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하는 서평

학술서평의 문제점을 짚은 대학신문의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지난주에 전화로 잠깐 기자의 질문에 답한 적이 있다. 출판대국의 면모에 걸맞은 (학술)서평문화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지적인데, 하루아침에 달라지긴 어려운 것이 아닐까(일단은 '학술'이 먼저 돼야 학술서평도 뒤를 따를 것이고). 그것도 '문화'라면 매일매일의 한 걸음이 그래도 먼훗날 어떤 궤적을 보여줄지도 모를 따름...   

대학신문(09. 11. 09) 잃어버린 학술 서평을 찾아서   

‘3·5·7’-3조원 시장 규모로 연간 5만 종의 책을 출간하는 세계 7대 출판국 한국. 늘어난 출판량이 질까지 담보하진 않는 법. 서점을 점령한 많은 책은 알맹이보다 화려한 표지와 자극적 제목으로 무장했다. 범람하는 책의 물결 속에서 여차하면 손가락 사이로 주르륵 빠져나가는 ‘진국’을 잡기 위해 독자들이 애용하는 내비게이션은 서평이다. 그 중 학술 서평은 고르기도 읽기도 어려운 학술서를 설명해주며 학술 담론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내비게이션’ 학술 서평이 오히려 길을 잃었다며 성토하는 목소리가 높다. 서평자들과 편집자들은 한국의 학술 서평이 영 못마땅하다는 눈치다. 후마니타스 안중철 편집장은 한국의 학술 서평을 두고 “활성화되지도 전문화되지도 않았다”고 비판했다. 이택광 교수(경희대 영미어학부)는 한 술 더 떠 “학술 서평 문화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딱 잘라 말했다. 한국 학술 서평은 서지정보와 출판사 보도자료에 의존하는 ‘신간 소개’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모호한 성격에 인적·물적 기반마저 열악해
애초 학술 서평은 대중 서평과 구분되는 고유한 정체성을 찾기 쉽지 않다. 인터넷 서평꾼 ‘로쟈’로 이름난 이현우 강사(노어노문학과)는 “일반적으로 서평 대상에 따라 학술 서적에 대한 서평은 학술 서평, 일반교양서에 대한 서평은 대중 서평으로 구분 짓지만 경계가 모호하다”고 말한다. 서평을 구성하는 두 가지 요소인 소개와 비평의 비율을 고려해 소개가 많으면 대중 서평, 비평이 많으면 학술 서평으로 가르기도 하지만 그 비율의 기준도 정의된 바 없다.

출판계와 언론계의 인적·물적 환경도 학술 서평 위기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 학계의 좁은 네트워크 안에서는 서평자를 구하기도 어려울뿐더러 구하더라도 저자와 한솥밥을 먹거나 적어도 안면있는 사이인 경우가 많다. 이는 서평자가 저자에 도전하기보다 인간관계를 고려한 ‘주례사 비평’을 통해 체면치레하는 결과를 낳는다. 안중철 편집장은 “최근 학술 서평은 책의 긍정적 측면을 지나치게 부각하거나 출판사의 보도자료를 그대로 싣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한국 서평의 원형 ‘서발문’을 연구 중인 심경호 교수(고려대 한문학과)는 “학계에 만연한 주례사 비평이 과거 자기 가문의 과시를 위해 낮은 수준의 글까지 엮어 무분별하게 유집(遺集)을 발간하던 세태와 비슷하다”고 꼬집었다.

학술서의 저술량이 적고, 전문 서평지가 없는 현실도 문제다. 권위를 갖고 서평 문화를 주도해야 할 매체가 없으니 학술 서평이 일간지 ‘귀퉁이’ 외에는 설 공간이 없는 실정이다. 주요한 학술서를 평하는데 정해진 매수와 마감 시간에 쫓기는 언론사의 일정은 깊이 있는 서평을 기대하기 어렵게 만든다.

낮은 위상을 반영하듯 서평은 학계에서도 주변부를 맴돈다. 하나의 완결된 논문으로도, 개인의 독창적 연구결과로도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재 서평은 한국연구재단과 대학 등의 기관에서 주관하는 연구업적평가 대상에서 제외된다. 외국은 학회 발표, 외부 기고, 서평 모두 교수 개인의 연구 커리큘럼에 기록되지만 한국에서는 논문 위주의 풍토로 서평이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활성화된 외국 서평, 분화시스템과 학술성 돋보여
외국 서평 매체 중에는 영미권의 『뉴욕타임스 북리뷰』 『런던 북리뷰』, 『뉴욕리뷰 오브 북스』와 프랑스의 『르몽드』지를 추천하는 이가 많다. 전부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집필하며 그 길이도 길다. 종합일간지와 별도로 독립운영되는 『뉴욕타임스 북리뷰』는 서평 기사 하나에 두 달을 할애해 그 수준을 유지하며 서평 의뢰 전, 서평자와 저자, 출판사의 관계를 점검해 ‘주례사 비평’을 방지한다.

분화된 시스템과 탄력적 운영도 강점이다. 일간지 서평이 대중성을, 학회지와 서평전문지 서평이 학술성을 담당하는 것이다. 이택광 교수는 “영미권 대중 서적은 대중문화 전공자가 서평을 쓰고 학술 서적은 학자들이 평가하는 등 필진이 고루 배치돼 있다”며 영미권 서평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수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경영전략도 주목할 만하다. 영미권 서평전문신문 『뉴욕리뷰 오브 북스』는 6개월간 격주로 발행하다 출판계가 뜸한 계절에는 월간으로, 책이 쏟아지는 3월에는 월 3회 발행한다.

학술 담론의 형성을 가능케 하는 논쟁적 성격도 돋보인다. 미국 고등교육 전문지인 『크로니클 리뷰』는 20개 면에 5~6권의 책을 다루는데, 필자의 주제의식을 중심에 둔 학술 에세이를 강화하고 학술 신간을 많이 넣는 것이 특징이다. 영국의 격주간 서평 전문지 『런던리뷰 오브 북스』는 주제가 비슷한 서적 몇 권을 엮어 서평을 쓰고 소논문 형식의 학술 에세이로 논쟁성을 강조한다.

◇서평자의 시각이 담긴 학술 행위로서의 서평 절실해···온라인 공간도 주목
『북새통』 같은 전문 서평지가 성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서평을 업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풍토와 어려운 글을 회피하는 대중들의 성향이 맞물려 학술 서평이 점점 소멸해갔다. 이 때문에 학술 서평의 부흥을 위해선 대중적 차원의 역량을 기르는 것이 필요한 실정이다.

학술 서평의 대안을 신문 지면에서 벗어나 온라인 공간에서 찾는 목소리도 있다. 안중철 편집장은 “자율적 블로그 활동과 온라인 커뮤니티의 활발한 활동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인간관계의 영향으로 ‘주례사 비평’이 되기 쉬운 오프라인 서평과 달리 온라인 공간에서는 외부 영향에서 자유롭게 비판의 목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온라인 비평 커뮤니티 ‘비평고원’의 조영일 대표는 “온라인 서평은 지면에 실린 서평보다 영향력이 없고 참여자들의 자발성에만 의존하는 것이 한계”라며 “오프라인 언론사·저널과 연계한 조직적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학술 서평의 위기는 그 원인이 다양한 만큼 여러 방향에서 대안이 제시된다. 서평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고 깊이 있는 서평을 쓸 수 있는 물적 토대를 마련하면서 비판을 꺼리지 않는 태도를 정착시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읽을 만한 책을 판별해내고 저자의 의도를 독자들에게 정확히 전달하는 서평의 고유한 자기 역할을 망각하지 않는 것이지 않을까.(김은열기자) 

09. 11.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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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ror 2009-11-10 07:25   좋아요 0 | URL
로자님이 처음에 잘 지적하신 듯 합니다. 학술이 제대로 안 되는데 학술비평이 제대로 될 리가 없죠. 이 기사를 쓴 기자는 학술비평이 왜 안 되는지를 묻지 말고, 왜 이 나라에서 학술이 제대로 안 되는지부터 물어야 할 것 같습니다. 과연, 각 전공에서 번역서들을 제외할 경우, 서평할만한 책들이 1년에 몇권이나 나올지 궁금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나라 학자들의 논문에 그 논문과 관련된 우리나라말로 된 동학들의 논문과 책을 얼마나 인용하고 평가하는지부터 검토해 보는 것이 우선이지 않을까요? 논문과 저서에 우리나라말로 된 관련 논저들을 애초부터 참조조차 하지 않는데, 서평이 제대로 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로쟈 2009-11-10 21:53   좋아요 0 | URL
일단 한국어로 쓴 논문이나 책 자체가 마이너리티인 것이죠. 한국학을 제외하면 정말 드물고 드물지 않을까 싶습니다...

sophie 2009-11-10 09:26   좋아요 0 | URL
입성했습니다 ^^ 르몽드 지가 서평으로 유명하군요. 한 번 들여다봐야겠네요.

로쟈 2009-11-10 21:51   좋아요 0 | URL
첫 댓글이신가요? 눈에 띄는 서평이 있다면 종종 소개도 해주시길.^^
 

장정일의 신작 소설이 나온 김에 그의 최근 칼럼도 읽어본다. 핀란드식 명품교육에 관한 책들이 요즘 유행인데, <영국의 독서교육>(대교출판, 2009)을 주제로 한 책도 나와 있다는 건 칼럼을 보고 알았다. 영국 경제의 토대인 '창의산업'의 기반이 독서교육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책인 듯싶다.       

한겨레(09. 10. 31) ‘양파 총리’보다 아이들에게 한마디

원래 이번 글감은 양반론(兩班論)을 통해, 까고 또 까도 의혹의 끝이 보이지 않는 ‘인간 양파’ 정운찬 총리를 까는 거였다. 하지만 어머니가 늘 내게 하신 ‘남자는 나이 서른이 되기 전에 철들지 못하면, 영영 철들지 못한다’는 말을 용케 떠올리고, 벼르던 글감을 포기했다. 총리가 이따위 글을 읽지도 않겠지만, 어머니의 지론에 따르자면, 읽어봤자 별무소용이겠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은하의 <영국의 독서교육>(대교출판, 2009)을 대신 읽는다.

영국은 전체 고용인구의 80%가 서비스 산업에 종사한다. 음악·서적·영화처럼 지적재산권이 중요한 산업이나 스포츠·관광 등의 산업을 창의산업(Creative Industry)이라고 하는데, 빈약한 제조업과 천연자원을 가진 영국으로 하여금 세계 5위의 경제규모를 유지하게 해주는 일등공신이 바로 창의산업이다. 1997년 이후 10년 동안 우리나라의 주력 산업인 반도체로 벌어들인 수출 총액 231조원은, 같은 기간 조앤 캐슬린 롤링이 <해리 포터> 시리즈와 파생상품으로 벌어들인 308조원보다 적다.

6년 넘게 영국의 교육현장을 일선에서 체험했던 저자는 영국 어린이들이 어떤 독서 환경에서, 어떤 독서 교육을 받는지를 세밀히 보여준다. 그러고 나서 내린 결론은 “출판·방송·디자인·예술·관광·광고 등 영국의 창의산업 중심에는 책”이 있으며, 창의적인 인력을 키우기 위한 “영국 교육의 키워드” 역시 책이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히기 위해서는 ‘책을 읽어라’라는 강요만으로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경우 어린이의 독서는 성인의 독서나 똑같이 책을 읽고, 토론하고, 독후감을 쓰는 행위에 국한된다. 하지만 영국은 캐릭터 상품, 애니메이션, 여행, 작가와의 만남은 물론이고 그저 도서관에서 놀게 하는 것만으로 어린이들을 제한적인 ‘독서 교육’이 아닌, 아이들의 삶에 깊숙이 파고드는 ‘독서 경험’과 접속시킨다.

지은이에 따르면, 이렇듯 한 사회가 어린이들에게 ‘독서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선비들처럼 독서란 혼자 읽는 것이란 생각에서 벗어나, 함께 하는 활동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작가·출판사·서점·도서관들이 개별적인 독서운동이 아닌 “유기적인 네트워킹으로 모든 부문이 ‘윈윈’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그 전에 정부가 결단해야 할 것은 어린 학생들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옥죄는 국정 교과서를 해체하고, 입시 위주의 교육을 개선하는 일이다.

흠모하는 중국의 작가 루쉰은 유교를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제도’라고 말하면서, 아직 인육을 먹은 경험이 없는 아이들을 구해야 한다고 썼다. 과연 <영국의 독서교육>을 소개하게 된 것은, 비유적으로 말해 불법에 맛 들였던 가망 없는 총리에 대해 한마디 하는 것보다 훨씬 탁월한 선택이다.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책을 가까이 하면, 다 큰 어른이 아무 대가 없이 용돈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염치 또한 생길 테니 말이다.(장정일 소설가)   

09. 11. 05.

 

P.S. 그러한 영국식 교육의 이면일 듯싶은 책은 닉 데이비스의 <위기의 학교>(우리교육, 2007)이다. 부제는 '영국의 교육은 왜 실패했는가'이고 원제는 그냥 건조하게 '학교 보고서(The school report)'. '위기의 학교' 속에서도 '책읽기에 열광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일까? 두 가지 보고서가 어떻게 양립가능한지 궁금하다. 누가 같이 읽고 리포트를 써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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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세알 2009-11-06 10:55   좋아요 0 | URL
그 문제의 해답중 일부는 닉 데이비스가 영국사람이라는데 있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나라 어떤 학자들도 '잘나가는 한국교육'같은 제목의 책은 쓰지 않을 것 같거든요. ^^;;
오랫동안 심심풀이로 영국tv를 봐온 저의 경험에 한정해서 얘기해도 영국문화의 중심에 책이 있다는 것은 맞는 이야기인 것 같아요. 해마다 찰스 디킨스나 제인 오스틴같은 영국작가들의 작품이 드라마화 된다는 뻔한 사실을 빼고도 드라마, 퀴즈나 오락 프로그램, 컬쳐쇼, 코메디, 다큐멘터리 등등에게 끊임없이 변주되고 있는 것을 보거든요.

로쟈 2009-11-06 23:06   좋아요 0 | URL
네. 그럴 법한 지적이십니다. 닉 데이비스의 진단이 '영국의 교육은 독서교육에도 불구하고 실패했다'인지 알고 싶어서요...

펠릭스 2009-11-06 14:18   좋아요 0 | URL
영국 교육제도의 기초되는 존 로크의 '미래를 위한 자녀교육'도 읽을 만합니다.

로쟈 2009-11-06 23:07   좋아요 0 | URL
그런 책도 나온 적이 있었네요!^^
 

독서대학 르네21의 이번달 금요대중강좌는 '책을 말하는 책'을 주제로 다룬다. 네 차례 강좌 중 한 꼭지를 나도 맡게 되었는데(http://www.renai21.net/bbs/settlement_view.php?s_id=61&schedule_type=4)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금요일 저녁(19시 00분 ~ 21시 30분) 광화문 대한성공회 대강당을 찾으시면 된다. 유료강좌이며 선착순 마감이다. 강좌 소개와 함께 일정을 안내한다.  


  

1. 11월 6일: 김이정, <순례자의 책> 

 

2. 11월 13일: 이현우, <로쟈의 인문학 서재> 

 

3. 11월 20일: 정혜윤, <그들은 한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4. 11월 27일: 조병철, <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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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2 2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02 2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펠릭스 2009-11-03 10:29   좋아요 0 | URL
듣고 싶군요

로쟈 2009-11-03 20:28   좋아요 0 | URL
저녁시간인데, 강좌가 운영되더라고요...
 
품위 있는 사회와 모욕사회

내일자 '책읽는 경향'은 아비샤이 마갈릿의 <품위 있는 사회>(동녘, 2008)를 다루고 있다. 저자의 이름은 이 책을 여러 번 언급한 지금도 입에 익지 않지만, 저자의 문제의식은 우리 사회에서도 요효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선정자도 같은 생각이었을 텐데, 필자가 조국 서울대 교수로 돼 있다. 그러고 보니 '품위 있는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보노보 찬가'와 맞아떨어지는 부분도 있을 듯싶다(<보노보 찬가>의 부제가 '정글자본주의 대한민국에서 인간으로 살아남기'이다).  

경향신문(09. 10. 13) [책읽는 경향] 품위 있는 사회  

이명박 대통령은 ‘국격’을 높이자고 강조하며 그 방안으로 법질서 준수를 들고 있다. 대통령 자신이 과거에 얼마나 법을 잘 지켰는지는 별도의 문제로 놓더라도, 품격있는 국가와 사회의 요체가 무엇인지 되돌아볼 필요를 느낀다. 



예루살렘 히브리대 교수인 아비샤이 마갈릿은 <품위 있는 사회>에서 사회 구성원을 물리적으로 학대하지는 않지만 제도적으로 모욕하는 ‘규제하는 사회’, 제도가 사람들을 모욕하지 않는 ‘품위 있는 사회’를 구분한다. 그는 ‘품위 있는 사회’를 “구성원들이 자기가 모욕당했다고 간주할 만한 근거가 있는 조건에 맞서 싸우는 사회”라고 규정한다.

생존권을 외면하는 재개발을 추진하고, 이에 반대하는 철거민들을 ‘도시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고 강경진압하는 현 정부의 행태를 정당한 법치라고 볼 수 있을까. ‘공무집행’의 외관을 띤 정부의 행위야말로 ‘제도적 모욕’의 예이다. 그리고 장례도 미루고 7개월 이상 이러한 모욕에 맞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품위 있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저자는 ‘품위 있는 사회’를 재화와 가치의 분배가 공정하게 이루어지는 ‘정의로운 사회’와도 구별한다. 즉 ‘품위 있는 사회’는 정의로운 분배만이 아니라 그 분배의 절차와 방식이 모욕적이지 않기를 요구한다. 사회적 약자를 ‘동정’으로 돕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받을 ‘권리’가 있다고 인정하며 분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최근 ‘친서민정책’을 추진하고 있지만, 이 정책이 기존의 부자 감세와 대기업 규제 완화 등 편향적 재화·가치 분배정책과 조화될 수 있을지, 이 정책이 ‘품위’를 실현하는 방향으로까지 나아갈 것인지 등에 대해서는 회의가 든다.(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09.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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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한겨레21의 출판 동향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잡지를 오늘 받아서 읽은 몇몇 흥미로운 기사 가운데 하나이다.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가 '중간필자' 결핍 현상에 대한 진단과 분석을 해주고 있는데, 학계와 언론을 포함한 전문가 집단이 질적·양적으로 흘러넘쳐야 이뤄지는 게 '중간필자군'이라는 입장에서 다소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하긴 학계도 매체도 내다버린 형편이라면 무얼 기대하기도 힘든 경우이긴 하다... 

한겨레21(09. 09. 18) 학계도 매체도 버린 중간필자 

한국 인문사회 출판에는 ‘중간필자’, 즉 저술을 주업으로 삼는 자유로운 문필가 집단이 형성돼 있지 않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대학의 인문학이 고사 상태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상상력과 자의식을 먹고 사는 학문인데, 지금 대학에서 이뤄지는 인문학 연구의 80%는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고증학·통계학·교육학·족보학 넷 중 하나다. 이들의 공통점은 일정한 ‘공식’에 따라 이뤄지는 연구이기 때문에 품만 들이면 결과가 나온다는 사실이다. 나머지 18%는 인문학을 표방하지만 싱겁거나 외곬이라서, 그 연구 결과물을 읽고 나면 “에라~ 그래, 혼자 놀아라” 하는 마음이 든다. 그리고 남는 2%가 그나마 읽을 만한 논문을 생산해내는데, 그들은 대학 내에서 열심히 ‘왕따’당하다 결국 입지 구축을 포기하고 대충 한 발만 걸쳐둔 채 밖으로 나온다. 그 경계성 혼란을 인문학으로 승화시켜 대중적 성공을 거두는 이들이 현재 한국의 중간필자다.

‘미국식’과 ‘기지촌 지식인 기질’이 결합한 학계
둘째는, 매체가 제 역할을 못하기 때문이다. 탐사보도를 하는 언론이 너무나도 부족하기 때문에 매체에서 뽑아져나오는 인문학이 거의 없다. 고만고만한 연재물이 대부분이다. 인문학을 기반으로 사회적 이슈를 제기하고 대중의 지적 관심을 강하게 집약시키는 해외 저술들은 절반 이상이 저널리스트가 쓴 것들이다. 베트남전의 실상을 밝혀 퓰리처상을 받은 미국 저널리스트의 유작 <콜디스트 윈터>란 책이 최근 나와서 이목을 끌었는데, 이는 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한국전쟁을 가장 가까이서 가장 생생하게 묘사한 책으로 남을 것이다. 전쟁의 원인, 구조, 경과 등을 따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걸 읽는 사람이 진짜 폭탄 터지는 소리를 듣고, 다리가 잘리는 아픔을 느끼게 하는 능력도 중요하다. 현장에서 10년 이상 지독하게 훈련받고 직업상 방대하게 독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저널리스트들이야말로 학자는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기발한 방식으로 ‘글감’을 구상하고 실천할 수 있다.

그동안 간혹 중간필자에 대한 논의들이 있었는데, 아쉬운 것은 ‘전문가-중간필자-대중’으로 너무 구획지어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이런 논의 구조에서는 학계가 지리멸렬하니 중간필자라도 잘해주면 좋겠다는 기대를 품게 한다. 학계는 무시하고 대중을 선도하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문제의 근본을 잘못 보는 것이다. 나는 중간필자를 ‘흘러넘침’ 현상으로 본다. 학계와 언론을 포함한 전문가 집단이 질적·양적으로 흘러넘쳐서 이뤄지는 중간필자야말로 ‘상업성’과 ‘개인적인 이유’ 등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정확한 지식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흐르기는커녕 바싹 말랐다.

학계는 <기획회의>에서 조우석 문화평론가가 지적한 대로 ‘미국식 시스템’과 ‘기지촌 지식인 기질’이 결합해서 아주 가관이다. ‘군단’급 학회를 제외한 중소 규모의 학회는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비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학술지 논문의 구색을 맞추느라 아는 사람들에게 논문 한 편만 보내달라는 ‘강제성’ ‘구걸성’ 전화를 돌리느라 바쁘고, 젊은 학자들은 2~3년 기본 연봉을 보장해준다는 이유로 자기 연구 분야도 아닌 프로젝트에 무미건조하게 투입돼 시간과 능력을 허비하고 있다. 출판사와 ‘의욕적으로’ 계약한 원고는 ‘공수표’로 방치한 채 말이다. 이런 현상이 갈수록 심해진다.  

가외의 심각한 노력이 요구되는 매체 구조
언론도 마찬가지다. 최근 우연히 한 블로그를 알게 됐는데, 어떤 역사적 사건을 다양한 문헌을 근거로 파고들어 역사상식의 뒤통수를 치는 글을 연재하는 개인 블로그였다. 글마다 참고 문헌이 붙어 있는데 많을 경우 10편이 넘어갔고, 그중에는 해외 석학의 최신 저작이나 논문도 포함돼 있었다. 글을 잘 쓴다기보다 질문을 잘했고, 역사적 맥락을 따져보는 품새가 아마추어적인 듯하면서도 꼼꼼하고 알찼다. 그런 글이 100편 넘게 올라와 있었다. 원고지 매수로는 3천 매 정도였다. 당장 연락을 취해 책을 내자는 제안을 했고 현재 계약을 맺은 상태다. 그런데 그 사람은 대학에서 동양사를 전공한 한 경제신문 국제부 기자였다. 그는 직장의 일과는 전혀 상관없이 자신이 짬을 내어 성실하게 그런 글들을 써나갔던 것이다. 나는 지금 허랑한 글들의 바다에서 괜찮은 글 하나를 발견한 기쁨을 얘기하려는 게 아니다. 글이 나오는 구조가 글쓰는 이에게 가외의 심각한 노력을 요구한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다.

다수의 대중을 훌륭하게 설득하고 감동시킬 수 있는 한 사람의 저자가 탄생하기까지는 적어도 5권 이상의 전작이 필요하다. 적어도 책을 5권은 내야 5천 부 팔리는 저자에 도달한다는 출판계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지속적인 저술 작업이 과연 가능하겠는가.

블로그에 글을 쓰고 포털이 중계하는 환경이 구축된 최근 5년 사이에 매체는 ‘빅뱅’이라고 할 만한 양적 팽창을 이루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표현 욕구를 블로그 등에 쏟아내고 있다. 그런데 이 중에서 ‘인문학’이란 간판을 달고 책으로 펴낼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 에세이·잡기류거나 재테크·다이어트 같은 실용류다. 역사·예술·문화비평 등도 간혹 있지만 체계성이 부족하거나 콘셉트가 부여되지 않은 리뷰, 세상 읽기 종류가 압도적으로 많다.

지금 우리 인문저술계에 필요한 것은 ‘아이템’이 아니라 ‘콘셉트’다. 조선시대 역사교양서만 예를 들어보자. 기생, 하층민, 양반, 무기류, 살인사건, 연애사건, 왕, 후궁, 2인자 등 아이템이 널려 있다. 이들을 매개로 역사의 빈곳을 채워나가는 건데, 나도 이런 책들을 내긴 하지만 과연 이걸 인문학적 역사물이라 할 수 있는가? 나는 순수한 인문학 독자로서 왜 18~19세기 조선 지식인들이 하나같이 갑자기 백과전서 짓기에 몰두했는지 그 역사적 배경을 밝히는 다큐멘터리를 내고 싶다. 또한 조선 지식인들이 ‘중국’이라는 원전을 어떻게 이 땅에 ‘번역’하고 어떤 경우는 ‘베껴먹었는지’ 그 체계적인 커넥션과 계보학이 궁금하다. 게다가 동인·서인도 모자라 남인·북인·소론·노론·벽파·시파·노론청류까지 뻗어나가 나라가 망한 판국에, 그들의 다양한 역학관계라는 주제 하나만 가지고 온전하게 알아듣기 쉽게 정리해놓은 책 한 권 없는 현실이다. 과연 이런 것들이 변화된 매체의 양적 팽창이라는 환경을 등에 업고 이뤄질 수 있을까?

번역하는 것이 국가에 충성하는 길?
앞으로는 출판도 해외로 수출해야 영세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까운 중국만 해도 얼마나 시장이 큰가. 10년 전만 해도 중국 책들은 공무원이 쓰는 도덕 교과서처럼 재미가 없었다지만, 요즘은 대륙도 상업출판이 불붙어서 얕잡아볼 수 없을 정도로 ‘글발’에 물이 올랐다. 거기에 ‘대표선수’로 내보내려면 최소한 소재의 특수성(특수한 보편성), 콘셉트(관점)의 확실성, 자료조사의 성실성, 논술 구조의 정합성은 담보돼야 한다.

그런데 문학이나 다른 실용·경제 분야라면 몰라도 인문학 분야에서 그러기는 정말 쉽지 않을 것 같다. 해외로 판권을 수출하려면 실용서나 경제경영서를 잘 세팅해보는 게 오히려 빠르겠다는 판단이 자꾸 앞선다. 어차피 그쪽은 내용보다는 콘셉트 싸움이니 말이다.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쓰랬다”고 가벼운 책으로 돈을 벌어 정말 중요하고 절실하게 필요한 책을 ‘번역’하는 것이 국가에 충성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 책 읽고 ‘외국어는 안 돼도 콘셉트는 되는’ 진짜 엘리트 중간필자가 많이 생기게 말이다.(강성민 글항아리 대표)  

09. 0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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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민혁의 생각
    from haawoo's me2DAY 2009-09-18 10:27 
    커패서티! RT aleph_k님: 한국에 야구, 게임 해설자는 몇 명이나, 전업작가는 몇 명이나 먹여살릴 수 있는 커패서티일까? heterosis님 rabbiyang님 julymon님 학계도 매체도 버린 중간필자 http://ow.ly/pTPj
 
 
노이에자이트 2009-09-17 23:33   좋아요 0 | URL
출판사에서 책저술을 맡길 만한 필자 구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군요.조금 고급독자를 위한 넌픽션물이나 역사물이 많아져야 하는데...미국의 퓰리처상 넌픽션 부문같은 상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로쟈 2009-09-19 09:02   좋아요 0 | URL
민음사에서 논픽션도 공모하지만, 아직은 응모작이 많지 않나 봅니다. 작가 지망생들은 모두 '소설'에만 매달려 있어서요. 공부하는 사람들은 넌픽션에 쏟아부을 수 있는 여력이 없지요. 입에 풀칠하고 바쁜 형국이어서...

펠릭스 2009-09-18 10:29   좋아요 0 | URL
'중간필자','중간지대적 담론','양극단을 융합할 힘의 중간' 등에서
'중간'의 중요함을 느낍니다.

로쟈 2009-09-19 09:03   좋아요 0 | URL
학문과 삶의 소통이라고 하면 많이들 공감할 듯싶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습니다. '학문은 학문이야'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아직도 많고요...

나의길 2009-09-18 14:44   좋아요 0 | URL
중간입장이 일방통행이 아니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 사회현상에 의해 중간필자의 그 수가 적을 수도 있지만, 출판, 독자, 저자의 세가지 형태의 직업군을 볼 때는 출판사의 역할 또한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들을 대우하고 서로가 도울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야 각각의 산업군도 알차게 성장하리라 봅니다. 현재 출판계는 베스트셀러 글, 베스트 셀러 저자, 베스트 셀러 만들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도 그런 중간필자의 수를 줄이는데 한 몫 한다고 봅니다. 양질의 저자를 출판사가 발굴하고 그들과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 인문학의 확대가 필요한 시점이라 봅니다.
중요하다는 것에는 누구나 공감하는 내용이나 불특정 공간에 문제만을 제기하는 것도 문제라 봅니다. 과연 출판계는 잘하고 있나도 한번 들춰봐야 하지 않을까 봅니다.

로쟈 2009-09-19 09:05   좋아요 0 | URL
사실 출판, 독자, 저자에 다 불만을 토로할 수 있지요. 어느 편이 먼저 총대를 매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요...