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주아 좌파와 우파 아나키스트의 만남

프랑스의 고전학자인 자클린 드 로미이와 소설가 미셸 우엘벡은 같은 프랑스인이라는 것 말고는 마주할 일이 없어 보인다. 다만 그들의 <왜 그리스인가?>(후마니타스, 2010)와 <공공의 적들>(프로네시스, 2010)을 어제오늘 구한 터에, 원서의 이미지가 궁금해서 찾아봤다(알라딘은 아직 프랑스 원서까지는 판매하지 않는다).  

먼저, 자클린 드 로미이는 1913년생이므로 거의 100세에 육박하는 나이다. 1988년에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에 이어 여성으로는 두번째로 프랑스 학술원 회원에 선출되었으며, 작년 레비스트로스 서거 이후엔 최고령 회원이라 한다. 소르본느 대학 교수를 거쳐서 1973년부터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그리스 고전학' 담당교수로 재임했다고 하니까 그리스 고전에 관한 한 프랑스 최고의  석학이다(2007년에 레지옹 도뇌르 최고훈장을 받은 걸로 돼 있다).   

놀라운 것은 90세가 넘은 후에도 거의 매년 한권씩의 저작을 발표하고 있다는 점이고, <왜 그리스인가?>는 1992년, 그러니까 우리 나이로 여든에 펴낸 책이다. 국내에 프랑스의 고전학자로는 장 피에르 베르낭이 있는데, 역자에 따르면 두 사람은 합동 강의를 진행하기도 했다고 한다.  

여하튼 프랑스 고전학의 수준을 엿볼 수 있는 책이기도 해서 소장도서로 손색이 없겠다. 드 로미이의 책은 영어로도 몇 권 번역돼 있다(<왜 그리스인가?>는 아직 영역되지 않은 듯하다).   

 

그리고 이어서 베르나르 앙리 레비와의 서신교환선을 펴낸 미셸 우엘벡. "출간하는 책마다 거센 찬반양론을 불러일으키는 현대 프랑스 문단의 대표 작가"로 소개된다.   

1985년에 시인으로 데뷔했고, 첫번째 장편소설 <투쟁 영역의 확장>(1994)으로 주목받은 뒤에 두번째 소설 <소립자>(1998)로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전세계 30개국 언어로 번역됐다고 한다). 영상 수필집 <란사로테>(2000)와 소설 <플랫폼>(2001)을 더 펴냈고(<란사로테>는 소설로도 분류된다), 현재는 <어느 섬의 가능성>(2005)을 영화화하고 있다고(이미 끝낸 듯하다. http://www.youtube.com/watch?v=rIA-_XOZeH8&NR=1 참조). 국내에는 그의 소설 네 편이 모두 번역돼 있다.

 

그리고 영역본들. <소립자>를 뺀 세 권의 소설 표지다.  

  

그리고 대표작인 <소립자>의 한국어본과 영어본 표지. 

  

그리고 아래는 프랑스어본의 표지와 영화 <소립자>(2006)의 포스터(예고편은 http://www.youtube.com/watch?v=UQNQlxuE0pQ 참조).

    

마음에 드는 표지는 영화의 스틸컷을 집어넣은 영어판이다.

  

그리고, <공공의 적들>의 프랑스어판 표지.

  

표지 이미지들을 둘러보는 것이 머리가 무거울 때 집안에서 할 수 있는 여흥이다... 

10. 03. 27.


댓글(3)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0-03-28 0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28 0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29 0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경향신문에서 와다 하루키 교수의 칼럼을 옮겨놓는다. 매우 흥미로운 지적들을 담고 있다. 일본 NHK에서는 러일전쟁을 다룬 시바 료타로의 대작 소설 <언덕 위의 구름>을 방영중이라고 하는데, 그와 관련하여 '조선병합'의 문제까지 짚어보고 있다(우리 TV에서는 어떤 특집들을 준비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시바의 소설은 찾아보니 <언덕 위의 구름>(전10권, 명문각, 1991)으로 출간된 바 있지만 현재는 절판된 상태다. 때도 때인 만큼 일본을 알기 위해서라도 다시 출간되면 좋겠다. 와다 하루키 교수의 신간과 함께.  

 

경향신문(10. 02. 02) 조선병합과 일본인의 역사관   

지난해 12월 일본 공영방송 NHK는 드라마 <언덕 위의 구름> 제1부를 5주에 걸쳐 방영했다. 이는 작가 시바 료타로의 장편소설을 드라마화한 것이다. 메이지유신 100년을 맞아, 러일전쟁에 이르는 메이지시대 일본을 그린 소설 <언덕 위의 구름>은 1968년 봄 산케이신문 연재를 시작으로 이듬해 단행본으로 출판됐다. 해전의 전략·전술을 수립한 해군 형과 기병대 소속 동생, 또 같은 고향 출신인 문학가 등 세 주인공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시바는 제1권의 맺음말에서 이 소설의 주제를 설명하고 있다. “이 긴 이야기는 일본 역사상 유례없는, 행복한 낙천주의자들의 이야기다.” 일본 국력 증강과 러시아와의 전쟁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 군인 2명과 문학가의 이야기는, 똑같이 ‘언덕 위의 구름’만을 바라보며 죽을 힘을 다해 언덕을 오른 고도성장기의 일본인들이 본받아야 하는 대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소설은 2000만부가 팔리며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러나 시바는 집필 과정에서 러일전쟁에서 우세승을 거둔 일본이 전후에 언덕을 내려오기 시작하더니 결국엔 굴러 떨어지는 최후를 내다봤다. 러일전쟁 개전 전날 밤까지를 그린 제2권의 맺음말에서 작가는 전후 일본의 변화를 예리하게 꿰뚫었다. “요컨대 러시아는 패할 수밖에 없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고, 일본은 뛰어난 계획성과 적군의 이런 사정 때문에 아슬아슬한 승리를 줍다시피한 게 러일전쟁이다. 전후 일본은 이 냉철한 상대적 관계를 국민에게 가르치려 하지 않고 국민 또한 그것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쟁을 절대화하고 일본군의 신비적인 강인함을 신앙처럼 믿게 해 민족적 치매 상태에 빠졌다.” 



러시아와의 해전에서 승리한 주인공은 연합함대의 관람식에 참석하지 않고 고향 친구의 무덤을 찾는다. 이것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다. 시바는 소설에서 포츠머스 조약의 내용뿐 아니라 조약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일으킨 ‘히비야 방화사건’도 다루지 않았다. 마치 전후 일어난 일은 모두 괴로운 것뿐이므로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언덕 위의 구름>은 72년에 신문 연재가 끝나고 같은 해 단행본 제6권이 출간되면서 완결됐다. 시바는 ‘낙천주의자의 이야기’를 쓰려 했지만 작품을 완성했을 때의 기분은 매우 암울했다. 러일전쟁의 승리는 그로부터 40년 후의 일본 패전을 초래했다고 시바는 생각한 것이다. 96년에 세상과 이별을 고한 시바는 생전에 <언덕 위의 구름>의 드라마화를 거절했다. 그 작품이 드디어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소설 판권을 가진 출판사와 NHK 출판부는 시바와 관련한 잡지 특집호와 책을 각각 출간했다.

뜨거운 관심이 집중되는 한편으로 드라마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한국병합 100년을 맞는 시점에 시작해 2011년까지 방영하는 것은 의도적인 게 아니냐는 비판적 시각이 그것이다. 앞서 조선 역사에 정통한 학자 나카쓰카 아키라는 시바의 역사인식에 의문을 제기한 책을 지난해 8월에 내놨다. 그는 시바가 메이지시대는 좋았지만 쇼와시대는 좋지 않았다는 기계적인 역사관을 세웠다며 <언덕 위의 구름>이 ‘조선’을 다루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아울러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저지른 조선왕궁 점령과 동학농민군 몰살작전, 그리고 민비(명성황후) 살해사건 등을 무시한 채 메이지시대 일본을 얘기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실은 필자도 시바의 <언덕 위의 구름>을 의식해 일본이 러일전쟁을 어떻게 일으켰는가라는 주제로 한 책을 구상해왔다. <러일전쟁 기원과 개전> 상권을 지난해 12월18일 출간한 것은 NHK의 드라마 방영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하권은 오는 23일 나올 예정이다. 필자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러시아와 싸우는 것이 숙명적이고 국민적인 과제였다고 판단한 일본인이 전쟁을 위해 필사적으로 준비했다는 것이 역사의 진실이라 보고, 그러한 인식은 역사적으로 옳았는지를 묻는 것이다. 시바는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제국은 이미 시베리아를 손에 넣고 연해주와 만주를 넘어 조선에까지 그 여세를 몰아가고 있었다. 일본은 절실했다. 조선을 차지한다기보다 조선을 다른 강국에 빼앗기면 일본 방위가 위태해지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러시아가 조선을 침략하려 했고 일본은 러시아에 조선을 빼앗기는 것을 허용할 수 없었다는 게 시바의 생각이다. 일본은 조선을 지배하에 놓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일본은 유신에 따라 자립의 길을 선택한 이상 타국(조선)을 괴롭혀 국가 자립을 꾀해야만 했다. 일본은 이러한 역사적 단계로서 조선을 고집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약 이를 버리면 조선뿐 아니라 일본도 함께 러시아에 먹히고 만다.”

이렇게 말한 시바는 작품에서 조선 자체에 대해선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한국은 어쩔 도리가 없다. 500년 역사를 이어온 이씨 왕조의 질서는 이미 노화됐기 때문에 한국 자신의 의사와 힘으로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할 능력은 전혀 없다고 말하는 편이 낫다.” 시바는 이것만 언급했다. 또한 동학농민군과 관련해 서술한 전봉준이 이 소설에 등장하는 유일한 조선인 이름이다. 청일전쟁 전부터 러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왕의 자리를 지켰던 고종에 대해선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다. 더군다나 그의 왕비이자, 왕궁 안에서 일본인에게 살해된 민비의 얘기는 찾아볼 수 없다. 시바는 러시아의 위협만을 강조한다. “러시아의 태도에는 변호해야 할 부분이 전혀 없다. 러시아는 일본을 의식적으로 죽음에 몰아넣고 있었다. 일본은 궁지에 몰린 쥐가 됐다. 사력을 다해 고양이를 무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시바의 이런 시각은 60년대 일본인의 견해이자 실제로 러일전쟁을 경험했던 당시 일본인의 역사관이었다. 그 시대 일본인은 신문을 통해 한국에서 벌어진 일을 매일 접하고 있었다. 1면 톱기사로 한국 정치 이야기를 다루는 일이 흔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은 한국인의 마음을 이해하지 않았다. 이 점에서 시바의 소설 세계는 당시 일본인의 인식과 궤를 같이 한다.

메이지시대 일본인 인식 해체필요
필자가 러시아 문서관에서 자료를 꼼꼼하게 살핀 결과 얻은 결론은 이렇다. 일본인은 문명개화, 부국강병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대외팽창이 필요하다고 보고 조선에 대한 야망을 품었다. 이웃 국가를 지배하고 침략하는 것은 비정상적 행동이라고 판단한 일본인은 러시아가 조선을 침략하려 하기 때문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일본이 조선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즉, 러시아 침략설로 자신들의 조선 침략을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정당화한 것이다. 고종은 1880년대 중엽 청나라와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를 방패로 삼아 저항했다. 철저하진 못했지만 러시아는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으로 삼는 것을 승인하는 협정은 맺지 않는다’는 태도를 고수해, 중립국이 되겠다는 한국의 뜻을 지지했다. 러일전쟁의 기원은 이러한 3자 관계 속에 있다. 이처럼 역사를 새롭게 직시하면서 시바와 메이지시대 일본인의 역사인식을 해체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언덕 위의 구름’이 이웃 국가의 병합으로까지 치달은 심각한 과정을 누구나 확인할 수 있다.

TV 드라마 <언덕 위의 구름> 제1부는 노력한 흔적이 엿보였다. 민비 살해사건은 사진을 이용해 설명했다. 그렇다고 문제시되는 시바의 역사관이 드라마에 노출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를 본 시청자가 어떻게 생각할지가 관건이다. NHK에서는 지난해 특별 프로그램 <일본과 조선 2000년>을 통해 고대부터 이어져온 양국 관계의 역사를 진지하게 재평가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과 통신사 얘기를 다룬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오는 4월부터는 새 프로그램 <한국병합 100년>에서 고종 시대부터 지금까지의 문제점을 되짚는다. 이러한 노력으로 일본 국민이 역사인식을 새롭게 고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필자의 책도 이런 변화에 일조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10. 02. 02. 

 

P.S. 칼럼을 읽고 나니 1910년의 한일병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05년의 러일전쟁부터 알아두는 게 필수적이란 생각이 든다. 관련서들이 몇 권 출간돼 있는데, 언제 한번 도서관 나들이를 해야겠다...


댓글(6) 먼댓글(2)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조선/한국의 입장에서 일본 근대의 계기로서의 서양 제국주의 비판을 어떻게 볼 것인가?
    from 혼자 사는 남자가 조용히 공부하는 곳 2010-02-03 16:49 
    로쟈 님이 옮겨 놓은 와다 하루키의 칼럼을 가지고 현재 새움에서 근동이물 세미나를 같이 하고 있는 네오풀 님과 리플을 좀 길게 나눈 리플을 옮겨 놓아 본다. 원래 리플이 붙기 시작한 곳은 지갱프(http://cafe.naver.com/think2wice/1367)이고 새움 근동이물 세미나 게시판(http://club.cyworld.com/51536042187/130358493)에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미 뒤늦었지만 그냥 블로그에는 닉네임으로 옮겨 놓..
  2. 근대와 근대극복 사이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2-06 21:11 
    출간시에 주목하지 않았다가 뒤늦게 관심을 갖게 되는 책들이 있다. 오늘 관내 도서관에서 대출한 고사카 시로의 <근대라는 아포리아>(이학사, 2007)도 그런 책이다. 필요 때문에 일본 근대사와 근대문학에 관한 책들을 주섬주섬 모아서 읽으려고 하는데, 이 책은 동아시아의 근대에 관한 상당한 다양한 주제들, 혹은 난제들을 다루고 있어서 지난주부터 새삼 주목하게 됐다.   경향신문(07. 11. 2
 
 
푸른바다 2010-02-02 17:02   좋아요 0 | URL
고려대 한승조 교수가 조선이 러시아가 아닌 일본에 병합된 것이 축복이라는 글을 썼다가 문제가 된적이 있었는데, 그의 관점이 아마도 시바 료타로로 대표되는 일본인들의 시각과 비슷했던 것 같군요.
동아시아 근대사는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한중일 3국의 관계도 재정립될 텐데, 기존의 낡은 시각으로는 새로운 변화들을 이해하고 선도하기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새로운 시각 속에서 남북문제와 친일파 문제도 해결해 나가야 할 듯 합니다...
가라타니 고진의 <역사와 반복>을 읽었는데, 참신한 시각이 돋보이더군요. 전적으로 그의 의견이 옳은 것은 아니겠고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좋은 참고는 되리라 생각합니다.

로쟈 2010-02-03 09:33   좋아요 0 | URL
참고할 책들이 몇 권 나와 있다는 건 이번에 알게 됐는데, 올해 좀더 나오면 좋겠어요...

노이에자이트 2010-02-02 21:07   좋아요 0 | URL
<언덕위의 구름>은 시중에 번역본이 있습니다.동서문화사 박재희 번역 <대망> 제 30권 째부터 시바 료타로 장편이 몇 개 있는데 <언덕 위의 구름>도 있습니다.길지만 박진감있는 좋은 작품입니다.아마 <대망>이라는 제목때문에 야마오카 소하치 것만 있는 줄 아는 사람이 많을 거에요.

로쟈 2010-02-03 09:32   좋아요 0 | URL
좋은 정보네요.^^ 한데, 그게 완역인가요? 분량이 다 들어갈 성싶지 않은데요...

노이에자이트 2010-02-03 16:18   좋아요 0 | URL
완역입니다.제1권은 청일전쟁부터 나옵니다.러일전쟁에 관해서는 전쟁 직전 제정러시아 말기의 궁중암투와 동아시아 정책이 상당히 자세합니다.전쟁 장면에서는 위에 소개한 쿠로파트킨이 참가한 전투도 자세히 나옵니다.

로쟈 2010-02-04 09:36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책이 상당히 두꺼울 듯합니다...
 

작년 여름 방한하기도 했던 미국의 고전학자이자 철학자(이자 법학자) 마사 누스바움에 관한 기사가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학자여서 더 많은 책들이 소개되길 바라지만 올해는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유행하는 용어로 하자면 그녀야말로 '통섭형' 학자이다).    

중앙대 대학원신문(09. 11. 04) 예술적 상상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  

누스바움의 아카데미적 경력의 출발은 서양 고전 철학과 문학이다. 그녀의 박사학위 논문인 <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의 운동에 관하여>는 아리스토텔레스 원전을 편집하고, 번역하고, 주석을 붙이고, 해석한 것이었다. 이후 그녀는 그리스 고전 문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헬레니즘 시기의 철학을 공부하면서 다양한 정치적 활동과 국제적 활동을 펼쳤다. 페미니스트로서 누스바움은 한낱 고전학자로서 대학 울타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론을 현실의 영역에 적용하려는 실천적 철학자의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그녀의 활동은 자신이 주장하는 내재적 실재론의 입장에 서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인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혹은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을 통해 이해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입장은 ‘철학함(philosophiern)’을 결국 공동체에 기초한 언어 사용과 관찰자의 공유된 경험에 한정된 사고방식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 다양한 사회 현상을 우리의 관심사와 동떨어진 현상으로 보지 않고 늘 관심과 배려를 보내는 태도가 오히려 세계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관심이 그녀로 하여금 인문학적 범주를 넘어 사회과학적 관심의 영역으로 나아가게 해서 여성문제, 경제발전, 법, 윤리, 교육, 인간발전, 성역할, 인권과 같은 폭넓은 사회문제 영역을 탐구하게 했던 것이다.  

공감에서 비롯하는 실천적 지혜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성공적인 삶이란 어떤 것일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잘 사는 것(to eu zen)’을 바라고, 그것을 목표로 하고 살아갈 것이다. 사람은 본능적 욕구에 따라서만 살지 않으며 일정한 합리적 원칙과 판단에 따라 행위하려 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로고스적 동물’이라 정의했다. 여기서 이성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로고스’는 여러 측면의 인간의 정신 활동을 반영하는 말이다. 인간은 말을 하고, 말을 통해 타자와 의사소통하고,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타자에게 내보인다.

인간은 욕구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욕구와 욕망을 통제하는 ‘합리적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다. 인간은 로고스를 주고받으면서 복잡한 정치 사회인 폴리스를 구성해 살아가기 마련이다. 이런 관점에서 인간이 로고스적 동물이라는 것은 또한 정치적 동물이라는 것을 말한다.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우리의 삶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인간은 윤리적 인간으로 거듭 태어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인간은 공동체 속에서 선한 자와 악한 자의 감정 상태, 삶에 대한 이해, 동정과 공감, 연민과 같은 복잡한 감정 양태들을 배우고 이해하게 된다. 나아가 이런 감정적, 지각적 균형을 배우면서 도덕판단의 기반이 되는 상상력, 감수성, 통찰력을 통해 자신의 도덕적 의식을 성장·강화해 나간다.

전통적 합리주의자들은 객관주의, 탈맥락주의, 이성중심적 사고를 도덕판단의 기준으로 삼았다. 반면 현대에 들어 포스트모더니즘의 계열의 학자들은 맥락을 강조하고 인간의 감정에 기초한 도덕판단, 공감, 상상력, 언어 등을 더 중시해서 인간의 내재적 감정의 영역을 인간의 이성(로고스)에 연결시키고자 한다. 감정과 이성, 욕구와 윤리가 서로 별개의 영역이 아니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감정이 오히려 이성을 설득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도덕판단, 상상력의 토대가 인간의 지각 영역에 놓여 있다고 해석한다. 이런 점에서 가치판단으로서의 감정의 역할이 인간의 실천적 합리성의 중요한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감정이란 한낱 몽매하고 불분명하며 모호한 영역의 어두침침한 내면세계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생각과 판단에 의한 구체화된 믿음과 느낌의 혼합’으로 판단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이성주의자와 달리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누스바움은 감정이 가치판단에서 중요한 인자가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의 행위 영역 안에 이성의 지배를 받는 욕구의 영역이 있음을 밝히고, 인간의 적절한 행위를 판단하는 실천적 지혜(phronesis)를 강조한 바 있다. 감정은 이성과 대립되지 않는 실천적이고 합리적인 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실천적 지혜는 마땅한 때에, 마땅한 방식으로, 마땅한 사람에 대해, 마땅한 목적으로 적절하게 응답하게 만든다. 이러한 인격을 갖출 때 인간은 탁월한 인격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적 지혜 개념을 바탕으로 적절한 반응을 하는 인간의 감정의 능력을 누스바움은 ‘지각적 균형’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타자에 대해서 무관심한 극도의 이기적인 합리성에 따라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 지혜를 발휘하여 타자에 대해 공감과 연민과 같은 공속의 감정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인간은 어떤 맥락에 따라 그 상황을 숙고하는 과정을 거쳐 판단하게 된다. 타자의 존재 양식을 인정하는 것도 타자와의 공감을 통해 이루어지고, 서로 간의 정서적 공감을 바탕으로 적절한 행동 양식을 찾아낸다. 그래서 누스바움은 지각적 균형을 갖춘 사람을 ‘예술적 지각을 갖춘 사람’이라고 말한다. 예술적 지각과 상상력은 도덕적 판단을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의 도덕성과 개별성에 대한 적절한 반응을 요구하며,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관한 질문에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만든다. 요컨대 ‘지각적 균형을 가진 삶’이란 예술적 상상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을 치료하는 수단, 철학
누스바움은 문학과 예술에 대한 윤리적 비평이 예술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엄격한 규범적 잣대로만 작품을 평가해 왔다고 비판한다. 나아가 그녀는 미학적 관심이 실천적 관심인 윤리적 관심과 별개라는 철학적 순수주의를 포기한다. 미적 판단과 윤리적 판단은 결코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스바움은 윤리교육이 문학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문학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상상력과 지적 지각, 감성적 지각을 통해 다양하고 복잡한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윤리적 사유와 욕망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스바움은 “만일 철학이란 것이 우리 자신에 대한 지혜를 탐구하는 것이라면 철학은 문학”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다는 주장까지 내놓는다. 이런 생각은 이미 <자연의 거울>을 쓴 로티에 의해, 합리성을 강조하는 전통 철학은 문학과 해석학에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고 말해진 바 있다. 

이러한 철학적 관점을 비춰볼 때 누스바움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옹호하는 입장에 선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푸코나 데리다를 비판하기도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우리가 직면한 현실 문제에 대한 통찰력을 주고 있기는 하지만 주장을 정당화할 만한 역사적으로 정확한 근거나 논리적 뒷받침은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푸코에 대해선 그의 철학적 문제 제기가 어느 정도 가치를 가진다는 점은 수긍하지만 그가 내세운 현대의 ‘성적 범주’에 대한 분석은 그리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은 점점 복잡해지는 사회 속에서 왜소화되고 또 경제적 이유를 포함한 여러 이유로 다양한 정신적 질병을 짊어지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인간의 감정은 메말라가고 서로에 대한 공감보다는 미움과 시기 속에서 고독이라는 질병의 늪은 점점 더 깊어만 간다. 누스바움은 철학이란 인간의 욕망을 치료하는 수단이라고 본다. 인간의 감정을 조절하고 치료하는 철학은 인간을 불안정한 정신적 혼란의 상태에서 벗어나 안정의 상태로 나아가게 만든다. 우리의 삶을 이끄는 철학은 유용한 것이어야 한다. 지나치게 합리성, 보편성, 절대성을 추구한 나머지 인간의 감정이 가진 상상력을 고갈시키는 철학은 더 이상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지 못한다. 문학, 예술적 상상력에 기반한 인간의 삶이야말로 인간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잘 사는 삶’의 목적이 아니겠는가.(김재홍/ 관동대 교양과 교수)    

09. 11. 10.  

P.S. 개인적으로 누스바움에 대한 관심은 아감벤에 대한 관심과 겹쳐 있다. 그건 <뉴레프트 리뷰>(길, 2009)에 실린 맬컴 볼의 글 '생명정치적인 것의 벡터들' 덕분인데, "인간은 본성상 정치적 동물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정치학>)을 제사로 삼은 글의 서두는 이런 것이었다.   

"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한 문장에서 주목을 끄는 21세기의 두 가지 이론적 담론이 유래한다. 조르조 아감벤이 주권과 신체의 관계에 입각해 도발적으로 재정식화하는 미셸 푸코의 생명정치, 그리고 아마르티아 센과 마사 누스바움이 발전, 정의와 자유를 평가하고 증진하는 수단으로서 전개하는 능력 접근이 그것이다.(...) 둘 다 일정한 의미에서 생명정치적이며, 동일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들- 인간과 동물, 정치와 자연-을 교차시켜 형성되고 있다. 그러나 두 담론은 1960년대 이후 인문과학에서 개시된 분할의 반대편에 있으며, 그것들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시각, 그들의 통찰을 통합하거나 비교할 길은 지금 없는 것처럼 보인다."(410쪽)  

그러니까 똑같이 생명정치에 해당하는 담론을 펼치고 있지만 푸코-아감벤과 센-누스바움이 각기 다른 벡터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 이 '태그매치'를 감상하고 정리하고픈 생각을 작년부터 갖고 있었지만 여러 사정상 실현시키지 못했다(맬컴 볼의 글에 대해서도 몇 가지 지적하고픈 게 있었고). 그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누스바움의 저작들이 소개되고 있지 않다는 것. 아마티아 센과 누스바움이 같이 편집한 <삶의 질>(1993) 같은 책을 도서관에서 대출해보기도 했지만, 읽을 시간을 따로 낼 수 없었다(누가 대신 정리해줘도 좋으련만).   

다행히 그 사이에 아감벤의 책은 세 권 더 출간됐고, 앞으로도 10여 권은 더 나올 예정이다. 그에 상응하여 누스바움의 다수 저작 가운데 <정의의 프론티어>(2007)이나 <인간성에서 숨기>(2006) 등 뭐라도 더 소개되면 좋겠다. 오웰의 <1984년>을 다룬 공저로 <'1984년'에 대하여>(2005)도 <1984년> 붐이 이는 김에 번역되면 좋지 않을까 싶고. 그걸 기다리느니 그냥 원서를 구해 읽는 게 빠를 듯싶지만, '삶의 질' 문제를 생각하여 독자의 바람을 그냥 적어본다...


댓글(4) 먼댓글(1)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민주주의를 위한 인문학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8-07 10:30 
    어제 배송받은 책의 하나는마사 누스바움의 <공부를 넘어 교육으로>(궁리, 2011)이다. 저자가 2008년 방한한 적이 있고, 그때 한 차례 강의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미국 인문학계를 대표할 만한 여성 학자인데(고전학을 전공했지만 현재는 시카고대학의 석좌교수로 철학과 법학, 윤리학까지 강의하고 있다)국내에는그간에 단독 저작이 소개되지 않았다(공저만 두 권 나와 있는 듯싶다). 사실은 더 무게 있는 책의 출간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인문학과 시
 
 
hikrad 2009-11-11 22:53   좋아요 0 | URL
저는 'Love's knowledge'가 빨리 번역됐으면 좋겠네요. 도서관에 주문했던 책을 빌려 놓고 보니 묵직한 분량의 압박이...^^ 로쟈님이 좋아하신다던 알렝 핑켈크로트의 '사랑의 지혜'와 비교해 보면 재미있겠네요^^

로쟈 2009-11-13 01:23   좋아요 0 | URL
네, 번역되면 좋을 타이틀이 꽤 많지요. 로스쿨 교양서로도 요긴할 듯싶은데, 아직 별다른 기미가 없는 듯합니다...

Jun 2009-11-12 01:2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드립니다. 누스바움은 제가 꾸준히 관심을 두고 있는 철학자인데 이상하게도 한국에서는 그녀의 학문적 명성과 국제적인 활동에 비해 관심이 적은 것 같습니다. 최근에 '붐'이 일고 있는 랑시에르나 아감벤과 같은 학자들과 비교해볼 때 그 불균형이 더 뚜렷해지는데요,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인지, 이에 대한 로쟈님의 견해를 여쭤보고 싶습니다

로쟈 2009-11-13 01:27   좋아요 0 | URL
영미 철학자들이 아무래도 덜 '매력적'으로 여겨지는 듯해요. 푸코, 들뢰즈 같은 '화려함'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 같고. 누스바움은 다루는 분야가 넓은 학자여서 얼핏 엄두들을 못내는 듯도 싶습니다...
 

올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헤르타 뮐러의 문학세계를 조명해주고 있는 기사를 대학신문에서 스크랩해놓는다. 필자는 서울대 독문과의 최윤영 교수이다. 올해 출간됐다는 장편소설 정도는 국내에도 바로 소개됨 직하다.   

대학신문(09. 10. 19) 헤르타 뮐러, 침묵과 말하기 사이에서  

헤르타 뮐러(사진)가 2009년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경탄과 놀라움을 불러일으켰다. 루마니아에서 온 조그마한 독일 작가는 한국의 독어독문학계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독일에서도 수상을 예상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 응축된 시적 언어와 뛰어난 작품성은 일찍 인정받았지만 특이한 출신배경과 반복되는 소설의 내용(루마니아 전체주의의 압제에 대한 고발), 그리고 지난 10년간 이미 2명의 독어권 작가(독일의 귄터 그라스 1999년, 오스트리아의 엘프리데 엘리넥 2004년)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상황에서 큰 기대를 모으지 못했기 때문이다. 헤르타 뮐러는 노벨문학상을 탄 12번째 여성작가이며 클라이스트상을 위시한 다수의 주요 문학상을 받은 작가다.   

올해 56세인 헤르타 뮐러는 루마니아의 바나트-슈바벤 지방에서 태어났으며 독일어를 사용하는 소수민족에 속한다. 이러한 출신배경과 가족사는 오랫동안 뮐러 작품의 주요 내용을 특징짓는다. 할아버지는 유복한 농부이자 상인이었는데 루마니아 공산주의 정권하에서 재산을 몰수당했다. 어머니는 열여섯 살 때 소련으로 끌려가 강제노역을 했고 아버지는 전직 나치출신으로 트럭 운전사였다.뮐러는 시골 마을에서의 행복한 유년시절이 아니라 쇠락해가는 작은 마을에서의 폐쇄적이며 억압적이고 두려움에 가득 차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뮐러는 루마니아의 한 대학에서 독문학과 루마니아문학을 전공했고 졸업 후 기계공장에서 통역 일을 했다. 1979년 스파이로 일하라는 루마니아 비밀경찰의 제의를 거부하면서 뮐러의 인생은 궤도에서 벗어난 험난한 길로 바뀌었다. 비밀경찰의 잦은 소환과 가택수색, 그리고 주변세계에서 받은 기생충 같은 인간이라는 모욕 속에서 뮐러는 독일어 개인교습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다. 당시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정권에 대한 반감을 키워가던 작가는 자기 확신을 얻기 위해 첫 작품집 『저지대(Nieder-ungen)』를 루마니아에서 출판했다. 이 작품은 작가 나름의 그때까지의 삶에 대한 정리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제까지의 나의 삶을 철두철미하게 빗어 훑어 내렸다. 작은 마을에서의 유년 시절, 아버지의 나치 경력, 독일 소수민족의 나치 범죄에의 연루, 지금 내가 겪는 독재의 전횡을 말이다.”

1987년 뮐러는 작가인 남편 리하르트 바그너와 함께 베를린으로 이주했고 이후 작가로 유럽 문단에서 주목받게 됐다. 작가에게 독일이라는 공간은 언제든지 소환돼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에서 벗어나게 해줬지만 한편으로는 자기가 태어난 바나트 지방의 독일어와는 완전히 다른 독일어를 사용하고 다른 세계관과 인생체험을 가지는 사람들의 땅으로 여전히 그를 이방인으로, 고향 없는 작가로 만들었다.  



작가의 경력을 볼 때 큰 전환점이 된 것은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정권 치하에서의 자전적 삶의 기록을 많이 담은 장편소설 『마음 속의 동물(Herztier)』의 출간이었다. 이 작품은 대학으로 진학한 여주인공이 일상 삶에서 겪은 정치적 탄압을 묘사했다. 같은 기숙사 방의 친구인 롤라는 자신의 운명인 시골을 벗어나겠다는 일념으로 여러 남자를 만나다 체육선생에게 성폭행을 당한 후 자살한다. 롤라의 기록을 읽은 주인공은 뜻이 맞는 대학생 그레고르, 쿠르트, 에드가와 이 사건을 이야기하게 된다. 이들은 모여 반정부 시를 짓고 자신들이 받는 일상의 정치 억압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결국 비밀경찰에게 이 일이 알려져 거의 모두가 비극적 결말을 맞게 된다.  

이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헤르타 뮐러 글의 전체적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바로 완결되지 않은 단편적 구조, 에피소드식 이야기, 그리고 많은 신조어다. 폐쇄적 전체주의 체제하에서 겪은 정치적 탄압과 두려움, 공포 속에서도 작가는 침묵하지 않고 용기를 내 발언하고 있지만 그의 언어는 노골적인 반정치 문학이나 구호문학이 되기보다는 일상 삶 안에서 냉철하고 조용하고 뚜렷한 이미지 언어로 전달된다. 『마음 속의 동물』은 “우리가 침묵하면 속이 편치 않고 우리가 말을 하면 우리는 조롱거리가 된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데 이는 작가의 위치를 잘 드러내 준다.  



올해 출간돼 많은 찬사를 받은 장편소설 『숨 그네(Atemschaukel)』는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사건, 즉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바로 나치의 후예로서 소련으로 압송된, 7만5천명의 루마니아-독일인들의 운명을 다루고 있다. 독일군에게 피해를 당한 소련을 복구한다는 명목으로 17세부터 45세까지의 루마니아 거주 독일인들이 끌려간 이 사건에 대한 언급은 오랫동안 터부시 돼왔다. 독일인이 가해자가 아니라 소수민족으로서 희생자로 산 삶을 주인공의 내부자 시각에서 그려낸 이 장편소설은 그 치밀한 묘사와 생생한 체험, 집중적인 시적 이미지, 그리고 거리를 두는 문체가 두드러지는데 작가로 하여금 노벨상을 받게 한 역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은 작가의 어머니가 실제로 겪은 사건이며 동시에 일찍 사망한 동료 시인 파스티오르의 고통스러운 회상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소련으로 압송된 수용소에서 사람들은 처음에는 개개인의 인생사를 가지고 있지만 수용소를 지배하는 극심한 굶주림과 억압 하에서 힘에 겨운 강제노역을 하면서 한명 한명 동물이 돼간다. 개인들의 회상 속에서 역사를 녹여내는 뮐러의 작품들은 종종 유사한 경험을 담아낸 솔제니친, 임레 케르테스, 프리모 레비와 비교되기도 한다

작가는 유럽, 독일, 그리고 현대 물질세계의 안락함에 적응하지 못하고, 우리가 잊고 있는, 같은 지구에 사는 사람들의 두려움과 공포에 대한 기억을 초지일관 기술한다. 거추장스러운 수사 없이, 강한 시적 이미지를 전달하는 산문 언어로 쓰인 그의 작품은 몰락해간 동유럽 소수민족의 역사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말대로 “너무 늦은 과거”와 “너무 이른 미래”에 사는, 아직도 다수로 존재하는 ‘벌거벗은’ 사람들의 삶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최윤영_독어독문학과) 

09. 10. 20.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펠릭스 2009-10-22 14:32   좋아요 0 | URL
문학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군요.

로쟈 2009-10-22 22:09   좋아요 0 | URL
네, 소설들이 있어서 다행이예요. 아무래도 시보다는 이해하기가 용이하니까요...
 

교수신문에 실린 해외출판 소식을 옮겨다가 '세계의 책'으로 분류해놓는다. 국내에 <유럽의 발견>(까치글방, 1997)과 <제국의 몰락>(까치글방, 2003) 등이 소개돼 있는 프랑스의 역사학자 엠마뉘엘 토드의 신작 <민주주의 이후>(2008)를 소개하고 있다.   

교수신문(09. 03. 23) [해외 출판 소식] ‘민주주의의 몰락’, 거부할 수 없는 대세?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는 인식은 요즘 누구나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일시적인 보수 정권의 출현이나 경제위기보다 더 근원적인 어떤 변화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프랑스의 역사학자이자 인류학자인 동시에 인구학자이기도 한 엠마뉘엘 토드는 최근 저서인 『민주주의 이후』에서 프랑스와 서구 사회를 감싸고 내입해오는 일련의 위기를 진단하면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민주주의 시스템의 소멸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어떤 시스템이 그것(민주주의)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인가” 

 

토드는 1976년 약관 27세의 나이에 『최종적 몰락 : 소비에트의 몰락에 관한 시론』으로 소련의 몰락을 예견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 책에서 토드는 출산율의 저하를 중심으로 다양한 통계 지표를 통해 소련의 역사적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냉정히 기술하면서, 특유의 실증적 성향을 나타냈다. 이후 토드는 한 공동체(국가, 민족, 지역)의 가족 체제 유형이 그 공동체의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문화적 성격을 결정한다는 테제를 내세우며, 이를 입증하는 연구 결과를 잇달아 내놓게 된다. 



가족 모델을 포함한 중층적 체제 분석
그 성과는 다음과 같은데, 일단 1988년에 출간된 『새로운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각 지방의 정당 투표율이 그 지방의 대표적인 가족 유형이라는 변수에 종속적이라는 점을 밝혔다. 그리고 1990년 출간된 『유럽의 발명』에서는 유럽 각국과 각 지역의 정치, 경제, 종교적 다양성은 4가지의 대표적 가족 체제(부모-자식 관계의 권위/비권위성, 형제간의 관계의 평등/불평등성의 조합에 의한 4가지)라는 결정인자에서 연유한 것이라는 점을 치밀한 조사를 통해 밝혀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권위적이고 불평등한 가족 체제인 독일은 교육, 경제성장 등에서 높은 성과를 보였지만, 파시즘 등이 자라날 토양을 제공했다. 반면 비권위적이고 평등한 가족 체제인 프랑스 파리 분지와 스페인에서는 무정부주의가 창궐하는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토드의 연구는 대단한 지적 충격을 안겨 주었고, 사회 현상을 해석하는 근본적인 연구틀을 제공했다는 평을 받았다. 2000년대 들어서 토드는 그간의 연구를 바탕으로 미 제국주의, 세계 경제, 이민자 사회 등 보다 정세적인 문제에 대해 문제작을 내놓으며 학문적인 입지를 더욱 다지기 시작했다.
최근 출간된 『민주주의 이후』역시 그러한 중층적 연구의 결과물로 볼 수 있다. 이 책에서 토드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오랜 기간의 사회, 정치, 경제적 상황과 가족 구조의 변화를 면밀하게 추적한다. 이를 통해 토드는 종교의 사회적 힘이 ‘공허’에 가까울 정도로 몰락했으며, 교육의 약화로 문화적 비관주의가 지배적이며, 과두제에 가까운 사회 계층화의 재출현, 세계화로 인한 자유교환의 충격, 계급투쟁 격화 가능성 증대 등이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는 곧 우리가 민주주의로 인식해온 서구의 기존 체제가 근본에서부터 흔들리고 있다는 책의 주제로 이어진다.

토드의 진단이 충격적인 이유는 사르코지의 집권과 같은 일시적이고 정세적인 요인이 아니라, 지난 세기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인류학적이고 사회 심층적이며 구조적인 변화를 통해 민주주의의 몰락을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예를 들자면, MB 정권이 출현했다는 사실보다도, 그러한 보수 정권을 출현시키게 만든 대중의 의식과 사회, 문화, 정치, 경제적 구조의 심부에 있는 변화가 더 무서운 것과 마찬가지다. 

독자들 찬사와 논란 이어져
충격적인 테마를 다룬 탓인지, 출간된 지 4개월 정도 밖에 안됐지만, 책에 대한 프랑스 독자들의 반향은 뜨겁다. 프랑스 독자 중의 한 명인 뒤께스느와이 씨는 아마존 프랑스의 독자평을 통해 “현상을 바라보고 이해함에 있어 비관습적인 측면을 제공하는 책”이라고 언급하면서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에 나타난 성찰의 부록으로 기입될만하다”고 평하면서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꼽았다. 또 리챠드 아페이안 씨는 “사건들을 새로운 빛으로 해명해주고, 사물들을 더 잘 이해하게 해주는 이 책을 읽는다면, 더 이상 기성 미디어와 정당의 바보 같은 이야기를 참을 수 없을 것”이라며 “그러한 참을 수 없음은 고통스러울 것이므로, 이 책을 읽지 말 것”을 역설적으로 권했다.

파리에 거주하는 리티티라는 닉네임의 독자는 “특히 가족모델과 정치모델 사이의 관계를 국가 혹은 지역의 범위에서 설명하는 역사적 분석을 높게 평가한다”면서 “가능한 해결책을 심화시킬 다른 저작이 기대된다”고 밝혔다. 또 발마에 거주하는 장 마리 필로씨는 조금 색다른 평을 내놓았다. 그는 “저작에는 비관주의와 낙관주의가 공존하는데, 낙관주의적 시나리오는 유럽 보호주의의 조숙”을 촉진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를 두고 필로씨는 “현재의 지배적인 관점과 배치되는 것이고, 드문 관점”이라고 지적하면서 “향후 경제적, 환경적 생존 가능성을 염두에 둔 건설적인 토론이 심화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 책은 여러 토론 및 서평 사이트에서도 화제가 됐다. 시사 토론 사이트 중 하나인 지평선에서는 수 십 명의 네티즌들이 책의 논제를 두고 설전을 벌였다. ‘과녁의 심장’이라는 닉네임의 네티즌은 종교에 대한 토드의 주장에 반대하면서 “교황 요한 바오르 2세와 엠마뉘엘 수녀는 종교가 여전히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선에 대한 갈망이 지금처럼 강한 적도 없었다”고 논평했다.

이에 대해 말라킨느라는 네티즌은 “이슬람 혐오증의 증가는 종교적 공백의 징후”라면서 “가톨릭의 붕괴는 거대한 지표의 상실을 야기한 바, 이는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적을 스스로 발명하고자 함에 이른다”고 응수했다. 특히 이는 이민자 수나, 이슬람의 종교 행위가 저하된 시점에서 오히려 인종, 종교적 적대주의가 부상하는 현상을 설명한다는 지적이다. 한편 필립이라는 닉네임의 네티즌도 토드의 주장에 수긍하면서 “우리는 사르코지 및 정부 관료의 문화적 결핍을 겪고 있다. 그들에게 휴머니즘은 없다”고 코멘트 하는 등, 정치는 물론이고, 경제적 보호주의 등 토드가 제기한 다양한 테제가 논의됐다.

또 다른 저명 토론 사이트인 ‘아고라-시민의 미디어’에서는 34년 간 고전 문학 교사로 활동했고, 인권 옹호 협회의 회장인 폴 빌라쉬 씨가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졌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엠마뉘엘 토드만이 아니다’라는 제목의 심층 서평을 게재했다. 이 서평에서 빌라쉬 씨는 “이 책은 미래의 최악을 시사한다”면서 “사르코지 대통령은 토드에게 오늘의 프랑스 사회가 겪고 있는 악의 징후로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구체적인 예로 그는 토드의 책으로부터 사르코지와 그를 선출한 사회의 5가지 결점을 읽어낸다. △이데올로기적 공허함에 의한 사고의 뒤죽박죽 △지적인 핍진함 △비시민의 배제로 표현되는 공격성 △돈에 대한 사랑 △정서적이고 가족적인 불안정성 등이 그것이다.

토드의 책이 일으키는 이러한 반향은 독보적인 학문적 성과를 통해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프랑스 지식인의 전형적 모습을 보여준다. 연구에 충실하면 상아탑에 안주하거나, 앙가주망을 지향하면 학문적 공력 쌓기에 소홀한 국내 지식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오주훈 기자) 

09. 03. 23.


댓글(0) 먼댓글(1)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사실 가장 관심가는 책, &lt;민주주의 이후&gt;
    from 자기치유 : I am NOT such a person. 2009-03-28 18:17 
    사실 지난 주 로쟈의 블로그에서 서평과 소개를 읽으며 가장 끌렸던 것은 프랑스 사학자 엠마뉘엘 토드의 를 소개한 글이었다. 개인적으로 관심 가는 주제인 데다가 저자가 지금까지 다양한 주제들을 다룬 새로운 관점의 역사서들을 냈던 엠마뉘엘 토드라는 점, 현재 한국에 적용가능한 시의성을 지닌다는 점, 지적 난이도가 만만치 않을 것 같다는 점 등 여러가지 점에서 호기심이 생겼다. 지금 알라딘에서 검색이 안 되는 것을 보니 아직 출간되지 않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