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책을 뒤적이다가 박가분의 <일베의 사상>(오월의봄, 2013)도 손에 들고 후기와 서문을 먼저 읽어보았다. '일베의 사상'이란 제목에서도 연상이 되지만, 실제로 마루먀마 마사오의 <일본의 사상>을 참조했다고. 거기에 일본의 사회평론가 아즈마 히로키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도 이론적 거점으로 활용되고 있다. 저자의 작업은 비단 일베의 사상에 대한 분석으로서뿐 아니라 한국사회 징후 독법으로 의미가 있어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국가와 사회라는 거대한 존재에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요구하는 연약하고 재미없는 인간들을 철저하게 구축한 자립적인 세계를 만드는 것, 나아가 '세계를 동물화하라'는 정언명령이 바로 일베의 공격적인 유머코드의 배후에 있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16쪽)는 서문의 주장과 "나는 자살로도 생을 마감한 노무현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고 광주항쟁 때 희생당한 시민들에 대한 조롱을 거침없이 해왔던 일베 유저들이 성재기의 죽음을 계기로 별안간 연민의식에 빠져서 침울해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성재기의 죽음을 자신과 동일시하면서 자기연민에 빠진 사람들도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것을 보면서 일베도 실제로는 생각만큼 그렇게 아방가르드한 집단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268쪽)는 후기 사이의 흥미로운 편차가 눈길을 끌어서 몇자 적으려다가 독후로 미루고(하지만 당장은 독서의 여유가 없다) 저자 인터뷰 기사를 찾았다. 경향신문의 기사가 요긴한 도움이 되기에 일부 발췌해놓는다(전문은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1091545001&code=940100).

노알라, 홍어, 보슬아치, 좌빨좀비, 민주화 같은 일베의 혐오스러운 용어들이 한국 사회를 자극했다.

일베에는 지향점이 없다. 젊은이들의 혐오문화가 현실에서 좌절한 후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로 나타난 것이다. 삐뚤어진 인정 욕구라는 것이 이 책의 결론이다. 일베 같은 집단에서 정치적인 프로그램이나 강령이 나올 리 없다. 이들의 목적은 인터넷에서 타인이 불쾌하도록 도발하는 데서 즐거움을 찾는 것이다. 이들은 현실에 나오면 우스워질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인터넷 밖으로 나서지 않는다. 공론장에 대해서는 불신하고 있다. 현실의 맨얼굴을 드러내지 못하고 감추고 있는 것이 일베의 멘탈리티다. 일베 유저들이 정치적인 프로그램을 갖는다면 파시즘에 가깝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금처럼 한가한 분석이 있을 수 없다.”

일베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해야 한다고 보나.

이들을 인터넷에서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베를 어떻게 한다? 이것이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 일베를 사회적 징후로 보고 분석하려 했다. 일베는 사양길에 들어섰다. 하지만 일베가 사라지더라도 이들의 혐오 방식을 잇는 커뮤니티가 있을 것이다. 일베는 인터넷에서 인정받고 싶어하는 영웅심리가 표출된 것이다. 젊은이들이 현실에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공간들이 있어야 한다. 물론 젊은이들 자신의 책임도 있긴 있다. 일베 자체를 어떻게 한다기보다, 그런 공간이 많아지면 (혐오문화가) 자연스럽게 없어질 수 있다.”

책 제목이 <일베의 사상>이다. 일베에 굳이 사상이란 단어를 붙인 이유는.

쓰레기에도 사상이 있을 수 있다. <일베의 생각>으로 제목을 정하려고 했다. 그렇게 하면 심각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심각하게 받아들였으면 좋겠다는 의미에서 <일베의 사상>이라고 이름 붙였다. 일베를 지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일베를 큰 의미로 보는 것도 아니었다. 사상이라고 해서 무조건 존중받아야 한다거나 긍정되는 것은 아니다.”

책에서 일베와 촛불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했다. 게다가 일베는 촛불의 사상을 계승한다고 분석했다. 진보에 대한 비판으로 읽힌다.

 

양쪽이 극단이고, 극단은 통한다고 이야기한 게 아니다. 일베가 촛불의 정서에서 일탈해 나온 존재라는 이야기다. 촛불이 실패했기 때문에 일베가 나왔다고 본다. 진보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지만 자아비판이다. 일베는 진보논객과는 다른 방식으로 조롱문화를 수용했다. 예전에 그런 문화에 발을 들였던 나 자신에 대한 비판이다. 진보좌파가 잘못했으니까 일베가 다 너희들 때문이야라고 하기보다, 과거에 뭘 했는지 어디에서 잘못했는지 되짚어본다는 의미다. 사람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그 시대를 돌이켜본다는 의미다.”

일베가 사양길에 들어섰다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보는 까닭은.

“책이 출간된다는 이야기가 나온 후 일베로부터 소위 ‘민주화’라는 것을 당했다. 예전에 내 신상을 털거나 모욕을 주면 화가 났다. 지금은 전혀 화가 나지 않는다. 진부했다. 이제 일베식 도발이 신선함을 잃었다. 일베의 선정성이 익숙하게 된 것이다.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도 영향을 미쳤다. 사건 초기 국정원의 입장을 옹호하다 최근 선거개입이 속속 사실로 드러나면서 조용해진 느낌이 있다.”

책의 부제는 '새로운 젊은 우파의 탄생'인데, 벌써 '사양길'로 접어들었다니 '탄생'이란 말이 무색하다. 곧 다른 방식으로 재등장하게 될까...

 

13.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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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마이뉴스에서 한국근현대사 연구자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과 국가정보원 과거사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위원장, 그리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한 안병욱 전 카톨릭대 교수와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일부를 발췌해놓는다(전문은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10369).

 

기사 관련 사진

- 그렇다면 박근혜 정부의 미래는 어떨 것으로 보나.
"일반적으로 국민은 권력이 무지막지하게 내리누를 때 반발하지만 그것이 늘 역사를 반전시키는 힘이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민중 역량이) 바닥으로 떨어졌다가 성장할 때 내리누르면, 역사를 바꾸는 동력으로 승화하는 경우가 많다. 가령, 5공화국 당시 1980년 광주항쟁으로 많은 시민이 학살당했지만 전두환 정권이 1981년, 1982년 무리한 정책을 추진해도 정권은 유지됐다. 전두환 정권이 가장 취약했던 때는 집권 후기다. 그 숱한 과정을 겪은 사람들이 다시 일어섰을 때, 비로소 정권의 억압을 뚫고 일어나 6월 항쟁을 만들어냈다.

박근혜 정부와 국민의 관계를 당시와 비교하면, 내 감으로는 국민의 역량이 이제 바닥을 치고 올라오는 시점이 아닌가 한다. 1987년 6월 항쟁 전의 분위기라고 생각한다. 박근혜 정부는 결코 순탄하게 연착륙 하지 못할 것이다. 그 점을 박 대통령도 알고 있다. 자신이 유화책을 쓰고 양보하는 순간, 끊임없이 양보를 하게 된다는 사실을. 옛날 박정희에게 쓸 수 있는 반전의 카드가 있었다. 계엄령이나 긴급조치 같은.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에겐 반전의 카드가 없다. 한 번 밀리면 어디까지 밀릴지 모른다는 그 두려움 탓에 김기춘 등을 기용하는 강경 드라이브를 하는 거다. 


 

결국 귀결은 어느 한쪽이 무너지는 건데, 지금은 시민사회와 국민이 무너질 수 있는 시대가 아니지 않나. 결국 누가 무너지겠나. 1995~1997년의 김영삼 정권을 보면 노동관계법 밀어붙이다가 한 번 꺾이니까 1년 동안 아무 권한도 행사 못 했다. 1950년대부터 정치를 하면서 주변에 자기 사람이 엄청 많은 김영삼 전 대통령도 그랬다. 객관적으로 보면 박 대통령은 고립무원이다. 선거 때 손 한 번 잡아보고 싶어하던 유권자들 그동안 지지해왔는데, 더는 유효하지 않다. 박 대통령이 쓸 수 있는 카드는 없다. 박근혜 정부의 남은 4년 반... '봄날은 갔다'."

- 국민 역량이 바닥을 치고 오르는중이라고 보는 근거는?
"국민은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세계 경제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바닥까지 떨어졌다가 이제 다시 기 자리에서 뭔가를 해볼 수 있는 위치에 왔다. 정치권이 조금 와줘야 하는데 여전히 찬물을 끼얹고 있다. 국민이 반전하는 시점에 정치권은 반대로 가는데, 이런 모습이 1985~1987년 상황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 2004년부터 3년간 '국가정보원 과거사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국정원을 직접 겪어본 사람으로서 개혁의 가능성을 어느 정도로 보나.
"사람이나 제도도 기본 바탕이 있다. 가령 '바탕은 좋은데 시대 상황이 어려워서 저렇게 꼬였다'는 말도 있지 않나. 사람들은 국내 사찰만 없으면 국정원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그 생각은 맞다. 하지만 거기서 더 나가 마치 국정원의 본질은 그게 아닌데, 독재자들이 잘못된 일을 시켜 악행을 저지른 것처럼 보는 사람들이 있다. 잘못된 생각이다.

5.16 쿠데타 세력이 제일 먼저 한 일이 중앙정보부 설치였다. 쿠데타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조사해서 사전에 제압해 권력을 유지하려는 목적이었다. 국정원은 그 역할을 20세기 내내 멈춘 적이 없다. 현재도 국정원은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대통령을 위해 존재한다. 마치 청와대 비서실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청와대 비서실은 기능만 있지만, 국정원에겐 인력과 예산, 큰 권한이 있다. 앞으로 한국사회가 정상화되기 위해서는 국정원을 바꿔야 한다. 하지만 제도만 바꿔서는 안 된다. 발전적 해체와 신설로 갈 수밖에 없다. 발전적 해체를 거쳐 새로운 국가정보기구를 신설한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 교학사 역사교과서가 역사를 왜곡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이명박 정부 때부터 시작된 일이다. 뉴라이트 우익 학자들에 의한 교과서 파동은 참으로 우스꽝스럽고 창피한 소극 같은 일이다. 그게 당당하게 정권의 비호를 받고 있는데, 현재 우리 사회 정신세계의 천박성을 보여준다. 게다가 여당 최고 실력자(김무성 의원)가 그런 학자를 불러 특강을 하고, 의원 50여 명이 그 강연에 박수를 보냈다는 것은 코미디다. 한국 정치인의 역사인식이 어느 수준인가를 보여준 사건이다. 그들의 역사인식이 1950~1960년대에서 멈춘 게 서글프다. 

국사편찬위원회가 그 교과서를 검정해줬는데, 이 역시 시대의 비극이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천박한 정치 논리에 들러리를 섰다. 한 나라의 학문을 관장하는 최고 기관이 허접쓰레기 같은 걸 교과서로 검정해줬는데, 학문적 양식을 지켜야 할 최후의 보루가 무너졌다."

- 의기소침해 있는 시민에게 한마디 한다면?
"소수의 안목이 있는 분들이 역사를 내다보고 그 의지에 따라서 끊임없이 국민을 선도했을 때, 국민의 힘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면 사회가 바뀐다. 지금의 여론조사가 생각처럼 나오지 않기 때문에 사회가 바뀌기 힘든 게 아니냐고 얘기하는 것은 올바른 생각이 아니다."

13. 10.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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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검정을 통과한 교학사의 한국사 교과서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한국일보에 실린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의 인터뷰에서도 비슷한 시각을 읽을 수 있다. 무엇이 문제인지 쟁점에 관한 대목을 발췌해놓는다(전문은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1309/h2013091520320984330.htm 참조). 박찬승 교수는 근대사 전공자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돌베개, 2013), <마을로 간 한국전쟁>(돌베개, 2010), <민족, 민족주의>(소화, 2010) 등의 저자다. 

 

 

-교학사 교과서 근현대사 부분을 읽어보고 어떻게 느꼈나.

 

"첫 인상은 '미스'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회영 등 6형제가 만주에서 신민회를 조직한 것처럼 썼다거나, 포츠담선언 날짜가 잘못됐다든지, 애치슨 선언과 미군 철수 시기가 뒤바뀌어 있다. 교과서 검정에서는 사실 오류를 제일 먼저 본다. 검정을 거친 교과서인데도 '팩트'에 오류가 많다는 데 놀랐다. 문장이 잘 안 읽힌다. 고등학생 수준에 맞게 써야 하는데 너무 전문적이거나 고유명사 단체 이름 같은 게 한 페이지에 너무 많아 굉장한 학습 부담을 준다. 교과서는 집필에 10개월, 검토에 10개월 걸린다. 필자들이 다 모여 한 줄 한 줄 놓고 이야기를 한다. 나도 교과서 필진으로 참여했을 때 1년 가까이 매주 주말을 반납했다. 교학사 교과서는 그런 시간 투자를 안 하고 급히 쓴 것처럼 보인다."

 

-교학사 교과서는 사실 오류뿐 아니라 식민사관, 친일 미화, 이승만 띄우기 등 여러 지적이 나왔다. 무엇이 가장 문제인가.

 

"사실 오류와 의도적인 왜곡처럼 보이는 부분이다. 다른 여러 교과서에도 5ㆍ16혁명공약을 실었는데 이 교과서만 '민정 이양'을 천명한 6항이 빠져 있다. 적절하지 않은 지문이나 질문도 많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대목에서도 '민비'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사건 가담 일본인의 글을 소개하면서 왜 일본이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을까 생각해보라는 질문을 던진다. 시해범의 입장을 이해하라고 받아들이라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에서 국내 문화운동, 실력양성운동 비판하는 대목을 인용하면서 이런 주장이 타당할까 하고 묻는다.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도록 유도하는 듯 하다. 또 구한말 조선의 유생들은 학문 수양에만 힘쓰고 망국의 책임을 반성하지 않았다고 했다. 의병을 일으킨 유생이 숱하고 자결한 사람은 내가 확인한 것만 70명이 넘는다. 선조들이 무책임했던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것은 자기 비하다. 대한민국 역사에 자긍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 썼다면서 이런 자기 폄하적인 부분이 있다."

 

-교학사 교과서 필자인 이명희 공주대 교수는 이 교과서가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는 비판에 대해 "우리 민족의 내적 발전을 강조하려고 했다"고 반박한다. 그렇게 보이나.

 

"일제의 수탈을 언급하고 물산장려운동을 강조하는 등 식민지 근대화론처럼 비치지 않으려고 신경을 쓴 건 사실이다. 하지만 비판 받을 여지가 있는 부분도 있다. 예를 들면 시간 관념의 변화는 근대의 당연한 현상인데 일제 지배 이후라는 표현을 붙여 일제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게 한다. 그런 건 일제 지배로 만들어졌다기보다는 다양한 형태의 교육과 언론 계몽 같은 것의 역할이 큰 것이다. 일본인 농장주가 수리조합을 만들고 저수지를 잘 축조해 선진적인 농장 운영을 했다는 대목에서도 그들이 간척사업을 위한 공유수면 매립 허가를 특혜로 받았다거나 수리조합에 대한 농민들의 반대 투쟁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냥 일본 사람 대단하다고 느끼게만 써놨다. 그렇게 균형 잡히지 못한 점이 아쉽다."

 

-이 교수는 이승만을 강조했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이승만에 대한 일반의 잘못된 관념을 바로잡기 위한 거라고 설명한다.

 

"교과서 저자가 자기의 생각을 주입하겠다는 자세는 잘못이다. 교과서는 기본적으로 학계에서 통용되는 상식적인 이야기를 정리해 학생에게 전달한다는 관점에서 써야 한다. 저자가 특정한 목적의식을 갖고 쓰면 편향될 수밖에 없다. 안창호는 초기 임정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도 임정 부분에서 한 번도 거론되지 않는다. 그에 반해 이승만은 도처에서 언급되고, 사진도 가장 많이 나온다."

13. 0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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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봉주 전 의원에 대한 대법원 유죄판결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기고를 옮겨놓는다. 박경신 교수의 시론이다.

 

 

한겨레(11. 12. 24) 정봉주 유죄판결은 법적 착시현상

 

국가가 모든 걸 통제하고 개입할 필요는 없다. 상대성이론은 국가 개입 없이 발견되었고 아이폰은 국가 지원 없이 잘 만들어졌다. 사법부가 모든 말의 진위 여부를 결정할 필요도 없다. 안기부 엑스(X)파일 검사가 실제로 떡값을 받았는지, <조선일보> 사장이 장자연의 성상납을 받았는지,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감염 가능성이 얼마나 높은지 등등 어떤 명제들은 과학적으로, 현실적으로 확인이 불가능하다. 아마도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명제인 ‘신은 존재하는가?’도 그 진위가 결정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수천년을 잘 살아왔다.

국가가 국민이 한 말이 허위라고 해서 잡아 가두거나 국가가 독점하는 기타 강제력을 행사하려면 우선 그 말이 허위임이 입증되어야 한다. 이번 정봉주 전 의원의 유죄 판결은 이 당연한 원리를 송두리째 무시한 판결이다. ‘비비케이(BBK)가 이명박 소유가 아니다’라는 입증이 없는 상황에서 정봉주 의원에게 ‘네 말이 진실이라고 입증하지 못했으니 유죄’라고 하는 판결은 전세계적으로, 그리고 우리나라 역사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판결이다.

대륙법과 영미법을 막론하고 어느 나라에서도 진실인지 입증하지 못한 명제의 책임을 그 말을 한 사람에게 지우는 나라는 없다. 그런 논리라면 전세계의 기독교인들은 야훼의 존재를 입증하지 못한 죄로 모두 감옥에 가야 할 것이다.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입을 다물라’는 것인데 이런 규범 아래서 문명이 어떻게 발전하고 사상이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 안기부 엑스파일 사건에서는 다행히도 우리 대법원이 정확하게 말했다. “안강민·홍석현·이학수가 법정에 출두해서 ‘우린 떡값을 주지도 받지도 않았다’고 증언이라도 하지 않는 한 이를 입증하지 못한 책임을 노회찬에게 지울 수 없다”고. 이 대법원 판결의 원리를 완전히 뒤집은 이번 판결은 우리나라 사법부의 수준이 얼마나 저열한지, 선진국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가 얼마나 깊게 우리 속살을 도려내야 하는지 보여준 판결이다.

이상훈 대법관은 ‘비비케이가 이명박 소유이다’라는 명제가 허위인지를 판시하지 않고 정봉주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틀림없이 죄목은 ‘허위사실 공표’인데 허위인지를 판시하기 전에 정봉주에게 자신이 한 말의 근거가 없다고 유죄를 때렸다. 이렇게 하게 된 이유는 착시현상 때문이다. 형법 307조 1항이 진실인 경우에도 명예훼손의 성립을 인정하기 때문에, 진실이든 허위이든 어차피 유죄이니 기소 죄목에서는 ‘허위’가 위법성 요건임에도 불구하고 진위를 판정하기도 전에 말한 사람이 얼마나 근거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따진다. 피고인이 한 말의 진위를 밝힐 생각은 안 하고 ‘피고인 너 그런 말 할 자격 있느냐’를 묻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권력비리는 캘 수가 없다. 권력비리는 침묵과 어둠의 장막 속에서만 이루어진다. 이들은 이런 장막을 구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장막을 뚫고 간신히 올라오는 단서들은 당연히 ‘충분한’ 증거가 되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단서들을 제시할 수조차 없다면 비리의 고발은 불가능하다.

장자연이 남긴 유언장과도 같은 문서, 안기부가 본의 아니게 남긴 엑스파일, 외국 과학자들과 언론이 광우병에 대해서 한 말, 누리꾼들이 황우석의 테라토마 사진을 보고 제기한 의혹들이 바로 그러한 단서들인데, 이 단서들을 국민들에게 공개하고 국민들의 의견을 묻는다고 해서 감옥에 가야 한다면 누가 비리 고발을 하겠는가. 정봉주도 비비케이의 소유주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이 침묵의 장막으로 차단된 상황에서 어렵게 어렵게 얻어낸 단서들을 국민들과 공유한 것뿐이다.

지금 할 일은 두 가지이다. 첫째, 전세계에서 유례가 없이 진실임에도 명예훼손 책임을 지우는 형법 307조 1항을 꼭 폐지해야 한다. 물론 이번 유죄 조항은 선거법 조항이지만, 명예훼손 논리를 대입하였음이 분명하다. 둘째, 사법개혁이다. 법관소환제도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법관이든 검사든 국민의 위임 범위 안에서 활동한다는 명제를 확실히 상기시켜줘야 한다. 국민은 누구에게도 국민의 말이 진실임이 입증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 국민을 처벌할 권한을 준 적이 없다.(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11.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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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처리해야 할 원고를 보내고 잠시 포털을 둘러보다가 읽은 기사를 옮겨놓는다. '나꼼수 신드롬'과 함께 2011년 한국사회를 특징짓는 '안철수 현상'에 대해서 중앙일보가 진중권 씨에게 촌평을청탁한 모양인데, '안철수 현상의 역설들'로 답해왔다. '나꼼수'에 대한 견해와는 달리 많은 부분에서 동의할 수 있는 모범답안이다. 

 

 

중앙일보(11. 12. 23) 안철수 현상의 역설들

 

‘올해의 인물’이 아니라 차라리 ‘내년의 인물’이라 해야 할까?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안철수는 전혀 정치적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서울시장 출마선언과 더불어 갑자기 한국정치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그가 출마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시장이 되어 있을 게다. 하지만 압도적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그는 박원순 후보에게 자리를 양보했고, 이 시민운동의 대명사는 아름다운 양보에 멋진 승리로 보답했다.

가장 비정치적인 인물이 외려 가장 정치적인 인물이 되었다. 이는 흥미로운 역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역설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유력한 후보의 자리를 턱 없이 낮은 지지율을 가진 후보에게 양보했고, 그 행동을 통해 박근혜 대세론을 무너뜨리며 일거에 유력한 대선 후보로 떠올랐다. 그에 대한 열광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지금, 여론조사에서 그는 여전히 박근혜 후보에게 10% 포인트 정도 앞서고 있다.

흔히 김영삼, 김대중을 “정치 9단“이라 부르나, 안철수의 행보는 이 노회한 이들의 계산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정치적으론 어리숙해 보이는 그에게서 어떻게 그런 묘수가 나올 수 있었을까? 아마 안철수는 자신의 후보 사퇴가 가져올 효과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사퇴는 그야말로 아무 계산이 없는 순수한 희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수함이 정치9단의 노회함을 뛰어넘는 정치적 효과를 낳았다.

꼰대와 멘토
안철수 현상에서 우리가 읽어야 할 것은 정치 패러다임의 변화다. 한국은 이미 산업화사회에서 정보화 사회로 변모했다. 하지만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여전히 낡은 산업사회의 삽질 경제 리더십. ‘CEO 대통령’을 자처하는 그 분은 사실 공사판 현장감독에 가깝다. 이를 시대착오라고 느끼는 대중은 정보화 사회에 적합한 새로운 영웅을 원한다. 그리고 그 영웅을 IT산업에서 배출된 디지털 유형의 CEO에서 찾았다.

 

‘롤 모델‘이라는 말이 있다. 이념의 시대에 젊은이들에게 인생의 롤 모델이 사회주의적 ’전사’였다면, 탈이념의 시대에 젊은이들의 롤 모델은 자본주의적 영웅이다. 안철수는 IT 분야에서 성공한 CEO이고, 그와 단짝을 이루는 시골의사 박경철은 주식투자의 전문가다. 한 마디로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삶의 목표는 곧 안철수 혹은 박경철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이들을 존경하며 그들의 형상을 닮으려 한다.

취업난의 시대에 가장 불안과 절망을 느끼는 것은 젊은 세대다. 그들은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고민을 들어줄 사람을 원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베스트셀러의 제목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고민에 빠진 젊은이들에게 낡은 산업사회의 ‘꼰대’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 아이들은 에어컨 바람 쐬며 일하려고만 한다.” 이와 달리 안철수는 젊은이들에게 귀를 기울이며 기꺼이 그들의 ‘멘토’가 되어 준다.

복지에서 시장개혁으로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메시지는 나쁘게 보면 허무한 위로의 제스처에 불과하다. 철수는 다르다. 그는 지금 젊은이들이 겪는 고통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짚어주며, 추상적으로나마 문제의 해결방향을 지시한다. 대기업 위주의 경제 그 속에서는 거대기업의 횡포로 인해 중소기업이 발전할 수가 없다. 하지만 고용의 대부분을 창출하는 것은 중소기업. 이러니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미래가 있겠는가?

현 정권은 대기업 위주의 정책을 펼쳤다. 덕분에 대기업들은 하나 같이 잘 나가고 있으나, 현 정권이 약속했던 떡고물(이른바 ‘낙수효과’)은 떨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떡을 먹으면서 고물 하나 안 흘리나?” 성장에 대한 기대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희망을 걸었으나, 성장도 제대로 안 되고, 성장이 고용으로 이어지지도 않는, 이른바 ‘고용 없는 성장’이 찾아 왔다. 그럼 이제 방향 전환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성장정책에서 비롯된 양극화를 극복하기 위해 저마다 ‘복지’를 떠든다. 복지를 늘리는 것도 중요한 과제이나, 그보다 시급한 것은 시장개혁, 즉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 공정한 게임의 규칙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것이 안철수가 던지는 메시지다. 이는 진보냐 보수냐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과 비상식의 문제다. 안철수는 진보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시장주의자, 이 사회에서 보기 드문 상식적 보수주의자다.

대안정당이냐 정당대안이냐
역설은 그의 보수적 메시지가 이 사회에선 졸지에 급진적 목소리가 된다는 것. 시장개혁을 하려면 대기업에 칼을 대야 하는데, 그 일을 누가 맡겠는가? 대기업이라는 고양이 앞에서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은 그저 겁먹은 쥐에 불과하다.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에 대한 대중의 혐오는 그저 그들이 보여주는 구태에 대한 불신이 아니다. 두 정당이 결코 사회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할 주제가 못 된다는, 근원적 절망이다.

일찍이 진보정당은 그 절망에서 만들어졌으나, 그들은 제 존재의 의의를 증명하는 데에 실패했다. 한때는 그들도 참신하여 10석의 의석과 14%의 지지율을 자랑하기도 했다. 하지만 산업혁명시대의 이념을 정체성으로 가진 진보정당은 정보화 사회 속에서 유의미한 정보를 산출하지 못했다. 그것은 대중에게 접근할 적합한 소통(채널)의 문제 이전에 그들에게 던질 메시지(콘텐츠) 자체의 한계다.

한때 안철수를 중심으로 한 대안정당(“제3정당”) 얘기가 떠돌았으나, 안철수 자신이 부정함으로써 논의는 짧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안철수는 ‘대안의 정당’이 아니라, ‘정당의 대안’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물론 정당 없이 통치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현실정치의 맥락에서 안철수는 아직 신기루에 불과하다. 정치를 하려 한다면, 그 역시 어떤 식으로든 정당과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이다.

보수와 진보의 역설
제대로 된 보수가 없고, 진보마저 ‘대안’이 못 되는 상황에서 ‘정당의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안철수라는 이름의 상식적 보수다. 그는 재산의 절반을 사회에 환원했다. 이 역시 대중이 보수주의자들에게서 보고 싶어 했으나, 그들에게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보수의 미덕(이른바 ‘노블리스 오블리주’)이다. ‘시장에서 공정하게 경쟁하고, 정당하게 획득한 재산을 정의롭게 환원한다.’ 이처럼 비정치적이면서 고도로 정치적인 메시지가 또 있을까?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은 안철수를 즐겨 ‘또 다른 이명박’이라 부른다. 그들의 말대로 안철수 열풍은 디지털 버전으로 진화한 이명박 신화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맥락에서 안철수의 ‘상식’은 그 어떤 진보적 구호보다 급진적이다. ‘시장의 개혁.’ 거기에는 엄청난 저항과 반발이 따르지 않겠는가? 물론 그가 이 일을 제대로 해낼 것이라 믿기는 힘들다. 하지만 보수주의자의 관점에서 적어도 그는 ‘시대정신’을 제대로 짚었다.

안철수가 진보적이지 않다는 진보주의자들의 지적은 옳다. ‘분배’의 정의로움이 아니라 ‘시장’의 공정함을 요구하며 재산을 ‘기부’하는 것. 이는 철저히 보수주의의 스탠스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대선에서 승리한다면, 그것은 보수의 승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엉터리 보수가 미덕과 가치를 가진 합리적 보수로 변모하는 것. 한국 사회에서 그처럼 커다란 진보가 또 있을까? 이것이 안철수 현상의 마지막 역설이다.(진중권_시사평론가)

 

11.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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