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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악'에서 '범죄'로

문학 분야의 신간들은 자주 둘러보지 않아서 놓치는 경우가 많은데, 자허마조흐의 <모피를 입은 비너스>(펭귄클래식코리아, 2009)가 작년말에 출간된 걸 뒤늦게 알았다. 알다시피 마조히즘(매저키즘)이란 말의 빌미가 된 작품인데, 이전에 나온 <모피를 입은 비너스>(열림원, 2006)는 이미 품절 상태다. 사드와 자허마조흐의 책들은 다 어디에 두었는지 행방이 묘연하지만, 이 참에 찾아서 읽어볼까란 '몽상'도 하게 된다. 관련기사를 찾아보다가 <사랑의 범죄>(열림원, 2006)과 <모피를 입은 비너스>가 나란히 나왔을 때 이를 다룬 최재봉 기자의 기사 또한 뒤늦게 읽었다. 타이틀이 그럴 듯하다. 때릴 것인가, 맞을 것인가? 

  

한겨레(06. 12. 29) 때릴 것인가 맞을 것인가

사디즘과 마조히즘. 합쳐서 사도마조히즘으로 불리기도 한다. ‘가학적 음란증’으로 해석되는 사디즘과 ‘피학적 음란증’으로 풀이되는 마조히즘이 각각 두 사람의 소설가와 그들의 작품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사디즘은 흔히 ‘마르키 드 사드’로 불리는 프랑스 작가 도나티앵 알폰스 프랑수아 드 사드(1740~1814)에게, 그리고 마조히즘은 사드보다 한 세기 가까이 늦게 태어난 독일 작가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1836~1895)에게 각각 연원을 두고 있다.

상대방에게 (육체적)고통을 가함으로써 성적 쾌감을 얻는 사디즘, 그리고 상대방에게서 고통을 받음으로써 성적 쾌감을 느끼는 마조히즘은 정신분석학의 비조 프로이트에 의해 주목받은 이래 정신병리학은 물론 문학과 예술, 그리고 사회현상 일반을 해석하는 데에 유용한 도구로 쓰이고 있다. ‘억압된 것들의 귀환’을 특징으로 하는 현대 인문학에서 인간 심층심리의 비밀을 파헤친 선구자들로 평가받는 사드와 자허마조흐는 그러나 자신들의 당대에는 미치광이와 범죄자로 취급당해 수십년 동안 옥살이를 하지 않으면(사드), 다만 미미한 작가로 분류되었을 뿐이다. 



사드의 실명으로 펴낸 2권 중 한권
그 두 불운한 선구자 사드와 자허마조흐의 대표작 두 권이 최근 나란히 번역돼 나왔다. 출판사 열림원이 세계문학의 숨은 걸작들을 발굴해서 소개한다는 취지로 내고 있는 ‘이삭줍기 시리즈’의 19, 20번째 권으로 나온 <사랑의 범죄>(사드)와 <모피를 입은 비너스>(자허마조흐)가 그것들이다.

<사랑의 범죄>를 사드의 대표작으로 꼽기에는 사실 무리가 있다. 사드의 대표작이라면 자주 영화로 만들어지곤 하는 <소돔 120일>과 <규방 철학>, <쥐스틴 또는 미덕의 불행> 같은 작품을 우선 꼽게 되기 때문이다. 이 작품들에서 사드는 파격적인 상상력과 잔혹한 묘사로 뒤틀린 욕망의 해방을 끝 간 데까지 밀어붙였으며 그런 ‘사랑의 철학’을 현실에서 실천한 것이 그의 수십 년 옥살이의 까닭이 되었다. 문제는 사드가 이 작품들을 대부분 익명으로 발표했다는 데에 있다. 사드가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발표한 작품은 서한체 소설 <알린과 발쿠르>(1795)와 이 소설집 <사랑의 범죄>(1800)가 유일하다. 제 이름을 내걸고 공개 출판한 만큼 묘사의 수위와 문제의식은 다른 익명의 소설들과는 조금 다르다. 그렇지만 ‘영웅적이고 비극적인 이야기들’이라는 부제 아래 11편의 단편을 묶어 펴낸 <사랑의 범죄>에서도 사드 특유의 ‘어두운 욕망’은 충분히 만날 수 있다. 한국어판에 수록된 세 단편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팍스랑주 혹은 야망이 낳은 과오>의 경우, 아메리카에서 온 부유한 신사로 위장한 프랑로는 실은 약탈과 살인을 서슴지 않는 도적떼의 우두머리일 뿐이며, 속아서 그와 결혼한 팍스랑주 양은 절망과 후회 속에서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포로들의 처형을 지시하는 등 남편을 대신해 악덕에 몸을 담근다. <플로르빌과 쿠르발, 혹은 운명론>에서 주인공 플로르빌은 뒤늦게 자신의 오빠로 확인된 과거의 연인 센느발을 향해 “그대 아들의 살인범이자 그대 아버지의 부인이며 또 그대의 어머니를 교수대로 보낸 추악한 여자가 바로 나예요”(194쪽)라고 절규한다. 선의와 미덕으로 생에 임하고자 했던 여주인공이 자신의 그런 의도에도 불구하고 불행하고 끔찍한 운명을 떠안게 되는 과정은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극한까지 몰고 간 듯한 느낌을 준다. <외제니 드 프랑발, 비극적 이야기>에서도 주인공 프랑발은 자신의 딸을 사랑하게 된 ‘패륜’을 당당하게 변호한다: “미의 제국과 사랑의 신성한 권리는 인간의 하찮은 규범 따윈 염두에 두지 않아. 한낮의 태양빛이 밤 동안 지구를 덮고 있던 안개를 말끔히 걷어내듯이, 미와 사랑이 지평선 위에 떠오를 때 규범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지.”(236쪽)

육체적 학대와 배신 통한 치유
그렇지만 사드의 ‘공식적인’ 소설들에서 악덕의 주인공들은 결국 ‘죗값’을 치르고 파멸해 간다. 이와 관련해서는 사드가 소설집 <사랑의 범죄>에 서문으로 실은 ‘소설에 대한 생각’이라는 글을 참조할 만하다. 이 글에서 사드는 자신이 죄악을 과도할 만큼 끔찍하게 그린 까닭은 독자들로 하여금 “죄악을 좋아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46쪽)이라고 밝혔다. 



사드의 ‘공식’ 소설집이 그의 사상의 핵심과 일정한 거리를 보이는 데 반해 자허마조흐의 장편 <모피를 입은 비너스>는 명실공히 그의 사상의 진수를 담고 있는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실제 생활에서도 쫓겨다니다가 사지가 묶이고 굴욕스러운 처벌을 받거나 모피를 입은 당당한 여자에게 채찍질과 같은 육체적 고통을 당하기를 즐겼다는 자허마조흐의 경험과 취향이 소설 속에 고스란히 들어 있는 것이다.

소설은 액자 구조로 되어 있다. 화자가 주인공 제베린의 이야기를 듣는 형식이다. 자신의 집 위층에 사는 반다라는 아름다운 과부에게 매혹된 제베린이 반다와 노예계약을 맺고 육체적 학대를 당하고 질투의 심연을 맛보는가 하면 치욕스러운 배신을 거치면서 비로소 증상을 ‘치료’하게 된다는 것이 기둥 줄거리. 제베린이 반다의 사랑(=그러니까 학대)을 갈구하며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는 전형적인 마조히즘에 해당한다. 모피는 그에게 피학성욕의 상징과 같다. 



“저는 고통 속에서 이상한 매력을 느낄 뿐만 아니라 폭력, 무자비 외에는 그 무엇도 제 열정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고(…) 특히 아름다운 여인의 배신이 그러합니다. 이런 여자, 추함의 미학으로부터 나온 이런 특이한 이상형, 몸은 프린이지만 영혼은 네로인 여자를 저는 모피 없이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74쪽)

“사랑에는 평등 관계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내가 지배하느냐 지배당하느냐를 선택한다면, 아름다운 여자의 노예가 되는 편이 훨씬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군요”(46)라는 그의 말은 사도마조히즘이라는 ‘비정상적인’ 관계만이 아니라 사랑의 본질 자체를 꿰뚫는 핵심을 담지하고 있어 보인다. 그런 점에서 ‘사랑의 범죄’란 ‘사랑이라는 범죄’의 다른 말이 아닐까.(최재봉 문학전문기자)  

10. 02. 05. 

P.S. 예전에 마조히즘 읽기에 관해서 적을 때 언급한 바 있지만, 들뢰즈의 <매저키즘>(인간사랑, 2007)에도 <모피를 입은 비너스>가 번역돼 있다. 이 작품의 우리말 번역이 최소 3종은 되는 셈. 닉 맨스필드의 <마조히즘: 권력의 예술>(동문선, 2008)도 같이 읽어볼 만하다. 그렇게 계획만 세워두고 실행하지 못한 지도 몇 년째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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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그레이효과 2010-02-06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영하의 소설도 생각나네요^^; 좋은 주말 되세요

로쟈 2010-02-06 17:43   좋아요 0 | URL
<빛의 제국>인가요?..

얼그레이효과 2010-02-06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예전 기억으론,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가 떠올라서요.^^;

로쟈 2010-02-08 13:42   좋아요 0 | URL
저는 영화도 봤는데, 마조히즘 장면이 얼른 떠오르진 않는군요.^^;

펠릭스 2010-02-07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의 권력에 예속되어 자신의 둥지를 만들려는 인간의 자존력이 곧 생존 본능같습니다(06:31). 오후에 우연히 <모피를 이은 비너스>의 표지 그림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오스트리아생)'의 '키스'를 보게되어 반가웠어요. '자허마조흐' 책의 표지에 자주 등장하는 '클림트'의 그림은 출판기획자의 의도인지 작가가 좋아한 그림인지 궁금합니다.

로쟈 2010-02-08 13:42   좋아요 0 | URL
영화 <클림트>도 볼 만합니다. 같은 오스트리아 출신이기도 하네요...

딸기 2010-02-07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96년에 나온 <모피를 입은 비너스>를 읽었어요. 재미있었는데...
근데 저는 그 책보다 장정일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가 훨씬 더 재밌었어요 ^^

로쟈 2010-02-08 13:39   좋아요 0 | URL
그거야 그럴 거 같긴 해요.^^
 

이번주에 가장 눈에 띄는 재출간 도서는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비봉출판사, 2009)이다. 지난 1996년에 출간됐다가 절판됐었는데, 액면가는 2만원에서 2만 5천원으로 올랐다. 상대적으로 초판이 얼마나 비쌌던가를 알 수 있다(새삼 적시하는 것은 내가 책을 구입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기 때문). 이번엔 소장도서로 마련해둠직하다(게다가 전면개역판이라고 한다). 리뷰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09. 11. 07) 철학자’ 애덤 스미스의 역지사지 도덕론 

애덤 스미스(1723~1790·그림)의 가장 유명한 저작은 <국부론>이다. 근대 경제학의 탄생을 알린 저작이기도 하다. 그러나 스미스를 유명인사로 만든 출세작은 <국부론>보다 앞서 집필한 <도덕감정론>(1759)이다. 1996년 한 차례 번역·출판된 바 있는 이 책이 출판사의 전면적인 번역 수정을 거쳐 명료한 문장으로 새롭게 나왔다. 



스미스는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그 자신은 경제학자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경제학이 분과학문으로 독립한 것은 20세기의 일이다. <도덕감정론>으로 명성을 얻었을 때 사람들은 그를 ‘철학자 스미스’라고 불렀다. 스코틀랜드 소도시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스미스는 글래스고대학과 케임브리지대학을 나온 뒤 1752년 글래스고대학 도덕철학 교수로 임용됐다. 그 자리는 전 시대에 도덕철학자로 이름을 날린 스미스의 스승 프랜시스 허치슨의 뒤를 이어받은 것이었다. 도덕철학은 오늘날의 사회철학에 해당한다. 스미스는 이 시기에 유창한 강의로 학생들의 사랑을 받았다. 도덕철학자 스미스의 강의가 책으로 열매를 맺은 것이 바로 <도덕감정론>이다.

<도덕감정론>은 <국부론>만큼이나 오해의 안개에 쌓여 있는 저작이다. <국부론>이 인간의 이기심을 찬양하는 저작인 데 반해 <도덕감정론>은 이타심을 강조한 저작이라는 것이 그런 오해의 한 양상이다. <국부론>의 이기심을 <도덕감정론>의 이타심으로 제어하고 교정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국부론>에서 시장원리주의를 설파한 스미스가 그보다 먼저 <도덕감정론>에서 복지국가론·후생경제학을 주창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이해는 스미스의 사상을 통합적으로 인식하지 못한 데서 오는 오류임이 분명하다.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은 동일한 원리 위에 세워진 중층 건물과도 같은 저작이다. <도덕감정론> 위에 <국부론>이 얹힌 모습인 것이다.

‘도덕감정론’ 하면 도덕심 또는 이타심이 떠오르기 십상인데, 도덕감정을 이타심으로 한정하여 이해한 사람은 스미스의 스승 허치슨이었다. 스미스는 스승의 생각을 비판하고, 이타심뿐만 아니라 이기심도 도덕감정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가 도덕감정의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동감(sympathy·공감) 능력’이다.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의 기쁨·슬픔·욕구·분노를 함께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공감할 경우 즐거움을 느끼고 그 감정에 공감하지 않을 경우엔 불쾌함을 느낀다.

스미스는 공감하느냐 공감하지 않느냐를 가르는 기준은 ‘적정성’이라고 말한다. 이타심이라고 해서 꼭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자신과 가족을 팽개치고 남을 돕는 행위는 그것이 아무리 이타적이라고 해도 공감을 얻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자기 이익을 도모하는 이기적 행위도 그것이 적정한 수준이라면 공감을 불러올 수 있다. 처지를 바꿔 생각해보는 역지사지의 상상력이야말로 공감 능력의 비밀이다. 그렇다면 그 적정성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스미스는 여기서 ‘제3의 공정한 관찰자’를 제시한다. 인간 행위의 경험적 축적 위에서 그런 관찰자를 상정할 수 있으며 사람들 각자의 마음속에도 그런 관찰자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 관찰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면, 이기심이든 이타심이든 도덕성을 획득했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스미스가 규명하려고 하는 것은 이기심이 사회적 조화와 질서를 깨뜨리지 않고 개인의 발전과 사회의 발전을 동시에 가져올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스미스는 공감의 원리가 이기심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조화와 발전이 가능하다고 본다. 마치 중력의 법칙에 따라 하늘의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질서 있게 운행하듯이, 인간의 이기심도 질서에 위배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도덕감정론>의 이런 규명 위에서 <국부론>의 논의가 펼쳐진다.

그렇다고 해서 스미스가 인간의 이기심을 무조건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냉정한 경험적 관찰을 통해 이기심의 강력성을 인정하고, 그 이기심이 적정하게 제어되고 공정하게 관리될 경우 사회적 이익 증진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보았을 따름이다. 스미스가 활동하던 시대는 매뉴팩처(공장제 수공업) 시대였다. 노동과 자본이 분화되지 않고, 자본가도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고 먹고 자고 하던 시대였다. 스미스가 생각한 ‘보이지 않는 손’의 조화와 질서는 소박한 단순상품생산 시대의 목가적 세계상을 반영하고 있다. 그의 이론을 노동과 자본이 극단적으로 분화된 현대 독점자본주의·금융자본주의 시대에 곧바로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옮긴이는 말한다. 신자유주의 이론가들이 스미스의 ‘자유방임’ 논리를 자신들의 근거로 끌어들인 것은 시대착오인 셈이다.  

더구나 스미스의 ‘자유방임’ 주장은 그 시대의 상업자본가들의 독점과 특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었다. 그는 이기심이 제어되지 않고 폭주할 경우에 사회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인애가 없어도 사회는 존속할 수 있지만, 정의가 부재하면 사회는 붕괴한다.” 모든 반칙과 특권에 반대하는 ‘급진적 철학자’가 스미스였던 것이다.(고명섭 기자) 

09. 11. 07.   

P.S. '급진적 철학자'로서 혹은 '윤리학자'로서의 애덤 스미스를 재조명한 책들이 없진 않다. 조나단 와이트의 경제학 소설 <애덤 스미스 구하기>(생각의나무)가 대표적이다. 개인적으론 1998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티아 센의 <윤리학과 경제학>(한울아카데미, 1999) 덕분에 <도덕감정론>의 의의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센은 펭귄판 <도덕감정론>의 서문을 쓰고 있기도 하다). 제목은 '윤리학과 경제학'이지만, 센은 경제학의 두 가지 기원으로 '윤리학'과 '공학'을 든다(각각 윤리학적 기원과 계산논리적 기원이다). 경제학이 오늘날과 같이 탈윤리적 성격을 갖게 된 것은 윤리학적 기원에 대한 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절반의 경제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센은 이렇게 지적했다.  

이른바 '현대 경제학의 시조'로 불리는 애덤 스미스는 글라스고 대학의 도덕철학 교수였다. 더구나 경제학의 주제는 오랫동안 윤리학의 한 분야 같은 것이라고 여겨졌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꽤 최근까지 경제학을 '도덕철학 우등졸업시험'의 한 분야로서 가르치고 있었다는 사실은 경제학의 본질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를 보여주는 한 예이다.(17쪽)    

해서 이러한 전통에서 일탈한 현재의 '주류 경제학'은 일종의 '돼먹잖은 경제학'이다(거기에 비한다면 센코노믹스는 좀 '돼먹은 경제학'이겠다). 돈은 많이 벌어서 으스대지만 안하무인이고 근본을 모르는 망나니. 소위 '경제학'에 대해 내가 가진 불편한 느낌의 기원도 그런 데 있다. 고등학교 때 '경제'를 배웠지만, 기억에 <국부론>의 애덤 스미스만이 조금 언급되었을 뿐 <도덕감정론>은 다뤄지지 않았고, 경제학의 윤리학적 기원에 대한 소개도 없었다. 그 때문인지 단 한순간도 경제학을 전공하겠다는 생각은 갖지 않았고, 대학에 들어와서도 경제학은 단 한 과목도 수강하지 않았다. 경제학이 도덕철학의 일부였다는 것만 알았어도 생각을 조금 달리했을 지 모를 일이다...   

P.S.2. 대출도서를 반납하기 위해 동네 도서관에 잠깐 들렀다가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에 관한 참고도서를 살펴봤다. 별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이 몇 권의 책에서 관련 장을 복사했는데, 일단 제임스 버컨의 <애덤 스미스 경제학의 탄생>(청림출판, 2007)이 전체적인 윤곽을 잡는 데 요긴해 보인다. "<도덕감정론>은 흄과 허치슨, 맨더빌, 샤프츠버리, 로크, 홉스를 거슬러올라가, 17세기 시민전쟁의 정치적, 종교적 소용돌이에 말려드는 도덕적 문제에 대한 영국의 오랜 전통의 절정이자 최후를 장식하는 백조의 노래다."(83쪽)라는 게 서두의 평. 저자가 경제학자가 아니라 영국의 소설가이자 비평가라는 점이 이상하지 않다. 한 대목 더 인용하면,  

이 책의 제목은 철학적 저작의 의도를 정확히 대변해준다. <도덕감정론>은 왜 어떤 행동은 옳고 어떤 행동은 그른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외적 권위가 필요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옳거나 그르다고 느끼게 되는가 하는 문제를 설명하려 한다. 이 책은 인간에게 언제나 옳고 좋은 것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경우에 인간이 어떻게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가 하는 문제를 탐구한다. '왜 여자가 정숙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왜 남자는 여자가 정숙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를 따진다.(86쪽)  

홍훈 교수의 <인간을 위한 경제학>(길, 2008)은 제목보다는 '고전으로 읽는 경제사상사'란 부제가 더 적합한 책인데, <도덕감정론>에 대해서도 내용을 잘 정리해주고 있다. 박순성 교수의 <아담 스미스와 자유주의>(풀빛, 2003)은 생각 밖으로 알찬 소개서이자 연구서. 스미스의 경제학과 윤리, 혹은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의 관계에 대해서는 7장과 8장, 두 장에 걸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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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애덤 스미스를 다시 읽는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12-16 23:26 
    애덤 스미스에 관한 책은 드물지 않게 나와 있고, 그의 <도덕감정론>이 <국부론>만큼 중요하게 간주돼야 한다는 것도 '상식'에 속하지만, 분량이 만만치 않아서 직접 읽어볼 엄두를 못 내는 독자가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도메 다쿠오의 <지금 애덤 스미스를 읽는다>(동아시아, 2010)은 그런 독자들을 위한 책으로 보인다. 이미 일본에서는 베스트셀러였다고 하니 '좋은 입문서'에 대한 관심으로도 읽어봄직하다는
 
 
펠릭스 2009-11-07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술의 기본 미덕은 '공감'인데요. 쌍방의 적정 수준을 유지함으로서
의식이나 물질의 흐름(소통)이 일어난다는 말같습니다. 대학1학년때
경제학개론(고교때 정치경제) 수강후로 오늘 처럼 일상의 경제용어를
공부했습니다. 윤리학과 경제학 문장들은 선문답같아 쉽지 않습니다.

로쟈 2009-11-07 17:27   좋아요 0 | URL
사실 주류 경제학은 '경제공학'이라고 개명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첨단의 '금융공학'처럼). 인간과 삶에 대한 지극히 협소한 이해에 근거하고 있으니까요. '제몫 찾아주기'가 필요한 듯싶습니다...

[해이] 2009-11-07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헛 사야지 ㅋㅋ

로쟈 2009-11-07 22:01   좋아요 0 | URL
^^

다이조부 2009-11-07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에는 2만원에서 5천원 올랐는데 그렇게 많이 오른건가 싶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까

당시 책값이 비쌌네요.

제가 2001년 대학신입생때 김밥집에서 서빙을 하면 꼴랑 시간당 2000원을 받았는데,

요즘 그런 일을 하면 5000원까지 받을 수 있거든요.

로쟈 2009-11-07 22:01   좋아요 0 | URL
네, 요즘 책값들에 견주면 3만원은 넘어갈 텐데, 재판이라서 그 정도로 매겨진 듯해요. 초판은 정말 비쌌죠. 요즘이라면 4만원대 책이었습니다...

koreack 2009-11-11 0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제공학' 공부하고 있는 박사과정생입니다. 경제학에 대한 그 불편하신 감정은 이해가 갑니다마는.. 지극히 협소한 이해라고 하시면 경제학자들 많이 섭섭하겠군요. 주류(어디까지를 '주류'라고 봐야할지도 모르겠네요. 맑스경제학 하시는 분들에게는 어지간한 비판적 학자도 전부 '주류'로 보일테니...) 경제학의 세상을 보는 시각과 방법론, 현실적 영향력에 관해서는 미국에서도 활발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저도 그렇고 많은 학자들이 크루그만이 말한 것처럼 현란한 수식을 통해 당연한 사실을 하나 증명해 놓고 그 틀을 세상 전체로 확대하고 때로는 남들이 그렇게 보기를 강요하려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수리적, 체계적 연구방법과 분석적 시각 자체가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또 수리적 틀을 통해 세상을 분석하는 것이 낸 성과와 그 시각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어쩌면 그래서 다른 학문분야와의 결합이 더욱 가속화되어가는 거겠죠. 오히려 다른 학문 영역을 침범한다고 "제국주의적"이라는 비판을 하시는 분들도 많지 않던가요? ^^ 경제와 인간의 복지, 자유 등에 대한 센의 철학적 논의 역시 의사결정론과 일반균형이론 영역에서 남긴 수리적 분석에 기반하여 나온 것이랍니다. 센의 후기 저작이 아닌 그 논의들만 보셨다면, 역시 "협소하다"는 평을 내리셨을 것 같습니다만. ^^

로쟈 2009-11-08 10:53   좋아요 0 | URL
섭섭해할 경제학자들이 많다면 오히려 다행인데, 정말 그럴지는 의문입니다.^^; 경제공학이란 '비아냥'을 면하기 위해선 경제학의 목적과 용도에 대한 성찰이 필요할 듯해요. 이번 경제위기에 직면해서도 경제학자들의 무능력이 도마에 오른 적이 있는데, 특히나 한국에서는 경제학자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C급 경제학자 우석훈씨의 푸념이기도 하지만...

펠릭스 2009-11-08 12:03   좋아요 0 | URL
자연과학은 통제된 실험을 할 수 있지만 경제학은 경제자체가 우리들 이야기이기(경제할동) 때문에 모형을 만들어 예측하기 쉽지 않을 것같아요. 인간의 뇌, 자연의 기후, 경제의 공통점은 '답이없다'지만 예측성 해설만으로는 쉽지 않을 것같습니다. 그런 연유로 다른 학문과 결합이 가속화될 것같구요. 우리의 현실에 유능하고 겸손한 경제학자와 포용적이며 거시적인 정치가가 필요함을 느낍니다. 최근에는
well-being GDP 를 제시한 학자도 있다는데요.

yamoo 2010-07-19 18:30   좋아요 0 | URL
수리적 틀을 통해 세상을 분석하는 성과과 그 시각...인문분야에서 경제학만 그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설득력 있는 깔끔한 설명방식..원츄입니다~ㅎㅎ

노이에자이트 2009-11-08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경국은 요즘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시장의 자유를 강조하는 글을 많이 쓰더군요.아담 스미스는 탐욕스런 상인들을 그 누구보다도 비판했지요.저는 다카시마 젠야<아담 스미스>가 좋았습니다.문고판에 값도 싸구요.저자는 사람들이 아담 스미스를 기업하는 자유를 이론적으로 다져놓은 인물로 오해하는 것에 대해 바로잡으려고 그 책을 썼다고 말했습니다.

로쟈 2009-11-08 18:45   좋아요 0 | URL
대개는 하이예크주의자를 자처하는 학자들이죠. 아담 스미스는 좀 특이한 포지션인 거 같습니다. 같은 자유주의라 하더라도...

koreack 2009-11-11 0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흠.. 또 왔습니다. ㅎㅎ 이거 괜히 잘못 적었다가 욕얻어먹는게 아닌가 싶긴 하지만... 사실 로쟈님의 블로그를 즐겨 보고, 선배의 선배님이라서 개인적인 이야기도 몇번 들은 적도 있습니다. ㅋ 그러니 미워하진 말아주시고 귀엽게 봐주시길. ^^
말씀하셨다시피 경제학의 목적과 용도, 성격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거리가 있겠죠.. 저는 현재의 모습에 불만이 있지만, 한편으로 백안시하는 시각 역시 공정하지 못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practice로서의 성격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면 (제 생각에는 경제학이 이 측면에 있어서 과도한 기대를 받는 측면이 분명 있다고 생각합니다. 큰 학문 규모에 따른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르지만요) 학문의 성격 자체에 대한 회의까지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구체적 개별 사례를 설명하는 것보다는 일반적 원리를 설명하는 것이 과학의 본질 아니던가요. 베이컨 등등의 시기 정립된 과학의 성격이라는 것도 그러하고요. 물론 모형의 구축과 일반화는 예측을 위한 시도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에 대한 비판이 "쟤는 왜 경제위기를 예측도 못해?"라는 식으로 이어진다면 모든 학문이 유사한 짐을 짊어질 수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인문학에 구체적인 처방을 내놓으라고, 그렇지 못하니 뜬구름 잡기라고 한다면 그것 역시 공정하지 못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제 변호 대신 자아비판(?)을 해보자면... 경제학을 공부하면 기본적으로 normative하기보단 positive한 면을 배웁니다. 방법론을 엄밀히 한다는 점에서 나쁘게 보지 않지만, 결국 이것이 개별 학자들의 세계관을 고정시키는 측면이 있습니다. 물리학적인 세계관과 방법론을 원용한 것까지는 좋은데, 잘못하면 프로크루테스의 침대 꼴이 되기 십상이라는 것이지요. 다른 중요한 문제점은 경제학계의 에너지가 "보다 정밀한 모델의 구축"과 "경제학적 틀로 구체적 현상을 설명"하는데 많이 쓰인다는 것입니다. 케인즈와 같이 "천재의 시대"가 가고, 아주 작은 것들의 설명 내지 개선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진 시대의 단면이지요. 저는 이게 틀렸다고는 말할 자신이 없지만, 그만큼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명쾌한 답을 주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고, 이것은 분명 시정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구조적 담론을 제시하는 (주로 좌파경제학 하시는 분들이지요) 분들에게서는 (수리/계량적 방법을 기반으로 하는 입장에서 보기에) 체계성이 떨어지거나, normative한 부분이 너무 많이 보입니다. 창조적인 시각을 제시하기에는, 학계의 분위기도 그렇고 "직업상" 분위기가 주류나 비주류나 너무 빡빡하죠.
하지만 각각 저는 기여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제학자들이 반드시 사회의 큰 틀을 설명해야 할 의무는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히려 어설피 거대담론을 제시하는건 입과 귀만 피로하다고 생각하고요. 임금, 산업, 금융 등 이슈에서 구체적인 기준 하나를 잘 설정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도 경제학자들이 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사회적 자본, 건강 불평등이 갖는 심리적, 문화적 함의 등 우리 사회의 보다 복합적인 측면을 보려는 시도들이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래봐야 저는 아직 일개 학생이지만) 아직 대안적 시도들은 한계가 많습니다. 단적인 예로 스티글리츠가 MEW를 만든다고 하는데, 이것이 의미가 있으려면 역사적, 보편적 분석이 가능한 수준까지 가야 하는데 어느 정도까지 가능할지는 모르겠네요..
글이 너무 길었는데, 어쨌든 제 말씀은 이런겁니다. 경제위기로 인해 합리성 가정이 송두리째 날아가고 갑자기 행태경제학에 의존하려는 등의 행동 역시 그다지 생산적이지는 않다는 것이죠. 그런 움직임은 다른 대안에서도 곧 실망을 맛보게 될겁니다. 비판은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하지만,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실들을 발견하는 노력에도 정당한 credit은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미스가 가졌던 혜안을 상당부분 잃은 것은 아쉽지만, 그것을 다시 얻는 방식이 반드시 옛날식이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지금 경제학자들의 몫이겠쬬.
시간이 있으시다면, 크루그만 등과 주류경제학자들의 논쟁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다른 것을 떠나 이런 논쟁 자체가 사실 상당히 부럽습니다. ^^
http://www.nytimes.com/2009/09/06/magazine/06Economic-t.html
http://modeledbehavior.com/2009/09/11/john-cochrane-responds-to-paul-krugman-full-text/

로쟈 2009-11-11 20:21   좋아요 0 | URL
네, 자세한 댓글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류동민 교수의 <프로메테우스 경제학>을 보니 문제의 지형이 짐작가능했습니다. normative한 맑스주의 경제학도 positive한 설명(수학적 논리에 기초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한다고 저자는 썼더군요. 거꾸로 이제 positive 위주의 경제학도 어떤 normative를 계획할 수 있는지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지난주 서점에 들렀을 때 눈에 띈 재간본은 바타이유의 <에로티즘>(민음사)이다. 중간에 여러 쇄가 나오긴 했지만 1989년에 초판이 나왔으니 20년 전이다. 말하자면 '20년전 화제작'이다. 표지가 달라졌는데, 일부 논란이 되기도 했던 번역은 그대로인지 궁금했다('개정판'이 맞는지 확인해볼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는데, 외관상으론 달라진 게 없는 듯했다). 그간에 저자의 이름이 '바타이유'에서 '바타유'로 바뀐 것도 변화라면 변화이겠다(개인적으로 별로 달갑지 않은 변화다. 나는 고유명사의 표기는 어느 정도 '고정적'이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베이유'가 '베유'가 되고, '바타이유'가 '바타유'가 되는 사정이야 어림짐작할 수 있지만, 그것이 과연 '필수적'일까? 결과적으로 우리는 두 개의 고유명사로 한 사람을 지칭하게 됐을 뿐이다). 

 

<에로티즘>과 함께 또 눈에 띈 책은 “우리가 알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가?”란 질문을 화두로 던지는 로저 샤툭의 <금지된 지식>(텍스트, 2009)이다. 예전에 같은 역자에 의해 두 권짜리로 출간됐던 책. <금지된 지식>(금호문화, 1997)이니까 12년 전이다.    

  

매스컴의 주목을 받긴 했으나 당시엔 좀 '고루한' 제목 때문에 나는 손에 들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 학기에 <실낙원>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도서관에서 대출하여 참고문헌으로 읽었다. 전체를 통독한 건 아니고 <실낙원>과 <파우스트>, <프랑켄슈타인>, <이방인> 등에  대한 '작품론'으로 읽은 것인데, 그런 차원에서도 아주 유익했다. 이미 절판된 이 책이 다시 나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게 된 건 당연한 일. 예기찮게도 이렇듯 일찍 나와서 반갑다. 한권으로 묶인 것도 더 마음에 든다.   

 

'옮긴이의 글'을 보니 저자 샤툭 교수는 지난 2005년에 전립선암으로 사망했고, 그 사이에 두 권의 책을 더 남겼다. 한권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한 가이드북이다. 나도 지난 학기에 저자에 대한 '뒷조사'를 하면서 궁금했던 책이다. 프루스트 단편전집의 서문을 쓰고 있기도 하므로 프루스트 전문가이기도 하다. 저자 소개엔 <마르셀 프루스트>란 책으로 미국도서상을 수상했다고 돼 있는데, 1982년에 나온 책에 <마르셀 프루스트>가 있지만 180쪽 분량이어서 수상도서가 맞는지는 모르겠다(다시 찾아보니 1974년에 쓴 프루스트 평전이 수상작이다).    

새로 출간된 <금지된 지식>의 의의? 출판사에서는 이런 기대를 적어놓았다. "12년 전 처음으로 국내에 번역 소개된 이 책은 당시 복제양 탄생과 함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이후 2005년 유명을 달리하기까지 로저 샤툭은 자신의 최종적인 세계관과 인간관을 종합적으로 체계화한 역작인 이 책의 논지를 반복하며 강연을 하러 다녔다. 생전에 핵무기 확산 반대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평생에 걸쳐 대체로 보수의 손을 들어주는 듯한 논지를 펼친 샤툭이 첨단 과학과 학문 및 예술의 기수들에게 얼마나 호소력을 가질지는 의심스럽다. 하지만 ‘순수한 앎’의 추구와 ‘알고자 하는 탐욕’의 제한 사이에서 긴장과 조화를 고민하고 문명의 향방을 가늠하려는 노력에 진보와 보수가 따로 있을 수는 없다는 데 동의한다면 샤툭은 분명 현대를 사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통찰을 제공할 것이다." 

나는 그냥 한권의 인문서로도 일독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09. 0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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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09-14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로티시즘과 금지되 지식 두권 모두 오래전에 읽었는데 내용이 가물가물 하네요.로쟈님 글을보고 창고에 먼지쓴 책좀 찾아서 다시 읽어 봐야 되겠군요^^

로쟈 2009-09-15 22:16   좋아요 0 | URL
그러실 것까지야...^^
 

북캉스의 계절도 다 지나간 것인지 눈에 띄는 신간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몇 권의 책을 보관함에 넣어두면서도 개인적으론 '허기'를 느낄 정도다(이럴 때는 도서관 검색을 통해서라도 필요한 '영양분'을 보충한다). 20세기 전반기 일본의 경제학자 가와카미 하지메의 <빈곤론>(꾸리에, 2009)에 눈길이 가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소개기사들을 읽어보면 강한 호소력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인 빈곤론이라고 하기엔 많이 빈약한 책이다(즉 빈곤한 빈곤론이다). <인간실격>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가 경제학 전공이었다면 이런 책을 쓰지 않았을까 싶다(즉 일본적인 에토스인지도 모른다). 찾아보니 예전에 <가난 이야기>(서셕연 옮김, 범우사, 1994)라고 번역된 적이 있고, 신경림 시인이 문학인생에 대한 회고에서 가와카미와의 특별한 인연을 언급한 적이 있다(그러고 보면 가와카미의 책도 경제서라기보다는 '시'에 가까운 게 아닌가 한다). '오래된 새책'으로 분류하면서 제목은 '가와카미 하지메와 신경림'이라고 붙인 이유다.      

가난이야기(범우사상신서 052) 

한국일보(09. 08. 22) 가난과 맞선 '도덕적 마르크스주의자'

가와카미 하지메(河上肇ㆍ1879∼1946)는 20세기 초 일본 교토대 경제학부의 상징적인 존재였다. 그의 집 근처를 지나면서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하는 학생들을 보며 경제학부의 가와카미인지, 가와카미의 경제학부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삶과 사유를 일치시키려 한 그의 생애에는 시대의 영광과 좌절이 함께 하고 있다.

<빈곤론>은 그가 교토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1916년 오사카 아사히신문에 연재한 글을 책으로 묶은 것이다. 사람들이 왜 가난하고, 가난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그의 생각들을 모았다. 부자들의 수요가 사치품에 몰리고 생산자들은 그에 맞춰 사치품을 만드느라 생활필수품을 생산하지 않아 가난한 사람이 생긴다는 게 그가 지목하는 빈곤의 원인이다. 따라서 가난을 해소하려면 부자들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중단하고 필수품이 가난한 사람에게 돌아가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책이 나올 당시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한편에서는 벼락부자가 속출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물가가 폭등해 사회적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빈곤 문제를 고민하는 이 책이 나오자 대중은 열렬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유물사관의 관점을 유지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도덕에만 매달린다는 비판도 함께 제기됐다. 그러자 가와카미는 그 비판을 수용하고 책의 절판을 요구했다. 저자도 인정했듯 이 책은 한계가 분명하다. 부자의 사치 근절로 빈곤을 막을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지나치게 순진할 뿐 아니라 현실적 해결 방안으로 이어지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곤론>에는 가난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과 함께, 그 가난과 맞서 싸우려는 그의 열정과 신념이 들어있다. 가난에 대한 가와카미의 태도는 1901년 겨울 대학생 신분으로 한 모임에 참가했다가 옷을 벗어준 일화에서도 확인된다. 마침 그 모임에서 모금 바구니가 돌았는데 돈이 없던 그는 외투, 상의, 목도리 등을 다 벗어주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그는 다음날 입고 있는 옷만 빼고 집에 있던 옷을 모두 그 모임에 기부했다고 한다.

가와카미는 개인의 도덕성을 평생 잊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빈곤론>에 제기된 비판을 수용하고 마르크스 이론을 공부하면서 과학적 사회주의를 향해 나아갔다. 정부는 그런 그를 대학에서 쫓아냈고 대학에서 나온 그는, 전편이 강조한 도덕성에 마르크스주의를 더해 <빈곤론2>를 썼다. 사상범을 단속하던 특고경찰에 검거돼 3년 9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그는 "투쟁 현장 뒤로 물러난 일개 노병에 불과한 나는 그저 인류 진보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사회 한 구석에서 조용히 숨을 쉬고 싶을 따름"이라며 칩거하면서 자서전 집필과 <자본론> 번역에 매진하다 1946년 1월 영양실조에 급성폐렴이 겹쳐 세상을 떠났다.  

  

한겨레(09. 08. 22) “결핍의 공포, 이것이 바로 가난”

<빈곤론>은 20세기 전반기 일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대표하는 학자 가와카미 하지메(1879~1946)의 저작이다. 37살 때 쓴 이 책은 대작도 아니고 대표작도 아니지만, 가와카미의 얼굴과도 같은 구실을 하는 저작이다. 이와나미서점에서 나온 ‘가와카미 하지메 전집’ 36권 가운데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이 이 저작이라고 한다. 한 손에 잡히는 이 단출한 책에는 가난의 고통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한 윤리적 인간’의 정신이 담겨 있다.

가와카미의 삶은 전력을 다하여 진리를 찾는 구도자의 삶을 닮았다. 만행과도 같은 맹렬한 사상 편력이 여기서 비롯했고, ‘윤리적 마르크스주의’라는 독특한 경지가 이 편력의 끝에서 열렸다. 1905년 <요미우리신문>에 ‘사회주의 평론’을 열화와 같은 독자 호응 속에 연재하던 26살 도쿄대 강사는 이 연재물을 갑자기 중단하고 ‘절대적 이타주의’를 내세운 종교단체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이 종교단체의 실상이 자신의 이상과 맞지 않음을 알고 두 달 만에 뛰쳐나왔다. 이 일화는 진리를 보았다고 생각하면 좌고우면하지 않고 바로 행동에 돌입하는 그의 삶의 자세를 보여줌과 동시에 그가 ‘이타적 도덕주의’를 일찍이 삶의 화두로 삼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부르주아 경제학에서 학문적 이력을 시작한 그는 40대에 이르러 마르크스주의로 행로를 바꾸었고 공산당에 입당했다. <자서전>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로자 룩셈부르크 같은 용기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보다 더 나이가 들어 비로소 입당 기회를 얻고서 로자처럼 울었다.” 가와카미는 결국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분야에서 독보적 업적을 쌓았지만, 도덕주의라는 근본태도는 마지막까지 기저음으로 남아 그의 사유에 독특한 울림을 심었다.

<빈곤론>은 그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 전인 1916년에 신문에 연재해 이듬해 출간한 책이다. 이 책에는 빈곤과 궁핍의 시대를 향한 가와카미의 분노 섞인 규탄과 이 사회적 질병을 퇴치할 방책에 대한 논구가 담겨 있다. 그는 ‘자발적 가난’과 ‘강제된 가난’을 구분한다. 스스로 선택하여 기꺼이 받아들인 가난과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가난은 같을 수 없다. 가난이란 그저 물질이 부족한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결핍의 공포와 두려움, 이것이 바로 가난이다.” 그 공포와 두려움이야말로 ‘강제된 가난’의 본질적 모습이다. “사람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지만, 빵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자발적 가난은 절감하지 못한다.

이 강제된 가난의 실상을 규명하려고 그는 ‘빈곤선’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육체의 정상적 발육과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생계비가 이 빈곤선을 긋는 지점이다. 최저생계비조차 마련하지 못하는 ‘빈곤선 이하’의 상태가 그가 말하는 가난, 곧 절대적·절망적 가난이다.

그는 통계 자료를 끌어들어 세계 최대의 부국이라는 영국의 런던에서조차 빈곤선 이하의 가난한 사람이 인구의 30%에 이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울러 최상층 2%가 전체 부의 72%를 소유하고 있음도 밝힌다. 그렇다면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에 왜 이렇게 가난한 사람이 많은지 이유가 밝혀진다. “소수의 부자가 엄청나게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와카미는 이어 왜 가난한 사람들이 죽도록 일을 하고도 생필품조차 제대로 얻지 못하는가 하는 물음을 던진다. 그는 ‘필요와 공급의 불균등’을 원인으로 제시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구매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꼭 필요한 공급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공급은 생활에 하등 필요하지 않은 사치품으로 쏠린다. 구매력이 큰 부자들의 수요 때문이다. 가와카미는 사치품 생산에 생산력이 소비되느라 생필품에 필요한 생산력이 줄어든다고 성토한다. 절대적 빈곤을 없애려면 사치품 소비를 줄이고 생산력을 생필품으로 돌려야 한다. 이런 진단은 산업예비군의 압력이 노동자들의 임금을 끌어내린다는 사실, 그리고 최저생계를 감당할 만큼 임금을 올리려면 노동자들의 투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가와카미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어쨌거나 이런 진단 위에서 가와카미는 빈곤이라는 시대적 질병을 퇴치하려면 부자들의 사치 근절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유한계급의 사치는 사회의 죄악이다.” 왜냐하면 사치품을 생산하느라 사회의 생산력이 생필품에 돌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산업을 국유화해 나라에서 생필품을 생산하는 식으로 경제 조직(자본주의 체제)을 개조하는 것도 방법임을 가와카미가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체제 개조가 근본 방책이 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외적인 제도를 바꾸는 것보다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가와카미의 도덕주의적 관점은 적지 않은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10여년 뒤 가와카미는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해 <제2 빈곤론>(1930)을 써 앞 책의 한계를 고백하고 극복했다. 그러나 <빈곤론>에 담긴 그의 진단과 처방은 당대의 젊은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가난을 강요하는 사회 현실에 대한 도덕적 분노의 파토스가 사람들의 폐부를 찔렀던 것이다. 1933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돼 4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던 가와카미는 끝까지 마르크스주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지만 실천의 장에서 물러난 자신을 ‘전향자’로 간주해 스스로 유폐 생활을 했다. 그는 일본 패전 직후인 1946년 영양실조와 급성폐렴으로 숨을 거두었다.(고명섭 기자)    

 

한국일보(02. 07. 17) "詩는 스스로 충만한 한그루 나무"

내가 시 쓰는 일에 회의를 느낀 것은 문단에 나온 직후이다. 내가 추천을 받은 시는 ‘낮달’ ‘석탑’ ‘갈대’ 등 이른바 순수 서정시였는데, 그 무렵 서울은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아, 곳곳에 폭격이나 포탄으로 허물어진 집이 즐비하고, 팔이나 다리가 잘린 젊은이들이 길거리에 늘어서 있었다. 나를 사로잡은 것은 절망감이었다. 하지만 내 시는 내 절망감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내 시가 우리가 사는 일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하면서 나는 시와 서서히 멀어졌다. 그 무렵 우리 시를 지배하고 있는 정서는 전통적 서정이 아니면 신이니 존재니 하는 관념이었던 터다.  

그때 내가 즐겨 다니던 곳은 동대문과 청계천 일대의 고서점들이었다. 거기서 이미 알고 있던 백석의 ‘사슴’이며 이용악의 ‘낡은 집’ 등의 시집을 구해 읽으면서 내 시에 대한 생각은 바뀌기 시작했지만, 특히 내 생각을 크게 바꾼 것은 카와카미 하지메(河上肇)의 ‘가난 이야기’였다. 이 책을 읽고 나자 세상이 새롭게 보였다. 눈 앞을 가리고 있던 안개가 말끔히 걷힌 것 같았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이때부터 만나는 친구들도 달라졌다. 문학하는 친구들 대신 고서점에서 만난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외국 사람들의 본을 따서 수요회라는 이름을 붙인, 말하자면 독서그룹으로였다. 이 모임에서는 새로운 책을 읽은 사람들이 그날 그날의 리더가 되므로 경쟁적으로 책을 읽게 되었는데, ‘공산당 선언’ 같은 문서도 이때 처음 접한 것이다. 시와는 더욱 거리가 멀어지면서 문학 따위 하지 않으면 어떠냐 하는 건방진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골로 내려와 10년 가까이 살게 된다. 그동안 소설도 써보고 번역도 해보고 또 진로를 바꾸겠다고 엉뚱한 공부도 해보았지만, 별로 전망이 보이지 않았다. 서울살이를 계속할 능력도 내겐 없었다. 그럴 때 수요회의 한 멤버가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이 되었다. 겁이 많은 나는 무작정 서울을 탈출했고, 대학을 다니고도 밥벌이도 못하는 미운 털이 되어서 거의 10여 년을 시골서 떠돌게 된 것이다.  

이미 아버지는 자식들 학비다 사업이다 해서 전답을 거의 팔아 없애 농사거리도 제대로 없었다. 먹고 살기가 얼마나 어려웠으면 이른 봄 마당에 있는 작약 뿌리를 다 캐 팔았겠는가. 유달리 자존심이 강하고 시샘도 많은 할머니는 아무 하는 일 없이 때가 되면 보리밥만 한 사발씩 축을 내는 부자를 앞에 놓고 시도 때도 없이 종주먹질을 했다.  

나는 밖으로 떠돌 수밖에 없었다. 공사장으로 건달 친구를 찾아가 보름씩 혹은 일주일씩 신세를 지기도 하고 광산에서 일하는 선배를 찾아가 한 달씩 공밥을 얻어먹기도 했다. 막일이라고 내가 왜 못하랴, 나는 이런 생각이었지만, 나는 이내 현장 감독들과 술친구가 되거나 장부 정리나 해주는 보조가 됨으로써 먹물 티를 냈고, 결국 내 노동현장의 삶은 늘 단명으로 끝났다. 이것을 나는 아는 사람들이 있는 탓으로 돌리고 일부러 먼 곳까지 찾아가기도 했으나, 마침내 내가 먼저 먹물임을 내세워 편한 일자리를 찾음으로써 스스로 절망감에 빠지기도 했다.  

장돌뱅이 친구가 있어 나도 한번 해볼 것이라고 며칠씩 따라다닌 일도 있고, 그의 물건을 나누어 받아 따로 다녀보기도 했으나, 깨달은 것은 먹고 살기가 이렇게도 힘드는구나 라는 사실 뿐이었다. 시골살이 10년에 내가 제대로 밥벌이라도 한 직업은 아마 학원강사 또는 개인교수였겠는데, 이 일도 내가 종종 저지르는 엉뚱한 사건 때문에 대개 뒤끝이 개운치 않게 끝났다. 나는 주위에서 무책임하고 싱거운, 이상한 소리나 하고 다니는 또라이로 낙인이 찍혔다.  

하지만 이 사이 나는 세상 공부를 다시 했다. 생각보다 농사일은 너무 힘들었고, 장사고 노동이고 쉬운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우리 땅은 사람 살기가 너무나 어려운 척박한 땅이요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것이다. 뿐 아니라 역사가 할퀴고 간 자국이 너무 깊이 남아 있었다. 가령 어떤 동네에 가 보면 같은 날 아버지 제사를 지내는 집이 여남은 집이 되었으며 또 어떤 동네는 온통 과부 뿐이었다. 보도연맹이다 부역자다 해서 같은 날 학살당하기도 하고 그 보복으로 죽임을 당하기도 한 것이다. 한 동네 살면서 서로 쳐다도 보지 않고 사는 집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 무렵 나는 다시 내게 글 쓸 기회가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글 쓸 기회가 다시 온다면 이런 사람들의 정서, 설움 같은 것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었다. 그래도 그 10여 년 동안 시에 대한 미련은 버리지 못했던 것 같다. 단 한 편도 발표하지 못하면서도 어쩌다 노트 조각 같은 데 시를 끄적였으니 말이다. 그때 그렇게 끄적였던 작품이 ‘눈길’, ‘그날’ 같은 시다. 뿐 아니다. 고(故) 김관식 시인을 우연히 길에서 만나, 우리 서울 가서 함께 좋은 시 한번 써보자는 권고를 받았을 때 나는 환호작약했다. 그의 말에 큰 무게가 실려 있지 않음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나는 그를 따라 무조건 상경했다. 갑자기 시를 쓰지 않고는 살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내가 상경해서 처음 쓴 시가 ‘겨울밤’이다. 이 시가 신문에 나오자 친구들은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내 초기 시에 호감을 가지고 있던 한 친구는 너무 오랫동안 시를 쓰지 않아 시에 대한 감각이 이상해진 것 아니냐는 투로 말했다. 그래도 나는 몇 해 동안 시골서 다시 글 쓸 기회가 오면 쓰겠다고 생각한 대로 시를 썼으니, 여기에는 내 시를 이해해주는 몇 안 되는 친구들의 격려도 적지 않은 힘이 되었다.  

이때 내가 시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생각은 시는 그 시대의 요구에 대한 대답이 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고, 이 생각은 날이 가면서 더욱 확고해졌다. 이 무렵에도 나는 여기저기서 만난 사회과학 공부하는 사람들과 많이 어울렸는데, 이들의 생각과 떠돌이 생활 10년에 내가 보고 느낀 것이 서로 같았다. 이때 쓴 시들이 시집 ‘農舞(농무)’에 들어 있는 시들이다.   

  

시는 그 시대의 요구에 대한 대답이 되지 않아서는 안 된다. 나는 한동안 이 명제에 충실했다. 결국 반유신, 반군사독재가 될 수밖에 없었으며 내 시는 그 무기가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과격한 생각까지 했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아름다운, 더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을 시를 쓰고 싶은 유혹이 도사리고 있었고, 그것이 드러나면 동료나 후배는 나를 문학주의자로 매도했다. 이 매도를 감수하면서 내 시는 경직되었던 것 같다. 문득 나는 시를 쓰기가 싫어졌고, 지루해졌다. 내가 민요에 몰두한 것은 이 무렵부터가 아니었나 싶다.   

    

민요적 정서를 시 속에 도입, 내 시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 보자는 의도였는데, 민요와의 접목은 내 시를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다. 민요는 역시 지난날의 정서요 그 말들은 오늘 살아있는 말이 되기 어려웠던 터이다. 80년대 전기간이 내게는 시 쓰기가 가장 어렵고 지루했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시집 ‘길’ 속의 시를 쓰면서 나는 서서히 민요의 중압에서 헤어났다. 고지식하게 민요 어쩌고 할 것이 아니라 민요에서도 배울 것이 있으면 배우고 배울 것이 없으면 배우지 말자는 생각이 든 것이다.  

시대의 요구에 대한 대답이란 명제도 그렇다. 그것도 그 시대의 삶에 깊이 뿌리박는 것으로 충분하지 그 이상의 대답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오늘의 내 삶, 우리들의 삶에 충실한 시를 쓰자, 이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시 쓰는 일이 조금씩 편하고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새로 낸 시집 ‘뿔’의 후기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나는 나무를 심는 기분으로 시를 쓴다. 내가 심은 나무가 아무리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단 열매를 맺어도 그것을 보지 못하고 지나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요 보고도 그 기쁨을 알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들 무슨 상관이랴, 그 나무는 그 자리에 있을 것이고 보는 사람, 아는 사람에게는 큰 기쁨을 줄 것인데. 하지만 그 나무는 오늘의 내 삶, 우리들의 삶이 심은 나무요 키워낸 나무가 아니어서는 안 된다는 점 나는 잊지 않고 있다.(시인 신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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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8-22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급성 폐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20세기 초 일본 경제학자인 '가와카미 하지메'의 가난에 대한
사유를 시인의 '파장'속에서도 찾을 수 있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깍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켜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빚 얘기
약장수 기타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싯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최고의 지성이 시장에서 '골라골라'를 외쳐도 공제선는 들어나지 않았다.
그는 무인도로 유배를 간다해도 나라의 숙제를 들고 가겠다 했다. 둘은
플라톤의 이상주의로(하지매), 아리스토의 현실주의(후광)로 극복하려 했다.

시인은 알아 차렸다. 척박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참여 해야 한다는 사실을,
시인은 자신의 삶에 충실한 시어를 '행동하는 양심'의 도구로 삼았다.
시인과 '가와카미 하지메'의 특별함은 나에게도 그렇다.

로쟈 2009-08-23 08:52   좋아요 0 | URL
"80년대 전기간이 내게는 시 쓰기가 가장 어렵고 지루했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란 고백이 인상적입니다...
 

오랜만에 '오래된 새책' 카테고리에 잘 부합하는 글을 스크랩해놓는다. 출판평론가 최성일씨가 5년의 터울을 두고 교수신문에 기고한 두 편의 글이다. '20세기 고전'의 재출간 트렌드를 다루고 있다.    

교수신문(09. 06. 29) [출판 트렌드] ‘20세기 고전의 재출간’ 재론

나는 5년 전에 ‘20세기 고전적 저작의 재출간 풍경’을 스케치한 바 있다(<교수신문> 제318호, 2004년 6월 21일자 5면 참조). 이번은 그때와는 다른 각도로 20세기 고전의 재출간에 접근하고자 한다. 헌책보다 새 책이 낫다는 것이다. 물론 새것이 늘 좋지만은 않다. 볼테르의 작품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단지 풍자적인 간명한 소설’(슈테판 츠바이크)의 제법 두툼한 새로운 번역판은 예전의 얄팍한 번역판만 못하다. 이런 경우는 예외라 할 수 있다. 재번역 여부와는 별개로, 고전일수록 새로 나온 책을 읽는 게 알맞다. 신판은 구판에 견줘 나아진 점이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새로 출간한 고전을 읽는 묘미
롤랑 바르트의 『기호의 제국』(김주환·한은경 옮김, 2008) 번역문은 초역과 그리 다르지 않다.“1997년 민음사에서 같은 제목으로 출간됐다가 이번에 산책자에서 다시 다듬어 펴내게 됐다.”(‘옮긴이의 말’) ‘옮긴이 주’ 1에선 작지 않은 변화가 보인다. “이상은 1997년 출간된 민음사 판의 옮긴이 주다. 이 옮긴이 주를 보고 많은 독자들이 여러 가지를 제보해주었으나 확인 결과 유용한 제보는 없었다. 당시에는 인터넷 검색을 해도 가라바니에 대해서는 유용한 정보를 찾을 수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면서 가라바니는 벨기에 태생의 작가 겸 화가 앙리 미쇼의 연작소설 제목에서 따온 이름이라는 요 근래의 인터넷 검색 결과를 덧붙인다.    

본문편집에서도 호의적인 변화가 감지된다. 변형판형의 1997년판은 다소 번들거리는 본문용지와 판면을 꽉 채운 사진들이 부담스러웠다. 독자에게 약간의 진입장벽으로 작용했다. 2008년판의 판형과 본문용지는 적절하다. 사진 또한 무난하게 앉혔다. 이제 보니 덴푸라는 튀김을 뜻한다(37쪽). 어묵이 아니다. 브레히트의 극작법 ‘낯설게 하기’는 이화효과라는 낯선 표현보다 상대적으로 친숙한 소격효과로 옮기는 게 어땠을까(72쪽). 



편집이 다소 촌스럽고 영역본의 重譯이긴 해도 그런대로 읽을 만했던 장 보드리야르의 『아메리카』(주은우 옮김, 문예마당, 1994)는 번역에 문제가 없지 않았다. “스냅 사진들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참을 수 없는 열기와 음악까지 포함하여 현실의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 여행에 관한 한편의 영화 전체가 필요할 것이다.”(36쪽) 이 대목의 2009년판 번역은 이렇다. “스냅사진들로는 충분치 않다. 주행경로의, 실시간의 완전 영화(le film total)가 필요할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열기와 음악까지도 포함한 것으로 말이다.”(산책자, 10쪽) 하여 번역자는 그가 옮겼던 우리말 번역문과 프랑스어판을 일일이 대조하는 작업에 들어간다. “그 결과 기존 『아메리카』의 단순한 재출간이 아니라 새로운 번역에 가까운 ‘완전 개역판’을 내놓게” 된다.  2009년판 『아메리카』는 유진 리처즈의 사진을 작가의 허락을 얻어 싣고 있다. 평원을 가로지른 왕복 2차선 도로 사진은 1994년판에 실려 있는 것과 같은 사진으로도 보인다. 



빛 바랜 책등의 제목, 여전히 듬직한 위용 

업튼 싱클레어의 장편소설 『정글』(채광석 옮김, 페이퍼로드, 2009)은 나의 해묵은 착시를 교정했다.나는 2009년판을 읽기 전까지 내가 지닌 1982년판의 제목이 ‘전진하는 삶의 길목에서’인 줄 알았다. 실제로는 『전전하는 삶의 길목에서』(동녘)다. 이 표제는 25장의 제목이기도 하다. 1982년판은 앞표지와 책등에 원제목을 부제목처럼 달아놨는데 ‘쟝글’이라는 표기법은 흘러간 짧지 않은 세월을 대변한달지. 또한 1982년판은 내용의 일부를 생략했다. 채광석 시인은 ‘옮긴이의 말’을 빌려 소설의 마지막 세 장을 생략한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한다. “본 역서의 1~28장까지 드러난 유르기스의 고난과 처참함이 유르기스 본인의 어떠한 결의와 행동에 의해 극복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독자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차라리 더 낫지 않나 싶기도 했다.” 시대 상황의 변화와 도식적인 결론을 생략의 이유로 들지만 내가 보기에는 검열의 화살을 피하려는 목적이 더 크게 작용한 듯싶다.  



2009년판은 나머지 세 장을 모두 되살렸다. 나는 2009년판 『정글』을 읽으며 소설이 그려낸 적나라한 진실성에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현재적이다. 그런데 『정글』에는 현재적인 게 또 하나 있다. 1906년 출간된 소설의 저작권이 살아있다는 사실이다. 업튼 싱클레어는 1968년 세상을 떴다. 



내가 다윈 다음으로 널리 알려진 고생물학자라는 스티븐 제이 굴드를 일찍 알게 된 것은 그의 『다윈 이후』(홍동선·홍욱희 옮김, 범양사출판부, 1988)를 통해서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몰라도 책이 나온 그해 2월 11일 부평역 인근의 오성서림에서 책을 사서 단숨에 읽었던 기억이 있다.굴드가 개진한 ‘생물학 사상의 현대적 해석’과, 이에 걸맞은 유려한 번역이 한데 어우러져 무지한 독자는 지적 충일감을 만끽한다. 아쉽게도 『다윈 이후』는 한동안 절판 상태였다. 새로 나온 사이언스북스판 『다윈 이후』(2009)는 금박을 입힌 제목과 양장본의 호사를 누린다. 그런 대접을 받아 마땅하다. 그렇지만 이제는 빛에 바래 책등의 제목이 흐릿해졌어도 범양사출판부판의 듬직함은 2009년판의 ‘위용’에 전혀 안 꿀린다.(최성일 출판평론가) 

교수신문(04. 06. 24) 트렌드 : 20세기 고전적 저작의 재출간 풍경   

'고전'을 쉽게 정의하자면 '널리 오래 읽히는 책'이다. 읽히는 폭이야 최신 베스트셀러만은 못해도 읽히는 시간은 웬만한 스테디셀러 못지 않다. 그런데 꾸준히 읽히기도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끊임없이 절판의 위협(?)에 시달려서다. 그런 위협을 극복하고 최근 재출간된 20세기의 저작들은 '고전적'이라는 수식어가 전혀 아깝지 않다. 이 책들은 첫 출간 당시에 이미 '현대의 고전'이라는 상찬을 받은 바 있다.

아쉽게도 이제 살펴볼 책들은 모두 번역서다. 그러니까 앞 단락에서 기술한, 출간과 재출간의 기준은 번역의 시점인 셈이다. 또, 재출간은 출판사가 바뀌어 책이 다시 나왔다는 뜻으로 썼다. 묵혀 있다가 같은 출판사에서 재간행된 책은 제외했다. 거듭 박음보다는 판 갈이에 주목했다는 말이다. 분야는 인문에서 문학까지 학문의 모든 분과를 아우르고 있는데 자연과학의 비중이 높다.   



바다출판사의 '21세기 뉴 클래식' 시리즈는 지난 세기의 지적 성과물을 복원하는 작업으로 새로운 세대가 20세기의 고전적 저작들과 마주할 기회를 제공한다. "전에 출간됐지만 여전히 유의미한 책들을 찾아내 펴낸다"는 것이 출판사 관계자가 전하는 이 시리즈의 기획 의도다. 지난 봄, 제이콥 브로노우스키의 '인간 등정의 발자취'와 프란스 드 발의 '침팬지 폴리틱스'가 나와 '21세기 새 고전'의 주춧돌이 됐다.

'인간 등정의 발자취'는 이번이 벌써 세 번째 출간이다. 1976년 삼성문화문고로 나온 '인간 등정'(삼성문화재단 刊)은 내용의 일부와 책에서 적잖은 비중을 차지하는 도판을 싣지 않은 축약본이었다. 1985년 재미 소설가 김은국의 번역으로 출간된, 텍스트를 모두 우리말로 옮기고 사진 자료들을 첨부한 '인간 등정의 발자취'(범양사출판부 刊)는 명실상부한 완역판이었다. 바다출판사 판은 김은국 번역을 바탕으로 미흡했던 점을 바로잡았다. 최신판이 이전의 책들과 또 다른 차이점 있다면, 지은이 이름 표기가 브로노프스키에서 브로노우스키로 바뀐 것. 이 책의 원서가 1973년에 나왔다는 점에서 책에 담긴 자연과학 지식이 시효가 다 된 낡은 것이라는 문제 제기가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은 가혹한 비판이다. 이 책은 우리말 제목대로 비단 자연과학에 국한하지 않고 인류의 지적 발달사를 두루 꿰고 있기 때문이다. 



'침팬지 폴리틱스'는 1995년 '정치하는 원숭이'(동풍 刊)라는 제목으로 나왔었다. 지은이가 관찰한 침팬지 사회의 정치 역학을 통해 인간 사회를 돌아보게 하는 이 책의 새 한국어판 역시 황상익 교수의 먼젓번 번역이 토대를 이룬다. 옮긴이 후기의 일절은 그대로 우리 현실에 적용해도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미국의 어느 하원의원은 의회 필독서 목록에 여러 해 동안 이 책을 올려놓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책을 읽고 나면 펜타곤, 백악관, 의회가 예전과는 달리 보일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뉴 클래식' 시리즈는 계속 나올 예정이고, 이미 두 권의 출간 일정이 잡혀 있다. 발췌본이 출간됐었다는 원제가 'Byzantium'인 존 노리츠의 '비잔틴제국 천년사'는 세 권으로 완역된다. '이기적 유전자'로 유명한 동물행동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Unweaving the Rainbow'는 初譯이다. 



올 초부터 나오기 시작한 도서출판 미토의 '이반 일리히 전집'은 지금까지 세 권이 나왔다. 세 권 모두 재출간이다. '학교 없는 사회'(심성보 옮김)는 1970년대와 80년대 '탈학교 논쟁'(한마당 刊), '교육사회에서의 탈출'(범조사 刊), '탈학교의 사회'(삼성문화재단 刊) 등의 제목으로 여러 차례 번역됐다. '병원이 병을 만든다'와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는 각기 1987년과 1990년 형성사를 통해 출간된 박홍규 교수의 번역 텍스트를 그대로 가져왔다. 그런데 여기에는 아쉬움이 없지 않다. 세월이 어느 정도 흐른 만큼, '학교 없는 사회'처럼 번역을 다시 하는 것이 '전집'의 이름에 값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출판사의 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일리히의 모든 저작을 모두 새롭게 번역하자면, 꽤 오랜 시일이 소요될 것이다. 번역의 적임자를 찾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데즈먼드 모리스, 칼 세이건, 제임스 러브록의 대표작들도 재출간의 '단골 손님'이다. 데즈먼드 모리스의 '털없는 원숭이'와 '인간 동물원'은 20여 년 전부터 10년 주기로 새 판을 찍었고, 최근 출간된 '피플 워칭'(까치 刊)은 '맨워칭'(까치 刊)의 개정증보판이다. 재간행을 언급한 것은 개정판에서 제목이 바뀐 사연이 재미있어서다. 원래의 제목이 남성만을 지칭한다는 오해에서 벗어나고자 그렇게 붙였다. 



칼 세이건이 앤 드루안과 함께 지은 '혜성'(해냄 刊)도 1985년 같은 제목으로 범양사출판부를 통해 나왔었다. 칼 세이건의 책들은 이전에 왕왕 재출간됐다. '에덴의 용'과 '콘택트'가 그랬다. 1981년 당시 교양 과학서로는 드물게 베스트셀러가 된 '코스모스'(문화서적 刊)는 이삼년 전부터 사이언스북스에서 재출간한다는 얘기가 있었지만 아직 새로운 '코스모스'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갈라파고스 刊)도 같은 제목을 달고 세 번이나 나왔다. 김영사 판(김기협 옮김)은 1999년에, 범양사출판부 판은 1990년 선을 보였다. 갈라파고스와 범양사출판부의 '가이아'는 홍욱희 씨가 옮겼다. 



사회과학과 문학의 현대적 고전은 상대적으로 긴 세월의 심판을 견뎌야 하는 모양이다. 20세기 후반기에 출간돼 대번에 고전적 지위를 얻은 이들 분야 책들의 재출간은 드문 형편이다. 사회과학 분야에서는 C.라이트 밀즈의 '사회학적 상상력'(돌베개 刊) 정도가 눈에 띈다. 1978년 홍성사에 나온 이 책은 26년만에 재출간되면서 공역자 가운데 한 명이 이해찬 국무총리 지명자(재출간 때는 의원)라는 사실이 잠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문학에서는 다시 나오기 시작한 '레이먼드 카버 소설 전집'을 들 수 있다. 문학동네의 카버소설 전집은 3월 출간된 '제발 조용히 좀 해요'를 포함해 네 권으로 완간된다. 카버 전집은 1996년 도서출판 집사재를 통해 '세상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 '숏컷', '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해줘' 등의 세 권으로 나온 바 있다.

20세기 고전적 저작의 재출간에는 더러 과거 성행한 무단복제의 관행이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높은 평판을 받은 책들조차 비교적 길지 않은 세월의 무게와 심판을 견뎌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말해 주는 듯 싶다.(최성일 출판평론가) 

09. 07. 03.  

P.S. 절판본이 재출간되는 일이야 이젠 예사로운 일이어서 특별한 주목을 요하진 않지만, 최근에 나온 책 가운데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길, 2009)은 다른 역자에 의해 새롭게 번역된 것이어서 눈길을 끈다. 특히 폴라니는 세계경제 위기에 대한 이론적 '대안'으로서 진보 진영의 새 화두가 되고 있는 참인데, 이번에 '진상'을 확인할 수 있을 듯싶다. <거대한 전환>은 예전에 <거대한 변환>(민음사, 1997)으로 소개됐었다. 순수하게 절판본이 재출간된 경우로는 인류학자 클리퍼드 기어츠의 <문화의 해석>(까치글방, 1998/2009)이 있다. 번역은 그대로일 듯싶은데, 그래도 표지는 바뀌었다. 예전 표지가 더 인류학스럽긴 하다.   

  

문학작품 가운데는 비록 절판되진 않았지만 새로 번역돼 나온 고전들이 많다. 괴테의 자서전 <시와 진실>(민음사, 2009)이 대표적이다. 이 두툼한 '진실'을 네댓 종이나 갖고 있다는 건 상당히 드문 일이 아닌가 싶다.

러시아문학 작품으로는 고골의 역사소설 <타라스 불바>(민음사, 2009)가 멋진 장정으로 다시 번역돼 나왔다. 주로 아동용으로 <대장 불리바>라고 소개됐던 작품이다. 이번에도 조주관 교수의 번역인데, <죽은 혼>(혹은 <죽은 농노>)의 번역만 추가된다면 고골의 경우 얼추 구색을 다 갖추게 된다.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서울대출판부, 2009)은 절판된 하드카바본을 대신하여 저렴한 소프트카바본이 재출간됐다. <대위의 딸>(펭귄클래식코리아, 2009) 또한 매혹적인 장정으로 새 번역본을 얻었고.   

이번에 <전쟁과 평화>가 뉴스위크 선정 최고의 저서로 꼽힌 톨스토이로 넘어가면 대표작 <안나 카레니나>(작가정신, 2009)의 새 번역본이 오랜만에 출간됐다. 기존의 범우사판과 경쟁할 듯싶다. 민음사의 세계문학시리즈에서도 출간될 예정이어서 독자로선 다양한 얼굴의 <안나 카레니나>를 만나게 될 듯싶다(<전쟁과 평화>도 새 번역본이 나오면 좋겠다). 톨스토이의 후기 대표작인 중편 <이반 일리치의 죽음>(펭귄클래식코리아, 2009)도 이번에 새로 번역돼 나왔는데, 강의용 교재로 쓸 수 있게 되어 반갑다...  

 

참고로, <대위의 딸>과 <안나 카레니나>의 표지에 공통으로 쓰인 초상화는 이반 크람스코이의 '미지의 여인'(1883)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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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3 1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03 12: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돈케빈 2009-07-04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르트의 기호의 제국이나 보드리야르의 아메리카같은 책들은 정말 매력적 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저를 독해해내서 책으로 낸다면 얼른 읽어보고 싶을 것 같습니다.

로쟈 2009-07-03 17:00   좋아요 0 | URL
그 매력에 대한 독후감도 듣고 싶어지는데요.^^

릴케 현상 2009-07-04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지의 여인 멋지네요^^

로쟈 2009-07-04 21:03   좋아요 0 | URL
네, 매력적인 도도함이 느껴지죠...

yamoo 2010-07-19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범양사 출판사가 펴낸 신과학 총서...타 출판사에서 재간이 되는 책도 있지만 안돼는 책들이 더 많네요..부디 이 총서가 다시 출간돼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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