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에 실은 '언어의 경계에서' 칼럼을 옮겨놓는다. 강의에서 읽은 김에 알퐁스 도데의 장편 <사포>(예문)에 대해서 적었다. 그간에 단편만 소개된 작가인데, 장편도 더 소개되면 좋겠다...

















한겨레(20. 01. 31) ‘시적 선택’ 앞에서 ‘산문적 진실’을 택하다


프랑스 작가 알퐁스 도데는 우리에게 ‘별’이나 ‘마지막 수업’ 등의 단편으로 친숙하다. 한동안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작품들이어서 한국 독자들에게는 가장 유명한 19세기 프랑스작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시대 작가로 더 중요한 문학사적 의의를 갖는 에밀 졸라의 작품을 우리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 비교해 보아도 도데의 인지도는 예외적이다. 그렇지만 그런 명성의 이면도 없지 않다. 그는 적잖은 장편소설을 남겼다. 졸라와 모파상 등과 함께 자연주의 작가로 분류되는 그의 장편들이 과연 단편들에 견주어 여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가. 현재로선 유일하게 번역된 장편 <사포>(1884)를 손에 들며 던지는 질문이다.



제목의 ‘사포’는 그리스의 여성시인 사포를 가리키는데 소설에서는 여주인공 파니의 별명이다. 사포의 조각상 모델이 되면서 파니는 사포라고도 불린다. 주정뱅이 마차꾼의 딸인 파니는 남의 손에 자라다가 열일곱 살에 조각가 카우달의 눈에 띄어 모델이 되고 동거녀가 된다. 그런 그녀를 시인 라구르너리가 달콤한 시로 유혹하고 파니는 새로운 동거생활에 들어간다. 그렇지만 그 또한 삼년 만에 종지부를 찍게 되고 그녀는 또 다른 예술가의 손에 넘어간다. 파니의 남성편력은 그런 식으로 이십년 가까이 이어지는데, 그러다가 한 가면무도회에서 장 고셍과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이 소설의 서두이다. 파니는 무엇보다도 장의 젊음에 반한다.


스물한 살의 미남 청년 장은, 파니를 뮤즈로 희롱하거나 숭배한 예술가나 부르주아들이 갖고 있지 않은 아름다움을 지녔다. “스물한 살의 나이와 단지 사랑한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는 단순함, 그게 바로 아름다움”이라는 게 파니의 생각이다. 열다섯 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열정적인 사랑에 빠지고 동거에 들어간다. 하지만 곧 두 가지 장애에 부딪힌다. 하나는 파니의 과거이고 다른 하나는 두 사람의 계급차다. 남부 프로방스 출신으로 파리 사교계에 익숙하지 않았던 장은 파니의 남성편력을 알게 되면서 당혹감을 느낀다. 파니가 내뱉는 저속한 말들도 불편하게 생각한다. 장은 지주 집안의 장남으로 외교관이 되기 위해 파리에 상경했으며 시험에 합격한 뒤 연수기간 동안만 한시적으로 파니와 동거하리라 생각한다. 사회통념상 하층계급 출신의 ‘매춘부’ 파니는 동거 상대는 될지언정 배우자는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파니와의 관계에 염증을 느끼던 장이 이렌느라는 젊은 처녀를 사랑하게 되면서 둘의 관계는 파국에 이르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 두 사람은 서로를 “더러운 부르주아!” “화냥년!”이라고 부르면서 감정의 밑바닥까지 내보인 상태였다. 비록 파니는 마지막 순간까지 장과의 이별을 아쉬워하지만 장에게 다른 선택이 없다는 것도 이해한다. 그렇게 파니를 떠난 장이 이렌느와 결혼하고 자신의 사회적 위치로 복귀하면서 끝난다면 자연스런 소설의 결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도데는 방향을 튼다. 파니가 사랑했던 가난한 조각가 플라망이 위조수표 발행 혐의로 구속됐다가 풀려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장은 질투심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금 파니를 찾아간다. 이 선택의 결과로 장은 이렌느와의 파혼과 아버지와의 의절을 대가로 지불한다. 그는 다만 외교관으로 파니와 함께 페루로 가려고 한다. ‘시적 선택’이라고 할 만한데 마지막 순간 파니는 자신이 그런 선택에 동참하기엔 더 이상 젊지 않다는 이유로 장을 거부한다. 도데의 <사포>가 보여주는 것은 이렇듯 엇갈리는 시적 진실과 산문적 진실의 조우이다.


20. 0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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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벤야민의 이름'을 읽기 위하여

14년 전에 쓴 글이다. 벤야민이나 데리다의 글을 한창 읽을 때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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