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따라 방문자 수가 많다. 요즘 뜸하게 페이퍼를 올리는데도 '눈팅' 내방객들이 많은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겠다. '그녀의 책은 거기에 없었다' 같은 제목이 선정적이어서일까?(고로 대개는 '헛걸음'을 한 게 아닐까?) '저널리스트 마르크스'란 타이틀도 자칫 선정적인 것으로 읽힐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무얼 꾸며대는 건 결코 아니며 마르크스가 저널리스트로 쓴 기사모음집이 최근에 펭귄복으로 출간됐고 그 편집자인 레드베터가 한 잡지에 그에 관한 글을 기고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옮겨올 따름이다. 개인적으론 마감을 제때 지키지 못했다는 마르크스의 에피소드에서 매번 마감이 지나서야 가슴을 졸여가며 가까스로 원고를 마무리짓고 있는 나의 처지가 오버랩되어서이다. 그게 말하자면 나와 마르크스의 드문 공통점이겠다. 차이점? "누군가 마감 독촉을 할 때 가장 좋은 글을 썼다"는 마르크스와 달리 나는 매번 '가장 좋은 글을 쓸 뻔 했는데!'라며 한탄한다... 

한겨레(07. 10. 23) "기자 카를 마르크스는 마감 안 지켜’

그는 열정적인 언론인이었다. 굶어죽는 사람들의 고통을 황색지 기자 못지않게 선정적으로 묘사했고, 급진주의적 성향으로 편집자들과 종종 마찰을 빚었다. 하지만 마감 독촉에 시달린 뒤에야 좋은 글을 썼다는 점에서, 그는 천생 언론인이었는지도 모른다. 다름아닌 칼 마르크스의 이야기다.

마르크스의 언론인 생활에 대한 책을 집필한 미국 언론인 제임스 레드베터는 미국의 진보적 주간지 <더네이션> 최근호에 기고한 글에서 “1852~1862년 <뉴욕트리뷴> 런던 통신원 생활이 마르크스의 사상적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며, 마르크스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를 철학자나 경제학자뿐만 아니라 기자로서도 분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PENGUIN CLASSICS DISPATCHES FOR THE NEW YORK TRIBUNE

당시 진보지 <뉴욕트리뷴>은 발행부수 20여만부의 세계 최대 신문이었다. 신문에는 10여년간 마르크스가 쓴 글 500여개(4분의1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대필)가 실렸다. 이는 오늘날 마르크스-엥겔스 전집의 7분의1을 차지할 정도의 분량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신문사의 관계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어떤 편집자는 그의 글 앞에 “마르크스는 매우 강한 입장을 갖고 있고, 그중 일부는 우리와 매우 다름”이라는 ‘편집자 주’를 붙이기도 했다. 마르크스 역시 엥겔스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이 신문사에서 자본주의적 착취를 당하고 있다며, “이따위 신문사를 위해 글을 쓰는 것은 구역질이 난다”고 불평한 적도 있다.

당시 여행 제한으로 영국에 발이 묶여있던 마르크스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취재’를 할 수 없었다. 대신 그는 대영도서관에서 유럽 각국의 신문을 섭렵하며 미국 독자들이 접할 수 없었던 유럽의 최신 소식을 전달했다. 여기에 그의 역사에 대한 조예와 엥겔스의 특기인 군사적 지식이 버무려져, 마르크스의 칼럼은 ‘유럽 정치의 주요 사안을 가장 정확하게 짚어주는 글’이라는 평가까지 들었다. 1857년 마르크스는 영국 중앙은행이 활동을 중단할 것이라는 ‘특종’ 기사를 썼다. 아편무역과 노예제에 대한 마르크스의 통렬한 비판은 그의 글 중에서도 가장 ‘마르크스적’인 것으로 꼽힌다.

레드베터는 마르크스가 언론인 생활을 하며 얻은 사실(팩트)이 그의 사상 발전의 거름이 됐다고 지적했다. 레드베터는 또 “마르크스는 누군가 마감 독촉을 할 때 가장 좋은 글을 썼다”며 “공산주의자동맹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1848년 2월1일까지 <공산당선언>을 쓰라는 강력한 독촉 편지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영원히 그 글을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서수민 기자)

07. 10. 23.

P.S. 기사의 타이틀에선 '카를 마르크스'라고 해놓고 본문에선 '칼 마르크스'라고 쓴다('카를'은 물론 'Karl'을 독어식으로 읽어준 것이다). 아마도 기자와 데스크간에 의견 조율이 되지 않은 듯한데, '카를'이라고 티낼 것 없이 그냥 통용되고 있는 '칼'로 충분하지 않은가, 라는 게 내 생각이다(찾아보니 프란시스 윈의 평전이 품절됐다. 마르크스에 관한 전기로는 가장 평이 좋은 책이 아닌가 싶다). '한나 아렌트'를 굳이 '해나 아렌트'라고 적어놓아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하는 건 '원칙의 실천'이 아니라 '고집의 과시'로 여겨지기에...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늘빵 2007-10-23 19:34   좋아요 0 | URL
그냥 하나로 통일했음 좋겠어요. 카를(칼), 휴움(흄), 해나(한나), 롤스(롤즈) 등등

로쟈 2007-10-23 20:11   좋아요 0 | URL
'휴움'도 있나요? 흠...

마늘빵 2007-10-23 23:50   좋아요 0 | URL
오늘 읽은 어떤 책에는 그렇게 되어있더라고요. -_- 좀 옛날 분이 쓰신거긴 합니다.

로쟈 2007-10-24 07:05   좋아요 0 | URL
'휴움'의 경우엔 사정이 다른 것 같습니다.^^ 현재 혼용되는 표기는 아니니까요.

푸하 2007-10-23 21:24   좋아요 0 | URL
"매번 '가장 좋은 글을 쓸 뻔 했는데!'라며 한탄"-- 매번 가장 좋은 글 근처까지 가보신다는 말씀이신거죠? 마감의 압박은 좋은 글을 낳게하는 원천으로 볼 수도 있겠어요.^^;

로쟈 2007-10-23 22:24   좋아요 0 | URL
피가 마른다고 하면 과장이겠지만, 적어도 침은 마릅니다.--;

릴케 현상 2007-10-23 22:04   좋아요 0 | URL
벤담은 벤섬이라고 하던데요~

로쟈 2007-10-23 22:27   좋아요 0 | URL
그런 사례는 많지요. 짐멜->지멜, 임마누엘->이마누엘, 베르그송->베르그손, 로랜스->로런스 등등. 대체로 저는 관행을 존중하면서 일관성을 유지하자는 쪽인데, '원칙'을 강조하는 표기들이 너무 '소모적'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virtuepeak 2007-10-24 00:57   좋아요 0 | URL
월러스틴 같은 경우에는 이매뉴얼이라고 적더군요.. 미국에서 태어난 미국인이니 이게 자연스러울까요?

로쟈 2007-10-24 06:53   좋아요 0 | URL
처음부터 그렇게 소개된 경우는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고유명사 표기란 게 '차이'를 드러내주는 걸로 족하니까요. 프랑스 작가 '발자크'를 '발작'으로 표기하는 게 비효율적인 것은 그 '차이'를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임마누엘 칸트'를 '이마누엘 칸트'라고 표기함으로써 우리가 어떤 이익을 얻게 되는 것인지 저는 의문입니다...

자꾸때리다 2007-10-25 20:36   좋아요 0 | URL
하이덱거 같은 경우는 어떨까요? 나이 드신 분들은 하이덱거라고 쓰시던데.

로쟈 2007-10-26 20:58   좋아요 0 | URL
현재 '하이데거'로 통용되므로 별 문제는 아닌 거 같습니다.^^

lastmarx 2007-11-04 09:36   좋아요 0 | URL
프랜시스 윈의 [마르크스 평전]은 재밌는 전기인데, 에드먼드 윌슨의 [To the Finland Station] 가운데 맑스 부분에서 가져온 게 많습니다.
예전에 정치부 기자일 때 <맑스는 다른 정치부 기자들과 달리>라는 메모를 한 적이 있습니다. http://blog.naver.com/lastmarx/60018927087

로쟈 2007-11-04 09:52   좋아요 0 | URL
베꼈더라도 '표절'은 아니겠지요. 유명한 저작을 베낀다는 건 '자살'행위일 테니까요. 절판된 윌슨의 책은 다시 나온다는 얘기도 있던데, 가급적이면 원제대로 재출간되면 좋겠습니다...

lastmarx 2007-11-04 11:39   좋아요 0 | URL
표절이 아니라 윌슨이 맑스에 대해 논한 것들을 윈이 가져다가 논하거나 살을 붙이거나 했다는 것이지요. 평전은 각주가 없는 책이고 '생각'의 출처를 다 명시하진 않으니까요. 평전을 먼저 읽고 참 똑똑하다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윌슨의 혜안이었던 것이지요. 클린턴 부부도 청년기에 읽었다던 To the Finland Station 원제로 고쳐 놓고 번역문장과 편집도 잘해서 고급스런 책으로 나오면 좋겠습니다.
 

중앙일보에 주말마다 연재되는 '글로벌 책읽기'는 몇 주전부터 찾아 읽는 코너이다('세계의 책' 범주에 딱 들어맞는 연재이기도 하다). 이번주에 다루어진 책은 우리에게도 임지현 교수와의 대담 <오만과 편견>(휴머니스트, 2003)을 필두로 하여 여러 권의 책이 소개된 바 있는 사카이 나오키이다('국민주의 비판'이 그의 주된 이론적 화두이다). 그의 신작이 <일본/영상/미국 - 공감의 공동체와 제국적 국민주의>인 모양인데, 얼른 소개되었으면 싶은, 흥미로운 주제의 책이다. 나는 소개기사나 챙겨두도록 한다.

중앙일보(07. 10. 06) 영화도 제국주의의 숨겨진 무기였다

20세기는 미국의 시대였다. 미국적 보편주의는 미국산 대중문화를 매개로 확산, 보급되었다. 특히 헐리웃 영화는 그 전형을 보여준다. 이 책에서 저자는 영화의 정치적 작용을 도마 위에 올린다. 예컨대, 한국전쟁 당시 미국인 신문기자와 중국·유럽 혼혈의 홍콩 여성의사의 사랑을 그린 영화 ‘모정(慕情)’(1955)은 그 해 골든글로브 국제이해 공헌상을 받았다. 그러나 이 영화가 중국여성 역으로 백인 여배우 제니퍼 존스를 등장시킨 것은 오로지 타인종과의 육체적 접촉을 금기시하는 ‘양식 있는’ 백인관객을 배려하기 위해서였다. 영화 속에서 동양인 여주인공은 남자 주인공의 눈에 들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다. 그 점에서 그녀는 미국인 해군장교에 버림받고 스스로 자결하는 오페라 ‘나비부인’의 일본인 여성 ‘초초상’의 후예이다. 여기에는 여성은 백인 남성의 ‘인지’를 통해서만 자기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남성(서양)우월주의가 작동한다. 반면, 비서양인 여성의 호의를 얻기 위해 백인 남성이 새로운 자기정체성을 만드는 연애이야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저자에 의하면, 식민지 상황의 국제 연애를 그린 영화의 압도적 다수는 식민지지배 질서를 전복할 수 없는 여성의 종속으로 끝나는 이야기를 생산해왔다. 다시 말해서, 20세기에 만들어진 인종간 연애영화는 국제관계의 알레고리 그 자체이며, 이 경우 영화는 국제간 권력관계를 획정하고 추인하는 장치가 된다. 1940년 일본에서 만들어져 중국 및 동아시아 각지에 배급된 영화 ‘지나(支那)의 밤’도 이 연장선상에 있다.

저자는 일본인 남성과 중국인 여성의 사랑을 그린 이 영화가 남경학살(영어로는 ‘남경의 강간the Rape of Nanjing’으로 일컬어진다)의 3년 후에 만들어진 사실에 주목한다. 강간은 강제적인 종속을 의미하며 피지배자의 의지에 대한 폭력적인 침해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양국 남녀를 낭만적인 연애관계 속으로 등장시킴으로써 일본의 중국 지배가 양자 간의 동의 하에 이루어진 정상적이고도 제도화된 정치현실이라는 점을 주장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저자의 관점을 적용하면, 종군위안부의 문제를 외면하거나 축소하고자 하는 일본 보수층의 태도 역시 ‘강간이 아닌 연애로서 식민지 역사를 구성하고자 하는 의도’와 맞물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또 ‘반전 영화’로 알려져 있는 ‘디어 헌터’가 실은 미국(서양)이 비서양세계에 행사한 폭력의 역사를 부인하고자 하는 미국인들의 집단 심성에 기대고 있다고 지적한다. 또한 미국인에게 ‘러시안 룰렛’과 같은 비인간적 고문을 강요하는 베트남인을 등장시킴으로써 ‘피해자 의식’을 부각시키고, 나아가 아시아인에 대한 반감에 의한 공감을 구축함으로써 국민주의를 강화한다는 것이다. 일본의 국민적 ‘반전영화’라 할 수 있는 ‘버마의 하프’ (1956) 역시 사카이식 비판적 감수성의 여과지를 거치면 일본판 ‘디어 헌터’가 된다.



한편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을 미국의 헤게모니 수용과정에서 나타난 내전의 상처라는 시각으로 접근한 제4장에서 내내 유지되어왔던 비판적 사유의 날카로움이 무뎌진 것은 아쉽다. 그 역시 일본인 지식인으로서 숙명처럼 직면해야 하는 이른바 ‘제국의 원죄의식’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일지도 모른다.

전후 일본과 한국의 민족주의가 미국의 패권주의와 공범관계에 놓여있다는 저자의 관점은 자위대를 ‘타위대’로 표현하는 등 더러 극단적인 주장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그러나 철저한 국외자적 감수성을 토대로 영역을 가로지르면서 현존하는 일본·미국의 국민주의 및 식민주의적 정치·문화현실에 대해 비판을 전개하는 저자의 작업은 ‘밖으로부터의 사유’에 취약한 국내 인문학계에 의미있는 자극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윤상인_한양대 교수)

07. 10. 07.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yoonakim 2008-01-10 17:45   좋아요 0 | URL
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들이 제국주의적 징후를 드러낸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책이 있었군요^^ 참고되겠슴다^^
 

중앙일보의 '글로벌 책읽기' 코너에 <뉴로맨서>의 작가(이자 <코드명 J>의 원작자) 윌리엄 깁슨의 신작 소설이 소개돼 있기에 옮겨놓는다(찾아보니 지난 8월에 나온 최신작이다). '세계의 책'에 올려놓지만 조만간 번역돼 나오지 않을까 싶다.

중앙일보(07. 09. 22) [글로벌책읽기] 테러 공포·미래 불안 … 미국은 `유령의 나라'

미국은 현재 유령의 나라다. 사이버스페이스라는 말을 만들어낸 것으로 유명한 윌리엄 깁슨의 신작 소설에 의하면 그렇다. “미래는 이미 와 있다”고 선언한 그는 과학소설이야말로 문학이 가진 전복적 힘을 잃지 않고 있다고 믿는다. 그는 말한다. “나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현재를 그리려고 한다. 과학소설이 쓸모가 있다면 그것은 인류가 나아갈 미래의 방향을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탐사하는 것이다. 지구는 이미 외계 행성이다.”



공상과학소설가인 저자가 공상적 미래가 아닌 2006년의 미국을 배경으로 쓴 이 소설은 미국이 처한 방향 상실과 정체성 혼란을 잘 형상화하고 있다. 중심적 인물 없이 세 겹의 스토리라인이 서로 뒤엉키고 결말조차 열려있어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주요 등장인물을 중심으로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홀리스는 전직 인디 락 밴드의 가수였지만 현재는 창간되지도 않은 잡지 ‘노드’의 프리랜서 기자다. 그녀에게 오밤중에 떨어진 취재 목표는 새로이 등장한 ‘위치예술’이다. 하지만 나중에 드러나는 실제 취재 목표는 뱅쿠버에 도착하는 정체불명의 화물 콘테이너의 위치다. 취재를 명한 막후 인물은 광고 재벌 빅 엔드로서 현재의 미국을 움직이는 유령같은 권력을 상징한다. 비정규직 기자가 존재조차 불확실한 잡지를 위해 아리송한 대상의 취재에 나서는 것이다.

두 번째 스토리 라인은 CIA 요원으로 간주되는 브라운과 그에게 인질로 사로잡힌 마약중독자 해커 밀그림이 만들어간다. 브라운은 마약과 위협으로 밀그림을 조종해 그가 가진 KGB의 암호화된 인터넷 기술로 쿠바와 러시아 커넥션을 감시하며 콘테이너를 추적한다.

한편 러시아에서 첩자 훈련을 받고 현재 미국에서 암약중인 쿠바-중국 정보마피아의 일원인 티토는 스파이 세계의 현란한 기술적 판타지를 보여준다. 아프리카 토착 종교의 믿음을 간직하고 있지만 카톨릭을 가장하고 있는 그는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자유를 향한 인간의 탐구를 대변한다.

이 세 가닥의 이야기를 얽어매는 것은 온갖 종류의 최첨단 과학 용어들과 장비들을 현란하게 운용하면서 벌이는 추격전이다. 거기다 로스엔젤레스·뉴욕·뱅쿠버를 왕복하는 공간 이동을 통해 미국 전체의 문화적 지도를 정치지리학적으로 그려낸다. 첨단 정보기술에 관한 세부 묘사는 과학기술의 진보가 세상을 바꾸는 힘임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하지만 깁슨이 이러한 힘의 세계와 의미심장하게 대비시키는 것은 ‘위치 예술’이다. 위치 예술이란 특정 장소에서 특정 안경을 써야만 작품이 보이는 예술을 말한다. 사이버스페이스가 공간과 시간의 차이를 무화시켰다고 해서 주체적 시점의 고유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깁슨은 지구적 시장단일화가 세계관의 모델로 제시하고 있는 사이버스페이스의 일원화에 반대해 지리적 고유성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 ‘매트릭스’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합친 듯한 이 소설은 현재의 미국 문명에 대한 준엄한 비판으로 읽힌다. 테러 공포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방향 감각을 상실한 미국인들은 현재 출구 없는 미로 속에 갇혀 있고 유령들만이 활개치고 있다는 것이다. 소설의 원제 ‘유령의 나라(Spook Country)’에서 Spook는 유령이란 뜻이지만 스파이를 의미하는 속어이기도 하다.(이영준/ 문학평론가)

07. 09. 22.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람혼 2007-09-25 03:25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윌리엄 깁슨의 신작 소식을 접하고 이곳 로쟈 님의 서재에서 그에 관한 소식을 다시 접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던 터입니다.^^ 기사 감사합니다. 풍성한 한가위 되시길~!

로쟈 2007-09-25 10:10   좋아요 0 | URL
제가 그 정도로 발이 빠른 건 아니고 우연히 소개기사를 읽었을 뿐입니다.^^; 람혼님도 편안한 연휴가 되시길...
 

서재일이란 게 주말과 휴일에 오히려 일이 더 많다. 많은 걸 보류하고 생략하더라도 몇 개의 페이퍼 거리는 꼭 남기 마련이다. 얼마전에 나온 'How To Read' 시리즈에 대한 가장 '도발적인' 리뷰를 옮겨오는 것도 그런 거리의 하나이다. 필자가 현직 편집장인지라 인문 시리즈에 대한 '감각'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리뷰이다. 

컬처뉴스(07. 06. 15) 역사상 가장 도발적인 사상과의 만남

다른 편집자들은 모르겠지만, 직접 책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내가 가장 해보고 싶은 작업 중 하나는 세계 유명 사상가들의 사유를 알려주는 입문서 시리즈를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런 시리즈가 나올 때마다 꼭 챙겨보곤 하는데, 특히 내가 주목해 보는 것은 ‘의심의 거장들’이라고 불리는 칼 맑스, 프리드리히 니체,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각각의 시리즈가 어떻게 다루고 있느냐이다(‘의심의 거장들’이라는 유명한 표현은 프랑스의 철학자 폴 리쾨르가 자신의 1965년 저서 『해석에 관하여: 프로이트에 관한 에세이』에서 처음 이들에게 붙여준 것이다).

내가  ‘의심의 거장들’을 다루고 있는 방식을 눈여겨보는 첫 번째 이유는 개인적인 이유다. 최소 열 명 이상을 다루고 있는 각 시리즈의 모든 책을 매번 다 읽을 수 없는 나로서는 몇 권만 집어들 수밖에 없는데 이왕 집어들 거면 맑스, 니체, 프로이트를 집어든다. 즉, 이 3인방은 이들과 관계된 책이라면 무엇이든 집어들만큼 내가 좋아하는 사상가들이다.

두 번째 이유는 제법 학문적인, 그러나 당연히 주관적이기도 한 이유인데, 나는 ‘의심의 거장들’이라는 데 그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는 이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시리즈라면 다른 사상가를 다룬 수준도 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이 ‘의심의 거장들’을 어떻게 다루고 있느냐는 내게 해당 시리즈의 수준을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인 셈이다.



“우리 시대 교양인을 위한 고품격 마스터클래스”라는 문구와 함께 첫선을 보인 “HOW TO READ”(웅진지식하우스) 시리즈를 보는 내 관심도 바로 여기에 맞춰져 있다. 내가 즐겨 사용하는 이 리트머스 시험지는 삼단, 즉 "누가 썼는가", "잘 썼는가", "쉽게 썼는가"라는 기준으로 이뤄져 있는데 각 단을 모두 빨간색으로 변색시키면 합격이다.

먼저 ‘“누가 썼는가”. 이 시리즈의 맑스, 니체, 프로이트 편은 각각 피터 오스본, 키스 안셀-피어슨, 조시 코언이 맡았다. 국내에 소개된 바 있는 인물은 안셀-피어슨이 유일하나, 이들은 모두 자기 분야에서 한몫을 단단히 하고 있는 젊은 연구자들이다(오스본은 1958년생, 안셀-피어슨은 1960년생, 코언은 1970년생).

특히 오스본은 이런 입문서의 필자로 먼저 소개되는 게 안타까울 정도인데 그의 주저 『시간의 정치학: 모더니티와 아방가르드』(1995)와 『문화이론에서의 철학』(2000)도 곧 소개되기를 바랄 뿐이다. 안셀-피어슨의 경우도 마찬가지. 그는 국내에 들뢰즈 연구(『싹트는 생명: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로 먼저 알려졌지만, 사실 영미권의 떠오르는 니체 번역자(대표적으로는 『도덕의 계보학』 등)이자 연구자이다. 그가 쓴 니체 연구서만 해도 『니체와 근대 독일철학』(1991), 『니체 대 루소: 니체의 도덕/정치사상 연구』(1991), 『새로운 니체의 운명』(1993), 『정치사상가로서의 니체 입문: 완벽한 니힐리스트』(1994) 등 네 권에 달한다.

가장 의외의 인물은 코언이다. 물론 영미권 대학 중 정신분석학을 정식 학과로 두고 있는 대학이 거의 없다는 실정을 감안해도, 코언은 영미 포스트모던 문학, 특히 레이먼드 카버와 폴 드 만 전공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아우슈비츠라는 트라우마에 천착하는 ‘수용소 문학’을 연구 중이다(실제로 그의 최근작은 『아우슈비츠에 끼여들기: 예술, 종교, 철학』이다). 그러나 전공보다 부전공에 더 강한 인물이 꽤 있고(가령 『제국』으로 유명한 안토니오 네그리는 정치철학자이기 전에 법학자였다), 그가 꾸준히 연구성과를 발표하고 있다는 점은 사실이니 일단 이 시리즈의 필자 선택은 빨간색.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가장 중요한 건 두 번째 기준, 즉 “잘 썼는가”이다. 내 관심을 염두에 둔다면, 여기서 “잘 썼는가”라는 질문은 이들이 ‘의심의 거장들’에게 “그 명성에 걸맞은 대접을 해줬느냐”라는 질문과 같은 것이다. 각각 1883년, 1900년, 1939년에 죽은 맑스, 니체, 프로이트를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심의 거장들’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일부 사람들은 그냥 버릇처럼 그렇게 부를 뿐이라고 해도, 이들의 의심이 여전히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시사해 주기 때문이다. 그도 아니라면 이들이 제기한 의심에 우리가 여전히 속시원한 답변을 못 내리고 있기 때문이거나. 그렇다면 이들에게 걸맞은 대접이란 이들의 의심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 의심의 유효성(그도 아니라면 함의)을 밝혀주는 것이리라.

그런데 도대체 이들을 한데 묶어 ‘거장’이라고 칭할 수 있게 한 그 의심은 무엇일까? 우리는 이 별명의 창안자인 리쾨르의 언급을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 리쾨르가 보기에 이들은 자본주의가 됐든, 도덕이 됐든, 의식이 됐든 연구 대상의 겉모습을 꿰뚫고 들어가 “진정한 세계, 새로운 진리 영역의 지평을 밝혀냈다”. 또한 이들은 의심을, 비판을 위한 비판의 수단이 아니라, 새로운 “해석의 기술”로 만들어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회의의 대가들’이 아니라 ‘의심의 대가들’이라는 것이다.

리쾨르의 이런 언급을 염두에 두고 본다면 가장 돋보이는 것은 맑스 편이다. 오스본은 『자본』 제1권의 “상품의 물신적 성격과 그 비밀”(제1장 4절)을 첫 번째 발췌문으로 골랐는데, ‘상품 물신주의’에 대한 오해를 지적하며(오스본에 따르면, 맑스가 말한 상품 물신주의란 상품에 대한 욕망의 고착화가 아니라 생산의 사회적 관계, 노동과 가치의 이중적 성격 등을 은폐하는 환상을 지칭한다), 맑스가 상품처럼 단순해 보이는 것에서 어떻게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동학을 읽어내는지 설명하는 부분은 무릎을 탁 치게 만들 정도다. 요컨대 맑스는 ‘노동의 산물인 하나의 물리적 객체’라는 상품의 겉모습을 의심함으로써, 상품의 사회적 의미를 드러내는 그만의 해석체계, 즉 ‘정치경제학 비판’을 창안했다는 것이다.

물론 안셀-피어슨과 코언 역시 니체와 프로이트의 ‘의심’이 어떻게 “진정한 세계, 새로운 진리 영역의 지평”을 밝혀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더 말하면 스포일러가 난무하게 될 테고, 내게 허락된 지면도 줄어들고 있으니 이쯤에서 이만. 아무튼 그래서 두 번째 빨간색.

마지막으로 “쉽게 썼는가”. 사실 이 문제는 좀 복잡하다. HOW TO READ 같은 해외 시리즈의 경우, 번역의 문제(더 나아간다면 담당 편집자의 교정교열 능력이라는 문제까지)가 중첩되어 있기 때문이다. 번역의 경우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옮길 수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아무튼 먼저 각 책의 원문을 보건대 필자들은 자신들이 다루는 해당 사상가들의 저작 중 핵심적인 부분을 직접 읽는다는 이 시리즈의 취지를 잘 따른 듯하다. 그 ‘핵심적인 부분’이 그리 길지도 않고, 그 발췌 부분을 중심으로 각 사상가의 삶과 사유를 명쾌하게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아무래도 이 시리즈의 책임편집자 사이먼 크리칠리(그 역시 1960년생으로서 촉망받는 연구자이다)의 공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편 번역의 경우도 별다른 문제없이 술술 읽힌다. 인터넷서점의 한 독자서평에 의하면 데리다 편의 번역은 좀 의아한 면이 있지만(*한 독자는 '로쟈'인 듯하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상가들을 다룬 책들도 적절한 번역자를 만난 듯싶다. 특히 셰익스피어 편을 옮긴 이다희(그는 셰익스피어 전집을 번역 중이기도 하다), 히틀러 편을 옮긴 안인희(그는 히틀러 평전을 옮긴 바 있다)는 믿을 수 있는 번역자이다. 아무튼 그래서 또 빨간색.

정리하자면, 관심 있는 분들은 꼭 자신이 좋아하는 사상가를 골라 이 시리즈의 한 권을 찾아볼 것은 권유하는 게 내 결론이다. 이 시리즈의 또 다른 장점은 저렴한 가격(9,000원)에 고급 사양(표지나 본문 디자인이나 얄미울 만큼 깔끔하다)이라는 데 있다. 다만 아쉬운 건 이 시리즈 역시 국내 기획물이 아니라는 점. 언제쯤이면 우리는 우리 손으로 만든 이런 시리즈를 갖게 될 수 있을까?(이재원/ 그린비 편집장) 

07. 06. 17.

P.S. 이 시리즈에 대해서는 나도 진작에 언급을 해둔 터이고 몇 개의 페이퍼를 올리기도 했다. <마르크스>와 <니체>는 몇 장씩 훑어보았지만 저자가 가장 생소했던 <프로이트>는 아직 들춰보지 못했었는데, 필자의 '뒷조사' 덕분에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게 됐다(단, 한 가지 착오가 있는 듯한데, '폴 드만' 연구자는 조시 코언이 아니라 톰 코언이다). 한데, 이 리뷰를 굳이 '세계의 책'으로 분류해놓은 것은 '국내 기획물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해서가 아니라 아직 번역/소개되지 않은 책이 조만간 햇볕을 쐬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이다. 가장 첫손에 꼽을 만한 책은 필자도 언급하고 있는 피터 오스본의 <시간의 정치학>(1995)이고 사실 이건 최근에 내가 읽기 시작한 책이기도 하다(이미지가 뜨지 않아서 그냥 <마르크스>로 대체했다).

더불어 꼽자면 <프로이트>의 저자 조시 코언의 <아우슈비츠에 끼여들기: 예술, 종교, 철학>(2003). 아우슈비츠에 관한 아감벤과 바우만의 책들과 함께 읽어볼 만하지 않을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학술저널 담비에서 경희대학원신문에 실린 리뷰 기사 하나를 옮겨온다. 올봄에 세상을 떠난 보드리야르의 <상징적 교환과 죽음>에 관한 것인데, 아직 국내에는 번역/소개되지 않은 책이라 '세계의 책'으로 분류한다. 그건 조만간 이 주저가 소개되기를 기대한다는 의미도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보드리야르에 관한 '신화'나 '전설'이 아니라 그냥 그의 '책'이다.

경희대학원신문 151호(07. 05. 22) 장 보드리야르와 『상징적 교환과 죽음』

얼마 전 보드리야르는 죽음을 통해 이 세상에 작별인사를 남겼다. 데리다와 부르디외의 죽음이 그랬던 것처럼 아직 보드리야르를 기억하고 있던 사람들은 추모의 글을 남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추모란 무엇일까? 추모(追慕)란 죽은 자에 대한 산 자들의 모순적인 태도를 압축해 놓은 역설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또 추모는 ‘죽은 자를 저편의 세상으로 추방하는 동시에 그를 그리워하는 행위’이다.

보드리야르가 『상징적 교환과 죽음』이라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서 현대사회란 죽음을 추방함으로써 세워진 일반 정치경제학이라고 비판하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 추모라는 말을 그에게 되돌려 보내는 행위는 역설적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추모란 산 자들에 의해 죽은 자들의 삶이 재구성되는 의례적 행위이며, 한 사상가의 사후의 삶 또한 한 사회의 의례적 행위를 통해 재구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더 생각해 보아야할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발리바르가 알튀세르를 가리키면서 말했던 ‘살아 있으면서도 죽은 자’에 대한 지위이다. 알튀세르, 보드리야르, 니체… 등등의 사상가들의 운명에는 공통적인 부분이 있다. 그들의 언급에는 무언가 외상적인 지점, 우리가 받아들이기 힘든 진리의 차원을 열어 놓았다는 점이다 : 예를 들자면 인간의 숭고한 기원을 발견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원숭이 한 마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니체의 말과 같은.

이러한 외상적 진리에 대한 한 가지 대처 방법이란 이들의 주장을 뻔한 인용구의 목록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뻔한 인용문의 목록은 그들을 읽지 않아도 그리고 이해하지 않아도 그들을 존중하는 가장 탁월한 (니체적인 의미에서) 교양적인 행위가 아닐까? 그 다음으로는 이들이 대항하고자 했던 상식들을 이들의 주장에 대한 대안점 또는 극복점으로 제시하면서 이들이 제시했던 ‘소화되지 않는 진리’는 회피된다. 이와 같은 전범은 아마도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이론일 것이다.

한때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그러나 보드리야르는 ~을 보지 못했다”라는 수사적 클리세들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한 때 유행했던 (편견으로서의) 상식은 보드리야르는 영화 매트릭스의 사상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매트릭스는 매트릭스 밖의 실재를 상정해 놓았다는 점에서,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매트릭스 밖 실재의 장소에서 영화를 볼 수 있게 허락해 주었다는 점에서 전혀 보드리야르적이지 않다. 보드리야르에게는 그와 같은 안정적인 장소란 존재하지 않는다. 시뮬라시옹을 진지하게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 책이 가져주는 불편함과 영화 매트릭스가 가져다 주는 불편함 속의 안락함을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시뮬라시옹이라고 불렀을까?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것은 보드리야르는 소쉬르가 불러일으킨 언어적 전회를 기꺼이 떠맡은 사람이라는 점이다. 언어적 전회는 재현 이전의 실재를 부정하며, 재현 이전의 실재란 재현이 만들어낸 사후적 효과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실재보다 더 한 실재란 시뮬라시옹에 대한 역설적인 정의이다. 이미 우린 존재론적으로 실재와 마주칠 수 없다면 실재 보다 더 한 실재란 과연 존재하는가?

우린 보드리야르가 르페브르의 제자라는 점, 그리고 르페브르가 근대성의 사회학자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보드리야르는 보들레르, 벤야민 등과 견줄 수 있는 근대성의 시인이자 비판가이다. 그의 근대성 이론은 마르크스와 니체와 뒤르켐과 마르셀 모스 등에 근거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추상적 체계로서의 자본이 기호의 영역을 실질적으로 포섭하는 과정이 소비의 사회이며, 그 결과 섹슈얼리티 마저도 (마르크스의 이윤율 하락의 법칙에 필적할 만한) ‘쾌락률 하락의 법칙화’하는 것이 일반 정치경제학체계, 즉 시뮬라시옹이다. 여기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최첨단의 이론가가 구식의 개념인 마르크스의 ‘사물화’ 논리에 의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상품관계가 인간간의 사회적 관계를 은폐함으로써 자신들만의 자전주기와 축적주기를 갖는 자동적인 운동으로 전화되듯이 시뮬라시옹 또한 인간들간의 관계 속에서 구성되었던 기호들의 관계가 이제는 역으로 인간들 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자동적인 자전주기와 축적주기를 갖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시뮬라르크의 자전이란 자본의 축적운동의 기호화와 그 기호에 의한 현실의 모델화일 뿐이다. 그리고 이 시뮬라시옹의 원주민은 니체적인 최후의 인간(the lastest man)으로 주제화된다. 따라서 그가 되불러 오고자 하는 것은 뒤르켐과 모스의 인류학에서 정식화되었던 상징적 교환의 전복적인 논리이다. 왜냐하면 상징적 논리란 사물화된 추상적인 체계가 아닌 유혹과 결투 그리고 의례에서 볼 수 있는 사회적 관계에 의한 기호의 점유이기 때문이다.

그의 문제틀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그는 근대화의 과정을 총체적인 관점에서 파악하고자하며, 이 근대화를 넘어설 어떤 급진적인 논리를 찾고자했던 사상가였다. 우리가 그의 논의에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후기에 주춤거렸던 그에게 되돌려 주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문제틀이다. 그리고 우린 역으로 그를 다시 급진화해야만 한다.

이제 정리해 보자. 진리는 보드리야르가 그토록 비판하였던 한 사회의 나르시시즘적인 위로도 위안도 아니며, 오히려 이 나르시시즘을 깨는 불편함과 불안이다. 그리고 이 진리의 차원은 보드리야르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정식화 된다. “외양들은 죽지 않는 것들이며, 의미 혹은 비―의미의 허무주의에 다치지 않는 것들이다. 바로 여기에서 유혹이 시작된다.” (『허무주의에 관하여』 중) 그리고 보드리야르는 그의 후기 글들에 대해서 ‘테러리즘적인 글쓰기’라고 명명하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그의 글들에 도전할 것을 부추기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도전과 유혹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는 그의 저서 『상징적 교환과 죽음』에서 논의된 결론을 그에게 되돌려 주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린 그를 그의 글 속에서 살게 할 수 있고, 바로 이 행위 속에서 그를 살아 있는 주장으로 간주하고 그럼으로써 비판할 수 있게 된다. 이제 그에게 사후의 삶을 주도록 하자. 즉 그의 문자 속에서 그를 거주하게 하자.(이병주/ 언론정보학부 강사)

07. 05. 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