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저의 도시는 따로 없겠지
발저는 산책가였으니
파리의 산책가 보들레르를 뺨칠
아니 따귀를 후려칠
산책가였으니
발저는 생의 마지막날까지
산책에 나섰던 거지
눈이 내리는 성탄절 아침에도
발저는 눈길을 꾹꾹 밟으며
걸음을 옮기는 일을
마치 성탄의식처럼
행했던 거지
눈덮인 산언덕에 이르러
마지막 열두 걸음을 옮기고
발저는 이제
생에서 손을 놓았지
지상에 남겨둔 두 켤레 같은
마지막 두 걸음 더
그러고는 누웠네
다 이룬 것처럼 누웠네
대자로 누웠네
그 바람에 모자가 날려
발저의 영혼길을 안내했다네
하늘에는 발저의 자리가 있을까
분명 정신요양원은 없을 테지
그래도 필시
발저는 산책을 멈출 수 없을 거야
경력 단절은 없을 거야
산책길 대화도 이어지겠지
연필로 쓴 작은 글씨도
다시 이어졌으면
그게 발저니까
로베르트 발저
눈길에 꾹꾹 새겨진
이름 로베르트
발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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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의 베른은 인구 14만의 도시(스위스에서 다섯번째라 한다). 도시의 아름다운 전경은 베른을 빠져나오는 언덕길에 오르고서 볼 수 있었다. 어제의 핵심일정이었던 로베르트 발저센터 방문을 마친 뒤에. 느긋하게 몽트뢰를 떠나 버스로 베른에 도착한 것은 12시가 되기 전이었다. 치즈퐁듀를 에피타이저로 한 점심을 마치고 짧게 구시가를 둘러본 뒤(아인슈타인하우스가 있었다. 내부로는 들어가지 않았는데 1903년-05년에 아인슈타인 가족이 살았다는 집이다) 예정시간에 맞추어 역시 구시가에 있는 발저센터를 찾았다.

발저센터는 건물 2층에 위치한 곳으로 연구소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발저의 사진들이 벽에 걸려있고 관련 유품들도 진열장에 전시돼 있었지만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발저의 책과 연구서, 번역서 때문에 ‘연구센터‘라고 해도 어울렸다. 회의나 세미나, 개인 연구자의 방문 등은 있었겠지만 단체관광객의 방문은 처음 받는 눈치였다. 우리는 담당자로부터 발저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를 듣고 질의응답시간을 가졌다. 발저를 전공한 담당자는 한국어 번역본들을 미리 테이블에 준비해놓고 있을 정도로 손님맞이에 진심이었다.

센터의 한쪽방 벽은 발저가 생을 마친 헤리자우 요양원 근방을 파노라마 사진으로 보여주었고 후견인 카를 젤리히의 책을 근거(<발저와의 산책>)로 만들어진 모형 지형도도 전시돼 있었다. 아직 한국어판은 나오지 않은 책인데(평전을 포함해 긴급하게 번역돼야 하는 책들이 있다), 가장 최근에 나왔다는 일어판이 눈길을 끌었다.

질의응답까지 1시간 반쯤 시간을 보내고 일행은 센터에서 판매하는 책들과 굿즈들을 구입했다. 내용만 보면 문학기행이라기보다는 학술기행 일정이었다. 발저센터 방문을 마치고 우리는 다시 버스에 올랐다. 50분쯤 떨어진 튠시에서 일박하기 위해서였다. 이름이 생소한 튠은 인구 4만3천의 도시로 성(튠성)과 호수(튠호수)가 유명하다(중세에는요새도시였다고). 튠호수의 물이 아레강으로 흐르고 유람선도 운항한다.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본 튠호의 야경이 아름다웠다. 내일(그러니까 오늘) 날이 밝으면, 날이 밝기 전에 우리는 인터라켄으로 향하게 된다. 융프라우 등정의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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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자유시간으로 보내고(나는 팰리스 호텔을 다시 찾아 로비 등 내부를 둘러보았다) 베른으로 가는 중이다. 아침산책의 끝은 숙소 근처의 서점 방문이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소규모 서점치고는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주로 불어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있었다.

고전과 문학 코너를 훑어보았는데, 러시이문학가로는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의 책들이 보였다(비프랑스어권 작가로는 코엘료와 하루키가 눈에 띄었다. 한강의 책들은 품절이었다). 나보코프 때문에 방문한 몽트뢰였기에 나보코프의 책을 찾으니 폴리오판 <롤리타> 한권이 꽂혀있었다. 독서용이 아니라 소장용으로 구입.

몽트뢰에 따로 나보코프기념관이 있는 게 아니니 기념품도 따로 있을 리 없다. ‘나의 롤리타‘가 기념품을 대신했다. 서점에서 나오니 예정보다 일찍 출발준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사진으로 담아두긴 했지만 몽트뢰와의 작별시간도 없이 급하게 출발. 언젠가 다시 찾을 일이 있을까 싶지만, 만약에 다시 찾는다면 나보코프가 묵었던 방을 구경해보면 좋겠다(공개되지 않는 스위트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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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의 시간은 이른 새벽이다. 날이 밝으면 문학기행 5일차가 시작된다. 중반을 지나게 되는 것. 아침산책을 하고서 느즈막히 출발해서 점심은 베른에서 먹게 될 예정이다. 알려진 대로 베른은 스위스의 수도. ‘사실상 수도‘라는 표현을 쓰던데, 작은 나라이긴 해도 스위스는 자치주들의 연방국가라 수도의 의미가 우리와는 좀 다르다(같은 연방국가로 미합중국과 비교해볼 수 있겠다. 크기의 차이를 무시한다면 연방국가의 좋은 사례와 미심쩍은 사례).

문학기행에서 베른을 찾으려는 것은 스위스 작가 로베르트 발저 때문이다. 우리한테도 여러 작품이 번역소개돼 열성 독자층을 갖고 있는 작가. 발저의 작품, 특히 <벤야멘타 하인학교>(야콥 폰 군턴)를 강의에서 다룬 뒤엔 탐구작가의 목록에 올라가 있다. 베른에는 로베르트발저 센터가 있고 오늘 오후에 방문할 예정이다. 문학기행에서 오늘은 로베르트 발저 데이. 일정이 마무리되면 튠으로 이동하여 일박하고 내일 융프라우 등정을 준비한다.

오늘 일정에 대한 사전 점검이었고, 어제 찾은 시옹성과 레만호 사진, 팰리스호텔의 야경사진 등을 기록으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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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로는 어제 오후 몽트뢰에 도착해서 문학기행 4일차 일정에 들어갔다. 몽트뢰는 루가노호를 끼고 있던 루가노와 마찬가지로 레반호를 끼고 있는 호반도시(내가 도시 비교의 척도로 쓰는 인구를 검색해보니 루가노가 6만2천, 몽트뢰가 2만6천이다). 레만호는 꽤 큰 호수여서 스위스의 여러 도시를 거느리고 있는데 제네바와 로잔도 몽트뢰와 마찬가지로 레만호의 도시다.

몽트뢰를 다른 두 도시와 차별화시겨주는 게 있다면 시옹성(바이런의 서사시 ‘시옹성의 죄수‘ 덕에 유명해졌다는데 스위스에서는 해마다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는 관광 명소다). 우리의 첫 일정도 시옹성 투어였다(불어 발음에 따라 쉬용성으로도 표기). 레만호변의 이탈리아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숙소에 들러 짐을 내려놓은 뒤 다시 버스로 이동하여 시옹성에 닿았다. 레만호 가장자리 암반 위에 세워진 중세성으로 사진으로 많이 봐서 친숙한 외관이었다. 성 내부의 여러 방을 둘러보고 기념품을 구입하고 기념사진들을 찍었다.

그러고는 나보코프 투어로. 미국을 떠나 스위스로 이주한 나보코프가 여생을 보낸 팰리스 호텔이 몽트뢰에 위치하고 있다. 호숫가의 산책로 따라가다가 도로쪽으로 올라가니 사진으로 눈에 익은 외관의 팰리스 호텔이 보였다. 그리고 호텔 앞쪽 잔디 정원에 나보코프의 시그니처 동상이 자리하고 있었다(사진으로는 프랑스 카부르의 그랜드호텔 같은 경관인 줄 알았다. 실제는 호텔과 동상 사이를 이차선 도로가 가로지르고 있다).

나보코프는 처음 1년간은 3층에서, 그 뒤로는 꼭대기층의 가장 전망 좋은 방에 종신 투숙했다(그 정도면 동상을 세워줄 만한가?). 그 기간에 <창백한 불꽃>을 포함한 많은 작품을 집필했다. 나보코프의 장소로는 페테르부르크의 나보코프박물관이 가장 가볼만한 곳이지만(우크라이나 전쟁이 종식되기 전까지는 러시아문학기행을 기획할 수 없다) 이곳 팰리스 호텔도 의미 있는 장소가 되는 이유.

동상 앞에서 단체로 기념사진을 찍은 뒤에 다행히 아직 해가 남아있어서 우리는 공원묘지로 걸음을 옮겼다. 팰리스호텔에서는 도보로 15분거리. 거리는 가까웠지만 오르막길이었다. 묘지의 규모가 작은 건 아니었지만 안내지도에 묘역이 표시돼 있어서 나보코프 가족(아내와 아들이 같이 묻혔다)의 무덤을 어렵잖게 찾을 수 있었다. 러시아 최대 망명작가가 이곳에 안식하고 있구나라는 감회를 잠시 느꼈다. 나보코프 데이의 마지막 일정이 종료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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