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학교 - 제10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35
전성희 지음, 소윤경 그림 / 문학동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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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 가장 결정적이고 인상적인 거짓말은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1학년 때 엄마에게 한 거짓말이다. 

20점이었나? 30점이었나? 형편 없는 수학(당시 산수) 과목 점수를 감추기 위해

선생님이 빨간 펜으로 쓴 점수에 같은 색 연필로 덧쓰기를 해

점수를 조작한 것이었다.(부모님의 확인 서명을 받아가야 했기에

엄마를 실망 시킨다는 것은 정말 처절한 상황이라 믿었던 나에게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그런데 이 최초이자 최대의 시험이었던 거짓말은 완전한 실패로 끝난다. 방문을 닫고 공책을 몸으로 덮듯이하고 '점수조작'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불쑥 엄마가 방문을 열어젖힌 것이다.

"정은아, 방문 닫고 뭐 하니?"

10대 청소년이 방문을 닫고 들어가는 것은 흔한 일이겠으나,

여직까지 "싫어." "안돼."라는 말을 별로 해 본 적 없는

말 잘듣는 여덟살 맏이가 굳이 제 방의 문을 꼭 닫고 책상에 앉아 있는 건 분명 드문 일이었을 것이다.

엄마라는 존재의 육감이랄까, 촉이랄까. 아무튼 그것의 안테나는 정말 대단하다.

그런데 그보다 더 대단한 것은 나의 신체반응이었다.

나는 그순간 너무나 놀란 나머지 -이게 의지적으로 가능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코피가 말 그대로 펑 터져 버렸다.

 

엄마가 문을 열자마자 거의 0초의 반응으로 내 코에서 굵은 코피가 툭, 툭 털어졌다.

엄마는 너무나 놀라 거의 비명을 질렀다.

정작 엄마보다 놀란 건 나다.

엄마가 문을 열었기 때문에 코피가 터졌다... 단순히 이렇게 원인과 결과로 정리하기에는 초과학적인 현상 아닌가.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점수를 조직할 때 이미 너무나 두려움에 떨었고, 그만큼 혈압이 높아졌을 것이다. 빵빵하게 부푼 풍선처럼 내 온몸은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았고, 내 핏줄들은 얇아졌다.

그때 문이 활짝 열렸고,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절대로 들켜서는 안 되는 비밀이 천일하에 드러났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미 극도로 긴장할 대로 긴장한 내 몸은 흥분과 공포로 콧구멍의 가느다란 혈관에 몰려 터져 버린 것이다.

 

코피가 터진 것은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 있지만

그  이후의 일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아마 갑자기 터진 코피에 놀라 엄마가 물수건을 가져 오고, 코를 잡고 뒤로 목을 젖히고 -전에는 코피가 나면 머리를 뒤로 젖히도록 했다. 지금은 이것이 잘못된 대처법이라는 것이 널리 알려졌다.-

책상에 떨어진 피를 닦느라고 내 받아쓰기 노트가 엄마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나의 점수조작은 자연스레 은폐되었을 것이다.

 

충격적이었던 그 코피분출 사건이 거짓말과 관련된 마지막 기억은 아니다. 아마 이후에도 몇 가지 거짓말을 했다가 엄마에게 들통이 나 된통 혼이 났던 듯 하다. 그것은 아마 지금 나이에 돌아보면 아주 사소한 것들로, 왜 학교가 끝나고 제 시간에 집에 오지 않았는지, 거스름돈 남은 것이 왜 부족했는지, 양치질을 했는지 안 했는지에 관한 나의 진술이었다.

생사를 결정짓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지만 거짓말을 하는데 나는 별로 재능이 없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나는 여덟 살인가, 아홉 살인가 아무튼 아주 어린 나이에 인생의 첫 번째 깨달음이라 할 만한 진리를 알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거짓말은 매우 귀찮고 번잡하구나.'

거짓말을 한 결과가 처벌이나 응징, 난감하고 불쾌한 상황으로 이어져서 거짓말을 그만둔 것이 아니다.

거짓말을 한 가지 하면, 그와 관련된 다른 것들도 연달아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한번의 거짓말은 연쇄반응으로 다른 사실도 거짓으로 말해야만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린 나이에 얻은 깨달음치고는 꽤 심오하달 수도 있는데, 그것은 내가 철학적이거나 윤리적인 인간이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실용적인 선택이었을 뿐이다. 거짓말을 지어내는 게 매우 지적이고 집중력을 요구하는 고도의 "정신노동"인데 당장 유리하자고, 나를 변호하자고 거짓말을 하면 그 일과 관련해서 끊임없이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았다는 것 뿐이다.

나는 게으르니까.

귀찮은 건 싫으니까.

단지 그거였다.

그래서 그뒤로 나는 거짓말을 거의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니, 그보다는 나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거짓말을 하지는 말자....라는 결심을 했다고 하는 편이 자연스러운 것 같다. (사람은 때로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기도 하니까. 심지어 자기가 한 말, 자기 생각에 자기가 속는 줄도 모른 채.) 

물론 내가 생각하는 거짓말이 일반적인 거짓말의 범주와 같은지, 그건 자신이 없다. 나는 거짓말을 아주아주 자의적으로 정의하니까. 별로 어울리지 않은 새옷을 자랑하는 친구에게 "잘 어울려." 하거나, 상대를 격려하기 위해 마음에 없는 빈 말로 긍정적인 멘트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화이트라이 white lie 류의 거짓말은, 나는 거짓말로 치지 않는다.

사기꾼들이 다른 사람을 등치거나, 믿음을 배신하며 속이는 언동, 행위, 몸짓... 그런 것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범죄행위에 가까운 그런 거짓말, 나 한몸 살자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내뱉는 거짓말... 그런 거짓말에는 독이 있다.

단지 허공으로 흩어지는 말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의심과 절망으로 서서히 죽게 만드는 독.거짓말은 사람들을 이간질하고 서로를 적으로 등돌리게 하는 어둡고 침울한 효능이 있다.

특히 정치인들의 거짓말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철퇴를 내리고, 살고자 하는 의지를 꺾을 정도로 독하다.

-이 책 156쪽에 나온 정치인의 거짓말 7단계는, 언제든 정치인이 연루된 사건에 적용해 보면 딱딱 들어맞을 만큼

절묘하다.-

 

"거짓말 학교"는 국가적인 규모로 거짓말 전문가를 영재로 기르는 학교가 있다는 작가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거짓말을 일삼고 무책임하게 권력을 휘두르는 특권층을 보노라면, 거짓말 학교가 온전히 상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든다. 아니면, 이 책에서처럼 누구나 입학하기를 꿈꾸는 명문대나 특목고나 자사고가

실제로는 거짓말을 능수능란하게 잘하고 개인의 영달을 위한 처세를 가르쳐서 배출하는 것이거나.

이야기는 신입생 인애와 나영이가 번갈아 1인칭 화자로 장을 바꾸며 이어간다.

인애가 친구라고 믿은 나영이, 그 누구도 믿지 않고 겉으로만 친한 척 나영이를 이용하는 인애.

이 둘의 사이는 위태롭다.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 인애도, 딱 한 사람 진실학 선생님만은 믿고 따른다.

그러나 책의 끝에 이르러 진실학 선생님마저 인애를 뒤흔들어 놓는다.

진실학 선생님이 인애를 속인 것인지, 억울하게 누명을 쓴 것인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인애는 선생님을 끝까지 믿고 싶지만 상황은 정반대로 흐른다.

그보다 더 딱한 것은 따로 있다. 인애는 이것을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진다.

이제까지 인애는 스스로 거짓말을 무기로 학교에서 '승리자' '강자'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인애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없었고,

반대로 타인(여태까지 잘 속여 온 인애)도 자기를 믿지 않게 되었다.

거짓말로 상대를 속이며 잠깐 잠깐 이득을 취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삶의 방식이 될 수 없음을

무섭게 깨달은 것이다.

왜? 이에 대한 답을 3단논법 비스무레한 형식으로 풀자면 이렇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사람은 거짓말을 반복하는 사람을 돕지 않는다.

그러므로 꾸준히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고, 결국 살 수 없다.

 

인애가 받은 충격은 고스란히 독자들에게 전해지며 이 책의 뒷심이 된다.

이참에 나도 '거짓학'을 들입다 연구해서 세상을 움직이고 가두는 거짓된 힘을 낱낱이 밝혀 볼까?

혹은 진실이 가진 긍정의 힘, 희망의 파워를 연구하는 진실학을 전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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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 세상을 뒤바꾼 위대한 심리실험 10장면
로렌 슬레이터 지음, 조증열 옮김 / 에코의서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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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주관적으로 즉, 내 마음대로 심리학을 정의해 보자면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인간의 변덕스런 이 '마음', 그리고 그 마음이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이해하고자 하는 갖가지 노력이다.

이때 "노력"이라 함은 '학문적인 방식'이란 학계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으로 실험하고 검증되어야 한다.

 

철학이나 그밖의 인문학도 어쩌면 나의 이런 애매모호한 정의에 해당될 수 있겠다. 그러나 '마음'과 '행동'에 방점을 찍는다면 심리학

이 걸어왔고, 지금 이순간 심리학자라는 사람들이 하고 있는 일들과 멀리 동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다.

마음에 대한 관심이야 소크라테스&아리스토텔레스 커플까지 거슬러 가지만 심리학의 공식적인 출발은 대체로 1879년 빌헬름 분트가 라이프치히 대학에 심리학 연구실을 세운 것으로 본다.

엄밀하게 말해 심리학자...는 아니고 생리학을 전공한 의사였던 프로이트는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심리학자다.

프로이트가 히스테리 증상으로 자신을 찾아온 환자들을 면담하고 사례를 분석한 것에 기초한 정신분석학은 심리학을 넘어, 사회과학, 예술, 문화 분야까지 대단한 영향력을 미쳤다.

학문이라는 것도 유행, 조류, 요즘 말로 하면 '트렌드'라는 것이 있어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굉장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정신분석학은 맑시즘과 함께 20세기 말엽에 등장한 혁명적 이론으로 꼽힌다.

그러나 심리학에서 새로운 전기가 찾아오는데 그것은 '행동주의'의 등장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본 파플로프의 침 흘리는 개 실험이 그것이다.

'조건이 주어지면 반사적 행동이 나타난다'는 기본적 원리가 행동주의의 핵심이다. 미국인이었던 스키너의 실험과 이론은 인간이 A와 B중 어떤 행동을 하느냐는 보상에 따라 유도, 강화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미국에서 스키너의 영향력은 대단해서 육아, 교육에도 영향을 많이 끼쳤다. (우리가 받는, 혹은 믿고 있는 육아-양육-훈육... 나아가 교육의 원칙, 이론들 중 심리학과 무관한 것은 없다.)

 

행동주의의 영향으로 실험과 데이터로 인간의 행동을 조사하고 예측하고, 이론을 만들던 실험실의 심리학은 21세기에 이르러 다양하게 갈라지고 진화했다. 인지심리학이나 신경심리학은 뇌과학 발달과 영상기계가 발달한 덕에 마음, 그러니까 뇌의 기능-작용과 연관지어 마음을 이해하려 한다. 또는 대중심리학, 사회심리학, 문화심리학, 교육심리학, 광고심리학, 상담심리학 등... 심리학을 응용하는 것에 더 관심을 갖는 방향으로도 전개된다.

 

청소년들과 심리학 책을 함께 읽고 싶었던 것은,

심리학이 이제까지 밝혀 낸 인간 행동의 원리를

공유하고 싶은 게 첫째 이유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고, 어디서나 사람들과 어울려 교류하며

살아야 하는 숙명을 타고 났다.

그런데 함께 사는 것은 일반적으로 생존에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그만큼 스트레스도 크다.

'저 사람은 왜 저럴까?' 

'왜 내 마음을 몰라 줄까?'

모든 사람이 내 마음과 같다면, 싶지만 그러기는 쉽지 않다.

내가 남을 이해해야 하고, 나도 남을 적극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인류는 말이라는 수단을 가진 거지만.

심리학을 배우고 이해한다면 어울려 살기에 큰 보탬이 될 것이라 믿는다. 모두가 평등하고 행복한 공동체를 만들고 싶다면 더더욱 심리학이 필요하다.

 

두 번째는

첫 번째 이유와 상충될 수도 있다.

심리학의 발전사를 읽다 보면

인간이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절감한다. 

심리학자가 평생을 바쳐 하나의 이론을 입증하려 해도

그렇게 알아낸 사실이 다른 사람의 눈에는 너무나 빈약하게 보인다. 심리학이라는 단순한 잣대로 인간이라는 존재를 밝히려 한다는 게 애초에 너무나 오만하고 불순한 시도였나, 라는 회의감이 들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스스로를 알기 위해 노력해 왔고

자신을 알고 이해하려는 노력하는 과정에 쏟는 열정과 에너지가 너무나 순수하여 숭고한 느낌마저 든다.

학자에게 닿을 수 없는 절대적인 지식이 이데알(ideal)이라면, 도달할 수 없음을 알지만 이데알에 도달하고자 끊임없이 손을 뻗는 노력 자체가 인생이고 빛이 아닐지.

 

세 번째, 청소년들이 심리학을 도구로 나를 비추고 스스로 힐링하는 있는 힘을 갖게 되면 좋겠다.

우리 사회는, 인간이 본능적으로 자족적이고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환경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 너무나 풍족한 한편에 극도의 빈곤이 공존하고, 온화하고 친절하고 평화로운 듯 보이는 속에 폭력과 억압의 힘이 팽팽하게 버티고 있다. 계급이 없다고 하지만 분명 투명한 계급층이 유리천장으로 존재한다.

안온하고 위생적인 인큐베이터 칸막이 같은 세계인 셈이다.

우리는 칸막이 너머를 볼 수 없고, 왜 우리가 칸막이 안에 있는지 질문할 수 없고 나의 주먹이 칸막이를 깨뜨릴 수 있는지 자기에게 묻지 않는다.

사람들끼리 연대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는 점점 줄어든다. 거칠고 황폐한 마음을 감추고 서로 친절하고 웃는 낯으로 대하기 위해

모두가 감정노동을 강요 받고 있다.

심리학이 미약하지만 내가 나를 위로하고 마음의 힘을 얻게 하는 비타민이 되면 좋겠다. 더욱 튼튼하고 건강해져서 다른 사람의 마음까지 돌볼 수 있다면 더더욱 좋고.

 

 

그런 의미에서 이번 주 주제도서 <토요일의 심리클럽>은, 청소년독자들이 심리학을 재미나게 맛볼 수 있는 책이라 생각한다.

앞서 간략하게 정리한 심리학 발달사에 관심이 있다면, 심리학자들을 연대기순으로 소개한 책 <그림으로 이해하는 심리학>을 권한다. 얇고 간단하며 쉽게 쓰여졌다는 점에서 아주 훌륭하다.

몇해 전 심리학도서 열풍에서 -열풍 가운데 내용 없는 쭉정이들도 많기는 했지만-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던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도 강추한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저자가 심리학사에 큰 성취를 남긴 심리학 이론들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으로서 그 학자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는 이야기가 에세이로 읽어도 손색이 없다. 학자이기 이전에 인간인 작가의 따뜻함이 묻어나서 정말 좋아하는 책이다.

마지막으로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권한다.

저자인 올리버 색스는 정신과 의사이며 이 책에는 그가 만난 아주 '특별한' 환자들 이야기가 담겨 있다. 물론 정신병동의 환자들이다.

정신병을 아주 괴상하고 낯선 것으로 꺼리고 차별하기 쉽다.그러나 의사의 눈으로 그들이 앓는 질병이 그들의 삶, 하루하루의 생활을 어떻게 지배하고 영향을 주는지 따라가다 보면 때로 마음이 아프고, 때로 감탄도 하게 된다.

이 책을 덮을 때 인간으로 '정상적'이라는 게 대체 뭘까? 하는 질문이 떠올랐다. 

질병은 결국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어떤 상황이고 그 어려움을 어떻게 이겨낼지, 혹은 품고 살아갈지 결정해야만 한다. 결함이나 불운이라 여겨지는 그것조차 내 인생 속에 녹아들고 그 상처가 곧 내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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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조건 - 꽃게잡이 배에서 돼지 농장까지, 대한민국 워킹 푸어 잔혹사
한승태 지음 / 시대의창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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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 소감을 덧붙이는 것이 그저 사족이 될 것 같아

말을 아끼고 싶지만,

이 책을 소개하지 않고 알리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죄'가 될 것만 같다.

내가 국적을 담은 이 사회의 민낯을

이렇게 고통스러울 정도로 적나라하게, 시니컬하게,

정확하게 묘사한 책은 처음이다.

그저 이념적으로 호기롭게 이즘을 설명하거나,

당위성을 내세워 노동문제나 인권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책은 많다.

그러나 이렇게 생생하게 노동의 밑바닥에서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가운데에서도

인간이고자 하는 한 정신이 이렇게 기록한 책은 보지 못했다.

조지 오웰이 1936년 탄광노동자가 처한 처절한 환경을 고발하기 위해 "위건부두로 가는 길"이라는 르포를 썼다지.

그러나 한승태가 이 책을 쓴 것은 작가로서의 그런 식의 일종의 '위장취업'이 아니었다. 아산의 돼지농장에서, 당진의 자동차부품 조립조에서, 진도의 꽃게잡이 배를 전전해야만 하는 자기 이야기를 털어 진솔하게 이 원고를 만들어 낸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서슴없이 2014년 올해의 책으로 꼽겠다)

 

고통스럽지만 나는 이 책을 끝까지 읽어야 했다.

나의 위선과 가식, 나아가 내가 발딛고 사는 사회의 위선과 가식을

직시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고통만 따랐던 것은 아니다. 작가의 시니컬한 유머감각은 지금 유럽과 영미권, 우리나라까지 베스트셀러를 보장하는 알랭 드 보통을 뺨칠 만큼 매력적이었다.

마지막 장 '퀴닝 Quenning'을 덮으며

한승태가 거쳐 온 그 참혹한 현장과 그가 만난 "과소평가 된" 성실한 노동자들이 모두 건강하게 살아 있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그들이 목숨을 부지하면서도, 미래를 꿈꿀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이윤만 짜내고 사람을 돼지 똥보다 하찮게 여기는 세상의 룰부터 달라져야겠지. 그 어떤 노동이라도 사람이 행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모든 노동, 노동자는 존중받아야 한다. 푸대접받고 모욕을 당해도 되는 노동은 없다.

덧붙여 진정 한승태 작가가 이 책에 묘사된 그 험난한 노동의 끝 혹은 와중에 '작가'로서 전업할 수 있기를 바란다. 어떤 장르라도 그가 쓴다면 정말 대단한 책이 나올 거라는 예감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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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사냥꾼의 죽음 클리프 제인웨이 시리즈 1
존 더닝 지음, 이원열 옮김 / 곰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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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왜 '죽음' 책만 봐?"

아홉 살인 둘째가 묻는다.

그러고 보니 아이 말이 일리가 있다.

"책 사냥꾼의 죽음"을 며칠 째 보고 있다.

직전에 다 본 책은, 프랑스의 주목 받는 신인 프랑크 틸리에의 데뷰작 "죽은 자들의 방"이었다.

 

여름이면 자연스레 추리물과 스릴러에 손이 간다.

이런 책들은 특히 가독성이 높아서 일단 책을 쥐면

밥 하는 것도 미루고, 빨래도, 청소도 뒷전으로 하고,

심지어 텔레비전 예능프로그램도 마다 하고 이야기에 빨려 들어간다.

죽음, 죽은 자...

아이에게는 공포감이 느껴지는 위협적인 제목인 모양이다.

(엄마가 그런 책만 들여다보고 하루종일 자기를 방치하는 게,

아이한테는 더 공포스러울 수도 있겠다.)

 

중고서점에서 이 책을 집어들 때는 '책 사냥꾼'이라는 제목에 끌렸는데

원제를 알고 나니 더 흥미롭다.   

Booked to die.

원래 문장은 '죽음이 예약되다'로 옮겨야겠지만 '책 때문에 죽다'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책의 후속작인 주인공 클리프 제인웨이 시리즈 2탄 '책 사냥꾼의 흔적'도

원제가 the Bookman's wake다. 전업작가 생활을 중단하고 고서적, 희귀서적 전문서점을 운영할 정도의 열정적인 북맨 존 더닝다운 작명이다. 

 

이 책이 전형적인 형사물이라거나 추리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주인공 클리프가 매혹적인 (전직)형사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사건 전개나 해결보다는 심리적인 전개에 치중하고 있으며 책 세계와 그와 관련된 인간들(북스카우트, 북맨, 북딜러... 등)을 소개하는 데 지면을 더 많이 할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소설이 꼭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매혹적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숨 막히는 긴장, 심장을 쫄깃하게 만드는 공포를 기대한다면 그리 권할 만한 책은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통해, 책을 사랑하는 또 다른 방식에 대해 알게 되었다.

어쩌면 그러한 점 때문에 이 책은 나에게 소설(픽션)이 아니라 지식정보책(논픽션)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현대문학 거장들의 초판본에 목숨을 걸고, 면지에 저자의 서명이 들어 있는 책을 보물로 여기며 그것을 사냥하기 위해 거리를 누비는 북헌터들이 있다는 것은 정말 충격이었다.

나도 이따금 신촌의 '숨어 있는 책'이나 신림동의 '흙서점', 그도 아니면 아주 세련되고 깔끔한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헌책들을 거침없이 사 들인다. 그러나 내가 그 책을 사는 것은 알라딘에서 책을 주문하거나 서점에서 새 책을 사는 것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그저 '소비'이자 '구매'일 뿐이다. 물론 헌책방에서 책을 고르는 것은 예기치 않은 보물을 발견한다는 느낌을 분명히 받지만, 그 가치는 철저히 개인적인 것이다. 유통되거나 재물로 교환될 수 있는 가치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 책에 따르면 북스카우트들과 북맨들은 책의 '화폐적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되팔기 위해 투자한다. 한마디로 골동품 소집과 비슷한 것이다.

그들은 "쓰레기 더미"에서 "보석"을 찾는 마음으로 창고를 뒤지거나 헌책방을 탐험한다.

 

정말 이런 책시장이 형성되어 있다는 게 내게는 전혀 현실감이 없다.

그렇지만 되돌아 생각해 보면 이탈리아나 영국에 갔을 때, 그리고 맨하튼에 갔을 때도 헌책방을 들르거나 지나치기는 했다. 어차피 외국어인지라 나는 그저 어린이책이나 그림책 정도만 뒤졌을 뿐이지만 그 헌책방들에는 공통적으로 카운터 뒤쪽에 열쇠가 달린 유리장식장이 따로 있었다. 그안에 따로 고이 모셔진 책들이 어쩌면 이 작품에 나오는 희귀본이었을지도 모른다.

나같은 뜨내기 외국인 관광객이 범접할 수 없는 어떤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고, 가게 주인들은 왕궁의 수문장처럼 그 장식장을 지키는 인상을 받았다.

 

책을 사랑하는 또 다른 방식이 있다는 것은 꽤 충격적이다.

미국에는 그런 시장이 분명히 있을지 모르지만 나한테는 너무 낯설다.

나는 책을 사랑하고, 그런 까닭으로 책 언저리를 서성이는 일을 하고 있지만

물체로서의 책을 숭배하거나 그것을 통해 큰 돈을 번다는 것이 어쩐지 꺼림칙하다.

집 가까이에 있는 공공도서관이 내가 가진 책들을 모두 보유하고 있으며,

또 그것을 언제든 손쉽게 대출할 수 있다면 사실 지금 우리 집의 하중을 쓸데없이 높이는

이 책더미와 책장들을 당장 치워 버릴 것이다.

 

책에 대한 견해가 나와 다르기는 해도,

이토록 책에 집착하고 목숨을 거는 인간들이 이 세상에 있다는 건

흐뭇하다. 찌뿌둥한 아침을 깨우는 진한 커피 한 잔처럼 아주아주 큰 위안이 된다.

 

p.s. 며칠전 알라딘종로점에 갔을 때 추리소설 코너에서 이 책과 함께 레이먼드 챈들러의 "빅슬립"을 샀다. 챈들러가 탄생 시킨 하드보일드 탐정 '필립 말로'의 영향력은 엄청 나서 이후 탐정소설 캐릭터는 심하게 말하면 필립 말로의 변형이거나 오마주,라고 책 소개에 나와 있다.

뒷표지에는 "레이먼드 챈들러는 나의 영웅이었다"라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이 굵고 붉은 글씨로 인용되어 있다.

앞의 몇 챕터를 읽었는데 계속 읽고 싶은 마음이 일지 않는다. 묘사가 과하다. 그 묘사가 보여주는 풍경을 마음 속에 제대로 그릴 수 없다. 묘사를 건너뛰고 읽자니 묘사를 버린 나머지 문단은 너무 앙상하다.  아무래도 나는 비열한 캘리포니아 거리를 누비는 바바리 차림의 필립 말로를 만날 일이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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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스노우맨 해리 홀레 시리즈 7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4년 5월
평점 :
판매중지


몇 해 전부터 여름이면 자연스럽게 추리소설, 공포 장르 쪽으로 자연스레 손이 간다. 처음 공포물에 눈 뜨게 한 것은 일본 작가들 덕분이다.

스티븐 킹이 아무리 세계적인 스릴러 작가라 해도 문화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인지 머리끝이 쭈뼛 서는 그런 경험은 많지 않았다.

공포란 매우 원초적 감정이기 때문에

문화권을 초월하여 어느 나라 독자든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 공포를 느끼게 하는 상황이라는 것은 매우 미묘하고 세심하게 설계되어야 하고 그 공포의 실체로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공포감의 크기는 달라진다. 문화역사적 경험이나 영적 DNA의 차이가 공포, 스릴러에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다.

일례로 우리는 미국의 총기살해나 연쇄살인범 사건을 모티브로 영화에 그다지 몰입하지 못한다. 13일의 금요일이나 스크림 시리즈를 보며 무섭기는 해도, 어릴적 TV에서 본 전설의 고향이나 링 시리즈만큼 한참동안 화장실에 혼자 가지 못하는 후유증을 겪지는 않는다. 

반대로 서양인들은 귀신이나 원한에 사로잡힌 영적 존재가 복수를 한다는 설정에 갸우뚱한다. 

 

내가 근래 읽은 추리소설도 대개 일본작가, 드물게 한국작가의 작품들이다.  

기시 유스케는 공감능력이 없는 비정한 살인마, 싸이코패스에 집중하는 작가로 '검은집' '악의 교전' 등으로 한국에서 비교적 짧은 시간에 두터운 팬층을 만들었다.

'추리작가'라고 분류하기는 좀 편협한, 그만큼 장르를 가리지 않고 대담하고 두터운 작품을 쓰는 미야베 미유키 작가의 '낙원' '모방범', 그리고 그녀가 사랑하는 에도시대의 음산하고 신비한 '미야베 월드' 시리즈 물 등도 한여름에 만나기 좋은 작품이다.

현직 의사이면서 정력적으로 메디컬스릴러를 쏟아내는 작가 가이도 다케루 책은 어느 것부터 시작해도 후회없을 것이다. 손에 잡는 순간 결말이 궁금해서 어떻게든 끝까지 읽게 만드는 이야기의 힘과 속도는 웬만한 미드 뺨친다.

한국에서 다시 태어난 셜록홈즈 '설홍주'의 활약이 눈부신 <경성탐정록>도 강추.

 

2014년 올해 읽는 스릴러는 3권.

프랑스 작가 프랑크 틸리에의 <현기증> <죽은자들의 방>과

노르웨이의 요네스 뵈 <스노우 맨>.

신간소개에서 정보를 접하고 서점에서 우연히 만나 읽게 된 <현기증>. 충격적인 설정과 숨막히는 진행으로 끝까지 긴장을 놓지 않게 하는 탁월한 솜씨에 진심으로 박수를 쳤다.

그의 전작들을 찾아읽으리라 마음 먹고 데뷰작 <죽은 자들의 방>을 보았다. 현기증과 죽은 자들의 방은 완성도의 격차가 너무 커서 조금 놀랐다. 다니던 IT 회사를 때려 치우고 전업작가로 몰입한 결과가 이토록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냐.

(그러하다면 언제나 작가가 본업이었던 나는 왜 급성장하지 못하고 늘 제자리란 말이냐. 출판사의 지원과 편집자의 열렬한 후원이 없어서일까? 뭐지? 뭐지?)

요네스 뵈는 책광고로 많이 노출되어, 언젠가 한번은 읽어야지... 하면서도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작품이었다. 청소년기에 <권장도서 목록>에 있는 클래식들이 읽어 보기도 전에 식상한 느낌이 드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역시 책은 내가 읽고 나서야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책에 대한 인상, 선입견, 명망가가 쓴 서평... 이런 것은 참고는 배심원에 불과하다. 책과 만나는 것은 나이고 책이 펼쳐 놓은 세계 속에서 배회하고 상상하고 경험하는 것은 나다.

<스노우맨> 한 권을 읽고 나니 요네스 뵈는 이름과 인기에 값하는 작가가 맞다,는 게 내 생각이다.

홀레 형사가 주인공인 시리즈물을 앞뒤로 다 읽고 싶어졌다.

190센티에 깡마르고 못생겼다고 묘사된 고독한 알콜중독자 홀레형사는 분명 작가 자신이 다분히 투영되었을 것이다. 작품도 그렇거니, 책날개의 작가이력만 읽어도 그렇고... 아주 매력적인 작가다.

한국에서 찍은 인터뷰 동영상을 보니 역시 '뭔가' 있다.

 

매력이라는 건 사람의 '깊이'와도 관계가 있다.

매력있는 작품을 생산하는 작가는

매력적인 사람일 확률이 매우 높다.

깊이 있는 사람일 확률도 매우매우 높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254&contents_id=53625&leafId=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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