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으로는 바르셀로나의 새벽이지만 바깥은 한밤이다. 어제까지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고 날이 밝으면 이제 귀국길에 오른다. 스페인 입국시와 같이 귀국길도 두바이를 경유한 장시간의 비행길이다. 아마도 귀가까지는 하루가 족히 걸릴 듯싶다.

마지막날인 어제의 일정은 단출했다. 먼저, 벤야민의 무덤과 메모리얼을 찾아 바르셀로나에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작은마을(인구가 1천명 남짓) 포르트부(‘포르부‘로 읽어왔는데 스페인어로는 포르트부)를 방문하는 것, 이어서 40분쯤 떨어진 피게레스(살바도르 달리의 고향이다)의 달리미술관을 찾는 것.

2차세계대전중이던 1940년 9월 독일점령하의 파리에서 탈출을 시도한 발터 벤야민은 미국으로 가기 위해 피레네산맥을 넘어 포르투갈로 향하려 했으나 스페인경찰의 검문을 받게 되자 프랑스로 회송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자살한다. 기록으로는 9월26일의 일이다. 우리가 찾은 그의 무덤은 해변 언덕의 교회 묘지에 위치하고 있었고, 그의 마지막 문건 역사철학테제(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의 한 대목이 묘비명을 대신하고 있었다.

교회묘지로 앞에 바다를 향해 벤야민 메모리얼이라고 불리는 추모 설치물이 있었다. 확인해보니 사후 50주년을 맞아 카탈루냐 주정부와 독일 연방정부의 지원으로 이스라엘 조각가가 만든 ‘파사주‘로 벤야민의 최후 프로젝트였던 파사젠베르크(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파사주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벤야민의 역사관에 대해 소개하는 것으로 포르트부 방문을 마쳤다(가능하다면 베를린과 파리에서도 벤야민의 흔적을 찾아가볼 예정이다).

한편 미술관 투어를 공식일정에 포함하지 않았던 이번 문학기행에서 달리미술관 관람은 ‘입막음‘의 의미도 있었다. 한 시대를 풍미한 괴짜이자 천재, 살바도르 달리의 여러 대표작과 스케치가 동화적 공간에 전시되어 있었다. 달리의 무덤까지도.

마지막 저녁식사를 위해 바르셀로나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한번 세르반테스를 출발점으로 하는 근대소설사의 의의를 설명하고 근대문학종말론도 소개했다. 3년만에 다시 진행한 문학기행이 그렇게 마무리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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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를 방문하는 관광객에게 안토니오 가우디는 각인되는 이름이다. 가우디를 알지 못한 채 방문하기도 어렵고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 채 떠나기도 어렵다. 바르셀로나 곳곳에서 여전히 이 세계적인 건축가의 손길을 확인할 수 있으며, 140년 넘게 아직도 건축중인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도시의 랜드마크이기 때문이다(가우디의 사망 100주년인 2026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어제의 여정은 바로 그 성가족(스페인어 사그라다 피밀리아‘의 뜻) 성당을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완성된다면 세계 최대규모의 성당이 될 거리고 하는데(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비싼 건출물로 에펠탑과 경합할 수도 있다고. 현재까지는 에펠탑이 넘사벽이라 한다). 여권검사는 하지 않았지만 관람을 위해서는 공항검색대를 통과하는 것 같은 소지품검사를 거쳐서 입장해야 했다. 그리고 곧장 만나게 되는 특유의 거대한 외관. 전문가이드의 자세한 설명을 들으며 건물의 외양과 내부를 둘러보며 여행자의 버킷리스트 하나를 지울 수 있었다(스폐인의 3대 관광명소가 마드리드의 프라도미술관, 그라나다의 알함브라궁전, 그리고 사그라다 파밀리아라고 한다. 코비드 직전에 정점을 찍은 방문자는 연간 450만명).

가우디에 관한 책은 두엇 구입했었는데 읽어보진 않았다(귀국하면 찾아봐야겠다). 가우디의 생애에 대해서, 그리고 이 성당의 미래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정확한 추이는 모르겠지만 스페인에서도 종교인(스페인의 경우는 가톨릭신자) 현저하게 감소하고 있을 듯싶은데 이 마지막 고딕성딩의 용도가 어떻게 될지 궁금해서다. 이미 위고는 <파리의 노트르담>에서 돌의 시대(돌로 된 책의 시대) 중세가 책의 등장과 함께 막을 내리게 된다고 정확하게 진단했다. 그러고보면 건축물의 아름다움과는 별개로 ‘뒷북성‘ 건축인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노트르담 대성당과 에펠탑 사이에 끼여있는 것처럼 보인다(바르설로나 자체가 뒷북성 스페인의 근대화의 표본이 되는 도시다).

기공연도를 보더라도 1882년에 착공된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에펠탑을 앞선다. 1889년 프랑스대혁명 100주년에 맞춰 완공된 에펠탑은 1887년에 기공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알려진 대로 에펠탑은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기념하여 축조되었는데(파리에서 열린 네번째 박람회였다), 바로 전해인 1888년 박람회 개최지가 바르셀로나였다(에두아르도 멘도사의. <경이로운 도시>에는 자칫 만국박람회 준비공사가 늦어져 파리와 경쟁하게 될까봐 우려하는 대목이 나온다). 주로 마드리드와 앙숙관계이지만 바르셀로나와 비교되는 도시는 파리이기도 하다. 내년가을 프랑스문학기행 때 노트르담 대성당과 에펠탑을 방문하게 되면 이 문제도 더 생각해봐야겠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방문을 마친 뒤 우리가 항한 곳은 가우디의 설계로 유명한 구엘공원이었다. 후원자 에우세비 구엘의 의뢰로 가우디가 지었다고 하는데(공원조성과 함께 추진한 주택분양사업은 실패로 돌아갔다고) 역시나 가우디 건축의 독특한 발상과 섬세한 고려를 음미하게 해주는 여러 건축과 조형물을 만날 수 있었다. 언덕 위에 조성돼 있어서 바르셀로나 시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도 일품.

크루즈선들이 정박해있는 바르셀로나항의 해물레스토랑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오후에는 파빌리온(1929년 박람회때의 독일전시관)을 찾았고, 이어서 고딕지구와 람블라스거리를 중심으로 워킹투어를 진행했다. 2000년대 스페인문학 최대 베스트셀러라는 <바람의 그림자>(2001)의 배경공간이다.

한편 고딕지구로 접어드는 골목입구의 한 건물을 지나치기 쉬운데 바로 세르반테스가 1610년경 살았다는 건물로 눈에 잘 띄지 않는 현판이 붙어있을 뿐이었다. 사실 이 건물의 존재는 미리 알고온 것이 아니다. 어제아침에 ‘바르셀로나의 세르반테스‘에 대해 검색하다가 알게 되어 찾아간 것이었다(<돈키호테> 2부 결말에 가서 돈키호테는 바르셀로나에 입성하며 해변에서 하얀 달의 기사와 결투를 벌이다 패배하여 결국 카스티아 라만차의 집으로 귀가하게 된다). 미리 짠 일정과 무관하게 덤으로 뭔가를 발견하는 일도 문학기행의 숨은그림찾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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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2-11-08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딸과 함께 언젠가는 스페인...이러고 희망을 갖고 삽니다
뜻깊은 여행 잘 마치시기 바랍니다

로쟈 2022-11-11 04:29   좋아요 0 | URL
네, 언젠가는 꼭 이루시길.~
 

그라나다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로르카공항(작은규모의 국제공항)에서 바르셀로나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탑승수속을 일찍 마치고 휴식 겸 자유시간을 갖는 중. 바르셀로나에 도착해서 여장을 푸는 일이 오늘의 남은 일정이다.

오전에는 예정대로 알함브라궁전 전체를 둘러보고 전문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다. 당연하게도 그라나다의 역사는 이슬람 스페인의 역사 전체를 대변하고 알함브라궁은 그 역사의 응축물이다. 아직도 풀리지않는 많은 미스터리를 품고 있다니 관람객들의 발길도 오래도록 끊이지 않을 것 같다(상당기간 앞서 예매해야 하고 여권을 지참해야 입장할 수 있다).

알함브라궁 내부에 미국작가 워싱턴 어빙의 기여를 기리는 현판이 붙어 있고 내려오는 길목에는 어빙의 동상까지 세워져 있어서 놀랐다. 미국문학사에서 어빙은 <스케치북>(1819-20)의 문제성 덕분에 한 자리 차지하고 있지만, 스페인에서는 단연 <알함브라 이야기>(1832)의 저자다. 기념품점에서도 어빙의 <알함브라>는 각국의 번역본으로 판매되고 있었다(한국어판은 절판돼 준비강의에서 다루지 않았다). 그라나다 관광을 준비하는 독자라면 미리 읽어두는 것도 좋겠다.

이번에 알게 됐는데(어빙을 강의에서 다룰 때는 주목하지 않아서) 어빙은 콜럼버스의 전기와 함께 미완성이지만 <그라나다 정복 연대기>를 쓰기도 했다. <알함브라>는 그 여세를 몰아서 쓴 책. 비록 온갖 장르의 글이 뒤섞여 있는 <스케치북>처럼 분류는 애매하지만 그의 <알함브라>는 알함브라궁전의 재발견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고 알려진다. 궁전의 주인들과 나란히, 혹은 그 이상으로 대접받는 이유다.

어빙이 쓰려고 했던 그라나다의 역사는 스페인사의 일부로만 다뤄질 게 아니라 별도로 책이 나오면 좋겠다. 더불어 스페인 재정복의 영웅인 이사벨여왕에 관한 책도 나오면 좋겠다(콜럼버스에 대한 책은 나와있기에 제외한다). 어빙의 책도 다시 나오고. 그라나다를 찾을 여행자를 위해서라면, 너무 작은 명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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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비야에서 론다로, 론다에서 다시 그라나다로, 옛적의 비유를 쓰자면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하는 것 같은 하루였다. 낮에는 론다의 절경을 보고 저녁엔 그라나다의 야경을 보고. 그 야경은 물론 알함브라궁전의 야경이다(그라나다의 야시장과 밤거리도 도보로 둘러보았다).

알함브라궁전의 내부 투어는 내일 오전에 할 예정인데, 오후에는 바르셀로나행 비행기에 오를 터라 오늘 저녁시간이 그라나다의 야경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자 마지막 시간이었다. 그리고 과연 스페인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도시라는 그라나다의 명성이 허명이 아님을 알게 해주었다.

23만의 인구를 가지고 있다는 그라나다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세력의 마지막 거점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그라나다의 이슬람왕국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카스티야와 아라곤 왕국이 주도한 가톨릭세력의 레콩키스타(국토회복전쟁)가 마무리된다. 1492년의 일이다.

어제 콜럼버스(스페인어로는 콜론)의 무덤이 있는 세비야의 대성당에서도 이 시기의 역사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들었는데, 콜럼버스의 항해를 후원한 이사벨 여왕이 남편 페르난도와 함께 바로 레콩키스타를 완결지은 인물이기도 하다. 그 이사벨 여왕의 무덤이 유언에 따라 그라나다의 왕실 예배당에 마련된다(찾아보니 남편 페르난도 2세도 같은 곳에 잠들어있다). 관광도시이기 이전에 중요한 역사도시인 것.

물론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이슬람 지배하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그라나다는 알함브라궁전을 포함해 가장 많은 이슬람문명의 유적과 흔적을 갖고 있는 도시다. 하지만 (역사기행이 아닌) 문학기행의 관점에서도 그라나다는 의미가 있는데 바로 20세기 스페인 최고 시인 가르시아 로르카의 고향이기 때문이다(로르카의 출생지는 그라나다 근교의 작은마을이다). 알함브라궁전 투어에 이어서 로르카 문화센터 방문이 내일의 주요 일정이다. 그렇게 일정을 소화하면 바르셀로나로 떠나기 위해 공항으로 향하게 될 텐데, 그 공항의 이름이 로르카공항이다. 그렇게 로르카와 만나고 헤어지면서 스페인문학기행은 중반을 지나 후반부로 넘어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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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2-11-06 08: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로르카 문화센터가 있군요. 알함브라 궁전 꼭 죽기 전에 보고 싶다고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다녀오신 분 말로는 해가 질 때 알함브라가 정말 절경이라고 하더라고요.

로쟈 2022-11-06 13: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해질녘부터 야경투어가 시작됩니다.~

2022-11-24 0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론다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그라나다로 향하는 중이다. 앞서 작은마을이라고 적었는데(그렇게 소개받기도 해서) 확인해보니 인구는 3만5천 가량. 하지만 관광객들로 북적이는지라(다른 한국인 단체관광팀도 보였다) 체감으로는 작지만은 않은 도시다. 유명한 협곡과 누에보다리를 보고 헤밍웨이의 산책로를 따라 투우장 앞에 있는 헤밍웨이 동상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었다. 론다의 바깥쪽 풍광을 보면서 멋진 점심식사를 하고 다시 그라나다로 향하고 있는 것. 그라나다의 아경을 구경하는 것이 오늘의 마지막 일정이다.

스페인 작가가 아니지만 명예 스페인 시민증을 받을 만한 작가가 헤밍웨이다. 그의 대표작 <태양은 다시 떠올다>(1926)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0) 그리고 투우를 다룬 논픽션 <오후의 죽음>이 모두 스페인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다.

헤밍웨이 문학의 특징으로 ‘고독한 개인‘의 형상을 자주 지목하는데(‘헤밍웨이와 실존주의‘가 언급되는 이유다), 그런 면에서 보면 주제적으로 가장 진화한 작품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이다. 하지만 작품은 제목과 제사를 빌려온 존 던(17세기 영국시인)의 시를 잘 구현하고 있는지 확실히 말하기 어렵다. 헤밍웨이의 의도(내지 명분)와 실제 사이에 간극이 있어보이는 것. 참고로 존 던의 시는 이렇다.

˝누구든, 그 자체로서 온전한 섬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대양의 일부이어라.
만일 흙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면
구라파는 그만큼 작아지며, 만일 모래톱이 그리되어도 마찬가지,
그대의 친구들이나 그대 자신의 영지가 그리 되어도 마찬가지.
어느 사람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킨다.
왜냐하면 나는 인류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 알고자 사람을 보내지 말라.
종은 그대를 위해 울린다.˝

주제적으로 <누구를>을 정점으로 하고서 헤밍웨이의 문학은 수축하여 다시 <노인과 바다>(1952)에서 안정화된다. 중편(분량)이라는 형식과 고독한 개인의 인정투쟁이라는 주제에서 그의 문학은 안정감과 함께 최고의 성취에 도달하는 것으로 보인다. 장편소설의 미흡함을 상쇄한다고 할까. 그렇지만 그 주제는 <누구를>에 견주에 결코 앞선다고 할 수 없다. 헤밍웨이 문학세계에 대한 짧은 강의의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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