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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가 목전인 탓인지 눈에 띄는 책이 드문 주다. 개인적으론 새로 번역돼 나온 러시아소설들, 가령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열린책들, 2010)이나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민음사, 2010)에 눈길이 가는 정도. 피에르 바야르의 신작 <셜록 홈즈가 틀렸다>(여름언덕, 2010)은 챙겨두어야 할 책이었지만 저녁에 서점에 들렀을 땐 깜박했고, 약간 기대했던 책 가운데 가마타 히로키의 <세계를 움직인 과학의 고전들>(부키, 2010)은 들춰보지도 않고 손에 들었지만 자세히 보니 너무 소략해서 실망스럽다(책이라기보단 칼럼집 수준). 리뷰기사를 미리 읽었더라면 쾨슬러의 <한낮의 어둠>(후마니타스, 2010)을 대신 손에 들었을 텐데, 아쉽다. 아, 프리모 레비의 자전소설 <휴전>(돌베개, 2010)도 이주에 나온 필독서다. 일단 <한낮의 어둠>에 대한 리뷰를 '오래된 새책'으로 분류해놓는다. 예전 번역본은 최승자 시인이 옮긴 <한낮의 어둠>(한길사, 1982)이었다. 저자는 '아서 케슬러'로 표기됐었다.    

한겨레(10. 09. 18) 어제의 혁명동지가 내 목을 달라는구나 

헝가리 출신 영국 작가 아서 쾨슬러(1905~1983)의 <한낮의 어둠>(1940)은 스탈린 치하 옛 소련 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한 소설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와 함께 언급되고는 한다.

소설은 주인공 루바쇼프가 감옥에 수감되는 것으로 시작해 결국 총살당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루바쇼프는 10대 후반부터 사회주의 혁명에 몸을 던졌으며 혁명이 성공한 뒤 당 중앙위원회 회원이자 인민위원, 혁명군 사령관을 역임한 혁명 정권의 중추적 인물이다. 그런 점에서 1938년 스탈린에게 숙청당한 니콜라이 부하린을 모델로 삼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쾨슬러 자신은 “루바쇼프의 삶은 이른바 모스크바 재판에서 희생된 수많은 사람의 종합판”이라고 밝힌 바 있다. 모스크바 재판(1936~8)이란 스탈린 개인 우상화를 위해 수천 명에 이르는 혁명 1세대를 숙청한 일을 가리킨다.

루바쇼프가 평생을 바쳐 복무했던 혁명 조국이 자신의 목숨을 요구한다는 것, 그것도 불명예스럽고 근거도 박약한 반혁명의 혐의로써 그렇게 한다는 상황은 루바쇼프에게는 절체절명의 딜레마이자 아포리아로서 다가온다. 지금보다 젊었던 시절 그는 외국에서 혁명을 위해 싸우다가 적들의 감옥에 갇히고 잔인한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곳은 적국이 아니고 자신은 혁명의 적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조국에 있었지만, 그 조국이 적국이 되었다. 그리고 친구였던 이바노프는 이제 적이 되었다.” 이바노프는 그의 대학 친구이자 오랜 혁명의 동지였으나 지금은 그를 심문하는 자로 처지가 바뀌었다.

모스크바 재판의 배경에는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알력으로 잘 알려진 혁명 노선을 둘러싼 대립이 있었다.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에 맞서는 스탈린의 ‘1국 사회주의론’을 대변하는 소설 속 인물은 이바노프에 이어 루바쇼프의 심문을 담당하게 된 젊은 관료 글레트킨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당에는 두 가지 경향이 있소. 하나는 모험자들로 이루어졌는데, 그들은 국외 혁명을 위해 우리가 획득한 걸 걸고 싸우려고 하오. 당신은 그들에 속하오. (…) 우린 오직 한 가지 의무를 가지고 있소. 그건 사멸하지 않는 것이오.”

루바쇼프의 딜레마를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그 자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글레트킨과 같은 논리로 주변 사람들의 희생을 요구했다는 사실이다. 독일 청년 리하르트, 비서이자 연인이었던 알로바, 그리고 벨기에 항구의 부두 노동자 조직 책임자였던 리틀 뢰비 등이 그들이다. 물론 그는 “‘혁명적 철학’으로 저지른 이 모든 사기는 그저 독재 정권을 강화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심지어 그는 ‘넘버원’(스탈린을 암시한다)을 두고 “그는 권력에서 결코 스스로 사임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폭력에 의해서만 제거될 수 있다”는 견해를, 비록 사석에서이기는 하지만, 내놓기도 했고 그것이 결국 그의 몰락의 빌미가 되었다.

그가 자신에게 씌워진 혐의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심문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는 것은 리하르트들에 대한 죄책감과 무관하지 않다. 다른 한편으로는 혁명의 대의를 위해 한 개인의 양심과 자유, 윤리 같은 덕목쯤은 희생시켜야 한다는 글레트킨 쪽의 논리에 그가 적어도 반쯤은 동의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재판정에서의 마지막 진술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당과 당 활동과 화해하지 못한 채 죽는다면, 죽을 수 있는 명분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진심의 전부라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혁명가로 평생을 보낸 그가 바로 그 혁명의 조국에서 다름 아닌 반혁명 혐의로 처형당하는 마당에 글레트킨의 논리에 의탁해서 스스로를 위로하고 설득하고자 하는 심리를 이해할 수도 있을 법하다.

루바쇼프 자신의 이런 혼란과 동요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초심을 잃고 괴물로 바뀌어 가는 혁명 정권에 대한 비판과 경고가 그것이다. “그건 체제상의 과오였다. 어쩌면 그 과오는 지금까지 그가 논의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간주해 온 원칙(그 원칙의 이름으로 그는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켰고, 이제는 그 자신마저 희생되고 있지만), 즉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그 원칙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로 그 원칙이 혁명의 위대한 동지들을 죽였고, 그들 모두를 미쳐 날뛰게 만들었던 것이다.”(최재봉 기자) 

10. 09. 17. 

 

P.S. <한낮의 어둠>과 같이 읽어야 할 책은 메를로퐁티의 <휴머니즘과 폭력>(문학과지성사, 2004)과 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새물결, 2008)이다. 김홍우 교수의 <현상학과 정치철학>(문학과지성사, 1999)에도 <한낮의 어둠>을 다룬 논문이 실려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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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8 0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20 08: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9-18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남국<부하린,혁명과 반혁명 사이> (문학과 지성사)의 제6장에 부하린 재판과 이에 대한 아서 쾨슬러와 메를로 퐁티의 평가를 소개했더군요.

로쟈 2010-09-20 08:41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제 책은 어디 박스에나 들어가 있을 거 같아요.--;
 

새로 나온 책들의 웅성거림을 기준으로 하면, 비교적 '조용한' 주라고 생각하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딱히 그런 것도 아니다. 숨죽인 외침 소리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는 이번에 재출간된 엘리아스 카네티의 <군중과 권력>(바다출판사, 2010)이다. 나는 학원사판(1985)을 갖고 있는데(하지만 어디에 두었는지는 모른다), 새 판본도 바로 장바구니에 넣었다 일단은 보관함으로 옮겼다. 학원사판을 조금 더 찾아보자는 생각에서다. 그래도 일단 이 '오래된 새책'에 대한 리뷰는 챙겨놓는다.    

세계일보(10. 08. 28) 살아남으려는 인간의 본성에서 모든 권력은 나온다

“카이사르, 칭기즈칸, 나폴레옹, 히틀러…. 인간의 역사는 수많은 군중을 죽음으로 내몬 자들을 숭상한다. 그들은 재능이 있는 동시에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 부족함이 없다. 그들은 모두 시체 더미의 왕이다. 인간의 역사는 살아남는 자의 역사이고 폭력의 역사이며 시체 더미의 역사라는 데 이론이 있을 수 없다. 권력자는 군중을 죽음으로 위협하여 전장으로 내몰고 군중은 죽음의 군중, 곧 시체 더미가 된다. 권력자는 그만이 살아남은 유일한 인간이 되어 시체의 들판에 서 있기를 좋아한다. 살아남는 최후의 인간이 되는 것, 이것이 모든 권력자가 원하는 것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엘리아스 카네티는 자신의 저서 ‘군중과 권력’에서 이렇게 갈파하고 있다. 이 책은 1981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20세기 최고의 르네상스 지식인으로 꼽히는 저자가 35년간 군중과 권력자의 생리를 조사 분석해 1960년 발표한 역작이다.

군중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현상이다. 월드컵에서 보여준 군중의 열기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2년여 뒤 실시될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점점 더 많은 군중의 행동들이 집단적으로 표출될 것이다. 아프간에 대한 미국의 전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북한 핵개발을 둘러싸고 한반도 긴장의 파고는 여전하다.

이러한 상황은 50여년 전 카네티가 고민했던 당시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다. 파시즘과 냉전, 핵전쟁의 위협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프로파갠더들의 극성도 여전하다. 현대사회든 그 이후 첨단 사회든 간에 군중과 권력은 여전히 궤를 같이하고 있다. 지금 이 시각의 상황도 카네티가 분석했던 군중과 권력 현상의 연장이라는 것이다.

카네티는 1905년 스페인계 유대인으로 불가리아에서 태어났다. 유대계라는 이력의 카네티에게 ‘나치즘’의 발호는 군중과 권력에 운명적으로 천착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나치즘의 행동 양태를 파악하기 위해 나치즘 치하에서 끼니를 이어가며 연구했다. 그러던 중 군중의 광기에 들떠 있던 히틀러의 유대인 대학살이 자행되자 영국으로 망명, 연구활동에 전념했다.

군중 심리는 카네티에게 문제를 풀어주는 핵심이었다. 1910년 핼리 혜성 출현에 따른 종말론적 패닉 현상, 1911년 타이타닉호 침몰 소식을 듣고 거리로 뛰쳐나와 비통해 하던 인파의 물결,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시민들이 보여준 적개심과 광기, 전후 독일의 인플레이션에 따른 극심한 궁핍과 혼란, 그리고 유대인 학살…. 자신이 살았던 20세기 전반기만큼 군중 현상이 역사상 폭발했던 시기도 없었다고 카네티는 쓰고 있다. 

카네티는 군중에 의한 권력 현상을 주로 생존 문제와 연관시켰다. 그는 “모든 권력은 살아남으려는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나온다”고 지적했다. 살아남는 순간이야말로 권력의 순간이다. “죽음을 목격하며 느꼈던 공포는 죽은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는 만족감으로 변한다”고 설명한다.

카네티는 권력 현상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사실로 종교도 근본적으로는 권력의 본질과 관련된다고 파악했다. 종교는 죽음과 내세를 담보로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인간의 약점을 이용해 벌이는 장사라고 카네티는 주장했다.

그는 군중 행동의 기원을 무리 행동에서 찾고 이렇게 정의한다. “무리는 부족이나 씨족의 개념과는 전혀 다르다. 부족이나 씨족은 정태적인 것에 반해 무리는 동태적이다. 가장 순수한 무리 형태는 사냥 무리다. 무리들 가운데 전투 무리가 가장 보편적이다. 전투 무리는 자신의 재물이 누구인가를 확실히 아는 사냥 무리와 유사하다. 군중의 심리도 이와 유사하다.”

카네티는 이어 군중 심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군중은 언제나 성장하기를 원하며, 군중의 내부는 평등이 지배한다. 군중이 형성되는 것은 평등을 얻기 위해서이다. 특히 군중은 밀집형태를 사랑하며 하나의 방향을 필요로 한다. 군중은 항상 동적이며 어떤 목표를 향해 움직인다.”

이 책을 읽은 서평자들의 일치된 결론은 카네티의 이 저서가 ‘파시즘에 대한 정확한 보고서’라는 것이다. 카네티는 책의 말미에서 히틀러의 광기와 역사상 유례없는 유대인 학살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의문을 던지고 있다. 어떻게 예술과 철학과 자연을 사랑하는 독일인들이 그처럼 포악한 권력자의 명령에 복종해 그런 끔찍한 만행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하는 물음은 카네티뿐 아니라 20세기 지식인들의 공통된 문제의식이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21세기를 연구하는 지식인들에게 적잖은 과제를 설정해주고 있다.(정승욱 기자)  

10. 08. 28.  

P.S. 이번주에 나온 최성각의 <나는 오늘도 책을 읽었다>(동녘, 2010)에도 <군중과 권력>에 대한 서평이 수록돼 있기에 옮겨놓는다. 저자는 '방대하고 치밀하면서도 극적인 책'이라고 평했다.  

청년 카네티가 처음 ‘군중’을 만난 것은 19살 때였다. 1924년 국수주의자들에 의한 독일 외상 라테나우 암살 사건에 항의하기 위해 노동자들이 벌인 대규모 시위였다. 그는 경악했다. 그것은 성난 물결이었고, 뜨거운 화염이었으며, 동시에 세찬 질풍이었다. 군중은 바위처럼 단단하면서도 비누거품처럼 쉽게 부서지기도 해서 더욱 카네티를 전율시키고, 경악시켰다. 그는 이때의 체험을 이렇게 말한다.

“이 군중은 예전에 내가 보았던 군중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나는 내 피부로 이 군중을 느꼈고, 이 군중의 일부가 된 것처럼 느끼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서 깜짝 놀랐다. 나는 그때까지 군중을 마치 나를 향해 습격해오는 것 같은 위협적인 것으로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때에는 정반대 현상이 일어나 어떤 저항하기 힘든 힘에 의해 군중 속으로 빨려들어가 나 자신이 군중의 일원이 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데모가 끝나 군중이 해산하고 각자 집으로 뿔뿔이 흩어져갈 때, 나는 나 자신이 지금까지보다 가련한 존재가 되고 무언가 귀중한 것을 잃고 만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3년 후인 1927년, 카네티는 다시 군중 속의 하나가 된다. 성난 시민들이 빈의 법무성 건물을 불태워버릴 때, 그 시위에 참여했던 체험이었다. 카네티는 이 체험으로 말미암아 바스티유의 폭풍우에 대해 책을 통해 보지 않아도 이해해버린다.

이 두 번의 운명적인 체험 이후, 그는 35년여 간 ‘군중연구’에 자신의 삶을 투신한다. 가히 필생의 작업이라 할 만하다. 이 장엄한 책은 실로 방대하고, 치밀하면서도 극적이다. 어마어마한 자료와 넘치는 인용과 역사적 사실들, 그리고 카네티만의 독창적이고 깊은 통찰로 점철되어 있다. 문학, 종교, 인류학, 심리학, 생물학의 영역을 넘나들며 카네티는 ‘군중의 물리학’ ‘권력의 정신분석학’을 완성했다. 그래서 세상은 그가 쓴 시나 소설 때문에 그를 시인이나 작가라 말해야 할지, 그가 쓴 희곡 때문에 극작가라 말해야 할지, 이 경이로운 책 때문에 사회과학자라 말해야 할지, 그의 방대한 지적편력으로 말미암아 인류학자라 말해야 할지, 끝내는 사상가라 말해야 할지 난감해졌다. 그러나 그는 어떤 학파, 어떤 체제(장르), 어떤 이데올로기로도 자신이 헐값으로 분류되기를 완강하게 거절했다. 단지 ‘카네티’라는 한 정신을 그는 자처했던 것 같다. 1960년, 책이 발간되자 이 놀라운 노작은 곧 ‘20세기의 서양고전’으로 자리매김되면서 그의 생전에 불멸의 가치를 얻게 되었다. 그를 일러 20세기의 ‘르네상스적인 인간’이라 말하는 연유가 여기 있다. 스웨덴 한림원은 결국 이 놀라운 정신이 이 작업과 함께 수행한 소설 『현혹』에 노벨문학상 수여라는 형식으로 최소한의 예를 갖춘다.  

필자가 접한 『군중과 권력』은 반성완 선생이 번역한 1982년 한길사 초판본이었다. 550쪽에 달하는 책을 읽고 난 뒤에 쓴 메모를 펼쳐보니, ‘1992년 3월 2일’에 이 책을 완독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 몇 달에 걸쳐 읽었을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어디 있었고 뭘 하면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있었을까? 직장에 매이지 않고 살던 그즈음 내게 의료보험증은 있었을까? 어떻게 이토록 벅찬 치열한 정신을 만날 염을 냈고, 이 책에 무수히 밑줄을 그으면서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인간정신에 대한 경탄과 새로운 발견의 기쁨과  내 정신의 초라함과 편벽,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데 대한 절망을 직시했을 것이다.

학원사판도 있고, 한길사판도 있고, 모두 절판된 뒤 펴낸 바다출판사판도 있다. 하지만 바다출판사판도 지금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아마 이 책은 오래된 도서관이나 ‘양식 있는 헌책방’에 가야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 나라 새 책방에는 정말 나무에게 너무나 큰 죄를 범하고 있는 쓰레기들이 범람한다. 그건 그렇다손치고, 찾아 읽으려는 뜻만 있으면 그러나 반드시 이 책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봄의 우리 촛불집회를 ‘군중’이라 해야 할 것인가, ‘공중’이라 해야 할 것인가, 누군가 이 책을 인용하면서 쓴 칼럼도 있었다. 이런 책을 한번 접하고 나면, 책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니라는 것과 혹 어쩌다 책을 펴냈더라도 책을 펴내기 전보다 더 겸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독자는 그러나 특별히 무장할 필요가 없다. 열린 마음으로 겸손하게 위대한 저작을 읽어나가면 될 것이다. 반드시 그 정신이 격랑을 만난 뗏목처럼 요동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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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10-08-28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반성완 교수가 번역한 한길사 본을 갖고 있습니다. 1982년 초판 발행, 제가 소장하고 있는 건 1987년 10판본이네요. 그 때만해도 이런 책이 10판을 찍어냈었군요. 카네티는 제 의식속에 현장 기억으로 남은 첫 노벨상 수상작가입니다. 노벨상 수상이 알려지자 그의 대표 소설 <현혹>이 <머리없는 세상>이란 제목으로 황급히 번역되었고, 이 책을 아직 소장하고 있습니다. <머리없는 세상>을 읽다가 어린 마음에 참 이런 재미없는 소설에 노벨상이 수여되었을까했던 기억이 납니다. 중학생에 불과했으니까요 ㅎㅎ <군중과 권력>은 <머리없는 세상>의 해설을 읽다가 알게 됐고 그 제목에 끌려 대학생 시절에 구입했었습니다. 읽었던 기억은 나는데 완독을 하진 못했던 것 같아요. 다시 한번 책을 읽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정말 오래간만에요.^^ 그런데 학원사판은 어떤 책인지 궁금하네요. 전 반성완의 한길사 본과 바다출판사 본밖에 몰랐었습니다.^^

로쟈 2010-08-28 20:11   좋아요 0 | URL
학원사판이 강두식 선생 번역입니다. 바다출판사판의 '원판'이죠...

드팀전 2010-08-29 0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3년전엔가요 <바다출판사>꺼를 서점에서 산적이 있습니다. 부산에 있는 대형서점에는 그때도 모두 품절상태였는데...대학가 앞의 작은 서점에서...^^
음반도 똑같습니다. 품절된 것들이나 단종된 것들이 동네 작은 서점이나 레코드가게에 가면 그대로 있지요. 안팔리니까 하염없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이런 길모퉁이 작은 서점에서 절판된 책을 찾을때가 더 기분이 좋다니까요.
그 바로 전에 어떤분이 헌책방에서 사서 보내준게<주우신서>라고 되어있던데...강두식역이구요. 83년 7판이네요

로쟈 2010-08-29 11:23   좋아요 0 | URL
한길사판이 1977년, 대일서관과 주우판, 학원사판이 1982년에 나온 것 같습니다. 1년만에 7판을 찍었다면 놀라운데요...

드팀전 2010-08-29 13:31   좋아요 0 | URL
책에는 7판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요즘 표기로 하면 7쇄 아닐까 싶네요. 많이 안찍었나보죠.그래도 적지 않은 양인 것 같습니다.

로쟈 2010-08-29 18:49   좋아요 0 | URL
네, 7쇄 정도면 꽤 주목받았던 걸로 보입니다...
 

다시 출간된 책, 곧 '오래된 새책'이 너무 많아져셔 이젠 특별한 '뉴스'가 되지 않는다. 지난주에도 스페인의 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대중의 반역>(누미노스, 2010)과 우나무노의 <삶의 비극적 감정>(누미노스, 2010)이 다시 출간됐다(<삶의 비극적 감정>에 대한 알라딘의 서지정보는 제목과 출판년도 모두 오기돼 있다). 우나무노의 책은 예전에 <생의 비극적 의미>란 제목으로 출간됐었다. 여담을 적자면, '스페인'이란 이름은 요즘 교과서에서 모두 사라졌다. '에스파냐'라고 한다. 그래도 축구할 때는 여전히 '스페인'. 외교부에서도 '스페인'이라고 표기하는 걸로 안다. 나는 이런 '이중표기'가 부조리하게 여겨진다. 

    

그래도 절판된 책이 '오래된 새책'으로 나올 땐 반갑다. 나오미 클라인의 <슈퍼 브랜드의 불편한 진실>(살림Biz, 2010)도 그런 경우다. 예전에 <No Logo>(랜덤하우스코리아, 2002)라고 원저명 그대로 출간됐으나 절판됐던 책이다. 이번에 10주년 기념판을 다시 옮겼다. 내용은 달라졌을 성싶지 않지만 저자의 새로운 서문이 붙었다. 소개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경향신문(10. 06. 12) 다국적기업들의 추악한 이면 ‘노동착취’

스티브 잡스는 예의 편해 보이는, 그러나 잘 연출된 캐주얼 의상을 입고 단상에 올랐다. 손에는 날씬하고 작은 아이폰4G를 들었다. 한국의 얼리어답터들은 미국에서 열린 잡스의 프레젠테이션을 새벽잠 설쳐가며 인터넷으로 지켜봤다. 아이폰4G가 한국에서 출시될 날만을 기다리는 동시, 손은 이미 신용카드를 꺼낼 준비를 하고 있다.

‘애플’은 미국의 가전제품 회사 이름이 아니다. 젊고 세련됐으며, 진취적이며 개방적인 시민들을 한 자리에 모으는 종교다. 아장아장 걷는 아기는 베이비갭을 입고 맥클라렌 유모차를 탄다. 청소년들은 코카콜라를 마시며 닌텐도를 한다. 직장인은 스타벅스 커피를 든 채 아이폰으로 전화한다. 브랜드가 침입할 수 없는 ‘성역’이었던 대학에는 ‘삼성관’이라는 이름의 건물이 섰다. 브랜드가 없으면 삶도 없다. 

캐나다 출신 저널리스트 나오미 클라인의 <슈퍼 브랜드의 불편한 진실>(원제 No Logo>은 미국 시애틀에서 세계무역기구(WTO)에 반대하는 반세계화 시위가 벌어진 직후인 2000년 1월 처음 출간됐다. 10년 사이 세상의 모습은 크게 변했지만, 브랜드의 영향력만큼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 사이 <쇼크 독트린>으로 다시 한 번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클라인은 10주년 맞이 서문을 붙여 <슈퍼 브랜드의 불편한 진실>을 다시 출간했다.

기업은 무엇을 만들까. ‘상품’이라고 답한다면 이미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다. “오늘날 가장 유명한 제조업체들 대부분이 더 이상 제품을 생산하고 광고하지 않는다. 대신 제품을 구매하고 거기에 상표를 붙인다.” 

그렇다면 상품은 누가 만들까. 제국주의자들이 제3세계 식민지를 착취하던 시대가 지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클라인은 미국과 유럽의 기업 대신 상품을 만드는 사람들을 직접 찾았다.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오지의 경계 삼엄한 공장, 10대 소녀들은 옹기종기 모여 평생 직접 사용하지도 못할 제품을 만든다. 자카르타에서 만난 한 노동자는 자신이 만들고 있는 옷이 오버코트라고 불리는 줄도 몰랐다. 더운 날씨의 이곳 사람들은 오버코트를 입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필리핀의 어떤 고용주들은 하루에 두 번씩 15분간 주어지는 휴식시간 외에는 화장실에도 못 가게 한다. 근무 중 잡담도 안되고, 노조는 언감생심이다. 최근에도 아이폰 하청업체인 중국의 공장에서 투신 자살이 잇달아 일어났다. 물론 잡스는 “우리는 노동착취업체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클라인은 버락 오바마에 대해서도 냉소를 보낸다. “하나의 브랜드로서 오바마 백악관은 스타벅스와 가장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세련되고, 진취적이고, 접근이 용이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도 이 정도면 괜찮다고 느낄 만큼만 호화롭다.” 오바마에게 속은 사람들은 그가 부시 행정부의 핵심 국제정책 중 많은 부분을 그대로 계승했다는 사실을 잊었다.  

 

>>광고판 해방 전선(Billboard Liberation Front)의 광고파괴자들은 애플 컴퓨터의 ‘다르게 생각하라’ 시리즈를 표적으로 삼았다. 그들은 ‘환멸을 생각하라’는 말을 써넣었고, 사과 모양의 애플 로고는 해골로 바꾸었다.

그래서 무엇을 할 것인가. 이미 많은 행동가들은 실천하기 시작했다. 어떤 ‘광고 파괴자’는 거대 기업의 광고를 패러디해 대중의 웃음을 자아냈다. 어떤 이들은 정치 시위와 놀이 문화를 결합시켰다. 클라인이 한국 사정을 알았다면 ‘촛불 시위’를 예로 들었을 것 같다. 노동착취기업에 대한 불매운동도 벌어졌다. 

 

>>벨기에의 노엘 고딘과 그의 친구들은 ‘파이 던지기’ 활동을 펼친다. 목표는 기업가들이다. 사진 속의 빌 게이츠를 비롯해 종자업체 몬산토의 로버트 샤피로, WTO의 레나토 루지에로 사무총장,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 등이 이들이 던진 파이를 맞았다.

번역은 조금 더 윤문했으면 좋았을 뻔했다. 예를 들어 ‘find oneself in …ing’를 그대로 옮긴 듯한 “…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와 같이 어색한 문장이 눈에 띈다.(백승찬기자) 

10. 0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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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0-07-19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중의 반역은 한마음사판으로 갖고 있습니다..재간돼었군요..그나저나 슘페터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나 다시 번역돼어 나왔으면 원이 없겠습니다..이상구박사님 번역 이후로 완역이 여태 안돼고 있으니...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삶의 해부'란 부제가 눈길을 끄는 책은 테렌스 데 프레의 <생존자>(서해문집, 2010). 아직 알라딘에는 책이나 저자에 대한 정보가 뜨지 않는데, 위키피디아를 찾아보니 테렌스 데 프레는 간단한 약력과 함께 '홀로코스트 학자'라고 소개돼 있다. 대표작이 1976년에 출간한 <생존자(The Survivor: An Anatomy of Life in the Death Camps)>. 저자 자신이 '생존자'의 모습이다. 

  

국내에 소개된 적이 없나 살펴봤더니 이미 두 차례 번역된 바 있다(그래서 '오래된 새책'으로 분류한다). 어지간한 도서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데, 일단 중앙일보사에서 펴낸 <월간 중앙>(1976년 10월호)의 별책으로 소개됐었다. 그리고 단행본으로 나온 것이 <생존자>(인간, 1981)이다. 역자는 차미례 씨. 이번에 나온 서해문집판은 이 번역판을 손질해서 펴낸 듯하다. 1981년판의 목차는 이렇다.    

머리말 / 테렌스 데 프레 = 3  

제1장 소설 속에 나타난 생존자 
살아남기 위한 투쟁 = 11 
페스트 = 14 
누명쓴 사람 = 17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 21 
연옥(煉獄) = 24 
암병동(癌病棟) = 30 

제2장 증인이 되기 위하여 
기록하라! = 36 
죽은 자와의 약속 = 42 
힘의 논리를 고발한다 = 53  

제3장 배설물의 공격 
배설에서 야기되는 참상 = 59 
배설물에 의한 고문 = 62 
정신력을 말살하는 것이 목표 = 66 
몸을 씻지 않는 사람부터 죽였다 = 69 
배설물과의 접촉에서 받는 충격 = 72 
악의 상징으로서의 오물 = 75  

제4장 악몽과 현실 
유일한 도피처 = 79 
더 이상 살아 있고 싶지 않다 = 81 
휴매니티의 신뢰에 대한 배신 = 86 
비인간적 솔직성에 대한 자각 =90 
걸어다니는 시체들 = 93 
수렁 속에서 의지를 되찾는 섬광같은 힘 = 98

제5장 죽음 속의 삶 
살아남기 위한 두 가지 처방 = 103 
협력과 저항 속의 생존 = 106 
두 가지 용어 - '조직한다'와 '캐나다' = 111 
암시장(暗市場) = 116 
훌륭한 보직 = 121 
삶의 연대의식 위에서 = 127 
정보수집과 저항운동 = 131 
죽음의 전략적 이용 = 135 
약속도 보상도 필요없는 도움 = 138 
선물 - 무언가 줄 수 있다는 기쁨 = 144 
빵의 법률 - 생존을 위한 응징과 질서 = 149  

제6장 우리와 그들 
수용소에서 행위에 대한 정신분석 = 157 
영웅주의에 대한 오해 = 162 
고통을 통한 인간의 재생 = 168 
지옥에 대한 잠재의식 = 176 
종말적 이미지의 극복 = 179  

제7장 우리 시대의 예언자 
철저한 빼앗김 = 185 
추억과 희망을 버려라 = 188 
성욕의 상실 = 193 
생명의 선천적 잠재능력 = 197 
바이오그램 - 생물학적 내면 구조 = 201 
집단에의 경보 = 204 
생명의 상향운동 = 206 
문화와 죽음의 상관관계 = 209 
아직은 절망할 때가 아니다 = 213  

참고 문헌 = 217 
역자 후기 = 224   

오래 전에 나온 것이긴 하지만 관심분야의 책이고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나 <암병동>에 대한 언급도 포함하고 있어서 구입해볼 작정이다.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돌베개, 2007)와 엘리 위젤의 <나이트>(예담, 2007),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청아출판사, 2005) 등과 같이 읽어봄직하다... 

10. 0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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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비스 2010-06-29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 완역본도 출간되었으면 합니다.
현재 열린책들에서 나온 책은 영어판과 다르게(러시아 원서는 잘 모르겠지만) 내용이 절반 이상 압축되어 나온 것처럼 보입니다.

로쟈 2010-06-29 17:09   좋아요 0 | URL
6권짜리로 나왔었는데, 절판됐습니다. 1/6인 거지요...
 

네덜란드의 저명한 문화사가 요한 호이징하의 <호모 루덴스>(연암서가, 2010))가 새로 번역돼 나왔다. 이번에도 영역본에서 옮긴 중역판이긴 하지만, 원래 영역자가 호이징하 자신의 영역도 참고했다고 하므로 편차는 크지 않을 것 같다. '오래된 새책'으로 분류하려니 사실 까치에서 나온 <호모 루덴스>가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책이고, 내가 대학 1학년 때 읽은 것도 이 까치판이다. 최초의 번역본은 언론인 권영빈의 <호모 루덴스>(홍성사, 1981)이지만(<놀이하는 인간>(기린원, 1989)으로 다시 나온 바 있다), 현재는 절판된 책이다.   

새 번역본은 저자명 Johan Huizinga를 네덜란드 발음을 따르려는 의도에서인지 '요한 하위징아'라고 표기했는데, 실제 발음은 [joːhɑn hœyzɪŋxaː]라고 하므로 딱히 부합하지도 않는다. 공연한 부스럼이라고 해야겠다(참고로 러시아어로는 '효이진가'라고 부른다). 애초에 '호이징가'라고 소개됐다가 '호이징하'로 교정됐는데, '하위징아'는 어떤 근거인지는 몰라도 원칙 불명의 표기다. '하위징하'는 가능하지만,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호이징하'라는 관행을 존중하는 게 나을 듯하다(모음 표기까지 물고 늘어지자면, '모스크바'가 아니라 '마스크바'라고 불러야 한다). 한겨레의 리뷰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10. 03. 06) 노동 예찬 사회…목졸리는 ‘놀이 정신’ 

네덜란드의 문화사가 요한 하위징아(사진·1872~1945)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호모 루덴스>(1938)가 새 번역본으로 나왔다. 인간을 ‘놀이하는 존재’로 규정한 저작이자 하위징아의 말년을 장식한 걸작이다.  



하위징아의 출세작은 1919년에 출간한 <중세의 가을>이다. 그에게 중세사가로서 불후의 명성을 안겨준 것이 이 저작이다. <중세의 가을>과 <호모 루덴스>, 20년의 간격을 두고 출간된 두 독창적 저작은 한 사람이 썼다고는 언뜻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주제가 다르다. 하나는 중세 말기 유럽인들의 ‘삶의 양식’을 조명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류의 문화와 놀이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통사적으로 살핀 것이다. 그러나 내용을 보면 두 책 사이에는 자연스런 물의 흐름 같은 연속성이 있다. 하위징아 자신은 <호모 루덴스> 안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중세의 가을>에서 … 문화와 놀이는 친밀한 관계라는 사상의 씨앗을 처음으로 마음에 뿌렸다.” 

14~15세기 유럽인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중세의 가을>은 그 시절 중세인들이 겪었던 ‘삶의 쓰라림’에 대한 절실하고도 고통스러운 묘사에 이어 그 중세인들이 마음에 품었던 ‘더 아름다운 삶을 향한 열망’을 추적한다. 그 열망의 길 가운데 하나가 ‘꿈의 길’이다. “현실은 너무나도 비참하고 세계를 거부하는 일도 너무 어렵다. 그렇다면 환상의 세계에서나 살자.”(<중세의 가을>) 그 길에서 하위징아가 만나는 것이 중세의 ‘기사도’와 ‘궁정 연애’인데, 바로 이 기사도와 궁정 연애가 <호모 루덴스>에서 말하는 ‘놀이 정신’의 중세적 표출이다.

하위징아는 1872년 네덜란드 북부 도시 흐로닝언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때 그리스어·라틴어·히브리어·아랍어를 공부했고, 흐로닝언대학에 들어가서도 언어학을 사실상 전공으로 삼았다. 특히 박사과정에서는 인도 고전어인 산스크리트를 공부했고, 산스크리트 문헌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897년 그는 하를럼고등학교 교사가 됐는데, 여기서 역사를 가르치면서 처음 유럽 중세사에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어 1905년에 흐로닝언대학, 10년 뒤에는 레이던대학 역사학 교수가 됐다. 수많은 고대어를 공부한 것이 역사학자 하위징아에게는 아주 훌륭한 무기가 되었는데, <호모 루덴스>에도 그리스·로마·산스크리트 문헌과 단어가 수시로 등장해 논거를 제공한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s)라는 말도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뜻의 라틴어다.

하위징아는 <호모 루덴스>의 머리말에서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인간’이란 뜻의 ‘호모 사피엔스’도, ‘(물건을) 제작하는 인간’이라는 뜻의 ‘호모 파베르’도 인간을 제대로 규정하기에는 미흡하다고 지적한다. “그리하여 나는 호모 파베르 옆에, 그리고 호모 사피엔스와 같은 수준으로, 호모 루덴스를 인류 지칭 용어의 리스트에 등재시키고자 한다.” 이어 하위징아는 말한다. “나는 지난 여러 해 동안 문명이 놀이 속에서, 그리고 놀이로서 생겨나고 발전해 왔다는 확신을 굳혔다.” 이 확신을 입증하는 것이 이 책인 셈인데, 그 계획을 수미일관하게 밀고 나간 뒤 결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진정한 문명은 놀이 요소가 없는 곳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이런 놀이의 본질적 특성 가운데 하나로 하위징아는 ‘경쟁’을 제시하는데, 그 경쟁의 성격을 가장 확연하게 보여준 것이 고대 그리스인들의 삶이었다. 어떤 점에서 보면 그리스인들의 생활 전체가 그들에게는 놀이, 곧 경쟁으로서의 놀이였다고 하위징아는 말한다. 이 경쟁을 나타내는 그리스어가 ‘아곤’(agon)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경쟁의 성격을 지닌 것을 모두 경기, 곧 아곤으로 만들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일화는 극단적이다. 알렉산드로스는 부하 장수 칼라노스가 죽자 슬픔을 달래려고 아곤을 열었는데, 가장 술을 많이 마시는 자에게 상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하여 아곤 참가자 35명이 현장에서 죽고, 나중에 6명이 더 죽었는데 그중에는 우승자도 들어 있었다.” 하위징아는 이 아곤과 결합된 놀이가 예술은 말할 것도 없고 철학·신화·소송·전쟁·정치·상거래에도 깊숙이 개입돼 있음을 입증해간다.

하위징아는 놀이의 정신이 19세기에 소멸했음을 매우 안타까워한다. “노동과 생산이 시대의 이상이자 우상이 되었다. 유럽 전역은 작업복을 입었다.” 그렇다면 20세기는 어떨까. 하위징아가 보기에 20세기는 겉보기엔 놀이가 아주 많아진 것 같지만, 놀이 정신은 사라지고 없다. 특히 정치에서 놀이 정신이 죽고 ‘유치한 행위’가 판친다. 그가 이 책을 쓰던 때는 나치가 독일에서 정권을 잡고 발호하던 때였는데, 그 현상을 염두에 둔 듯 그는 “소리를 지르거나 요란하게 인사를 하고, … 우스꽝스러운 집단행위를 한다”고 썼다. 이 시대는 놀이의 정신에 관한 한 명예의 코드도, 게임의 규칙도 내팽개친 천박한 시대였다. 그 나치 독일이 네덜란드를 침략한 것이 1940년 5월인데 이때 하위징아는 대학에서 쫓겨난 뒤 변방 도시 더스테이흐로 유폐됐다가 1945년 2월 숨을 거두었다.(고명섭 기자) 

10. 03. 07.  

P.S. 나에게 <호모 루덴스>는 <중세의 가을>보다 인상적인 책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주 오랜만에 목차를 다시 보니 흥미를 끄는 대목이 없지 않다. 대학 1학년 때 읽은 것이니 거의 안 읽은 것과 마찬가지고, 그사이에 책에 대한 안목도 달라진 때문일 것이다. 호이징하의 문제의식을 계승한 책으론 로제 카이와의 <놀이와 인간>(문예출판사, 1994)이 있다. 최근에 나온 버전으론 스티븐 나흐마노비치의 <놀이, 마르지 않는 창조의 샘>(에코의서재, 2008)도 참고할 수 있겠다. 서양미술사학자인 노성두씨는 "나는 이 책을 호이징가의 <호모 루덴스>와 바꾸지 않겠다"고까지 평했다. 국내서로는 한경애의 <놀이의 달인, 호모 루덴스>(그린비, 2007)가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Йохан Хейзинга Homo ludens. Человек играющий. Статьи  по истории культуры Homo ludens. Artiklen over de CultuurgeschiedenisЙохан Хейзинга Homo ludens. Человек играющий

마침 러시아에 있을 때 호이징하의 책이 양장본으로 새로 출간되어 구입한 기억이 있다. <중세의 가을>과 <호모 루덴스> 두 권의 러시아어본을 구했는데, 나머지 책은 여력이 닿지 않았고, 일단 국내에 소개된 책만이라도 구해놓자는 생각이었다. 다시 검색해보니 저렴한 문고본으로도 출간돼 있다. 왼쪽이 <호모 루덴스>의 러시아어 양장본이고 오른쪽이 문고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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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리는 여전히 호모 루덴스인가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10-01 00:20 
    한겨레에서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지면사정으로 두달인가 쉬다가 다시 시작하는데, 너무 오랜만인지 '로자의 번역서 읽기'라고 나갔다. 첫문장에도 오타가 있어서 교정해놓는다. 요한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를 대상으로 삼았다. 현재 두 종의 번역본이 나와있는데, 한겨레 지면에는 까치판이 소개됐다. 두 번역본을 다 확인하며 썼지만 주로 인용한 건 연암서가판이다.한겨레(11. 10. 01) 놀이와 ‘유치한 놀이’의 차이점인간이 ‘생각하는
 
 
yamoo 2010-07-19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성사와 기린원..정말 이 두 출판사의 엔날 리스트를 보면 갖고 싶은 책들이 한보따리입니다..ㅎㅎ 호모루덴스는 저도 까치 출판사본으로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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