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한국일보는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완역한 조형준씨와의 인터뷰를 싣고 있다. 안 그래도 지난주 한 모임에서 국역본의 나머지 절반이 나올 때가 됐는데 좀 늦춰지는 것 같다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었다. 그러던 차에 기대보다는 늦게, 하지만 예상보다는 빠르게 책이 완간됐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어 반갑다. 사실 한두 주 전에 나는 영역본을 주문해놓은 터여서 이 달안으로 책을 받게 될지 모른다. 해서 이젠 그간에 미루어둔 국역본의 구입도 더이상 미룰 수 없을 듯하다(책을 사는 건 어렵지 않다. 책을 꽂아둘 장소가 문제이다!).

참고로, 수잔 벅 모스의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문학동네, 2004), 그램 질로크의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효형출판, 2005), 그리고 할 포스터의 <욕망, 죽음 그리고 아름다움>(아트북스, 2005)이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함께 읽어볼 만한 대표적인 참고문헌이다(초현실주의를 다루고 있는 포스터의 책에서 두 개의 장이 벤야민에 할애돼 있다. 벤야민에게서 초현실주의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는 독자라면 반드시 읽어보야야 할 대목들이다.)

한국일보(06. 07. 04)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 완역 조형준씨

-나치를 피해 망명을 시도하다 자살한 비극의 유대인 지식인 발터 벤야민(1892~1940). 구미 지성계의 관심이 커지고 있는 그의 필생의 역작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완역됐다. 새물결출판사 조형준(42) 주간이 지난해 1권에 이어 최근 2권을 번역, 3일 출판했다. 2,500여 페이지나 되는 이 책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서사시’라는 평가를 듣고 있다. “마르크스가 외부에서 X레이로 자본주의를 촬영했다면, 이 책은 내시경을 밀어넣어 자본주의 몸통 내부를 촬영한 것입니다.”

-1920년대 유럽은 제국주의, 나치즘, 전쟁 등 자본주의의 폭력적 모습을 목격한다. 마르크스주의, 프랑크프루트학파, 루카치 등이 자본주의의 성격 분석을 시도하지만, 벤야민은 이들과 다른 방식을 취했다. 워즈워드의 시 ‘무지개’의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란 구절처럼, 광기와 광포함이 극에 달한 ‘어른 자본주의’를 분석하기 위해 ‘자본의 유년기’로 눈길을 던진 것이다(*나는 다른 페이퍼에서 유년기적 마르크스주의'란 표현을 쓴 바 있다). 이때 벤야민이 택한 지역은 19세기의 파리.

-프랑스혁명과 파리코뮌으로 대변되는 혁명의 도시가 바로 파리였다. 벤야민은 도서관에서 13년 동안 아케이드(arcade), 패션, 권태, 박람회, 광고, 매춘, 도박, 회화, 신문, 조명, 철도, 사진, 증권, 광고 등 자본주의 탄생기의 파리 모습을 찾아낸다. 책의 절반이 이런 내용이니, 자본주의의 육아일기로 보아도 무방하다. “벤야민은 자본주의가 사회에 꿈과 환상을 심어주었다가 한 순간 그것을 쓰레기 혹은 물거품으로 만들고 다시 꿈과 환상을 부추기다가 또 다시 쓰레기로 만드는 과정을 반복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아케이드만 해도 초기에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석조 건물만 보아온 파리 시민에게, 철과 유리로 만든 아케이드는 산업이 만든 새로운 발명품이자 가스등을 처음 선보인 새 도시, 새 세상이었다. 그러나 그런 아케이드는 불과 20, 30년 만에 갑자기 폐허가 되고 만다.



-조 주간은 “벤야민이 파악한 자본주의의 동력을 지금 우리나라에 적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고화소 카메라 기능을 갖춘 첨단 휴대폰이 나오면서, 아직 충분히 쓸 수 있는 제품이 쓰레기로 변하는 것 등이 그 보기다. 그는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의 멸망을 점친 마르크스와 달리, 이 책은 자본주의의 내밀한 부분을 가장 깊숙한 곳에서 들여다 본 책이라고 평가한다.

-원서는 1980년 독일에서 나왔는데 절반은 독일어, 절반은 프랑스어로 돼 있었다.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하고 독일어 프랑스어에도 능한 조 주간은 “분량은 방대했지만 번역이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고 했다. 다만 주(註)가 하나도 없어 애를 먹었다..

-예를 들어 “블랑키가 정부 대표로 노동자 대표단을 이끌고 런던 만국박람회에 갔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조 주간은 이를 폭력혁명을 주창한 공산주의자 블랑키(1805~1881, 사진)가, 자본주의의 잔치인 만국박람회에, 그것도 (프랑스) 정부 대표로 갔다는 것으로 해석하고는 매우 난감했다. 하지만 박람회에 간 사람은 그의 형인 제롬 블랑키(1798~1854)였다. 경제학자로 정부 관료를 지낸 형은 동생과 성향이 크게 달랐는데, 원서에는 동생인지 형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초기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이지만 딱딱하거나 어렵지는 않다. 조 주간은“책이 두껍다고 독자들이 너무 겁 먹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두꺼운 책을 좋아하는 나로선 겁먹을 일이 아니다. 내게 일차적으로 겁나는 책값이고, 그보다 더 두려운 건 들고다닐 무게이다. 혹 영역본까지 같이 들고다녀야 한다면!).

06. 07. 04. 

P.S. 작년에 나온 1권은 한겨레가 꼽은 '2005 올해의 책 50'에 선정되기도 했다(2권까지였다면 단연 '올해의 책'이었을 것이다). 그 이유를 들어본다.

한겨레(05. 12. 16) 현대 미학비평과 문화연구 같은 분야에서 최근 새롭게 조명받는 발터 베냐민(1892~1940)은 일찍이 자본이 만든 인공낙원인 “19세기의 수도” 파리에서 자본과 상품의 화려한 불빛을 뿜어내는 아케이드의 상징에 주목했다. 1927년부터 삶을 마감하기 전까지 그는 아케이드와 관련한 옛문헌, 인용문, 가십, 인물촌평, 여행 안내서, 박람회 카탈로그 따위를 모으고, 생시몽·보들레르·마르크스의 관련 자료들을 모았다. 그렇게 모은 방대한 자료에 자신의 생각들을 덧붙인 것이, 이름하여 <아케이드 프로젝트>(새물결 펴냄)다(*'벤야민' 대신에 '베냐민'이란 표기를 끝까지 고집하는 것이 한겨레의 '프라이드'이다. 아마도 '베냐민 지파'의 후손들인 모양이다).

-‘이 책은 나의 모든 투쟁, 나의 모든 사상의 무대’라고 그 스스로 말했다는 이 미완성 자료집은 그동안 여러 해석과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국내 독자들한테는 부분 인용되거나 이름만 알려졌을 뿐이었다. 그래서 우리말 완역 출간의 의미는 크다. 이 책에선 베냐민이 근대 자본주의의 ‘모더니티’를 19세기에 이미 찾아나선 발견자의 상상력을 엿보여준다.

-아케이드, 유행품점, 패션, 권태, 오스만식 도시, 철골 건축, 박람회, 광고, 꿈, 매춘·도박, 파노라마, 조명 같은 이름말들은 호기심 많고도 우울한 ‘비판적 관찰자’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하부구조를 분석한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과 다르게 “자본주의에 대한, 자본주의 안에서 하는 전혀 다른 발본적 사유”로서 근대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데 좋은 텍스트로 꼽히고 있다. 그가 “초현실주의의 어머니”로 부른 아케이드는 왜 베냐민을 그토록 흥분시키고 매혹시켰을까?(*누구더러 답하라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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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클로 2006-07-04 11:12   좋아요 0 | URL
기쁜 일입니다...

palefire 2006-07-04 12:53   좋아요 0 | URL
영역판은 그래도 페이퍼백이 나와서 다행입니다(아마 페이퍼백으로 주문하신 것 같아요). 하드커버 책가방에 들고다니면 볼만하죠. 거기다 노트북까지;;

로쟈 2006-07-04 12:58   좋아요 0 | URL
네, 페이퍼백이 25불 가량이더군요(중고는 12-3불까지도 떨어지던데, 벤야민 얼굴을 봐서 새 책으로 주문했습니다). 그럴리야 없을 테지만, 전4권과 영역본의 무게를 합하면 거의 군장 수준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고 구보까지 해야 한다면?.. 다시 돌아가기 싫은데요.^^

드팀전 2006-07-05 17:34   좋아요 0 | URL
1,2권 합치면 거의 4천페이지군요....저같은 직딩이 읽으려면 좀 시간이 걸리겠지만도전의식같은게 생기긴하는데....그전에 수잔 벅 모스의< 발터벤야민과 아케이드프로젝트>를 읽어야할 듯....

로쟈 2006-07-05 19:30   좋아요 0 | URL
영역본이 1천쪽이 좀 넘는데, 국역본이 쪽수로는 거의 4배가 되는군요...
 

얼마전 구내서점에서 본 두툼함 책 하나는 '학문 주체화의 새로운 모색'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우리 안의 보편성>(한울, 2006)이었다. 한동안 '학문의 주체성' 내지는 '우리 학문'이란 말이 학술계의 화두로 유행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신간은 그간의 성과를 집약하고 있는 책인지, 아니면 주기적인 레퍼토리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걸 직접 따져볼 만한 형편은 아니었는데, 얼마간 궁금증을 풀어주는 리뷰가 있길래 옮겨온다. 문화일보 최영창 기자가 쓴 "탈식민적 인식서 나아가 현실에 대한 보편적 독해"란 제하의 리뷰가 그것이다. 참고로, '우리 안의'란 표현은 <우리 안의 파시즘>(삼인, 2000) 이후 최근에 출간된 <우리 안의 과거>(휴머니스트, 2006)에 이르기까지 출판계에 유행하고 있는 하나의 트랜드이다.

 

 

 

 

문화일보(06. 06. 30) 1990년대 중반 미국 서부 남가주대(USC)에 교환교수로 가 있던 조희연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는 세계체제론의 권위자인 지오반니 아기리의 강의를 듣다가 “독재정부가 아닌 민주정부 아래에서 투쟁하는 한국을 포함한 제3세계 신흥공업국의 노동운동의 과제와 방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아기리는 “그것은 나에게 물어야 할 것이 아니라 당신이나 한국의 운동가들이 스스로 대답해야 할 문제이다. 한국의 노동운동이 신흥공업국 노동운동의 선봉에 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한국 노동운동의 향방이 세계 노동운동에 중요한 전범을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국내 인문사회과학자 12명이 서구 학문으로부터의 종속에서 벗어나 우리 학문의 주체적 정립을 모색한 책에서 조희연 교수는 당시 경험을 예로 들며 일생일대의 ‘지적 수치심’을 느꼈던 때라고 밝혔다. 당혹감에 얼굴이 후끈 달아오른 그는 강의가 끝난 뒤 벤치에 한 시간쯤 앉아 국내 학계와 지성계가 우리 현실을 어떻게 대면하고 있는지 수치스러운 마음으로 되돌아보았다고 한다.

-우리 근대학문의 서구 종속성 문제는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그러나 상지대·성공회대·한신대 3개 대학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민주사회정책연구원에서 기획한 책은 우리의 경험과 현실, 역사와 사회에 대한 ‘탈식민적 인식’의 순준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우리 현실에 대한 ‘주체적이고 보편적인 독해’를 통한 실천적 시도를 하고 있다는 점이 돋보인다. 여기서 ‘보편적 독해’란 정신대 문제나 박정희 신드롬, 광주항쟁 같이 우리 사회의 ‘특수성’으로 간주되는 현상들 속에서 세계사적 보편성을 읽어내려는 노력을 말한다.


 

 

 


-한국 학계 전반의 식민성을 점검한 서장에서 조희연 교수는 “지적·학문적 식민주의는 미국적 근대화를 추구했던 주류 우파 학자들뿐 아니라 이에 저항했던 좌파 학자들도 피해갈 수 없었다”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과잉보편화’된 서구적 보편의 특수화와 함께 그동안 주변적인 것으로 인식되면서 ‘과잉특수화’된 한국적·비서구적 특수의 보편화가 요구된다”고 강조한다.

-다만 우리 안의 보편성 발견 노력은 ‘우리 안의 파시즘’을 인식하는 과정과 동시에 진행돼야 ‘국가주의’나 파시즘으로 빠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있다고 조 교수는 덧붙였다. 화교나 외국인 노동자, 정주외국인에 대한 배타적 태도에서 볼 수 있는 무수한 ‘우리 안의 파시즘’적 잠재력을 성찰하고 극복하는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우리 자신이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을 가질 때 현재의 ‘한류’가 문화적 패권주의가 아니라 아시아 동반주의의 새로운 문화적 차원을 열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은 서장에 이어 독일과 일본, 중국, 남아프리카 등 해외에서 이뤄진 학문 주체화 사례들을 다룬 논문과 내재적발전론·민족경제론, 분단시대론, 민중 등 광복 후 국내 학계에서 학문 주체화를 시도한 대표적 사례들을 살펴본 글, 이병천 강원대 경제무역학부 교수의 ‘개발자본주의론’ 처럼 한국사회의 주요 측면들에 대해 최근 새롭게 개념화·이론화에 들어간 작업들을 해당 연구자가 직접 소개하는 논문 등으로 구성돼 있다.

-서구의 근대학문과 우리의 관계에 초점을 맞췄지만, 사실 우리 학문의 대외 종속성은 근대나 서구와의 관계로만 한정되지 않고 훨씬 더 뿌리가 올라가고 복잡한 문제다. 따라서 필진으로 참여한 12명의 노력이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낯설게 비쳐보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시도가 가진 의미는 인정받을 가치가 충분하다(*이를 계기로 '우리 학문의 (불)가능성에 대한 보다 진전된 논의가 이어지기를 기대해본다).

06. 07. 03.

P.S. 러시아 사이트에서 '한국'에 대한 이미지들을 찾아보다가 발견한 한반도 지도 한 장을 옮겨놓는다. 동아시아사에 대한 내용 중 7세기 삼국시대의 한반도 모습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와 함께 양편으로 황해와 동해가 러시아어로 표기돼 있다. 암튼, 이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 우리 안의 보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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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퇴전문 2006-07-04 04:37   좋아요 0 | URL
당면한 현실과 문제들을 스스로의 머리로 고민하지 않는 한국적인 무언가를 식민과 냉전-분단 체제 탓으로 결론 짓는 것도 차츰 망설여집니다. 지적인 전통과 토양이란 것에 대해 알면 알아갈수록 답답한 심사도 함께 느네요. 가령 거대 제국이 공급해주는 담론들을 끽 소리 않고 받아들여서 오히려 더 교조적으로 울궈먹는 모습도 조선조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전통인가 싶고, 대전제는 결코 건드리지 않는 안전한 개설서를 주로 내놓는 모습도 당시 유생들이나 지금 교수들이나 뭐가 다를까 싶죠. 때론 한국이 뒷방 구석의 작은 냉장고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유통 기한이 지난 수입 식품들을 오롯히 저장해두는.

공부가, 평생 남이 퍼질러 놓은 대변이나 분석하다 끝나는 것이 아닌가.. 그게 나 하나 잘 하고 열심히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곧 죽어도 능력 없다곤 인정 안 하죠;), 가끔씩 서늘해지는 거겠죠. 초면 불구하고 몇자 남깁니다.

로쟈 2006-07-04 07:39   좋아요 0 | URL
'뒷방 구석의 작은 냉장고'란 비유가 절묘하네요.^^ 이게 한 개인의 역량과 무관한 듯싶은 문제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떼로 돌파할 수 있는 문제인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게 됩니다. 누군가 좀 뚫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
 

오늘자 조간신문들의 문학란은 대부분 중국계 프랑스 작가 샨사의 방한기사로 채워져 있다.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방한소식을 기사를 통해 처음 접하고 나는 두번 놀랐다. 나이가 나보다 많이 어리다는 사실에 한번 놀라고, 그럼에도 외모는 나이가 더 들어보인다는 사실에 한번 더 놀랐다. '놀랐다'고 적었지만 그냥 '의외였다'고 해야 맞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의외인 것은 이 '중국 여성'이 불어를 배운 지 4년만에 쓰기 시작한 소설들로 프랑스 문단을 뒤흔들고 있다는 사실. 이게 사실은 가장 '놀라운' 일이다! 비록 당분간은 그녀의 소설을 읽을 일이 없을 듯하지만, 안면 정도는 터둔다는 의미에서 관련기사 몇 편을 옮겨둔다(일부 중복되는 내용은 조정했다).   

세계일보(06. 07. 03) "천안문 사태가 내 인생 전환점"

-감각적인 문체와 진중한 서사로 국내에도 두터운 독자층을 확보한 중국계 프랑스 작가 샨사(34·사진)가 지난 1일 ‘현대문학’ 초청으로 방한했다. 1972년 중국 베이징에서 태어나 천안문사태를 겪은 후 17세에 파리로 건너가 불어를 배운 지 불과 4년 만에 불어 소설을 집필, <천안문> <바둑 두는 여자> <측천무후> 등을 잇달아 펴내면서 프랑스 고교생들이 선정하는 ‘공쿠르 데 리세앙’상 수상을 비롯해 뜨거운 호응을 얻어낸 작가. 입국 당일 기자와 만난 작가는 일본에서 다양한 매체와 인터뷰를 하고 난 직후여서인지 다소 피로한 듯했지만 맑은 눈동자에 빛나는 투지를 담고 있었다.

 

 

 



―불어로 쓴 첫 소설이 <천안문>인데, 천안문사태는 당신에게 어떤 경험이었나?

당시 고교생이었기에 적극적으로 낄 자리는 없었다. 하지만 시위대에게 물을 가져다 주고 여러 가지 물품을 공급하는 정도의 일은 했다. 나는 그 비극적인 사건으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프랑스 정부 장학금을 받아 파리로 건너갔는데, 개를 데리고 산책을 다니는 파리지앵들을 보면서 비극적인 사태로 인한 심리적 내상까지 지니고 있던 나는 난파선에서 살아남은 듯한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그들도 천안문사태를 매체를 통해 접했겠지만 고통이란 공유되기 힘든 것이었다.”

―왜 중국어가 아닌 불어로 소설을 썼는가.

“프랑스에 가기 전까지 따로 불어를 배운 적은 없다. 하지만 나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 도전하는 걸 좋아한다. 틀리건 맞건 간에 ‘쓰겠다’는 용기를 냈던 게 주효했던 것 같다.”

―독자들이 당신 소설에 열광하는 이유는?

좋은 소설이기 때문일 것이다(*다른 인터뷰에서도 드러나지만 그녀의 자신감과 도도함은 하늘을 찌른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소설이란 자기 만족을 위한 에고이스트 소설이 아니라, 보편적인 주제를 통해 감동과 함께 작가의 생각이나 감정을 공유하는 소설이다. 내 소설은 공간이 특별하고 오감을 건드리는 심포닉한 불어를 쓰기 때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영화를 보는 것 같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당신 소설에서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 배경은?

내 소설은 꿈꾸게 하는 소설과 공포나 잔인함, 생의 막다른 골목을 드러내는 소설로 나뉜다. <측천무후>나 <버드나무의 네 번째 삶>이 전자이고, <바둑 두는 여자> <천안문> <음모자들>이 후자일 것이다. 이 두 부류의 작품들을 번갈아 쓰면서 내 안의 균형을 유지하는 편이다.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흔히 성공한 여자들을 ‘악마’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이런 여자들이야말로 ‘불꽃 위를 나는 새’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미 불꽃을 건너 날아가는 새다.”

-그림도 병행하고 있는 샨사는 소설을 쓸 때는 하루에 15시간씩 매달리며 수도자 같은 삶을 살고 있다. 단문을 전략적으로 구사하는 그는 단어를 신중하게 선택해 단칼에 문장을 요리하는 스타일을 선호한다. 단어를 사람처럼 대한다는 그는 “단어마다 각기 다른 기질과 관능이 배어 있는데 주방장이 향신료를 적절히 활용해 좋은 요리를 만들어내듯 내가 애정을 가지는 그 단어들로 소설을 완성해낸다”고 말한다.

-프랑스에서 한국인들도 많이 접했다는 샨사는 “한국인은 다이내믹하고 창의적인 민족 같다”며 “한국영화는 셀 수도 없이 많이 봐서 제목조차 기억 못할 정도”라고 한국과의 친연성을 드러냈다. 한국에서는 낭송회(4일 오후 7시 교보문고 잠실점)와 사인회(5일 오후 3시 교보문고 광화문점)를 비롯해 각종 매체와의 바쁜 인터뷰 스케줄로 꽉 차 있다. 1주일 후에는 부모가 사는 베이징으로 날아가 영화 계약을 해야 한다. 이렇게 바쁜 생활 속에서 사랑은 언제 하나.(*소설은 언제 쓰나, 라고 질문했어야 하지 않을까?)

“사랑은 불가능합니다. 사랑은 우리 각자의 가장 훌륭한 부분, 서로 만나기로 되어 있는 두 존재의 완전한 융합입니다. 그러나 삶은 그 존재들이 서로 만나지 못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사랑은 짧은 순간들 속에서만 존재합니다.”(글·사진 조용호 기자)

동아일보(06. 07. 03) "‘베이징의 별’…중국계 프랑스인 작가 샨사 내한"

-소녀는 작가가 되리라는 걸 알았다. 여덟 살 때 시를 쓰기 시작해 10대 시절 이미 세 권의 시집을 냈고 ‘베이징의 별’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베이징대 진학을 앞둔 17세에 소녀는 톈안먼(天安門) 사태를 맞는다. 도저히 공부할 상황이 아님을 알고는 프랑스행을 결심했다. 파리에 도착한 그는 얀니(閻c)라는 원래의 이름 대신 샨사(山颯)라는 이름을 쓰기로 한다. 아들을 낳으면 이름에 ‘사(颯·바람소리를 뜻함)’를 쓰려고 했다는 아버지의 얘기를 일찍이 들었기 때문이다.



-중국계 프랑스인 소설가 샨사(34)가 1일 처음 내한했다. 국내에선 2002년 소설 <바둑 두는 여자>가 처음 소개된 뒤 대표작 <측천무후> 한 종만 8만 부가 팔린 인기작가다. <바둑 두는 여자>는 고등학생들이 가장 읽고 싶은 책으로 뽑혀 공쿠르 데 리세앙 상을 받았으며 <측천무후>는 프랑스 출판사 두 곳이 판권을 놓고 법정 분쟁까지 벌였다.

-놀라운 것은 그가 파리에 도착했을 때 프랑스어를 한마디도 할 줄 몰랐다는 사실. 그랬던 그가 파리 생활 7년 만인 1997년 프랑스어로 쓴 첫 소설 <천안문의 여자>를 냈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창작을 감행한 이유를 묻자 샨사는 “나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해냈을 때 희열을 느낀다”고 답했다.

-샨사 소설의 문체는 아름답지만 단문으로 쓰여 속도감 있게 읽힌다. 그는 “(소설을 쓸 때) 사전 속 단어를 찾아보면서 ‘언어의 관능’을 느낀다”고 했다. 단어를 정교하게 직조하되 “단칼에 치듯” 문장을 쓴다고도 했다. 소설의 주인공은 여성이지만 전쟁, 음모 같은 남성적인 주제를 다룬다. 샨사는 “권력, 두뇌의 힘, 사상의 대립과 충돌을 지켜보기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프랑스로 귀화한 그는 “서양인, 동양인 중 어디에 속한다고 생각하나”라는 물음에 “나는 중국이 벼려내고 서양의 불 속에 담금질된 칼”이라고 답했다.



-순식간에 스타덤에 오른 만큼 질시도 따랐다. 공쿠르상 등 각종 문학상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리면서 심사위원들에게 ‘샨사는 중국 스파이’라는 투서가 잇따랐을 정도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얘길 들려줬지만 이내 “거기서 소설 <음모자들>의 모티브를 얻었다”며 웃었다(<음모자들>은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중국 스파이와 미국 CIA 요원의 사랑을 다룬 소설이다).

-그는 아침마다 태극권으로 몸을 단련하고 서예를 하며 정신을 가다듬는다. 창작에 매진할 때면 하루 15시간씩 소설을 쓰거나 그림을 그린다(그는 개인전을 수차례 연 화가이기도 하다). 일하느라 바빠 연애할 시간이 없다면서도 샨사는 “사랑은 운명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소설은 읽어본 적이 없지만 <형사> <태극기 휘날리며> 등 한국 영화를 많이 봤으며 임권택 감독을 좋아한다고 했다. 수년 전 임 감독 등 한국 영화 제작진과 우연히 만나 저녁식사를 함께한 적이 있는데 ‘보드카 폭탄주’를 만드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며 웃었다.(김지영 기자)

한국일보(06. 07. 03) 中 태생 佛작가 샨사 방한 "동서고금 아우른 세계문학 추구"

-"단어는 하나하나가 영혼을 가진 존재입니다. 저는 그 영혼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그 존경과 사랑이 단어와 저를 매개합니다." 중국 태생의 프랑스 작가 샨사(34)는 앙가슴이 드러나는 드레스 차림이었다. 그리 크지않은 키에 둥근 몽골리언 골격, 서글서글한 눈매와 푸근한 웃음은 그의 문장이 지닌 섬세한 힘과 언뜻 조화되지 않는 듯했지만, 소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대목에 이르자 측천무후의 위의(威儀)처럼 도도하고 당당했다.

-베이징에서 나서 문학 신동이라 불리며 8살 때부터 시를 썼고, 18살에 프랑스 정부 장학금으로 파리 유학, 7년 만에 불어로 장편소설 <천안문의 여자>(원제 <천안문>)를 써낸 작가. 이후 <바둑 두는 여자> <측천무후'>등 그의 작품은 발표될 때마다 프랑스 문단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고, 미국과 일본에도 번역 출간됐다. 이번 한국 방문은 책 출간 홍보와 <측천무후> 등의 영화 제작 협의차 중국과 일본을 들르는 김에 이뤄진 것이라고 했다.

-"저는 완벽주의자예요. 문장이 마음에 안 들면 10번이고 20번이고 고쳐 씁니다." 그 노력이 2차 언어로 직조한 그의 문학을 토종 프랑스문학에 꿀리지 않게 한(때로는 압도하게 한) 힘일 것이다. "스포츠에 비유하자면, 유러피언의 산문은 복싱입니다. 그만큼 몸과 발과 팔동작이 복잡하다는 의미지요. 반면 저의 글은 검도예요. 머뭇거림 없이 단칼에 내려치는 것이지요." 그는 자신의 문학이 지닌 장점을 "독창적인 문장과 강렬한(강력한) 인물 설정, 그리고 현실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현실을 벗어나게 하는 묘사의 힘"이라고 말했다.

-부모는 중국에 있고 매년 한두 차례 고향을 방문한다. 6년 전 중국 국적을 포기하고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지만 그의 소설은 다분히 중국적이다. 작품 소재로서의 역사가 그러하고, 문화적 맥락이 그러하다. 하지만 그는 "나의 문학은 세계 문학"이라고 말했다. "프랑스에서 9월쯤 출간될 신작 <알렉산더와 알레스트리아>는 중국 역사와 무관한 작품이죠. 전 보편적인 문학을 추구합니다." 그는 근작의 내용을 잠깐 소개했다.

-"스키타이 일족 가운데 여전사 부족이 있었고, 그 부족 여왕과 알렉산더가 만났다는 기록이 그리스 문헌에 등장합니다. 물론 사료적 근거는 없는 이야기입니다. 이 소설은 그 둘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알렉산더를 선택했냐는 질문에, 사뭇 진지하게 "알렉산더가 나를 택한 것"이라고 말할 만큼 당당한 이 작가는 독자사인회와 인터뷰 등 일정을 마친 뒤 7일 출국한다.(최윤필기자)

06. 07.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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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07-03 19:28   좋아요 0 | URL
샨샤의 작품은 몇 개 읽어보았는데, 좀 실망했었습니다. 천안문을 소재적 차원에서만 다룬다는 느낌도 있었고, 오리엔탈리즘을 무기로 혹은 화장으로 공허함을 감추는 것도 같았고요.
하지만, '고통이란 공유되기 힘든 것이었다'라는 말은 가슴에 울리네요...
우리의 박완서나 임철우의 글들이 생각납니다. 망각에 저항하며 상처를 쥐어뜯는 사람들.
퍼갑니다 ;)

로쟈 2006-07-03 20:04   좋아요 0 | URL
<천안문>이 데뷔작이라면 가장 약한 소설일 수도 있을 거 같네요. 프랑스 출판사들이 난리였다는 걸 보면, 그래도 뭔가 '대중적인' 무기를 갖고 있지 않나 싶고. 저는 그녀의 '도도함'이 눈에 띄길래 옮겨왔습니다...

stella.K 2006-07-04 13:05   좋아요 0 | URL
처음 알려지기 시작했을 때 나온 사진하고 지금은 많이 다른 것 같아요. 살도 많이 찌고. 전 천안문 읽어 봤는데 나름대로 괜찮던데, 그후 읽을 기회를 못 갖고 있기는 한데 그래도 꽤 기대가 되요. 15시간이라...전 좀 더 노력해야겠군요. ㅋㅋ. 가져갑니다.^^

로쟈 2006-07-04 13:06   좋아요 0 | URL
조만간 '광화문'이 나오는 건가요?^^

비자림 2006-07-04 13:19   좋아요 0 | URL
기인님 서재에서 얘기하다 왔어요. 님이 올리신 글이었군요.
앗, 님도 소설을 읽으시나요???? 저는 어려운 책만 읽으시는 줄 알았다는.. 호호

로쟈 2006-07-04 13:36   좋아요 0 | URL
그래도 제 전공이 '문학'인데요(^^;). 샨사의 소설들은 아직 읽은 바 없지만...
 

작가 조정래 선생의 신작 장편소설 <인간 연습>이 출간됐다. 책이 나온 건 며칠 됐고, 오늘자 한겨레에 최재봉 기자의 리뷰가 실렸다. 길잡이 삼아서 옮겨놓는다. 기사의 타이틀은 "무너진 사회주의 전향 장기수의 선택은?"이지만, "사회주의 몰락'에 대한 문학적 해명 시도"라는 설명에 기대어 페이퍼의 제목을 달았다. 그게 나의 관심사와 맞기도 하고(주제면에서 가장 '러시아적'이기도 하다).

-작가 조정래(63)씨가 새 장편소설 <인간 연습>(실천문학사)을 내놓았다. <한겨레>에 연재했던 <한강> 이후 소설로는 4년여 만이다. 80년대 초부터 20여년 동안 세 편의 대하소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에 매달려 온 조정래씨가 한 권짜리 소설을 발표하기는 <불놀이>(1983) 이후 23년 만의 일이다. 일제 강점기에서 유신 말기까지의 한국 현대사를 대하소설 삼부작으로 갈무리한 작가의 다음 행보가 어떠할지 독자들은 궁금해했던 터였다.

 

 

 

 

-<인간 연습>은 전향한 장기수 ‘윤혁’을 통해 이념의 현실적 의미를 따져 묻고 그 방향을 모색해 본 작품이다. 90년대 초를 배경으로 삼은 이 소설에서 윤혁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사상의 조국’ 소련이 무너지고 조국의 북쪽에서는 인민들이 굶주림에 쓰러져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소설 앞부분에서 윤혁과 또 다른 전향 장기수 ‘박동건’은 자신들이 평생 동안 추구해 온 가치가 속절없이 스러지는 장면 앞에 망연자실해한다. 두 사람은 감옥에서 악랄한 고문에 못 이겨 전향은 했을지언정 자신들의 청춘을 바쳤던 사회주의 이념을 진정으로 버리지는 않았던 것.

-“이런 꼴 보려고 우리가 평생 그 고생을 한 겁니까”라며 탄식하던 동건은 결국 병상에서 죽음을 맞고, 윤혁에게 “그의 죽음은 바로 자신의 죽음”으로 받아들여진다. 동건의 죽음이라는 물리적 사태는 실상 사회주의라는 이념적 가치의 현실적 죽음을 대행하는 것이었으니까. 사회주의가 무너진 마당에 동건과 윤혁에게 남은 삶은 무의미한 소음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니겠는가.

-이념을 좇았던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윤혁은 이성과 논리의 인간이다. 비록 전 존재가 뒤흔들리는 듯한 충격과 절망 속에서도 그는 사태의 진상과 원인을 합리적으로 규명해 보고자 한다. 무엇보다 결과적으로 실패였음이 드러난 자신의 선택에 대해 합당한 옹호의 논리가 필요했던 것. 이 대목이야말로 소설 <인간 연습>의 핵심에 해당할 터인데, 소설 속에서는 윤혁의 감방 동료였던 운동권 출신 ‘강민규’가 우선 윤혁의 노력을 돕는다.

-강민규에 따르면 사회주의의 실패는 △공산당 일당독재 △인간을 도덕적으로 개조할 수 있다는 믿음 △당의 일방적 계획과 집행 △‘당의 무오류’라는 오류 등에 기인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런 원인 분석 가운데서도 민규와 윤혁은 특히 사회주의가 ‘인간의 얼굴을 잃어버렸다’는 지적에 큰 공감을 표한다. 윤혁은 달리 “(본능적 존재인)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이성의 힘이 큰 존재로 보려고 한” 착각을 들먹이기도 한다.

-또 다른 해석도 있다. 보호관찰 대상인 윤혁을 감시하는 ‘김 형사’가 퉁겨준 신문 칼럼에서 어떤 교수가 쓴 글이다: “마르크스주의란 기본적으로 밥 먹는 철학인데도 그것을 실현시키지 못해 결국은 스스로 몰락하고 말았다.” 이런 사후 분석들에 앞서 벌써 30여 년 전에 사회주의의 몰락을 예견한 견해도 있었다. 간첩으로 내려오자마자 믿었던 친구의 신고로 체포된 윤혁을 담당했던 검사의 장담이었다: “모두 함께 일해 공평하게 나눠 먹는다고? 말이야 근사하지. 그렇지만 내 것이 아닌데 어느 누가 최선을 다해 일하겠나? 그 망상이 결국 공산주의를 망치게 될 것이다. 두고 봐.”

-미흡한 대로 원인 분석이 끝났으면 향후 대책이 마련되어야 하는 법. 이제 사회주의는 패배했으니 승리한 자본주의 쪽에 빌붙어 그 떡고물이나마 얻어 먹고자 분골쇄신해야 하는가. 그런 것이 아니라면? 이와 관련해 작가 쪽에서 뚜렷하고 획기적인 대안을 내놓고 있지는 못하다. 그다지 길지 않은 소설에 대한 요구로는 처음부터 무리했달까. 작가는 다만 일종의 원칙론이랄까 막연한 낙관적 전망을 제시하고 있어 보인다.

-방향은 두 가지. 하나는 강민규가 운동의 새로운 활로로서 추진하는 ‘진보적 시민단체’ 결성이다. “건전한 보수와 생산적 진보를 조화시켜 좌우의 날개로 균형을 잡는 사회를 만들어 가자는 구상”이라고 민규 자신은 설명한다. ‘사회주의는 시민단체들을 용인하지 않아 몰락했을 수도 있다’는 윤혁의 생각은 민규의 구상에 대한 납득과 지지의 표시로 볼 수 있다.

-또 다른 방향은 다소 엉뚱할망정 윤혁 자신에게는 무엇보다 절실하게 와 닿는 체험적 진실의 무게를 지니고 있다. 그 이름은 ‘아이들.’(*이 '엉뚱함'이 어중이떠중이들과 '작가'의 차이이다.) 윤혁은 우연한 계기로 부모를 잃은 어린 남매 ‘경희’와 ‘기준’을 만나고 그 아이들을 손주처럼 돌보면서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삶의 기쁨을 맛보게 된다. 아이들과의 만남은 “새싹 파릇파릇 돋는 너른 초원”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는 햇살” “온갖 꽃들이 흐드러지게 만발한 꽃밭”으로 묘사될 정도로 윤혁의 잿빛 삶을 황홀하게 채색한다.

-다섯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소설의 마지막 장 제목은 ‘인간의 꽃밭’인데, 이 표현은 윤혁이 출간한 수기를 읽고 그를 찾아온 대전의 보육원장 ‘최선숙’이 자신의 보육원을 가리켜 한 말이다. 선숙은 그 자신 대학병원 간호부로서 전쟁 때 만났던 인민군 장교에게 큰 감화를 받아 인민군에 입대했던 경험을 지니고 있다. 그가 자신의 현재를 말한다: “제가 무작정 인민군을 따라나서며 그렸던 세상을 아이들을 길러내면서 만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우리가 꿈꾸는 미래이니까요.”

-우여곡절 끝에 윤혁이 경희·기준 남매를 데리고 선숙의 보육원으로 들어간다는 소설 결말은 윤혁 역시 선숙의 견해에 동조한다는 뜻이리라. 아이들이 곧 미래라는 것. 이념 이전에 아이들을 잘 기르는 것이 인류의 미래에 대한 확실한 투자요 실천이 될 수 있다는 뜻(*이건 도스토예프스키이 마지막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테마이기도 하다).

-<인간 연습>은 조정래씨가 <한강> 이후 발표한 중단편 <수수께끼의 길>과 <안개의 열쇠>의 연장선상에서 사회주의의 몰락이라는 인류사적 사건에 대한 문학적 해명을 시도한 작품이다(*물락 15년 후에도 이 주제를 붙들고 있는 작가에게 경의를 표한다). <태백산맥>과 같은 이전 작품에서 좌익 옹호라는 비난을 받고 국가보안법 혐의로 피소되기까지 했던 작가의 이번 소설은 그가 맹목적 이념주의와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충분히 보여준다. 다만 사회주의 몰락 원인에 대한 해명과 그 이후의 대안 모색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독자들도 있을 법하다. 시종 윤혁의 시점으로 진행되던 소설이 끝부분에 가서 민규와 선숙의 시점 쪽으로 흔들리는 것이 혼란스럽다.

06. 0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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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신문에서 올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을 다룬 리뷰 기사를 옮겨온다. 필자는 경향신문의 김중식 기자이며 타이틀은 "박주영, 책세상에 칩거하는 ‘프리터族’ 그려"이다. 너무 기사틱한 제목이어서 '자발적 백수의 윤리학'이라고 고쳐단다. 보아하니, 백수는 2000년대 문학의 가장 특징적인 인물군이다. 

작가의 말을 인용하면 이렇다: "책을 소유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식은 그것을 쓰는 것이라고 발터 벤야민은 썼다. 나는 책을 소유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이 소설에는 내가 좋아해 마지않는 것들이 아주 많이 포함되었다. 쓰면서도 읽는 것이 더 즐거울 때가 많았다. 하지만 읽는 것보다 쓰는 것에는 더 많은 자유가 있었고, 나는 그 자유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나는 읽는 것보다 쓰는 것이 더 재미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느낌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다."

경향신문(06. 06. 29) 올해 제30회 ‘오늘의 작가상’을 탄 박주영씨(35)는 취미·놀이가 자연스럽게 직업·일로 연결된 행복한 사람이다. 수상작인 장편소설 <백수생활백서>(민음사) 역시 “가장 겸손한 독자를 치밀한 소설가로 탈바꿈시킨다”(심사위원 김화영)는 말마따나 오직 책을 읽는 것만이 삶의 이유이자 목표인 ‘나’(서연)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나’는 일종의 프리터족(자유롭게 살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만큼만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들)인데 때때로 일 하러 나가는 유일한 이유는 책값을 벌기 위해서다.

 

 

 

 

-박씨는 “독서 자체가 정체성인 주인공의 삶과 나의 실제 생활은 70~80%쯤 비슷하다”면서 “올들어 60권쯤 읽었고 대학원(정치외교학) 졸업 직후인 1997~99년에는 연평균 300권쯤 읽었다”고 말했다(*백수는 백수가 안다). 작품의 구조는 노래가사와 드라마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는 뮤지컬 ‘맘마미아’의 그것과 비슷하다. 서사와 국내외 현대소설의 인용문이 돌쩌귀의 암짝·수짝처럼 문설주와 문짝을 사이좋게 열고 닫는 것 같은 모양새다. 작가는 “딱 맞는 인용문이 떠오르지 않을 땐 일단 공란으로 비워두고 소설을 써내려가면서 나중에 인용문을 찾아내기도 했다”고 밝혔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나’는 책을 읽거나, 읽을 책을 사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러다 절판된 책을 갖고 싶었는데 인터넷을 통해 그 책을 팔겠다는 한 남자와 ‘오프라인’에서 접선한다. 실연한 남자는 옛사랑이 남긴 책을 팔아치움으로써 연인을 잊어버리겠다는 복수극에 ‘나’를 끌어들인다(*왠지 장정일의 <아담의 눈뜰 때>를 떠올리게 한다. 21세기 버전?).

-이 작품이 문제적인 이유는 두 가지 대목이다. 하고 싶은 일만 하는 밀폐적·자족적·자발적 백수들의 존재론을 묘사했다는 것과 경제적 어려움을 모른 채 자란 젊은이가 커서도 캥거루족처럼 부모에게 의지해 살면서도 ‘스스로 컸다’고 뻗대는 새로운 윤리학이 그것이다.

-식당 주인인 아버지는 돈을 잘 버는데도 돈 쓸 시간이 없을 만큼 일만 한다. 반면 “책을 읽을 시간을 뺏기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일하기 싫다”는 ‘나’는 아버지가 저당잡힌 ‘시간’마저 책읽기에 쓴다. 사글세를 벌기 위해 일을 해야 하는 시간을 줄이려고 아버지에게 얹혀사는 형국이다.

-작가는 “두 세대간에는 노동에 대한 개념과 삶의 방식이 다르다”면서 “프리터족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을 만큼만 돈을 벌면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삶의 방식 또한 자신만의 유토피아에서 똬리를 틀고 있다. ‘나’의 친구 유희와 채린 역시 사회적 관계와 의무를 팽개치고 소설쓰기와 로맨스(불륜)에 몸과 마음을 던지는 것이다.

06. 06. 29.

P.S.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김미현 교수는 이렇게 평한다: "그 자체로 불후의 도서관인 소설, 그 옆에 영화관이 있는 소설, 그 속에서 자족적인 삶을 사는 인간이 있기에 이 소설은 21세기적 유토피아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장자의 나비가 책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불가능한 이상을 실현 가능한 일상으로 느끼게 할 정도로 이 소설은 환상적이면서도 구체적이다. 반성하고 자학하는 주인공이 아니라 스스로를 사랑하고 만족하는 주인공을 이제 우리 한국 소설에서도 갖게 되었다." 소설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마지막 문장의 멘트는 '추상적'이다. '스스로 컸다'고 생각하는 백수들의 윤리학을 이 소설이 건드리고 있다면 말이다...

P.S.2. 자료를 옮겨오는 김에 문화일보 장재선 기자의 소개기사도 옮겨오도록 한다.

문화일보(06. 06. 29) 책읽는 여자, ‘백수 유토피아’를 꿈꾸다

어떤 사람들은 책을 읽는 걸 공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 책 읽기는 공부라는 성실하고 고리타분한 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내 책 읽기는 처음부터 놀이였을 뿐이다. 내가 설사 아주 어려운 학술 책을 읽고 있다고 해도 그것 역시 놀이일 뿐이다.놀이가 꼭 쉬울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내가 보기에는 아주 지능적이어야 하고 연마를 거듭해야 하는 바둑이나 장기, 체스를 놀이로 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말이다.
-<백수생활백서>의 주인공 서연의 독백.


-현존하는 한국 최고 독서가는 누구일까. 책을 읽을 시간이 많아서 감옥생활이 괜찮았다고 회고한 김대중 전 대통령일까, 수만권의 장서를 갖고 무불통지(無不通知)의 혜안을 과시하는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교수일까, 아니면 중학 중퇴 학력으로 오로지 책 읽기와 글 쓰기를 통해 대학교수로 입신한 소설가 장정일씨일까.

-여기 이들 못지 않게 책 읽기를 즐기는 28세의 여성이 있다. 이 미혼 여성은 1년에 최소 300권에서 700권 정도의 책을 읽어야 살맛이 난다. 지난 10년간 대략 5000권 정도의 책을 비타민처럼 씹어재꼈다. 사람들이 책을 하도 읽지 않아 ‘책읽는사회만들기 국민운동’단체까지 생긴 인터넷 시대에 책 읽기를 통해 자족의 삶을 추구하는 희귀종인 이 여성은, 그러나 실존인물은 아니다.

-올해 오늘의 작가상을 받은 박주영(35)씨의 장편소설 <백수생활백서>(민음사 발행)에 나오는 주인공 서연의 이야기다. 서연은 21세기에 지구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일하지 않고 오로지 책만 읽으며 살 수 있는 유토피아’를 꿈꾼다.

서연은 책 읽을 시간을 뺏기지 않으려 직업을 얻지 않은 자발적 ‘백수’입니다. 오로지 책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주유소나 친구 비디오가게에서 잠깐씩만 아르바이트를 하지요. 주인공과 그 친구들의 캐릭터에 작가인 제 모습이 골고루 투영돼 있습니다.”

-27일 서울 중구 충정로 문화일보에서 만난 작가 박씨는 책 읽기와 글 쓰기에만 능한 듯 어눌하기 짝이 없었다. 2005년 신문사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후 작가 생활을 해 왔으나 언론 인터뷰는 처음이라 너무 떨린다고 솔직히 토로했다. 경쾌하게 읽히는 그의 소설과는 달리 대화는 띄엄띄엄 느리게 진행됐다.

-부산에서 대학·대학원을 나온 그는 사회과학 전공 논문을 준비하며 책읽기의 즐거움에 푹 빠졌고, 이후 소설 쓰기에도 눈을 떴다고 했다. 그는 보통 신인작가들에게 주어지는 오늘의 작가상에 투고하며 수상의 확신이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제 소설이 빠르게 잘 읽힌다는 반응은 예상 밖이에요. 수많은 책들을 인용했는데…. ”

-그의 소설에는 마르그리트 뒤라스, 파트리크 모디아노, 폴 오스터, 레몽 장, 구효서 등 국내외 작가들의 작품에서 발췌한 구절들이 구석구석에 배치돼 있다. 철학, 사회과학 저서들도 꽤 인용돼 있다. 이것들이 현학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은 주인공 서연이 책 읽기를 지식을 확장하기 위한 학습으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몰입에의 놀이로 즐기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좋아하는 책을 읽을 뿐이다. 막연하긴 하지만 책을 읽고 있는 순간만은 적어도 내 삶이 허무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로써 주인공 서연이 책 속에서 발견한 빛나는 구절은 독자들에게도 삶의 이면을 알아가는 순수한 기쁨을 느끼게 한다. 책 읽기의 체험에만 의지했으면 이 소설이 수많은 ‘독서일기’와 비슷해졌을 것이다. 아내와 사별한 후 식당업으로 홀로 딸을 키우는, 겉으론 무뚝뚝하지만 속정이 깊은 아버지, 서연의 고교동창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소설을 쓰겠다는 ‘유희’, 남편이 아닌 남자와 사랑에 빠진 친구 ‘채린’ 등이 주인공과 엮어내는 희로애락은 작품에 현실감을 부여한다.

-특히 서연이 절판된 책들을 구하기 위해 만나게 된 ‘남자’의 실연 복수극에 동참하는 이야기는 주말 드라마의 한 대목처럼 박진감이 있다.서연과 남자가 책을 주제로 한 대화 틈틈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끼워넣는 것은 이 시대의 문화코드가 영상 쪽으로 기운 것을 어쩔 수 없이 반영하고 있다. “저는 영화의 대본과 같은 소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소설엔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재미가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그는 이미 장편소설 하나를 써서 퇴고 중이라고 했다. 지금까지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서른 살이 되어가는 여자들의 성장이야기를 줄거리로 하고 있다. 그는 이후엔 탐정소설류를 쓰고 싶다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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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6-06-29 09:12   좋아요 0 | URL
제가 옛날 사람이 되어 버렸나봐요.글을 읽다보니 순간 그런 생각도 듭니다.돈벌이 만이 최고의 가치로 규정되어 버린 개발독재 세대의 가치가 진저리처집니다.그러나 또한 노동을 통한 가치의 실현을 도외시하고 노동의 의미를 극도로 개인화,파편화 시켜 버린 프리터나 일명 백수족들의 윤리가 과연 옳바른가 라는 생각도 듭니다.물론 백수가 늘어나는 것이 그들의 자발적 선택에 의한 것 만은 아니라는 생각에 안타까운 마음도 듭니다만.....책을 위해 백수가 된다는 것은 무언가 가치 전도라는 생각이 듭니다.아무래도 저도 이제 늙나보네요.켕

로쟈 2006-06-29 09:38   좋아요 0 | URL
백수족들의 '윤리'에 대해서 이견이 가능하지만, 그것이 한 가지 '가능한' 선택이라는 점은 인정하고 싶습니다. 비노동만큼 반국가적, 반자본적인 것도 없을 테니까요. 자멸적인 것이긴 하나...

기인 2006-06-29 09:57   좋아요 0 | URL
박주영, 책세상에 칩거하는 ‘프리터族’ 그려" 는 '그녀'가 아닐까 싶습니다 ^^;
음. 저는 노동을 통한 가치의 실현이, 그 '가치'가 교환가치나 사용가치가 아닌 자아실현 같은 '가치'가 존재한다는 데에는 부정적입니다. 적어도 상당수의 노동현실에 있어서는요.
그렇다고 부모를 착취(?)하는 삶은 물론 바람직하지 않지만.
인문학 대학원생은 뭐랄까.. 이 또한 일종의 프리터 족으로 살 수 밖에 없는 경우가 많은데 (예전 로쟈님 인터뷰 중에 인문학의 기생성은 이렇게 인문학 대학원생의 존재 방식에서도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 공대 대학원생들은 투덜되기는 해도 먹고는 살던데요;;) 그 아르바이트라는 것이 주로 '과외'라는 것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일종의 계급 재생산 같기도 하고, 어쨌든 맘에 안 들어서 요즘은 과외를 안 하고 서서히 굶어죽어가고 있습니다 ^^;

로쟈 2006-06-29 10:02   좋아요 0 | URL
암세포를 죽이는 방법 중의 하나가 굶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혹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건 안 사기...

드팀전 2006-06-30 09:19   좋아요 0 | URL
출구가 막힌 사회가 주는 반강요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물론 글을 쓴다거나 공부를 한다거나 하는 것 등을 목표로 자발적 백수를 선택할 수는 있겠지만...그 역시 항구적 백수의 윤리를 쫓는 다기 보다는 단계상 거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프리터나 백수모델에 대입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인문학 대학원생들은 지금은 그렇지만 다들 교수나 평론가나 뭐 이런 목표를 지향하고 가는 도정이지 자발적 백수나 프리터를 상정해 두고 공부하진 않을테니까요.
노동현장에서 노동이 자아실현 가치로 각성되기 까지는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대게는 밥벌이를 위해서 마지 못해 일한다고 하지요.-좀 멋있게 이야기하면 교환가치나 사용가치라고 하겠지만-전 밥벌이란 말이 더 좋아요.직업 선택의 첫 관문에서 자신의 가치를 고려치 않고 밥벌이만을 위해 일하게 된 사람들의 경우 노동을 통한 자아실현의 가치를 찾기 어려운 경우를 많이 봅니다.하지만 프리터나 백수처럼 취미의 일상화를 통한 자아실현 만큼이나 자신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현장에서 자아의 가치를 찾으려고 하는 경우도 많다는 점.노동을 통한 자아실현이 어렵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지향점이라고 생각하기에 부정적인 견해는 잠시 거두어 두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