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다시 나온 책 중의 하나는 '다윈의 대답' 시리즈이다. 전체 8권 가운데, 4권은 새로운 타이틀이니 '다시' 나왔다는 말은 절반만 옳긴 하다. 원래는 피터 싱어의 <다윈주의 좌파>가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은 있는가>(이음, 2007)란 제목으로 시리즈의 첫 권이었지만, 이번에는 최재천 교수의 <호모 심비우스: 이기적 인간은 살아남을 수 있는가?>(이음, 2011)에 자리를 내주었다. 새로 나온 타이틀들에 관심이 가기에 소개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겨레(11. 12. 10) 다윈 가라사대 ‘불평등이 현대인 죽음 앞당긴다’

 

자연 하면 약육강식, 적자생존을 떠올린다. 텔레비전에서 사자가 영양을 사냥하는 장면을 너무나 많이 봐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프리카 초원에 가본 이들은 그런 장면을 볼 수 없어 실망하기 마련이다. 사자들은 대부분 시간을 낮잠이나 빈둥거림으로 보내기 때문이다.

약육강식, 적자생존 하면 다윈이다. 이 등식은 다윈의 이론을 전파하기 위해 그의 ‘성전’을 끼고 세상으로 뛰쳐나간 ‘전도사’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다윈은 그런 용어를 즐겨 쓰지 않았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생태학자들, 특히 남성 생태학자들은 95%가 자연계의 치열한 경쟁을 연구 주제로 삼았다. 오늘날 추세는 무척 달라졌다. 자연계에서 경쟁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무조건 남을 제거하는 것만이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8권으로 된 ‘다윈의 대답’ 시리즈는 인간의 본성, 직장 내의 남녀 차이, 건강 불평등 문제 등 우리 사회의 현안에 대해 21세기 다윈주의자들이 보내온 답이다. “다윈이 살아 있다면 이렇게 말하고 행동했을 것이다”라는 가정에서다. 내용은 차분하고 설득적이다. 런던정경대 세미나를 바탕으로 만든 7권에 한국 최재천 교수의 책을 보탰다.

세미나 좌장 격인 피터 싱어는 우선 다윈한테 덧씌워진 우파의 허울을 벗긴다. 그는 우파들이 다윈의 학설에서 무한경쟁 논리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끌어내었고 좌파는 그러한 측면을 의도적으로 무시했다고 말한다. 그는 다윈주의에는 좌우가 없으며 중요한 것은 생물학적 인간 본성을 바탕으로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대안은 ‘다윈주의 좌파’다. 억압받는 자의 편에 서되 인간의 이기적인 속성을 무시하지 않는 것. 나아가 인간 본성의 또다른 측면인 협동적이고 이타적인 본성에 대해 통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사회·정치적 목표를 수립해야 한다고 싱어는 역설한다.

 


영국의 생물학자 콜린 터지는 농경이 위대한 문명을 낳은 기초가 되었다는 발전론적 역사관에 토를 단다. ‘농경 확대→인구 증가’가 맞물리면서 터져 나온 여러 문제를 다윈이 목격한다면 농경이 “고된 노동과 환경파괴의 시작”이라고 규정했을 거라고 본다. 그는 수렵·채취인이 농경을 하면서 환경을 바꾸고 통제하게 되면서 인간은 파괴적인 포식자가 될 수 있었고 홍적세의 대량살육과 네안데르탈인의 멸종을 낳았다고 주장한다. “기하급수적 인구증가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의심해봐야 하며 사자처럼 게을렀던 우리의 수렵인 선조들한테서 배워야 할지도 모른다.”

사회역학 분야 선구자인 리처드 윌킨슨은 지금 현실에 눈을 돌린다. “기대수명이 가장 긴 나라는 가장 평등한 나라이지 가장 부유한 나라는 아니다.” 불평등과 소득격차가 크면 스트레스와 불안감, 자존감 상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죽음을 앞당긴다는 것이다. 그는 또 불평등을 줄이면 경제성장이 느려진다는 견해는 거짓이라고 말한다. 그의 말을 빌라면, 정부는 건강과 사회적 자본을 증진시키고 통합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 불평등 감소를 핵심 목표로 삼아야 한다.

최재천 교수는 ‘호모 사피엔스’는 결코 그 어원처럼 영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자연을 잘 이용해 만물의 영장 자리에 오르기는 했지만 무차별적인 세계화, 국가간 빈부격차, 환경 오염 등으로 위기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그는 인류는 이제 ‘호모 심비우스’ 즉 ‘더불어 사는 인간’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한다. 자연한테서 공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자연계가 수차례 멸절 위기를 겪었음에도 다양성을 회복한 것은 ‘니치’, 곧 자기만의 독특한 공간을 갖고 공존해왔기 때문이라 말한다. 지구의 생물 중량 중 으뜸인 것은 식물, 개체수에서 가장 성공한 것은 곤충인데, 이는 움직일 수 없는 식물을 대신해 곤충이 꽃가루를 날라주고 그 대가로 꿀을 얻으며 공생해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보기에 따라 다소 불편한 내용도 있다. 마틴 데일리와 마고 윌슨은 <신데렐라>, <콩쥐팥쥐> 등 전세계에 분포하는 아동학대 설화가 단순한 ‘괴담’이 아니라고 말한다. 의붓부모와 함께 사는 아이들이 학대받거나 죽임을 당할 확률이 친부모와 사는 경우보다 백배 이상 높은 통계를 들고 이는 자신의 유전자를 더 많이 확산시키기 위한 무의식적 행동의 결과라고 해석한다. 지은이들은 현실이 그러함에도 사회적 통합을 구실로 진실이 숨겨지고 있다면서 이혼과 재혼율이 높아지는 상황을 고려해 이제는 문제를 직시해 해결책을 터놓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한다.(임종업 선임기자)

 

11. 12. 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회변혁 요구를 담은 책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느낌인데, 이번주 관심도서 두 권도 그런 흐름을 보여준다. 사회학자 예란 테르보른의 <다른 세계를 요구한다>(홍시, 2011)와 우리에겐 <긍정의 배신>(부키, 2011)으로 소개된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오! 당신들의 나라>(부키, 2011)가 그 두 권의 책이다. 우리는 '당신들의 나라' 말고 '다른 세계를 요구한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한국일보(11. 12. 10) 불안한 현실, 보고만 있을 것인가… 행동하라

 

중동의 여러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재스민 혁명은 현재 진행형이다. 1%의 가진 자를 위해 99%가 희생하는 현실에 분노하는 미국 시민들의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운동이나 국내에서 주권 침해 여부로 논란이 가중되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운동 등 변화의 물결이 거세다.

이 같은 일련의 움직임은 1990년대 이후 전 세계적 흐름이 된 '세계화(Globalization)'의 상호의존성과 맥이 닿아있다. 세계화는 시장만능주의와 뒤엉키면서 계층간 불평등을 확산시켰지만 동시에 전 세계적인 이슈를 공유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지구의 수명을 단축하는 탄소배출에 대한 국가적 합의가 이뤄지고 인권 사각지대에 놓인 계층에 대해 귀를 기울이게 된 것도 같은 선상에 있다.

 



스웨덴 출신인 저명한 사회학자 예란 테르보른은 이 책에서 향후 10년간 세계의 공통 과제를 인식하고 변화를 준비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에 따르면 변화는 서구중심주의와 미국 패권주의 시각을 경계하고 세계의 다양성과 불평등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앞으로 자본주의가 시험대에 오르며, 이슬람 국가와 서구 국가간 대립이 첨예화할 것으로 내다봤다. 중국을 중심으로 떠오르는 아시아와 모습에 대한 예측도 구체적이다.

철학자 니체는 '미래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과거를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다'라고 했다. 저자 또한 미래를 알기 위해 고대문명 속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해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일어난 세계화의 양상을 치밀하게 분석한다. 교육 노동 결혼 등 인간의 전 생애과정을 역사적ㆍ사회적 관점에서 읽어내는 깊이도 보여준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테르보른은 조언한다. "한국의 문제는 한국인 스스로 해결해야 합니다. 수많은 한국인들의 고단한 생애과정은 하나의 중대한 과제로 대두됩니다. 이 과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주시기 바랍니다." 이 세계에 대한 장기적 전망의 부재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어느 때보다 커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현실을 그저 관망하는 객체가 아닌 참여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변화의 시작은 우리 손에 달렸다.(이인선기자)

 

 

 

경향신문(11. 12. 10) 이미 2년 전 1%의 꼼수를 분석 ‘월가 점령’ 주장

 

저서 <긍정의 배신>에서 자본주의와 긍정주의의 은밀한 공생을 까발린 그가 이번엔 ‘1%의 배신’을 정조준했다. 반박과 조롱, 풍자를 실탄으로 장전했다. 1%를 위한, 1%에 의한, 1%의 세상을 그렸다. 구조조정하면서 게을러서 실업자가 된다고 말하는 그들, 회사 주가가 떨어져도 거액을 챙기는 그들, 불법체류자를 실업률 증가의 원인이라면서 집에선 불법체류자를 부려먹는 그들, 가난한 아이들의 무상진료는 막으면서 애완견에게 항암치료를 해주는 그들, 상냥하게 대출을 권할 땐 언제고 눈 깜짝 안 하고 집을 빼앗아가는 그들…. 현실을 못 보게 만드는 그들의 ‘꼼수’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긍정주의가 세계 금융위기를 자초했음에도 반성은커녕 되레 몸집을 키우고 있음을 지적한 <긍정의 배신>과 맥이 닿아 있다.

 

 

 

미국의 현실로만 받아들이기엔 공감 가는 얘기가 많다. 아웃소싱과 대량해고의 쓰나미를 맞은 중산층은 날로 오르는 의료비, 연료비, 대학등록금을 대기 위해 버둥댄다. 빚을 갚기 위해 집을 담보로 다시 고금리 대출을 받는다. 임금은 떨어지고 의료보험료가 치솟자 보험을 포기하고 진통제에 의존하는 사람이 늘었다. 부자도 층이 갈렸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상류층은 고급 매장에서 쇼핑하는 그저 그런 부자들과, 다른 이를 시켜 쇼핑하는 초부유층으로 나뉘었다는 것. 부의 정점에 선 그들은 “로마제국 이래 유례가 없는 사치”를 누리고 있다.

 



이 책은 가진 자들이 정치·경제·사회정책을 이용해 어떻게 중산층과 빈민층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지를 날카롭게 분석한다. 작가 특유의 풍자와 해학은 이 책에서도 단연 돋보인다. 복잡한 경제 메커니즘이 술술 풀린다. 소설과 같은 표현은 읽는 속도감을 더한다. ‘스파이’를 보내 직원들을 스토킹하고 심문하는 월마트의 행태를 “냉전 스릴러”에 비유하며 “지극히 폭력적인 형태의 독재”라고 쏘아붙인다.

대학들의 학자금 대출 장사를 언급하는 대목은 웃음, 통쾌, 분노를 유발한다. “여러분의 진정한 목표는 무의미한 청춘의 자유를 뿌리치고 빚의 부담을 떠안는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마십시오. 바로 이런 목적을 위해 우리는 방금 등록금을 인상했습니다. 우리 대학이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다면 여러분은 초일류 채무자가 되어…. 여러분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이 책이 미국에서 출간된 건 2009년이다. 저자는 채무자들의 피와 눈물로 배를 불리는 그들에 대항해 “우리 모두 월스트리트로 행진해 가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물었다. 2년 후 그의 바람은 현실이 됐다.

정부는 경제정책에서 불평등이라는 심각한 문제를 외면해서는 안된다고 저자는 충고한다. 그래야 추락한 사람들이 무덤으로 직행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란다. 또 ‘복지’라는 단어가 너무 급진적으로 생각된다면 ‘생존권’으로 부를 것을 권한다.

강탈과 착취, 탐욕으로 얼룩진 1%의 얘기로 구린내가 나지만 99%의 심정을 시원하게 대변해주고 있다. ‘모르는 게 약’이라고 하는 1%에 맞서 ‘아는 게 힘’이라고 외치는 듯하다. 저자는 위장취업해 저임금 노동현실을 체험하는 등 “빈곤의 골짜기” 실상을 고발해온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사회운동가다.(고영득 기자)

 

11. 12. 10.

 

 

 

P.S. <다른 세계를 요구한다>의 저자 예란 테르보른은 오래전에 <권력의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의 권력>(백의, 1994)이란 얇은 책으로 처음 소개됐었다. '괴란 테르본'이란 이름으로. 스웨덴식으로 불러준 게 '예란 테르보른'인 듯싶다. 현재는 케임브리지대학의 사회학 교수로 돼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주의 학술서'라 할 만한 책 두 권은 진태원 교수가 엮은 <알튀세르 효과>(그린비, 2011)와 프리드리히 키틀러의 <광학적 미디어: 1999년 베를린 강의>(현실문화, 2011)다. 키틀러는 독일의 저명한 미디어 학자라 얼핏 접점이 없어 보이지만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매체(미디어)론으로도 읽을 수 있다면, 무관하지도 않다. 관련기사를 묶어서 옮겨놓는다.

 

 

 

경향신문(11. 12. 10) “어떤 지배계급도 매체 독점하려는 순간, 저항 끌어들이게 돼”

 

어느덧 흘러간 이름이 돼 버린,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1918~1990)를 왜 되새기는가. 이 물음에 최근 900쪽 가까운 분량의 <알튀세르 효과>(그린비)를 엮어낸 진태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45·사진)는 지난 7일 연구실에서 일화 한 토막을 꺼냈다.

 

 

“삼성 이건희 회장의 재판이 진행되는 때였어요. 지하철에서 어떤 노인이 ‘우리 회장님이 얼마나 나라를 위하셨는데 감히 구속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어요. 서민들이 왜 이 회장을 걱정하는지, 흔히 ‘계급을 배반한다’고 불리는 메커니즘의 작동에 대해 알튀세르가 하나의 대답을 줍니다.”

 

이렇듯 알튀세르 사상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효력이 있다”는 것이 2년6개월간 출간 작업을 해 온 진 교수의 믿음이다. “세계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자본주의의 대안을 모색하고 있는데, 결국 마르크스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실패를 되풀이할 수는 없죠. 알튀세르는 처음부터 마르크스에 대한 비판적 복귀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책은 김정한·서관모 등 국내학자 10명과 알튀세르의 주요 제자인 피에르 마슈레 프랑스 릴 3대학 명예교수 등 해외 연구자 9명의 논문으로 구성돼 있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가 말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왜 현실사회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독재’로 변질됐는지, 자본주의 국민국가 내부에서 왜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 지배구조가 날로 강고화되는지를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설명한다. 이때 이데올로기는 관념이나 사상, 허위의식을 지칭하지 않는다. 물질이며, 장치다. 예를 들면 종교적 믿음도 ‘무릎 꿇고 기도하라, 그러면 믿을 것이다’라는 파스칼의 말이 상징하듯 매주 교회에 가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실천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장치가 가족과 학교 같은 것들이다.

 

 

이 이데올로기는 지배구조에 반항하지 않는 유순한 사람들을 만들어낸다. 즉 ‘종속적 주체의 재생산’이다. 진 교수는 “우리 사회에서는 이 문제가 내셔널리즘의 형태로도 나타난다”고 말한다. 한 민족 한 핏줄이라는 민족의식, 국가의 같은 정당한 구성원이라는 국민의식이 이건희 회장과 서민들을 계급으로 나누기보다 동일한 구성원으로 인식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나아가 ‘모든 개인은 독립적 주체이며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라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더욱 구조를 강고화한다. 진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종합하면 결국 이주노동자는 우리 국민이 아니고, 비정규직은 게을러서 그런 것이니 이들을 자본가에 맞서는 연대의 대상이라기보다 ‘적대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죠.” 그러나 알튀세르는 개개인을 ‘독립적 주체’로 보는 것을 거부했다. 진 교수는 “자본가와 노동자가 일대일의 사적인 계약 관계로 여겨지면서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불평등한 관계가 은폐되는 것을 알튀세르는 ‘법 이데올로기’라며 비판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알튀세르의 문제의식은 에티엔 발리바르, 알랭 바디우, 슬라보예 지젝 등 오늘날 가장 뜨겁게 인용되는 현대 철학자들에게 계승되고 있다. 진 교수가 “현대 사상의 흐름을 알기 위해서라도 알튀세르를 재조명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를 관철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수단을 ‘매체’라고 말했다. 보수 매체들은 종합편성채널로 확장되고 대안매체인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규제의 대상에 오르고 있는 시점에서 알튀세르의 말은 하나의 함의를 던진다. “알튀세르는 매체가 항상 양면적이라고 말했습니다. 지배의 도구가 되지만 저항과 변혁의 거점으로 작용한다는 것이죠. 어떤 지배계급이나 집단도 매체를 독점하거나 자기 뜻대로 전유하긴 어렵습니다. 만드는 순간 저항의 여지를 끌어들인다는 것이죠.” (황경상기자)

 

 

 

경향신문(11. 12. 10) “미디어는 수신·송신·저장의 데이터 장치일 뿐”

 

독일 미디어 학자 프리드리히 키틀러(1943~2011)는 ‘유럽의 마셜 매클루언’ ‘디지털 시대의 데리다’로 불린다. 그의 미디어 이론이 갖는 무게와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는 별칭이다. 책은 키틀러가 1999년 독일 훔볼트대학에서 진행한 14편의 강연을 묶었다. 한국에선 처음 완역돼 나왔다. 키틀러의 미디어 이론에 앞서 들여다볼 것은 ‘미학’(aesthetics) 관점이다. 그는 미학을 그 어원인 감각으로 이해했다. ‘아름다움 자체가 아니라 인간 지각 기관의 물질성’을 연구하는 것으로 봤다. “미학적 특성은 언제나 기술적 실현 가능성에 의존하는 변수”라는 말도 했다. 기술 환원론적 관점을 가진 키틀러에게 미디어는 ‘데이터 처리 장치’일 뿐이다. 다음은 키틀러의 미디어 정의(定義)를 잘 나타내는 말들이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 철학을 글로 옮겼을 때 ‘철학 활동에 일반적으로 쓰일 수 있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라는 논의가 나왔다. 그때 정답은 “인간이 혼을 가지고 철학을 한다”였다. 키틀러는 “나 같은 미디어 역사가라면 ‘모음도 표기할 수 있는 최신식 이오니아 알파벳을 정답이라고 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TV는 예술인가 아닌가? 키틀러는 독일의 학술기자이자 영화제작자인 클라우스 짐머링의 “TV는 국제무선통신자문위원회 보고서 407-1에 의거하여 국제적으로 표준화된 시각의 한 방식”이라는 말을 인용한다.

 

 

 

책은 르네상스 시기 투시도법 패널화에서 사진, 영화, TV를 지나 컴퓨터 그래픽으로 이어지는 미디어 역사를 다룬다. 키틀러는 인간의 손이 지배한 ‘예술적 미디어 시대’, 시간적 과정을 저장·조작할 수 있게 된 ‘아날로그 미디어 시대’, 궁극의 호환 가능성이 실현된 ‘디지털 미디어 시대’로 구분한다. 미디어 역사 서술에서 그가 강조하는 것은 “이미지 저장, 전송, 처리의 일반 원리”다. 연대순으로 기술과 예술의 상관관계, 정치와 종교 간 맥락을 따져든다.

‘예술적 미디어 시대’에 이미지는 그려진 뒤 교회나 미술관에 놓였다. 글은 일상 언어의 저장 매체인 동시에 대단히 느린 전송 매체다. ‘카메라 옵스큐라(암상자·Camera obscura)’는 이미지 기록(수신), 장치인 ‘매직 랜턴’(환등기·Laterna magica)은 이미지 재생(송신) 장치다. 카메라는 이미지를 저장했다. 키틀러는 이 삼원적 도식에 따라 근대의 미디어사를 개괄한다.

키틀러는 ‘미디어 철학자’라고도 불렸다. ‘미디어 철학’의 특징은 근대 이후 주체로 부상한 ‘인간’을 걷어내는 것이다. 그는 “(아날로그 미디어 시대에) 인간은 더 이상 기록을 지배하고 인식 가능한 우주를 통치하는 군주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인간 고유 활동이라 여겼던 그리기, 글쓰기, 보기, 듣기, 언어처리, 기억, 인식까지 기계의 몫이 되고, 어떨 때는 기계가 인간보다 더 뛰어나다고 봤다. 인간이나 혼에 관해 알 수 있는 건 그 척도인 기술적 장치뿐이라고 했다.

미디어 철학의 또 다른 특징은 ‘전쟁’이다. 키틀러는 강의에서 미디어의 군사적 맥락을 자주 말한다. 미디어 기술의 시대는 기술적 전쟁의 시기다. ‘전기적 빛’의 발견은 전쟁과 영화를 바꿨다. 키틀러는 “일본군이 야간 공격을 감행하는 순간, 스포트라이트는 전장을 치명적인 영화 스튜디오로 변형시켰다”는 정치철학자 폴 비빌리오의 말을 인용한다.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감 장면 촬영은 1차 세계대전 때 정찰 목적의 군사 작전에서 비롯됐다. 전쟁이 끝나고 많은 전투기 조종사들이 영화계에 들어갔다. 키틀러가 ‘전자 기술로 무장한 능동적 눈’이라고 규정한 레이더 분야에서 발견된 사각형 임펄스(충격전류·Impulse)는 근대식 전화망, 컴퓨터 회로, TV 표준의 근간이 됐다. 키틀러는 “미국이 2차 세계대전을 통해 TV 기술의 선진국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폭탄이 스스로 적을 추적해서 폭파시키는 ‘자가유도식 무기 체계’의 탄생을 두고, “모든 근대 철학의 주체인 인간은 그냥 잉여가 되었다”고 했다. 키틀러는 의도적으로 TV표준에 미달하는 간섭 이미지의 미학을 표방한 백남준의 예도 든다. 백남준은 독일 작가 칼 오토 괴츠의 영향을 받았는데, 괴츠는 독일 국방군에서 레이더 스크린의 간섭 이미지를 탐구했다. “백남준의 미디어아트는 또 하나의 ‘군수품 오용’ 사례”라는 것이다.

 



한국에서 파편적으로 소개됐던 키틀러의 미디어 이론을 전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책이다. 구술을 정리한 강의록이라 난해하진 않지만, ‘디지털 시대의 데리다’를 좇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김종목 기자)

 

11. 12. 09.


댓글(3)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1-12-10 08: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10 09: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13 2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번주 관심도서(라고는 하지만 책은 내주에 나오는 듯싶다)의 하나는 사회학자 송호근 교수의 <인민의 탄생>(민음사, 2011)이다. 얼핏 연결이 안 되는 제목이지만 '공론장의 구조변동'이란 부제를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만하임의 지식사회학을 전공한 저자가 하버마스의 문제의식을 한국 근대사에 적용해본 듯싶다. 인터뷰기사를 옮겨놓는다. 전인권의 <1898, 문명의 전환>(이학사, 2011)과 같이 읽어볼 수 있겠다 싶다...

   

한겨레(11. 12. 03) 읽고 쓰는 평민의 공론중세 조선을 해체하다

조선이라는 봉건적 중세 사회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근대로 이르게 됐는지에 대한 연구는 우리 학계 최대의 화두이자 숙제라 할 수 있다. 외래적 요인 덕분에 근대화가 가능했다는 입장에서부터 조선 사회에도 내재적인 발전요인이 있었다는 입장까지, 역사학·사회학·정치학 등 여러 학문 분야에서 다양하게 펼쳐진 논쟁과 논박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여기에 중도보수 성향의 학자로 평가받는 송호근(사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도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가 최근 펴낸 <인민의 탄생-공론장의 구조 변동>은 하버마스의 ‘공론장’ 개념을 중심으로 삼아 한국 근대의 기원과 변천을 탐구하는 연구의 첫 성과물이다. 책은 조선 후기에서 개화기까지 ‘통치의 객체’였던 인민이 어떤 과정을 거쳐 먼 미래에 ‘시민’이 될 ‘근대적 인민’으로 진화했는지를 살핀다. 공론장이란 사회구성원들이 합리적 토론을 통해 보편적 이익을 도출해내는 마당을 말한다. 시민이 나타난 개화기 공론장의 문제는 다음 책 <시민의 탄생>에서 다룰 계획이라 한다.

송 교수는 <한겨레>와의 전화 통화에서 “어떤 처방을 내려도 먹히지 않을 정도로 균열된 우리 사회의 공론장 현실을 보면서, 왜 이렇게 되었는지 그 역사적 과정을 들여다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교과서에 ‘자유민주주의’를 싣기 위한 시도에서부터 경쟁적으로 내놓는 복지담론, 성장과 분배에 대한 논쟁 등 오늘날 합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공론장이 균열된 현실은 지난 20세기 들어 80년 동안 진행된 어떤 역사적 과정의 결과물이라는 것. 따라서 그 과정을 보기 위해 개화기 공론장으로, 또 조선 후기로 거슬러 올라갔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서 근대의 기원을 찾으려는 그동안의 작업들에 대해 송 교수는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가 있지만, 소재주의와 목적론의 범주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사회경제적 모순만 다루거나 정치제도만 다루는 등 소재에 치중해 분절적으로 연구했거나, 거시적인 담론을 엮어내기 위해 오늘의 관점으로 과거를 채색하는 오류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를 총체적으로 보려 했다는 지은이는 “중세적 제도에 배태된 ‘국문담론’이라는 중추신경”, 곧 언문의 확산이 사회변화에 끼친 영향에 주목했다.

기본적으로 그는 조선을 ‘지식과 권력이 한 몸인 사회’로서, 지식·종교·정치가 강고하게 삼위일체를 이룬 체제로 규정한다. 강한 신분제에 바탕을 둔 향촌 지배와 종교적 의례, 지배 이념의 도덕과 윤리를 재생산하는 교육으로 이뤄진 이런 삼중구조는 형이상학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성리학으로 뒷받침됐다는 것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 인민은 ‘적자’(赤子, 어린아이)로서 ‘통치의 객체’로 강하게 속박됐다고 한다.

송 교수는 “조선 후기 천주교의 유입과 확산, 민란과 농민 전쟁, 서민 문예의 출현과 확대가 인민을 질적으로 변화시켰으며, 여기서 ‘문해인민’, 곧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인민이 출현하면서 유교국가 조선을 해체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지적했다. 훈민정음은 애초 성리학적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이를 쓰는 인민들은 점차 지배 계급과 다른 새로운 인식의 틀을 갖추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게 지은이의 견해다.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에 비춰볼 때, ‘문해인민’은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교환하고 설득할 수 있고, 타인의 낯선 생각을 접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성찰의 기회를 갖게 된 존재라고 한다.

송 교수는 조선 후기의 중대한 변인이었던 ‘인민의 탄생’이 동학에 이르러 전에 없는 ‘평민 공론장’으로 분출했다고 말한다. 이렇게 형성된 인민은 개화기를 맞아 지식인층이 주도했던 여러 형태의 변혁 시도에 분화되고 동원됐지만, ‘시민’으로 정착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는 “적자로서의 인민이 역사와 접속하는 순간 중세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시간대가 열렸다”며 “그게 반드시 근대라고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이전의 중세적 질서와 다르고 우리가 근대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근대라고 할 만하다”고 말했다.

송 교수는 우리 시대 공론장의 균열을 극복할 방안으로 ‘교양시민의 형성’을 제시했다. “사적 욕구를 제어하고 공공선에 책임을 지는” 교양시민은 원래 개화기 공론장에서 정착되었어야 할 존재지만, 그렇게 되지 못한 채 각종 이념과 담론들이 펼쳐져 오늘날까지 이어져왔다는 문제의식이다. 그는 “정치민주화를 이룬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제도의 투명화, 분배, 복지 등 사회민주화를 이루는 것”이라며 “이를 위해선 자기 욕망을 제어하고 다른 계층을 배려하며 공공이익에 관심 갖는 교양시민의 출현이 절실하다”고 말했다.(최원형 기자) 

11. 12. 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요즘 세종대왕을 다룬 드라마가 뜨는 모양이어서 덩달아 <조선왕조실록>이나 <세종실록> 같은 책이 잘 나간다고 한다. 아예 통째로 '한국정치사상사'라고 하면 어떨까. 같은 타이틀의 책이 없는 건 아니지만 신복룡 교수의 <한국정치사상사>(지식산업사, 2011)는 가장 방대한 스케일을 자랑한다. 정치사상이란 '그 시대를 살던 사상가들이 국가 구성원들의 행복과 슬픔을 고민하면서 산출한 복음주의'에 대한 해석을 담아야 한다는 게 저자의 기본 입장이라고. 오랜만에 보는 묵직한 저작이다...   

한국일보(11. 11. 26) "세종의 한글 창제, 백성 다스리기 위한 정치적 산물"

"역사학과 정치학은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세종이 그렇지요. 그를 백성을 사랑한 군주로만 보는 것은 인문학적 순진함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분단사연구> 등 정치외교사 연구에서 기념할 만한 저작들을 내온 신복룡(69) 건국대 석좌교수가 단군신화가 만들어진 고대부터 박정희 정권까지 한국 정치사상의 역사를 아우른 <한국정치사상사>(지식산업사 발행ㆍ전2권)를 냈다. 책 하권 32장에 실린 '동학사상'을 쓴 게 1983년이니 햇수로 따져 거의 30년을 공들인 역작이다.

신 교수는 책에서 한국의 정치사상을 고대, 중세, 근세 전ㆍ후기, 근대, 현대로 나누고 그 시대의 핵심 사상을 41개 장에 걸쳐 소개했다. 정치사상과 종교의식을 떼내어 설명할 수 없는 고대에서는 원시공동체의 민회, 제천의식과 부락제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고려에서는 불교를 빼놓을 수 없다. 조선은 주자학을 뼈대로 조광조로 대표되는 지치(至治)주의, 향약 문화, 양명학과 실학을 두루 짚는다.

그는 이 책에서 '천하에 주인이 따로 없다'는 혁신적인 사상을 설파한 조선 문인 정여립이나 묘청, 신돈 등 왕조사 중심의 주류 역사학에서 이단아 취급 받던 인물의 사상을 부각해서 조명하고 있다. '김부식은 사대주의자였고, 신돈은 요승(妖僧)이었고, 퇴계는 주리론자였고, 율곡은 주기론자였다는 식'의 역사학적 정형을 깨고 싶었던 데다, 정치사상이란 '그 시대를 살던 사상가들이 국가 구성원들의 행복과 슬픔을 고민하면서 산출한 복음주의'에 대한 해석을 담아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인문학에서는 세종을 백성을 사랑해 한글을 만든 성군으로 볼지 모르지만 정치학적으로 한글 창제는 백성을 다스리기 위한 산물에 불과합니다. 조선 창업에서 수성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어떻게 왕조를 튼튼하게 이어갈까 고민한 세종은 마키아벨리 같은 교활한 측면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데올로기의 시대'라고 이름 붙인 근대 이후에는 역사주의, 무정부주의, 좌ㆍ우파 이념과 함께 박정희의 정치사상을 해부했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해 '실적과 결과를 유보한다면 합의된 사상사적 평가가 불가능할 것도 없다'며 그를 일본 군국주의를 통해 전수된 프러시아적 우국심에 사로 잡힌 인물이라고 평했다. 또 국가의제 설정에 성공했고 그 방향으로 국가와 사회의 편제를 재구성하는데 성공한 최초의 지도자이지만 '절차적 민주주의를 파괴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그의 연배에, 그것도 정치사상이라는 딱딱하기 이를 데 없는 주제를 이만큼 읽기 쉽게 쓸 수 있는 것은 '물 긷는 아낙에게 들려주어 무슨 뜻인지 모른다면 글이 아니'라고 한 소동파에 동감하는 그의 노력의 산물이다.

신 교수는 책 서문에서 돈이 없어 남들처럼 제때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해 나무지게 지고 산에 올라 학교 가는 친구들을 바라 보던 아픔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미국 유학 중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는 전화를 받고도 바로 귀국할 방법이 없자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었던 그에게 이번 책은 '말년을 살아야 할 이유'였다. 칠순이 코 앞이니 이 책을 마지막으로 그만 쉴 때도 된 듯하지만 '공부에 한이 맺힌' 이 학자는 다시 책을 펴 들었다. "<플루타르크 영웅전> 주해서 번역을 시작했어요. 10년쯤 걸릴지 모르겠네요."(김범수기자) 

11. 11. 26.  

P.S. 검색해보면 신복룡 교수의 <한국정치사상사>(나남출판, 1997)가 한 차례 출간된 적이 있다. 이번에 나온 건 개정증보판의 성격을 갖겠다. 한국 동양정치사상사학회에서 엮은 <한국정치사상사>(백산서당, 2005)도 같이 비교해볼 만한 책이고, 박충석의 <한국정치사상사>(삼영사, 2010/1982)도 개정판이 나온 책이다. 그밖에 자료집도 포함해 몇권 더 출간돼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1-11-27 1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01 1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