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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발견'으로 수학책을 고른다. 줄리언 해빌의 <무리수>(승산, 2014). 저자는 영국 대학에서 오랜동안 수학을 강의한 수학자. 국내에는 <오일러 상수 감마>(승산, 2008)가 더 번역돼 있다. 그래도 <감마>보다는 <무리수>가 조금은 더 쉬워 보인다.

 

 

놀라운 것은 <무리수>가 이 주제에 관한 최초의 포괄적인 책이라는 점. "무리수는 고대 그리스인들에 의해 발견되었지만 19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적절하게 이해되고 엄밀하게 정의되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무리수를 둘러싼 신비는 모두 밝혀지지 않았다. 이 주제에 관한 최초이자 포괄적인 책 <무리수: 헤아릴 수 없는 수에 관한 이야기>에는 고대부터 21세기에 이르기까지 무리수와 그것에 관한 문제에 맞서 싸운 수학자들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소개다. 그런 점에서라도 특별히 눈길을 주게 된다.

 

물론 수학책인 만큼 좀 어렵지 않을까 짐작해볼 수 있는데, "실변수 미적분학과 이와 관련된 극한과 급수에 익숙한 독자들을 위해 쓰였지만, 수학적 훈련이 조금 덜 되어 있더라도 호기심과 열정이 대단한 독자들도 충분히 읽어낼 수 있을 만큼 흥미롭고 알기 쉽게 서술되었다".

 

그래도 독자를 격려하기 위한 문구일 텐데, '극한과 급수에 익숙한 독자들'을 위해 쓰였고, '호기심과 열정이 대단한 독자들'은 도전해볼 수 있다는 사실, 곧 익숙한 독자들과 대단한 독자들을 위한 책이란 점이 '격려'가 되는 것인지는 미지수다. 이 책을 구입하는 무리수를 두기 전에 자신이 얼마나 익숙한 독자이고 대단한 독자인지 먼저 판별해봐야 할 것 같다. 유럽수학회 회원의 추천사를 참고하도록 하자.

수학자뿐만 아니라 수학에 일반적으로 관심이 있는 독자에게도 열렬히 권할 수 있는 책이다. 하지만 증명도 조금은 읽어 내려갈 준비가 필요하다. 그저 앙상한 뼈대만 남겨둔 채 모든 증명을 지나치는 것은 개념을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증명 몇 개는 뛰어넘어도 좋다. 문체를 비롯해서 잘 정리된 역사적 내용과 현대적 상황에 대한 참고문헌들과 융합된 인용구들은 이 책을 아주 훌륭한 읽을거리로 만든다.

14. 1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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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할 만한 아침습관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통상 포털에서 밤사이 뉴스를 훑어보고 간혹 스포츠경기의 하이라이트 동영상을 본 다음에 다시 새로 나온 책들을 검색한다. 한 주간의 주문이나 포스팅에서 빠진 책들이 어떤 것인지 확인하고 새로 주문을 넣거나 이렇게 포스팅 서플먼트성 페이퍼를 적는다. 최근에 두 중국인 저자의 책이 나왔기 때문이다. 1941년생 류짜이푸와 1947년생 이중톈. 개인적으로 두 사람을 묶을 수 있다면, 내가 '전작'을 갖고 있다는 게 공통점이다(류짜이푸의 절판된 책 <고별혁명>을 소장하고 있는지 긴가민가해서 아침에 중고본을 다시 주문했다. 구입한 기억은 있는데 알라딘의 구매리스트에는 없다. 다른 서점에서 구입한 건지도 모르겠다). 거기에 더 보태자면, 각각 마이리스트도 만들어놓은 적이 있는 저자라는 점.

 

 

류짜이푸의 신간은 <인간농장>(글항아리, 2014)이다. 원제는 '인성제상(人性諸相)'. '인간성의 갖가지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 번역본은 공식적인 부제는 아니지만 '세상의 모든 인간성을 논하다'는 설명을 붙여놓았다. 바로 떠올린 책이 <류짜이푸의 얼굴 찌푸리게 하는 25가지 인간유형>(예문서원, 2004)인데, 알고 보니 그럴 수밖에 없다. <인간농장>은 새로 쓴 단행본이 아니라 류짜이푸의 잡문 선집으로 1부의 '인간의 모습'에 실린 글들은 대부분 <인간론 25종>(<류짜이푸의 얼굴 찌푸리게 하는 25가지 인간유형>의 원저)에서 실렸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인간성을 묘사하는 글들을 꽤 발표했다는 걸 알 수 있다. 학술적인 저작도 펴내면서 잡문도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저자는 이렇게 적었다.

제가 이런 산문을 쓰는 것은 실험적 작업일 뿐입니다. 혹 어느 비평가가 이것을 산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어쨌든 이 글은 인간성과 인간의 생존 상황을 직접 보고 증명한 것이고, 문학이 해낼 수 있는 일도 바로 '직접 보고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류짜이푸가 '학술 연구'라고 분류한 책에는 <고별혁명>(북로드, 2003)과 <쌍전>(글항아리, 2012) 같은 책이 있는데, 거기에 <전통과 중국인>(플래닛, 2007)도 포함할 수 있겠다(<죄와 문학>, <리쩌허우 미학 개론> 등도 흥미를 끄는 타이틀이지만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저자는 톈안먼 사태 이후 중국을 떠나 홍콩과 미국을 오가며 강의와 저술활동을 하고 있는 디아스포라 지식인. 인간성에 대한 신랄하고 익살맞은 풍자를 읽다보면 루쉰의 잡문 정신이 이런 것이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프로필을 읽다 보니 류짜이푸와 이중톈은 학연도 갖고 있다. 류짜이푸가 중국의 샤먼대 중문과를 졸업했는데, 이중톈이 샤먼대에서 교편을 잡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 정도를 '학연'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넓디넓은 중국 대륙을 생각하면 퍽 '가까운' 인연처럼도 여겨진다. 류짜이푸와 함께 이중톈을 호명한 것은 <이중톈의 품인록>(역사의아침, 2014)이 최근에 다시 나왔기 때문. 전에 <품인록>(에버리치홀딩스, 2007)이라고 나왔다가 절판된 책이다. '5천 년 중국사를 뒤흔든 5인의 흥망성패'가 부제로 이중톈식의 '인물평설'이다.

저자 스스로 대표작으로 꼽을 만큼 인물 품평의 정수를 엿볼 수 있는 이 책은, 항우.조조.무측천.해서.옹정제 등 뛰어난 능력과 개성으로 세상과 대결한 논쟁적 인물들을 품평하고 있다. 이들의 비극적인 운명은 개인의 성품이나 인격과 무관하지 않았다. 단순히 승리나 패배라는 결과로, 또는 집단문화와 도덕의 잣대로 쉽게 단죄할 수 없는 인물들의 면면을 저자의 문학적 감성, 깊이 있는 안목, 남다른 통찰과 함께 살펴보고 있다.

어느 해 겨울인가 이중텐의 책을 연이어 몇 권 읽을 때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난다. 그러고 보니 <인간농장>이나 <품인록>이나 갖가지 인간에 대한 품평이란 점에서는 마찬가지로군. 다만 류짜이푸가 익명의 다수를 다룬다면, 이중톈은 소수의 역사적 인물을 도마에 올려놓았다. 비교해보는 재미도 있을 듯하다.  

 

 

알다시피 이중톈의 신작이자 역작은 한창 출간되고 있는 <이중톈 중국사>다. 번역본은 현재 3권까지 나와 있는데, 아직 장구한 여정을 남겨놓고 있다. 이번 겨울에는 모아서 읽어보고 싶다(그러러면 4권 이후도 제 페이스로 무탈하게 출간되어야 할 텐데, 그러길 기대한다). 그래, 겨울엔 또 겨울에 읽을 책들이 있는 것이지. 우리가 살아있다면 말이야... 

 

14.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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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처럼 일어났지만 자꾸 눈이 감기는 주말 오전이다. 습관처럼 새로 나온 책들을 검색하고 장바구니에 담고 몇 권을 주문한 다음에 잠시 침묵하다가 발견한 책이 오늘의 발견이어서 '이주의 발견'으로 분류한다. 패트릭 리 퍼머(1915-2011)의 <침묵을 위한 시간>(봄날의책, 2014). 제목만으로는 어떤 침묵인지 알기 어렵지만, '유럽 수도원 기행'이란 부제는 대번에 어떤 책인지 짐작하게 해준다.

 

 

영국의 대표적 여행작가의 한 명이라는 저자의 책은 <그리스의 끝, 마니>(봄날의책, 2014)에 이어서 두번째다. 담백한 표지 때문에 여행서임에도 잘 눈에 띄지 않는데, 마치 열화당 책과 같은 느낌을 준다(노란색이 들어갔으면 많이 화려한 것이라고 해야 할까). '세계산문선' 시리즈로 나온 첫 두 권이 퍼머(애칭은 '패디'라고)의 책 두 권인데, 어떤 책들이 더 나올지 궁금하다.

'패디'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영국의 전쟁영웅이자, 독특한 문체와 깊이 있는 관찰이 돋보이는 여행작가 패트릭 리 퍼머의 유럽 수도원 기행. 이 책은 표면적으로는 천주교 수도원 네 곳의 이야기다. 그곳과 그곳 사람들 이야기라고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저자 퍼머가 보고 느낀 것들은 특정 수도 공동체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의 수도 공동체에 해당할 만한 이야기다. 패트릭 리 퍼머는 수도원에서 묵은 시간 동안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어쩌면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치유와 환희의 날들을 보낸다. 이방인들이 수도원에 머물 때 제일 먼저 깨닫게 되는 비밀, 느리면서도 점점 커져 가는 침묵이 주는 치유의 마법.

우리에게도 그렇게 침묵을 위해 머물 만한 수도원이 몇 곳이나 있는지 모르겠지만, 저자의 발걸음을 조용히 따라가보는 시간은 충분히 마음을 끈다.

 

 

수도원 책이라면 일단 떠오르는 게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오픈하우스, 2009)이다. 사진과 함께한 진동선의 <침묵으로의 여행>(문예중앙, 2012)도 수도원의 분위기를 접하게 해주는 책. 이색적인 책은 최근에 다시 나온 <뉴스킷 수도원의 강아지들>(바다출판사, 2014). 수도사들이 쓴 강아지 양육법 책이다. 어쩐지 강아지도 수준이 좀 다를 것 같은 느낌.

 

덧붙여 전에 예고편만 보았던 다큐멘터리로 필립 그뢰닝의 <위대한 침묵>(2005)이 떠오른다(http://vimeo.com/38263988). 침묵을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면 견본으로 삼아도 좋겠다. 러닝타임 168분.

 

 

14.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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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혹 페란 아드리아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레스토랑 엘불리는? 아마도 미슐랭 별점에 관심을 갖고 있을 정도는 되어야 알 만한 이름일 듯싶은데, 다르게 얘기하면 미식가를 식별하는 한 가지 기준일 수도 있겠다. 좋은 음식(맛있고 건강에도 좋으며 보기에도 정성이 깃든 음식)이라면 마다할 사람이 없겠고, 나도 거기에 속하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맛집(이나 유명 레스토랑)을 찾아가는 건 아니니 미식가 축에는 들지 못한다. 그래서 장 폴 주아리의 <엘불리의 철학자>(함께읽는책, 2014)가 아니었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이름이 엘불리의 수석 셰프 페란 아드리아다. 

 

 

게다가 놀랍게도 페란 아드리아와 엘불리에 대한 책이 이미 출간됐었다. 평소 요리책까지 눈여겨보진 않는지라 모르고 지나쳤는데, '이 시대 최고 요리사의 열정과 집념'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미각혁명가 페란 아드리아>(들녘, 2008)가 오래 전에 나왔다가 현재는 절판된 상태이고, 전 세계 셰프들이 꿈꾸는 레스토랑에서의 6개월 견습과정을 다룬 <180일의 엘불리>(시공사, 2012)도 이미 선보인 책이다. 

 

  

덧붙이자면 <에불리: 요리는 진행중>(2011)이라는 영화도 만들어진 바 있으니 흠, 이름을 좀 알아두어도 괜찮겠다. <엘불리의 철학자>는 프랑스의 철학자인 저자가 이 세계적인 요리사 페란 아드리아에게 바치는 오마주이다. 피터 그리너웨이의 영화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를 빗댄 '요리사, 철학자, 그의 레스토랑, 그리고 그의 예술'이 부제. 소개는 이렇다.

 

마르크스주의자이며, 급진적 철학자인 저자가 순전히 미식가로서, 페란 아드리아라는 천재 요리사와 그의 레스토랑이 실험해 온 예술 작품들에 관한 철학적, 미학적 고찰을 담은 예술서이다. 철학자이자 미식가인 저자는 운 좋게도 거의 매년 엘불리의 새로운 요리를 맛보고 페란 아드리아와 대화할 기회를 누렸다. 그 과정에서 프랑스(혹은 유럽) 요리의 역사, 예술사, 미학사, 먹는다는 행위 혹은 맛에 대한 철학자들의 생각들이 다채롭게 소개된다.

참고로, 에불리는 스페인 카탈루냐 주, 외딴 해변에 숨어 잇다고 하다. 2011년 7월말부터 재정비에 들어가 최소 2년간 손님을 받지 않기로 했다는데, 지금은 3년이 지났으니 다시 개장했을 성싶다.

 

 

흠, 설사 재개장했더라도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곳은 아니겠다. 그저 요기는 눈으로 하는 수밖에. 혹 엘불리 출신의 한국인 셰프가 오픈한 레스토랑이 있다면 한번 찾아가보는 건 가능할지 몰라도. 일요일 밤에 간식을 먹는 대신 미식의 세계를 다룬 페이퍼를 적어도 효과가 없진 않은지 배는 고프지 않군... 

 

14.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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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이라고 이름 붙이기엔 너무 친숙한 주제이지만, 민족주의를 다룬 묵직한 연구서가 출간되었기에 '이주의 묵직한 발견'이라는 이름을 붙여본다. 서양사학자 김인중 교수의 <민족주의와 역사>(아카넷, 2014). '겔너와 스미스'가 부제인데, 민족주의 연구의 거목으로서 어니스트 겔너와 앤서니 스미스를 집중 조명하고 있기에 붙여진 것이다(한스 콘 같은 학자는 이제 지나간 이름이 되었나 보다).

 

 

저자는 에드워드 톰슨의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창비, 2000),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근대세계체제>(까치, 2013) 등의 굵직한 저서들을 공역했고, 민족주의 관련서로는 브라이언 젠킨스의 <프랑스 민족주의>(나남, 2011)를 우리말로 옮긴 바 있다. <프랑스 민족주의>의 부제는 '1789년 이후의 계급과 민족'인데, 홉스봄의 책 <1780년 이후의 민족과 민족주의>(창비, 1998)를 떠올려준다. 1780년대가 중요한 분기점이란 걸 시사한다.

 

 

대표적인 민족주의 연구자로 언급되고 있지만 어니스트 겔너의 책은 <쟁기, 칼, 책>(삼천리, 2013)만 소개된 터이고 <민족과 민족주의> 같은 주저는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앤서니 스미스 같은 경우는 사정이 나아서 <민족주의란 무엇인가>(용의숲, 2012)가 번역돼 있다(<국제화 시대의 민족과 민족주의>(명경, 1996)도 번역됐었지만 절판된 지 오래다).

 

 

저자는 앤서니 스미스의 저작들에 대해서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여 검토하고 있는데, 주요 저작들 가운데 특히 <민족들의 족류공동체적 기원>(1986)을 자세히 다룬다. 현단계 민족주의 연구를 대표할 만한 저작이라면 소개되어도 좋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한 이해를 한단계 심화시켜줄 만한 노작이 나온 듯싶어 반갑다...

 

14.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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