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작품
윤고은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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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심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고민한다. 그냥 책장을 덮어버릴까, 투비컨티뉴드할까. 야심차게 책 표지를 넘긴지 근 일주일이 되어가건만 하루 십여쪽을 넘기기가 여간 힘겨운 게 아니다. 목구멍이 부어서 음식을 넘기기 힘든 인간이라도 된 거 마냥 시퍼렇게 눈을 부라려도 글자들을 눈으로 집어넣기가 어찌나 힘이 드는지. 꾸역꾸역 집어 넣었다가도 되돌아가서 다시 읽기를 반복한다. 소설에서 이러기가 쉽지 않은데, . "왜 이 책을 추천하셨어요!" 독서 모임 도서로 추천한 이를 원망조차 할 수 없다. 그게 바로 나라서.

추천의 이유는 그럴싸했다. 불을 연상시키며 강렬하게 시선을 사로잡는 빨간 표지, 미술이라는 장르가 주는 신비감, 흥미진진한 뒤표지의 추천 글, '벌어질 모든 우연에 덫을 설치'했다니! '상상력의 빈곤을 자책하게 만드는 기묘한 설정,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놀라운 이야기'라니! 표지에 그려진 푸른 액자 틀이 블랙홀의 중심이라도 되는 양, 그 안에 바탕과 같은 빛깔로 쓰인 제목 '불타는 작품'은 일단 나의 호기심을 강한 인력으로 끌어당긴다.

 

문제는 끌어 당겨져서 입장까지는 했으나 이후로는 이정표 없는 광장에 내던져진 듯 많은 날들을 방황했다는 거다. 고갱님, 마이 당황하셨쎄요? 작가의 목소리가 음성 지원된다. 소설 분량의 절반이 넘어가도록 작품 제작조차 이루어지지 않는다니! 작품이 불타야 하잖아! 설마 마지막에 '그리고 작품은 불태워졌다, '은 아니겠지? 슬슬 불안해진다. 읽다가 그만 두면 의문의 1패를 한 듯 찜찜할 듯하다.

일단 도전하지만 줄거리를 요약하기조차 난감한 소설이다. 배달 알바를 뛰는 생계형 화가인 주인공 안이지가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로버트 예술 재단의 후원을 받아 작품을 제작할 기회를 얻는다. 재단의 후원 조건은 하나, 완성작 중 하나를 전시 마지막 날에 소각한다는 거다. 그녀는 작품 열 점을 완성하지만 소각될 작품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못하고 모조작을 만들어 이를 빼돌리게 된다. 여기까지는 평범해 보이지만, 재단 이사장인 로버트가 ''이고 개와의 대화가 이루어지며 소각할 작품을 고르는 주체가 바로 개라는 사실에서 나의 동공은 흔들린다.

 

내용의 분배는 더 당황스럽다. 어떤 소설이든 읽기 전에 대략 전개될 내용을 상상한다. 주인공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하리라 짐작한다. 불타는 작품을 고르기 위한 예술가의 고뇌가 주제일지도 모르지. 대략 이렇게 생각한다.

분량의 1/3 정도인 101페이지에 이르러 주인공은 재단에 도착한다. 불에 탈 작품은 언급조차 없고 캘리포니아 도시만 불에 타는 중이다. 반복된 어긋남, 소통의 부재를 포함한 상황이 몹시 답답하여 내 마음도 열을 받아 불에 탈 지경이다. 다시 1/3 정도를 지나 240페이지에 도달하니 드디어 '오늘의 개' 연작이라는 작품 주제가 얼굴을 드러낸다. 이제 마지막까지는 100페이지 가량밖에 남지 않았는데 말이다.

한데 주제가 발표된 다음부터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막판 스퍼트가 시작된 로켓 발사가 이루어지듯 내용 전개는 점차 스피드를 높인다. 발화점에 도달하기라도 하듯 이야기가 휘몰아친다. 느릿한 전개를 불평하던 시간이 무색하게도 후다닥 마지막에 도달할 만큼 몰입한다.

 

물리학자 김상욱이 추천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나 역시 소설의 전개를 따라가며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떠올린다. 여왕처럼 군림하는 듯하는 개 '로버트', 말하는 토끼처럼 여왕과 앨리스를 이어주는 통역사들, 카드가 펼쳐지는 이상한 나라같은 도시 Q, 주인공이 무심코 던진 말을 고지식할 정도로 구현하는 그 안의 사람들. 여기저기 튀어나오는 판타지적 요소가 독자를 오묘한 세상으로 데려간다.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 도무지 짐작되지 않는 전개와 미스터리한 복선들에 쓸데없는 걱정이 생기기 시작한다. 로버트가 처음의 그 로버트가 맞을까? 로버트는 학대를 당하고 있었나? 로버트가 던진 두 작품 중 주인공이 집어든 건 과연 진품이었을까? 공항에서 샘 옆에 있던 건 로버트였을까? , , 이 많은 물음표를 어찌 다 수습하시려고 하시나요, 작가님? 결국 나는 윤고은 작가의 결론 앞에서 한 방 얻어맞는다. 수습은 내가 해야 하는 거였다. 훌훌 떨어진 로켓의 잔해들을 주워 나의 상상력으로 나머지 퍼즐을 완성해야 했던 거다.

 

로켓 발사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문장으로 구현한다면 딱 이 소설로 비유할 수 있으리라. 거대한 몸체에서 정작 우주 공간으로 날아가는 건 맨 꼭대기에 있는 작은 덩이인 것처럼, 작가는 마지막에 인상적인 메시지 하나 만을 강렬하게 남긴다. 질척이며 덕지덕지 붙는 듯한 그동안의 전개는 발사를 위한 준비 과정이었던 걸까. 마지막에는 과감할 정도로 나머지 과정을 훌훌 털어낸다. 지구 중력을 이겨내고 우주로 날아가려는 발사체인 양.

지구 대기권과 우주의 경계선을 일컫는 용어 '카르마라인'이 마음에 남는다. 매일 아침 '오늘의 날씨' 카드를 받는 주인공과는 달리 로버트는 '우주의 날씨' 소식을 받아본다며 카르마라인을 언급한다. 서로의 영역이 다르다면서 말이다. 주인공 안이지는 자신에게서 출발한 말들이 로켓처럼 쏘아올려져 카르마라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것을 덜어내야 하는지 생각한다. 나는 이 부분이 작가 윤고은의 고민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고민했고, 결과는 적어도 나라는 독자에게는 성공적이었다.

 

지구 대기는 위로 올라갈수록 희박해지므로 우주로 돌입하는 명확한 경계막이 존재하는 건 아니다. 항공 관련 국제기구마다 우주의 시작으로 보는 기준이 다르다. 유럽국제항공우주연맹은 100km, 미국항공우주국은 80km 너머를 우주로 정의한다. 때문에 고도 106km를 다녀온 제프 베이조스는 우주 여행을 한 것으로, 고도 85km까지 다녀온 리처드 브랜슨은 영국인이기에 유럽의 기준에 따라 우주에 다녀온 사실을 인정받지 못한다.

이 책에서 작가가 설정한 카르마라인은 6장부터라고 판단된다. 물론 나만의 기준이다. 6장 이후로 고도를 높이면 드디어 작가가 설정한 우주 공간으로 돌입한다. 거기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올라가는 건 독자의 몫이다.

무엇이 진짜일 수 있는가. 어떤 것을 진짜라고 말할 수 있는가. 미술품 뿐 아니라 문학 작품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주제를 작가는 독자의 우주를 향해 쏘아 올린다. 나머지 이야기들은 로켓이 벗어던진 옷인 양 우수수 물음표 모양으로 떨어진다.

 

멕시코의 미술품 수집가가 143억원의 가치를 지닌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불태웠다는 뉴스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림을 대체 불가 토큰인 NFT형태로 팔기 위해 칵테일 잔에 그림을 고정하고 불태우는 장면을 유튜브 영상으로 공개했다고 한다. 다만 소실된 작품이 원본인지 모조품인지 논란이 일고 있다는 기사다.

작가의 말에도 역시 원본의 기준을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그녀는 한 권의 책이 원본의 정체성을 가지는 시점을 명확하게 정의한다. 중력을 이겨내고 독자의 마음으로 넘어가 독자의 마음을 흔들 때, 하나뿐인 진짜가 된다고 말한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과도 일맥상통하는 생각이다. '불타는 작품만이 진짜라고. 불타고 있을 때, 그 순간의 화력만이 사람의 영혼을 움직인다고. 그런 의미에서 화염을 피해 밖으로 나온 건 진짜일 수가 없다고.'

불타는 작품은 확실히 미괄식이다. 마지막 문장에서 그동안의 전개는 다만 거들었다는 사실을 한순간에 깨닫게 만드는 작품이다. 블랙홀로 들어갔다 화이트홀로 빠져나온다면 이런 기분이 들까.

 

이정표 없는 공간을 걸어가던 초입, 책을 쉽게 던져버릴 수 없던 이유 중 하나는 작가의 뛰어난 표현력이다. 뭔 내용이 이 따위야! 라며 후지다고 치부하기에는 문장의 표현력이 너무 고퀄리티를 뿜어냈기 때문이다. 내용 파악은 되지 않았건만, 좋았던 표현을 한 가득 메모한다.

'별을 보는 사람들이 잠의 입구로 기울고 해를 보는 사람들이 잠의 출구를 찾기 전, 디지털 시계의 숫자들이 한순간 증발해 버린다면 이 바늘 달린 시계들은 그대로 남아 숨이 멎은 시간을 보여준다, 얼핏 보기엔 내 마당에서 개가 뛰노는 것이나 개 마당에서 내가 뛰노는 것이나 비슷해, 작가가 사랑하는 작품을 로버트가 선택하는 게 아니라 로버트가 선택한 작품을 작가가 사랑하게 되는 구조, 그의 그림자가 돌돌 말아두었던 우산을 펼치듯이 커지고 나는 우산에서 톡톡 털어낸 물방울처럼 작고 하찮게 쪼그라든다, 어떤 사람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고치면서 매일을 살아간다' 는 문장들에서는 대조적인 표현이 두드러진다.

 

기발한 발상에 감탄을 한 부분도 많다. 주인공이 움직이는 경로가 어떤 이동 수단을 사용하든 동그랗고 파란 점으로 요약된다든지, 두 다리가 한 장의 포스트잇처럼 나풀거린다든지, 산책할 개를 고르는 것조차 귀찮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오늘의 개' 서비스가 인스턴트 반려 욕구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든지.

작가의 말에 나오는 '우리도 책처럼 저마다 원본인데' 라는 문장 앞에서는 보는 순간 찡해진다. 한동안 그 문장이 심장 곁을 맴돈다. 그래, 나의 원본은 바로 나인데 말이지. 예술품으로 말하면 진품인데도 종종 휘말리고 흔들리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잊고 살지 않았던가.

주인공의 상황에 몰입하며 작가라는 직업에 올인하기에는 생계를 유지하기 힘든 현실을 절감한다. 정여울이 해석에서 언급한 것처럼, 작가로서 어떤 작품을 창작해야 하는 건지, 창작자와 관객은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는 모든 창작자들이 고민하는 문제이리라.

 

똑같은 계단을 올라가면서도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한다. 물리학자는 계단의 높이와 몸무게를 이용해서 한 일의 양을 계산한다. 화가는 계단에 비치는 빛과 그림자를 인지하고 입체적인 굴곡으로 표현한다. 음악가는 계단을 밟는 경쾌한 발소리를 듣고 통통 튀는 리듬을 음에 담는다. 추리 소설 작가는 계단 끝에서 이제 곧 발생할 미스터리 사건을 상상할 지도 모른다. 수많은 이들이 자신이 몸 담고 있는 분야의 관점에서 주변 상황을 수용하고 해석한다. 같은 공간을 살면서도 다른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이유는 관점의 차이 때문이리라.

"사람이 어떻게 보고 싶은 거만 보니?" 주변인의 말에, "굳이 취향이 아닌 걸 볼 필요가 있나?" 당당하게 답해왔다. 현실도 충분히 복잡하므로 선택할 수 있는 문화 생활 만큼은 좋아하는 요소들을 누리고 싶어서이다. 이런 생각을 책에서 만큼은 예외로 적용해야 할 듯하다. 고정 관념의 중력에서 벗어나 카르마라인을 넘어서면, 거기, 상상도 하지 못했던 새로운 우주를 보게 될 테니까. 다른 세상이 궁금하다면, 다른 세상을 살고 싶다면.

 

p87, 3째줄: 있냐느고 있느냐고

p260, 중간: 배변욕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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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익병을 말한다 - 피부과의 역사를 바꾼 함익병의 직설
함익병.지승호 지음 / 비온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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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에서 가장 넓은 장기, 피부다. 제주도 해녀가 입는 잠수복을 떠올린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통 검정 스키니스러운 천으로 둘러싸인 옷 말이다.

피부라는 옷을 전체적으로 인식해 본 적은 없다. 온몸을 구석구석 세밀한 시선으로 탐색한다. 지형으로 비유하면 파란만장하다. 어두운 얼룩과 작은 골짜기와 울퉁불퉁한 모래알들이 흩어진 얼굴, 왼쪽 발바닥은 군데군데 보호막이 벗겨져 있다. 양쪽 발뒤꿈치와 손끝은 사막이다. 윤기 좌르르 흐르는 비옥한 토양이 드물다. 전체적으로 건조 지형이다.

얼굴만은 깐 달걀이었던 적이 있었었었건만 까마득한 대과거이다. 시간의 공격 앞에서는 속수무책이 되나 이제는 까지 않은 신선한 달걀 표면이다. 거칠어졌다. 관리를 좀 할 걸 그랬나 때늦은 뒷북을 친다. 피부에 관한 진실을 말해주는 책을 읽으니 그나마 위안이 된다. 피부는 타고 난다는 점, 전적으로 유전적인 요소가 많다는 사실이다.

 

함익병을 말한다는 전업 인터뷰어 지승호가 피부과 의사 함익병을 인터뷰한 대담집이다.

인터뷰 작가 지승호의 글은 몇 번 접한 적이 있다. 들어가는 글에 시상식 수상 소감처럼 책이 나오기까지 관여한 모든 이들의 이름을 빠짐없이 언급하는 사람, 숨어서 일하는 이들의 노고를 아는 세심한 작가다. 독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대화를 이끌어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사람, 평소 그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이미지다.

솔직히 함익병이란 이름은 처음 들어본다. 지나가던 직장 동료가 책 표지를 보더니, "! 이 사람~!" 한다. "유명한 사람이예요?" ", TV 예능 프로그램에 많이 나왔던 의사잖아요." 자연스럽게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말을 들으며 유명인인가 한다. 드라마에 한 번 꽂히면 줄기차게 본방을 사수하는 드라매니아지만 다른 TV 프로그램은 뉴스나 볼까 잘 보지 않으니까. 주문한 책을 받아보고 나서야 피부과 의사라는 사실을 알게 된 나에게는 오히려 인터뷰어인 지승호가 익숙하다. 졸지에 작가에 대해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오롯이 글로만 알아가는 기회를 갖는다.

 

6장으로 편성되어 있지만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3'피부에 헛돈 쓰지 마라'4'피부, 무엇이든 물어보세요'에서는 피부 관련 지식을 언급한다. 피부과 전문의로서 피부 질환이나 상식에 관해 일반인들이 잘못 알고 있는 내용을 정확하게 짚어준다.

둘째, 1'함익병을 말한다'6'함익병이 말한다'에서는 인간으로서 삶을 살아가는 태도와 세상사에 대한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셋째, 2'대한민국 피부과의 역사를 바꾸다'5'호통왕 함익병'에서는 피부과 의사라는 직업을 선택하고 개업을 하기까지의 과정, 의료계의 현실, 직업인으로서 의사의 입장을 밝힌다.

피부 건강을 위해 함익병이 언급한 노하우는 한결같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골고루 잘 먹고 운동을 열심히 하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한 실천 요소와 일맥상통한다.

 

인터뷰 내용 만으로도 한 인간적인 면모를 아는 데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어떤 사안에 대한 그의 견해를 듣다 보면 컴퓨터에 사용되는 단 두 가지 숫자, 01을 보는 듯하다. 그의 사고 체계는 깔끔한 알고리즘을 연상케 한다. 머릿속을 디지털화시키고 계량화시킬 줄 알면 복잡한 문제를 풀어가는 데 쉽다는 말에 공감한다.

최초로 레이저를 도입하여 피부과의 역사를 바꾸기까지의 과정에서 삶에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자세를 배운다. 절박하면 두려움이 없어진다며 과감한 선택을 하는 결단력이 보인다.

주관이 확실하며 확고하게 자신의 의지를 믿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그런 성향이 말에서 드러난다. 어투와 내용뿐 아니라 문장의 배열 곳곳에서 그가 묻어 나온다.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 짐작해 본다. 요즘 유행하는 MBTI로 표현하면, 100%에 가까운 T가 포함된 ESTJ 유형이라 말할 수 있을까.

 

피부 질환에 대하여 상담을 받은 기분이다. 피부 관련 궁금증을 많이 해소한다. 감성적인 내용 없이 팩트만 말하니 오히려 편하다. 이렇게 명쾌하고 단순하고 시원할 수가! 의사로서의 행동 기준이 명확해 가족에게 할 수 있는 처방이라면 환자에게 권한다는 말에 신뢰가 간다.

피부 노화를 막기 위해 자외선 차단제나 보습을 말하지만 무엇보다 정신적인 안정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역시 만병의 근원은 스트레스인가. 거의 모든 발병의 원인으로 안 끼는 데가 없는 걸 보니! 릴렉스, 릴렉스가 필요하다.

그는 아토피 피부염, 제모, 여드름, 피부 노화 등 우리가 피부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왜곡된 지식을 바로 잡아준다. 가장 인상 깊은 내용은 각질이 제거 대상이 아니라 보호 대상이라는 거다. 주변에서 선크림, 아이크림은 꼭 발라야 한다고 자주 말해주지만 귀찮아서 제대로 바르지 않았다. 50대 중반이 되어서야 얼굴 피부에 위기의식을 느낀다. 그나마 선크림은 그럭저럭 바르는 편이지만 각질 제거도 해야 하나 망설이던 차이다. ! 안도의 숨을 쉰다.

 

직업인으로서 의사는 돈만 밝히는 것이 아니고, 돈을 밝히는 거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냉철하게 보면 무한한 봉사를 요구하는 거 자체가 무리이다.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사명 의식은 있어야 하지만 직업을 갖는 중요한 목적은 생계를 유지하는 거니까.

의사로서의 고충을 말해주는 진상 환자의 사례를 접하며 작은 깨달음을 얻는다. 비교적 양호한 환자였지만 나 역시 불필요한 말을 간혹 했던 듯하기 때문이다. 증상을 듣고 정확하게 병을 진단하여 고쳐주는 게 의사의 역할이다. 이 과정에서 증상과 관계없는 말을 하는 건 본질을 흐리며 병을 낫게 하는 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의료보험 수가를 듣고 그동안 지불한 돈에 비해 너무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구나 싶었다.

대학 병원에서 아버지의 뇌 건강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여러 검사를 권유받아 실시했던 기억이 난다. 유난히 검사를 많이 했던 이유가 돈과도 관련 있다고 생각하니 의심의 눈길이 간다.

 

세상 안에서 굳건하게 자신의 위치를 지키는 인간으로서의 자세를 보여준다.

왼쪽 눈으로 보면 왼쪽이 먼저 보이고, 오른쪽 눈으로 보면 오른쪽이 먼저 보이는 차이일 뿐이라며 사물의 본질을 언급한다. 소위 좌파와 우파도 편견 없는 시각으로 바라본다.

젊은 독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보며 '그 답다'고 생각한다. 생을 관통하는 일관된 흐름이 있어야 하며 자신이 한 말에 마지막까지 책임을 다하는 삶을 사는 젊은이가 되었으면 한다고 당부한다.

문장에 담긴 내용과 어투는 그에 대하여 많은 걸 알려준다. 너무 직설적이고 비판적인 면모가 있어 초반에는 다소 거부감이 들었지만, 고유의 성격으로 인정하니 이해된다. 한 사람을 알아가는 데 책 한 권으로는 어림도 없음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익병이란 사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누가 보지 않아도 바닥에 떨어진 휴지를 줍는 작은 행동으로도 인성을 판단할 수 있는 것처럼.

 

동네에 있는 내과 두 군데에 가본 적이 있다. 한 분은 나에게 몇 마디 묻지 않고 말을 유려하게 잘하신다. 또 한 분은 다소 무뚝뚝하시지만 증상을 디테일하게 물어보신다. 언제부터인가 후자 쪽으로 발길이 가게 되었다. 은연 중에 신뢰감을 가졌던 듯하다.

어제는 감기 증상으로 그 병원에 갔다. 의사는 질병을 고치기 위해 필요한 말만을 한다는 그의 말이 떠올랐다.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목이 아프고 콧물이 나요."

"언제부터 그런 증상이 나타났나요? 두통이나 몸살이나 설사는요?"

청진기를 등에 대고 여러 군데를 짚으면서 호흡 소리를 들어보신다. 이성적으로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분석하니 곁가지 없이 병의 치유를 위한 길로 직진하고 있었다. 나 역시 질문에 부합하는 답만 한다. 진료는 2~3분 만에 클리어된다. 스마트한 환자가 된 듯해 뿌듯했다.

 

삶에 소신을 가진 그를 보며 나의 삶을 돌아본다. 건강해지는 방법을 말하는 그를 보며 건강을 돌아본다. 기대하지 않기에 실망도 없다는 그의 생각에 합리적이고 깔끔한 사고방식을 배운다. 그는 퍼즐 맞추기를 할 때 한 칸의 여유가 있어야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 있다고 말한다. 삶의 퍼즐을 완성해 가며 늘 한 칸의 여유를 가지는 삶을 꿈꾼다.

마음이 건강해야 몸이 건강하고, 몸이 건강해야 마음도 건강하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 둘은 연속적인 연결 고리를 갖는다. 몸에 좋은 담백한 두부를 먹은 기분이다. 음미할수록 고소한 맛이 난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관망하며 몸과 마음을 돌아보는 시간을 보낸다.

누군가에게 말해질 수 있는 대상이 되고 싶다. 중력장에서는 휘고 나머지 공간에서는 직진하는 햇살처럼 융통성을 보이면서도 올곧게 빛나는 삶을 살고 싶다. 몸을 덮고 있는 스킨처럼 나의 삶을 감싸고, 촉촉한 얼굴로 만들어주는 스킨처럼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나이 들고 싶어졌다.

 

p54, 5째 줄: 풀어가는데 풀어가는 데

p74, 밑에서 2째 줄: ,어떻게 , 어떻게

p83, 밑에서 2째 줄: 반말하는데 반말하는 데

p87, 밑에서 6째 줄: 묻는 데로 묻는 대로

p240, 마지막 줄: 마침표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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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도 100퍼센트의 휴식
박상영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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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으로도 힘이 되는 책들이 있다. 안방 한쪽 벽면에는 책장이 있다. 종종 꽂힌 책들의 제목을 주욱 훑어본다. 제각각의 문구들이 나에게 와서 짧은 문장의 조합이 되거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전혀 상관없는 별들이 모여 이야기가 담긴 별자리가 만들어지는 것처럼.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사는 게 뭐라고,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 언제 들어도 좋은 말, 내 옆에 있는 사람, 익숙한 새벽 세 시, 오늘처럼 고요히, 인생의 일요일들, 안으로 멀리뛰기, 빼기의 여행,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 나를 읽다, 나란 인간, 어쩌면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 나는 내 나이가 참 좋다, 순도 100퍼센트의 휴식’ 등이다.

한동안 정신없는 일상을 보낸다. 해야 할 일이 하고 싶은 일을 밀어내고 영역을 넓힌다는 위기감이 들 무렵, 책장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책을 뽑아 든다. 제목에 몇 번이나 눈길을 주며 ‘언젠가는 나도’ 를 되뇌던 책이다. 

『순도 100퍼센트의 휴식』은 친구와 함께 한 여행기이다. 휴식의 공간에서 함께 하는 친구 이야기이다. 그는 '언젠가'나 '어딘가'를 꿈꾸는 게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작은 빈틈을 찾아보고자 한다. 저자에게 휴식은 친구와 동급이 아닐까. 휴식을 목적으로 하는 많은 시간에 친구들이 담겨있는 걸 보면.

소설 같은 에세이다. 저자가 주인공인 탐정 소설 같은  분위기가 있다. 드라마 엔딩처럼 결정적인 장면에서 전개가 끊어진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그의 소설도 이런 느낌일까. 책장에서 대기 타고 있는 『대도시의 사랑법』이 궁금해진다.

구성 면에서는 논설문이 떠오른다. 서론, 본론, 결론의 영역에 소소한 에피소드를 적절히 배치한다. 때로 억지스런 유머 코드가 잠시 걸음을 멈칫하게 만들지만, 여행, 휴식, 관계에 대하여 보다 깊이 사유하는 시간을 건네는 것으로 이 책의 의미는 충분하다. 


1부에서는 휴식 프로젝트를 세우기까지의 배경을 서술한다. 소설로 말하면 본격적으로 주인공이 등장하기 전에 펼쳐지는 시간적, 공간적 배경에 대한 설명이다. 슬럼프에 빠져있던 작가는 순도 100퍼센트의 휴식을 꿈꾼다.

2부는 본론이다. 우연한 기회로 그는 가파도에 있는 레지던시에 입주할 기회를 얻는다. 완벽한 휴식도 취하고 새로운 장편 소설을 완성하고자 하는 야심찬 계획을 세운다.

함께 생활하게 된 작가와 예술가들, 섬의 주민들, 섬으로 놀러 온 친구들과의 에피소드가 펼쳐진다. 휴식을 목적으로 하는 여행이 맞나 싶게 역동적인 사건들이 그의 일상을 흔든다. 스스로도 섬 생활이 자유와 휴식의 동의어가 되어주지 못했다고 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신선한 삶의 형태를 경험한 것으로 의미를 부여한다.

3부에서는 아나운서 이금희의 삶을 지켜보며 자신만의 결론을 짓는다. '지금 이 순간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지나간 일에 머무르지 않는 사람, 지금 좋으면 미련 없이 모든 것을 내어주고, 인연이 다 되면 후회 없이 저벅저벅 걸어가는 삶' 을 보며 커다란 느낌표를 안는다.

그는 여행에서 함께 했던 친구들을 바라보며 관계의 속성을 분석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화석처럼 굳어지는 관계가 많아짐을, 애써 노력하지 않고는 영원할 줄 알았던 관계가 퇴색되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목도한다. 지금 이 순간의 반짝임이 곧 인생이라는 게 박상영이 내린 결론적인 믿음이다.

여행 후기처럼 서술한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여행과 관계의 본질을 통찰한다. 일상으로부터의 도피를 꿈꾸며 휴식을 위해 떠나온 여행에서 가장 열렬히 일상에 대하여 생각했음을 말한다.  

 

진정한 휴식은 무엇일까. 퇴근 후에 엄마로서의 일정까지 마치고 100퍼센트의 순도로 갖는 나만의 시간에 여기, 스터디 카페에 와 있다. 책을 읽고, 시나 짧은 에세이를 쓰고, 리뷰를 쓰고, 하루를 돌아본다. 쉬러 가면서 노트북을 챙기는 저자 박상영처럼 내 가방 역시 노트북과 책 등으로 묵직하다.

휴식에 대한 리뷰를 쓰며 나를 돌아본다. 리뷰를 완성하기 전까지는 어떤 글을 쓸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다. 일단 말을 꺼내면 줄줄 이어지는 가래떡처럼 생각은 물꼬를 튼다. 나의 글이 나도 모르는 결론으로 나를 데려다 놓는다. 전혀 낯선 생각으로 채워진 공간을 맞이하며 새로운 세상을 포용한다. 나의 영역이 조금씩 넓어진다.

사람은 '휴식'이라는 단어로 이루어진 그릇에 저마다 다른 의미를 채우는 듯하다. 감정의 색채가 드넓음에도 불구하고 꼴랑 '사랑'이라는 두 글자로 퉁치는 것처럼. 나의 휴식 그릇에는 어떤 것이 담겨있나. 박상영의 에세이를 읽어가는 동안 스스로 묻는다.

나에게 휴식은 무엇일까. 단어의 정의를 내리기 전에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아야 함을 깨닫는다. 테스 할배를 잠시 소환한다.

나는 휴식에 무엇을 담고 싶은가? 글이다. 책도 글을 쓰기 위해 읽는 목적이 크다.

글에 무엇을 담고 싶은가? '나'이다.

나의 무엇을 담고 싶은가? 아픔, 슬픔, 원망, 공허, 고독 등이다.

무엇을 위해 휴식을 취하는가? 스스로 나를 치유하기 위해서다.

글을 쓰면 후련해지고 뭉클해지고 따뜻해지는 이유가 선명해진다. 토닥토닥 위로를 받고 싶었나 보다, 지금처럼. 그의 여행을 구경하며 나는, 나의 마음을 여행하고 있었던 걸까.


p29, 첫째 줄: 낡고 → 낡은

p42, 2째 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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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
송길영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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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라테와 캐러멜 마키아토를 좋아하던 시기가 있었다. 커피는 나와 맞지 않지만, 우유의 부드러움과 캐러멜의 달콤함은 다른 영역이니까. 커피는 다만 거들 뿐 소소한 첨가물에 불과하달까. 생크림을 소프트아이스크림처럼 고봉으로 쌓아 올려도 맛있으면 0칼로리라는 불변의 계산법도 있으니, 체중에 대한 걱정은 잠시 접는다.

요즘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이런 탕약을 왜들 마시는지 생각했던 내가. 첫 모금을 마시는 순간, 노곤하던 혈액은 혈색을 되찾는다. 입안에 맴도는 깔끔함과 개운함은 날마다 나를 유혹한다. 온전히 나로 존재하는 시간에 커피 한 잔을 마신다. 퇴근 후 엄마로서의 일정까지 마치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스터디 카페에서이다. 적당히 말똥말똥한 밤이어도 괜찮다. 나의 낮은 이 시간을 위해 존재하니까. 여기에 오려고 잠시 직장에 9시간 정도 다녀오는 거니까.

고정불변일 것 같던 취향이 변하는 중이다. 초콜릿, 어리굴젓 같은 단짠을 그렇게나 맛있게 먹었다고?! 절대 변하지 않으리라 여기던 입맛이 비슷한 수순을 밟는다. ‘.라는 말을 섣불리 꺼낼 수 없게 된다. 현재의 세상만이 절대 월드라 여겼던 시절의 오만함이다.

주변 사람을 바라보는 마음도 변하고 있다. 도미노 현상인 듯 인간관계의 농도도 서서히 달라지는 중이다. 내가 이런 사람과 그토록 친밀했다고?! 절대 그럴 리 없는 게 세상에 존재하기는 할까.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는 세상의 모습을 정확히 스케치하여 세상이 변화해 가는 방향을 제시하는 책이다. 책날개에 시대의 마음을 캐는 마인드 마이너라는 저자 소개가 있다. 저자 송길영은 사람들의 검색기록을 토대로 빅데이터를 분석하여 결과를 도출한다.

그는 지능화와 고령화를 사회 변화의 주요 축으로 언급한다. AI 최적화 시스템에 따라 일자리가 변화하고, 효도의 종말이 나타난다고 전망한다. 자기만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개인의 시대가 왔다고 본다. 기존에 없던 존재, 핵 개인의 출현이다.

물질의 세계에도 핵이 있다. 핵이 처음부터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건 아니다. 원자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입자이던 시기가 먼저이다. 달리기의 출발선처럼 원자는 늘 시작점이었다. 전자, 양성자, 중성자가 발견되기 전까지. 쪼갤 수 있는 입자가 되면서 원자는 근본의 자리를 내어준다. 이보다 더 작은 쿼크가 등장하는 순간, 원자는 또다시 뒤로 밀린다. 핵의 세계가 세상을 향해 열린다.

핵 개인이 처음부터 존재한 건 아니다. 조부모로부터 부모와 자식들이 생활근거지를 공유하던 대가족이 먼저이다. 시대가 바뀌면서 거대한 가족은 부모와 자식으로만 이루어진 핵가족이 된다. ‘이 붙어 있지만 독립된 존재는 아니다. 사회로 나아가는 개인의 출발점은 가족이었다. 이제 우리는 원자가 쪼개지듯, 그래서 흩어지듯, 결국 홀로 서는 핵 개인의 새로운 시대를 건넌다.

 

새로움은 기존 사람들에게 종종 두려움으로 작용한다.

외할머니께서 잔액이 남은 버스카드를 주셨어. 이제 공짜로 탈 수 있다고 쓰래.” “티머니페이로 등록해서 사용해, 엄마. 온다택시 어쩌구 티머니GO 저쩌구 마일리지 쭝얼쭝얼...”

큰딸이 택시 호출 앱을 핸드폰에 깔아준다. 카카오 택시를 접하면서 느꼈던 생소함이 다시 구현된다.

좀 어렵다.” “엄마! 하나도 안 어려워. 공항버스 어쩌구 고속버스 저쩌구 지원금 쭝얼쭝얼...”

설명을 들어도 주춤거려지는 신문물이다.

기시감이 든다. 부모님을 모시고 병원에 갔다가 택시를 잡으려 할 때의 일이다. 도롯가에서 두리번거리시며 팔을 들어 올리시는 80대 부모님. 예약 문구를 매단 택시 한 대가 휭 지나간다.

요새는 택시 잡기 참 힘들어.” “엄마, 양반콜 부르면 금방 오는데, 전화할까?” “조금만 더 기다려 보고...”

예약 택시 몇 대를 구경하는 동안, 살짝 답답해진다. 결국 콜택시를 부른다.

당신들이 접하는 생소함과 내가 느낀 답답함이 큰딸과 나 사이에도 고스란히 복제되었으리라. 세상은 변화하고 있다. 보이는 분야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시간과 공간을 태운 기차는 점점 빨라진다. 미래를 향해 달리는 동안 변화하는 풍경이 펼쳐진다.

 

변화는 당장 학교에서 직접적인 체감 온도로 다가온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하는 아이들이 많아진다.

예전 아이들은 안 그랬는데.”

복도를 걸어가며 라떼를 찾는다. 생각이 복잡해진다.

그게 세대 차이지. 요즘 발령받은 20대나 30대 교사들은 아이들의 행동을 당연하게 여길걸?”

동료가 말한다.

체감하는 온도 차이가 점점 벌어지고 있다. 세대가 변했건 시대가 변했건 분명한 건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시작 지점을 콕 집어 말하기는 애매하다. 시간이 멈추지 않고 흘러가듯 변화 또한 노을의 그러데이션처럼 자연스레 물들어 가니까.

아이들은 점점 자신만의 세계관을 만들어 간다. 게임만 해도 이제 유저들은 동네와 국가를 넘어 전 세계로 확장된다. SNS에 실려 보이지 않는 연결이 지구를 휘감는다. 그들은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까.

예전에는 안 그랬던 아이들을 복기하는 횟수가 잦아진다. 괴리감을 느끼는 내 모습을 돌아본다. 사고가 점점 경직되어 가는 걸까. 이상적인 모습을 가둬놓고 고정된 틀을 고집하고 있나.

 

완고함을 판단하는 기준은 결론을 내리는 순서에 있다. 답정너랄까. 처음부터 스스로 정한 정답이 있다. 그다음에는 정답을 정당화할 수 있는 명분을 찾아 논리적으로 배열한다. 다양한 사례를 분석하여 결론에 도달하는 귀납형이 아니다. 그에게는 어떤 말을 건네도 코팅한 종이에 물 뿌리는 듯 말방울이 흩어진다.

그가 하는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살아온 배경과 경험을 토대로 최선의 결론을 내리는 거니까. 나의 말이 틀리지 않듯, 그의 말 역시 그렇다. 다만 완고함은 타인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고 틀린 것으로 간주하는 데 있다.

3장에서는 직장 상사의 라떼를 냉철하게 분석한다. 지금 시대는 경험이 아니라 지혜가 자산이니 빠른 환경 변화에는 경험이 독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경고한다. 현재진행형이 아닌 과거완료형 회고록의 삶을 살지 말고 지나간 권위는 과감히 내려놓아야 함을 강조한다.

삶은 OX 선택형이 아니다. 틀린 답이 없다. 제각기 다른 답을 작성할 수 있는 서술형이다. 100M 일직선 달리기가 아니라 원형의 룰렛에 가깝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발생하는 의견 대립도 마찬가지다. 부모라는 이유로 자식의 삶의 문제에 허락을 논할 수 없다. 골프 경기에서 많은 영향을 미치는 갤러리 정도의 역할이면 충분하다. 삶은 스스로 걸어야 하는 각자의 몫이니까.

 

우리 나이 또래에는 현직에 있을 때 자혼을 시키는 경우는 거의 드물 거예요.”

맞아요. 예전에 비해 경조사에 가는 횟수도 많이 줄었어요.”

연로하신 부모님도 챙겨야지, 요즘 취업도 어려운데 자식도 신경 써야지,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40대 직장 동료의 결혼을 앞두고 사무실에서 오가던 말이다. 20대 후반의 미혼 자녀들과 80대의 노부모가 있는 분들이다. 올해의 사무실 구성원은 유난히 비슷한 또래가 많아서인지 고민의 지점들이 많이 일치한다.

자녀들의 결혼보다 발등의 불은 취업이다. 갈수록 취업의 문이 좁아지니까.

요즘은 취직만 해도 효자예요. 효도는 바라지도 않아요. 그냥 제 앞가림만 잘하면 좋겠어요.”

맞장구치는 말들이 오간다. AI 시장의 확대로 인한 직장 문화의 변화가 2~3장에 걸쳐 비중 있게 다뤄진다. 사회적 기여가 동반되는 일자리는 쉽게 사라지지 않으니, 시대의 흐름을 읽고 자신을 현행화해야 함을 권유한다. 하나의 장르가 되도록 고유함을 지녀야 함을 강조한다.

자식으로부터의 부양은 아예 기대하지 않으나 부모에 대한 효도는 의무로 떠안은 나이대이다. 위아래로 부양의 의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세대이다. 한 손은 뜨거운 물에 다른 손은 차가운 물에 담그고 있는 사람인 양 체감하는 세상의 온도 차가 가장 큰 나이, 지금의 50대인 듯하다.

 

효도의 종말이라는 4장의 제목을 보며 속마음을 들킨 듯 움찔한다.

이제 효도를 기대할 수는 없게 되었어. 내가 마지막 효도 세대가 아닐까.’

무의식적으로 생각해 왔다.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타당함이 막연하게 흐릿한 생각에 선명한 선을 덧씌운다.

효도의 끝이 개망나니 자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가족도 남처럼 적정 거리를 유지하며 존중하는 매너를 장착하라는 거다. 오히려 서로 깔끔하게 주고받는 관계가 아름답다는 것. 받는 건 당연한 게 아니니까.

저자에 의하면 나이듦을 판정하는 중요한 기준 중 하나는 완고함이다. 카피라이터 정철의 한글자에 나오는 문장이 떠오른다. 가장 인상적으로 와 닿았던 한 글자, ‘이다.

‘ “불이야!”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말이다. 닥치는 대로 집어삼키는 불이 나를 삼키기 직전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가장 무섭지 않은 말은 무엇일까. 아무리 큰 소리로 외쳐도 듣는 사람은 하품만 나오는 말은 무엇일까. “불이었다.” 이미 재가 되어 들꽃 하나, 풀잎 하나도 삼킬 수 없다는 뜻이다. 그냥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늘 과거를 사는 바보들은 나도 한때 불이었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며 그것으로 사람들을 위협한다.’ (한글자, 정철, p284~285)

 

무의식적으로 불이었던 기억을 붙들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나이듦의 미래를 그리는 4장에 공감의 시선이 머문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면 동기와 의지가 필요하니, 내 존재의 의미를 갖고 주체적으로 살 수 있다면 충분하다는 격려가 따뜻하다. 왜 옛날만 후회하고 지금은 함부로 사느냐는 문장이 제법 서늘하다.

몇 번이고 읽으며 마음에 새긴 내용이 두 군데 있다. ‘멋지게 나이 드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멋진 사람이 나이가 든 것’, 문제는 나이가 아니라 라는 문장들이다. 멋진 나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진정성으로 고유한 서사를 만들 것. 변화하는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고 살아가는 비법으로 저자가 제안한 방법이다.

핵개인은 자신의 삶과 사회 모두에 책임을 다하는 존재이다. 옛날 사람이라 핵개인이 될 수 없는 게 아니다. 당신도 나도 이미 원자 단계를 지나 핵개인으로 쪼개져 있으니까. 이를 인지하고 홀로 서려는 의지가 충분하지 않을 뿐이다.

나의 의지로 내린 선택은 새로운 세상으로 삶을 이끈다. 라떼에만 머물렀더라면 아아의 깔끔한 세계를 평생 몰랐을 터이다. 무난하게 잘 걸어왔다며 평지의 추억만을 곱씹으며 낭떠러지 앞에서 주춤거릴 건가. 일단 한 발을 과감하게 내밀면 어떨까. 당신 어깨에 달린 날개가 펼쳐지는 희열을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 자유로움은 발을 떼지 못하면 결코 깨닫지 못할 무게로 살며시 접혀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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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12-14 2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한 때 카라멜 마키아토의 맛에 반해 이를 맛나게 내놓는 가게를 찾아다닌 적이 있었어요. 당시엔 온통 머리속에 카라멜 마키아토 뿐이었죠. 당시 제일 맛있는 곳은 엔젤리너스였는데, 이 가게 없어졌지요.ㅠㅠ 지금은 입맛이 변했는지, 생각이 변했는지 아이스 아메리카만 찾지요. 결국 개인의 취향 변화는 호기심의 발로라고 생각해요. 호기심이 없다면 그 한 곳에만 머물기 쉽답니다.

나비종 2023-12-20 20:03   좋아요 0 | URL
저도 커피숍에만 가면 카라멜 마키아토만 마셨습니다. 지금도 가~~~끔 당충전이 필요할 때 마시기는 하지만 이제는 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죠.^^
엔제리너스가 없어졌군요. 저희 동네에는 매장이 없어서 없어진 줄도 몰랐네요.
호기심... 공감합니다. 다른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듯 크든 작든 방향의 전환을 위해서는 호기심에서 출발한 용기가 필요한 듯합니다.^^

호시우행 2023-12-21 04: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행복하세요
 
단 한 사람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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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명은 세포분열을 한다. 몸집을 크게 하거나 생식하거나 저마다 목적을 품고 새로운 세포를 만든다. 세포분열이 거듭될수록 유전정보를 담은 염색체의 말단은 짧아진다. ‘텔로미어라 부르는 부위이다. 텔로미어가 소멸하는 순간 세포의 생명은 끝난다. 죽음으로 향하는 노화가 시작된다.

식품의 유통기한처럼 나의 세포 역시 생명 활동을 할 수 있는 기간이 정해져 있으리라. 환경에 따라 다소 연장되거나 단축된다 해도 마지막 순간을 향해 나의 몸은 달려갈 터이다. 잡을 수 없는 시간처럼 말이다.

현재로서는 텔로미어의 단축 속도를 늦추는 방법뿐이다. 스트레스를 줄이거나 식생활, 운동, 수면 등 건강한 몸을 위한 일반적인 권장 패턴과 별반 다르지 않다. 집 주변에 녹지가 많으면 텔로미어가 짧아지는 속도가 느려져 생물학적 연령이 2년 이상 낮아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식물은 역시 버릴 게 없는 완벽한 식품처럼 인간에게 유용한 존재인가. 녹지까지는 아니지만 출퇴근길에 나무 곁을 지나간다. 우뚝 선 나무들을 바라보며 가끔 나무가 말을 거는 장면을 상상한다.

-어젯밤에는 바람이 많이 불었어. 내 잎이 이만큼이나 바닥에 떨어졌단다.

모노드라마의 주인공인 양 나무를 향해 마음속으로 말을 건넨다.

-아깝지 않니?

가을을 품은 나무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답한다.

-때가 되어 떠난 건데, . 할 일을 다했으니 무슨 아쉬움이 있을까.

나무도 나처럼 숨을 쉬는 생명체라는 사실을 종종 잊는다. 삭막한 도시를 유영하는 침묵에 둘러싸여 쫓기듯 달려가느라 초록빛 숨결이 물결치는 장면을 휘리릭 넘겨버려 왔나. 눈앞에 놓인 책 표지의 초록을 보니 오랜 친구를 만난 듯 호흡이 느려진다.

 

겉표지의 무성한 초록 아래로 나무를 응시하는 단 한 사람과 그의 그림자가 시선을 끈다. 옆으로 누운 느낌표 같다. 단 한 사람. 마음을 집중하게 만드는 문구이다. 어떤 의미를 지닌 사람일까. 내용이나 맥락을 떠나 단 한 사람은 어떤 이를 연상케 하는가.

단 한 사람을 주재료로 상상의 요리를 펼친다. 세상에 단 한 사람만 남는다면 어떤 이가 남을까. 당신 곁에 단 한 사람만 남을 수 있다면 지금 누가 떠오르는가. 나를 가장 아껴주는 단 한 사람은 누구일까. 내가 가장 사랑했던 단 한 사람은 누구인가.

러브스토리를 짐작한 건 나만의 상상이었던가. 책을 읽을수록 나의 가정은 허물어진다.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은 건 아니다. 다만 핀 조명이 내리쬐는 영역에 있지 않을 뿐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사랑은 이보다 광범위하다. 가족, 소외된 사람들, 삶과 죽음에 대한 사랑을 폭넓게 다룬다.

 

소설단 한 사람은 나무를 매개로 수많은 사람 중 단 한 사람만 살리는 일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몽환적인 설화 느낌도 나고 판타지 소설의 외피를 입은 듯하지만, 지극히 냉철하게 현실을 직시한다. 삶과 죽음의 본질을 통찰하는 시간을 건넨다.

외할머니로부터 어머니, 주인공 목화에 이르기까지 모계로 이어지는 똑같은 과업은 수천 년을 생존하는 나무의 능력과 연결되면서 시작된다. 세 사람이 미션을 바라보는 관점은 제각기 다르다. 외할머니에게는 기적, 어머니에게는 지옥이다. 주인공 목화는 이 일을 중개라고 표현한다.

죽음을 맞는 사람들에게서 그녀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사랑한다는 말이다. 나는 오늘 하루 동안 이 말을 몇 번이나 했던가. 얼핏 기억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한 건 언제더라. 역시 희미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지 않은데 쑥스럽고 어색하다는 이유로 은연중에 말을 삼켰던가.

 

죽음 이후에 남을 나의 흔적은 무얼까. 물건을 정리하면서 시곗바늘을 상상한다. 채 도달하지 못한 미래의 시각을 가늠한다. 내가 사용하지 않은 물건의 유통기한은 언제일까. 내 몸을 이루는 세포의 유효기간은 언제까지일까. 허탈한 건 쓰임을 다하지 않았는데도 죽음으로 툭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삶과 죽음은 가장 먼 듯하면서 가깝다. 삶과 죽음을 1부터 100까지의 숫자로 표현하라면 삶은 1, 죽음은 100이라고 여긴다. 이들 사이의 거리가 나에게만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고 자만한다. 흔한 착각이다.

삶의 범위는 1부터 99까지 넓은 스펙트럼으로 퍼져있다. 언제 도약적으로 뛰어 99가 될지도 모른다. 무작위로 던져지는 주사위처럼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99도의 물이 100도의 수증기로 변하는 순간이 불현듯 온다. 작가의 표현처럼 느닷없는 죽음, 말도 안 되는 일, 눈 깜빡할 사이에 생사가 갈린다.

 

박스 접는 AI에 의해 허망하게 죽은 뉴스 속의 노동자가 떠오른다. 01로만 작동되는 로봇에게 눈앞의 대상은 흑백 화면 속 음영으로만 존재한다. 로봇은 생명과 생명이 아닌 대상을 구분하지 못한다. 안대를 두른 채 거침없이 팔을 휘두르는 거인의 이미지가 연상된다. 순간적으로 섬찟하다.

뉴스는 하루에도 몇 건씩 말도 안 되는 죽음을 쏟아낸다. 소설 속 문장이라면 차라리 좋을 죽음을 토해낸다. 이토록 허탈하고, 찰나적인 끝맺음이라니. 더욱 안타까운 건 세상을 향해 드러나는 죽음보다 드러나지 않는 죽음이 많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그늘진 어둠 속에서 소리도 없이 사그라드는 죽음을 조명한다. 노후 설비를 교체하다가, 자재를 옮기다가, 조형물을 설치하다가, 이물질을 제거하다가, 청소하다가 죽는 수많은 노동자의 죽음을 일깨운다.

 

사고는 흔하고 무작위로 일어나는 죽음은 보통 명사인듯하다. 죽음은 언제나 막연한 끝이었다. 나와는 상관없다고 여겨왔다. 블러 처리된 그림처럼, 그저 삶에서 멀리 떨어진 배경처럼, 아득한 지평선처럼 외면하고 살아왔던 듯하다.

대부분의 죽음은 마주하고 싶지 않은 순간일 터이다. 그 순간이 온다면 간절하게 타임머신을 떠올릴지 모를 일이다.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에게 만큼은 오지 않기를 바란다. 삶의 분명한 종착점은 나에게 도달하는 순간, 특별한 고유 명사로 변화하니까.

이 책에서는 죽음이라는 낱말이 가장 많이 등장한다. 작가는 죽음의 속성을 샅샅이 묘사한다. 죽음이 멀리 있지 않음을 경고한다. 이와 더불어 되살리지 않아도 좋을 죽음도 언급한다. 예컨대 마지막까지 바라보고 싶은 사람을 바라보다 맞는 죽음 같은 경우이다.

 

되살리지 않아도 좋을 죽음이라. 나에게도 다가올 죽음이 이런 모습이면 좋겠다. 후회 없는 지금으로 채운 삶, 영원한 오늘을 누려온 삶을 살아왔다면 미소 지으며 그 순간을 맞이할 수도 있으리라. 내 삶의 주인으로 살아온 삶이라면, 오늘 지금의 삶을 걸어간다면 가능할 수 있겠다.

사실 인간의 언어로 죽음을 적확하게 묘사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우리라. 죽음은 언제나 말보다 위에 있으니까. 갈팡질팡하는 말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아이러니한 건 죽음에 접근할수록 삶의 의미가 선명해진다는 거다. 빛을 건너 어둠을 향해 다가가듯.

소설 속 인물들의 삶은 갈등과 고통의 연속이다. 타인의 죽음에 개입하게 된 주인공 목화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서 깨닫는다. 중요한 건 따로 있음을, 운명에는 자신만의 몫이 있어 자신의 의지가 개입할 수 있음을. 그녀는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이끄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의 삶이 고유한 만큼 타인의 삶 역시 그렇다. 각기 특별한 삶은 관계로 얽힌다. 소설 속 가족, 연인, 사회적 관계에서 오가는 감정의 농도를 생각한다. 관계의 키는 옆으로 자라 상대의 심장을 향한다. 두 개의 심장에서 나오는 파동이 공명한다. 음악 같은 순간들이 켜켜이 쌓이면 감정은 짙어진다.

주인공 목화는 자신이 목숨을 구한 이들의 삶을 거울인 듯 지켜보며 자신의 삶을 바라본다. 자기가 자기를 구해야 함을, 누군가 대신 삶을 살아주는 게 아님을, 모두 자기만의 삶을 살아가니 상대의 삶이 어떤지 알 수 없으므로 쉽게 판단하지 말 것을 깨닫는다.

죽음에서 출발한 그녀의 결론은 삶이다. 저자의 결론이다. 삶은 죽음과 탄생 모두를 담는 그릇이라고. 둘이었다 하나가 된 나무처럼 나눌 수 없는 거라고. 죽음으로 둘러싸인 소설의 끄트머리가 삶을 향하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원하는 삶과 원하는 죽음은 동일한 의미를 품으니까.

 

구운 생선을 발라 먹는 장면을 떠올린다. 부드러운 속살과 따끔거리는 가시가 공존하는 음식 말이다. 맛있는 생선 살을 남김없이 먹으려면 어쩔 수 없이 자잘한 통증을 감내해야 한다. 세상에는 정반대의 요소가 공존한다. 저자가 말한 대로 삶이 고통이자 환희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 세포가 모여 보이는 생명체를 이룬다. 구름방울 백만 개는 빗방울 하나를 이루고, 빗방울들이 모이면 폭우가 쏟아진다. 인류의 관점에서는 보이지 않을지라도 단 한 사람은 분명히 존재 한다. 작가는 그 한 명에 초점을 맞춘다. 이렇게 당신의 삶을 바라보고 있다며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텔로미어는 염색체가 풀리는 현상을 막아준다. 유전정보를 지켜주는 울타리이면서 세포의 삶을 끝까지 바라보는 물질이다. 마지막이 있기에 과정은 의미롭다. 죽음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죽음이라는 한계가 있기에 삶이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뒤표지, ‘작가의 말에서, 1째줄: 기억하기 위해 사랑~

뒤표지, ‘작가의 말에서, 5째줄: 언젠가 언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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