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과 인간의 폭력을 어떻게 봐야 할까. 이번주 다시 나온 책 두 권 때문에 갑작스레 엮은 물음이다. 



<중세의 가을>과 함께 하위징아의 대표작 <호모 루덴스>(연암서가)가 개정판으로 다시 나왔다. 확인해보니 연암서가판으로 2010년에 초판이 나왔으니 8년만에 나온 개정판이다. 기억에 방송대의 '책을 삼킴TV'에서 테마도서로 다룬 적이 있다(김어준 총수가 사회를 맡은 독서토크 프로였다). 그게 벌써 8년 전인가. 하위징아의 대표작들이 이종인 번역가의 번역본으로 모두 대체가 되었는데, <중세의 가을>은 아주 오랜만에 다시 읽어볼까 싶다. 그럴 여유가 있을까. 



폭력의 문제를 다시 떠올린 건 야마기와 주이치의 <인간 폭력의 기원>(곰출판)이 나와서다. 처음에는 <폭력은 어디서 왔나>의 속편인가 했더니 제목을 바꾸어 다시 나온 것이다. 저자는 교토대 총장으로 재임중인(2017년 현재) 영장류 학자다. 야생 일본원숭이와 침팬지, 고릴라가 주 전공분야. 


"세계적인 진화론의 대가이자 일본 영장류학의 기초를 세운 이마니시 긴의 대를 잇는 인물로 평가되는 저자는 40년 가까이 고릴라의 행동을 관찰하고 인간 사회와 비교 연구했다. 그는 아프리카 열대 숲을 오가며 우간다, 르완다, 콩고민주공화국(옛 자이르) 등에서 벌어진 내전의 상처를 두 눈으로 목격한다. 그리고 그러한 폭력적 사태에 내몰린 인간을 보며 동족상잔의 전쟁도 불사하는 잔인한 폭력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의문을 품는다."


<폭력은 어디서 왔나>를 구입해놓고 독서 시기를 놓쳤는데, 생각난 김에 다시 찾아놓아야겠다. 새로 개정된 내용이 있는지 궁금하다...


18. 0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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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의 <윤리21>(도서출판b)이 새 번역본으로 다시 나왔다. 초판이 나온 게 21세기 벽두였으니 햇수로는 17년 전이다. 17년만에 다시 읽으려니 감회가 없지 않다. 가라타니 고진을 지속적으로 읽어온 것도 20년은 되는 듯싶다.

서문에서 저자가 적고 있는 대로 <윤리21>은 칸트를, 칸트의 윤리학을 다시 읽으려는 시도이고 그런 점에서 <트랜스크리틱>의 짝이 되는 책이다. <트랜스크리틱>에 대한 강의를 기획했다가 보류하긴 했는데 칸트전집도 나오고 있는 김에 장기적으로 다시 기획해봐도 좋겠다. 돌이켜보면 내가 이해하는 칸트는 상당 부분 가라타니 고진이 읽은 칸트다.

책의 의의에 대해서는 출판사의 자세한 소개글을 참고할 수 있다. 가라타니 고진의 책 가운데 가장 많이 읽혔다고도 하니까 가라타니 고진 입문서로 읽어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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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더 강의 일정이 남아있지만 매주 목요일 밤이면 고비를 넘겼다는 느낌이 든다. 월요일부터 나흘간의 일정만으로 진이 빠지게 하기에. 이번주만 하더라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 오르한 파묵, 프란츠 카프카, 너새니얼 호손, 제임스 조이스, 파울로 코엘료, 토마스 만, 자크 데리다에 대해서 강의했다(내일은 기형도의 시에 대해 강의한다. 비공개강의다). 평균적으로 매주 8명의 작가(와 그들의 작품)에 대해 강의하는데, 이 정도면 문학강사로서 최다강의자가 아닐까 싶다(물론 건강상으로는 강의를 좀 줄여야 한다).

미국문학 강의에서 호손의 단편들을 읽고 있는데 다음주에는 <주홍글자>에 이어서 쓴 또다른 로맨스로 <일곱박공의 집>을 읽는다. 국내 번역된 호손의 장편소설은 모두 세 편인데 호손은 모두 ‘로맨스‘라고 불렀다. 연애담을 뜻하는 로맨스가 아니라 사실적인 소설과 달리 비현실적인 내용도 포함한 이야기라는 뜻의 로맨스다. 이런 경우는 ‘로망스‘라고 부르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다.

호손의 단편들은 대략 1831년에서 1850년까지 쓰인다. 그 이후 호손은 <주홍글자>를 필두로 주로 장편소설에 주력한다. 공직자로서의 활동을 제외하면 말이다. 이번에 주요 단편들을 읽으며 호손 문학의 독특한 특징을 확인하게 되는데 그것이 장편에서는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보는 게 나의 관심사다. <주홍글자>는 여러 차례 읽었기에 <일곱박공의 집>을 골랐고 다음주에는 이 작품에 대한 견해도 갖게 될 것이다. 남은 장편은 <블라이드데일 로맨스>인데, 이 세 작품을 호손은 1850년대 초에 집중적으로 썼다.

<주홍글자>(1850)
<일곱박공의 집>(1851)
<블라이드데일 로맨스>(1852)

작품의 가치나 문학사적 중요성은 순서대로다. 한권만 읽는다면 <주홍글자>이고 거기에 순서대로 더할 수 있다. 강의에서는 <일곱박공의 집>만 다루지만 여력이 있다면 <블라이드데일 로맨스>까지도 이번에 읽어보려 한다. 호손을 언제 또 읽겠는가라는 생각이 이런 부담을 떠안게 한다. 호손의 전기와 함께 당대의 ‘시장혁명‘을 다룬 역사서를 주문해놓은 상태라 나중에라도 다시 다루기는 해야겠다. 주문한 책들의 면목을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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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페이퍼를 쓰기도 한 존 쿳시의 <페테르부르크의 대가>(문학동네)가 다시 나왔다. 2001년에 나왔다가 절판되었던 책으로 제목이 가리키는 건 도스토에프스키다. 도스토에프스키에 대한 오마주이면서 동시에 아들을 잃은 아비의 심정을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의탁하여 쓴 소설. 번역본이 처음 나왔을 때 강의에서 다루고 리뷰를 쓰기도 했다. 그 리뷰를 다시 읽어본다(쿳시에 대해서는 <마이클 K>가 다시 나오면 몇작품을 강의에서 한꺼번에 읽고 싶다)...

남아공의 작가 쿳시가 난데없이 1869년의 러시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를 호출한다. 해외여행 중이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의붓아들 파벨의 죽음을 통고받고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다. 그리고 아들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음모론을 쿳시-도스토예프스키는 교묘한 문학론으로 치환한다. 이것이 소설의 뼈대다.

쿳시의 문학론은 일견 단순하다. 작가는 글쓰기를 위해서 모든 사람들 배반하고 또 영혼을 팔아먹는 작자라는 것. 그 배반의 맛은 식초맛인가, 쓸개맛인가? ‘이제 그는 그것의 맛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것은 쓸개즙 맛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제대로 된 독법은 그 쓸개즙 맛을 얼마만큼 따라가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책을 읽고난 감상은 다소 씁쓸하다.

실제 도스토예프스키의 의붓아들 파벨(1848-1900)은 소설에서 그려지는 네차예프 사건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는 1869년에 페테르부르크에 간 일도 없다. 그렇다면 소설의 마스터(대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소설에서 작가 쿳시의 마스크이자 대행자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작가 쿳시는 아들을 자살로 잃었다고 한다. 아들의 죽음에 처한 한 작가가 그 비탄과 분노를 어떻게 떠밀어낼 것인가 하는 절박함이 이 소설에 형식을 부여하고 있다. 하지만, 그 형식은 다소 늘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단 ‘죽은 아이에 대한 슬픔은 끝이 없는 법이다‘는 것이 전제이다. 하지만 결국 작가는 ‘죽은 아이를 살려낼 수 없다‘는 것이 결론이다. 쿳시-도스토예프스키는 끊임없이 자신의 아들을, 아들의 영혼을 불러내고자 하지만, 그것은 불가항력적으로 불가능하다. 그에게 남겨져 있는 일은 다만 아들의 죽음을 수습하면서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른바 배신의 글쓰기이다. 그런데 죽음의 의미는 ‘죽을 때까지 서로의 적인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생성된다. 여기서 ‘내‘ 아들의 죽음은 그 구체성을 상실하는 대신에 보편성을 획득한다.

그렇다면 러시아라는 시공간은 사실 이 소설에서 그다지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지 못하며 플롯 또한 마찬가지다. 소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죽음에 대한 사변적인 푸닥거리다. 그것은 여자들이 갖고 있는 굉장한 비밀로서의 울음을 갖고 있지 못한 사내들의 신음 소리이기도 하다. 아들의 죽음 이후에도 살아야 하는 아버지-작가란 무엇인가? 영혼을 단념한 존재들 아닌가! 소설은 그런 존재들이 가진 ‘고통의 무딘 부재‘에 대해 이빨 사이로 새는 듯한 문장들로 서술하고 있다. 그것은 씁쓸한 쓸개즙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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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먼지에도 불구하고 봄볕이 좋은 날이지만 내리 죽음에 관한 책 얘기다. 죽음학(내지 사망학)의 고전으로 꼽히는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의 <죽음과 죽어감>(청미)이 재출간되었다. 그간에 절판된 상태라 죽은 책이었는데 이번에 다시 생명을 얻은 것. 1969년에 초판이 나왔으니 얼추 반세기가 되어 간다. 그 사이에 저자도 유명을 달리했다(2004년에 타계했다).

죽음학에까지 특별한 관심을 둔 건 아님에도 퀴블러로스를 기억하는 것은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 때문이다. <죽음과 죽어감>에서 죽음에 이르는 단계를 정확하게 묘사한 소설로 언급하면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죽음학의 부교재 같은 작품이 되었다. <죽음과 죽어감>을 읽기 위해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고, 거꾸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기 위해서 <죽음과 죽어감>을 참고하게 된 것.

<죽음과 죽어감>에 더해서 <죽음과 죽어감에 답하다>(청미)도 이번에 나왔는데(초역이지 싶다), 제목대로 <죽음과 죽어감>의 속편이자 보충격의 책이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박사의 <죽음과 죽어감>이 출간된 1969년 이후 5년 동안 죽어가는 환자를 돌보는 일에 관한 약 700회의 워크숍, 강연, 세미나를 진행하면서 청중들이 가장 많이 던진 질문들과 이에 대한 자신의 대답을 모아 1974년에 출간한 책이다. 

청중에는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작업치료사, 재활훈련사 등 의료 서비스 전문가들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한 일반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책에는 ‘죽음과 죽어감’에 대해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거의 모든 질문들이 총 망라되어 있다.˝

1974년작이면 좀 오래전 느낌도 나지만 죽음이 유행을 타는 주제도 아니기에(요즘이라고 안 죽는 건 아니잖은가) 여전히 유효한 내용이 많을 듯하다. 아무리 고령화사회라고는 해도 죽음은 남의 나라 일이 아니다. 퀴블러로스 여사의 말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죽응에 더 깊이 고민하고 이해하고 인간의 유한성을 받아들일 때 삶을 의미 있고 충만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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