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나온 국내 철학서들 가운데 가장 묵직한 책은 아마도 이상인 교수의 <플라톤과 유럽의 전통>(이제이북스, 2006)일 것이다. 지난주 대부분의 언론에서도 주목하고 있는 책인데, 여기서는 경향신문에 게재된 김재홍 연구원의 서평을 옮겨놓도록 한다. 예전 같으면 언론사 리뷰들을 알라딘에서도 읽고 참조할 수 있었는데, 새삼스럽지만 그게 법적으로 불가능하게 된 모양이고 이젠 손품을 좀 팔아야 한다. 리뷰/서평의 유익이란 그 책이 읽을 만한가, 읽을 만하다면 언제쯤 읽을 것인가 등을 가늠하도록 해준다는 데 있다. 그건 '프리뷰'의 가장 중요한 취지이기도 하다.  

 

 

 

 

경향신문(06. 06. 24) 고대철학의 오해-왜곡-재해석

-‘플라톤 이래로 서양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각주(脚註)다.’ 영국의 철학자 화이트헤드의 말이다. 에머슨이란 시인은 단적으로 ‘철학은 플라톤이고, 플라톤은 철학’이라고 말한 바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서양 사상이나 철학 관련 책을 펴놓고 읽다 보면 ‘플라톤’이란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 책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어쩌면 유럽 철학 전통 자체가 ‘플라톤적’인지도 모른다. 유럽적 사유의 전통에서 플라톤이 차지하는 위치는 그만큼 중요하고, 그를 통하지 않고는 서양 사상을 논할 수조차 없다. 정작 문제는 그렇게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플라톤이라는 거대한 봉우리를 오른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서양을 바라볼 때, 유럽적 사유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는 오늘날 우리 문화 전반에 깔려 있는 유럽적 사유의 본질적 현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과연 유럽적 사유의 실체는 무엇일까?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본래의 사고 토양을 고대 그리스·로마로 놓고 그들의 사유의 뿌리를 찾으려 했다. 서양을 극복하려면 유럽적 사유체계를 이해해야만 한다. 오늘의 유럽인을 유럽인으로 만든 유럽적 사유의 전통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적으로 플라톤을 봐야 한다(*즉, 유럽적 사유 -> 그리스/로마 -> 플라톤으로 수렵된다는 것).

-지금까지 우리는 늘 유럽적 사유의 뿌리를 유럽인의 근대적 시각을 통해서 바라봐야만 했다. 우리의 ‘고유한’ 시각은 어디에 있었나? 이제는 플라톤을 해석한 근대의 철학자들의 관점을 넘어 ‘플라톤 자체’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플라톤을 ‘전근대’라는 전통 속에 가두지 않고 우리의 눈으로 플라톤 그 자체를 보기 시작하는 것이며, 우리의 시선으로 플라톤을 해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유럽인의 눈을 통해 플라톤을 해석하는 작업도 멈춰야 한다. 이제는 우리의 ‘고유한’ 시각으로 플라톤을 바라 볼 때가 됐다.

-누군가 우리와 같은 고전 학자들을 향해 “가라사대 철학”이라고 평가절하하는 발언을 했다. “누군가가 말하기를”이라고 하지 않고도 철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플라톤을 말하지 않고 어떻게 서양 철학을 논할 수 있단 말인가? 고전을 전공하는 어느 선생님은 “고전을 공부하기 위해선 10년가량 면벽(面壁)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만큼 어려움이 있다는 얘기이다.

 

 

 



-서구적 사고의 원천인 고전 그리스 사유의 중심에 선 플라톤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의 저서를 읽는 것이다. 아직 플라톤 원전에 대한 온전한 우리말 번역이 다 나와 있지 않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몇몇 작품만이 제대로 번역돼 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플라톤 원전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서가 등장하기란 어렵다. 그렇다고 고전 전문가들이 원전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했다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근대의 자기이해와 고대의 해석’이라는 프로젝트의 영향 아래 구상되고 저술됐다. 이 책은 거대한 학문적 꿈을 가지고 있다. 고전을 지난 시대의 ‘전근대’라는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고, 오늘의 관점으로 동시적으로 바라보려는 태도가 그것이다. 저자의 원대한 학문적 꿈은, “고전학자는 과거의 대양에서 현재의 ‘그물’만으로 작업해서도 안 되고, 현재의 ‘그물’과 구별되는 과거의 ‘그물’을 찾아내고, 그것을 이후에 짜인 ‘그물’과 더불어 미래의 철학의 법정에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 학문적 꿈을 실현하기 위해 저자는 그리스인들이 큰 축으로 삼았던 ‘지각과 이성’ ‘인식과 방법’ ‘경험과 과학’ ‘개인과 국가’라는 네 가지 얼개를 제시한다. 이를 바탕으로 현상을 구제하고, 세계를 해석하는 방법을 플라톤 철학의 문제 제기와 해결 방식을 통해 해명하고자 한다. 이런 연구 작업을 통하여 근대의 ‘역사적’ 고대 해석 경향을 넘어 고대의 ‘철학적’ 자기 이해를 규명하려는 학적 야심을 전개해 가고 있다. 네 얼개로 구성되는 일련의 작업이 5개의 장으로 나누어져 제1장인 고대와 근대로부터 출발해서 각 장에서 별도로 논의되고 있다.

-이 책은 이러한 논의를 통해 유럽적 사유의 전통을 플라톤으로 대표되는 고대 철학에서 찾고자 시도한다. 고대의 관점에 따라 재단된 ‘고대 철학 고유의 모습’을 드러내고, 역사적 연속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려진 잘못된 규정을 통해 고대가 어떻게 오해되고 왜곡됐는지를 밝혀내고 있다. 저자는 이 연구를 통해 ‘서양 고대’를 도식적인 해석으로부터 구제하고, 고대 철학을 다시 현대의 철학으로 만날 수 있는 방식을 제기하고자 한다.

-저자의 학적 능력이 되는 독서는 플라톤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 이전부터 시작해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학파, 신피타고라스주의, 히포크라테스, 그리고 근대 헤겔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영역에 학적 역량이 미치고 있다. 이렇다 보니 책의 부피도 만만치 않다. ‘큰 책은 큰 악(惡)’이란 말이 있지만, 저자의 작업에는 큰 책만큼 큰 악은 없고, 작은 악만이 있을 뿐이다. 독서하기가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저자의 날렵한 필치가 유럽적 사유를 좇는 그의 날카로운 시선에 머물도록 독자를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김재홍|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선임연구원)

06. 06. 2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르네 지라르에 대한 짤막한 글을 써야 할 필요 때문에 자료들을 읽고 있는데, <문학과 사회>(2004년 가을호)에 실렸던 맹정현씨의 '모방과 폭력 - 지라르 논리의 원환구조'란 글을 옮겨온다. 자세히 뜯어읽기 위해서이다. 본문 중 강조와 (*)로 덧붙인 군말만이 나의 것이다.

 

 

 

 

욕망에서 성서로?
욕망에 관한 (탈)현대적 담론들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해보자. 아마도 그것은 욕망으로부터 인간을 지우고 욕망의 실체성을 부정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헤겔에서 라캉에 이르는 욕망론은, 욕망은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타자나 구조의 효과임을 주창함으로써 욕망에 대한 반인간주의적인 해석의 길을 열어주었다.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은 정확히 이러한 계보 속에서 씌어진 르네 지라르의 대표작이자 처녀작이다. 욕망은 삼각형의 도식에 의해 구성되며, 욕망과 대상 사이에는 항상 제삼자가, 금지의 매개자가 개입되어 있다는 지라르의 주장들은 그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더라도 우리에겐 이미 익숙한 것이 되었다. 삼각관계가 없이는 욕망도 존속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가 말하는 욕망은 요컨대 실체가 없는 욕망이며, 이 점에 있어선 그가 욕망에 대한 현대적 해석들의 반경 안에 머물고 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국내에서 번역되어 출간된 지라르의 후기 저작들(<희생양>,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을 살펴보면 그가 (탈)현대 사상가들에 비해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그는 동시대의 사상가들처럼 반인간주의적 욕망 이론을 개진하면서 특이하게도 현대의 반종교주의와 이교도적 ‘니체주의’의 경도를 비판하며 ‘기독교주의로의 회귀’를 강력하게 주장한다. 심지어 유일신적 종교야말로 인간이 폭력의 악순환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메시지가 될 수 있다는 지라르의 결론은 낯설다 못해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내 기억에는 이미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도 이러한 메시지를 읽을 수가 있었던 듯한데, '이질감'까지 느낀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지라르의 여정에 있어서 욕망의 반인간주의적 해석에서 <폭력과 성스러움>으로 이행하는 과정은 비교적 자연스럽게 이해될 수 있었다. 하지만 상기 두 저작에서 보여주는 기독교적 엄숙주의로의 회귀는 논리적 비약이나 이론적 퇴행으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후기의 작업 속에서 보여주는 반인간주의와 기독교주의라는 지라르의 독특한 이론적 배합은 정확히 그의 출발점에서 이미 예견된 것이며, 그가 설정했던 최초의 전제를 끝까지 밀고 나간 결과라 할 수 있다(*내 말이 그 말이다. 필자가 약간의 트릭을 쓴 것이군!). 이 점을 확인하기 위해선 익히 잘 알려진 지라르의 전제에서 다시 출발할 필요가 있다.



미메시스와 폭력
잘 알려져 있다시피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 보여준 지라르의 출발점, 최초의 전제란, 욕망을 미메시스와 접속시켜 읽는 것이다. 지라르에게 있어 욕망은 곧 모방 욕망이다. ‘나’는 ‘그’가 가진 것을 원하고 ‘그’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 대상에 대한 직접적인 생물학적 욕구가 아니라 제삼자를 경유한 욕망, 타자의 음영이 드리워진 매개된 욕망이다. “매개자 그 자신도 대상을 욕망하거나 욕망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 매개자의 욕망이 주체의 눈에 이 대상이 끊임없이 욕망할 만한 것으로 보이도록 만든다.”(*영역본의 제목은 <속임수, 욕망 그리고 소설>이다.)

결국 욕망이란 거울의 운동 속에서 서로를 반사해가며 모방해가는 하나의 과정이다. 지라르는 욕망으로부터 성욕이라든가 생물학적인 욕구의 흔적을 제거한 후 모방의 흔적만을 도출해내는데, 이는 지라르에겐 모방만이 인간의 고유성을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특질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모방 욕망이 긍정적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나보다 우월한 자, 초월자에 대한 모방 욕망을 통해서(“매개자가 외재적인 경우”) “자아 이상”을 획득하고 사회의 문화유산들을 나의 것으로 섭취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수평적’으로 이루어질 경우, 즉 나와 초월자가 아닌 나와 동류(“짝패”) 사이에서 이루어질 경우(“매개자가 내재적인 경우”), 그것은 곧 관계를 갈등과 사투(死鬪)로 이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폭력의 기원이 있다. 모방은 “응집의 힘이면서 동시에 해리의 힘”인 것이다.

따라서 지라르가 모방 욕망에서 폭력의 논리로 이행하는 것은 그 출발점에 상정된 전제에 비추어볼 때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지라르는 1972년에 출간된 <폭력과 성스러움>에서 모방 욕망의 갈등의 측면을 최대한 부각시킨다. 인간이 모방하는 존재인 한 ‘나’와 ‘너’는 대립한다. 그런데 이러한 대립이 첨예해질수록 모방은 더욱더 가속도를 얻고 개체들은 원환을 그리면서 ‘무차별성’의 지점으로 수렴한다. 그것은 “적들 사이의 거울 효과를 증대시킨다.” 그리고 ‘무차별성’의 지점으로 수렴할수록 폭력의 강도는 점점 더 증폭되며, 그것이 일정 정도 한계에 다다르면 결국 사회는 위기에 빠진다.

<폭력과 성스러움>에서 지라르적 논리의 흥미로운 점은 위험 수위를 넘은 사회는 이러한 위기의 해소를 위해 그 사회 자체 내에 자생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지라르가 말하는 ‘문명’과 ‘언어’의 원리이다. 문명과 언어의 원리란 곧 희생양을 만들어내는 논리이다. 그리고 이러한 희생양의 논리를 가능케 하는 것은 다시금 ‘모방’이다. 욕망의 모방은 폭력을 만들어냄으로써 나와 너 사이에 갈등의 골을 판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갈등의 골을 봉합할 수 있는 가능성도 바로 그 모방에 있다. 증오를 모방함으로써, 서로 반목하던 ‘나’와 ‘너’는 ‘그’를 증오하는 ‘우리’가 된다.

 

 

 

 

‘공동체’의 동일성이 구성되는 것은 무언가를 이질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배척함으로써다. 공동의 적을 만들어냄으로써 우리는 ‘하나’가 된다. “바로 좀 전에 무수한 갈등, 적대 관계 속의 무수한 형제들이 있었던 곳에서 그 구성원 중 하나에 의해 고취된 증오 속에서 단결된 새로운 공동체가 나타난다.” 갈등을 양산하던 모방이 이제는 갈등을 치유하는 ‘치료책’으로 굴절된다. ‘수평적’ 폭력이 ‘수직적’ 폭력에 의해 방출의 기회를 얻고, ‘모방의 폭력’이 ‘폭력의 모방’으로 해소되는 것이다.

따라서 “폭력이 폭력을 추방한다.” 이에 대한 묵시론적 판본은 바로 “사탄이 사탄을 몰아낸다”이다. 결국 되돌아오는 것은 처음보다 더 강력한 폭력이며 더 교활한 사탄이다. 폭력의 ‘간계’이자 사탄의 ‘간계’이다. 지라르가 볼 때 전통적으로 문명은 희생양에 ‘성스러움’의 베일을 씌움으로써 희생양을 만들어내는 논리를 은폐해왔다. 바로 이 지점에서 지라르는 폭력과 성스러움을 접속시킨다. 적어도 희생 제의라는 문제와 관련시켜볼 때 성스러움이란 폭력의 논리에 대한 ‘몰인식’을 강화하기 위해 만든 매혹의 베일에 다름 아니다. 집단적인 폭력은 그 원인에 대해 무지한 상태에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인식론적 전환
여기서 다시 한 번 지라르의 논점 뒤에서 작동하는 이분법은 몰인식과 진리의 분할이다. 희생양을 만들어내는 논리, 희생 제의가 효과를 거두기 위해선 그것의 논리에 대해 당사자들이 몰인식해야 한다. 그는 이미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 ‘거짓’과 ‘진리,’ ‘기만’과 ‘진실’이라는 인식론적인 이분법을 동원한 바 있다. 기만과 진실의 이분법은 이제 상상적 거울의 운동 속에서 몰인식과 진리의 이분법으로 표현된다. ‘희생 제의 속의 맹목적인 폭력’이라는 주제는 <폭력과 성스러움> 이후 지라르의 모든 저작들을 관통하는 기본적인 주제다. 하지만 이 주제가 정당한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선 지라르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것이 바로 그가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귀착하는 본격적인 계기가 된다.

(1) 우선 ‘인식론적’ 문제. 즉 만약 이 사회가 폭력의 맹목적인 순환에 기초한 사회라면, 지라르는 어떻게 폭력의 악순환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는가? 근본적으로 문명과 언어가 희생양을 만드는 “초석적인 살해”와 그 살해의 재생산에 근거한 것이라면, 그리고 그 재생산이 몰인식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 맹목적인 사회 속에 몸담고 있는 지라르는 어떻게 그러한 진리를 깨달았는가?

(2) 이러한 ‘인식론적’ 문제는 보다 근본적으로 ‘윤리적인’ 문제를 전제한다. 즉 어떻게 폭력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릴 것인가? 어떻게 폭력에 기대지 않고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폭력의 치료제로서의 폭력이 아니라면 보다 적극적인 해결책은 무엇인가?

바로 이 두 가지 문제가 저자가 폭력의 구조를 파헤치는 비평가적 입장(<폭력과 성스러움>)에서 유대 기독교적 실천가(<희생양>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로 넘어가는 단초이다. 인식론적인 견지에서 볼 때, 지라르는 신화가 아닌 성서의 절대 우위를 주장한다. 폭력의 구조를 해명하는 데에는 신화 분석이 유용하게 쓰이지만, 자신에게 그러한 분석을 가능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것은 신화가 아니라 유대 기독교적 성서와 복음서라는 것이다. “복음서가 희생양 과정을 엉클어뜨리거나 신화화하는 것이 아니라 신화적인 해석이었다면 신적으로 취급하였을 것들의 순전히 모방적인 성격을 드러냄으로써 희생양 과정의 신비를 벗겨내고 있다.”

물론 현상적으로 볼 때는 반대의 주장을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신화에서보다 성서에서 더 많은 폭력을 접할 수 있으며, 심지어 성서의 ‘피학적 성격’을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라르는 신화에 폭력이 나타나지 않음은 폭력이 부재해서가 아니라, 폭력이 지워져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있음’과 ‘없음,’ ‘많거나’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은폐’와 ‘드러냄,’ ‘억압’과 ‘계시’의 문제라는 것이다.

지라르에게 모든 텍스트에 등장하는 폭력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다. 폭력은 하나의 현실인 것이다. 하지만 신화는 폭력을 가하는 자에 기초한 텍스트이기에 폭력을 왜곡시키거나 드러내지 않는다. 반면 성서는 폭력을 당한 자의 언어이기에 그 폭력을 ‘폭력’으로 규정하며 그 폭력성의 구조를 ‘계시’한다. 신화는 폭력을 ‘은폐’하거나 ‘신화화’하고, 성서는 폭력을 ‘계시’하고 ‘탈신화화’한다(*이것이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에서 지라르가 반복적으로 대비시키면서 강조하는 바이다). 심층적인 구조 분석을 통해서만 폭력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신화와 달리 성서에선 심층적인 분석이 없이도 폭력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이 단순해 보이는 ‘은폐’와 ‘계시’의 놀이 속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것은 지라르의 비평가적 감식안이다. 비평가들은 지라르가 문학 비평을 버리고 인류학으로 전향했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인류학을 문학 비평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한다. 즉 인류학에서 텍스트는 어디에 위치하는가, 폭력과 텍스트는 어떤 관계인가? 또 텍스트에서 폭력이 위치하는 곳은 어디인가?

폭력을 자리 매김하기 위해 지라르가 원용하는 것은 현대 언어학적 수행론의 성과라 할 수 있는 언표 행위와 언표, 말하는 것과 말해진 것의 이분법이다. 지라르는 신화와 복음서에서 폭력의 위치를 혼동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신화와 복음서의 차이, 신화의 은폐와 기독교의 폭로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표현과 표현되는 것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신화에서 폭력이 보이지 않는다면, 이는 폭력이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폭력은 언표 행위의 수준에 있다. 반면 성서에서 폭력은 언표의 내용, 즉 대상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표면에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언표 행위의 주체는 곧 그 폭력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비판하는 자의 위치에 있다.

성서는 신화 속의 폭력을 대상으로 삼아 폭력의 구조를 ‘계시’한다. 따라서 성서는 신화에 대한 ‘메타언어’라 할 수 있다. 성서는 신화 속에 감추어져 있는 폭력의 암호를 해독하고 그것을 지식의 형태로 전환시킨다. 지라르에게 종교적인 ‘계시’란 바로 이러한 ‘인식론적 전환’을 말한다.

폭력에 대한 이러한 상이한 자리 매김은 폭력을 당한 자에 대한 상이한 가치 평가를 수반한다. 신화에선 희생양이 죄인으로 그려지는 반면(이 점에서 지라르가 가장 오이디푸스(적)이다), 성서에선 희생양이말 그대로 희생양으로 그려진다. 가령 “예수는 희생양이다”라는 문장을 생각해보자. 이는 예수를 희생양으로서 규정함으로써 그의 무죄성을 전제하는 문장이다. 언표 행위의 주체가 예수의 무죄성을 항변하고 있는 것이다.

지라르는 신화적 세계관, 다신교, 이교도에서 유대 기독교적, 유일신교적 세계관으로의 이행을 ‘혁명’이라고 표현한다. “박해자의 환상을 처음으로 기록하면서 <구약 성서>는 혁명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는 정확히 인식론적 혁명이다. 희생양의 메커니즘에 대해 몰인식하도록 만드는 신화의 왜곡(“환상”)을 계시(“기록”)한다는 점에서 인식론적인 혁명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혁명은 단순히 인식론적 혁명에 그치지 않는다. 유대 기독교적 세계관이 가져온 혁명은 또한 폭력의 ‘악무한’을 깨뜨리는 적극적인 전략을 겸비하고 있다. 즉 ‘윤리적’ 혁명인 것이다.

미메시스의 윤리
그렇다면 성서-복음이 가져온 윤리적 혁명이란 무엇인가? 지라르에게 인간은 언제나 모방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모방으로부터 갈등이 시작하고 폭력이 출발한다. 모방이 폭력의 악순환을 초래한다면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선 모방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 앞에서 지라르는 자신의 전제를 폐기하지 않는다. 즉 인간은 모방이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지라르에게 남은 길은 모방의 가치론이다. 다시 말해 ‘좋은 모방’과 ‘나쁜 모방’을 구별하는 것이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에서 지라르는 두 가지 모델을 구분한다. “하나의 모델은 탐욕이 적어서 어떤 것도 경쟁적으로 욕망하지 않기 때문에 절대로 그 추종자들이 장애물이나 경쟁자가 되지 않고, 또 다른 모델은 탐욕이 아주 많아서 그 추종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좋은 모델이란 모방 관계를 갈등의 경쟁 관계로 만들지 않을 경우를 말하는데, 그것은 곧 신이다. 그리고 두번째 모델, 그 추종자들을 탐욕스럽게 만드는 탐욕스런 모델은 바로 사탄이다.

결국 좋은 모방이란 신을 모방하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신의 좋은 욕망을 모방하는 것이다. 모방 욕망이 아닌 욕망,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욕망이 아닌 금욕적인 욕망, 상대를 죽이는 경쟁적 욕망이 아니라 비경쟁적 욕망을 모방하는 것이다.

물론 경쟁적 모방과 달리 이러한 좋은 모방이 가능하기 위해선 또다시 ‘매개자’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인간이 맹목적인 모방의 원환 속에 갇혀 있는 한 신이라는 좋은 모델, 좋은 욕망을 알아볼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신을 직접적으로 모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신에 대한 모방을 매개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와 ‘예수의 말씀,’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예수의 욕망’이다.(*아래 그림은 러시아 화가 이반 크람스코이의 '황야의 예수'[1872])

예수는 신을 모방하고자 한 최초의 인간이다. 따라서 신을 모방하기 위해선 예수에 대한 모방을 경유해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를 모방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모방을 모방하는 것이다. 즉 “신을 모방하는 것을 모방하는 것이다.” 예수의 말씀은 신화의 암호를 해독하는 인식론적인 혁명이면서, 동시에 신이라는 모델을 비경쟁적 관계에서 추구했던 최초의 모델이라는 점에서 윤리적인 혁명이다.

결국 지라르의 원환은 완벽하다. 나쁜 모방의 악순환을 깰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좋은 모방이지만, 이러한 모방은 ‘신적인’ 것이기에, 매개적인 모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폭력 구조의 해명에 있어서도, 그러한 폭력의 악순환을 벗어나는 해결책 모색에 있어서도 자신이 최초에 상정했던 모방 가설을 폐기하지 않는다.

인간은 모방하는 존재라는 전제에서 출발한 지라르는 결국 모방의 가치론과 윤리적인 실천의 문제로 귀착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다시 그러한 윤리적 실천의 핵심은 ‘모방론’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바로 지라르 논리의 원환 구조이다. 자신이 최초에 설정한 한계를 깨뜨리기 위해서 그 한계 속에서 스스로 해답을 찾아낸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지라르에게서 반인간주의적 욕망론과 기독교주의로의 회귀가 봉합되는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06. 06. 26.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6-06-26 23:46   좋아요 0 | URL
퍼갑니다^^ 맹정현 씨는 라깡에 대해서 해박하시다는 그 분 맞죠?

로쟈 2006-06-26 23:52   좋아요 0 | URL
아직 정리도 안됐는데요(--;). 맞습니다. <라캉의 재탄생>에 그의 논문들이 실려 있습니다. 흔히 FM이라고 그러죠. 학위를 마치고 귀국했을 법한데, 좀 오래 걸리네요...
 

<미국의 민주주의>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 프랑스의 사상가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앙시앵 레짐과 프랑스혁명>(박영률출판사, 2006)이 최근에 출간됐다. 겸사겸사 토크빌에 관한 자료 몇 가지를 모아놓는다. 작년에 탄생 200돌을 맞았던 그의 삶과 사상에 관한 간단한 소개기사와 번역된 두 주저에 관한 서평들이다.  

동아일보(05. 07. 27) "佛 자유주의 사상가 토크빌 탄생 200돌"

-(*2005년 7월) 29일은 <미국의 민주주의>의 저자로 유명한 프랑스의 자유주의 사상가 알렉시스 드 토크빌(1805∼1859)의 탄생 200주년이 되는 날이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토크빌 200주년을 기리는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미국에서는 예일대와 토크빌학회가 공동으로 9월 30일∼10월 1일 예일대 바이네케 도서관에서 공동학술대회와 전시회를 개최한다. 유럽에서는 11월 18∼20일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유럽에서의 민주주의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국제 기념 학술대회가 열린다.

-프랑스 명문 귀족 출신인 토크빌은 1831년 26세의 젊은 나이로 7개월간 미국을 방문한 뒤 귀족주의를 포기하고 민주주의가 시대적 대세임을 선언했다. 그는 프랑스 혁명을 진압한 비엔나 체제라는 복고주의가 팽배한 유럽에선 낯설게만 느껴지던 신대륙 미국의 민주주의의 힘이 ‘조건의 평등’에서 나온다는 점을 꿰뚫어 봤다. 귀족 출신의 젊은이답게 평등보다 자유를 고결한 가치로 봤던 그는 그러나 미국 방문 후엔 ‘자신의 눈에 인간 쇠퇴로 보이는 것이 신의 눈에는 발전으로 비친다’는 말로 평등을 더 강조하는 민주주의를 신의 의지로까지 격상시켰다.



-이 때문에 토크빌은 미국에서 ‘프랑스적 규범(canon)과 미국적 규범 모두의 구성원임을 선언할 수 있는 유일한 프랑스인’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미국식 민주주의를 절대 선으로 믿는 조지 부시 대통령도 애독서로 <미국의 민주주의>를 서슴없이 꼽을 정도다.

-그러나 170년 전 토크빌의 사상이 오늘날 다시 르네상스를 맞고 있는 것은 그의 민주주의에 대한 찬사 때문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그의 경고에서 찾아야한다는 게 학자들의 지적이다. 토크빌은 민주주의의 원동력인 평등에 대한 열망이 무질서와 노예 상태를 불러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는 ‘민주주의의 위기’가 거론되는 미국과 ‘민주주의 이후의 새로운 질서’를 고민하고 있는 한국의 정치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최장집 교수가 진단하는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와는 어떻게 다른가?).

-서병훈(정치학) 숭실대 교수는 “토크빌은 민주주의가 ‘시기하는 감정이 충만한 정치체계’라는 점에서 지적으로 뛰어난 사람을 싫어하는 평등제일주의를 낳고 한편으론 개인주의와 결합해 독자적 판단능력이 없는 개인들의 고립을 심화시킴으로써 다수의 익명에 자신을 숨기는 방식으로 ‘수의 권위’에 대한 순종을 낳을 수 있음을 경고했다”고 말했다. 

 

 

 



-토크빌은 미국에서 위대한 정치가가 등장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 그 같은 경고는 미국의 대통령선거에서 갈수록 비범함과 거리가 먼 인사들이 선출되는 문제점을 정확히 예측하고 있다. 또한 다수의 결정 앞에서는 누구나 입을 다물어야 하는 반(反)엘리트주의와 평등제일주의가 지배하는 한국정치의 현실에 대한 지적같이 들리기도 한다(*사회적 불평등과 양극화를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라고 보는 진보진영의 시각과는 얼마나 다른가?). 토크빌의 이런 사상은 내년에 탄생 200주년을 맞는 영국의 존 스튜어트 밀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토크빌이 폐결핵으로 갑자기 숨진 이후 ‘다수의 횡포’를 비판한 밀의 자유주의 사상으로 꽃피게 된다.

 

 

 



-김비환(정치학) 성균관대 교수는 “귀족주의적 자유주의자였던 토크빌이 궁극적으로 옹호했던 것은 자유였지만 그는 미국을 통해 평등의 참된 가치를 수용했다”면서 “다수의 지배를 주장하는 민주주의가 도덕적, 문화적 획일주의와 ‘부드러운 전제정치(soft despotism)’를 낳을 수 있다는 토크빌의 경고는 오늘날 더 유효하다”고 말했다.(권재현 기자)

동아일보(05. 07. 04) 알렉시스 드 토크빌, <미국의 민주주의>(고전해제)

-토크빌은 예리한 관찰자요 심오한 예언자다. 미국을 불과 7개월 여행하면서 미국 민주주의의 장점과 한계를 면밀히 파헤쳤으며, 장래 미국과 러시아가 두 세계 강국으로 등장할 것이라고 정확히 예측했다. 미국 사회가 프랑스 사회보다 민주적인 이유를 토크빌은 미국의 활성화된 지방자치, 자발적인 결사체, 배심원제도 등에서 찾았다. 이것들이 국가권력의 집중과 전제화 경향을 억제하고 다수의 횡포에 대항하여 소수의 권익을 보호하며 시민들의 공공의식을 함양시켜 준다.

-민주주의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제도뿐 아니라 관습도 중요하다. 프랑스가 대혁명 이후 다양한 헌정질서와 정치제도를 고안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달리 민주주의를 성취하지 못한 이유는 두 나라 사이의 상이한 관습에 있다. 흥미롭게도 토크빌은 당시의 급진자유주의자들 및 사회주의자들과 달리 자유와 평등을 이율배반적인 것으로 보았다. 민주사회에서 사람들이 자유와 평등 두 가지를 모두 추구하지만 자유보다는 평등을 선호하기 때문에 평등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유를 포기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시민들은 자유를 물질적 복지를 추구하기 위한 방법으로 선호하기 때문에 자유가 번영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물질적 복지와 조건의 평등을 위해 기꺼이 자유를 희생할 것이라는 견해다. 특히 자유는 획득하기도 어렵고 그 이점도 잘 보이지 않는 반면 평등은 그 이점이 매우 즉각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평등을 더 선호하게 된다는 것이다.

 

 

 

 

-토크빌은 평등화의 경향으로부터 오는 민주적 전제주의의 가능성뿐만 아니라 개인주의로부터 오는 민주적 전제주의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경고했다. 민주사회에서 개인주의가 만연하게 됨에 따라 사람들의 삶은 서로 고립되고 서로를 연결시켜 주던 전통적인 유대는 거의 모두 해체된다. 게다가 조건의 평등과 물질적 복지에 대한 애착으로 중앙정부의 기능은 강화되고, 이로 인해 국가와 개인 사이에 전통적으로 존재하던 교회, 가족, 길드, 지역공동체 등 거의 모든 중간집단은 약화된다.

-대중의 여론도 전제주의를 부추긴다. 개인주의가 만연하게 됨에 따라 개인들의 다양한 의견보다는 다수가 형성한 여론이 오히려 더 강한 지적·도덕적 권위를 행사하게 된다. 이로 인해 개인들은 다수의 의견에 복종하고 거기에 안주함으로써 책임을 회피한다. 정치적 무관심 또한 문제다. 정치가 시민들의 관심으로부터 떨어져나갈 때 사적인 이해관계가 공적영역을 침범하게 된다. 현대사회의 병폐라 할 로비문화와 정경유착이 나타나는 맥락이다.

-파리의 유서 깊은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다양한 행정경험을 쌓은 토크빌의 사상은 보수주의와 자유주의를 넘나들 정도로 독특하고 뛰어나서 당대의 정치사상가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미래 민주사회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파악하고 있다. 그가 우려했던 대로 자유의 자발적 포기, 평등에 대한 열망, 다수의 횡포, 그리고 로비문화와 정경유착 등은 오늘날 미국을 위시한 여러 민주주의 나라들에서 나타나고 있다. 선후진국들이 겪고 있는 자유와 평등 사이의 갈등 또한 풀어가야 할 중대한 과제다.(임현진 서울대 기초교육원장)

조선일보(06. 06. 24) "자유를 잃은 혁명은 독재를 낳는다"

-프랑스의 사상가·정치가 토크빌(1805~1859)의 이책은 그가 죽기 3년 전에 자신의 모든 역사사회학적 지식과 학문적 역량을 기울여 저술한 대표작이다. 이책은 우리 독자에게도 익숙한 초기 저작인 <미국 민주주의>와 함께 토크빌의 양대 저작을 이루며,‘ 미국 민주주의’에서 시작된 프랑스 민주주의의 성숙이라는 문제의식을 평생을 고뇌하며 뼈를 깎는 노력으로 완성한 명작이다.



 

 

 

-이 책이 던지는 핵심 질문은 어째서 프랑스에서 가장 먼저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라는 것이다. 그리고‘자유·평등·박애’라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이념적 기반을 인류 최초로 성공적으로 완성한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이 어떻게 개인들의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는‘민주적 독재’의 사회로 변질되어갔는가 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토크빌의 설명은 후대의 역사학자와 사회학자들이 프랑스 혁명에 대한 자유주의적(또는 수정주의적) 해석이라고 부르게 된 이론적 틀을 제시한 선구자적 작업이었다.

-토크빌에 따르면, 프랑스 혁명의 첫째 요인은 구체제(앙시앵 레짐) 때부터 시작된 프랑스의 지나친 중앙집권화 된 획일적 통치 방식이다. 둘째는 프랑스만의 독특한 절대왕정체제 하에서 정치적 결사와 시민적 자유가 결여됐기 때문에 과거의 특권계급인 귀족과 새롭게 등장한 지배계급인 부르주아 사이에 철저한 분리와 불신이 이루어져서 그들 사이에 국가를 통치하는 방식에 대한 합의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군주정 최고의 번영기를 누렸던 루이 16세는 인민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다양한 정책적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국민들에게 봉건적 잔재들이 가장 참을 수 없는 구체제의 속박으로 느끼게 만들었다. 그래서 시민들이 계기만 주어지면 기존의 정치·사회체제를 혁명적으로 거부할 수 있는 정서를 갖게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의 혁명가들은 귀족계급을 현대사회의 법 정신에 맞게 복종시킴으로써 그들을 새로운 엘리트 계급으로 만드는 대신에 타도해버렸다. 그리고 이와 함께 현대사회라면 반드시 필요한 엘리트 계급과 그들의 덕목들-용기·모험정신·사회적 책임의식·창의성·지도력 등-을 함께 잃어버렸다. 또한 오랜전통을 지닌 기독교 정신을 인위적으로 대체한 반(反)기독교적 정서의 민주주의 이데올로기는 평등의 정신을 일방적으로 강조했다. 그 결과 시민들의 물질적 번영과 안락한 생활이 위협 받을 때 자유를 희생해 가면서까지 평등과 복지를 추구하게 만드는 전제주의에의 길을 열어놓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당시 프랑스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계몽철학적 문필가들은 전문성과 경험적 사실을 무시한 추상적 시민관과 사회관을 가졌다. 이들은 머리 속에서만 가능한 정의관을 시민에게 가르침으로써, 당면한 문제들을 구체적 사실과 경험에 입각해서 논의하고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아 실용적 해결책을 찾는 방식을 경멸하게 만들었다.



-프랑스의 석학 레이몽 아롱은 1968년‘5월 혁명’을 계기로 맑시즘이 다시 부활하고 프랑스 사회가 큰 혼란에 빠졌을 때 반드시 일어야 할 필독서가 토크빌의 저서라고 주장했다(*얼마 되지 않는 레이몽 아롱의 번역서들은 모두 전사한 듯하다). 이 책은 또한 프랑스의 ‘5월혁명’에 준하는 좌파 지식인과 민중운동가들의 실험을 경험한 최근 10년간 한국 사회의 혼란에 대한 사회학적 진단과 처방의 단초도 제공한다.(민문홍 서울대 국제대학원 전임연구원·사회학)

(*)그러니 요즘 분발하고 있는 우파/신우파 지식인들도 토크빌을 열심히 읽어주면 좋겠다. 그게 한국민주주의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듯하니까. 더불어 자신을 좌파라고 간주하는 이들도 <공산당 선언>보다는 <미국의 민주주의> 같은 책을 더 열심히 읽어주었으면 싶다. 그래야 앵무새가 되지 않을 테니까(생각은 다른 생각들과 부딪치면서 단련된다)...

06. 06. 2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겨레(06. 06. 23) 북리뷰에서 저자 인터뷰 기사를 옮겨온다. <축제, 세상의 빛을 담다>(시공아트, 2006)의 저자 김규원씨와의 인터뷰인데, 타이틀은 "진짜 잘 노는 법 보여드리죠". 월드컵이란 '축제'도 현재 진행중이므로 한번쯤 귀기울여볼 만하다.  

 

 

 

 

-축제의 첫 장은 역시 술로 시작하고 있었다. “(스페인) 팜플로나에서 가장 먼저 나를 반긴 색은 샹그리아 술병에서 흐르는 붉은색이다. 기대했던 진한 붉은색 대신 분홍빛이 감도는, 그래서 색정이 달콤하게 뚝뚝 흐르는 액체가 유리병에서 흔들거리고 있다.” 분홍빛 알콜로 얼굴을 내민 팜플로나는 곧 핏빛 축제로 젖어 이방인을 맞는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인 시내를 가로지르며 더운 콧김을 내뿜는 황소떼가 달려가고 비명과 탄성이 온거리에 울려퍼진다. 살벌한 소몰이에 자칫 어리숙한 관람객은 목이 꺾이고 배가 뚫리는 일도 다반사. 순교자 성 페르민을 기리며 13~14세기께 시작된 성 페르민 축제는 오늘날에도 죽음의 광란까지 마다않는 ‘붉은 축제’다.



-‘축제연구자’ 김규원(39·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 연구원)씨는 지난 10년 동안 산 페르민 축제를 비롯해 축제 문화가 발달한 유럽 곳곳을 돌아다녔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 장난감 산업 박람회라는 실용적 목적을 유감없이 달성하는 뉘른베르크 크리스마스 장터 축제, 개성있는 정원의 잔치가 펼쳐지는 쇼몽 쉬르 루아르 축제, 2차 대전의 폐허를 딛고 독창적인 공연으로 승부해 명성을 얻은 아비뇽과 에든버러 페스티벌…. 축제 속에 풍덩 빠져 그 감흥을 소상히 적은 <축제, 세상의 빛을 담다>(시공아트 펴냄)는 서로 다른 빛깔과 향취를 뿜어내는 축제의 매력을 전하는 낭만적인 기록이다.

-대학에서 조경을 공부한 김씨는 95년 도시계획을 전공하러 유학길에 올랐다가 문화지리학을 전공한 프랑스인 스승의 말에 솔깃해 축제 연구에 빠져들었다. “축제를 만나면서 도시를 즐겁게 연구할 수 있었어요. 축제는 압축적으로 도시를 보여주거든요.” 이 도시의 어떤 역사적, 정치적 상황이 이런 축제를 만들었을까, 도시마다 왜 축제는 다를까, 축제가 펼쳐지는 공간은 어떤 곳인가…. 축제를 경험할수록 이런 의문들이 자연스럽게 꼬리를 물었다.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99년은 지방자치단체들이 저마다 축제아닌 축제를 열어 ‘축제 망국론’까지 터져나오던 시기였다. 그만큼 ‘축제 연구자’가 절실했다. 김씨는 곧 문화관광정책연구원에서 축제를 평가하고 장기 계획을 세우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 “축제가 행사로 변질되는 경우가 많아요. 축제는 자발적이고 즉흥적이고 우연에 기대지만, 행사는 스케줄이 있어야 하고 시간에 맞춰야 하고 실수가 없어야 하지요.”(*즉 '행사'는 '축제'의 적이다. 비록 겉보기에는 유사하게 보일지라도.)

Click for more about Georges Bataille: Theory of Religion.

-그는 축제가 즐거움을 주려면 두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다. “축제가 아주 오랜 세월동안 지속되며 같은 행위가 반복되면 많은 사람들이 쉽게 따라하고 재미를 느끼지요. 여수진남제에서 시민들이 <뱃노래>를 따라 부르며 희열을 느끼는 것처럼요. 또 하나는 속죄양 또는 희생제물을 만드는 것이지요.” 그는 모든 ‘잘되는’ 축제엔 반드시 ‘죽이는’ 의식이 있다고 했다(*사실, 이 내용 때문에 기사를 옮겨왔다. 축제의 비결은 '죽이는 의식'에 있다는 것! 이건 바타이유의 종교론이기도 하다).

-꼭 양이나 소를 잡지 않아도 여러가지 상징적 행위들이 있지요. 풍어제에서 배를 띄워 바다로 보내는 거나, 짚인형을 태우거나, 풍자적 언어로 누군가를 공격하거나.” 하회마을에서 탈춤을 추며 양반을 사정없이 씹거나, 쾰른 카니발에서 시장을 본딴 인형을 태우는 의식 등은 바로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 축제의 속성을 보여준다.

-아무것도 죽는 것도, 죽이는 것도 없이, 그저 시민들에게 일방적인 즐거움만을 제공하려는 ‘하이서울 페스티벌’의 실패는 이런 데서 온다고 그는 지적했다(*누가 좀 죽어줘야 했을까?)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응용하자면, 비도덕적인 축제나 도덕적인 축제 같은 것은 없습니다. 잘 만든 축제와 잘 만들지 못한 축제만이 있을 뿐이지요.”(*축제는 '선악의 저편'에 있다.)

-그래서 그는 “축제는 순간을 포착해야 하는 고도의 예술 작품”이라고 표현했다. “현대 추상화를 잘 그리는 기술을 가르쳐줄 순 없잖아요. 딱딱한 문체로 축제 보고서를 쓰다보니, 축제의 본질적인 매력을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는 화려한 축제의 체험담을 펴낸 까닭은, “좀더 많은 사람들이 축제의 감흥을 깨달아 진짜 잘 노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라고 강조했다.

06. 06. 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자 한겨레(06. 06. 23)의 북리뷰들을 읽다가 비교적 크게 다루어진 미셀 옹프레의 <무신학의 탄생>(모티브북, 2006)에 대한 임종업 기자의 '책소개'를 옮겨온다. 리뷰는 역자와 마찬가지로 리뷰어 또한 '그리스도교도'라서 이 '불경스러운' 책을 소개하기 마뜩찮다는 식의 소심한 엄살로 시작한다(부분적으로 발췌한다). 리뷰의 타이틀은 '세상 구원할 자, 무신론자!'인데, 이 페이퍼의 제목은 그걸 풀어서 쓴 것이다. 

-신문방송에 금기가 있다. 종교, 또는 종교집단의 실태, 문제점 또는 비리는 알아도 침묵한다. 떼거지로 몰려와 개판을 치거나, 소리지르고 뒤엎으며 야단법석을 떨기 때문이다. <무신학의 탄생>은 금기에 도전한다. 신의 존재를 부인하기 때문이다(*한국의 종교는 언론보다도 힘이 세다!).

-지은이는 프랑스의 도발적인 고교 철학교사. 번역자는 그리스도교도다.(...) 나는 이 책의 서평 또는 소개기사를 쓰고 싶지 않다. 나 역시 그리스도교인이고 한 교회에 적을 두고 있는데, 예수의 존재를 부인하고 내세를 부인하고 교회를 부인하는 내용의 책을 어찌 소개하는가. 유황불이 들끓는 지옥에 떨어질 터인데…. 나에게 이 책을 떠넘긴 <18.0°> 책·지성팀 한 아무개 팀장이 지옥에 동행할 것이 분명해 그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또 출판담당 기자라는 밥벌이로서의 일이거니 정상참작이 되지 않겠는가.

 

 

 

 

-자! 철학교사의 얘기를 들어보자.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한 나무에 얼씬 말라고 했다. 그런데 악마의 꼬드김에 넘어가 여자는 일을 저질렀고 인간은 낙원에서 추방됐다. 창세기는 여성과 육신을 증오하고, 원죄에 시달리며 회개하고, 인간으로는 불가능한 속죄의 길을 찾으며 운명에 순종해야 하는 신앙을 낳았다. 인간은 저능아처럼 살다가 죽으라는 운명이었을까. 지혜를 택한 하와는 찬양받아 마땅하다. 사탄은 노예상태의 세상에 자유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들’은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을 끌어와 형체가 없는 이데아의 도시를 조작해냈다. 하늘과 땅을 나누어 낙원을 꿈꾸고 땅을 업신여겼다. 내세의 희망, 즉 보이지 않는 세상을 가겠다는 염원은 ‘지금 여기’에서의 절망을 낳았다. 그리고 말구유에 넋을 놓고 기뻐하는 어리석음을 낳았다. 근데 예수 이야기는 날조다(*이 '날조'에 관한 책들도 드물진 않다). 이 땅에서 살았다는 증거가 없다. 관련 고문서?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 이념적 조작물이다! 1세기 전반기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 해방을 얘기하는 예언자, 구세주, 복음의 예고자로 넘쳤다. 예수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행한 행동과 굳은 의지만으로 시작한 투쟁에서 승리하리라고 믿은, 즉 당시의 시대적 히스테리가 결집된 응축물이다.

 

 

 

 

-예수를 창조한 인물은 마가. 예수를 본 적도 없는 마가는 당시 분위기에 사로잡혀 거짓을 꾸며냈다. 옛 선조의 글쓰기 수법을 모방해 프로파간다의 수법을 쓰고 기만책도 서슴지 않았다. 신약의 몇몇 구절과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쓴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가르침·격언>을 비교해 보라. 예컨대 플라톤도 한창 때인데도 처녀막을 유지한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났고 수태고지는 아폴로 신이 몸소 행차해서 담당했다. 플라톤 역시 죽은 뒤의 삶, 영원히 죽지 않는 영혼의 존재를 믿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뒤 인간세계에 돌아온 예수에 앞서 피타고라스도 그랬다. 다만 사흘과 207년의 차이가 있을 뿐.

-‘정경’은 수세기에 걸쳐 수많은 사람이 관련됐다. 하여 곳곳에 모순과 있을 법하지 않는 일이 포함돼 있다. 로마제국을 대신하는 빌라도 총독이 과연 ‘작은 동네 깡패’와 대화를 했을까. 게다가 라틴말 총독과 아람말 예수가 통역도 없이. 십자가 형도 의심스럽다. 유대의 왕을 자처했을 뿐 로마권력에 도전한 적이 없는 예수를 매달 이유가 없다. 설령 그렇다 해도 무덤에 묻힌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통상 십자가형 죄수의 시신은 그대로 두어 날짐승, 네발짐승 밥이 되게 했고 잔해는 공동묘혈에 던져졌다. 한마디로 복음서의 화자들은 한 사내의 과거보다 종교의 미래를 말한 것이다.

-바울, 그는 예수를 독점하여 제멋대로 옷을 입히고 갖가지 사상을 덧씌웠다. 달을 못 채우고 난 조산아, 왜소한데다 대머리인 바울은 히스테리를 일으키는 신경쇠약 환자로서 성기능 장애를 가진 자로 추정된다(*저자가 아주 화끈한 성격이라는 걸 짐작하게 한다). 그는 자신에 대한 증오는 세상을 향한 증오로 바꿔갔다. 세상사람들에게 독신의 삶, 순결, 금욕을 강요한 것은 그 탓이다. 예수는 결혼을 반대하지 않았고 금욕적인 삶을 강요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모든 권력은 하느님한테서 오는 것이며 가난과 불행도 하늘의 뜻이라며 노예적인 순종을 가르쳤다. 교회는 탄생한 순간부터 당연히 폭군과 독재자의 편에 서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기회주의자 콘스탄티누스의 변절로 인해 그리스도교는 박해받는 소수에서 박해하는 다수가 되었다. 수세기 동안 교황청은 세속의 권력과 결탁히 권력을 휘둘러왔다. 나찌와의 협력, 종교재판, 노예매매, 인디안 학살…. 르완다 성직자들의 후투족 씨말리기. 사랑하는 이웃외에는 모두 무생물이다. 가나안을 유대인에게 주기 위해 야훼는 총력전을 펼쳤다. 바다를 가르고 태양을 멈추고, 모기와 등에를 군인으로 삼고, 역병과 궤양과 피부병을풀었다. 야훼의 가슴에는 전쟁의 훈장이 주렁주렁 달렸다.

-성직자들, 그들은 하느님의 말을 대신 한다며 뻔뻔하게 하느님의 몫을 요구한다. 세금도 없다. 유대교나 이슬람교도 피장파장. 지은이는 말한다. 신에 대한 거짓신화는 깨뜨려져야 한다. 유일신 교도들이 뒤죽박죽 헝클어놓은 이 세상을 구원할 자는 무신론자다! 때가 오면 육신은 더이상 더러운 것이 아니며, 쾌락추구는 죄 짓는 일이 아니며, 지적 판단은 오만이 아닐 것이다. 자기와 다른 상대방이 적이 아니라 상호 주체성을 완성해갈 동반자가 될 것이다. 또 낙원도 하늘나라에 있는 허구의 대상이 아니라 이 땅에서 이뤄낼 수 있는 이상향이 될 것이다, 라고.

-부조리한 세상에 정의로운 신이 있어야 한다는 소박한 믿음을 가진 나는 죽었다 깨나도 이렇게 용감하고 신랄한 책 못 쓴다. 책은 신문보다 무모하다(*'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정확하게 유신론자들의 구호이다. '그래도 나는 예수를 믿는다!' 책이 신문보다 무모한 것은 한편으론 신앙이 학적 문제, 곧 인식론의 문제가 아니라, 즉 '알면 안 믿는다!'가 아니라  실존의 문제이면서 구원론의 문제, 즉 '믿기라도 해야 하지 않나?'라는 걸 간과한 탓이다. 인간은 빗자루라도 믿는 존재이다! 최근에 신자수가 감소했다고 개신교단에서 대책 마련에 부심한 걸 보면 신앙은 사회학적 문제이기도 하고).

06. 06. 23.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을산 2006-06-23 13:17   좋아요 0 | URL
와, 대단한데요. 오강남씨보다 과격하네요.

연우주 2006-06-23 13:23   좋아요 0 | URL
제가 달 댓글은 아니지만, 가을산님, 오강남씨는 그리 과격하지 않은데요. 그 책<예수는 없다-이 역시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예수는 없다"구요.>의 제목만 과격했을 뿐, 내용은 무척이나 원론적이잖아요.^^

로쟈 2006-06-23 13:25   좋아요 0 | URL
대신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을산 2006-06-23 14:22   좋아요 0 | URL
역시 쓰면서부터 우려했던 대답이 달렸군요.... ^^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