자는 죽었다고 깨닫거나 모든 것을 자명하게 알게 되지는 않았다. 자신의 생각대로 범인을 판단하기도 했고, 엉뚱한 대상에게 화풀이를 하기도 했다. 결국 사적 복수는 또다른 희생자를 낳고 또다른 원한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완벽한 복수란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아닐 것이다.


명의 오빠인 민은 카이스트를 졸업하고 유학을 가려 했으나 동생인 명을 위해 경찰이 되었다. 그런 다정한 오빠인 민과 명이 도와 준 복수가 이루어진 곳의 관할 형사들인 경욱과 규영, 명의 당집이 있는 사주, 점술 거리의 많은 무속인들이 하나가 되어 이런 사건들을 해결할 수 있을까. 


사적 복수가 아닌 공적 처벌 및 교화가 제대로 이루어지는 사회가 온다면, 피해자 스스로의 손에 피를 묻히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이 없는 평화로운 사회가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사회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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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12-22 0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법이 있다 해도 그걸 반대로 이용하는 사람도 있군요 죄를 지은 사람이 제대로 벌을 받는다면 피해자가 좀 나을 텐데... 복수한다 해도 돌아오는 건 별로 없기도 하죠 복수가 다른 원한을 낳고, 그런 거 알아도 그만두지 못할지도 모르겠네요 그건 소설에서 봤지만... 실제로도 그런 사람 있을지...


희선

꼬마요정 2023-12-23 10:25   좋아요 1 | URL
그쵸 복수한다고 원한이 풀리는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그만 못 두는 사람이 소설에만 있으면 좋겠네요. 날이 너무 추워요. 감기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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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달하고 쫀득하면서도 부드러워서 술술 넘어간다. 생각보다 빨리 다 먹어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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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보다 Vol. 2 벽 SF 보다 2
듀나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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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보다 시리즈가 또 나왔다. 처음이 '얼음'에 대한 것이었다면 이번엔 '벽'에 대해 이야기 한다. '벽'이라... 얼음이 물이 되고 수증기가 되는 것처럼 벽 역시 안과 밖을 나누고 때론 문이 되기도 하면서 변한다. 여섯 가지 이야기 모두 물리적인 '벽'과 심리적인 '벽', 그리고 '변화'를 그려내고 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듀나 작가의 <아레나>이다. 어느 순간부터 기후위기나 팬데믹 등으로 세상이 급격하게 변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아졌다. 심지어 이 이야기에서처럼 지하에서 '젤리층'이 발견되어 접촉한 사람들이 피를 토하며 죽는다는데도 그럴 수 있겠구나 여겨지는 것처럼 말이다. 대구에서 사람을 죽이는 젤리층이 발견된 이후 남한은 폐쇄되었다. 그리고 그 젤리층의 영향으로 초능력자들이 태어났고, 1세대 '슈퍼히어로' 그룹인 블루스펙터스와 그 팀 해체 후 생겨난 '아퀼라' 등 여러 슈퍼히어로 집단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남한의 '회사'들은 독점적으로 그들을 연구했고, 미국의 다국적 제약회사인 클릭스와 악당인 엑스스쿼드는 '회사'가 가진 연구 자료들을 강탈하기 위해 폭력마저 마다하지 않았다. 물리적으로 거대한 벽에 둘러싸인 남한의 상황과 블루스펙터스의 멤버였으나 부끄러운 과거의 기억 때문에 세상에 벽을 둘러친 찬우. 그들의 미래는 과연 어떻게 될까? 


두 번째 이야기는 아밀 작가의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이다. 이 이야기는 얼핏 보면 SF 소설 같지 않을수도 있지만, 읽다 보면 너무나 SF 소설답다고나 할까. 나윤처럼 많은 사람들이 '신체 조건'이나 '타고난 재능' 앞에서 좌절하기도 한다. 피아노를 치는 나윤은 어린 시절에는 피아노 신동 소리를 들었으나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만난 학생들이 모두 피아노 신동들이라 자신이 평범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거기다 성장이 멈춰버린 작은 손 때문에 좌절하고, 같은 반 학생인 제프리의 악담에 더더욱 절망한다. 그러던 중 중요한 콩쿨에서 좋지 못한 성적을 내고 방황하던 차, 우연히 마녀를 만나고 4차원을 경험하게 된다. 손만 4차원이 된다는 건 어떤 것일까. 엄지가 새끼 손가락이 되고, 검지가 약지로 가고 그렇게 빠른 속도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릴 수 있다면 손가락이 짧아 치지 못했던 악보까지 모두 가능할 터였다. 나윤은 마녀가 내건 조건을 받아들였다. 3차원에서 가지는 가능성을 대가로 나윤은 4차원의 손을 얻었다. 


어쩌면 평범한 것이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울지도 모른다. 하찮다거나 아무렇지 않다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얻기 힘든 것들인지도. 사실 '넘을 수 없는 벽'은 신체 조건도 재능도 아닌 자신이 결정해버린 자신의 가능성은 아니었을까.


세 번째 이야기는 이산화 작가의 <깡총>이다. 펄 벅의 소설 <대지>에 논과 밭을 뒤덮은 메뚜기 떼가 나온다. 왕룽과 오란은 메뚜기 떼의 습격에 울었고, 비적 떼들 때문에 울었다. 여기서는 그런 메뚜기 떼가 아니라 토끼 무리가 인간의 터전을 위협한다. 실제로 호주에서 일어났던 사건이기도 한데, 토끼들이 농장을 망쳤고, 호주 정부가 만든 토끼 장벽은 실패했다. 이 이야기 속에서 토끼는 공간을 넘다 못해 시간마저 뛰어넘어 버린다. 과학자인 웬디를 위해 사냥꾼인 라일리는 토끼의 습성을 계속 관찰하고 기억하고 그 내용을 웬디에게 알려준다. 하지만 토끼의 공간 도약을 막기 위해 만들었던 벽은 반전되어 인간을 가두는 벽이 되었고, 시간을 뛰어넘은 토끼는 인간을 농락한다. 이제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인간 지성이 쌓아온 것들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님을 새삼 알게 되었다.


네 번째 이야기는 이서영 작가의 <월담하려다 접천>이다. 제목부터 굉장히 옛스러우면서도 정이 갔다. 월담 하려다가 접천하려면 얼마나 커다란 비약을 해야 할까. 이 이야기는 기후위기로 몰락한 미래의 서울이 배경이다. 애트우드의 소설 <시녀 이야기>도 떠오르고 영화 <인터스텔라>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생각나기도 했다. '방패님'이란 독재자에게 점령당한 서울은 거대한 방패로 둘러쌓여 있고, 서울 사람들은 방패님이 바깥 세계의 오염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준다고 믿었다. 하지만 연경의 친구인 현정이 어느 교수의 성범죄를 알게 되고 대자보의 형식으로 사회에 알렸으나 도리어 현정이 잡혀가서 고문을 당한다. 독재 체제 유지가 최우선인 세상에서 독재자가 체제를 유지하고 시민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을 침범당했을 때, 그 침범의 이유가 극악한 범죄를 알리고 보다 바른 사회로 나아가기 위함이었다해도 침범한 자는 그저 범죄자가 될 뿐이었다. 현경은 방패님의 독점 권한인 CCTV를 해킹했고 잡혀갔다. 연경은 현정을 구하기 위해 현정이 남겨놓은 메모를 통해 인터넷에 접속했고, 신세계를 만났다. 


<서유기>에서 제천대성인 손오공이 부처님 손바닥에서 놀았다면, 이 이야기에서 연경은 약사여래 혹은 관음보살을 만나 어디서 놀다오는 것일까. 억압적인 힘이 물리적인 벽을 쌓아 사람들을 가둬도 어떻게든 뚫고 나오는 힘과 용기가 정말 멋있다.


다섯 번째 이야기는 이유리 작가의 <무너뜨리기>이다. '부부'는 어떤 존재일까? 불타는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요즘 세대는 연애 결혼이 많다. 부모님 세대는 그렇지 않았지만 말이다. '사랑'이 아주 소중한 가치가 되고, 평행을 함께 할 조건 중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면서 그렇게 결혼한 부부들은 그 '화학적 반응'이 사라지면 어떻게 할까. '정'과 '의리'로 산다는 그들의 익숙함 역시 '사랑'의 한 부분은 아닐까. 


그래서 수정과 정진이 '리빌딩'을 하고 난 뒤 겪는 일련의 사건들이 의미심장했다. 사랑하여 상대에게 잘 보이고 싶어 '나'를 온전히 꺼내지 않은 상황에서 서로는 어디까지 희생할 수 있을까. 어디까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함께 울고 웃으며 켜켜이 쌓아 온 세월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음을, 그들은 알게 되었을까.


여섯 번째 이야기는 정보라 작가의 <무르무란>이다. 선사시대인 듯 보이는 때의 이야기이다. 얼마 전에 읽었던 <파묻힌 여성>이 떠오르기도 했다. 선사시대의 것인 벽화나 인형들의 성별은 알 수 없다고, 만든 사람이나 만들어진 것들이나 모두 성별이 이렇다 저렇다 정할 수 없으며 지금 생각처럼 의미지을 수도 없다는 내용 말이다.


이 이야기에서 사냥을 잘 하는 사람은 벽에 그림을 새길 자격을 얻는다. 사냥하는 방법, 사냥감의 종류, 곰이나 호랑이 등이 언제 약해지고 언제 사나워지는지, 사냥 후에는 어떻게 하는 지 등을 새긴다. 그리고 사냥을 잘 하는 이가 아이를 가지면 또한 벽에 그림을 새긴다. 검은깃털은 바다 사냥도 육지 사냥도 모두 잘 했고, 아이를 가졌고, 벽에 그림을 새기게 되었다. 그러던 중 겨울을 지나 봄에 축제가 있었고, 죽은 이가 돌아왔다. 


현명한 큰어머니는 뻣뻣한털가죽 아주머니를 불렀고, 뻣뻣한털가죽 아주머니는 '무르무란'을 부르기로 했다. 죽음을 먹는 새, 죽음을 먹는 존재인 '무르무란'을. 결국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산 자가 알아서는 안 되는 이야기를 벽에 새긴다 한들 어떤 기호나 부호도 없기에 그 의미는 입으로만 전해질 것이다. 그렇게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벽만큼이나 구전으로 내려오던 이야기와 그저 널리 퍼진 이야기 사이에 커다란 벽이 있는 건지도.


죽음의 비밀까지 간직한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문학이 무엇인지, 장르와 SF가 무엇인지 나는 아직 정확히 모르지만, 어쩌면 그건 끝없이 벽을 넘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아닐까? 사람과 방과 계단과 궁전을 넘어, 누군가 우리에게 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기도하고 그리는 일. 우리에게 메타포가, 비유와 우화가, 문학이 그런 것처럼. 이야기는 벽이 되고 문이 되고 세계가 된다. 책은 벽돌이다.
어느새 저녁이 되었고, 이제 꿈꿀 시간이다. - P13

소설은 우리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동시에 전체로서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상기시킨다. 벽을 두고도 격리와 적대, 혼란과 자아 상실, 어느 쪽으로도 빠지지 않는 길이다. -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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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센디어리스
권오경 지음, 김지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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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참 아름다운 감정인데, 누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숭고해지기도 하고 폭력적이기도 하다. 낙태를 하는 병원을 폭파하면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다고, 그 행동에 대해 스스로가 옳다고 믿는다면 그 행동이 아무리 폭력적이어도 죄책감이 없다. 신의 뜻을 행했기에… 이 책은 세 명의 화자를 통해 어떻게 그런 믿음에 경도되는지 이야기한다. 차별, 좌절, 죄책감 등 인간을 이용할 거리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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