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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한 잔 마시다가 문득 책장에 있는 책 한권을 꺼내들게 되었다. 독일의 문예학자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1921-1997)의 <미적 현대와 그 이후>(문학동네, 1999)가 그것이다. 독어본이 1989년에 나온 걸로 돼 있으니까 10년 안쪽으로 '발빠르게' 번역소개된 문예이론서이다. 이번에 찾아보니까 영역본도 아직 나오지 않은 책이다.

흔히 수용미학의 창시자로 잘 알려진 야우스는 그의 대표작인 <도전으로서의 문학사>(문학과지성사, 1983)를 통해서 비교적 일찍 국내에 소개된 바 있다. 이후에 몇몇 글들이 더 번역된 걸로 기억되지만 단행본은 그 두 권이 전부인 듯하다. 나는 영역된 그의 책을 2-3권 더 갖고 있다.

  

<미적 현대와 그 이후>는 "수용미학의 창시자이자 독일의 대표적인 문예학자가 쓴 근현대 서유럽의 철학, 예술적 담론에 대한 학문적 탐색"이다. 러시아 모더니즘에 대한 강의를 준비해야 하는 까닭에 그 '미적 현대'를 되짚어볼 필요성이 생겼는데, 야우스의 책은 요긴한 준거점이다. 그 모더니즘/모더니티에 대한 이야기는 내년에 자주 하게 될 듯하고, 다만 이 번역서의 책갈피를 들여다보다가 이 책이 속해 있는 '모더니티 총서' 목록에 눈길을 주게 되었다. <진리와 방법>부터 시작된 총서는 9번째 책으로 한스 블루멘베르크의 책 <세계의 독서가능성>을 '근간'으로 적어놓고 있다. 그게 7년 전 일이고, 책은 아직 출간되지 않았다. 아마도 '엎어진' 기획인 듯싶다.

야우스란 이름과 함께 곧잘 떠올려지는 독일 철학자/문예학자의 이름이 한스 블루멘베르크(1920- )인데, 두 사람은 연배도 비슷하고(비록 야우스가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또 이름도 똑같이 '한스'이다(한스 vs 한스?). 모처럼 블루멘베르크의 주저 한 권을 읽어볼 수 있겠구나, 라고 기대를 걸었던 일이 목록을 보면서 다시 상기되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한국어와는 아직 인연이 없는 것을. 도서관에 있는 영역본으로 당분간은 만족해야겠다(책을 복사해두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블루멘베르크의 책으로 내가 읽어본 건 'Shipwreck with spectator : paradigm of a metaphor for existence'(MIT Press, 1997)이란 얇은 책 한권이다. 흥미는 갖고 있었지만 대개의 그의 책들은 잘 엄두가 나지 않는 방대한 부피를 자랑한다. 영역본 <세계의 독서가능성>과 함께 같은 시리즈(Studies in contemporary German social thought)의 책으로 출간된 <코페르니쿠스적 세계의 발생(The genesis of the Copernican world)>(1989)만 하더라도 본문만 772쪽에 이르는 책이다(블루멘베르크의 책으론 그밖에 'Work on myth'(MIT, 1985) 정도가 더 영역돼 있다). 

독일 현대 문예이론의 봉우리들을 이루는 이러한 저작들이 조만간 번역/소개될 수 있을까? 블루멘베르크의 '독서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여기에 적어두도록 한다...

06.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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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가는 지난주에 종강을 하고 이번주가 대개 시험주간이다. 월요일 강의를 나가던 학교에 마지막으로 나가 시험감독을 하고 돌아오다가 교보에 들러 (두리번거리다가) 두 권의 책을 샀다. 양서부에서 먼저 산 책은 데이비드(데이빗) 호이의 <비판적 저항(Critical Resistance)>(The MIT Press, 2005). 저자는 현재 캘리포니아대학의 철학과 학과장을 맡고 있는 모양인데, 이번에 다시 찾아봤지만 지명도에 비해서 저서가 몇 권 되지 않는 '고마운' 학자이다. 이번에 산 것까지 포함하면 그의 주요 저작은 모두 갖고 있는 것이 된다(그래봐야 네 권이지만).

책의 부제는 '포스트구조주의에서 포스트-비판'까지로 돼 있는 이 책에서 저자는 들뢰즈의 니체주의에서 지젝까지를 '비판적 저항'이란 키워드를 통해 관통하고자 한다. 일단은 책이 다루는 범위가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도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했다(물론 복사할 경우보다는 2배 정도 비싸지만). 게다가 저자인 호이와는 '안면'도 있고. 그래봐야 책을 통한 안면이지만.  

데이비드 호이는 <해석학과 문학비평>(문학과지성사, 1988)으로 국내에 소개된 학자인데, 원제가 <해석학적 순환(The Critical circle)>(1978/1982)인 이 책은 "독일의 비판 철학자 하버마스와 미국의 비평가 허쉬의 해석 이론들을 가다머의 이론과의 차이로 분석한 후, 롤랑 바르트, 폴 리쾨르,자크 데리다 및 미국의 신비평과 프랑스의 구조주의, 독일의 수용미학을 해석철학과 대조한다."

그러니까 이 책 한권을 제대로 혹은 음미하며 읽으려고 해도 신비평과 구조주의와 수용미학과 해석학을 모두 건드리게 된다. 내가 그러한 비평이론과 철학적 조류들에 견문을 갖게 된 것은 다 이런 '문학이론서'를 읽으면서, 혹은 읽기 위해서였다(가장 대표적으론 테리 이글턴의 <문학이론입문>을 들 수 있는데, 나는 학부시절부터 문학이론세미나 '교사'를 하면서 이글턴의 책을 포함해 국내에 출간돼 있는 모든 문학이론입문서들을 최소한 두 번, 많게는 네댓 번씩 읽었다). 호이의 책은 '해석학'을 카바하는 기본 연장이었다. 그의 나머지 책 두 권?

하나는 저작이 아니라 그가 편집한 책 <푸코: 비판적 독해>(1986)인데, 분량은 두껍지 않지만 쟁쟁한 논자들의 푸코론을 편집한 책이고 호이는 그 서문과 함께 '푸코와 프랑크푸르트학파'를 다룬 논문을 썼다. 푸코가 한창 유행하던 시절에 대학가 서점들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책이다. 나도 그때 구입했었고.

   

그리고 다른 한권은 하버마스 전문가인 토마스 맥카시와 공저한 <비판이론>(1994). 이미지의 사이즈가 들쭉날쭉이군. 여하튼 리처드 로티의 서평을 잠시 인용하면 이렇다: “The two authors disagree strongly about important philosophical issues, but each takes the other's position and arguments seriously. The book as a whole helps greatly in clarifying what is at stake in discussions of universalism versus historicism. The level of debate is as high as might have been expected from two of America's best expositors and interpreters of recent European philosophy. . . . The so-called Habermas-Foucault debate has been at the centerof philosophical discussion in Europe for a decade, and this book is an admirable overview, and continuation, of that exchange. It is a hopeful sign of long-overdue internationalization that a debate between an important French and an important German philosopher should be continued in English with no diminution in either sophistication or acuity.”(Richard Rorty - Ethics)

호이와 맥카시 두 사람이 각각 푸코와 하버마스 라인을 대표했다(도서관에서 복사한 책인데, 이건 또 어디에 처박혀 있나). 생각난 김에 적어놓자면 <자유를 향한 참을 수 없는 열망>(새물결, 1999)이 푸코와 하버마스 논쟁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여하튼 이렇게 네 권이 호이의 주저이다. 단독저서로 치면 <해석학적 순환> 이후에 <비판적 저항>으로 건너뛰는 것이니 이 얼마나 고마운 경우인가. 이 책에 대한 맥카시의 추천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포스트-니체주의 프랑스 철학에서 저항의 이론들에 대한 호이의 통찰력있고 다면적인 설명은 독보적이다." 북치고 장구치고...

 

호이의 책을 사들고 인문 신간 코너를 둘러보다가 발견한 책은 <스피박의 대담>(갈무리, 2006). 제목 그대로 가야트리 스피박의 대담집이다. 책의 원제는 '포스트-식민주의 비평가(The Post-colonial Critic)>(1990)이고 엊그제도 다른 책들을 찾다가 책장에서 본 바로 그 책의 번역본이었다(나는 몇년 전에 책을 복사했었다). 난해하다는 평판이 자자한 스피박 입문서로서는 제격인 책. 

 

그렇다면, 여기서 퀴즈. 왜 이 페이퍼의 제목은 '데이비드 호이와 가야트리 스피박'인가? 호이의 책엔 스피박이 전혀 언급되지 않으며, 스피박 또한 호이를 다룰 일이 없는데 말이다. 둘 사이의 연결고리는 무엇일까?.. 이 연결고리는 저자들과는 무관하다. 바로 역자가 그 고리이기 때문이다. <스피박의 대담>은 호이의 <해석학과 문학비평>을 우리말로 옮긴 이경순 교수의 번역이다. 해서, 링크 이론을 적용하자면 호이와 스피박은 2촌관계쯤 되겠다.   

 

 

 

 

어쩌다 보니 스피박의 책들은 나올 때마다 언급하게 되는데, <포스트식민 이성 비판>을 제외하곤 나와 있는 책들은 모두 원서와 함께 책장에 꽂아두고 있다. 그런 '인연'에는 물론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의 영역자에 대한 신뢰가 한몫한다(이 무명의 영문학도가 붙인 장문의 서문은 학계의 '전설'이 되었다). <스피박의 대담>은 이전에 나온 스피박 입문서 <스피박 넘기>의 저자 스티브 모튼이 "스피박을 처음 읽는 이에게 가장 좋은 책"이라고 추천한 책이다. 사실 그런 입문서적 '기질'은 대부분의 대담들이 공유하고 있는 자질이기도 하다. 하니 스피박에 처음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이 책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찾아보니, 스피박의 최신간은 <어느 학문의 죽음(Dearh of a disciple)>(2003)인데, 주디스 버틀러가 쓴 아래의 서평을 보니 그 '어느 학문'이란 '비교문학'을 뜻한다. 르네 웰렉 강의를 책으로 펴낸 얇은 책이다.

"Gayatri Chakravorty Spivak's Death of a Discipline does not tell us that Comparative Literature is at an end. On the contrary, it charts a demanding and urgent future for the field, laying out the importance of the encounter with area studies and offering a radically ethical framework for the approach to subaltern writing. Spivak deftly opposes the 'migrant intellectual'approach to the study of alterity. In its place, she insists upon a practice of cultural translation that resists the appropriation by dominant power and engages in the specificity of writing within subaltern sites in the idiomatic and vexed relation to the effacements of cultural erasure and cultural appropriation. She asks those who dwell within the dominant episteme to imagine how we are imagined by those for whom literacy remains the primary demand. And she maps a new way of reading not only the future of literary studies but its past as well. This text is disorienting and reconstellating, dynamic, lucid, and brilliant in its scope and vision. Rarely has 'death'offered such inspiration." -- Judith Butler, UC Berkeley

 

 

 

 

방티겜과 바이스슈타인의 비교문학 개론서들이 소개된 지 20여 년쯤 된 것 같은데, 그 마지막 자리에 놓일 만한 책이겠다. 한 학문의 죽음(위기)과 새로운 출발점. 끝으로 자신의 이론적 출발점에 대한 스피박의 자전적 고백을 (재)인용해놓는다.

"제가 하는 일이란 저의 학문상의 상태를 분명히 하는 데 있습니다. 저의 입장은 일반적으로 말해 반동적인 것입니다.저는 맑스주의자들에게는 너무나 기호적으로 비치고, 페미니스트들에게는 너무나 남성적으로 비치고, 토착 이론가들에게는 지나치게서구이론에 물들어 있는 것으로 비칩니다. 저는 이것이 불편하면서도 기쁩니다."(16쪽)

06.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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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렌티우스 2007-04-23 23:14   좋아요 0 | URL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푸코-하버마스 논쟁을 다루고 있는 정일준씨 편역의 책 제명은 <자유를 향한 참을 수 없는 열정 : 푸코-하버마스 논쟁 재론>입니다... <- 전망>이 아니고요... 오타이네요... ^^

그리고 책은 3부로 나뉘어져서

1부는 푸코의 논문 혹은 대담 네 편으로 <니체, 프로이트, 맑스>(1964/1967), <비판이론과 지성사>(1983), <정치와 윤리>(1983) 그리고 <도덕의 회귀>(1984),

2부는 역시 푸코의 칸트 혹은 계몽주의 논문 3부작
<비판이란 무엇인가?>(1978)
<혁명이란 무엇인가?>(1983/1984)
<계몽이란 무엇인가?>(1984) 및
드레퓌스/래비노우의 <성숙이란 무엇인가?>(1986),

마지막 3부가 바로 푸코-하버마스 논쟁으로서
하버마스의 <현대의 심장을 겨냥하여>(1986),
낸시 프레이져의 <푸코는 소장 보수주의자인가?>(1986),
디디에 에리봉의 <자유를 향한 참을 수 없는 열망>(1994),
드미니크 쟈니코의 <합리성, 힘, 권력>(1992),
프랑수아 에발드의 <외부가 없는 권력>(영역1992)로 구성되어 있는데...

논문의 선정은 매우 좋다. 특히 <비판이란 무엇인가?>는 푸코의 선집인 Dits et Ecrits에 수록되지 않은 희귀 논문으로서 영역으로부터의 중역이나마 내용의 대강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참고로 <혁명이란 무엇인가?>와 <계몽이란 무엇인가?>는 불어본 이름이 Qu'est-ce que les Lumières로서 같은데(내용은 다르다), 논문의 내용에 따라 전자를 <혁명이란 무엇인가?>로 번역했다.

다만 지적한 것처럼 영역으로부터의 중역인 것이 흠이나, 책이 발행된 것이 1999년임을 고려하면 당시의 사정으로서는 최신 논쟁의 소개 및 정리라는 차원에서 이해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번역 자체는 그리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어도 나쁜 번역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주 뛰어난 번역이라 하기도 역시 어려운데 ... 최악은 아니지만 최상도 아닌 중간에서 위 아래로 논문에 따라 많이 편차가 지는 번역이다...

다만 결정적으로 아쉬운 것은 이 논쟁의 핵심 개념인 modernité, actualité, contemporaineité 등이 구분없이 맥락에 따라 근대성, 현대성 등으로 일관성 없이 번역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특히 칸트 계몽주의를 다루는 3부작 논문에서 그러한데, 이는 논문의 핵심 논점을 - 우리말로는 - 파악할 수 없게 만든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오류이다.

이 세 단어를 예를 들면, 근대성(혹은 모더니티), 시사 문제(혹은 당대의 현실문제 전체를 이르는 광의의 시사성, 당대성), 현대성(혹은 동시대성) 등으로 - 여하튼 한 저작, 논문 내에서 - 일관적으로 번역하지 않는다면, '근대성'의 개념을 옹호하는 사상가로서의 푸코를 결코 이해할 수가 없다(따라서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푸코에게 포스트-모더니티는 일종의 '사이비 문제'로 간주된다).

이상의 지적된 점들만을 제외한다면 논문의 선정 및 시의성은 매우 적절한, 유익한 추천할 만한 책이다.

로쟈 2006-12-12 12:58   좋아요 0 | URL
오타는 수정했습니다. 거기에 발빠른 서평까지 보태주셨네요.^^ <비판이란 무엇인가>는 불어에서 직역된 글이 이상길 교수의 번역으로 <세계의 문학>에 게재된 적이 있습니다...

테렌티우스 2006-12-12 22:01   좋아요 0 | URL
서평까지는 전혀 아니고요, 다만 글을 읽으시는 분들을 위한 정보 차원에서 간략하게 적어본 것입니다. 읽으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저나 로쟈님에게도 기분 좋은 일이지요...^^
 

작년 이맘때 기사 하나를 옮겨온다. 북데일리의 '세계의 책' 코너에서 가져온 것인데, 희귀하게도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지오 아감벤의 책을 소개하고 있다. 그의 주저 중 하나의 <호모 사케르>의 국역본이 근간예정인 상태에서 해를 넘기는 것 같아 유감스럽지만 대신에 영역본들이라도 뒤적거려봐야겠다(*아감벤의 <남겨진 시간>이 최근 출간됐다. -08. 11. 14).  

북데일리(05. 12. 05) 선악의 이분법 뛰어넘은 '사도 바울로'

기독교 성인 사도 바울로(서기 10~67년)는 다마스쿠스로 여행하다가 예수의 출현을 보고 사흘간 실명 상태를 겪은 끝에 소명을 받고 제자가 됐다. 기독교 역사상 최고의 전도자이자 신학자였던 바울로는 기독교인들에게 편지로 자신의 종교적 사상을 전해 그 가운데 14통이 신약성서에 포함돼 있다.

이중 바울로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그리스도를 박해했던 이방인이 그리스도와 만남을 통해 이방인의 사도로 떠오른 바울로 사상의 진수를 가장 분명하고도 명쾌하게 담고 있다. '신앙과 의화(義化)'와의 관계를 소개하는 이 편지는 '성경 속의 다이아몬드'라고 불리듯 다른 편지에서는 볼 수 없는 그리스도교 구원론의 진수가 들어 있다.

이탈리아의 철학자-미학자 이자 베네치아건축대학 교수인 조르지오 아감벤(63. Giorgio Agamben)은 바울로의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 앞부분에 나오는 10개 단어를 텍스트로 하여 매우 획기적인 시각으로 서양사상의 사유적 이분법을 철저히 분석해 냈다. 그의 저서 <남은 시간 :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스탠포드대출판부. 2005)는 그 결실이다. 영어 원제는 'Time That Remains: A Commentary on the Letter to the Romans'.

아감벤은 그동안 죽은 자와 산 자, 동물과 인간, 육체와 정신, 자연과 문화 등 서구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이원적 대립의 사유구조 속에서 중간지대를 설정, 그 '무언가'의 상태가 현대사회를 지배한다는 점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그 '무언가'와의 관계 속에서 아감벤은 '경계'와 '나머지'라는 말을 적시하는 조건은 이원적 대립 관계에 수용되지 않고 계속 '남는 것'이라는 데 주목한다. 그 전형이 로마시대 '성스러운 인간'이란 이름 아래 '인간 외 인간'으로 차별화된 '호모 사켈'이며 혹은 아우슈비츠에서 '회교도'로 불리며 유대인을 돌보고 그들의 최후를 목격한 사람, 죄수도 간수도 아닌 '나머지의 사람'이다.

책은 이런 발상의 사유를 하게 된 저자 특유의 메시아에 대한 이해를 바울로의 편지 속에서 그 흔적을 찾아낸다. '메시아'란 히브리어로 세계 종말에 영원한 평화를 가져다주는 구세주를 나타내며 그리스어 역시 예수 그리스도는 '구세주 예수'를 의미한다. 하지만 유태교에서는 아직도 도래하지 않는 메시아를 '지금' 항상 기다리는 반면 기독교에서는 '이미' 도래한 메시아(예수)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차이가 있다.

아감벤은 '지금'과 '이미'의 중간에 놓인 시간에 초점을 맞춘다. 과거 사건이 결코 '지금' 완료된 것이 아니라 본래 부정적일 미래를 구속하는 응축된 형태로서 점차 다가오는 특이한 '지금의 때'를 밝혀낸다. 이것이 '나머지 시간'이다. 그때 구원에 대한 갈구를 통해 '자유인' 바울로가 기독교의 사도가 된 시점이 바로 '나머지 시간'이다. 이런 사상적 관념은 기독교인 바울로에게 인종, 종교, 성별이라는 차이는 의미가 없고 현대인에게 '약함' 관심을 둘 때야 비로소 힘을 발휘하는 존재로서 '바울로'를 나타내게 된 것이다.(노수진 기자)

06. 11. 30.

P.S. 아감벤의 책과 같이 읽어볼 만한 책으로는 스탠포드대학의 'Cultural Memory in the Present' 시리즈로 나란히 나온 알랭 바디우의 <성 바울: 보편주의의 정초>(영역본 2003)와 테어도어 제닝스의 <데리다 읽기/ 바울 생각하기>(2005) 등이 있다. 진작에 구해놓은 책들이지만 읽을 여가/기회를 아직 못만들고 있는 책들이다. 아직은 '나머지 시간'을 살 나이가 아닌 탓인가?..

 

 

 

 

바울에 대한 나의 관심은 '신학'과는 무관하며 지젝에 의해서 촉발된 것이다. <믿음에 대하여>나 <혁명이 다가온다> 등에서 바울에 대한 언급을 읽을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따로 다루기로 한다. 참고로 지젝이 추천하는 바울 관련서는 독일 철학자 야곱 타우베스(Jacob Taubes; 1923-1987)의 <바울의 정치신학>(1993)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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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bi 2006-11-30 16:37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서재는 늘 좋은 글,정보들이 넘쳐나는군요..^^ 요즘 게을러진 책읽기에 탄력을 주고자 아감벤의 '바울' 불어본,영어본을 함께 보고 있습니다.올 겨울 공부계획이죠. 90년대 후반 바디우의 '바울'의 출간되었을 때 상당히 흥분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종영씨가 이행총서로 계획했다가 포기한(버린?) 신학적 사고(Christian Jambet의 '알라무트에서의 위대한 부할'도 저작권만 사놓고 포기됨)가 저에겐 아직도 매력적입니다. 사실 바디우나 아감벤의 '바울'은 ' 네그리의 '욥기'보다는 더 매력적입니다.... 꼬르벵(H.Corbin)의 책들('이슬람철학사'..)와 함께 농사꾼에겐 이 겨울이 공부의 계절이 될듯합니다..

"종말의 도래가 아직 분명하지 않지만, 곧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다. 이것이 바울의 시간 이해였고, 그는 최초의 그리스도교 저자이다.(124쪽)" 알랜 시걸, <예수 2000년>,대한기독교서회

로쟈 2006-11-30 16:39   좋아요 0 | URL
제 경우 바울에 대한 관심은 지젝에 의해 촉발된 것인데, 바디우, 아감벤 등이 모두 바울론을 쓰고 있어서 이게 거으 '트렌드' 수준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관련서 몇 권에 관한 정보들을 모아두려고 합니다...

아포지 2006-11-30 18:01   좋아요 0 | URL
관려서 정보들을 모으신다니.. 참고로.... Theodore W. Jennings, Jr. 의 "Reading Derrida/Thinking Paul" 라는 책도 있더군요. 데리다에 관한 책이니 벌써 아시는지도 모르겠네요...

2006-11-30 18: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1-30 20:13   좋아요 0 | URL
apouge님/ 예, 갖고 있는 책입니다.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님/ 별 말씀을요, 오히려 제가 진득하게 매달려 있지 못하는 성격/처지인지라...

Nabi 2006-11-30 20:56   좋아요 0 | URL
지젝이 The Parallax view에서 네그리와 아감벤의 차이를 지적하면서 아감벤의 생각이 더 묵시적(265쪽)이라고 지적한부분에 공감이 갑니다. 제가 알고 있는 바울과 관련한 묵시적 사고에 대한 참고 자료들은... 데리다 <최근 철학에서 제기된 묵시론적 목소리에 관하여>, 지젝,바디우와 활발히 교류하는 신학저널JPS(http://www.philosophyandscripture.org)실린 바울과 관련된 글들. Ward Blanton의 Apocalyptic Materiality: Return(s) of Early Christian Motifs in Slavoj Zizek(http://www.jcrt.org/archives/06.1/index.html).. 리요타르의 책 The Hyphen : Between Judaism and Christianity (Philosophy and Literary Theory)도 볼 필요가 있을 듯 합니다.(얇은 책이 왜그리 비싼지 아직도 구입을 미루고...)

로쟈 2006-11-30 21:14   좋아요 0 | URL
Nabi님/ 거의 전문적인 서지인데요.^^ 저는 그 정도까지는 관심을 갖고 있는 건 아닙니다만 리오타르의 책 같은 건 도서관에서 주문해봐야겠습니다...
 

자크 라캉의 셋째딸이라는 '시빌 라캉'의 회고록이 출간됐다. <한 아버지: 수수께끼>(Un pere: puzzle)가 그것이다. 책은 최근에 나온 것이 아니라 지난 1994년 갈리마르출파사에서 나왔다(이후에 스페인어와 독어로도 번역됐다). 하지만 이 책에 관한 리뷰는 최근에 읽었다. 다음카페 '비평고원'에 김남시님이 올려놓은 리뷰 '부재하는 아버지에 대한 욕망 : Sibylle Lacan <한 아버지>'(06. 11. 19)를 옮겨놓는다(필자가 참조한 책은 독역본이다). 김남시님은 <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그린비, 2005)를 우리말로 옮긴 바 있으며 현재는 독일 유학중이다. 리뷰에서 '쟈크 라깡'이란 표기는 '자크 라캉'으로 통일했으며 원어는 우리말로 음역하고 일부 문단을 조정했다. 그리고 각주는 포함시키지 않았다.   

“내가 태어났을 때 이미 아버지는 없었다.” 시빌 라캉(Sibylle Lacan)의 회고록 <한 아버지 : 퍼즐>은 이 첫 문장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이건 이 책 전체를 관통해 흐르고 있는 ‘부재하는 아버지’를 자신의 아버지로 만들기 위한 그녀의 안쓰러운 투쟁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그녀가 태어날 때부터 부재했던, 바로 그 부재로 인해 그녀 생애 전체를 규정했던 그녀의 아버지 이름은, 쟈크 라깡이다.

시빌 라캉은 쟈크 라깡이 첫 번째 부인 마리-루이즈 블롱댕(Marie-Louise Blondin)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다. 쟈크 라깡은 그녀와의 사이에서 세 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이후 교통사고로 죽게 되는 첫째 딸 카롤린(Caroline)과 둘째 아들 티보(Thibaut)에 이어 1940년, 이 회고록을 쓰게 되는 세 번째 딸 시빌을 낳는다. 그녀가 태어난 지 1년 후 라깡은 블롱댕과 이혼한다. 그녀의 말처럼, 아버지를 의식하게 될 나이의 그녀에겐 이미 자신의 아버지는 부재했던 것이다. 

시빌은 위의 문장으로 시작되는 자신의 회고록 앞에, 특이하게도 ‘일러두기(Hinweise)’ 라는 제목을 단 ‘서문’을 붙였다. 거기서 그녀는 ‘이 책은 소설도, 소설 형식을 띤 자서전도 아니다. 이 책엔 어떤 픽션도 없다. 독자들은 여기서 이야기를 극적으로 만들거나 책 부피를 늘리기 위한 어떤 꾸며진 이야기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 기억 속에 있는 모든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들을, 내 아버지와 나 사이에 일어났던 모든 것들을 기록하려 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자크 라캉이라는 인간자체에 대한 것도, 정신 분석학자로서의 쟈크 라깡에 대한 것도 아니다. 이건 나의 아버지 쟈크 라깡에 대한 이야기다“라고 썼다.

실지로 그녀가 이 책에서 전해주고 있는 자크 라캉의 모습은 온전히 그의 ’버려진‘ 딸, 시빌의 관점으로 채색되어 있다. 그녀의 회고록은 자크 라캉에게 버림받은 후 광고 삽화가와 부띠끄 점원을 전전하며 어렵게 세 아이를 양육해야 했던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자신의 생부이지만 법적인 타자였던 라캉에 대한 그녀의 양가적 감정, 나아가 그가 두번째 부인 실비아 바티이유(Sylvia Bataille; 조르주 바타이유의 아내였다) 사이에서 낳은 딸 주디스 바타이유(Judith Bataille) - 그녀는 이후 라깡의 제자였던 자크-알렝 밀레르(Jacque Alain Miller)와 결혼해 주디스 밀레르(Judith Miller)라는 이름을 갖는다 - 에 대한 그녀의 깊은 열등감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저 유명한 정신분석 이론가는, 이미 세 명의 아이를 낳은 부인에게 또 아이를 낳기를 요구하다 그를 거부한 부인과 이혼하는 이기주의자이자, 전 부인과 자식들이 사는 거리 바로 맞은편 호텔에서 버젓이, 그것도 약속시간을 어기면서까지 여자와 동침하는 파렴치한으로, 나아가 이혼한 부인과 자식들에게 오랫동안 궁핍한 생활비만 제공했던 인색한으로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버지 자크 라캉에 대한 관계를, 그의 ‘아버지 역할’에 대한 요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 그려지는, 혹은 읽어낼 수 있는, 아버지의 부재를 극복 혹은 부정하려는 그녀의 집요하고도 애처로운 의식적, 무의식적 노력은 이 책을 읽는 독자를 인간적 연민과 스노비즘적 경멸 사이를 오가게 한다. 부재하는, 유명한 아버지 자크 라캉에 대한 그녀의 권리 주장은 그녀의 깊은 피해의식과 열등감과 결합되어 있는데, 이는 라캉이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주디스 바타이유에게로 집중되어 있었다. 이혼한 아버지의 성을 버리고 어머니 성을 따르자는 제안을 거부할 정도로, 아버지 라캉에 집착하고 있던 그녀에게, “Who‘s who” (유명인 인명사전)에 실린 'Jacque Lacan'의 소개 글은 충격적이었다. 거기엔 정신분석학자 라캉에겐 한 명의 딸, 'Judith Bataille'만 있는 것으로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아래 사진이 '주디스 라캉' 혹은 '주디스 밀레르').

자신에겐 태어날 때부터 부재했던 바로 그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현존하는 아버지로 인정받고 있는 배다른 동갑내기, 라캉이 자신의 진료실에 커다란 그녀 사진을 붙여놓을 정도로 자랑스러워 했던 유디트(*주디스?)의 첫 만남이 그녀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겼는지는 충분히 예상할 만 한 일이다. “유디트와의 첫 만남은 내겐 치명적이었다. 그녀는 너무도 사랑스럽고 완벽했고, 나는 너무도 조야하고 서툴렀다. 그녀는 완벽히 사교적이고 재치 있었고 나는 거칠고 직접적이었다. 그녀가 성숙한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데 반해 나는 어린애 같았다...나는 완전히 내팽겨지고 버림받은 기분이었다. 게다가 내가 언어만 공부했던데 반해 그녀는 철학을 공부하기까지 했다. 아, 얼마나 자주 그녀가 소르본 앞에서 마치 모르는 사람인 양 내 앞을 스쳐지나 갔던가.”

그런데, ‘자신에겐 부재했던 아버지를 가지고 있는’ 유디트에 대한 그녀의 피해의식과 열등감은 자기 언니이자, 라캉이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낳은 첫째 딸 카롤린에게도 향하고 있었다. 자신보다 네 살이 많았던, 그리하여 라캉을 4년이나 더 ‘아버지’로 가지고 있었던 카롤린에 대해 그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그녀는 모든 능력과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성숙하고 모든 여성스러움을 갖추고, 길고 탄탄한, 그리고 우리 가족 중에선 보기 드문 금발머리였으며 르노아르 그림의 주인공처럼 화사했다. (그에 반해 나는 우리 반에서 가장 작았고 버릇없는 소년 같았다.) 그녀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름답다는 소리를 들었고 (나는 그냥 귀엽기만 했다), 특별히 재능이 많고 지적이었다. (그녀는 학생시절 내내 1등이었고, Concours General 상을 받고, 우수한 대학 성적을 거두었다. 난 성적이 좋긴 했지만 그를 위해 무척 애써야 했다.) 한마디로 말해, 그녀는 육화된 여신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우리 (나와 오빠)와는 다른 세계에서 살았다.”

그녀에 의하면 이 카롤린이 교통사고로 사망했을 때, 라캉은 그녀에게 두 번째로 - 첫 번째는 메를르 퐁티가 죽었을때 -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내 아버지 (라깡)는 어머니의 손을 잡았고, 그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확실히 카롤린은 아버지와 어머니 이 둘의 유일한 자식이었던 것이다.”

아버지를 가지고 있었던 다른 딸들의 아름답고, 지적이며 성공적인 여성성을 아버지가 부재했던 자신의 볼품없고 초라한 삶과 대비시킴으로써 불러일으켜지는 꺼림칙한 연민의 감정은, 자크 라캉의 자식이기를, 태어날 때부터 부재하던 그를 자신의 아버지로 전취하려는 시빌의 파라노이드적(*편집증적) 집요함 앞에선 엽기적 섬뜩함으로까지 발전한다. 라캉이 죽은 후 그의 묘지를 방문한 그녀는, 함께 방문했던 남자 친구를 묘지 입구에서 기다리게 한다. “나는 아무 목격자도 없이, 내 아버지와 단둘이 있고 싶었다. (내 남자 친구의 모욕받고 기분상한 반응에 대해선 침묵하기로 하자.) 그건 사적이고도 내밀한 만남이었으니까.” 그녀는 아버지의 차가운 묘석에 손을 얹고는 마음 속으로부터 이야기한다. “내 아빠,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은 내 아버지에요. 그걸 아시겠지요.”

한편 또 한 명의 라깡의 딸, 철학자 주디스 밀레르 역시 아버지 라캉과 관련된 책을 출판했다. 1991년 Le Seuil 출판사에서 나온 <라캉 앨범. 내 아버지의 얼굴>이 그것이다.

06. 11. 19.


 

 

 

 

P.S. 알다시피 자크 라캉의 생애와 관련하여 가장 자세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책은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의 <자크 라캉>(새물결, 2000)이다. 그리고 슈나이더맨의 <자크 라캉, 지적 영웅의 죽음>(인간사랑, 1997)도 참고할 만한 책이다. '생초보'라면 다리언 리더의 <라캉>(김영사, 2000)부터 읽는 것이 좋겠다.

흥미롭지만, '아버지'와 관련하여 읽어야 할 최적의 문헌은 '아버지의 이름(the Names-of-the-Father)'을 주제로 한 라캉의 세미나이다. 자크-알렝 밀레르가 편집한 이 세미나가 작년에 쇠이유출판사에서 출간됐으며, 곧 영어와 러시아어로 번역됐다. 영어본은 저널 'Lacanian Ink'(27호)에 들어 있는데, 그 일부 발췌내용은 아래와 같다.

The figure of the father is not a concept born in psychoanalysis, but rather a figure inherited by psychoanalysis. If the plural is an allusion to the end of this cursed tradition, it is because it is introduced in a logic of the Name-of-the-Father in which the latter appears as a function that can be sustained by diverse statements, which, from then on, play the role of said name.

Thus the Name-of-the-Father, as one of these elements, should not be the ultimate instance nor the ultimate response. It remains to be given a status and distinguished as element and as function. But, what function? If we refer to what Lacan denominated the paternal metaphor, it is the function of metaphorizing the desire of the mother, of barring it. In this sense, the Name-of-the-Father is, par excellence, an operator of metaphorization, to such an extent that, as element, it already is in itself the metaphor of the father, of the presence of the father. Let us write it this way:

The Name-of-the-Father can not only operate in the absence of the father (this is why Lacan criticizes the theories that relegate psychosis to the lack of the father), but it can also make him absent. If it is a matter of the father spoken through the mother, as a theme of the discourse, it is well to stress that it is an empty reference there, that he is made absent by the verb. And for that reason, without myth, one can affirm that it is a matter of the dead father as the subject of the signifier, which is writt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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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11-20 06:47   좋아요 0 | URL
마지막 “내 아빠,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은 내 아버지에요. 그걸 아시겠지요.”가 의미심장하네요.

로쟈 2006-11-20 08:19   좋아요 0 | URL
모든 딸들의 코멘트 아닐까요?..

비로그인 2006-11-20 11:12   좋아요 0 | URL
라캉.. 저는 어렵습니다.
유디트의 사진, 전형적 프랑스 엘리트계층 여인의 풍모입니다.
시빌이 열등감을 느낄법도 합니다.


2006-11-20 2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1-20 22:59   좋아요 0 | URL
**님/ 블로그를 갖고 있지 않구요, 가보니까 (출처를 밝히지 않고) 무단으로 옮겨놓았더군요. 네티켓이 없는 분입니다...

2006-11-20 2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깽돌이 2006-11-21 02:12   좋아요 0 | URL
자녀는 하나여야 안전한가?! ^^

로쟈 2006-11-21 08:38   좋아요 0 | URL
상팔자는 무자식이죠...

테렌티우스 2006-12-01 10:32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팬입니다...^^

중간 이름의 우리말 표기는 쥐디트 라캉, 쥐디트 밀레르가 맞습니다. 국어 연구원의 외래어 표기법을 보시면 됩니다...

http://korean.go.kr/06_new/rule/rule05.jsp


로쟈 2006-12-01 10:54   좋아요 0 | URL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국어연구원의 표기를 다 따르지는 않지만, 이 경우는 그게 맞는 거 같네요...
 

'세계문학을 안 읽어도 되는 이유'에 이어지는 페이퍼이다. 물론 그때의 세계문학은 문학이라면 하품이 먼저 나오는 회사원들이 '세계문학'이란 주제가 등장했을 때 '대처'하기 위한 방책으로서의 '세계문학'이다. 인문학 전공의 대학원생들이라면 사정은 전혀 달라지는데, 여기서부터는 웃음을 거두어들여야 한다.

 

 

 

 

<근대의 서사시>와 <세상의 이치>의 저자 프랑코 모레티가 책임편집을 맡은 <소설(Tne Novel)>(2006) 정도를 '교양'으로 읽어줘야 하기 때문이다(두 권의 단행본 외에도 모레티의 소설론들은 여러 차례 국내 문학잡지들에 게재된 적이 있다). 본래의 이탈리아어본은 네 권짜리인데, 영어본은 그걸 간추린 것인지, 추가적으로 더 출간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국역본이 나온다면 아마도 모레티의 책들을 낸 바 있는 새물결출판사에서 나올 듯하다. 하지만, 언제?  

몇달 전 도서관에 주문했던 책을 나는 어제 대출할 수 있었는데, 두 권 합하여 1,700여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소설론 집성'이라 할 만하다(소설 대백과사전!).  'The New York Sun'지에 실렸던 서평 'Taking a Novel Approach'(06. 07. 26)을 읽어보면  책의 대략적인 윤곽을 그려볼 수 있다.

 

The sheer size of "The Novel" (Princeton University Press, $99.50 per volume), a new two-volume compendium of scholarly essays on every aspect of the history and nature of the genre, makes a sort of claim. Clearly, a literary form that requires some 1,700 pages of examination must be inherently problematic: Its origins, its techniques, its effects on readers must cry out for expert investigation. Yet the claim posed by "The Novel" (and still more by its original Italian version, Il romanzo, which is twice as long), seems counter-intuitive, given how central novels and fiction are to our current understanding of literature. In any bookstore, the sum total of all printed matter is divided into two categories, fiction and everything else. The novel, you might say, is like pornography: It may be hard to define, but everyone knows it when they see it.

Yet it is exactly the cultural phenomena that are most obvious, that surround us as invisibly as an atmosphere, that most need questioning.Take a seemingly simple question that arises again and again in "The Novel": What was the first novel? Among English readers, there are a few standard answers: Samuel Richardson's "Pamela," the epistolary novel that appeared in 1740, or Daniel Defoe's "Robinson Crusoe," which was advertised as a true story when it was published in 1719. Widen the focus to Western Europe, however, and Defoe looks like a latecomer compared to the French women novelists of the 17th century, notably Madame de Lafayette (author of the courtly novel "La Princesse de Cleves") and Madame de Scudery. And even before the courtiers of the Sun King devoured those amorous tales, there was "Don Quixote," published in 1605 and often baptized as the first novel, though it reads very unlike the novels we know today.

Yet "Don Quixote" itself vanishes in an abyss of precursors. What about the prose romances of the Renaissance, or the novelle of Boccaccio and the tales of Chaucer, popular in the 14th century? Or the chivalric verse romances of the Middle Ages, which grew to encompass dozens of episodes? Or the Greek novels of the Hellenistic period, like Heliodorus's "Aethopika," with their tales of lovers reunited after fabulous ordeals? For that matter, isn't the "Odyssey" itself essentially novelistic, with its focus on domestic relationships and psychological predicaments?

When you open "The Novel," in other words, you may think you know what a novel is; by the time you close it (not to say finish it, since few nonprofessionals will read it from beginning to end), you are no longer sure. And if there is one goal that all the diverse contributors to "The Novel" share, it is this sort of estrangement. Under the editorship of Franco Moretti, an Italian who teaches at Stanford and is one of the most unorthodox and influential scholars of the novel today, dozens of academics from around the world have contributed studies in their areas of expertise.

Their essays are grouped under broad rubrics. The first volume, subtitled "History, Geography and Culture," has sections such as "Polygenesis," on the multiple origins of the novel, and "Toward World Literature," on the way the genre has been adapted in Africa and Asia. The second volume, devoted to "Forms and Themes," is more literary-critical (at times drearily so),organized around themes like "Writing Prose" and "Space and Story." The result is not an encyclopedia but a potpourri — a loosely structured work that does not define the novel so much as it illustrates the way today's scholars think about it.

The sheer diversity of topics here is exciting and opens up many new horizons. Henry Y.H. Zhao, writing on "Historiography and Fiction in Chinese Culture," shows how the term xiaoshuo, defined in the first century A.D. as mere "gossip and hearsay," the lowest form of writing, emerged as the modern Chinese term for literary fiction. Catherine Gallagher, in one of the collection's best essays, discusses "The Rise of Fictionality," showing how the 18th-century European novel helped to create the notion of stories that can freely explore reality because they do not claim to be real: "a nonreferentiality,"as she puts it, "which could be seen as a greater referentiality." Another excellent contribution is Bruce Robbins's "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Social Climber," which explores the paradoxical, subtly hypocritical figure of the bohemian — the artist who turns his material deprivation into a badge of spiritual aristocracy.

Beyond these fairly conventional historical essays, "The Novel" also makes room for some more eccentric approaches.The French scholar Nathalie Ferrand writes about SATOR, the Society for the Analysis of Novelistic Topoi, which has worked over the last two decades to compile a computer database of every plot element used in 18th-century French fiction.This goal remains as elusive as Casaubon's "Key to All Mythologies"in "Middlemarch"— even Ms. Ferrand calls it "a rather mad idea" — but it stimulates some interesting debates about how to analyze fiction. Likewise, Espen Aarseth's essay on "Narrative Literature in the Turing Universe"explores the netherworld of Dungeons and Dragons and online role-playing games, reaching the sane conclusion that gamelike simulations have little in common with novelistic narrative.

But the most enticing parts of "The Novel" are the sections of "readings," focused on individual novels grouped around a theme: novels of the metropolis, political novels, novels of the Americas.When it comes to these brief sketches, the less familiar the subject, the better. An American reader will probably yawn at yet another summary of "Huckleberry Finn." But other readings will send him straight to the library, eager to find Recaizade Mahmut Ekrem's "A Carriage Affair," a Turkish novel of 1896, about a young man's incompetent pursuit of a courtesan; or Mao Dun's "Midnight," published in China in 1932, with its lurid portrait of pre-Communist Shanghai; or "Love in Excess," the 1719 novel of sex and sentiment by Eliza Haywood, who was once as famous as Defoe or Richardson. Such essays are a reminder that the canon of Western fiction, though large enough for a lifetime's reading, is still just one galaxy in the universe of the novel.

A universe, by definition, can't be summarized, and neither can "The Novel." Contributors are given their freedom, not just to range widely, but to disagree fervently on basic issues.Take that vexed question of the novel's origins. Different contributors trace its parentage to ancient Greek tales, Chinese historiography, Indian epic, and even rabbinical midrash. But the preponderance of the evidence suggests that the conventional wisdom is correct. It is impossible to understand why the novel has been the quintessential modern art form, and why it has appealed to writers and readers around the globe, without understanding the circumst ances of its rise in Western Europe in the 18th century.

The most important factor in that rise was that the novel began life as a defiantly low, critically stigmatized genre. It was the first literary form to be written and read largely by women; to seek a popular, democratic audience; and to consider realism a virtue instead of a low vice. In all these ways, it helped to incarnate the modern sensibility, and to teach its readers what it means to be modern. It is the novel, as opposed to earlier forms of narrative, that made the ordinary mind's encounter with the ordinary world a source of drama and significance. If the novel is indeed losing its central position in our imaginative life — and while "The Novel" seldom addresses this possibility, its very comprehensiveness can suggest an autopsy report — it can only be because modernity itself is slipping away, with all its distinctive promise and menace. The dispensation that replaces modernity may be better or worse, but if it does not see its own reflection in the novel, it cannot help appearing to us as somehow less human.

 

모레티가 직접 쓴 책들 가운데는 <유럽소설의 지도 1800-1900>(1999) 같은 책도 있는데(책의 일부는 국내에 번역/소개된 바 있다), 그가 얼마나 대범하며 독창적인 소설이론가인지를 웅변해주는 책이다. 그러한 그의 방법론을 집약해서 정리해주는 책이 <그래프, 지도, 수형도>(2005)이다. 모두 <소설>과 함께 소개될 만한 책들이다(물론 모레티의 초기작들도 곁들인다면 더 좋을 것이다). 사실 소설은 근대세계가 산출해낸 것이지만, 우리가 그 소설의 바깥에서 근대세계를 얼마나 직시/이해할 수 있을는지는 의문이다. 그것이 근대소설의 위대성이며 우리가 여전히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06. 11. 16.

P.S. 모레티의 <소설>에는 문학평론가 황종연 교수의 <무정>론이 한국소설에 관해서는 (꼼꼼하게 찾아보지는 않았으나) 유일한 글로 포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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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17 08: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1-17 08:34   좋아요 0 | URL
**님/ 모레티의 '문학의 도살장'이란 글이 매력적이었죠. 형식주의+진화론. 제가 그런 쪽의 생각들을 좋아하기도 하고. 듣고 보니까, 모레티와 강유원은 (50번 읽거나) '안 읽어도 된다'주의로 묶일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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