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의 ‘안티오이디푸스‘ 읽기>(그린비)가 나온 김에 서가에서 <안티오이디푸스>(민음사)를 찾았지만 실패하고 대신 <차이와 반복>(민음사)을 손에 들었다. 2004년에 번역본이 나왔고 책을 구한 건 2005년. 머리말만 읽은 흔적이 있다. 당연하게도 긴 호흡으로 읽을 여유가 없었고 마땅한 가이드북도 나오기 전이어서다.

이후에 두 권의 가이드북이 차례로 나왔다. 제임스 윌리임스의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라움)과 조 휴즈의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입문>(서광사). 두권 다 책상에 올려놓고 있는데 알라딘 구매에는 뜨지 않는다(어디서 샀단 말인가?). <차이와 반복>을 포함해서 모두 원서 내지 영어본을 갖고 있어서 독서준비는 다 갖춰진 셈. 그간에 시간적, 심리적 여유가 없었을 뿐인데 더 미룰 수도 없지 않느냐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원저는 1968년에 나왔으니 이제 52년이 된 책이다. 들뢰즈는 1969년에 가타리와 만나서 새로운 단계로 진입한다. 그 대표 성과물이 빅히트작 <안티오이디푸스>(1972)와 <천개의 고원>(1980)이다.

알려진 대로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서양철학사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독해하고 재구성한다. 키워드로 표현하면 ‘재현‘에 대한 비판이 그가 시도하는 과업이다. 그걸 따라가는 일이 만만치는 않다. 조 휴즈가 한국어판 서문에 적어놓은 바에 따르면, ˝들뢰즈는 엄밀하고 독창적이며 종합적인 독서를 하는 철학자였으며, <차이와 반복>이 주는 가장 큰 어려움 가운데 하나는 독자들에게 저자와 마찬가지로 광대한 철학의 역사를 가로질러 엄밀하고 정확하며 독창적인 독해를 하도록 요구한다는 사실에 있다.˝

15년 전에는 그런 요구를 감당하기 어려웠지만 지금은 사정이 나아졌는지(그래도 조금은 나아졌으리라고 기대한다) 테스트해볼 수도 있겠다. ‘들뢰즈와 문학‘에 관한 책들도 많이 나와있는지라 나의 관심사와 동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들뢰즈의 칸트론과 니체론에도 조만간 다시 손이 갈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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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1 2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3-11 2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평일과 마찬가지로 점심을 먹고는 백팩을 매고 카페로 나왔다. 단골로 들르는 카페까지는 10분이 안 걸리는 거리(커피맛은 좋은데 음악소리가 좀 크고 안쪽으로는 조명이 어두운 편이다). 통상 에피타이저로 읽을 책들도 넣어서 나오는데 서가에서 눈에 띄는 대로 무겁지 않은 책을 빼온다. 독일 저널리스트 로베르트 미지크의 <좌파의 생각은 어떻게 상식이 되었나>(그러나)와 전진성의 <보수혁명>(책세상).

미지크의 책은 2015년에 나왔고 <보수혁명>은 2001년에 나왔으니 오래전 책이다. 보수주의나 보수혁명(독일의 바이마르공화국 시기 지식인 담론)에 관한 책을 관심을 갖고 모으고 있는데(영미 쪽 책들도 몇권 나와있다) <보수혁명>은 가성비가 좋은 책이다. 독일지성사 분야의 책일 터이지만 문학사 이해에도 요긴하다. 가령 토마스 만이나 헤르만 헤세 이해에도 도움을 준다(나는 만의 <어느 비정치적 인간의 고찰>이 번역되지 않는 게 심히 유감스럽다).

미지크의 책은 사상의 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리처드 도킨스라면 ‘밈‘이라고 불렀을 특정 관념이나 사고가 어떻게 상식으로 남게 되었는가를 살펴보고 있다. 더 확장하자면 부정적인 퇴적물도 그만큼 우리 (사고의) 주변에는 남아있는 것 아닐까. 좌파의 생각뿐 아니라 우파의 생각도 상식에, 내지는 공통감각에 새겨져 있는 것이니. 일괄하여 이런 퇴적물들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해보인다. 봄맞이 대청소를 하는 것처럼 낡은 상식들은 떨어내버리는 재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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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정희진의 글쓰기‘에 포함돼야 하는 내용인데 시간적 간격도 있어서 별도로 적는다. 김영하의 <보다>(문학동네)에 대해 적은 설명이 생각의 꼬투리이자 시빗거리다. 저자가 인용한 건 김영하가 영화 <그래비티>를 보고서 우울증에 대해 적은 대목이다. 줄여서 인용하면 이렇다.

˝우울증 환자들은 인간이 혼자라는 것, 죽을 수밖에 없는 가련한 운명이라는 것을 냉철하게 직시한다는 점에서 극단적으로 현실적이다. ‘혼자 죽는‘ 고통을 미리 맛보고 있는 그들에게 삶이 이미 죽음이고 죽음이 곧 삶이다.˝

나로선 우울증에 관한 책들을 더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대목인데, 과연 ˝혼자 죽는다는 사실을 미리 직시한 자˝들로 우울증 환자들을 정의할 수 있는 건지 궁금하다. 절판돼 유감인 책 가운데 하나는 로버트 버턴의 <우울증의 해부>인데(완역본은 아니었다), 기억에 버턴은 우울증의 사회적 조건을 지목하고 있어서 시사적이다. 그 첫번째 조건은 고학력. ‘식자우환‘의 전형적 사례인데, 평균보다 많이 아는 자가 우울증을 앓기 쉽다. 두번째 조건은 사회적인 역할이 할당되지 않는 것. 그래서 남보다 우월한 앎(인식)이 사회적 쓸모와 결합하지 못할 때 발생하는 정서가 우울증이다(19세기 러시아희곡의 제목을 빌리면 ‘지혜의 슬픔‘, 곧 잉여적인 앎이 빚어낸 슬픔이 곧 우울증이다).

단순하게 인간이 혼자라는 사실, 혼자 죽는다는 사실에서 우울증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건 자연적 사실일 뿐이고 삶에 대한 성찰과 성숙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심지어 그런 주제의 철학서나 문학책을 씀으로써 성취감도 맛볼 수 있다(파스칼의 <팡세> 이후의 허다한 책들). 문제는 그러한 인식을 나누지 못할 때다. 체호프의 단편 ‘우수‘가 여기서는 적합한 사례가 될 수 있겠다. 아들을 잃은 가난한 마부 이오나의 이야기인데, 그에게 아들을 잃었다는 사실보다 더 큰 고통은 그 슬픔을 같이 나눌 사람이 없다는 데 있었다. 다시 말해 ‘혼자 죽는‘ 고통이라는 건 특별히 호들갑을 떨 일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김영하의 ‘극단적 현실‘론이나 그에 대한 정희진의 맞장구(‘이 정확성!‘)에 나로선 공감하기 어렵다. 정희진은 이렇게 보충한다.

˝‘극단적 현실‘의 당사자도 쓰기 어렵다. 현실은 현실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현실적‘이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은 누구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발언은 ‘현실‘을 운전할 수 있는 ‘현실적인‘ 상태인 몇몇 인간만의 특권이다. ‘극단적 현실‘, 즉 현실에서는 도스토옙스키라도 쓰지 못한다.˝

나로선 증상으로밖에 읽을 수 없는 대목이다. 다시 읽어보자. 현실은 현실이 아니다, 현실은 언제나 현실적이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은 누구도 감당할 수 없다, 현실에 대한 발언은 현실적인 상태의 몇몇 인간에게만 가능하다, 극단적 현실로서의 현실에 대해선 도스토옙스키도 쓰지 못한다? 나는 누가 이 대목을 이해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아무려나 도스토옙스키조차도 들지 못하는 ‘몇몇 인간‘에 누가 들어가는지 저자에게 묻고 싶다. 그에 이어지는 문장이 힌트가 될까? ˝홀로코스트 생존자 프리모 레비 같은 이도 있지만, 그는 인간이 어디까지 고통을 견딜 수 있는가를 증명해야 하는 존재로 기대받았고, 결국 자살했다.˝

나는 저자가 도스토옙스키를 읽지 않았고 프리모 레비도 대충 읽었을 거라고 추정하게 된다. 총살 5분 전까지 경험했던 사형수 도스토옙스키는 8년이 넘는 시베리아 유형생활을 경험했고 이를 <죽음의 집의 기록>이라는 소설을 통해 사실적으로 그렸다. 도스토옙스키가 무슨 이유로 호출되어(도스토옙스키라도!) 의문의 1패를 당해야 하는지 나로선 알기 어렵다.

그리고 홀로코스트 생존작가로 프리모 레비가 자살하기 전까지 평생에 걸쳐서 증언한 것이 ‘인간이 어디까지 고통을 견딜 수 있는가‘였던가? ‘결국 자살‘? 저자는 그의 자살을 그의 패배로 해석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가능한 해석이지만 아주 나이브한 해석이다. 레비가 경험한 수용소의 경험은 모든 인간성이 박탈되어 자살조차도 불가능했던 현실이었다. 똑같은 홀로코스트 생존작가로 자살한 장 아메리의 책제목을 빌리자면 두 사람의 자살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주장하고 입증하기 위한 ‘자유죽음‘의 뜻을 갖는다.

저자의 한탄에 따르면 삼사십대에 우울증과 자살연구에 매달렸는데 ˝이룬 것은 없고, 있던 것마저 다 잃˝어서 ˝우울증과 죽음을 해명하지 않으면 다음 날을 맞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각자에게는 자신의 고통과 고독이 절대적일 수 있다. 그건 주관적 진실이다. 내가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건 그걸 객관적인 것으로 과장하면서 애꿎게도 도스토옙스키나 프리모 레비를 들러리로 세운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라도 쓰지 못한다˝라거나(저자가 얼마나 읽었는지 궁금하다) ˝프리모 레비 같은 이도 결국 자살했다˝ 같은 문장은 나로선 쓸 수 없는 문장이다. 사실 상상력이 빈약한 탓에 상상도 해보지 못했다.

조금 돌아오긴 했는데 나는 저자의 진의가 도스토옙스키나 프리모 레비를 폄하하는 데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렇게 읽힐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고 있어서 한 독자로서 불편했다는 것이다. 저자의 어떤 글들은 메시지를 담고 있다기보다는 하나의 증상이고 그렇게 읽어야겠다는 것. 오랜만에 정희진의 책을 읽고서 정리한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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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2020-03-06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실에 대한 발언은 현실적인 상태의 몇몇 인간에게만 가능하다, 극단적 현실로서의 현실에 대해선 도스토옙스키도 쓰지 못한다.‘ 이 부분 제가 읽기엔 도스토옙스키는 ‘몇몇 인간‘에 속하는 걸로 이해됩니다. 저자(정희진)는 현실에서 약간이라도 거리가 생긴 상태를 ‘현실적인 상태‘라고 보는 것 같아요. 현실에 압도되어 있는(‘극단적 현실‘) 상황에선 글쓰기가 어렵다는 뜻이 아닐런지요.

로쟈 2020-03-06 19:53   좋아요 0 | URL
저자는 현실과 극단적 현실을 구분하는 듯하면서도 또, 극단적 현실=현실(‘극단적 현실‘, 즉 현실)이라고 쓰고 있어요. ‘극단적 현실=현실<->현실적‘이라는 것인지. 이해불가한 용어법입니다. 서평이나 칼럼의 한국어 문장이 해독을 요한다면 넌센스입니다..
 

강의가 없어지면서 일상의 루틴도 달라졌다. 반경 500미터 내 카페들을 주로 순례하면서 책과 자료를 읽거나 원고를 쓰거나 교정하는 일을 한다. 백팩에 며칠 들어있던 책이 정희진의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교양인)인데 빼놓기 위해서 몇자 적는다.

몇가지 사실과 인상. ‘정희진의 글쓰기‘가 시리즈로 나오는 듯하고 이번에 두권이 나왔다. 지난해 통과한 박사학위논문(‘반미문학을 통해 본 식민지 남성성의 형성‘)도 아마 곧 출간되지 않을까(석사논문이 <아주 친밀한 폭력>으로 나온 것처럼). 그만큼 현재 가장 ‘대중적인‘ 여성주의 저자가 정희진이다. 글쓰기의 모델?

이번에 나온 책을 포함해 정희진의 글쓰기는 주로 서평이나 칼럼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서평이라 하더라도 책의 내용보다는 책이 준 인상이나 촉발된 생각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에 칼럼적인 성격이 더 강하다. 내가 서평강의에서 권장하는 모델은 아니다. 누군가의 분류대로 서평에 객관적 서평과 주관적서평이 있다면, 정희진의 서평은 장정일의 그것보다도 더 주괸적이다. 그래서 그의 서평에는 책보다도 ‘정희진‘이 더 강하게 드러난다.

서문에서 밝힌 대로 저자는 15년간 한 출판사에서만 책을 내왔다. ˝출판사 교양인에 감사드린다. 지난 15년 동안 교양인, 한 출판사하고만 일해 왔다. 그들의 안목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가장 큰 이유이지만, 나의 우울증으로 인한 무기력과 과욕을 오가는기분 장애(변덕)의 범퍼가 되어주었다.˝ 두 가지 이유를 들고 있는데 (1)출판사에 대한 신뢰, (2)그들의 범퍼 역할.

실제로 책에는 저자의 기분이 잔뜩 실려 있는 서평들이 많이 들어가 있다(‘우울증‘만도 아니어서 정확히는 ‘조울증‘이라고 해야겠다). 김영하의 <보다>(문학동네)의 한 대목에 감격하면서 토로한 이력. ˝나는 삼사십대, 이른바 한창나이에 ‘원래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우울증과 자살 연구(?)에 매달렸다. 이룬 것은 없고, 있던 것마저 다 잃었다. 어쨌든 우울과 죽음을 해명하지 않으면 다음 날을 맞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읽고 만나고 앓고 써댔지만, 글이라 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 ‘해명‘은 종료된 것인가? 아니면 그의 글쓰기는 그 연장이거나 대체인가?

몇가지 대목에서 물음표를 치고 페이지를 접어두었는데 한곳만 적자면 기형도의 사인에 관한 기술. ˝기형도(1960-1989년). 그는 스물두 살에 백혈병(혈액암)에 걸렸고 그로부터 7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심야극장에서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게 공식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백혈병으로 투병하다가 사망에 이르렀다는 건 금시초문인데(책으로 나온 자료에 그런 내용이 있던가?), 새롭게 알려진 진실인지 착오인지 모르겠다. 저자가 누군가에게 그냥 전해들은 게 아닐까 추정해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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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05 16: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3-05 17: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3-05 19: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3-05 2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출처 : 로쟈 > 윤동주-프리모 레비-빅터 프랭클

12년 전에 쓴 글이다. 서경식의 <시대의 등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를 그맘때 읽었던가 보다. 윤동주와 빅터 프랭클을 같이 떠올렸고. 작년봄 이탈리아문학기행 때 참고한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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